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18일 트럼프 미 대통령이 추진하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면 휴전에 앞서, 에너지 인프라(기반 시설)에 대한 공습을 중단하는 부분 휴전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무려 2시간 30분에 걸친 트럼프 대통령과의 긴 통화 끝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30일간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는 데 동의하고, 즉각 이를 군 사령부에 지시했다고 크렘린이 발표했다.
에너지 인프라 공습 중단은 당초 우크라이나 측이 제다에서 열린 미국과의 고위급(장관급) 회담에서 미국 측에 제안한 휴전안의 일부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제다 회담을 앞두고 공중및 해상에서의 휴전(부분 휴전안)을 제안했다. 따라서 미-러 양국의 이번 합의는 즉시 시행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사진출처:스트라나.ua 크렘린.ru
◇당초 기대에 못미치는 푸틴-트럼프 전화 통화
푸틴-트럼프 대통령의 전화 접촉 후 양측에서 발표한 성명(언론 발표문)을 보면, 그 내용이 당초 기대에는 못미친다. 30일간 휴전에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세부 내용은 추후 실무회담을 통해 해결한다는 정도의 발표는 나올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유례 없을 정도로 긴, 2시간 30분간의 마라톤 통화 끝에 나온 발표가 공습 중단 외에 양국간 스포츠 교류, (이미 합의된) 러-우크라 포로교환 계획 공개, 전략무기 통제및 중동 분쟁 해결 노력 등 우크라이나 전쟁과 직접 연관성이 떨어지는 것들이라니 실망스러운 결과다.
일단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겉으로는 두 정상간의 전화 통화이지만, 실제로는 핵심 참모들이 모두 참여한 '컨퍼런스 콜'(conference call) 형태로 휴전 조건 뿐만아니라 우크라이나 점령지 분활과 대러 제재, 나토 가입, 자포로제(자포리자)원전의 통제권 등 평화 협상 관련 문제를 두루 논의하는(사실상 비대면 확대 정상회담) 바람에 시간이 길어졌다. 다른 하나는 휴전 조건을 둘러싸고 양측이 서로 팽팽이 맞서는 바람에 협상 결렬을 피하기 위한 면피용으로 몇가지 합의를 일궈냈다는 추측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18일 "이번 미-러 정상간 통화에서 푸틴 대통령은 이미 제시한 조건(우크라이나 동원령및 외국 군사 지원의 중단)을 반복 요구하고, 미 백악관은 중동 지역에서 휴전 회담이 즉시 시작될 것이라고 밝혔다"며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했거나, 큰 틀에서 합의에 이르렀지만 일부 조정을 위해 아직 발표하지 않기로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러시아군의 공습으로 불타는 우크라이나 자포로제(자포리자) 시설물/텔레그램 영상 캡처
일각에서는 30일간의 에너지 인프라 공격 중단 합의를 미-러 휴전 협상의 결렬을 피하고, 성과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사실 러시아에게 이 합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러시아의 대규모 미사일 공격은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번 정도다. 30일간 공습 중단은 앞으로 대규모 에너지 인프라 공격을 한번 건너뛰는데 불과하다. 그에 비하면 러시아 정유소와 에너지 기타 시설을 타격하는 우크라이나군의 드론 공격이 더 잦은 편이다. 물론 피해 규모는 다르다.
주목되는 것은 양측의 발표문이 서로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기조로 작성됐다는 점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협상하겠다는 양국의 의지를 보여준다. 특히 양국간 아이스 하키 교류는 상징적이다. 2022년 2월 러시아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이후 국제 무대 진출이 봉쇄된 러시아 스포츠계에는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
◇미-러 통화이후 발표문을 보면
스트라나.ua와 콤스몰스카야 프라우다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양측의 발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강제 동원및 재무장(서방측 무기 공급) 중단 시 30일간의 전면 휴전에 동의.
△러시아의 평화 협상 조건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외국의 군사 원조및 정보 제공 중단.
△트럼프 대통령은 30일간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공습 중단을 제안. 푸틴 대통령이 이에 동의하고 즉시 군에 지시.
△푸틴 대통령은 흑해 해상 운송의 안전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제안에 원칙적으로 찬성하고, 실무 협의를 시작하기로 합의.
△푸틴 대통령은 19일 러-우크라 양측이 각각 175명의 포로를 교환할 것이라고 미국 측에 통보. 중상자 23명도 선의의 표시로 우크라이나로 이송.
△양국 정상은 앞으로도 협의를 계속하기로 하고 이를 위한 전문가 그룹을 만들기로 합의.
△양국 정상은 중동 정세와 전략 문기 통제, 양국간 경제및 에너지 협력에 대해서도 논의.
2019년 크렘린에서 열린 푸틴-트럼프 정상회담/사진출처:크렘린.ru
양국의 발표문은 그 뉘앙스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자국의 입장에서 정상간 대화를 요약, 설명하되 과시하고픈 욕구나, 혹은 두루뭉실하게 넘어가려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보면 된다. 양측의 발표가 어떻게 다른 지 한번 살펴보자
우선 크렘린의 성명을 요약하면
△양국 정상은 우크라이나 주변 상황에 대해 자세하고 솔직하게 의견을 교환했다. 푸틴 대통령은 적대 행위와 인명 피해를 끝내고자 노력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푸틴 대통령은 러-우크라 양국이 30일 동안 에너지 인프라 시설에 대한 공격을 상호 중단하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제안에 동의하고, 이를 군에 지시했다.
△양국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전문가 그룹을 만들기로 했다.
△두 정상은 우크라이나 분쟁의 최종적인 해결책은 위기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고 러시아의 합법적 안보 이익을 고려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러시아는 갈등 확대를 막고 정치·외교적 해결로 나아가기 위한 핵심 조건이 외국의 (대우크라) 군사 지원및 정보 제공의 중단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러시아는 (미국의) 30일간의 휴전 제안과 관련, 최전선에서의 효과적인 휴전 감시와 우크라이나 강제 동원및 재무장의 중단 등 몇가지 중요 사항을 설명했다. 또 키예프(키이우) 정권의 반복적인 합의 위반 사례를 설명하며 실증적인 리스크를 지적했다.
△러시아는 흑해 해상 운송 안전과 관련된 트럼프 대통령의 제안에 건설적으로 대응(원칙적으로 동의)하고, 구체적인 방안 마련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기로 했다.
△푸틴 대통령은 19일 러-우크라 양국이 각각 175명씩 포로를 교환하기로 했다고 알렸다. 선의의 표시로 러시아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상자 23명도 인도할 예정이다.
△양국은 세계 안보와 국제 정세 안정 문제에 관한 협력을 계속하기로 했다. 두 정상은 또 양국간 협력이 가능한 분야에 대해 논의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이 제안한 NHL(북미아이스하키 리그)과 KHL(러시아아이스하키 리그) 간의 아이스하키 교환 경기 개최에 동의했다.
△쿠르스크 지역에서 포위된 우크라이나군의 생명 보장을 요청한 트럼프 대통령의 호소에 대해 인도적으로 고려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항복할 경우 러시아 법률과 국제법에 따라 생명 보장과 합당한 대우를 약속했다.
△두 정상은 중동 분쟁을 포함한 국제 현안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위기 지역의 상황을 안정시키고 핵 확산 방지 및 세계 안보 문제에 관한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스트라나.ua는 "크렘린이 이번 접촉 결과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더 잘 이해하려면 키릴 드미트리예프 대통령의 특별 대표(러시아 직접투자기금 대표)의 성명을 보면 된다"고 지적했다. 드미트리예프 대표는 엑스(X)에 "러시아와 미국 대통령 덕분에 세계가 더 안전해졌다"며 "역사적이고 완벽하다"고 적었다.
◇ 러시아와 뉘앙스가 다른 미 백악관 발표문?
미 백악관/사진출처:위키피디아
백악관의 공식 발표문을 요약하면
△ 두 정상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평화와 휴전의 필요성에 대해 논의했으며 이 갈등이 지속적인 평화로 끝나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또한 미국과 러시아 간의 양자 관계를 개선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갈등은 결코 시작되어서는 안되고, 진지하고 정직한 평화 노력을 통해 오래 전에 끝났어야 했다. 두 정상은 평화를 향한 움직임이 에너지 및 인프라 분야에서의 휴전에 대한 합의, 흑해에서의 해상 휴전에 대한 기술적인 협상으로 시작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 다음 단계는 완전한 휴전이고, 영구적인 평화 수립으로 갈 수 있다. 이 협상은 중동 지역에서 즉시 시작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동을 '미래 갈등을 예방하기 위한 (양국간의) 잠재적 협력 지역'으로 제시했고, 두 정상은 이란에 이스라엘을 파괴할 기회를 결코 주어서는 안 된다는 데 견해를 함께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러 양자 관계의 개선은 미래에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으며, 여기에는 역내 평화 정착 후 주요 경제 협력과 지정학적 안전보장이 포함된다고 강조했다.
△두 정상은 전략 무기의 확산을 막아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으며, 이러한 조치가 가능한 한 광범위하게 적용되도록 다른 핵 보유국과 협력하기로 했다.
◇양측 반응은
발표문에서 엿보이는 양국의 분위기는 러시아는 비교적 담담하고, 미국는 기대에 못미쳐 약간 실망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전화 통화 후 백악관 잔디밭에서 기자들에게 내용을 설명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기자회견을 취소했다. 발표문으로 기자회견을 대신했다.
다른 시각도 있다. 미국 일간지 뉴욕 타임스(NYT)는 푸틴-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전화 통화에서 영토 문제 등 우크라이나의 양보안을 논의할 것으로 전망했는데, 발표문에는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NYT는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17일)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영토'와 '자산'을 다룰 것이라고 한 발언을 상기시키면서 "러시아가 거의 모든 우크라이나 점령 지역을 인정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NYT는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대통령에게 양보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다른 징후도 있다"며 러시아의 전쟁 범죄에 대한 국제 조사팀에서 미국이 철수했다는 점을 들었다.
러시아 정치학자 세르게이 마르코프는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두 정상 간 협상의 주요 결과는 부분적 휴전"이라며 "푸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흑해 해상 안전에 대한 지지라는 작은 정치적 선물을 건넸다"고 주장했다. 대신 양국 간 아이스하키 경기의 교환 개최로 중단된 비자 발급및 항공편 운항이 재개될 수 있다고 기대했다.
2시간 30분에 가까운 푸틴-트럼프 대통령의 이날 통화는 미-러 두 정상간 전화 통화 시간으로는 최장 기록이다. 길었던 지난 2월 12일 통화도 1시간 30분을 넘지 못했다. 전쟁 발발 직전인 2021년 12월 31일 이뤄진 푸틴-바이든 대통령 통화 시간은 50분에 그쳤다. 오바마 전 미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이 전화를 든 2012년 3월 12일에는 겨우 20분 통화한 뒤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