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518. 묵상글 ( 부활 제7주간 토요일, - 상관하지 않아 방해 받지 않는. 등 )
----------------------------------------------------
240518. 부활 제7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5.18 04:58
- 상관하지 않아 방해 받지 않는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오늘로써 부활 시기를 끝내는 우리 교회는
사도행전과 요한복음도 끝부분을 들려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 최후를 두 성경이 들려줄 법도 한데 그러지 않고,
아무 방해받지 않고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얘기와
아무 상관 말고 주님 따르라는 말씀을 베드로 사도가 듣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것은 영화나 소설에서 결말을 짓지 않고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것과 같은 수법일까요?
제 생각에 이것은 그런 것이기보다는 주님을 따름과
복음의 선포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되기 위해서는 누구에 의해 그만두지도 않고,
내가 그만두지도 않는 두 측면이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가 아무 방해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방해하는 사람이 진짜 아무도 없었다는 그런 뜻일까요?
그런 뜻일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에 그것은
방해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바오로 사도가 방해받지 않은 겁니다.
그것은 복음 선포의 일념으로 누가 방해해도 상관하지 않은 결과이고,
총탄이 아무리 빗발쳐도 고지를 향해 달려가는 전사와 같은 것입니다.
상관하지 않기에 방해받지 않는 것,
이것이 오늘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고,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러니까 죽기 전까지는 본받아 살아야 할 점입니다.
사도행전과 요한복음은 우리에 의해서 계속돼야 한다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
240518.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고대 그리스 철학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인가가 창조되는 ‘목표’, 또는 ‘목적’을 뜻하는 ‘텔로스’에 대한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도토리가 자라나 떡갈나무가 되고, 새끼 고양이가 자라서 성인 고양이가 되면 그것들의 텔로스가 달성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텔로스는 무엇일까요? 즉 우리 삶의 목표, 목적은 무엇일까요?
가톨릭 교리를 보면,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며, 이 세상에서 그분을 섬기고, 하늘 나라에서 그분과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궁극의 행복인 것이고, 우리 삶의 목표이며 목적입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야 ‘인간의 텔로스’를 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이 길을 벗어납니다. 신앙생활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인데도, 자기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할 수 없는 이유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냅니다. 결국 우리 삶의 목적에 다다를 수 없게 됩니다.
삶은 많은 유혹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화려하고 편한 것들 사이에서 그와 반대로 볼품없고 힘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있습니다. 문제는 화려하고 편한 것만 자기 삶의 첫 번째라고 외친다는 것입니다.
나의 텔로스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도달했는지도 떠올려 보십시오. 자기 텔로스를 완성하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후회와 슬픔만 간직하지 않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로 유명한 요한 사도를 가리키면서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보기에, 요한 사도는 특별한 지위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을 정도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고, 부활의 순간에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의 미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미래가 중요했습니다. 즉, 남의 텔로스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자기의 텔로스를 완성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는 말씀을 실천해야 자기의 목표, 목적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같은 모습만을 보이면서 자기의 목표와 목적을 잊어버렸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을 따르면서, 특히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나의 목표, 목적에 완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미래가 훨씬 밝아집니다.
-------------------
오늘의 명언: 용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평화와 행복을 보답으로 준다(로버트 뮬러).
----------------------------------------------------
240518.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오늘 우리는 내일 성령강림대축일을 앞두고 부활시기를 마무리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호숫가에서 나타나시어 아침을 차려 먹이시고, 베드로에게 세 번이 사랑을 확인하신 후에 사명을 맡기시고, 그의 장래를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사도 요한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장래에 대한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장래에 대해서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할지라도 ,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한 21,22)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에게는 베드로와는 다른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각자에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베드로에게는 ‘증거’의 몫이, 그리고 그들을 뒤따라오는 사랑하는 제자에게는 ‘증언’의 몫이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는 ‘선포’(kerygma)와 ‘증거’(mariteria)라는 예수님의 예언직의 두 가지 형태입니다. 곧 말씀의 선포와 행위의 모범을 통한 증거를 나타냅니다. 이 둘은 서로 경쟁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시켜주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따라 하늘나라의 복음을 세상에 알리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참 아이러니하고 재미난 내용을 드러내줍니다. 곧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랑을 확인까지도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다른 제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베드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오랜 고향 친구입니다. 그러니 그의 장래가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혹은 찬구를 경계하거나 비교하거나 경쟁하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여기서 베드로는 요한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곧 “요한을 위해서 묻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요한을 무척 사랑했고, 또한 그들의 친밀한 관계는 <사도행전> 2-4장과 <요한복음서>에 잘 나타나고 있음을 말하고, 본문에서 베드로는 전에 최후만찬에서 배신자에 대해 예수님께 직접 묻지 못하고 요한을 시켜서 물었기에, 이제 요한을 위해서 호의로 직접 묻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고 하십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일’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실, 베드로는 벌써 그렇게 하지 안했던 적이 있습니다. 목숨을 내놓고까지 따르겠다고 하고서 이미 세 번이나 배신하고 도망가지 않았던가요?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를 호숫가에서 제자로 부르실 때에도,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올라갈 때에도, 부활하시어 나타나셔서도, 오늘 <복음>에서도 여전히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죽을 것입니다. 곧 베드로는 ‘증거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증언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활동의 사목직을, 요한에게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관상의 역할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한 베드로에게는 교회를, 당신이 사랑하신 요한에게는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말씀의 선포를 증언으로 추종하며, 말씀의 증거를 모범으로 삼으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면서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주님!
길을 가다가 멈추지 않게 하소서!
멈추다가 떠밀려가지 않게 하소서!
떠밀리다가 뒤로 휩쓸리지 않게 하소서!
휩쓸리다가 가야할 길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을 따라 가게 하소서!
눈길을 돌리느라 옆길로 새지 않게 하소서!
자신을 따르느라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고, 당신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
240518. 부활 제7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인생
우리 각자에게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의 고유함이 있습니다. 각자는 하느님께서 주신 탈렌트를 가지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족합니다. 모두가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운명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던 사람입니다(요한21,20). 그런데 그 제자는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21,21)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의 삶의 모습에 대해 많은 관심을 지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일생이고, 너는 너의 갈 길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나를 따라라.”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 제자가 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비교하지 마라.’ ‘너는 너대로 사랑을 받으면 된다.’ 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각자가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따름의 방법도 다양합니다. 그러므로 그 길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의 운명에 관심을 갖는 것은 쓸모없는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기서 영원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호기심은 걸림돌일 뿐입니다. 아마도 요한은 예수님만을 따르는 추종의 길을 걷고, 베드로는 뒤를 돌아보는 주저함이 있었나 봅니다.
그러므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루카9,62) 되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흔들림 없는 나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걷는 발걸음에 복이 넘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에는 시간이 필요하다지만 사랑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당신이랍니다. 당신이 없으면 시간도 사랑도 아무 쓸모가 없으니까요.” 누구에게 행복해 보이려고 하지 말고 실제로 행복하십시오. 예수님을 모시게 된 것이 복입니다.
“남의 떡은 더 커 보인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 것보다도 남의 것이 훨씬 더 좋아 보인다.’는 말입니다. 자기 것에 만족하고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과 비교하며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허세를 떨기도 하고 분수없이 지낼 때가 있습니다. 잘 보이려 하지 말고 지금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이 아름답건만 그것이 마음 같지 않아 힘들어 합니다. 나는 나의 삶을 사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그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해 주면 속을 끓일 이유가 없건만 안타까움이 큽니다. 서로에게 주어진 고유한 인생을 주님의 마음에 들게 사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518.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화나 드라마가 재미있으면 끝이 가까울수록 아쉽습니다. 사랑하는 연인도 그렇습니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면 못내 아쉽습니다. 헤어짐이 아쉬워서 서로, 상대방의 집으로 데려다주기도 합니다. 예전에 중곡동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제가 예비자 교리를 가르쳤던 학생이 찾아왔습니다. 어느덧 직장인이 되었고, 자동차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중곡동에서 식사하고, 저는 봉천동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봉천동에서 입가심으로 한잔 더하고, 돌아오는데 저를 중곡동까지 데려다준다고 하였습니다. 교사와 학생의 만남이 이럴진대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은 더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50일 동안 주님의 ‘부활 시기’를 지냈습니다. 부활삼종기도를 하였고, 부활 성가를 불렀습니다. 7주 동안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갈망, 믿음, 말씀, 착한 목자, 포도나무와 가지는 우리가 부활 시기에 들었던 주님 말씀의 주제입니다. 그리고 지난 주님 승천 대축일에는 또다시 ‘갈릴래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주님의 부활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부활 시기에 우리는 ‘사도행전’을 독서로 읽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면, 교회에 위기가 찾아올 때면 늘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어려움과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주님 부활의 체험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두려움에 떨었던 베드로 사도,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사도는 한 번의 설교로 3,000명이 넘는 사람에게 세례를 줄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초대교회의 신학과 교리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서, 요한이 전한 편지, 요한 묵시록’을 남겨 주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다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사도들은 마귀를 쫓아냈고, 병자를 고쳐주었고,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순교의 월계관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전화위복(轉禍福)’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서품 성구도 시편 126장을 정했습니다. 저의 서품 성구는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래서 아담의 죄를 ‘복된 죄’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아담이 죄를 지어서 우리에게 ‘원죄’가 주어졌지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모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쩔 수 없이 로마의 법정에 상소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에게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당시 가장 힘이 센 로마의 심장부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원망하면 원망할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미워하면 미워할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들이 생깁니다. 기뻐하면 기뻐할 일들이 생깁니다. 2024년 부활 시기는 이제 연중시기에 자리를 내어 줄 것입니다. 우리는 2025년 부활을 기다리며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어 놓은 곳에 우리가 마침표를 찍으면 안 됩니다.
----------------------------------------------------
240518. 부활 제7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는 사도 요한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로 표현하는 요한은 만찬 때에 주님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면 요한은 주님의 가슴에 기대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바로 주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즉 요한이라고 말합니다. 왜 요한은 주님의 이야기를 적었을까요? 사실 공관복음(마태오, 마르코, 루카)만으로도 충분했을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주님께서 요한을 사랑한 만큼 요한도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떠나면 그 사람을 기리려 하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그래서 위인들이 떠나고 나면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를 기리려 책과 동상, 그림들을 남깁니다. 이것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요한도 같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한 주님을 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물론 다른 이들이 전한 주님의 모습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만났던 주님, 자신이 보고 들었던 주님, 자신이 안겼던 주님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과 다른 어조로, 다른 시선으로 주님을 전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주님은 모두 우리 각자가 만난 주님입니다. 우리가 만난 주님께서 전체가 아닐지라도 상관없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가 다른 모습의 주님을 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처럼 사랑하는 주님을 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
끼어들기
얼마 전 보복 운전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봤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재미있었습니다.
그 영상 밑에 댓글을 달았던 사람들 거의 모두가 보복 운전을 잘했다고 칭찬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복 운전을 당해도 싸다고 입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보복 운전을 하게 된 동기가 바로 끼어들기였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틈 없는 곳을 비집고 들어오는 끼어들기. 전문 용어로 ‘칼치기’라고 한답니다.
그렇게 칼치기로 비집고 들어왔고 놀라고 당황한 뒤차는 그 뒤부터 보복 운전을 한 것이었습니다.
보복 운전도하면 안 되겠지만 칼치기도 하면 안 됩니다. 갑자기 끼어드는 모습에 많은 사람은 놀라고 또 사고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전후좌우 상황을 살피고 깜빡이 켜고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도 이런 일들은 일어납니다. 준비되지 않았는데 우리 삶에 불쑥 끼어드는 사람들, 그들의 무례함.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전후좌우 살피고 깜빡이 켜고 마음 다치지 않도록 서로서로 배려합시다.
----------------------------------------------------
240518.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축제인생
<구원의 꽃자리>
“주님은 당신 성전에서, 하늘의 어좌에서,
세상을 굽어보시노라,
당신 눈은 인생을 살피시느니라.”(시편11,4)
계속되는 5월 성모성월, 파스카 축제시기이고 내일은 대망의 성령강림대축일로 부활 파스카 축제시기도 끝납니다. 일년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신록의 기쁨 충만하고 끊임없이 피어나는 다양한 꽃들입니다. 말그대로 파스카의 봄꽃들입니다. 파스카의 꽃처럼 살라고 부단히 피어나는 온갖 꽃들입니다. 거룩하게 살았던 성인들은 하늘의 별들로 떠오르고, 착하게 살았던 신자들은 매해 끊임없이 꽃들로 피어나나 봅니다. ‘땅의 행복’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땅의 행복은
밤마다 누워 하늘 바라보며
별들 가득 담아 두었다가
꽃들로 피어내는 것이다.”-2001.8.20.
눈만 열리면 어디나 구원의 꽃자리이며 펼쳐지는 축제인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꽃자리에서 행복한 축제인생을 살아야 할 의무와 책임, 권리가 있습니다. 이래서 만세칠창으로 시작하는 하루요, 마감하는 하루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또 이어 떠오르는 ‘구원의 꽃자리’라는 시입니다.
“자리 탓하지 않는다
자리 찾지 않는다
어디든 뿌리내리면
거기가 구원의 꽃자리이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회색빛 죽음의 벽돌들 그 좁은 틈바구니
집요히 뿌리내린 연보랏빛
파스카의 제비꽃들!
눈물겹도록 고맙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 축제인생이다
찬미와 감사다
절망은 없다”-2001.4.18.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요즘 저의 기쁨이자 행복은 면담고백성사후 집무실 옆 꽃길에서 사진을 찍어나누는 일입니다. 사진과 더불어 주고 나눈 메시지입니다
“사진처럼 예쁘고 행복하게 사세요.”
“신부님을 뵌 것이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감사합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한길만을 걸어오신 삶이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나누고 싶습니다.
“한 사람을 기르는 것은 하나의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눈앞의 아이에게서 다가올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한다.”<다산>
“일년의 계획은 곡식을, 십년의 계획은 나무를, 일생의 계획은 사람을 심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관자>
모 정치인의 “궤멸적 저출생, 패싸움만 할 것인가?” 언급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정치의 양극화, 이념의 양극화, 정서적 양극화. 빈부의 양극화등 풀어야할 산적한 양극화가 끝이 없습니다. 성령이 희망입니다. 성령에 의한 내적혁명, 영적혁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저녀녁기도 찬미가는 성령강림청원 찬미가였습니다. 7절까지 내용이 참 풍부합니다만 2절만 나눕니다.
“우리들의 위로자며 천주주신 선물이라,
온갖샘의 근원이며 타는사랑 주시도다”
성령의 희망, 성령의 기쁨, 성령의 위로...성령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성령의 선물은 끝이 없습니다. 교회를 풍요롭고 충만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은총이요 제가 매일 강론을 쓸 수 있는 것도 성령의 은총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에서 전통의 달인 수제자 베드로, 선교의 달인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 사랑의 달인 애제자로 이뤄진 교회의 풍요로움을 묵상합니다.
모두가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몫입니다. 오늘로서 끝나는 부활시기, 복음의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와의 대조가 흥미롭습니다. 머지 않아 순교의 죽음을 맞이할 베드로입니다. 애제자가 어떻게 될 것인가 묻는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전통의 달인이자 활동가인 수제자 베드로에게 본연의 일에 충실하며 애오라지 주님만을 따르라 하십니다. 불필요한 관심에 대해 마음을 접고, 마음을 닫고 네 본연의 섬김의 책무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 익명의 애제자입니다. 수제자 베드로와 꼭 함께 등장하는 익명의 애제자 사랑의 달인입니다. 말그대로 활동과 관상의 조화를 상징하는 두 제자입니다.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있는 익명의 애제자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 애제자가 상징하는 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교회의 심장처럼, 교회의 보물처럼 숨겨져 있는 사랑의 관상가라 합니다. 애제자들은 언제 어디에나 교회의 중심부에 익명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드러나는 지도자 베드로가 전통과 활동의 상징이라면 이런 애제자는 관상과 사랑의 상징입니다. 어느 저명한 신학자의 통찰이 고맙습니다.
“실제적 인간으로서, 사랑받던 제자는 어느 시점에 죽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킴으로 예수님에 의해 사랑을 받았던 모든 이들을 상징하는 완전한 제자로서 그는 예수님이 내림시까지 머물러 있어야 한다. ‘교회는 결코 그 애제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The Church must never be without him)’”
잘 보십시오. 멀리 갈 것 없이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잘 들여다보면 이런 애제자를 발견할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이 바로 애제자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교회의 심장같은 사랑의 달인이자 관상가인 애제자들이 있어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전통의 장상을 상징하는 수제자 베드로 역할이 익명의 숨겨진 사랑의 관상가 애제자와 같을 수 없습니다. 서로 보완하므로 풍요롭고 충만한 교회공동체입니다. 여기에 선교의 달인 바오로가 추가되니 얼마나 풍요로운지요!
순교의 죽음을 목전에 둔 바오로는 세계의 중심부 로마에서 복음의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미미하게 시자되지만 유럽대륙을 산불처럼 휩쓸 복음의 불이 될 것입니다. 비록 쇠사슬에 매어있는 수인 바오로이지만 말씀을 묶어둘 수 없습니다. 구원의 꽃자리에서 복음 선포에 전념한 선교의 달인이요 그 모습이 참 자유롭고 아름답습니다. 구원의 주님은 늘 그와 함께 하셨음을 봅니다.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년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는 모든 사람을 환대하였다.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어디에서나 구원의 꽃자리로 삼아 복음 선포에 전념하며 축제인생을 살았던 이런 선교의 달인 바오로와 전통의 달인 수제자 베드로, 그리고 애제자 사랑의 달인이 잘 조화된 교회는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다운지 감탄하게 됩니다.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각자 구원의 꽃자리에서 사랑의 달인 애제자가 되어 축제인생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의로우신 주님이기, 정의를 즐기시나니,
올바른 자, 당신 얼굴을 뵈옵게 되리라.”(시편11,7). 아멘,
----------------------------------------------------
240518.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을 걸으니 길벗이지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길이 있어
길을 걷고
길을 걷다
벗을 만나
함께
길을 걸어야
길벗이지요
앞선 길벗
붙잡지 않고
뒤선 길벗
가리지 않으며
더불어
길을 걸어야
길벗이지요
길벗에게 마음
빼앗지 않고
길벗에게 마음
빼앗기지 않고
오롯이
길을 걸어야
길벗이지요
----------------------------------------------------
240518. 부활 제7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1,21-22)
관상과 행동
하늘로부터 교회에게 계시된 바, 교회가 가르치고 권하는 삶의 두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 안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는 삶입니다. 하나는 낯선 땅에서 시간 안에 남아 있는 삶이고, 또 하나는 영원한 하늘 거처에서 사는 삶입니다 ... 첫 번째 삶을 나타내는 이는 베드로 사도이고 뒤의 삶을 나타내는 이는 요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속세의 악을 견디는 일에서 당신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나를 따라라”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요한에 관해서는 영원한 행복을 되찾아 주시기 위해 당신이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더 명확히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행실은 내 수난의 본을 보고 완전하게 배웠으니 나를 따라라. 그러나 지금 막 시작된 관상은내가 왔을 때 완전하게 되도록 내가 올 때까지 계속하거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내하는 충만한 신심은 그리스도를 따르지만, 지식의 충만함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채워지며 그때서야 완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악은 죽어 가는 이들의 땅에서 견디는 것인 반면, 주님의 좋은 것들은 산 이들의 땅에서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사람은 새로운 성전이다.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지금도 끊임없이 만물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창조 행위는 과거 속으로 사그라지지 않고, 향상 시작 중이고, 진행 중이며, 새롭습니다.“
우리의 원천과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영원히 젊고 영원히 현재인 이 시작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새로움은 아직 경험되지 않은 것. 이제 막 시작되려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분과 하나가 된다면, 우리는 다시 ‘새로워질’ 것이다. … 하느님은 영원히 일한다. 그분은 힘들이지 않고 창조하고 있다." 하느님이 하는 일은 모두 새롭다.
“지혜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살라고 만드셨다’(1,14). 현존이야말로 만물의 시작이요 처음이며 원천입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하느님의 모든 일이 새롭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지혜서는 말합니다. ‘지혜는 … 스스로는 변하지 않으면서 만물을 새롭게 한다’(7,27). 묵시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21.5). 이사야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시작이요, 내가 마감이다’(44,6).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끊임없이 창조하고 계십니다.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것과, 그것의 목적은 언제나 시작입니다. 그것은 늘 일어나고, 늘 태어나고, 늘 태어났습니다.(171)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과 '믿음의 다섯 기둥'
이슬람의 ‘믿음의 다섯 기둥'
순례 여행길에서 메카가 가까워지면 이슬람교도들은 목욕 재계하고 순결을 상징하는 흰 천을 걸친 뒤 메카의 카바 성소와 아라파트 언덕에서 그리고 인근 사막지역에서 질서정연하게 종교 의례에 참석한다. 대개 종교 의례가 자신의 원형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이슬람교도 유일신 신앙의 처음 신봉자요 믿음의 아버지라고 믿는 아브리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을 둘러싸고 일어난 <구약성경>의 고사를 종교 의례 형식으로서 재연한다.
의례 재연의 궁극 목적은 유일신 알라만 섬기고 그 뜻에 순명하겠다는 신앙 다짐, 영적 자기 정화와 영지의 밝아짐, 죄의식의 소멸과 내세 천국 신앙 등을 다짐하는 데 있다. 이 기간 동안 ‘믿음의 다섯 기둥'을 보다 철처하게 실천하면서,, 현실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신분 차별과 빈부 격차와 인위적 가식을 벗어버리고 성실한 자세로 ‘신 앞에 선 참자아'로 되돌아 가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실펴보았지만 이슬람교에서 강조하는 '믿음의 다섯 기둥'은 결국 이슬람의 유일신 신앙의 표현 형태이자 지속의 방편이며 구체적 실천 강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위대한 강점은 딘순성과 통일성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86)
----------------------------------------------------
240518. 부활 제7주간 토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이제 지난 7주 동안 계속된 부활 시기가 끝나 갑니다.
독서와 복음도 각 책의 마무리 부분이 봉독 되는데, 사도행전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요한 복음서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맨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사도단의 대표들이 부활 시기의 마지막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으로 선정된 요한 복음서의 마지막은 이 책의 저자와 저술 목적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두 번이나 되풀이되며 이질감을 주는 표현이 나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는 이 물음이, 복음서의 끝을 장식하는 데에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옮긴 문장을 원문 그대로 옮기면 “그것이 너에게 무엇이냐?”입니다.
주변과의 비교나 경쟁, 불필요한 견제에 휘말림 없이 나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지혜로운 삶의 자세임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독서에서도 바오로 사도를 통하여 보게 됩니다.
그는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 되었지만 불안과 공포에도 흔들리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칩니다.
주변의 상황이나 조건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가는 모범을 누구보다도 훌륭히 실천한 것입니다.
“남과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책을 읽은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은 언제나 저에게 위로가 됩니다.
날마다 그날의 말씀을 붙잡고 나의 길을 가는 것, 비교에 휘둘리거나 경쟁하느라 소모되지 않는 것, 내 삶에 집중하고 이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의 길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