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 알을 품는 자리
봄이 오는 길목이다. 내가 길을 나설 때 어디 먼저 정해둔 행선지가 없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하염없이 걷는다. 지나가는 겨울엔 창원 근교 산자락 둘레 길을 자주 걸었다. 틈틈이 낙동강 자전거 생태탐방로도 내가 걷기 알맞았다. 한 달 내내 하루 이삼십 리는 족히 걸었으니 총연장은 천 리를 넘지 싶었다. 방학이 끝난 이월에도 시간이 나면 길을 나서 어디든지 뚜벅뚜벅 걷고 있다.
구산면 난포는 난중일기에 남포(藍浦)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진해만은 오염 안 된 푸른 바다였으리. 푸른 바닷물의 갯마을이라 쪽빛 남(藍) 개 포(浦)였다. 주민들은 마을 뒤 봉화산 지형이 거북이가 알을 품은 형상이라고 난포(卵抱)라 불렀다.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일본은 쪽빛을 남루할 남(藍)에 개 포(浦)로 변경시켰다가 현대에 와 옛 지명 되찾기 일환으로 난포마을을 되찾았다.
바로 앞 문단은 난포 현지에서 채록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근거에 따랐다. 구산면사무소 홈페이지 지명유래 자료를 바탕으로 했다. 나는 이 자료를 접하기 전엔 난포가 따뜻할 난(暖)에 개 포(浦)를 쓰리라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가졌느냐면 남쪽 바닷가에서 남향의 포구 마을이라 다른 곳보다 더 따뜻할 동네였기에 그렇게 믿었다. 엉뚱한 내 유추는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난포는 반동삼거리에서 양평마을 너머 갯마을이다. 난포에서 심리를 거친 끝 마을이 바다낚시터로 유명한 원전이다. 나는 원전까지 해안선 따라 몇 차례 걸었다. 최근에 원전의 벌바위 둘레 길도 걸었다. 아트막한 산에 벌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벌바위로 불렸다. 엊그제 봉화산을 올랐다가 난포에서 옥계까지 해안선에 임도가 개설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만 시간이 모자라 들리지 못했다.
이월 둘째 주 토요일 아침 마산역으로 나가 구산 갯가 원전으로 다니는 62번 농어촌버스를 탔다. 밤밭고개를 넘어 현동 검문소에서 유산 삼거리를 지났다. 바람재를 넘으니 구산면사무소가 있는 수정이었다. 나는 올해 들어서 입춘 이후 두 차례나 들렸다. 한 번은 죽전마을 들머리서 쑥을 캐면서 노란 양지꽃을 발견했다. 그 뒤 봉화산을 올랐다가 옥계마을 거쳐 안녕 갯가를 걸었던 적 있다.
내가 탄 농어촌버스는 수정에서 안녕을 돌아 옥계로 갔다. 버스는 그곳에서 되돌아 나와 반동삼거리를 거쳐 난포와 심리를 거쳐 종점 원전까지 다닌다. 나는 그림 같은 포구 마을인 옥계에서 내렸다. 현지인 아낙이 한 명 내렸고 나는 낯선 이방인이었다. 옥계는 엊그제도 지나갔지만 예전에도 몇 차례 들려 지형지물이 익숙했다. 마을 안길을 지나 볕바른 언덕으로 올라가 산기슭을 따라 걸었다.
묵정밭 매실나무는 꽃망울이 몽실몽실 부풀어 갔다. 그 곁의 산수유나무에선 노란 꽃망울이 부풀어 연방 꽃잎을 펼칠 기세였다. 인적 드문 산자락으로 찾아간 보람은 산수유 꽃망울에 있었다. 산수유 꽃망울을 폰 카메라에 담아 놓고 되돌아 나오니 밭둑에는 자주색 광대나물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마을 안길을 빠져나와 폐교가 된 옥계 분교장 터를 지나니 별장횟집이었다.
행정 당국에선 지난해 가을 별장횟집부터 해안가 따라 임도를 새로 뚫어 놓았다. 임도 가장자리엔 황매화와 남천을 비롯한 여러 종류 나무를 심어 토사가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해두었다. 해안선 산모롱이를 돌아갈 때마다 진해만과 그 뒤로 둘러친 산세가 훤히 드러났다. 뒤돌아보니 합포만과 마창대교가 아스라했다. 해안가 임도는 난포까지 연결되지 않고 불과 산허리에서 멈추었다.
임도가 끝난 지점에서 희미한 등산로 따라 갯가로 내려섰다. 감은사지 앞 문무대왕 수중릉 같은 암반이 드러났다. 마침 물때가 썰물이라 바위까지 물길이 열러 걸어서 가 볼 수 있었다. 멀리 아득한 수평선 너머 거가대교 연륙교였고 바로 건너는 심리로 원전 가는 들머리였다. 다시 갯가로 나와 볕바른 곳에 돋아난 쑥을 몇 줌 뜯고는 해안선 따라 걸었다. 그곳이 내가 목표한 난포였다. 15.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