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020-05-20)
< 아내와의 거리 >
문하 정영인 -
이번 신종 코로나 때문에 아내와의 거리를 재산정하게 되었다. 거리의 종류도 하도 여러 가지라, 사회적 거리, 물리적 거리, 생활 속의 거리, 마음의 거리 등. 그나마 코로나 때문에 ‘사회적 거리’라는 말을 처음 알고 자주 듣게 된다.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적정거리는 한국은 2m, 미국은 1.8m 라 한다. 적정 사회적 거리는 6척 장신이라 하더니 그쯤 되나보다.
모든 사물은 거리가 있게 마련이다. 물질의 세 가지 상태인 고체, 액체, 기체도 분자 간의 거리에 따라 분류하게 된다. 칼릴지브란은 ‘사원의 기둥도 떨어져 있어야 한다’라고 했다.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 사람과 물체와의 거리, 물체와 물체와의 거리가 당연히 존재한다. 글자와 글자도 떨어져 있어야 제 기능을 발휘하다. 말하기에서도 글쓰기에서 띄어서 말하거나 띄어서 쓰기가 중요함은 초등학교 때부터 가르친다.
그 숱한 거리 중에서 가장 산정하기 어려운 거리가 아마 마음과 마음의 거리일 것이다. 속담에 열 길 물속의 물은 알아도 한 길 속의 사람 마음속은 알기 어렵다고 했다. 아무리 찰떡같은 궁합이라 해도 거기에도 거리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이라 했던가?
친구들 중에는 부부가 각방을 쓰는 친구가 여럿 된다. 어떤 이는 코골이 거리라고도 한다.
아내와의 거리는 나이가 먹을수록 멀어지는 것 같다. 늙으면 등 긁어주는 재미로 산다지만……. 흔히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하지만, 엄연히 부부는 이심이체(二心異體)다. 마치 화성인과 금성인이 만나 지구인이 되듯이 말이다. 톨스토이는 “행복한 결혼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얼마나 맞는가보다 다른 점을 얼마나 극복해나가는가이다.” 라고 했다. 결국 거리의 단축이 중요한 관건이다. 그러면서 서로 공감하는 영역이 자꾸 넓어져 가는 것이 부부인가 보다. 부부가 나와 똑같아지길 바라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서로가 가진 당연히 다른 마음과 몸이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아기를 못 낳듯이 말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했다. 늙어갈수록 눈의 가시거리가 있으면 부부일 것이다. 부부 간의 거리는 젊을수록 가까워지고 늙을수록 멀어진다. 부부 간의 거리는 나이에 정비례하나 보다.
가끔 전철 안에서 젊디젊은 연인들을 본다. 대개 그들은 아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도 부족해 어떤 친구들은 손과 몸과 가만히 있지 못한다. 더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려고……. 거기다가 서로가 입술까지 최단거리를 유지한다. 게다가 경로석 앞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그럴 때는 늙은이가 민망하기 그지없다. 아마 그들에겐 사랑의 마음거리를 확인하는 방법인가 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랑의 거리가 불안한가 보다. 경로석에 앉아있는 노부부는 같이 앉아 있어도 무덤덤한 표정이다. 노부부는 바싹 젊은이처럼 바싹 붙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무덤덤하게 인생의 노을 속에 앉아있다. 긴 부부의 세월은 그들의 거리를 그어 놓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얼굴에 그려진 인생의 훈장 같은 주름살 속에는 마음 속 깊이 정의 세월을 버무린 흔적이 역력하다. 금방 뜨거워졌다 금시 식는 젊은이의 사랑의 거리와는 또 다른 차원의 정(情)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세월이 약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은 수많은 세월의 거리를 지나왔기 믿음과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
나도 그렇다. 나는 내 방에서 무엇을 할 때 아내는 안방에서 무얼 한다. 무얼 하는지는 서로 간에 별로 관심이 없다. 이게 우리 부부의 사회적 거리다. 신종 코로나가 사회적 거리를 다사 인식 시킨다. 두 사람의 거리 중에도 불가근 불가근의 원칙이 적용된다. 서로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거리두기는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은 남녀의 거리두기를 강조하여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 했다. 서양은 안전의 거리를 악수거리로 정했다. 일본은 열과 열 사이를 통상 3m 이상의 간격을 둔다고 한다. 옛날 무사들이 회의를 할 때 칼이 닿지 않을 거리라 한다. 삼강오륜(三綱五倫)도 일종의 사회적 거리두기다. 그나저나 이번 코로나로 인해 악수가 사라지고 있다니 격세지감이 든다.
가장 중요한 거리는 마음의 거리이다. 천리여면(千里如面)이라 했다. 바로 옆에 있어도 천 리처럼 떨어져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천 리 떨어져 있어도 지척에 있는 사람이 있다. 각자의 거리가 있는 것이다.
부부가 마주 보고 누우면 30㎝도 채 안 되지만 등을 맞대고 누우면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 하니깐 30만㎞의 긴 거리가 되게 마련이다. 그러니 천 리 길이 한 걸음일 수 있고, 한 걸음 길이 천 리가 될 수 있다.
사회적 거리, 물리적 거리, 생활 속의 거리가 문제가 아니다. 마음의 거리가 문제다. 한국인은 정(情)의 거리가 더 문제다. 지척(咫尺)의 거리가 천 리 거리가 될 수 있듯이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란다.
관계(關係)는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관계는 더욱 그렇다. ‘인간(人間)’이라는 한자어만 보더라도 ‘인간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다. 이번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는 비대면으로 인한 만남이 줄어 들고, 사람과 살가운 접촉도 줄어만 간다. 겨우 대면하는 것이 스마트 폰이나 텔레비전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만난다. 갈수록 소외될 것이다.
제주도의 돌담이 센 바람에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돌과 돌 사이에 틈이 있어서란다. 아무리 사회적 거리두기라지만 그 거리 사이에는 틈과 틈이 있게 마련이다. 돌 사이로 통과하는 바람처럼 틈과 틈 사이의 마음의 거리를 통해야 할 것이다. 마음은 늘 무선(無線)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다만, 충전이 문제이긴 하다.
“여보, 띄어서 앉아! 우리도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해야 해?”
집사람은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소리로 들렸는지 피식 웃기만 한다. 내가 말 같지 않은 거리두기를 했나 보다. 늙은 부부란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존재가 아닌가? 가끔 가다가 등 긁어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여보, 내 등 좀 빨리 긁어?”
등을 긁어주기는커녕 효자손을 덜렁 내동댕이치고 휭하니 나가버린다. 이게 우리 부부의 신종 사회적 거리두기인가 보다.
차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뒤에서 “정○○!” 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 여기서 내 이름을 부를 사람이 없는데….’ 하고 뒤를 돌아다보니 자그만 여자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집사람이었다. ‘백○○, 많이 컸다.’ 하기야 반려자(伴侶者)란 벗 같은 사람이 아니던가. 나도 요즈음은 아내를 부를 때 “백○○!” 라고 이름을 부른다. 이게 요즘 우리 부부의 아내와의 거리다.
첫댓글 ㅎㅎㅎ
30 만 킬로미터.
@@@ 거리를 거닐며 @@@
아주 오랜만에 남도의 맛을 찾아 딸네 부부가 진도와 완도를 다녀왔습니다.
진도자연휴양림과 완도자연휴양림에 머물며 남도의 음식 맛을 좀 찾아보았습니다.
상록의 푸르름이 더해지는 6월 초입은 또 다른 거리를 좁히기도 합니다.
'딸 같은 며느리, 아들 같은 사위'의 거리두기가 있는가를 주억거리며'...
짙어지는 신록의 계절을 건강하게 지내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