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교우촌 성당들의 부활절
그날 대전에 내려 온 나는 저녁부터 조 신부님과 TV 화면에 붙어 앉아 시시각각 전해지는 세월호 소식에 눈과 귀를 기울였다. 당시 보도만 보면 대한민국 전 국력이 세월호 구조에 집중되는 것 같았다. 며칠 후 내가 현장인 팽목항에 가보고서야 그 보도들이 대부분 과장되고 터무니 없는 것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7일 성 목요일 오전에는 대흥동 주교좌 성당 성유축성 미사에 참례하고 저녁에는 대전 성모병원에서 환자들과 성 목요일 미사를 함께 했다. 이튿날에도 조 신부와 나는 세월호 승객들이 빨리 구조되기를 기도하면서 TV 앞을 떠나지 못했다. 저녁에 다시 전날처럼 성모병원을 찾아 성 금요일 전례에 참석하고 영성체했다. 사제들은 전례 때마다 세월호 승객들의 구조를 위해 기도했다. 세월호 참사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수난당하신 고통을 지상에서 재현하는 것 같았다. 성 금요일날은 종일 단식했다. 다음 날 나는 부활성야 미사를 시골 성지 성당에서 참례하고 싶어 배낭을 메고 서대전역으로 향했다. 충남 강경에서 기차를 내려 인근 전북 익산군 망성면 화산리에 있는 나바위 성지 성당까지 걸었다. 도 경계를 지나지만 거리는 6킬로에 불과했다. 성당에 도착해 숙소를 알아보니 성당에 숙박시설이 있어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고 있었다. 나는 어둡기 전에 성지를 둘러보고 특히 세월호 승객 구조를 지향으로 십자가의 길을 바쳤다. 나바위 성지는 1845년 10월 12일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작은 목선으로 상륙한 장소이다. 당시는 이곳에 금강물이 넘실거렸지만 지금은 육지로 변했다. 그해 1월 부제의 신분으로 육로를 통해 입국한 김대건은 제물포에서 선박을 구입해 라파엘호라 명하고 4월 말 열한 명의 신자들과 함께 서해를 건너 상해로 갔다.
김대건은 그 해 8월17일 상해에서 사제로 서품되어 8월 31일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신자들과 조선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출항한지 3일 만에 풍랑을 만나 표류해 한달 가까이 서해에서 시달리다 9월 28일 구사일생으로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착했다. 이곳에서 배를 수리하고 음식을 준비해 10월 1일 포구를 떠난 김 신부 일행은 10월 12일에야 이곳에 도착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여정이었다. 일행이 황산포(강경)에서 금강하구를 타고 3킬로 떨어진 이곳에 상륙한 것은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페레올 주교는 훗날 당시 폭풍을 만나 표류한 것은 하느님의 섭리였다고 감사했다. 젊은 김대건 신부의 계획은 무모했다. 만일 계획대로 라파엘호가 서해를 건너 한강을 따라 곧장 한양에 도착했다면 모르긴 해도 모두 붙잡혀 죽었을 것이다. 어쨋든 나바위 상륙은 김 신부로서는 두번 째이자 마지막 입국인 셈이다. 1886년 한불 수호조약으로 종교의 자유가 생기자 프랑스 외방선교회는 순교자들이 처음 상륙한 이곳에 성당을 세운다. 나바위 성당은 베르모렐 신부가 1897년 설립하고 건물은 1906년 완공되었다. 한옥 건물 전면에 고딕식 종탑이 있는 나바위 성당은 외부에서는 2층 구조로 보이며 추녀를 바치는 회랑이 한국적인 멋을 더해 준다. 명동성당을 설계했던 프아넬 신부가 설계했고 중국인 인부들이 공사했다. 성당내부는 당시 전통대로 남녀석을 구분하는 기둥들이 세워져 있다. 이날 부활성야 미사 때도 신자들이 대부분 남녀를 구분하여 앉아 이곳의 뿌리깊은 전통을 느끼게 했다. 또한 성당 창문에는 스테인글라스를 대신해 성화를 그린 한지로 장식되어 있어 소박한 느낌을 준다. 나바위 성당은 건물의 역사적, 건축학적 가치로 국가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성당 밖에는 라파엘호 상륙지부터 성당까지 십자가의 길이 마련되어 있고 언덕 위에는 김대건 신부 석상이 나바위 전체를 굽어보고 있다. 또한 정상에는 1915년 베르모렐 신부가 지은 커다란 망금정(望錦亭)과 라파엘호 크기의 김대건 신부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성당 뒤에는 수영장까지 있어 여름철 학생 피정을 위한 시설로 보인다. 피정의 집은 3백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내가 묵은 곳은 성당 앞 독채 건물로 침실과 거실, 취사도구까지 갖추어져 가족단위로 머물기 좋다. 사제관과 수녀원 한옥도 성당과 함께 지어진 아름다운 건물이다. 이날 저녁은 사무장 권유에 따라 마을 식당에서 올챙이국으로 식사했다. 색다른 별미다. 마을주민 대부분 신자로 교우촌 분위기다. 올해 117년 역사의 나바위 성당은 일제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주민들과 애환을 같이했다. 1907년 설립한 계명학교는 해방 후 폐교할 때까지 일제하에서 독립심을 키워 주었다. 신사참배에 저항하던 사제와 신자들이 옥고를 치르기까지 했다. 6.25 당시에는 김후상 신부가 “양들을 버리고는 목자가 아니며, 미사를 지내다 죽으면 그보다 행복이 없다”며 피신하지 않아 며칠을 제외하고는 매일미사가 계속된 기록을 갖고 있다. 어둠이 짙어지자 신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성당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게 되어 있어 입구 신발장에 실내화가 비치되어 있다. 나는 마당에서 초를 받아들고 입장했다. 시골성당이라 신자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경건한 분위기에서 부활성야 미사를 봉헌했다. 10여 명의 작은 성가대까지 있어 부활절 분위기를 더해 준다. 그러나 세월호 소식이 부활절의 기쁨을 움츠리게 해 신부는 강론 때 세월호를 언급하면서 마음 모아 기도하자고 강조했다. 미사 후 신자들은 떡과 따끈한 차 한잔으로 부활절 잔치를 대신했다.
이튿날 새벽 나는 성체조배한 후 라면으로 식사를 때우고 익산시 함열읍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부활대축일 낮미사를 드릴 예정이다. 나는 전날 함열성당 박인호 신부께 미사시간을 확인하고 가겠다고 미리 전화드렸다. 박 신부는 마침 부활절 잔치가 있는데 잘되었다며 계획된 잔치라 취소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신명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나바위에서 함열까지 8킬로 거리다. 새벽공기를 마시며 차도를 따라 걷는다. 뒤쪽에서 오는 차가 신경쓰여 반대쪽 차량을 마주보는 찻길로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함열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다. 한참가니 길아래 방죽에 낚시꾼이 있었다. 나는 길 위에서 소리쳐 함열가는 길을 물었다. 그는 지나왔다며 그곳에서는 방법이 없으니 내려 오라고 한다. 나는 허리까지 오는 잡풀을 헤치고 내려갔다. 그는 방향을 가르키며 농로를 타고 계속가다 다시 물어보라고 했다. 내가 차를 마주보고 걸은 탓이었다. 반대편 방향에 함열 이정표가 있을리 없었다. 덕분에 5킬로를 더 걷는다. 읍내에 접어들자 자전거 타고가는 여자가 보여 성당을 물어보니 자기도 성당가는 길인데 성가대원이라 빨리가야 한다며 길만 안내해 주고는 급히 사라졌다. 함열은 천주교 박해시대 많은 신자들이 숨어 살던 곳으로 특히 프랑스 선교사 블랑 신부가 숨어 지냈던 곳이다. 그는 병인박해로 조선에 신부가 한 사람도 없을 때인 1876년 드게트 신부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 교회를 재건한 분이다. 그는 1882년 조선교구 7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어 1890년 갑작스러운 병으로 46세에 사망할 때까지 명동성당 등 여러 성당을 세우고 14명의 성직자와 21명의 조선 신학생 그리고 2만 명 가까운 신자들로 조선교회를 완전히 재건했다. 함열은 블랑 신부가 박해가 끝날 때까지 숨어서 활동했던 곳이다.
이 지방에는 1910년 안대동 본당이 설립되으나 초대 서병익 신부가 평안도로 전임한 후 교세가 위축되었다. 현재 함열성당은 1959년 안대동 성당을 이전하여 신축한 것이다.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으로 전동성당을 닮은 성당은 당시 김영구 신부의 설계와 감독으로 순수한 우리 기술로 건축된 것이다. 전쟁 후 몇 년되지 않은 열악한 재정과 여건 속에 이토록 아름다운 성당이 지어졌다는 것이 놀랍다. 성당 정문 위에는 1959 숫자가 새겨져 있다. 박인호 신부가 반갑게 맞이해 준다. 그분은 오래 전 아틀란타 한인성당에 재임 중 마음고생을 많이하셨던 분이다. 이날 미사에는 많은 신자들이 정장과 한복차림으로 참석해 축일분위기를 보였지만 세월호 소식 때문인지 표정들은 밝지 못했다. 박 신부는 미사 분위기가 가라앉자 알렐루야 대신 만세삼창을 시키기도 했다. 신자들은 미사 후 전통대로 돼지를 잡아 잔치를 열었다. 그러나 오락 프로그램은 모두 취소하고 음식만 나누었다. 나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세월호로 인해 패닉상태에 빠진 것을 보면서 다음 날 팽목항을 찾아 볼 결심을 굳혔다. 박 신부는 행사와 모임으로 바쁜 중에도 나를 위해 신경을 써 주었다. 식사 후 박 신부는 성당 총무에게 나를 여산성당까지 안내해 주도록 부탁했다. 내가 이날 이 지역에 온 것은 교우촌 시골성당에서 부활성야와 대축일 미사를 드리고 싶었던 평소 소망때문이다. 함열에서 여산과 천호산에 이르는 지역은 불과 10킬로 이내에 한국 천주교의 중요 성지인 여산 숲정이와 천호성지가 있다. 여산 성당에 도착하니 나춘성 신부가 놀라서 반갑게 맞이해 준다. 10여 년만에 만나는 나 신부는 이제 어느덧 중년을 훌쩍 넘긴 노숙한 사제의 티가 묻어난다. 그는 캐나다 피터보로 한인성당에 재직할 때 나와 인연을 맺은 분이다.
여산성당도 잔치가 끝나 어수선했다. 나 신부는 오랫만인데 술한잔해야 한다며 굳이 잡아끈다. 이곳에서도 돼지를 잡은 모양이다. 부활같은 명절에 마을잔치를 벌이는 교우촌의 전통인 듯했다. 인근에 여산동헌과 숲정이 성지가 있다. 나는 나 신부의 안내로 성당에서 기도를 바친 후 동헌과 숲정이를 순례했다. 여산동헌은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 고문하고 사형을 내리던 곳이다. 당시 여산에는 사법권이 있는 부사(府使)와 진영(鎭營)이 있어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했다. 1868년에는 금산, 진산, 고산 등지의 신자들이 많이 처형 당했는데 기록으로 남은 신자는 26명이고 대부분 무명이다. 동헌마당에는 역대 부사들의 선정비, 불망비들과 척화비(斥和碑)가 세워져 있다. 신자들을 처형했던 부사의 선정비도 있을 것이다. 척화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하자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글귀가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대원군 쇄국정책으로 조선은 근대화의 기회를 잃고 수 많은 신자들이 죽어야 했다. 또 동헌옆 숲에는 '여산순교성지' 라고 쓰인 돌판과 백지사(白紙死) 기념비와 대형십자가가 세워져 당시 비극을 되새기고 있다. 백지사형이 자행되었던 곳이다. 백지사형이란 말뚝 앞에 죄수를 앉혀 묶은 후 손을 뒤로 결박하고 상투를 함께 묶어 얼굴이 하늘로 향하도록 해 물을 뿜어 창호지를 여려겹 붙여 질식시키는 방법이다. 많은 신자들이 형장에서 얼굴에 달라붙은 백지에 가쁜 숨을 헐떡이다 죽었다. 백지사형은 '도모지사형'(塗貌紙死刑) 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앞이 캄캄해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뜻으로 쓰는 '도무지'라는 말의 유래라고 한다. 지금도 한국에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왜 꽃다운 아이들이 바다에서 떼죽음 당했는지, 왜 세월호 사건으로 온 나라가 마비되는지, 왜 진상조차 못밝히는지 '도무지' 투성이다. 조국이 백지사형을 당하는 느낌이다.
이곳에서 순교한 이름이 밝혀진 분 중 17명이 고산 널바위 주민들인데 당시 57세로 순교한 김성첨(토마스) 일가 6명의 일화가 대표적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대아리 저수지에 수몰된 널바위 마을은 전북 완주군 동상면 광암리였다. 김성첨은 사촌 김프란치스코를 대신 자원하여 체포된 후 조카 김명언을 비롯해 정규, 정언 등 3형제와 그 아들 등 3대에 걸친 6명을 포함한 마을사람 17명의 신앙을 모두 자기가 가르쳤다고 진술했다. 당시 칼을 쓰고 옥에 갇혀 있던 신자들은 형장인 이곳 풀밭에 도착해서야 칼을 풀었는데 얼마나 굶주렸던지 짐승처럼 풀을 뜯어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김성첨은 마을사람들에게 "천국이 눈앞에 왔으니 모든 고통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아내자"며 격려했다고 한다. 대부분 일가족이며 마을사람들인 이들은 옥중에서도 서로 위하며 사랑을 실천했으며 이같은 우애는 형장에서 차례로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 형리들이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신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여산 숲정이는 지금은 숲이 아니라 논밭 가장자리로 변했다. 이곳에서 순교한 사람들은 인근 천호산 기슭에 묻혀 있는데 어디에 묻혔는지 대부분 알 길이 없다. 나는 여산성당과 성지순례를 마치고 이들 순교자들이 잠든 천호성지로 향했다. 나춘성 신부는 부활절을 맞아 어머니가 계신 고향으로 가야 한다며 신자 한 분에게 나를 천호성지까지 데려다 줄 것을 부탁했다. 이곳에서 천호성지는 10킬로도 안되는 거리지만 새벽부터 강행군한 나로서는 걷기에 무리다. 천호성지는 입구부터 스케일이 대단했다. 요즘 각 교구마다 성지가꾸는데 열성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한국교회가 서울, 지방 가리지 않고 부유해졌음을 의미한다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삐까번쩍한 외형보다는 소박하더라도 그곳을 찾아 얻는 내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교회가 화려한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천호성지는 그동안 발굴한 여산 순교자 열 분 무덤 중 8명은 집단매장된 상태로 발굴된 것을 각각 따로 무덤을 만들었다. 이와 함께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해 1984년 성인품에 오른 6명 가운데 이곳에 묻혔던 한재권, 정문호, 손선지와 다른 곳에 묻혔다 1988년 이곳에 이장된 이명서 등 성인 4명과 같은 해 8월 28일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호의 묘까지 열다섯 분의 무덤으로 성지를 조성했다. 이들 무덤들은 호남교회사 연구소가 1983년부터 시작한 발굴작업을 서울대학교, 전북대학교의 5개월 간에 걸친 법의학적 분석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이 분들과 함께 순교한 수 많은 분들은 천호산 기슭 어디엔가 알 수 없이 묻혀 있다. 봉분인들 있을리 없다. 천호산 전체가 성지인 셈이다. 이곳은 천호산(天壺山) 이름 그대로 순교자들의 피를 담은 '하늘의 병'이다. 산기슭에는 150년 전부터 신자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아 왔다. 지금도 모든 주민이 신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소를 '하느님의 부르심'을 뜻하는 천호(天呼) 공소라 짓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부르며' 사는 신앙공동체로 지금까지 내려 온다. 천호공소는 박해시대 여러 번 관의 표적이 되어 많은이들이 잡혀가고 순교했다. 천호산 기슭에는 1839년 기해박해 이후 신자들이 숨어들어 와 공동체를 이루어 한때는 7개 신자촌 공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천호공소(옛 다리실)와 산수골 공소만 남아 있다. 천호산에 많은 순교자들이 묻혀 있다는 것은 박해시대 때부터 알려져 왔다. 종교의 자유가 시작된 후 1909년 당시 프랑스 선교사 목세영 신부와 신자들이 힘을 합쳐 이곳의 150정보 임야를 사들여 그 중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곳으로 알려진 75정보를 교회에 봉헌해 오늘날 천호성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전주교구는 1985년 이곳을 성지로 축성한 후 계속해서 개발하고 확장해 왔다.
나는 천호성지에 도착해 순교자들의 무덤을 참배하고 이곳에 세워진 부활성당에서 한참 묵상했다. 청호성지에는 순례자의 길과 순례자의 집이 가꾸어져 있고 게세마니 동산과 십자가의 길 그리고 기도하고 묵상하기 좋은 경당이 세워져 있다. 또한 편백나무 숲과 대나무 숲은 잘 갖추어진 피정의 집과 함께 성지순례 뿐 아니라 산림욕과 산책길로도 훌륭했다. 여기저기 성지를 돌아보는데 난데없이 장의차와 차량행렬이 들어선다. 이곳에서 납골당까지 운영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주교구가 천호성지를 다목적으로 개발한 것 같다. 이곳의 성물박물관을 관람하는데 어느 중년부부가 나에게 끓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천주교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은 것이다. 나는 아는만큼 답변해 주었다. 성지순례를 마치고 마을로 걸어가는데 그들 부부가 차를 멈추고 어디까지 가는지 태워드리겠다고 한다. 피곤한 참에 반가운 소리다. 나는 오늘 목포까지 가는데 가까운 기차역에 갈 수 있으면 고맙겠다고 했다. 그들은 전주역까지 태워드리겠다고 했다. 고마운 일이다. 진안, 장수에서 유명 아이스크림 제품 총판을 하고 있다는 남자는 자기도 배낭여행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그는 아내와 전북 관광지도에 나온 천호성지가 어떤 곳인지 알고 싶어 일부러 찾아 왔다고 한다. 그는 천주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보아도 무었인지 몰랐는데 나의 설명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내 사정만 허락된다면 자기집에 모시고 식사하면서 여행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부인도 덩달아 나에게 함께 가자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다음 날 팽목항에 가기로 해 목포의 아는 분께 연락해 둔 상태라 아쉽지만 정중하게 사양했다. 내 마음은 이미 세월호 현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전주역에서 이들과 작별하고 목포행 차표를 끊었다.
(2014.9.14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