♣복음말씀의 향기♣ No3727
1월6일[주님 공현 대축일 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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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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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sWe4gwYNIVo
[서울대교구 온승현 바오로 신부 집전(잠실 본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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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란 존재는 구세주께서 탄생하실 장소이며 누여질 장소, 또한 죽으시고 부활하실 거룩한 장소입니다!>
이제 슬슬 성탄 시기도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치렁치렁, 주렁주렁 매달았던 성탄 장식이며 트리도 조심스럽게 떼어내어, 내년 성탄을 위해 보관함에 잘 간직할 순간입니다.
주님 성탄, 육화 강생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깨닫고 체험하게 된 성탄 시기여서 개인적으로 참 은혜롭고 풍요로웠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이토록 감지덕지, 황공무지한 성탄 앞에 나도 그에 합당한 호응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은 결국 나도 나자렛의 마리아처럼 내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잉태되시고, 탄생하셔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란 존재가 한없이 죄스럽고 불경스러운 존재이지만, 동시에 나란 존재가 구세주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장소이며 누여질 장소, 또한 죽으시고 부활하실 거룩한 장소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성탄이란? 천상의 거룩한 왕좌에 편히 계셔도 좋으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인간 세상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오신 한없는 겸손이 구체화된 은혜로운 대사건입니다.
극도로 자신을 낮추신 하느님의 겸손은 성탄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 내내 반복됩니다. 공생활 초기 예수님께서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음에도, 요르단강을 찾아가셔서 세례자 요한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 세례가 필요 없으신 분, 무죄한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 한 인간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무죄한 분이 죄인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죄인들의 세계로 들어오시겠다는 표현이 예수님의 세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세례는 하느님께서 죄인인 우리 인간과 어깨를 나란히 하시고 함께 우리와 동행하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한없는 예수님의 겸손,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은 오늘도 매일의 미사를 통해서 거듭 반복됩니다. 매일 미사 안에서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잉태되시고, 탄생하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십니다.
올 한해 이토록 은혜로운 성체성사에 어떻게 해서든, 더욱 자주 참여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미사가 주는 놀라운 은총과 풍요로움을 만끽해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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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음을 준다는 것>
전에 한 자매가 저를 좋아한다는 표를 하기에 저는 그러면 저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자매는 저에게 ‘마음’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사랑하면 육체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여자가 ‘마음’을 준다는 것은 ‘모든 것’을 준다는 말이에요.”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아 정말 주는 것인지, 혹은 주는 척만 하는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시간이나 노력, 모든 행위 등을 함께 주지 않는다면 마음을 주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단 몇 분도 행동으로 상대를 위해 사랑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마음을 주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가장 중요한 것을 준다는 말은 곧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동시에 준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실천이 따르지 않는 믿음도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은 물로써 세례를 주지만,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가진 전부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느님이 아닌 사람으로서 성령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물을 통한 회개의 세례밖에는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주신다는 말은 동시에 그 분의 신성-인성, 모든 것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마음을 준다고 했을 때 자신의 육체까지도 포함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주신다고 하셨을 때는 그분의 몸까지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하느님이셨고 영이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로부터 육체를 취하셨습니다. 이 영과 육은 이제 서로 ‘갈라질 수 없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셔서도 영혼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그 육체도 함께 부활하신 것이고, 그 육체는 십자가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살아있을 때의 바로 그 육체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성체성사도 하나의 밀떡과 포도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에 나오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물로만 오신 것이 아니라 피로도 오셨습니다. 여기에서 물이란 신성을 상징하고 피는 인성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고 요한은 증언합니다. 당시에 예수님께서 진짜 인간의 육체를 지니고 오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영지주의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물로써만 오신 것이 아니라 참 인간의 육체, 즉 피로써도 오셨다고 증언하는 것이고, 이 영적인 측면과 육적인 측면의 결합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거짓말쟁이요 적그리스도라 칭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께서 몸을 주신다는 것은 그와 함께 결합되어 있는 영, 신성, 성령님을 함께 주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육체, 즉 몸을 먹지 않으면 그분의 신성에 참여하지 못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에게 하는 사랑의 행위, 즉 선물을 주거나 하는 등의 모든 사랑의 표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동시에 그 사람의 사랑의 마음 또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아먹으라고 하셨던 육체를 믿고 받지 않는다면 동시에 주시는 그 분의 신성 또한 받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둘은 더 이상 갈라놓을 수 없게 일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물만이 아니라 피로써 세상에 오셨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물은 신성이고 피는 인성입니다. 이 신성과 인성은 성령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그래서 증언하는 것이 셋입니다.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성체를 모셔야 성령님이 오십니다. 사제의 사죄경을 받아야 죄가 용서됩니다. 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기름 바름을 거부하지 말아야 성령의 인호가 새겨집니다.
이 모든 상징적이고 물질적인 행위들이 보이지 않는 은총이 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언어, 즉 물질을 당신과 하나가 되게 결합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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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4년 겨울에 저는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나환자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낮에는 나환자 마을에서 양계와 양돈 일을 도와주고, 밤에는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때 만났던 학생 중에는 수도자가 된 친구도 있고, 간호사가 된 친구도 있고, 사업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지난 12월입니다. 수도자가 된 친구가 문자하였습니다. 조카가 뉴욕에 가는데 성탄 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국에서 교환 학생으로 온 조카는 12월 23일 친구와 함께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왔습니다. 그 학생의 아빠가 중학생 때 만났으니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조카는 성탄 미사를 함께 하였고, 친구와 함께 떠났습니다. 4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참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중학생이었던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생인 자녀를 두고 있었습니다. 고등학생이었던 학생은 수도자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이웃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신학생이었던 저는 어느덧 서품 33년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 연탄을 갈아 주던 학생이 생각납니다. 유정란을 문 앞에 놓고 갔던 학생도 생각납니다. 눈 덮인 산을 올랐던 생각도 납니다. 모두가 잘 자라 주어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교회의 역사 안에서 공의회와 교부들이 고백했고, 선포했던 ‘그리스도론’을 나누고 싶습니다. “교회사의 처음 5백 년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이며 참 인간이라는 신앙을 언어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단적 주장의 출현과 이에 대처하기 위한 공의회의 개최가 반복되었습니다.
1. 아리우스 이단과 니체아 공의회
4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는 그리스의 플라톤 철학을 근거로 자기 생각을 펼쳐나갔습니다. 플라톤 철학에 따르면 최고의 유일자(唯一者)인 신은 근접할 수 없는 초월성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인식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참된 신은 근접할 수 없는 초월성을 지녀야 하므로 인간으로서 살면서 희로애락을 느낀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보다 낮은 신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에 무로부터 창조되었고, 그러므로 하느님 아버지와 영원하거나 그분과 같은 본질을 지닐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리우스의 이설에 대처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의 지역 시노드가 열렸는데, 두 시노드는 아리우스를 편들었고, 한 시노드는 그를 반대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시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이렇게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분쟁으로 인해서 자신의 제국의 일치가 깨질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325년 소아시아의 도시 니체아에서 제국 공의회를 소집하였는데, 이는 최초의 보편 공의회로 간주됩니다. 황제가 의장이 되었고 대부분 동방의 그리스 지역에서 온 300여 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여 아리우스의 주장을 단죄하면서 니체아 신경을 확정하였습니다. ‘우리는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곧 하느님의 아들을 믿습니다. 그분은 아버지, 곧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낳음을 받으신 외아드님이시며 하느님으로부터의 하느님, 빛으로부터의 빛, 참 하느님으로부터의 참 하느님이시요, 낳음을 받으셨지 지음을 받지 않으셨으며 성부와는 동일본질(homoousios)이십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 위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분은 우리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사 살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2. 네스토리우스와 에페소 공의회
니체아 공의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립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인정하였지만, 둘 사이의 관계를 좀 느슨하게 보았습니다. 그는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인성을 약화시키는 것에 반대해서 그리스도가 영혼과 육신을 갖춘 참된 인간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마리아에게 부여하던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고수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신성을 낳은 것이 아니라 신성과 결합된 인간을 낳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머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의 온전한 인성을 구하기 위해서 인성을 신성에서 분리시켰던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치릴로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전해 듣고 즉시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치릴로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한 위격으로 풀릴 수 없이 일치되었다’는 견해를 내세웠습니다. 예컨대 불붙은 연탄에 있어서 연탄과 불은 하나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치릴로에 따르면 마리아께서 비록 예수의 인성만 낳으셨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한 위격으로 결합된 까닭에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어머니도 되신다는 것입니다. 양대 신학파가 대립하자 에페소에서 공의회(431년)가 소집되어서 ‘거룩한 동정녀’는 ‘하느님으로부터 오시어 육신을 취하신 말씀을 육적으로 낳으셨기 때문에’ 마리아를 진실로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를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3. 단성론과 칼체돈 공의회
네스토리우스의 우려는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이 아니었음이 사실로 드러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한 수도원의 원장인 에우티케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서 인성을 너무 약화시켰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마치 바다로 떨어지는 꿀방울이 바다에서 녹아버리듯’ 신성으로 완전히 흡수될 정도로 그렇게 신성과 인성이 혼합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성이 거부되고 폐기되었습니다. 이를 단성설單性說이라고 합니다. 에우티케스를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자 451년 칼체돈에서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느님이며 참 인간’으로서 ‘하나이요 동일한 그리스도는 본성이 둘이면서도 뒤섞이거나 뒤바뀌거나 나뉘거나 갈라지지 않는 분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이 일치를 빙자하여 본성들의 구별을 치워 없애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두 본성의 저마다의 고유성을 고스란히 보전해야 합니다. 이 두 본성은 한 인격과 한 위격 안에 모여옵니다.’ 이렇게 해서 정통 교리가 확립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느님이며 참으로 인간으로서, 신성과 인성은 혼합됨이 없이 존립합니다.(단성론에 반대해서). 그러나 양성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신적인 위격 안에 서로 풀릴 수 없이 결합하여 있습니다.”(네스토리우스에 반대해서)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공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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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7-11: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오늘 복음에서 역시 요한 세례자의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7절). 요한은 자신을 철저히 예수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역할을 다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주인의 신발 끈을 풀어주는 종과 같이 이것은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그러면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8절).
이렇게 요한의 증언을 소개한 다음,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소개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면서 그분은 하느님의 영으로 사신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확신한 것을 여기에 고백한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강한 소명 의식을 지니셨기에 세례를 받으신 후 고향과 친척과 직업을 등지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룩하는 일, 공생활을 시작하셨다. 예수님 홀로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신다. 그 내용을 보면 하늘이 갈라지며 하느님의 영이 예수께 내려 그분은 하느님의 힘으로 살게 될 것이다.
이어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절) 여기서 사랑하는 아들은 요한계 문헌에 나오는 “외아들”(요한 1,14.18; 3,16.18; 1요한 4,9)과 같은 의미이며,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이사 42,1)는 하느님께서 일정한 사명을 부여하시려고 선택하신, 이사 42,1의 “야훼의 종”이라는 인물이 자신은 죄가 없음에도 세상의 죄에 대해 대신 속죄하려고 고난을 겪는 종으로 예수님도 야훼의 종처럼 살아가도록 선택되셨다는 뜻이다.
이렇게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은 성령 안에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당신이 죄 없는 하느님의 고통 받는 종으로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임을 복음은 전하고 있다. 이제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로서,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자녀들로서 세상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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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1,4)였습니다. ‘더 큰 능력’으로 예수님께서 처음 보여 주신 것은, 죄인들의 회개에 동참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 반드시 함께 계신다는 신비가 그분의 세례로 드러납니다. 죄인들은 더 이상 단죄와 심판의 대상이자, 한 번 지은 죄가 낙인이 되어 영원히 죄인으로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로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는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더 큰 능력’이 처음으로 드러낸 신비입니다.
제1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증언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셋째 문장을 원문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드님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소유하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소유하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도 당신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그들도 당신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은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십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더 큰 능력’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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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1,7-11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세례성사 예식 중에 주례 사제가 입교 후보자들의 이마에 부어줄 ‘세례수’를 축성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때 사제는 예식에 사용할 물에 손을 담근 채로 이렇게 기도하지요.
“주님 비오니, 성자를 통하여 이 물에 성령의 힘을 풍성히 부어주시어,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속에 묻힌 모든 이가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이 기도를 통해 이 물은 그냥 평범한 다른 물과는 다른, 아주 특별하고 고유한 ‘세례수’가 됩니다. 우리의 간절한 청원을 들으신 성령께서 그 물 위에 내려오시어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가득 부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특별한 물로 입교 후보자들의 이마를 씻음으로써, 주님께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죄로 가득한 ‘세속의 나’는 죽고, 하느님을 닮은 그분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이런 세례수 축복 예식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는 아주 센세이셔널 한 ‘대사건’입니다. 하느님이신 분께서 피조물에게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고 죄를 짓지 않으신 분께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볼 때 굳이 하실 필요가 없는 일, 자칫 당신의 ‘품위’를 떨어뜨릴 수 있는 일을 하신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그리고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그리고 그 물을 통해 우리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시려고 물 속에 당신의 몸을 담그신 것이지요.
그분이 물 밖으로 나오시자 하늘이 갈라지며 비둘기 형상을 한 성령께서 예수님께로, 이 세상으로 내려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늘 나라의 문이 열리고 우리가 그 나라에 올라갈 ‘길’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명과 사랑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주는 ‘다리’가 된 것입니다. 이에 하늘에서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는 당신 아들 예수님께 하신 말씀인 동시에, 세례를 통해 새로이 당신 자녀가 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부족하고 죄많은 우리가 예수님 덕분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분께서 아끼고 사랑해주시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으니, 세례 받은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총과 축복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은총을 입은 만큼 사랑을 실천하고, 용서를 받은 만큼 자비를 베풀며, 인정을 받은 만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은총이 구원으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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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많이 보지만 동시에 험악함도 많이 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어서 아름답지만, 아담과 하와의 원죄와 카인의 살인 같은 죄가 가득한 이 세상의 추악함을 대면하게 됩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사도의 이 말씀은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증언하면서, 그분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면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험악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끌어 올려 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시면서 점점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하느님께서 흐뭇해하시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지니는 특권을 누리며 삽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 승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미약한 우리의 삶은 영원한 생명의 은총으로 채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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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구요비 욥 주교님]
작년 가을, 아주 어린 시절에 우리 가족에게 교리교육을 해주신 인보성체수도회 오 수산나 수녀님이 사진 한 장을 보내주셨다. 이 사진은 단기 4291년(1958년) 4월 6일에 찍은 흑백사진으로, 어머님이 청평본당에서 윤을수 신부님(인보성체수도회 설립자)께 세례를 받고 찍은 가족사진이다.
어렸을 때 본 기억이 있었는데, 중간에 잦은 이사로 분실하여 늘 마음으로 아쉬워했었다. 가족들이 아버지·어머니 주위에 서 있는데 묘하게도 내가 제일 가운데 있고, 아버님의 친구이셨던 고 김홍섭(바오로) 판사님이 우리와 함께하셨다.
그렇다! 「무상(無常)을 넘어서」의 저자, 지금까지도 법조인의 귀감으로 존경받는 사도 법관 김 판사님이 주말이면 우리집 사랑방에 머물며 전도하시던 기억이 난다. 그 선하고 마냥 온유하고 인자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사진을 크게 확대하여 서재에 모시니 방안이 따스하게 안정을 찾은 듯하다. 전통적 유교문화에서 살아온 한 가정이 가톨릭 신앙으로 귀의한 것은 그 가정의 역사가 구원의 역사로 전환된 것을 뜻하며 각 사람한테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이를 두고 사도 요한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1요한 5,4)라고 선언하신다.
세례는 예수님의 영이 우리 인간 안에서 이루시는 새로움이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모님의 태중에서 잉태되시고 태어나셨듯이 같은 성령께서 우리 인간 각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이룩하심이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양자(養子)가 됨을 말함이니,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5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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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1,11)
삶은 항상 능동적이며 수동적인 움직임만이 있는 게 아니라, 특히 영적인 삶에서는 전적인 ‘받아들임’의 움직임도 있다고 봅니다. 이는 모든 것을 은총으로 이해하고 바라볼 때 나올 수 있는 마음 자세이며 행동이라고 느낍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먼저 받아들이는 사람이어야 하며, 이런 점에서 세례자 요한은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섭리이며 은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온유하면서도 겸손한 마음이 있었기에 세례자 요한은 자신 뒤에 오시고 다가오실 예수님 앞에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나는 몸을 굽혀(=겸손한 마음의 표출)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종의 모습)”(1,7)고 고백하면서 마음을 열어 주님께 집중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증언하신 분은 분명 성령이시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1요5,6) 그런데 사람들의 증언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예수님에 관한 증언은 바로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셨음을 믿지 않은 세상에서,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1,7) 고 증언 함으로써, 그 홀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증언함으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1요5,5)이 되셨습니다.
오늘 복음 내용을 더 풍부하게 더 명확하게 풀어주는 요한복음에 보면,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다가온 이들에게 세례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도 세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에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1, 29~34)
이렇게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0~11)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복음은 그 장면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심을 통해 예수님이 바로 오실 분이며, 하느님의 사랑받으시고 마음에 드는 아드님이심을 증언셨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사는 사람,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며, 영원한 생명을 지닌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는 표지입니다.(1요5,11~13참조) 이로써 우리 또한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을 증언하는 삶과 사람이 되도록 독려하고 고무시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죄 있는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는 성령의 세례를 받은 우리가 분명 세상을 이긴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이제 두려움 없는 사랑에서 솟아나는 믿음을 통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증언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이기는 은총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 또한 내가 무엇을 먼저 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은총을 은총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됩시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1,34)
● % 오늘 복음은 다음 주 월요일, 주님 세례 축일(나해) 복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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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5년 전, 어느 본당에서 주임신부를 하고 있었을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 한 청년을 만났는데, 러시아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는 아주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방학을 맞이해서 잠깐 한국에 들어온 것이었지요. 그래서 본당의 청소년들에게 자신이 공부했던 음악을 들려주면 어떠냐는 제안을 해보았습니다. 이 청년은 흔쾌히 허락했고, 아이들의 교리 시간에 작은 연주회가 이루어졌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청소년들도 클래식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의 작은 연주회는 엄청난 인기였습니다. 당시의 유행가에 맞춰서 연주해서 그랬을까요? 고전 음악을 중심으로 연주했기에, 빠른 댄스 음악이 주를 이뤘던 당시의 음악과는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본당 청소년들은 또 이런 공연을 열어줬으면 할 정도로 큰 인기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워낙 재미있게 또 쉽게 클래식을 설명해 주었고, 무엇보다 당시의 인기 아이돌 못지않은 훈훈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연주회가 끝난 뒤에 인기 아이돌에게 하듯이 사인 요청과 사진 촬영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청년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교회 안에서 우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은 완벽하신 분이십니다. 완벽하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 역시 완벽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우리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실망하고 교회를 등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역할이 주님을 세상에 알리는 데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최선을 다해 주님을 알리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자기 생각만 전하고 있을까요? 왜 주님이 아닌 자기를 알리려고만 할까요?
세례자 요한은 주님을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그는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라고 말하면서, 주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에게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시지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세례를 받는 더 큰 겸손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자기를 알리려는 교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대신 주님을 알리기 위해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주님을 알게 됩니다. 또한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평화 안에서 진정한 위로를 세상이 누리게 됩니다. 그런 우리가 될 때, 주님으로부터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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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고 희망하고 사랑합니다>
마르코 1,7-11 (세례자 요한의 설교, 세례를 받으시다)
그때에 요한은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믿고 희망하고 사랑합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8)
그분을
믿습니다
그럼으로
성령께서 늘
새로 나게 하심을
나는 믿습니다
그분을
희망합니다
그럼으로
성령께서 늘
힘차게 이끄시기를
나는 희망합니다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럼으로
성령께서 늘
기쁘게 함께하시도록
나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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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가정 방문을 하면 신발을 바로 놓아주고 먼지도 털어주고 가끔은 구두약도 발라 윤을 내주는 분도 있습니다. 미쳐 단정하게 하지 못한 미안함도 있지만, 기분은 좋습니다.
예수님 당시 풍습은 주인이 외출하였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종이 신발 끈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뒤에 오실 주님을 선포하며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7)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감히 예수님 앞에서 종노릇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품위가 높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요한은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라는 고백을 하며 지극히 겸손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한창 인기가 좋은 상황이었고, 그러니 그 인기를 누릴만한데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오실 주님을 자랑하였습니다. 요한은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큰 겸손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가능하면 나를 추켜세우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입니다. 그러나 그 바보의 몫, 겸손이 모두가 본받아야 할 덕목입니다. 우리는 겸손으로 세례자 요한의 뒤에 오신 주님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는데 그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어서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이는 “너는 나의 귀염둥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사랑이다.”(이사 43,4)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의 장벽이 무너졌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세상이 인간의 세상에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이사 63,19)입니다.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에게 내려왔다는 것도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의 활동이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 예수님을 택하셨습니다.
가끔 신자들이 나는 추기경님께 세례를 받았네, 어떤 주교님께 세례를 받았네. 하며 자랑합니다. 그러나 누구한테 세례를 받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오는 은총은 베푸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내려오는 것은 하늘에서 하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물론 세례를 주신 분을 통해서 공적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은총을 얻게 되었으니, 그분이 영적 은인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따라서 고마운 만큼 자녀다운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무리에 섞여서 마치 당신 자신도 죄를 고백하여야 할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데 우리를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마치 불 속에 있는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하듯이,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처지가 되어서 오신 것입니다.
무능력한 분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할 능력을 지니고 죄인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어둠 속을 비추는 빛으로, 진흙으로 빚어 만든 인간의 코에 입김을 불어 넣어 숨을 쉬게 하신 생명의 영으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보여준 겸손의 옷을 입고 주님을 기쁨으로 만나 뵙길 바랍니다. “겸손의 그림자를 가진 사람은 많지만, 그 덕을 가진 사람은 적습니다.”(성 예로니모)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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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
얼마전 메타세콰이어 가로수와 불암산을 보며 써놓은 “당신이 되고 싶다”라는 고백시가 생각납니다.
“높은 나무 있어
하늘 높은 줄 알겠다
높은 산 있어
하늘 높은 줄 알겠다
당신 있어
하느님 높은 줄 알겠다
당신 있어
하느님 참되신 줄 알겠다
당신 있어
하느님 좋으신 줄 알겠다
당신 있어
하느님 아름다운 줄 알겠다
당신은
주 예수님이시다
당신이 되고 싶다”-2023.12.21
눈들면 어디나 하늘이듯 눈들면 어디나 하느님입니다. 하늘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늘 사랑하라고, 하느님을 늘 잊지말라고, 하느님을 늘 생각하라고 언제 어디서나 눈들면 하늘입니다. 참 좋으신 하느님을 반영하는 예수님과 하나되고 싶음은 누구나의 깊은 영적 갈망입니다.
누구나 믿는 이들의 평생 영원한 화두는 예수님입니다. 예나 이제나 앞으로도 한결같을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세례자 요한 상상할 수 없듯이 예수님 없는 우리들 또한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 서두 세례자 요한의 선포만 봐도 그의 초점이 온통 예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이요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존재이유이기도 합니다. 앞에가는 이는 뒤에 오는 이의 종일 따름이며 남의 신발끈을 푸는 것은 노예나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세례자 요한처럼 겸손히 비워질 수 뿐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면 영원히 자기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신원은 오늘 복음이 증언하는 그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히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자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그분위에 내려 오심과 동시에 들려온 하늘로부터의 음성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세례로 인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하나하나의 세례 때도 들려왔을 하늘로부터의 음성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리스어 문장상으로 볼 때 이는 단순 과거가 아니라, 히브리 말이나 아람 말과 같은 셈족 말에서처럼, 지속적인 상태를 가리킴으로 현재로 옮깁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늘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아들 예수님이란 말씀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평생 이런 자의식을 지니고 아버지의 아드님답게 살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존엄한 품위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과 일치의 갈망의 사람들이 성인들이요 그 1호가 세례자 요한 이라면, 제1독서의 요한 사가도 그에 버금가는 인물입니다. 다음 요한 사도의 고백은 우리가 배워 믿어야 할 고백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새삼 세상을 이기는 최상, 최고의 무기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연상되는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성심상 아래 바위판에 있는 말마디와, 그리고 요한복음의 말씀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제가 늘 강조하고 좋아하는 주제가 주님의 전사입니다. 평생 영적전쟁의 삶에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인 우리들이요, 주님의 평화의 전사, 사랑의 전사, 믿음의 전사인 우리들에게 이런 주님의 말씀은 얼마나 든든한 위로와 격려가 되는지요! 이런 주님과 깊어지는 일치가 말그대로 천하무적, 영적승리의 삶을 보장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 관하여 친히 증언해 주신 내용이 우리를 더욱 용기백배하게 합니다.
“그 증언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살아 있다고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하나되어 살 때 비로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지 않고 유령같이, 좀비같이 천박하게 헛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그래서 제가 거칠고 험헌 광야 영적 전쟁중 세 상태만 있다고 강조하곤 합니다. 성인이냐 괴물이냐 폐인이냐? 외관상은 사람이지만 내용을 보면 자기를 잃고 사는 괴물이나 폐인같은 인생들도 꽤 많을 것입니다. 오늘로써 요한1서는 끝나는데 오늘 독서에 이어지는 요한 사가의 고백도 기억하고 싶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정말 고맙게도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모심으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에게 주신 최상 최고의 선물이 이 거룩한 성체성사 미사입니다. ‘감사기도’이자 ‘행복기도’ 또 ‘예닮기도’라 일컫는 기도문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희망과 기쁨, 평화와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예수님!
당신은 저희 모두이옵니다
저희 사랑, 저희 생명, 저희 기쁨, 저희 행복이옵니다
히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2018.10.16)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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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믿음, 세상을 이기는 힘>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하니 즉시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사실 세상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를 이기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울 것입니다.
세상은 나의 밖에 있는 것인 데 비해 자기는 자신이기도 하고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든 세상에서 사는 것도 고통이고 불행이지만
자기가 병든 것이 훨씬 더 고통이고 불행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유혹의 근본 원인인 욕망을 이기는 내가 되면
세상이 아무리 유혹해도 유혹을 이길 수 있지요.
세상은 권력과 이권을 놓고 죽자고 싸우지만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고 안빈낙도하는 내가 되면 그 초연함으로 인해 나는 세상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오늘 서간이 얘기하는 것은 내가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기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믿는 내가 이기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으로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정의로 세상의 불의를 이기고, 그리스도의 평화로 세상을 평화롭게 하고, 그리스도의 피 흘리는 사랑으로 세상의 미움을 녹여버립니다.
우리는 종종 이것을 의심합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을 보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고, 그리고 어제 남북 간에 있었던 상호 간의 포격을 보고, 우리는 절망하고 그리스도의 평화가 과연 힘이 있는지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고 의심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의심하면 삼손이 머리카락이 잘렸을 때 힘을 잃듯이 힘을 잃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악령 추방에 실패하듯 세상의 죄악을 추방할 힘을 잃고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신념만으로도 세상을 이기는 체험을 하곤 하는데 이런 신념보다 주님을 믿음이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념보다 더 강한 이 믿음이 내게 있는지 돌아보고 없다면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도움을 청했던 사람처럼 믿음의 도움을 또한 청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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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1,23)
<복음과 원복음>
오늘 복음(마태1,1-16.18-23)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와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탄생 예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셉과 약혼한 나자렛 처녀 마리아를 통해서 탄생하십니다.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1,21)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구세주)'이십니다.
그래서 예수가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인류 구원을 위한 기쁜 소식'입니다.
'원복음!'
'인류 구원을 위한 복음(기쁜소식)'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 창세기 때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그 복음을 '원복음(최초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오늘 독서가 이 '원복음'(창세3,15)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창세3,9-15.20)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원죄에 관한 말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불순종의 죄를 지어 에덴동산에서 추방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고, '원복음'을 약속하시고 추방시키십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3,15)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여자의 후손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실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복음'이고,
그래서 '원복음'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복음(기쁜소식)'은 매일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매일 선포되는 '복음 말씀'이고,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해 제대 위로 내려오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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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r4t_y-_Vfj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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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 11)
마음을 살리고
삶을 살리는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생각한 것을
실행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먼저
우리에게
건네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입니다.
주면 줄수록
더욱 커지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자기의 뜻을
내려놓는 것이
사랑으로
채워지는
사랑의
아주 특별한
순간이 됩니다.
자기의 뜻을
내려놓는 것이
행복의
첫시작입니다.
이와 같이
생명의 기쁨은
사랑의 기쁨으로
드러납니다.
사랑은
또한 빛의
시작입니다.
어둠을 맑은
빛으로
감싸주는
빛나는
사랑입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곳에
근원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크옵신
사랑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됩니다.
사랑의 본질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마음의 근원도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모두를
살리는
생명의 길입니다.
그 길만이
아름답게
우리를
성장시키는
성장의 길입니다.
성장의 길인
인격성숙은
하느님 사랑이
빚어내는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진정한 의미
진정한 관계는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사랑을 먼저
실천하십니다.
사랑은
마음의 강력한
실천이며
마음의 강력한
깨달음입니다.
하느님 사랑에서
이 모든 것이
시작되는
우리의
행복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이 모든 것을
맡겨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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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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