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어제는 다니엘 기도회 첫 날이었습니다.
무참한 시간이었습니다.
한숨으로 새날을 맞이합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갑니다.
오염된 영혼, 상한 심령을 십자가 보혈로 덮어 주옵소서.
주님의 인애와 신실을 보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9.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10.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11.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본문 주해)
이 시의 표제어는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이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 사울에게 쫓길 때도 유다 광야에 있었다. 또한 왕이 된 후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서도 유다 광야에 있었다. 그런데 11절에 다윗이 자신을 ‘왕’으로 부른 것으로 보아 이 시는 압살롬의 반란을 배경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또 1절을 보면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한다고 한다. 그런데 2절에서는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6절에서는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다윗은 유다 광야만이 아니라 그가 사는 어디서나 하나님을 갈망한다.
1~4절 : 다윗은 목이 타는 갈증으로 ‘나의 하나님’을 찾는다. 그는 아들의 반란과 신하들의 배신 앞에서 오직 하나님의 현존을 갈망한다. 그것은 영혼과 육체가 주를 갈망하는 것으로 전인적인 갈망이다.(1절)
지금 광야에서 과거 주님의 임재의 장소인 성전에서 주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새번역에서는 현재형으로도 말하고 있다.
“내가 성소에서 주님을 뵙고 주님의 권능과 주님의 영광을 봅니다.”(새번역)
현재형이 된다면 지금 성전에 들어갔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표제어대로 지금 다윗이 광야에 있다면 광야에서 주를 갈망하는 그 장소가 성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건물로 된 성전이 있어도 그 안에서 주를 갈망하지 않으면 그 성전이 우상 숭배의 장소가 된다.
그러나 광야와 같이 메마른 땅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주를 갈망하면 이것은 주의 영이 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곳이 비록 광야일지라도 주께서 임재하시니 성전인 것이다.(2절)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목숨)보다 낫다고 한다.
주의 인자함이란 ‘헤세드’ 즉 하나님의 언약을 따른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 인자함을 맛보았다면 지금 메마른 광야라도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윗의 마음을 육신의 사람들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생명’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 형태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어떤 생명이라고 하는 것도 주의 인자함이 없으면 결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시인은 그의 입술로 주를 찬양한다. 그는 평생에 찬양의 노래로 하나님을 증거 할 것이다.(3~4절)
5~7절 : 시인은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만족한다.
시인의 영혼은 하나님의 헤세드로 인해 기름지고 맛깔진 음식을 먹은 듯이 만족하다. 그는 밤이든지 새벽이든지 주를 기억하며 주의 말씀을 읊조린다. 밤이든 새벽이든 주님과 동행하는 다윗의 모습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교제는 기본적이고도 직접적인 삶의 필수적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낮이든 밤이든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묵상한다.
다윗은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믿었던 신하들이 배신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덮여도 하나님이 그의 도움이 되심을 믿는다. 극한의 고통에서 하나님의 도움은 그의 날개 아래에 거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주의 날개’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의 스랍을 말하며, 신약에서는 아들이 있는 곳, 즉 창세전부터 현존하는 아버지 집을 가리킨다.
8~11절 : 왕은 원수가 멸하여지기를 기대하며,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한다.
시인은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께 매어 달린다. 이는 원수들이 그의 영혼을 멸하려 하는 고통의 현실을 직시하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원수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됨을 확신한다. 그들은 땅 깊은 곳으로 내려갈 것이며 칼에 넘겨지고 승냥이의 먹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왕은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사람들은 모두 왕을 칭송할 것이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는 자들은 말문이 막힐 것이다.”(11절, 새번역)
(나의 묵상)
다윗은 지금 유다 광야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쫓기는 신세이다.
그것도 아들의 반란과 신하들의 배신으로 인한 것이니 얼마나 비참한 상황일까?
아들을 생각하며 신세 한탄을 한다든지, 신하들에 대해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해도 시원찮을 것인데,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라는 고백이나 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것은 그에게 주의 영이 임하였기 때문이다.
주의 영으로 인하여 주의 인자함을 맛보지 못하면 세상의 썩어질 것을 찾아 만족을 구하려고 한다. 아무리 채워도 해갈되지 않는 것들, 썩어질 것들을 향하여 온 세상이 다 그렇게 달려가기 때문이다.
어제 다니엘 기도회에서도 그것을 보았다.
너무 마음이 아프고 답답했다.
이런 구별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내게 성령이 임했기 때문이다.
주의 영이 임한 내게 그분의 인자하심이 부어지니 내 영혼의 만족이 오직 예수님이신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은 그저 이 땅에서 내 소원이나 들어주는, 내가 만든 금송아지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전 약속을 이루심으로 내게 영생을 주시고, 지금도 나와 교제하여 주심으로 날마다 아버지 집으로 이끌어 주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죄인에게 베풀어 주시는 주님의 인자하심이다.
그래서 나는, 그 절박한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다윗을 보게 되고,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예수님의 인자하신 그 사랑이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는 고백을 하게 되니 이 땅의 것을 구하기 위해 더 이상 부르짖지 않는다.
죄악만이 대로처럼 열린 죄악 된 이 땅에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내게 필요한 것은 오직 주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히 여겨주심뿐이다.
밤이든 새벽이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주님의 날개 그늘로 피하여 들어가는 다윗처럼 나도 날마다 주님 날개 아래로 피하여 들어간다.
이 세상을 내 뜻과 내 힘대로 살다가 힘들거나 곤경에 처하면 그의 날개 그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자체가 그분의 날개 아래에 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말씀 앞으로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연합되는 일, 즉 내가 세상에 대해 죽고, 세상이 나에 대해 죽은 것을 보는 일이다.
그렇게 이미 주님의 날개 아래에 있기에,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신하가 배신을 하고, 목숨의 위협을 받는 그 엄청난 일이 일어나도 주의 인자하심만을 찬양하며 안심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묵상 기도)
주님,
성도는 이 땅에서 울면서 주님께로 갑니다.
처음에는 내 뜻대로 안되어서 울던 자였지만,
이제는 주님의 뜻을 알고 또 자신의 죄로 인해 애통하며 울게 됩니다.
죄의 본성 때문에 자주 괴로움을 당하는 연약한 자이지만,
주님의 보혈만을 의지하며 날마다 주님의 날개 그늘로 찾아듭니다.
이것이 제게 주님의 인자하심이 필요한 이유요,
또 주님의 인자하심만을 찬양할 이유입니다.
날마다 십자가에 연합되기를 기도하며
주님 다시 오실 날만 사모합니다.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