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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흥사숙 ⇨ 조천동공립국민학교 ⇨ 북촌공립국민학교 ⇨ 북촌국민학교 ⇨ 북촌초등학교
위치 ; 조천읍 북촌리 1212번지(일주동로1481)
시대 ; 일제강점기~대한민국
유형 ; 교육기관(초등학교)
북촌초등학교
북촌리에 근대적인 교육이 시작된 것은 1918년 3월 1일 中동네 문태화씨 자택(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에서 개설된 창흥사숙으로부터이다. 북촌리 출신 이석림씨(1925년생)는 "처음에는 일반 사가에서 하다가 도갓집에서 1-2학년 가르치다가 3-4학년 되니까 장소를 신성회관으로 옮겼어요. 숙장이 이선익, 부숙장은 김균배(한학자)였죠. 교사는 10명 정도이고 처음 교사는 평대 출신 장윤삼(당시 27-8세 정도)을 초청했어요. 한문만 하다가 나라가 망했으니 신학문을 가르쳐야 한다고, 한문만으로는 안된다 해서 교사는 외지에서 현대교육을 받은 이를 초빙해서 이선익 씨가 상투 자르고 신학문을 가르쳐 우리는 상투 자르고 삭발해야 수업을 받았어요. 창흥서숙 들어가려면 삭발을 해야 했던 거예요. 과목은 일본어(국어), 조한(조선어), 산술, 창가, 도화, 작문으로 기억나요. 좀 연령이 많은 이들은 20세까지 다녔는데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내용이 많았고 ‘하고도 아름답다. 동해물과’로 시작하는 애국가를 알게 하고 일제에서 수색오면 지붕 위로 올라가고 숨고 난리가 났죠. 인근 함덕에서도 왔어요. 그때 서숙은 조천면에 하나뿐이라 전반적인 기초교육은 북촌 사람이 더 받았어요. 조천심상소학교의 관할 하에 있는 6년제 학교가 된 거죠. 전부 마을 사람들의 출자금으로 지었어요. 동급생이 15명 쯤 되는데요, “조선어 독본”으로 공부했는데 5-6학년 때 책이 없어져 버렸어요. 나중에 (1939-42) 북촌공립국민학교로 흡수되었죠. 1회 교사는 장윤삼 씨가 전 교과를 담당해 9명의 생도를 한 달 월사금 30전을 받고 가르쳤죠. 학제는 4년제, 장소는 윤창화 씨 집이 넓고 마을 유지기도 해서 거기서 시작해서 김재기(김성택 교장 부친)씨 집을 거쳐 문태화 씨 사택에서 수학하다가 향사(도갓집, 향회, 마을회, 통칭 ‘상회’라 함)에서 했어요. 향회는 마을회로 연말되면 향회 결산도 하고 큰 행사였죠. 나중에 신성회관이 지어져 거기서 했죠."라고 증언했다.(1989년 증언. 황요범 선생님 제공)
昌興은 날로 번창한다는 뜻을 가진 것으로 북촌리 청년회에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 이장(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 또는 청년회장(북포천년) 이선익씨가 구좌읍 평대리에서 장윤삼씨를 스승으로 초빙하였으며 운영은 홍순아씨가 맡았다.(북포천년)
수학연한은 4년제였으며, 한문교육에 수학, 문학 등 신학문을 병행하였다. 학비(월사금)은 한 달에 30전이었으며, 입학 조건 가운데 하나는 상투를 자르고 삭발하는 것이었다.(북포천년) 창흥사숙을 마치면 구좌중앙이나 조천으로 진학하였다. 교사는 장윤삼이 혼자 맡다가 나중에는 홍의숙/홍이숙(구좌), 한양준(김녕), 김규영(제주읍), 한행석(함덕), 채평옥(북촌) 등이었다.
1942년 북촌리 출신 고경찬 조천면장이 북촌리에 창흥사숙의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사립보통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기금 마련 운동을 벌였다. 이에 동조하여 원산에 거주하는 북촌리 출신 한지홍씨가 200원, 일본에 거주하던 김태규씨가 100원을 보내 오면서 학교설립기금 조성의 기반을 이루었다. 마을 유지를 비롯한 구장들의 노력과 주민들의 헌신적인 뒷받침이 있었다. 호당 1명씩의 해녀들이 동원되어 미역을 공동작업하여 1,000원 넘게 모았으며, 호당 30원씩을 할당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부정규씨가 부지(8,840㎡=2,678평)를 기부채납했고, 북촌해녀조합이 500원, 한지홍씨는 건축비 200원을 쾌척했다. 학교설립을 위한 기금이 상당한 액수에 달하면서 6개월에 걸쳐 마을 주민의 부역으로 북촌리 1212번지(현재 학교 터)에 목조기와 3개 교실과 부속건물이 지어졌으며 연차적으로 교실증축이 이루어져 7개 교실을 건설하였다.
1942년 5월에는 전라남도 광주교육청 학무국에 학교 설립인가 신청서를 제출하였으며, 별다른 조건 없이 1943년 6월 10일 조천동공립국민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았고, 1944년 4월 1일 개교하였다. 최초 학급 수는 2학급이었다. 이로써 창흥사숙은 자연히 폐숙되었다. 1945년 9월 1일에는 북촌공립국민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렇게 마을 자력으로 세운 학교가 1949년 1월 당시에는 6년제에 6개 교실, 250명의 학생이 재학하였다. 당시 북촌공립국민학교에는 양두혁 교장을 비롯하여 문덕순, 정추종, 김성택, 이송림, 이재인, 김정희, 이항석 교사, 강남수 소사가 근무하였다. 정문은 일주도로면 가운데에 있었고 울타리는 현무암 겹답으로 높게 쌓았고 울타리 안에는 멀구슬나무가 즐비하였었다.
이렇게 발전해 가고 있었는데 4·3사건의 와중에서 온마을이 전소되고 수백명이 학살되는 비운을 겪으면서 1949년 2월 10일 폐교되었다. 첫 졸업생(67명 예정) 배출을 2달 정도 남겨둔 때였다. 폐교를 당하자 학교 건물은 이웃 마을 청년단원들에 의해 허물어졌으며 건축자재도 어디론가 모두 실려가 버렸다.
그러는 동안 졸업예정자와 재학생들은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 학업을 중단하여 가사에 종사하거나 일부 학생들만이 인근학교에 다녔다. 다음해인 1950년 7월 4일 함덕국민학교 북촌분교장으로 다시 개교하여 끊어진 교육의 맥을 겨우 이었으나, 학생을 수용할 시설은 전혀 없는 상태였으므로 학생들은 현 어촌계사무실인 신성회관, 신창원씨 댁(윤철정씨 사택)에서 공부하였다.
1953년 4월 1일 3학급 6년제로 인가를 받아 1953년 4월 9일(제주교육사에는 3월 1일로 되어 있음) 북촌국민학교로 승격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1954.03.15. 신성회관에서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이어서 다음해까지 이곳에서 제2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 신성회에 대해서
"신성회는 1929년 조직된 걸로 봅니다. 약 40여 명이 회원이 있었고 그 중 10명은 해방 후 들어오고 나머지 30명 정도는 대판에 그냥 남아 ‘북촌친목회’를 이루며 지금까지 살고 있지요. 대판에 살던 북촌 출신은 거의 가입했고 보면 됩니다. 막노동하면서, 장사하면서 조금씩 모은 어려운 돈으로 정립하였죠.
김태림이 대판에서 하숙집을 할 때 동향 사람들이 모여들고 드나들면서 그 집을 드나드는 북촌 사람들은 자연히 사회주의 사상을 알게 되었어요. 이 집에는 한 때 화북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김문준이 자주 드나들면서 모여드는 청년들이 그 영향을 받게 되었어요. 김문준은 수원농림학교 졸업한 사람인데 그 후 사립 화북학교 보습과(4학년 졸업한 5.6학년 대상) 선생으로 들어갔다가 이후 일본으로 가 독립운동을 한 분이죠. 이양근씨도 회원으로 그 아들 이용선, 이용휴가 밑에서 크기 시작했고 김택림 아들 김완식, 김희식도 여기서 영향을 받았죠. 윤상목씨는 재봉공장 다니다 파업 주도(당시 22세)해서 본국 송환되었는데, 구류 좀 살고 강제 출국 당한 것이죠.
신성회관 집 천장서 목판 태극기가 나왔다고 해요. 내가 대판에 있었으면 알겠지만 다 기억하기가 어려워요. 회원은 약 40명인데, 반은 일제 때 귀향했어요. 북촌은 먹고 살기가 어려워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어요. 청진, 대판, 동경, 시모노세키에 주로 살았죠. 대판에 3-40 세대가 살고 시모노세키에 2-3 세대, 북촌회관 건립자인 고경덕씨는 동경에 살았고요."(이석림씨 1989년 증언. 황요범 선생님 제공)
1954년 11월에 원래 학교 자리(북촌리 1212번지)에 교실신축공사를 시작하여 1955.08.28. 3개 교실 준공기념잔치를 열었다. 공사비의 반액은 북제주군교육청의 지원과 E.C.A.의 원조(전축자재 및 지방부담금)를 받았으며, 나머지 반액은 마을 주민이 부담하였다. 주민들은 미역공동작업에 의한 기금 외에, 호당 흙 5가마, 네모나게 다듬은 돌 50덩이, 자갈 2상자(약 2톤)를 할당하였다. 그 외 기초공사에서부터 콘크리트, 기초 다지기, 석축 등은 주민들의 노력봉사였다.
❃ E.C.A. 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복구를 위해 시행된 마셜 플랜(European Recovery Program)을 집행하기 위해 미국이 설립한 기관. 유럽 및 일부 국가에 경제 원조 제공. 전후 복구와 경제 안정 지원. 한국전쟁 전후 시기에도 물자·경제 원조 표기에서 “E.C.A.”가 자주 등장하는데 1950년대 문헌에서 “E.C.A. 원조”, “E.C.A. 물자”라고 하면 대체로 미국의 전후 경제원조 기관이 공급한 물자를 의미한다.(ChatGPT)
건축 양식은 석조기와집이었으며, 교실 서쪽 토관을 임시 교무실로 이용하였다. 현재의 학교 터(북촌리 1212번지)로 옮겨온 것은 1955년 9월 이후이며 학년은 6개 학년인데 교실이 3개뿐이었으므로 2개 학년씩 복식수업으로 운영하였다. 제3회 졸업식은 이곳에서 하였다. 1957년이 넘어서야 7개 교실로 증축되었다. 1970년대초에 기와를 걷어내고 스레트로 지붕을 바꾸었으며, 1984년 병설유치원을 개원하였고, 1990년 12월에 2층 양옥으로 개축하였다. 1996년 3월 1일 북촌초등학교로 개칭하였다.
1989년부터 북촌초등학교총동창회가 중심이 되어, ‘초창기 학교를 다녔지만 졸업장을 받지 못한 학생들에게 명예졸업장을 주자’는 논의가 시작되었으나 4·3사건과 관련된 민감한 문제라 당장 실행하지 못하고 미루어 오다가 2000년에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하여 2001년 2월15일 제48회 졸업식에 이어 명예졸업식을 거행하여 총 215명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 북포천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은 4·3 당시 400여명의 주민들이 학살당할 때 집합장소였다. 1948년말에는 무장대들이 깊은 밤을 틈타서 마을에 침입하여 젊은 사람들을 산으로 끌어가거나 먹을 것을 약탈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사건은 음력 1948년 12월 19일(월)에 일어났다. 전날 밤에도 여느 때처럼 학교 교문 앞의 보초막에서는 산사람들의 잠입을 경비하는 보초를 서고 있었다.(1948.11.16. 23명의 청년들이 숨졌기 때문에 대부분 나이가 많으신 어른들이 각 구역마다 보초를 서고 있었다.) 한겨울 새벽에 서쪽으로 향하는 자동차 소리와 시간을 같이하여 범상치 않은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려왔으며. 곧이어 지금의 북촌초등학교에서 서쪽 100여m 지점(속칭 마가리질 서녘의 길로 당시에는 오르막이 심한 길, 당시에는 경사가 심하면 자동차가 제 속력을 내지 못하였는데 이 순간을 노리고 습격하였던 듯하다. 학교 앞 동쪽에는 보초막이 있었다고 함.)에서는 교전이 벌어진 듯한 수십 발의 총성이 들려왔다.
이 날 새벽에는 세화리에서 중대 일부 병력을 함덕리에 주둔하고 있는 2연대 3대대 본부로 이송하던 중에 산사람들에 의하여 피습을 당하여 2명의 군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군인들은 산 쪽으로 도주하는 무장대을 추격하였으나 검거하는 데 실패했으며, 인근 숲 속에서는 무장대가 잠입했을 법한 곳에서 맹탱이(볏짚 새끼로 엮어 만든 가방) 속 밥차롱(대나무로 만든 도시락)과 숟가락 6개, 바지 한 벌이 들어있는 흔적을 발견하였다.
군인들은 주변에서 밥지은 흔적이 없는 것으로 미뤄봐서 이는 분명 북촌마을에서 식사를 제공한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곧바로 마을로 방향을 바꿔 무장대의 잠적이 의심되는 곳을 수색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문초하고 학교로 내몰며 집에 불을 지르기 시작하였다. 때를 같이 하여 보초를 섰던 섯동네 노인 9명에게 군인들이 이송하는 기밀을 폭도들에게 알렸다는 누명을 씌워 보초의 책임을 물었으며, 군인 사체를 부대로 운구하여 오라는 명령을 내리고 마을사람들을 몰살하겠다는 언질을 남겼다.
이 사실을 가족에게 전한 황학선씨를 포함한 9명(이군찬, 황학선, 이방옥의 조부형제, 이만원의 부, 김갑도의 부, 한대섭, 정덕진, 이만필 씨)은 군인의 시체를 부대에 운구해 갔는데, 이들은 구 함덕중고등학교 정문 안의 오른쪽 모퉁이로 끌려가서 무지막지한 매질로 실신 당한 후 사살되었다. 이 8명의 행방은 1948년 12월 19일 죽음의 현장에서 경찰 가족임이 확인되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다음 날 귀가한 이군찬씨(심한 구타를 당하고 죽음의 형장에서 총격을 가하기 바로 직전에 이군찬 씨는 손을 번쩍 들며, 이유 없는 죽음 앞에 마지막 한 마디를 호소하였다. “잠깐, 총격을 멈추시오! 경찰가족도 죽어야 합니까?” “순경이 누구요?” “삼양지서에 이성익 순경이 저희 샛아들입니다.” 이렇게 이군찬 씨는 처형을 면하였으며, 나머지 8명은 운명을 달리하였다.)의 증언으로 행방을 알게 되었다. 한 달 간격으로 두 차례의 사건을 겪은 북촌마을은 무려 479명의 무고한 희생과 온 마을이 불에 타는 처참한 사태에 직면하였다.(제주도 4․3 피해 보고서, 1997.1.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
군인들은 사전에 마을을 포위하고 무장대나 젊은이들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지면서 집에 불을 지르기 시작하였으며, 젊은이나 ‘폭도’를 내놓으라고 위협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모두 학교로 내몰았다.
“젊은이들은 다 어디 갔어? 너희들이 기르는 폭도를 잡아오지 않으면 다 죽인다.”
하며 ‘폭도’와 젊은이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마을은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하여 갔으며, 넋을 잃고 빈손으로 학교에 운집한 마을 사람들은 사색이 되어 공포에 떨고 있었다. 학교주변에는 너븐숭이부터 학교 앞 산신동산과 정지폭낭 일대에 이미 1,2백 여명의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학교운동장을 에워싼 군인들은 운집한 마을사람들을 포위한 채, 기관총을 3각으로 장전하여 도주를 미연에 차단하고 있었다.
민보단 단장이었던 장윤관 씨에게는 ‘민보단 운영을 이 따위로 하니까 폭도를 양산시켰다’며 팬티 차림으로 운동장을 뛰게 하고는 두 바퀴쯤 돌 무렵 두 세 차례 사격을 가하여 마을 사람들 앞에서 본보기 총살을 하였다. 운집한 모든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죽임을 목격하고 넋을 잃고 말았다.
무장한 군인들은 마을의 몇몇 사람(김석도씨 외)을 군중 앞에 대면시켜놓고 죽일 가족과 살릴 가족으로 가르도록 협박하였다. 군경 가족과 민보단 가족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는 폭도 가족과 도피자 가족, 폭도에게 도움을 주는 자, 산에 올랐던 자로 간주하여 두 그룹으로 나눠 앉혀놓고 무조건 형장으로 끌고 나갔다. 그 와중에도 감시하는 눈을 피하여 살릴 그룹으로 피신하던 문인섭씨 모친과 조씨의 부인에게도 총격을 가하여 사태의 심각성을 암시하였다. 이들의 죽음이 북촌학교 운동장에서의 첫 사살 행위이다. 이들의 시신은 가족에 의하여 거둬졌으나 연고자가 없는 하인 조씨(하인 조씨는 마을의 중요행사 시의 어려운 일이나, 궂은 일을 도맡아 했으며, 또는 바다에 시체가 떠올랐을 때 이를 처리하던 분이셨는데 외지 분이었다.)의 시신은 학교 서쪽 울타리 밖인 '뒤끔밭'으로 던져졌다.
계속해서 죽일 자와 그렇지 않을 자로 구분하여 집결시키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교문 쪽에서 총성이 들렸다. 죽음의 집단에서 살 수 있다는 무리 쪽으로 몰래 앉은걸음하던 한 아기엄마가 총에 맞아 뒹굴고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故한경림씨의 어머니였다. 아기(故한경림)를 안은 채 총에 맞아 아기와 함께 엎치락뒤치락 꿈틀대며 죽음의 길을 걷고 있었다. 싸늘하게 숨이 멎은 어머니의 몸에는 피에 젖은 홑적삼 사이로 젖가슴이 드러나 있었고, 배고파 울던 아기는 젖가슴에 매달려 젖을 빨고 있었다. 죽음 앞에 떨며 서 있던 사람들은 애처로운 심경으로 바라다볼 뿐 그 어느 누구도 젖가슴에 매달려 젖을 빠는 아기를 떼어놓거나 어머니의 부릅뜬 두 눈을 가리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얼마 후 그 옆에 있던 이용배 씨가 아기어머니의 시신을 거둬들였다 함.) 이 모자의 처참한 모습은 형장으로 향하는 이들에게까지도 심금을 울렸으리라.
군경 가족과 민보단 가족, 동짓달 열 엿새 날에 죽은 23명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신작로 인근 당팟(취락구조의 정지폭낭 아래쪽에 있는 김진국 씨 소유의 밭)과 탯질(너븐숭이 바다 쪽의 박부남씨 소유의 밭)로 끌고 가서 무참하게 몰살시켰다. 이 두 곳에서의 희생자가 제일 많았다고 한다. 총살 장소 = 당팟, 양개왓, 옴팡밭.
사살이 계속 진행되고 있을 오후 4시경에는 뒤늦게 나타난 상급 지휘관(대대장 정준철)의 ‘사살중지!’ 명령으로 광란의 사살행위는 일단 멈추었으나, 이어서 지휘관은 살아있는 북촌 사람들을 모아놓고 몸서리치는 언질을 남겼다.
“오늘 새벽에 피살된 군인 1명당 너희들 500백 명씩을 죽였어야 할 것이다. 오늘 죽은 사람들은 백 번 죽어 마땅한 자이나, 그 중에는 착한 이도 있을 것이다. 차후에 폭도에게 음식을 제공하거나 내통하는 자가 있을 시는 그 땐 모두를 몰살하여 씨를 말릴 것이다.”
라고 엄중한 말을 남기고 군인들을 철수시켰다.
이어서 앞다투어 식구들의 시체를 찾아 나선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할 장면들을 목격하였다. 형장(탯질 밭)에 쓰러져 죽어 있는 모습이 마치 무를 뽑아 놓은 형체처럼 즐비하게 널려있어서 누가 누구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총성이 멎은 해 저문 들녘에는 형제자매를 찾는 울부짖음이 동지섣달의 차가운 밤 기운도 잠재우지 못하였다. 아비규환 속에서도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은 비명에 숨져간 형제들을 밤새 찾아 헤맸으며, 살을 에는 듯한 한겨울의 추위와 긴긴밤의 허기진 고통도 잊은 채 죽은 부모 형제를 부둥켜안고 밤을 지새워야만 하였다.
이 총살 현장에서도 살아나온 사람이 있었다. 윤태삼씨는 쓰러질 때 누나가 자기를 덮쳤는데 그 속에서 살 수 있었으며, 고윤진씨는 옆구리에 관통상을 입었고 허벅지에 총알이 박혔는데도, 총알이 등에서 가슴 쪽으로 관통한 그의 어머니와 함께 살아 남았다. 고윤진 씨는 허벅지에 총알이 박힌 것을 모르고 있었다. 관통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았지만 허벅지에서는 자꾸 고름이 나고 벌레가 기어다닐 정도가 되어 4~5년을 고생했는데 동네 할아버지가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는데 허벅지에서 총알이 나왔다.(애기무덤 51쪽)
죽은 자의 수가 워낙 많아서 시체는 아녀자들에 의하여 가매장되었다가 사태가 진정된 후에 안장하였고, 그 중에도 온 가족이 몰살당한 사람들의 시체는 눈이 덮인 채 얼마 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에 의하여 야산에 묻혔다. 이 날에 죽임을 당한 이들의 관이나 호상옷을 마련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호강의 소리였고, 하나같이 피묻은 옷이 그대로인 채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더구나 사태가 일었던 다음 날도 살아남은 사람들을 함덕마을로 집결시켜 문초를 계속하였다. 군인들은 그 중에서도 젊은이나 수상쩍은 이들이 혹시 살아있나 싶어 경계와 감시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이밖에도 이웃 마을과 북촌 사람의 몇몇을 내세워서는 불순한 사람을 색출하도록 하는 강압을 서슴지 않았으며, 뽑혀나간 사람들을 들로 끌고 가거나 그 앞에서 총살을 자행하였다.
그 이후로 가족과 집을 잃은 북촌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나마 친척이 있거나, 친분을 찾아서 이웃 마을 함덕리 등지로 찾아간 사람들은 마굿간이나 헛간에서 추위와 기아를 견디며 목숨을 연명할 수가 있었다. 반면 연고가 없는 사람들은 동냥질로 동지섣달의 매서운 추위와 참기 힘든 기아에 허덕이며 인간 이하의 비참한 생활을 보내야만 하였다. 몇 명은 굶어 죽기도 했다.
함덕 마을로 이주해온 후에도 군인들은 젊은이와 ‘폭도’를 찾는 일에 조금도 고삐를 늦추지 않아 북촌사람들에게 가하는 강압은 더욱 거세어져갔다. 밤이면 밤마다 불현듯 나타나서 총검을 들이대며 산사람과 내통하고 있지를 않나 감시를 하고, 한밤중이면 잠자리를 걷어차며 ‘폭도와 젊은이들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협박과 공포의 밤을 하루도 거르지 않아 죽음에 못지 않은 두려움의 도가니로 몰아세웠다.(북촌리 출신 황요범씨 글 참조)
당시 북촌 인구는 1864명이었는데 일본이나 산으로 피신한 사람이 400명 정도 되었기 때문에 마을에 살고 있던 사람은 대략 1400명 정도였다. 마을 인구의 40% 정도가 12월 19, 20일 단 이틀 동안에 학살된 것이다.
함덕리가 고향이며 경찰에서 운전을 했던 김병석씨(73․조천읍․당시 18세)의 증언에 의하면 이렇게 마을 사람을 다 죽이려 했던 이유는 ➀이미 집들을 다 불태워 버린 상태에서 그들을 수용할 대책이 없어서였으며, ➁박격포를 이용하여 한꺼번에 죽이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일일이 총살한 것은 군인 개개인에게 총으로 사살하는 경험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414~415쪽) 김씨는 "참모회의는 임시 대대장 차량이었던 앰뷸런스 안에서 이뤄졌다. 운전석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회의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참모회의에서는 국민학교 주위에 도열시켜 놓고 주민들을 사살하자는 의견과 박격포 등 중화기를 이용해 사살하자는 의견이 논의됐었다. 한 장교가 군인들 태반이 적을 사살해 본 경험이 없는 군인들이다. 각 분대별로 주민들을 끌고가 처형하자고 의견을 내놓은 이후 집단 학살이 시작됐다”고 증언했다.(제민일보 2002.06.01.)
학교 연혁(나무위키)
1918년 3월 1일: 창흥사숙 설립 운영(~1944)
1943년 6월 10일: 조천 동 공립학교로 개교
1949년 2월 10일: 4·3 사건으로 폐교
1950년 7월 8일: 함덕국민학교 북촌분교장으로 개설
1953년 4월 9일: 북촌국민학교로 승격
1996년 3월 1일: 북촌초등학교로 교명 변경
2001년 2월 15일: 북촌공립국민학교 명예졸업식(215명)
2002년 3월 1일: 환경체험 중심학교(환경부 지정)(~2004.02.29)
2009년 3월 1일: 청렴교육시범학교(국민권익위원회 지정)(~2010.02.28)
2010년 3월 1일: 청렴교육시범학교(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지정)(~2011.02.28)
2011년 3월 1일: 제3기 제주형 자율학교(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지정)(~2013.02.28)
2011년 3월 1일: 학력향상형 창의경영학교(~2014.02.28)
2012년 3월 1일: 돌봄교실 운영
2013년 3월 1일: 제3기 제주형 자율학교(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지정)(~2015.02.28)
2013년 8월 1일: 예술꽃씨앗학교 운영(문화체육관광부 선정)(~2016.12.31)
2017년 3월 1일: 예술꽃새싹학교 운영(~2018.12.31)
2019년 3월 1일: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다혼디배움학교 지정(2019.3 ~ 2023.2)
2022년 12월 30일: 2022학년도 제70회 졸업(총 1,699명 졸업)
2023년 3월 1일: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다혼디배움학교 재지정(2023.3 ~ 2027.2)
2023년 3월 1일: 제33대 강여임 교장 부임
2024년 3월 1일: 디지털 기반 교육혁신 선도학교
학교연혁(북촌초등학교 홈페이지)18
1918.03.01. 창흥사숙 설립 운영(~1944)943
1943.06.10. 조천 동 공립학교로 개교1949
1949.02.10. 4·3 사건으로 폐교1950
1950.07.08. 함덕국민학교 북촌분교장으로 개설1953
1953.04.09. 북촌국민학교로 승격1996
1996.03.01. 북촌초등학교로 교명 변경2001
2001.02.15. 북촌공립국민학교 명예졸업식(215명)2002
2002.03.01. 환경체험 중심학교(환경부 지정)(~2004.02.29)2009
2009.03.01. 청렴교육시범학교(국민권익위원회 지정)(~2010.02.28)2010
2010.03.01. 청렴교육시범학교(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지정)(~2011.02.28)
2011.03.01. 제3기 제주형 자율학교(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지정)(~2013.02.28)
2011.03.01. 학력향상형 창의경영학교(~2014.02.28)
2012.03.01. 돌봄교실 운영
2013.03.01. 제3기 제주형 자율학교(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지정)(~2015.02.28)
2013.08.01. 예술꽃씨앗학교 운영(문화체육관광부 선정)(~2016.12.31)
2017.03.01. 예술꽃새싹학교 운영(~2018.12.31)
2019.03.01.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다혼디배움학교 지정(2019.3 ~ 2023.2)
2023.03.01.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다혼디배움학교 재지정(2023.3 ~ 2027.2)
2024.09.01. 제34대 강연심 교장 부임
2026.01.09. 제73회 졸업(총 1,741명 졸업)
2026.03.01.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제주형자율학교 문예체학교 지정(2025. 03. 01. ~ 2027. 02. 28.)
《작성 2026.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