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한국영화에 대하여 언급하거나 몇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영화 제작환경은 겉으로 드러난 것을 비추어보면 정부의 검열과 관객의 외면이라는 이중고를 면치못하고 있다. 제작환경의 열악함은 제작 분위기를 위축시키는 정도의 위력을 발휘했지만 완성도있는 작품생산까지는 막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실례가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1974)과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1975), 이만희의 <삼포가는 길>(1975) 그리고 김호선의<영자의 전성시대>(1975)라는 쟁쟁한 영화들이 70년대에 생산된 한국영화라는 점이다.
제작환경의 열악함과 완성도 높은 영화의 생산이라는 두 가지의 상반된 상황이 70년대 한국영화를 규정하는 모호함의 정체다. 영화평론가 양윤모는 1970년대 한국영화의 제작환경을 고려하여 한국영화의 특성을 아주 우울하게 진단한 바 있다. 그는 70년대 한국영화의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있는 발언을 했다.
"대중문화의 부각으로 자본주의의 상품논리에 영합하여, 소비적 ·쾌락적·비현실적인 화면과 연기자의 인권을 값싸게 처리하는 것을 패턴화한 성적인 영화를 대량생산했다. 대중의 취향조작에 있어 이성적이기보다 비합리적인 감정에 호소하여 탈의식화를 유도하여 체제 유지에 봉사했다."(양윤모, 1986: 73)
"정책의 강력한 통제가 미치지 않는 자율적 영화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책의 시녀로서, 상업적인 영화작업으로서, 유신체제 이념구현의 범위 내에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한국영화는 확실히 영화의 힘을 상실했다. 그리고 영화의 경제학, 영화의 정치학, 영화의 미학적 측면에서 무비, 필름, 시네마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70년대의 한국영화는 정책의 결과에 좌우되어온 꼭두각시 놀음에 불과하지 않았는가하는 의혹을 살 여지가 있는데, 물론 영화의 독자성을 추구하고 그것을 위해 저항해온 흔적이 없지 않으나 차후에 본격적으로 거론키로 하면서..."(양윤모, 1986: 73)
양윤모에 의하면 70년대 한국영화는 '상품논리에 영합한 성적인 영화'와 '유신체제 이념의 구현을 위한 체제유지용 영화'가 주류를 형성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화의 독자성을 추구한 영화'들이 생산되어졌다.
위의 주장을 토대로 하여 70년대 한국영화 제작환경의 열악함과 완성도 높은 영화생산이라는 상반된 상황을 검토해 볼 때 흥미있는 사실이 도출된다. 우선 제작환경의 열악함은 '상품논리에 영합한 성적인 영화와 유신체제 이념의 구현을 위한 체제유지용 영화'를 대량생산할 토양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에서 일정한 완성도를 보인 소수 작품의 출현은 바로 '영화의 독자성을 추구하고 그것을 위해 저항해온 흔적'의 산물로 여겨진다. 70년대에 완성도 높은 영화생산은 바로 제작환경의 열악함을 극복하고 영화의 독자성을 추구하려했던 일군의 영화감독들의 정신이 성취한 산물로 여겨진다. 그 중심에 영화감독 하길종이 서 있었던 것이다.
70년대에 존재한 한국영화의 새로운 흐름은 영화계의 두 흐름 속의 한 갈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영화의 독자성을 추구하는 일군의 작가군 형성이라는 집단적 대응으로 가시화 되었다. 그 흐름의 중심에 하길종, 김호선, 이장호와 홍파, 변인식을 중심으로 결성된 '영상시대'가 놓여있었던 것이다. 70년대 한국영화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흐름에 대한 선언적 입장은 「영상시대」에 실린 평문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표면화되었다.
영상시대의 대표적인 논객으로서 하길종 감독은 1977년 창간된 「영상시대」에 '새시대·새영화·새정신'이라는 장문의 영화론을 발표하였다(하길종, 1977). 하길종의 영화론은 이후 그의 영화 작업을 조명해보는 데 의미있는 단서를 제공해준다.
"새 世代 映畵의 기능은 영화가 대중의 기호라는 점에서 <기본적 興味>를 준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단지 영화적 <재미>를 통해 스토리를 서술하는 일차적인 차원을 떠나서, 새세대의 영화는 인간의 가치관과 기존의 모랄을 재고하고 날카롭게 현실을 관찰하도록 대중을 선도하는 힘이다." (28쪽)
"한 社會에 있어서 사람이 사회가 제공해 주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일 수 있듯이 영화도 완성된 작품자체가 사회학적 역할연기자(role performer)로서 행사할 때 영화는 비로소 그 가치체계를 찾게된다." (33쪽)
"그러면 영화와 영화인의 역할은 무엇이며, 이것이 사회적 가치체계와 규범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관객(대중)이 영화미디아에 요구하는 기대양식으로 표현된다. 그들(관객)은 영화가 오락을 목적으로 하던, 교육 또는 순수창작행위를 목적으로 하던 우선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통해서 제작자의 의도나 관객의 의도가 합일될 수 있는 영화의 역할을 기대하면서 임의대로 영화관을 찾는 것이다. 역할 기대 못미치면 관객은 짜증/외면, 방화의 불황은 이러한 척도에서 영화가 없기 때문..."(34쪽)
"한국영화의 타성적 인습을, 도식적 드라마투루기를, 테크닉의 빈곤을 영화미디어의 보수적 가치관을 우리의 새세대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34쪽)
"영화작가는 거시적으로 앞을 내다보는 눈(眼目)과 현실을 투시해야하는 詩魂이 깃든 見者로서의 냉철함을 절대적인 창작의 무기라고 확신해야한다고 본다. 영화는, <현실의 거울>인 것이다. 때문에 영화인은 개성적 경험을 통해 영화언어의 수단을 빌려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균형있는 영적 시스템을 창조해야하는 것이다.
솔제니친이 밝혔듯이 창작인은 세계에 대한 아름다운 혹은 추악한 행위를 알고 있으므로 이를 날카롭게 알릴 용기와 힘(표현능력)이 있어야함은 너무나도 분명한 상식론이다. 이러한 상식론에 입각한 영화정신, 그 정신을 기초로 한 영화가 바람직한 새세대의 영화라는 데 이론이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한다."(35쪽)
위의 발언을 참조하여 정리해볼 때 하길종의 영화론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새세대는 기존의 한국영화의 타성적 인습과 도식적 드라마투루기와 테크닉의 빈곤과 보수적 가치관을 배척한다. 두 번째, 영화의 기능은 기본적 흥미제공이라는 일차적 기능과 현실에 대한 비판 능력과 대중을 선도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세 번째, 영화인의 덕목은 세계에 대한 아름답거나 추악한 현실을 자각하고 알릴 용기와 표현능력을 겸비해야한다.
하길종은 한국영화계는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영화가 부재하다는 다소 성급한 진단을 내렸다. 그는 기본적 흥미라는 상업적 속성을 일차 긍정하면서 현실의 비판기능과 대중 선도기능이라는 소박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입장을 영화론 속으로 편입시켰다. 그의 영화론은 예술로서의 영화(현실의 비판과 대중의 선도)와 산업으로서의 영화(관객에게 기본적 재미 제공)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는 의욕을 표명한다. 아울러 행간의 의미를 고려해 볼 때 그의 무게중심은 현실 비판과 대중 선도라는 예술로서의 영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조금 더 엄밀하게 규정하자면 세계에 대한 미추를 폭로하고 관객에게 올바른 현실을 자각할 수 있게 하는 목적성을 담보하는 기능까지 수행해야한다는 소박한 리얼리즘의 정신을 새시대의 영화좌표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그의 영화에 대한 태도는 영화의 상품적 속성을 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영화의 예술적 속성을 강조하고 실천하려했다. 이 같은 영화 예술에 대한 사고는 초기작품을 통해 분명하게 목격되고 입증된다. 그는 첫 작품 <화분>(1972)과 <수절>(1973)에서 스스로의 예술관을 표현하려 시도한다.
신강호는 하길종의 작품세계를 예술적 영화와 상업적 영화로 구분하여 전자에 <화분>, <수절>, <한네의 승천>(1977)을 들고 상업적 영화로 <바보들의 행진>(1975), <여자를 찾습니다>(1976), <속 별들의 고향>(1978), <병태와 영자>(1979)로 분류하였다(신강호, 2000: 309). 하길종에 대한 본격적인 조명을 시도했던 유정숙도 이미 신강호의 입장과 별반 다를 바 없이 '1기는 예술성이 돋보이는 것으로 <화분>, <수절>, <한네의 승천>'을 들었으며, '2기는 상업적 성공을 거둔 계열로 <바보들의 행진>, <병태와 영자>, <속 별들의 고향>'으로 구분하였다(유정숙,1994:14).
이 분류는 논의 편의상 분류한 기준이기는 하나 상업적 고려보다 표현하려는 감독의 의지가 우세하게 작용한 작품 군들이 초기에 등장했다. 이 같은 입장에서 볼 때 초기작 <수절>과 <화분>은 예술로서의 영화에 근접한다고 분류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하길종 감독의 초기에 보여주었던 영화예술에 대한 지향은 한 두 작품이 소수관객의 관심과 다수관객의 외면이라는 상반된 반응을 받게되었다.
그의 후기작에 속하는 <바보들의 행진>과 <속 별들의 고향>으로 넘어오면서 감독의 관심은 자의식적인 연출력을 자제하고 관객과의 소통 쪽으로 관심의 방향을 선회한 듯 보인다. 두 작품은 다수 관객의 환호와 소수 논자의 냉담함이라는 반응을 얻어냈다. 그 냉담함의 정체는 예술성의 퇴색이거나 상업주의로의 투항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과 <속 별들의 고향>을 단지 상업적 고려에 의한 작가적 타협의 산물로 규정하기에는 재고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영화에 대한 평가는 흥행의 결과라는 산업적인 고려도 무시 못할 부분이지만 작품 자체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의 작업 역시 경중을 가늠하는 귀중한 작업의 하나임에 분명하다. <바보들의 행진>과 <속 별들의 고향>은 관객의 환호를 받은 작품이지만 하길종 감독의 자의식과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연출방식이 유지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텍스트로 여겨진다. 두 작품은 흥행 성공이라는 결과를 지나치게 부각시켜 상업적 코드에 충실한 영화로 치부되기 보다 오히려 관객의 눈높이를 맞추기와 자기 목소리 내기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룬 영화군이라는 평가를 내릴 여지도 있는 것이다. 두 영화에 대한 재론은 그동안 정당한 평가로부터 소외되는 부분을 재검토한다는 차원에서 나름의 의미있는 작업으로 여겨진다.
이 영화들은 관객에게 기본적인 재미의 제공(흥행 성공)과 감독이 바라보는 현실에 대한 일정정도의 비판기능을 수행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하길종 감독이 지향한 두 가지를 성취하려는 노력의 흔적을 목격할 수 있는 흥미로운 텍스트로 부각된다. 필자는 하길종 감독의 영화에 팽만한 낭만성과 주인공들의 도주의 행각과 70년대 한국영화를 지배했으며 2001년 현재까지도 유효한 죽음의 활용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작품세계를 살펴보도록 한다.
2. 고래를 잡으러 간 낭만주의자의 행적
낭만주의자들은 현실의 공간에 거주하지 못한다. 현실은 견고한 금을 긋고 금 안에서의 안주를 요구하지만 그들은 금밖의 또 다른 현실에 이미 눈길이 머물고 있다. 현실의 금 안에서는 금밖의 현실에 대한 동경으로 가슴이 끓어오르고 선을 벗어난 곳에서는 다시 고향으로눈 길을 돌리는 정신적 유목민이다. 근대인의 표상 중의 하나인 경계를 벗어나려고 끊임없이 탈주를 시도하는 유목적 사유 역시 낭만주의자의 후예이자 낭만성의 한 징후로 여겨진다.
70년대의 한국영화감독 하길종에 대해 수많은 규정들이 있어왔다. 필자는 하길종 감독의 영화세계를 한 줄로 줄이라는 주문을 받는다면 이렇게 말하고싶다. 하길종 감독의 영화세계는 '정신적 유목민들이 미적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낭만적 행각으로 점철되었다'라고 규정하고싶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낭만주의자와 닮아있다.
쉴러는 낭만주의자를 귀향하고 싶어 안달이 난 국외추방자로 명명하였다. 낭만주의자는 '목적도 끝도 없는 방랑, 찾으려야 찾을 수 없고 찾아져서도 안되는 '푸른 꽃', 그리고 찾으면서도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고독' 등을 입에 물고 다닌다(하우저, 2000: 227). 낭만주의자들은 고향과 알 수 없는 곳에 대한 그리움으로 현실의 삶이 지옥과 같다. 낭만성이 강할수록 현실 속에서 절망의 강도는 더욱 강해지는 법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에서 '동해로 고래를 잡으로 간다'는 영철의 발언은 낭만주의자의 외침으로 읽을 수 있다. 영철의 발언은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없는 푸른 꿈같은 고래를 찾으면서 서울이라는 공간과 70년대라는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 것이다. 영철은 감독 스스로 자신의 분신이라고 밝힌 바 있다.
"<병태>가 최인호가 체험한 그의 대학생활의 인물이라면 내가 겪은 대학생, 즉 <영철>이라는 인물을 설정하여 두 사람의 우정과 꿈을 그려보자는 발상이었다. ..중략... 나는 동해바다로 가서 고래를 잡겠다고 떠나 결국 자살하고 마는 다른 한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의 젊은이들의 꿈과 좌절, 그리고 현실을 묘사할 결심이 섰던 것이다." (139쪽)
병태와 영철이 꿈꾸는 꿈의 항목은 참으로 낭만적이다. 그들의 행적 역시 70년대의 대학 풍경의 일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영철과 영자와 순자와 병태는 늘 술을 마신다. 술자리에서 토로한 말에 의하면 영철은 우등생이 아닌 열등생의 범주에서 살아왔다. 그의 이력은 실패로 점철되어있다. 그가 수립한 패배의 기록은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입시 실패와 대학입시의 실패와 반칙을 사용한 입학이다. 그리고 그의 군대나 가고싶다는 바닷가에서의 푸념은 신체검사 불합격으로 또 다시 좌절된다.
그는 스스로 바보라고 한다. 영화의 제목인 <바보들의 행진>도 병태와 영철이라는 바보들의 청춘을 다루었기에 자연스러워보인다. 영철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피운 담배를 입에 넣었다 뺏다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철은 꿈이 있다. 그 꿈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다. 돈은 빨뿌리(담뱃대) 장사를 통해 벌겠다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한다. 그가 개발한 빨뿌리는 비오는 날 담배를 피울 수 있게 작은 우산을 장착하는 것이다. 영철은 비오는 현실을 소수자인 스스로의 방식인 우산을 장착하여 대응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비오는 현실과 우산을 장착하려는 영철의 삶의 태도는 냉정한 현실과 일정한 거리/틈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자의 자격증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돈을 벌어 빨간 지붕으로 되어있는 양옥집을 구입하고 정원에 장미를 심으며 자가용도 구입한다는 것이 현실과 근거리에 있는 일차목표다. 그러나 보다 궁극적인 꿈은 동해바다에 있는 고래를 잡으러 가는 것이다. 주제음악인 송창식의 '고래사냥'은 영철의 심리상태를 보다 선명하게 대변하고 있다.
하길종 영화에서 낭만성의 징후는 곳곳에 만연해 있다. 우선 등장 인물들이 꿈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는다는 고집스러움과, 경비원과 경찰에게 검문을 받아도 긴장하지 않는다는 대범함의 항목을 들 수 있다. <바보들의 행진>에서 병태와 영철과 그의 친구들은 당구장에서 당구를 치다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뭐냐'는 질문을 한다. 영철은 믿음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신뢰를 시험하기 위해 신문팔이 소년에게 500원을 준 다음 거스름돈을 가져오는지 그냥 도망갈 것인가에 대해 내기를 한다. 소년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당구장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시계와 당구장에 앉아 기다리는 영철과 병태를 교차해서 잡아내며 초조함을 시각화한다. 영철의 친구들은 소년을 포기하고 당구장을 떠나려는 순간에 신문팔이 소년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신뢰를 확인해준다. 영철은 "늬놈이 날 구했다. 너는 우리의 형이다"라는 극찬의 발언을 한다. 영철은 한국에서 가장 필요한 믿음이 존재함을 입증해주는 소년을 통해 여전히 희망할 수 있는 사회를 우회적으로 관객에게 보여준다.
진실과 믿음에 대한 지속적인 하길종 감독의 관심은 <속 별들의 고향>에도 유효하다. <속 별들의 고향>에서 수경은 소매치기로 살아간다. 수경은 태어날 때부터 진실이 없었으며 문오에게 '이제는 따뜻한 진실을 갖고 살고 싶다'는 각오를 말한다. 수경이 가장 절실히 필요로 했던 것은 바로 진실이었다는 점은 영철과 동일하다.
소수자가 만들어낸 현실과 거리가 있는 꿈과 인간에 대한 막연한 신뢰가 낭만성의 징후였다면 꿈이 좌절된 낭만주의자의 출구는 현실로부터 벗어나려는 탈출의 시도와 달아나는 도주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 탈출의 경로와 도주의 몸짓은 예술이라는 그릇에 담길 때 아름다움이 발산되며 향유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낭만주의자는 현실의 절망감을 해소하기 위한 출구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탐색자이다. 흔히 탐색의 과정과 탐색의 결과는 바로 삶을 낭만화시키고 그 낭만화시킨 삶을 예술로 담아내어 미적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기도로 귀결된다. 삶의 낭만화는 정신의 자율성이라는 빛나는 성취를 이룩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과 낭만주의자의 기획에 편차가 지나치게 커서 조율이 안될 경우에는 세상에 대한 생경한 공격성이 분출되거나 알콜과 마약에 탐닉하는 도피의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속 별들의 고향>에서 병을 방치하여 죽어가는 문오와 <바보들의 행진>에서 술에 취해 횡성수설하는 영철과 병태의 행위는 순진한 한 예에 불과하다.
현실에 대한 낭만적 기획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격렬함이라는 야성적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기도 한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에서의 절규 역시 격렬함의 발산의 대표적 사례다. 야성적 감정의 날 것 그대로의 노출은 '낭만주의에 와서야 처음으로 예술은 인간 기록, 울부짖는 고백, 적나라하게 드러내놓은 상처가 되는 것'이라는 예술적 평가를 받기도했다.
하길종 감독의 영화에서 야성적 저항은 무모한 자극을 쫓는 야성의 발톱이 완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의 저항 방식은 기존의 방식을 패러디하는 장난스러움과 스스로 소수자가 되어 자신의 논리를 주장하는 고집스러움을 채택한다. 대표적인 장면의 예는 <바보들의 행진>에서 영철과 아버지, 영철과 경찰과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영철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는 영철에게 뭐하고 있냐고 묻는다. 질문은 요즘 근황에 대한 의문과 대학생활 열심히 하고있는가에 대한 점검과 질책성 발언이다. 영철은 "서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관습적인 언어/질문에 대해 의도적으로 질문의 본질을 회피하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는 뭐 하십니까"라고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부친은 "너하고 애기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영철과 동일한 동어반복을 보여준다. 영철은 아버지의 관습적이고 동어반복적인 간섭과 언어를 패러디하여 동일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어린이 같은 장난스러움을 보여준다.
또한 영철은 자전거를 자동차처럼 타고 도로를 활보하다가 경찰에게 도로에서 검문받는다. 그때 영철은 자전차(자전거)를 자동차라고 우긴다. 경찰은 '자전차'라고 강조하며 영철은 계속 자동차라고 고집부린다. 순자와 만날 때도 자신의 자전거를 자가용이라고 반복해서 명명한다. 영철은 대다수의 공인된 논리를 부인하고 스스로 바보임을 자처함으로써 소수자의논리와 사상을 관철시키려는 고집스러움을 보여준다. 하길종의 영화에 등장하는 낭만주의자들은 울분같은 야성적인 저항 대신 기존의 방식을 패러디하여 공격하는 완화된 저항방식과 스스로 자처한 소수자의 논리를 관철시키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들의 논리가 좌절되었을 때 그들을 좌절시킨 현실을 견디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현실로부터의 탈출이며 도주이다. 서구의 낭만주의자들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헛것인 푸른 꽃을 찾아나서는 정신적 유목민이었다. 하길종 감독의 영화에 나타난 낭만주의자들은 어떤 정신풍경을 보이고있는가. 그것은 바로 바보의 꿈을 좌절시킨 현실로부터 벗어나기이며 탈주를 꿈꾸는 자들의 좌절 행각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맥락에서 주인공들의 행적은 여타의 한국영화와 차이를 가지며 근대적 정신풍경과 근거리에서 오버랩된다.
병태와 영철은 미팅을 가다가 장발 단속에 걸려 경찰의 추격을 피해 도주한다. 이때 배경음악은 송창식의 '왜 불러'가 깔린다. 경찰이라는 공권력의 권위는 즐거운 미팅이라는 그들의 소박한 기대를 좌절시킨다. 이때 이들의 대응방식은 순순히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억압의 현장과 현실에서 도주하는 방식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육교 위에서 경찰에 포위된 영철과 병태는 그 시대의 자유롭고 싶은 젊은 이를 억압하는 표본적인 상황을 방영한다. 그리고 파출소에서 탈출하는 두 바보들의 도피행각은 하길종식 저항방식이며, 구속하려는 현실로부터 벗어나려는 한국적 낭만주의자들의 행적을 시각화한다.
바보들에게 현실은 권위에 굴종할 것을 강요하고 꿈 대신 규율의 준수를 요구한다. 바보들은 그 현실에서 대응하기 위해 낭만적인 꿈꾸기와 장난스러운 패러디와 스스로의 소수자 논리로 대응하나 결과는 현실의 벽에 좌초한다. 그들은 수긍하고 싶지 않은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도주하나 출구조차 막혀서 체념과 좌절로 점철되어 있다. 낭만주의자의 도주행각은 결국 현실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동해로 뛰어들거나(영철), 병들어 죽어가거나(문오), 군대로(병태) 편입해간다. 즉 현실적 낭만화 기획 실패는 장난스러운 저항과 실패한 도주로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현실 세계의 절망은 예술의 세계로 편입하여 낭만화시킨 현실로 가공되는 공정을 거쳐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 이 같은 공정을 통해 모든 예술 작품은 현실의 페허를 작품 속으로 편입시켜 예술품으로 대체시켜 미적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데 일조한다. 하길종 영화에 반영된 70년대 젊음은 푸르지 못하고 회색 빛 하늘아래서 늙어가고 일을 뿐이다. 하지만 두 편의 영화는 한국적 낭만주자의 좌절 행각이라는 하나의 풍경을 성공적으로 담아내어 미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감독의 의도에 어느 정도 부응한 작품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 같다.
3. 뛰는 자들은 결코 세상의 밖으로 탈출하지 못하고... 혹은 정신적 유목민의 좌절풍경
두 영화라는 프리즘을 들여다 볼 때, 70년대 한국의 젊은이는 도피를 꿈꾸었으나 '포충망처럼 펼쳐진 현실의 억압이라는 그물'을 결코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영철과 병태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도주의 길을 택한다. 그들은 '자전거를 타고 질주하거나 스트리킹'으로 출구를 모색한다. 하지만 탈출에 성공하지 못하고 영철의 자전거는 경찰의 단속에 걸리며 서울이라는 공간을 탈주했던 병태와 영철은 해안선의 금에 걸려 멈추고 만다. 그들은 현실적인 공간으로부터 도주를 시도했으나 경계의 선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고 만다. 뺨때리는 교수라는 폭력적인 권위에 대항하여 스트리킹이라는 행동을 통해 현실의 영토로부터 탈주를 시도했던 바보들(병태와 영철)은 해안선에서 우회하여 촘촘한 놀이기구 속에 서성거릴 뿐이다. 놀이기구가 구성하는 쇠창살 같은 포충망에 포섭된 두 인물은 '포충망처럼 펼쳐진 현실의 억압이라는 그물'에 갇힌 곤충같은 형상을 보인다. 즉 현실을 탈주하지못한 젊은이는 놀이기구에 서성이는 두 인물을 통해 시각적 의미망을 축조한다. 이 장면은 현실의 영토를 버리고 경계를 넘어서려는 도주의 시도와 그 도주의 행각이 새로운 영토에 착륙하거나 정주하지 못하고 좌절한 유목민의 자화상을 보여준 것이다.
현실 앞에 그들은 서툰 꿈과 낭만성을 무기로 저항한다. 하지만 그들에서 현실은 탈출의계기는 제공할지라도 탈출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탈출에 실패한 정신적 유목민들은 현실에 복종(병태의 군 입대, 수경의 정신병 치유)하거나 죽음이라는 방법(영철의 자살, 문오의 자살)으로 경계선를 넘어갈 뿐이다. 그들의 월담 행각 혹은 현실 탈주는 항복의 형태(군으로 투항)이거나 좌절의 포즈(자살의 선택)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극단적인 방식이 아니면 그들은 임시정류장에 서성대는 승객처럼 멋쩍게 떠돌고있을 따름이다. 떠돌기 아니면 자학하기는 미적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이전의 생경한 대응법이다. 실제 <바보들의 행진>에서 그들은 술에 취해 끊임없이 우리는 바보들이고 병신 쪼다라고 자학한다. 이 자학과 도주의 자장 속에 70년대 젊음의 불온한 기운이 서식하고 있다. 아울러 취했을 때 우리에겐 꿈이 있다고 읊조린다. 취할 때 발언하는 꿈은 주목을 요한다. 취한 것은 냉정한 현실의 감각을 상실하게한다. 현실과 거리를 둔 취한 상태에 꿈이 서식하는 공간은 바로 낭만성이 거주하는 자리이며 낭만주의의 영토인 것이다. 자학과 도주라는 현실적인 대응방식과 대척점에 두 바보들은 낭만성이라는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세워두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절망감은 그들만의 유토피아라는 맞은편의 영토건설을 통해 균형감각이 생성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이 꾸는 낭만적이며 소박한 꿈은 미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들의 내면과 닮아 있다.
반복되는 도주의 심리와 도주의 시도는 어떤 의미를 생산해내는가. 이는 하길종의 영화를 해독하는 하나의 열쇠를 제공할 주목할 만한 장면이다. 도주와 자학의 이분법에서 우선 한 축에 포커스를 맞춰보도록 한다. <바보들의 행진>에서는 대학의 캠퍼스와 거리에서 도주하며 <속 별들의 고향>에서는 집에서 수경이 도주한다. 그들은 왜 도주하려하는 걸까.
루이 알튀세는 근대 이전에 서구에서 가족과 교회가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SA: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라고 하였다. 하지만 근대로 이행해오면서 가족과 학교가 강력하게 개인을 구속하는 국가이데올로기장치로 작동했다고 한다. 이 장치들은 지배계급의 기득권 유지와 보호에 복무한다. 보다 강화된 기득권 유지 책략은 ISA와 억압적 국가기구(RSA: Repressive State Apparatuses)의 활용이다. ISA는 가족, 학교, 종교기구, 미디어, 시민단체 임에 반해, 보다 통제력과 강제성이 강하게 작동되는 경찰, 군대, 법원은 RSA다. 두 기구 모두 주어진 사회규범의 준수와 기성의 질서에 순응을 요구한다.
하길종 감독의 두 영화에서 가족(아버지)과 학교(교수)라는 근대적 ISA와 경찰(장발단속하는 경찰과 자전거를 세우는 교통경찰)로 대표되는 RSA가 소수자인 바보들을 길들이려한다. 질서와 규율 준수의 요구는 그들은 권위적인 폭력과 억압으로 해독되며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도주라는 방식으로 저항하고있는 것이다. .
영철과 병태가 잘 차려입고 미팅을 가다 장발 단속하는 경찰을 만나 도주하거나 교정에서 교수에게 뺨을 맞고 스트리킹을 시도한다. 그리고 도주의 연장선에서 병태는 입영열차에 몸을 싣고 나서 대학으로부터 벗어나 군대로 도피한다. 그들은 견고한 억압의 시대와 직접적인 통제기구인 ISA와 RSA라는 감시의 그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이 자유는 유목적 사유를 통해 그 출구를 암시 받게된다. 들뢰즈에 의하면 유목론 nomadology은 '도망치는 사상, 스스로 소수자가 되어가는 사상, 혹은 정주적 발상을 넘어서 항상 경계 쪽으로 새로운 대지를 찾아 움직이는 사상'이다(아시다 아키라, 1999: 86).
하길종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문호와 병태와 영철은 스스로 바보라는 주변인으로 규정한다. <바보들의 행진>에서 영철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입시에 실패한 과거의 체험을 근거로 바보론을 펼친다. <속 별들의 고향>에서 수경(장미희 분)은 "전 바보예요. 아저씨도 바보, 우린 바보"라고 말한다.
스스로 소수인 바보들이 학교라는 정주지를 이탈하여 도주해가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존재하지 않는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동해바다와 입영열차와 죽음(문오)이다. 동해바다는 영철이 뛰어든 죽음의 장소이며 입영열차는 대학의 자율성을 거세한 군대라는 규율사회로 투항하는 것이며 젊음과 자유의 죽음에 대한 은유다. 그리고 문오의 죽음은 보다 선명한 직설법으로 다가온다.
도주가 현실로부터 멀어지기라면 질주라는 대척점이 존재한다. <바보들의 행진>에서 어눌한 영철은 순자와 데이트 신청에 성공하자 기뻐서 뛰어간다. 영철의 질주는 삶을 절대 긍정하는 환희의 다른 영상적 표현이다. 경찰서에서 탈출한 병태와 영철의 질주 역시 환희의 영상적 표현이다. <속 별들의 고향>에서도 수경은 정신병원에서 퇴원조치를 받을 때 춤추듯이 뛰어간다. 하길종은 현실로 멀어지는 도주와 희망을 품고 현실 속으로 잠입해가는 질주를 양축에 설정함으로써 정서적 균형을 꾀한다. 하지만 늘 추는 좀 더 비중 있는 도주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점 역시 하나의 특징적인 풍경을 만든다.
위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유목적 사유는 억압의 시대와 사회로부터 도피하는 것이지만 그 도피의 끝이 죽음이라는 점에서 하길종 감독의 세상에 대한 환멸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유목의 사유가 정주적 발상을 넘어서 새로운 영토를 발견하지 못했고 도주의 도상이라는 현재진행형이 아니라는 점에서 절망의 풍경에 근접해있다. 하길종은 유목적 사유를 통한 현실 넘어서기를 시도했으나 그의 절망적 현실인식으로 인해 새로운 대지로의 이주라는 진일보한 영토를 답사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길종 영화가 담보한 근대적 사유와 영상 세계는 좌절한 도주자들의 초상으로 인해 정체의 신호등 앞에 머물러있는 것이다. 그의 도주 행각이 실패한 자의 초상이라는 과거완료형이 아닌 '<따라잡고 뛰어라> 경주에서 추월당했다고 하더라도, 금방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보고 말도 안되는 방향'(아사다 아키라, 1999: 33)으로 달리는 무모한 도주의 현재진행형을 보여주었다면 그의 미적 유토피아는 여전히 공사중이었을 것이다. 그는 늘 '미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정신적 유목민의 좌절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하지만 이 좌절의 기록도 진정성과 열정이 뿜어나올 때 아름다운 감동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카뮈는 자신의 처녀작 서문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었다. 그는 '니체, 톨스토이, 또는 멜빌이 품었던 야망은 그들의 실패 자체 때문에 내 가슴을 뒤흔들어 놓는다. 내심 깊은 곳에서 나는 결국, 가장 가난한 자의 삶이나 또는 정신의 위대한 모험을 대할 때만 비로소 머리가 숙여질 따름'이라고 했었다(카뮈, 2000: 24-25). 하길종의 영화가 뿜어내는 힘은 현실의 환멸을 견디는 방법으로 미적 유토피아를 꿈꾸다 실패한 자들의 정직한 기록이라는 점에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지 살펴보는 것 역시 미룰 수 없는 과제로 여겨진다.
4. 죽음 코드의 전복적 사용, 좌절한 예술가의 도피처
영화탄생 이후 제작자가 관객의 주머니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영화제작경향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중의 하나는 흥미로운 볼거리를 찍어내는 방식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관객을 울리거나 웃기는 일에 공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영화 역시 예외없이 관객의 웃음과 눈물에 포커스를 맞추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1970년대 한국 멜로드라마는 눈물의 정서를 자극하기 위해 상업적인 코드로 여성의 불행과 죽음을 주로 사용해왔다. 여성의 불행한 전락은 금기 위반에 대한 처벌 대상의 역할을 수행해왔기 때문에 장르적 요구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더 검토해 보면 영화내적 논리로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의한 희생양과 금기위반에 대한 처벌이라는 표면적인 사실이 부각되지만 이와 함께 그 이면에는 남성관객이나 남성주인공을 우울에 빠뜨리려는 은밀한 기도가 감지된다. 남성관객입장에서 볼 때 착한 여주인공의 불행만큼 안타까운 일은 많지 않다. 남성 주인공 역시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짐 혹은 사랑하는 여성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이다. 남성주인공과 동일시하던 관객 역시 여성의 불행과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조금 그럴 듯하게 말하자면 남성은 여성과 달리 단선적이며 직선적인 시간관을 지니기 때문에 과거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과거는 남성의 기억에 의해 복원되거나 반추되지만 늘 낭만적인 추억의 대상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늘 과거는 화려했던 기억 혹은 좋았던 시절로 채워진 유토피아는 아니었다는 사실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남성은 잃어버린 과거의 자체에 대한 슬픔과 영화로웠던 옛 시절에 대한 아쉬움이 공존하면서 안타까움을 배가시킨다. 따라서 그리운 대상의 부재에 대한 상실감에서 비롯된 감정인 우울은 남성관객과 남성 주인공에게 결코 남의 일이 아닌 그들만의 특수한 정서를 자극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우울melancholhy은 남성의 특권적인 표현수단'이며. ' 남성들에게 예술적 창조의 조건을 제공'해온 셈이다(문재철, 2001: 346). 여성의 불행과 죽음 혹은 헤어짐이라는 관습적인 결말은 남성 주인공과 남성관객에게 그리움의 대상 상실감을 제공하여 우울을 환기시켜 슬픈 정서를 유발하는 특효약이된 것이다. 이 같은 차원에서 70년대 한국 멜로드라마는 여성의 불행과 죽음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마음껏 휘두르면서 남성관객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하지만 하길종 감독이 연출한 <바보들의 행진>과 <속 별들의 고향>은 여성의 불행과 죽음이라는 관습과 거리를 두고 있다. <바보들의 행진>의 영자와 <속 별들의 고향>의 수경은 대단히 적극적이다. 영자는 병태를 이용하여 어려운 과제물을 해결하거나 수경은 문오의 지갑을 훔쳐서 달아나거나 동료 소매치기 남자에게 알몸으로 위협하는 태도를 통해 상황에 종속된 여성의 이미지를 탈각시킨다.
<바보들의 행진>의 영철은 고래사냥의 음악에 맞춰 동해로 뛰어들어 자살을 기도한다. 병태는 영철과의 질주가 무위로 돌아가자 군입대를 결정한다. 병태의 입대는 자유로운 공간인 캠퍼스에서의 도주를 의미하며, 이는 곧 낭만적으로 꿈꿀 수 있는 자유로운 청춘시절의 종말로 해독할 수 있다. 군용열차에 승차한 병태에게 대학은 '지금 이곳'이 아닌 기억이라는 다리를 건너야 도달 할 수 있는 '그때 그 곳'에 존재하는 공간으로 변화된다. 대학은 병태가 떠나온 공간이며 가슴저린 노스탤지어를 동반하여 반추할 과거의 추억에 편입되고 있는 것이다. 대학은 이제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로 등기 이전한 것이다. 대학에서 추방은 군입대와 등호를 그을 수 있으며 이는 곧 철없는 대학시절과 결별을 의미한다.
병태의 입대로 가시화되고있는 낭만적인 꿈꾸기의 종말은 곧 한 낭만주의자의 좌절 혹은 죽음으로 의미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주인공의 자살 혹은 상징적인 죽음은 하길종 감독 스스로의 자화상이라고 밝혔던 영철의 죽음을 통해 보다 선명한 좌절감의 영상적 표현으로 해독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속 별들의 고향>에서 문오는 병들어 죽어간다.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은 경아의 죽음과 이를 우울하게 추억하는 남자주인공 문오의 정서에 관객이 감정이입되었다. <속 별들의 고향>에서 문오는 '지난 겨울에 죽은 예쁜 아가씨'인 경아를 추억하면서 살고 있다. 문오는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이 유발한 우울과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향수에 절어 살고 있다. 수경(장미희 분)은 경아라는 과거의 지배 아래있는 문오의 가슴을 열고 들어온다. 문오와 수경 사이에 태어난 이이 이름이 경아라는 점은 과거와 접맥된 문오의 삶을 새삼 확인 해 볼 수 있다. 문오는 정신적인 불안감으로 가출을 시도하는 수경을 데려온다. 그리고 수경은 "전 바보예요, 아저씨도 바보, 우린 모두 바보예요"라는 말을 한다. 이는 <바보들의 행진>에서 두 주인공인 영철과 병태라는 바보들과 동일하다. 영철은 순자와 영자에게 '제힘으로 해낸 것이 하나도 없는 바보'라고 말하고 병태는 우리는 바보 쪼다라고 동조한다. <바보들의 행진> 제목도 영철과 병태라는 두 바보의 이야기임을 분명하게 제시하고있다.
그렇다면 두 영화에서 영철과 병태, 그리고 문오는 바보라고 명시한 공통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남자주인공이면서 현실에 저항하거나(영철과 병태) 저항력을 잃고 서서히 죽어가는(문오)이다. 이는 바로 <속 별들의 고향>불안하게 산부인과 응급실 복도를 서성이는 인물로 출연한 하길종 감독의 페르소나이며 자의식의 표출로 읽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여기서 하길종 감독의 영화에 나타난 남성 등장인물의 죽음이 주는 70년대 한국영화사의 위상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바보들의 행진>은 저항하다 좌절하고 <속 별들의 고향>은 깊은 병에 걸렸지만 치유하려는 노력보다는 방치하여 자살 같은 죽음을 맞이한다. 하길종 영화의 특징은 70년대 한국영화에 나타난 관습적인 여성의 불행과 죽음이라는 결말관행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자의식과 목소리를 담은 남성 주인공의 죽음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이는 70년대의 상업 코드인 여성의 불행과 죽음을 통한 우울의 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자의식이 투영된 인물의 행적과 죽음을 통해 동시대의 영화인으로서의 갈등과 좌절감을 영상화했다는 변별점을 보인다.
1970년대 한국의 주류영화와 영상시대 혹은 하길종 감독과 70년대 한국영화감독의 변별점은 그의 선언적 주장인 영화론보다 그의 영화작업의 산물인 작품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사적인 의미를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영철의 죽음과 문오의 죽음은 70년대 여성의 불행과 죽음이라는 관습적 상업코드와 차별화하여 감독의 자기반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중의 함의를 보유한 것이다. 따라서 70년대 주류한국영화가 취한 여성 주인공의 불행과 죽음이라는 결말의 관행과 대척점에 남성 주인공의 불행과 죽음을 세워놓았다는 점에서 영화세계의 영역을 일부 확장한 셈이다. 하길종 감독의 영화 주인공들은 영화 속에서 새로운 영토로 진입하는데 실패했지만 감독은 미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정신적 유목민들의 좌절풍경을 카메라로 포획하여 70년대 한국영화의 새로운 지형을 일구어낸 것이다.
문학산(영화평론가)
☞ 참고문헌
문재철(2001), "향수 영화에 나타난 남성과 여성",「영화연구」16호(한국영화학회).
신강호(2000), "하길종 영화의 스타일 분석".「영화연구」15호(한국영화학회).
아르놀트 하우저(2000), 염무웅·반성완 역,『문학과 예술의 사회사』3, 창작과 비평사.
아사다 아키라(1999), 문아영 역,『逃走論』, 민음사.
알베르 카뮈(2000), 김화영 역,『안과 겉』, 책세상.
양윤모(1986), "70년대 상황과 한국영화의 갈등",「레디고」1집.
유정숙(1994), "하길종 감독 연구", 경성대학교 대학원 연극영화학과 석사학위 논문.
하길종(1977), "새世代·새영화·새精神―새세대 영화의 조류와 본질론을 중심으로",「영상시대」, 여름호.
첫댓글 뉘신지 말씀하오시면 등업시켜드리옵니다~^^
등급업 하였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