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모 주교의 명상 칼럼] 실존적 차원의 나 (1)
예수와 붓다도 씨름한 질문
우리는 재산과 지식과 명예와 권력의 영역을 넓혀보려고 매일매일 땀을 흘리며 살아간다. /셔터스톡
오늘 날 우리 사회의 큰 병폐 중에 하나는 다른 사람과 맹목적으로 비교하고, 내가 좀 못하다 싶으면, 지고는 못사는 심리가 사회 전반에 만연되어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어떤 회사원이 친구들이 모두 큰 아파트에 사니까 자기도 은행에서 융자를 내어 큰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했다. 그는 일생동안 은행 융자금을 내다가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임종 시에 주위에 모여 있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다 이루었다.”고 한 마디 하고는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누가 우스개 소리로 지어낸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야기 속에는 삶에 대해 성찰해 볼만한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의 삶의 영역을 넓히려고 애를 쓴다. 재산과 지식과 명예와 권력의 영역을 넓혀보려고 매일매일 땀을 흘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바쁜 마음과 발걸음을 잠깐 멈추고 서서, ‘내가 왜 이렇게 바쁘게 뛰어다니지?’ ‘내가 하는 일의 의미가 뭐지?’ ‘이렇게 바쁘게 뛰어다니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지?’ 하는 따위의 물음을 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물음들을 잠깐 마음속에 떠올렸다가는 이내 잊어버리고 다시 바쁘게 뛰어다닌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조용한 곳을 찾아 앉아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고 호흡을 고르게 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여 깊은 생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예수도 이런 질문을 가지고 씨름을 했던 것 같다.
그가 세상에 나와서 사람들을 가르치기 전에 광야로 들어가 사탄의 시험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은 그의 내면에 솟아오르는 이런 질문들과 씨름을 한 것에 대한 신앙적 표현일 것이다.
붓다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6년간이나 인간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마침내는 죽어가야 하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깊은 사색 속에서 바라보다가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예수와 붓다의 차이점이 있다면, 예수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전제로 한 인간실존의 문제에 골몰한 것이며, 붓다는 신에 대한 전제 없이 인간 실존의 문제를 살펴보다가 깨달음을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와 예수는 종교의 지도자로 유명해졌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늘어나서 그들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역사 속에서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바쁜 마음을 잠시 멈추고 서서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고, ‘나는 누구인가’ 라는 실존적 질문에 애태우고,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보려고 무던히 노력했을 것이다.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고 당신도 그 중에 한 사람일 것이다.
사람들의 이런 행위를 명상(瞑想, meditation)이라고 하는데, 나는 근 30년이 넘게 명상을 해오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話頭)를 단 한 번도 놓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아직도 만족할만한 답을 찾지 못했다.
인간의 실존이란 무엇인가?
실존주의 철학자인 하이덱거(Martin Heidegger)는 인간의 탄생을 ‘이 세상에 내던져진 것(thrown into the world)’이라고 표현한다. 반면에 기독교는 인간의 탄생을 ‘이 세상에 초대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탄생이 신의 섭리에 의해 이 세상에 초대된 것이라면, 신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신의 뜻에 따라 살다가, 신의 부름에 따라 다시 저 세상으로 돌아가 그의 품에 안기면 된다.
그러나 탄생이 이 세상에 내던져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인간은 살아남기 위하여(to survive) 다른 사람과 경쟁하며 아등바등 살아야 하고, 하이덱거의 말처럼 죽음이라는 배경음악을 들으며 일생을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계속>
글 | 윤종모 주교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