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11월의 첫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늙고 병들었을 때도 주님과 친밀한 관계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몸이 아프면 온 마음이 몸에 가게 되고,
입에서 나오는 것이 한숨과 병약한 말들만 하게 되는 연약한 인생들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하나님의 인애를 흘려보내지 못하는 자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보다 약하고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존재들을 은근히 판단했던 것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들이 존재함으로 가정과 교회와 제가 속한 모든 공동체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조그만 웅덩이 속에 서로 다투고 시기하는 물고기처럼 살았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사랑이 왜 이웃 사랑으로 연결되는지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시편 말씀 앞으로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2.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4.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
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6.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9.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10.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11.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12.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본문 주해)
이 시편의 표제어는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두둔의 법칙에 따라 부르는 노래’이다.
여두둔은 다윗 시대 레위인으로 성전의 문지기 역할도 맡고, 찬양의 인도도 맡은 자이다.(대상16:42, 25:1)
그러므로 이것은 다윗의 시를 여두둔이 작곡하여 부른 것으로 본다.
시인은 어떤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는 친구들로부터 버림을 당해 마치 무너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처럼 위험에 처해 있다. 이들은 겉으로는 친구처럼 행세하나 속으로는 거짓과 미움으로 가득 차서 시인의 목숨까지 노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위선적인 친구들을 뒤로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을 갈망한다. 시인은 허무한 인생과 권능의 하나님을 대조한다. 권능의 하나님은 인자(헤세드)의 하나님이시다. 시인은 헛된 인생을 직면하고 인자(헤세드)의 하나님 안에서 안식한다.
1~4절 : ‘오직 내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잠잠하니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온다’고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이란 나에게서 나오지 않으니 잠잠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1절)
반석, 요새는 흔들리지 않고 든든한 곳이다.
그러나 다윗은 쫓겨 다니는 중에 요새도 반석도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만 바라는 것이요, 하나님만이 흔들리지 않는 반석, 요새, 구원이라는 고백을 한다.(2절)
사람의 연약함을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로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이런 연약한 인간이 시인 자신이기도 하고 시인을 공격하는 자들이기도 하다.(3절)
3절이 인간의 연약함을 말한다면 4절은 인간의 악함을 말한다.
겉으로는 축복을 하지만 속으로는 저주하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속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뜻인 말씀을 보면서 바르게 분별하여야 세상의 진영이나 이념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다.
‘셀라’가 나오는 것은 한 단락이 끝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찬송의 간주와 같다.(4절)
5~8절 : 5~7절은 1~2절의 반복이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이시니, 백성아, 언제든지 그만을 의지하고, 그에게 너희의 속마음을 털어놓아라.(셀라)”(8절, 새번역)
마음을 토한다는 것은 마음을 쏟아 놓으라는 것이다.
하나님께만 마음을 쏟아 놓으라는 말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구체적인 방식이다. ‘마음을 토하다’(마음을 쏟아 놓는다)라는 것은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놓으라는 것이다. 이는 기도의 또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그분이 우리의 피난처이시기 때문이다.
9~10절 : 3절에서 인생의 연약함을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로 말하였다.
여기서는 사람이 입김이며 속임수라고 한다. 합니다. 저울에 달면 입김보다 가볍다고 한다.
“신분이 낮은 사람도 입김에 지나지 아니하고, 신분이 높은 사람도 속임수에 지나지 아니하니, 그들을 모두 다 저울에 올려놓아도 입김보다 가벼울 것이다.”(9저ㄹ, 새번역)
천한 자는 입김이라고 하고 신분이 높은 자도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천한 자들의 목소리는 힘이 없기에 입김이라고 할 수 있고, 높은 자들은 목소리에 힘이 있지만 그들의 힘도 결국 속임수로 얻은 것이라 입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무너지는 담, 흔들리는 울타리, 입김, 속임수인 인생들이 저마다 힘을 가지려고 한다. 힘은 재물에서 나오기에 재물을 가지려고 한다. 재물을 가지려면 포악해져야 한다. 그렇게 탈취한 것으로 자기의 재물을 늘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탈취하여 재물이 늘어난다고 해서 그런 재물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한다.
11~12절 : 참된 권세와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에 하나님께서 한번 불어버리시면 한순간에 날아 가버리는 먼지와 티끌에 불과한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주의 인자함이란 주님의 언약을 따른 사랑이다. 그 사랑 외에는 다른 소망이 없다는 말이 주의 인자하심을 바란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오직, 잠잠히, 주님의 약속만 믿고 사는 것이다.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말씀은 잠잠히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는지, 아니면 자신의 힘을 키우려고 온갖 악을 행하였는지에 따라 심판하신다는 말씀이다.
(나의 묵상)
나의 묵상을 함께 공유하는 지체들은 내게 말한다.
‘우째 그리 바쁘게 사느냐?’고.......
정말 매일이 바쁜 것이 맞다.
그러나 나의 내면은 참으로 잠잠할 뿐이다.
이렇게 ‘잠잠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매사에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의 구원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즐거운 일, 슬픈 일, 한가한 때, 분주한 때.....내 몸이 맞이하는 상황은 다양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이 모든 상황을 가지고 언제나 주님 앞으로 나아감으로 나는 언제난 잠잠하고 고요하다는 느낌이다.
매일 말씀 앞으로 나아가, 주님의 뜻을 잘 알아먹지 못하는 우둔한 내 마음을 토하고, 주님보다 앞서려는 얕은 생각도 토하고, 인간적 생각으로 사람들을 조종하려는 생각도 토한다.
그러면 내가 당한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씀의 내용조차도 내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응답이 된다면 과연 말이 되는 것일까?
오늘 시편에서 인생은 무너지는 담이요, 흔들리는 울타리요, 입김이요, 속임수라고 말한다.
한 단어, 한 구절에 아멘, 아멘이다.
무엇이라도 된 줄 아는 인생에게는 주님의 은혜가 시큰둥할 뿐이리라.
복음을 알기 전 나는 스스로를 인정하는 자였다. 물론 세상에는 나보다 훌륭한 자들이 차고도 넘치지만, 그들과 굳이 비교하지 않고, 나 스스로에게 만족하며 사는 내가 지혜로운 줄 알았던 것이다.
자신을 그토록 인정하는 자에게 주님의 은혜란 입술에 그저 대롱대롱 달린 말이요, 내 기분에 따라 붙었다가 떨어졌다가를 반복했다.
말씀의 빛에 나아가 보니, 나는 한도 끝도 없는 깜깜이, 절망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나를 부인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어 반항도 하고, ‘예, 예, 하나님 99%, 저는 1%로 하지요’라고 타협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님은 확실하셨다.
매일의 말씀으로 나를 다루시니 결국 두 손 들게 하신다.
나는 저울에 달아서 무게도 나오지 않는 입김이요, 거짓 것으로 치장하여 자신을 드러내려는 속임수인 존재라는 사실에 토를 달 수 없게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 끝내지 않으셨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시고, 매일 생명으로 사는 삶을 허락하시니 어찌 감사, 감격이 넘치지 않을까?
먼지요 티끌인 존재가 새 생명을 가지게 되고, 주님을 찬양하는 존재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나의 전 생애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지 않을 수 없다.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젖 뗀 아기의 만족함으로, 엄마 품에 있는 자로 보내는 것이다.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아 (문부원~~),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시131편, 새번역)
(묵상 기도)
주님,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게 살지만
제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예수님만 바라며 살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