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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정답은 하나뿐입니다. 하느님의 품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오래전 젊은 시절, 마음 맞는 형제들과 의기투합해서 어설프기 짝이 없는 뗏목 하나를 만들어 바다로 나간 적이 있습니다. 낚싯대도 드리우고, 드러누워 하늘도 올려다보고, 참 좋았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좋은 시절은 늘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물살이 멈추는 정조 상태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썰물이 시작되면서 저희가 탄 뗏목이 떠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육지는 점점 까마득해지고 저희는 점점 큰 바다로 흘러가 몇 시간 동안이나 표류를 계속했습니다. 이러다 죽는가보다는 생각과 함께 점점 공황상태에 빠져드는 순간 작은 어선 한 척이 저희를 발견했습니다.
구릿빛 젊은 선장은 우선 저희를 안심시키더군요. “이젠 됐슈. 아무 걱정들 마유.” 그러면서 어선의 꼬리에 저희가 탄 뗏목을 묶어 안전하게 항구에 내려줬습니다. 그 젊은 선장의 모습이 얼마나 고맙고 멋있던지 마치 예수님을 뵙는 듯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 역시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던 중에 강한 맞바람을 만납니다. 하필 날까지 저물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새벽녘까지 노를 저었지만 배는 언제나 그 자리였습니다. 전문직 어부 출신인 제자들이었지만 탈진한 상태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습니다.
그 순간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제자들은 혼비백산해서 비명까지 질러댔습니다. 아수라장이 된 제자들의 배 위로 예수님께서 올라가십니다. 제자들을 향해 건네시는 한 말씀은 얼마나 따뜻했는지 모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참으로 위엄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빵과 물고기의 기적으로 당신의 메시아성을 백성들 앞에 확연히 드러내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물위를 걸으심으로써 당신의 초인간적 위대성, 당신의 신적 본질의 신비를 드러내는 현현(顯現)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이 순간 인생의 고해(苦海)을 건너가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도 동일하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갖은 우여곡절과 역풍 속을 헤쳐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옛날 제자들을 안심시켰듯이 우리의 마음도 안심시킵니다.
인간, 근본적으로 유약한 존재입니다. 쉼 없이 흔들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주님, 저희의 마음은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되었기에 당신 안에 쉬기까지 편할 날이 없습니다.”
결국 더이상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더이상 근심하지 않기 위해서 정답은 하나뿐입니다. 하느님의 품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느님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선장인 교회란 배에 승선하는 일입니다.
어두운 밤 갈릴래아 호수 위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현현은 큰 의미를 지닙니다. 유다 문학 안에서 깊은 물은 악의 세력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악과 어둠과 죽음의 정복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생명의 부여자로 자리매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의 물결을 당신 발 아래 두십니다. 그분의 옥좌는 광란하는 파도보다 높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분은 거센 역풍을 다스리실 능력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습니다.”(마르 6,5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을 통해 제자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고 보호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믿음은 환경을 다스리는 연습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신 후 물 위를 걸어 제자들의 배에 타서 폭풍우를 가라앉히신 내용입니다. 주님 ‘공현’대축일 다음이 나오는 이러한 복음들은 우리가 이렇게 공적으로 당신을 현시한 주님을 보게 되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런데 처음에 폭풍우와 물 위를 걷는 존재를 보고는 제자들이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었습니다. 마르코는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환경에 지배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리 많은 사람도 배고플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배부르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분과 함께라면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이 믿음으로 능력의 주님을 뵈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충남 예산의 한 17세 처녀가 19세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안타까워하며 위로했지만, 19세의 과부에게는 큰 시련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거울 앞에서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자르며, 이제 더 이상 동정의 말을 듣기 싫다고 결심했습니다. 자신만의 길을 찾기로 결심하고, 서울행 완행열차에 올랐습니다.
서울에서 처음엔 힘든 생활을 했고, 닥치는 대로 일하며 힘겹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는 부유한 가정의 가정부로 들어갔고, 성실히 일하면서 주인에게 신뢰와 인정을 받았습니다.
주인 어르신은 그녀에게 “무엇을 하고 싶냐?”라고 물었고, 그녀는 공부하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을 전했습니다. 주인은 그녀의 소원을 흔쾌히 들어주었고, 그녀는 숙명여학교 야간부에 입학했습니다.
그녀는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하며 최우수 학생이 되었고,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여자사범대학에서 학문을 닦았습니다. 26세에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하여 숙명여고 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해방 후, 숙명여자전문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취임한 그녀는, 나중에 숙명여자대학교를 창설하여 초대 총장이 되었습니다.
임숙재 총장은 제자들에게 항상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환경을 다스리세요.”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녀의 삶은 고난을 극복하고, 환경을 변화시켜 성공을 이룬 강한 의지의 예입니다. 임숙재 총장이 하고 싶었던 것은 공부와 교회에 다니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환경을 바꿀 수 있는 분이 함께 계심을 계속 믿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환경 탓하며 핑계 대는 사람은 자신과 함께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뵙지 못하게 됩니다. 능력을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1996년, 목포의 작은 사업가 조호연은 회사 회식 중 나이트클럽에서 부당하게 청구된 요금을 항의하다 지역 조직폭력배 목포 오거리파에게 폭행을 당했습니다. 직원들 앞에서 심하게 폭행당하고 굴욕을 겪었지만, 조호연은 오직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나이트클럽 사장을 직접 찾아가 사과를 요청했으나 또다시 폭행과 협박을 받았습니다. 굴하지 않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조직폭력배들은 그의 동생까지 공격하며 보복했습니다.
마지막 방법으로, 조호연은 전 재산을 들여 신문에 광고를 내고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호소했습니다. 광고는 폭력배의 만행과 공권력의 무능함을 폭로하며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김영삼 대통령은 강력한 조직폭력배 척결 명령을 내렸고, 목포 경찰은 대규모 수사를 통해 관련 조직원들을 체포하고 조직을 해체했습니다. 이 작전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조직폭력배의 몰락을 이끌었습니다.
조호연의 끈질긴 용기와 결단력은 불의를 향한 저항의 상징으로 남았으며, 한 개인의 노력이 사회적 변화를 이끌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조호연 씨는 대통령이 자기 편이라고 믿으니 조폭들이라는 환경에 굴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조호연 씨가 그렇게 약자인 자신을 보호해주는 대통령을 새롭게 만났듯이, 우리도 그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환경도 바꿔보려 해야 무한한 능력이신 그분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6,45-52: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행하신 다음 제자들을 재촉하여 당신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호수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풍랑과 맞바람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예수님 없이는 도무지 풍랑과 맞바람을 이겨내고 건너편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 말씀께서는 호수 건너편으로 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호수 위를 걸어 그들에게 가신다.
맞바람은 뜻하지 않게 맞게 되는 유혹과 곤경과 싸움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님께서는 풍랑과 맞바람에 뒤흔들리는 배 안에서 당신 제자들을 단련시키려 하신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분명히 물 위를 걸어오시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주님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그분을 알아 뵙지 못하고 겁에 질려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겁에 질려 소리치는 이들에게 다가가시어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50절) 하신다. 그분은 겁에 질린 그들을 이렇게 격려하시고 안심시키신다.
그분은 왜 나무에 못 박히셨을까? 우리에게 그분 겸손의 나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만으로 부풀어 올라 본향으로부터 멀리 쫓겨났다. 그 길은 세속의 풍랑으로 끊어졌으니, 나무를 타지 않고서는 도무지 본향으로 건너갈 수 없다. 그분이 몸소 길이 되셨다. 그 길은 호수를 건너가는 길이다. 당신이 호수 위를 건너가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분이 호수 위를 걸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처럼 호수 위를 걸을 수 없으니, 배를 타고 나무를 타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을 믿으면 도달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51절) 이처럼 우리도 세상 어려움 속에 있을 예수께서 함께 계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어떠한 역경이라도 이길 수 있으나,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그 어려움을 자기 힘으로 헤쳐나가고자 할 때 더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온갖 풍랑으로 뒤흔들리고 어지러울 때, 거기에 십자가를 모실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우리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성인 성녀들 또는 순교자들의 순교 모습에서 그들이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것이다. 빵의 기적을 체험하고 놀라움과 감탄으로 가득 찼던 제자들이 지금은 또 풍랑을 만나서 고생을 하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은총의 순간을 체험하지만, 또 역경을 만나면 그 은총의 순간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보다,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하고 자포자기한 풍랑을 맞이할 때가 많다. 이때 우리의 마음 안에 주님의 십자가를 모시도록 하자 그러면 그 풍랑은 가라앉을 것이다.
자연을 섭리하시는 권능을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시지 않겠는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분을 잊지 않고 그분의 은총의 때를 기억하며 다시 우리 자신을 가다듬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신앙생활이 너무 어렵다는 분을 종종 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냥 착하게만 살면 되는 것 아니에요?”
미사, 기도, 성경 읽기, 봉사활동… 등등 너무 어렵다면서 그 끝이 없는 것 같아서 포기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무슨 일이든 포기하면 그것으로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모르겠어도 계속 노력할 때, 분명히 변화되는 자기를 만나게 됩니다.
아는 신부가 장염으로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말합니다. 뭐만 먹었다면 바로 화장실 행이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물만 마셔도 화장실이 자기를 불러서 나중에는 힘이 쫙 빠져서 화장실 갈 힘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화장실에 계속 가게 되니, 물도 마시지 않고 또 음식도 먹지 않고 가만히만 있어야 할까요?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께서 이온 음료를 많이 마시고, 죽을 먹으라고 권했답니다. 먹고 싸고를 계속 반복하더라도 계속 먹고 싸는 과정에서 장에 남는 것이 생기면서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남는 것이 자기의 영양분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다 나에게 들어오지 않고 모두 빠져나가는 것만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면 더 큰 일 납니다.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계속 신앙생활을 하면서 빠져나가는 것도 있지만, 자기 안에 쌓이는 것도 많아집니다. 주님의 가장 큰 선물인 구원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얻는 것이 없다고, 또 누구가 미워서 하지 않겠다고 선언도 하지만, 자기 안에 쌓이고 있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베푸시고 기도로 밤을 지새우신 다음, 바람을 멈추시고 물 위를 걸으시어, 노를 젓느라 애쓰는 제자들의 배에 오르십니다. 제자들은 빵을 많게 하신 그분의 기적이 담고 있는 사랑과 권능의 신비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도 유령인 줄로 생각하며 비명을 지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탄 배에 함께 오르시어 그들의 두려움과 불안을 없애 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의 신비를 깨닫지 못했을 때, 쉽게 두려움과 불안 속에 갇힐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랑과 신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냥 저절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아니면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직접 봐야지만? 그 모두가 아닙니다. 계속된 신앙생활을 통해서만 주님의 사랑과 권능의 신비를 깨닫게 되면서,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내고 기쁘게 지금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계속 들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청출어람(靑出於藍) 푸른색은 쪽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다(순자).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1요한 4,18)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잃어버린
완고함은
모든 은혜를 망각하게 한다네.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기도하게 되고
빵의 기적을 보게 되며
완전한 사랑에 이르게 되지만
언젠가 우리가
완전한 사랑에 이르게 되면
두려움은
영원히 사라진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내 삶 안에서 예수님은 어떤 존재인가?
살다 보면 험난할 때도 있고,
칠흙 같은 어둠의 시기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의 인생길을 보살펴 주시며
동행하시는 주님을 인식해야겠습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만난
위기의 순간에 필요했던 것은
다름 아닌 주님께서
함께하고 계신다는 의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동행을 믿고 있었다면
그 풍랑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었겠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동행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합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거센 풍랑을 만났을 때
어느새 우리 곁에 나타나시는 그분을,
그분의 동행을 의식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힘을 북돋우어 주시고
격려해주시는 그 따뜻한 말씀에
용기를 내어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 50)
맞바람을
이겨내는
지혜가
참된
용기입니다.
맞바람
속에서도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시는
주님이십니다.
맞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시는
주님의
뜻이십니다.
우리의 두려움이
물결을 일으킵니다.
숨겨진 것을
내보이게 되는
우리의
시련입니다.
우리 내면을
비추어 주는
맞바람의
물결입니다.
출렁이는
물결을 통해
허약한 믿음을
만납니다.
시련 속에서도
꼭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용기입니다.
거친 물결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을
해야 할 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진실로
믿습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참된 용기를
가르치는
주님의
여정입니다.
절실한 기도가
필요한
이 시간을
용기로 건너는
우리의
오늘입니다.
겁쟁이의
시간이 아닌
참된
믿음의
시간입니다.
용기와
믿음의
살아있는
오늘입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6,50ㄷ)
'완전한 사랑을 믿자!'
오늘 복음(마르6,45-52)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젖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 쪽으로 가십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지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6,50ㄷ)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습니다. 제자들이 너무 놀라 넋을 잃었는데, 그 이유를 제자들이 빵의 기적인 오병이어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기 때문이라고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당을 다니는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당신의 외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한 '완전한 사랑의 표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표지를 보시고 당신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할 믿음의 본질이요 신앙의 핵심'입니다.
오늘 독서(1요한4,11-18)에서 사랑의 사도인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4,18)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믿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고, 죄 중에 있는 사람이 두려워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말씀
제1독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4,11-18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7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45-52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45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46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47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48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4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50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51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