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네 정육점
김선미
한 주먹의 볼펜을 받고 보니 눈이 올 것 같다
개업 1주년 기념, 동그란 펜은 몸통이 하얗고 위아래가 푸른빛이다
쇠고리에 통째로 매달린 고기들,
펜 옆엔 칼이 있고 화분이 있고 먹다 만 떡이 있고 전화기가 있고
창 밖 도로엔 스프레이 펜으로 표시해놓은 구부러진 사람 모양이 있고 차들이 지워가고 있다
통영 앞바다에 내리는 눈 같다
소처럼 두 눈을 껌뻑거리며, 사내
마흔이 넘은 노총각이라며 돈 벌면 장가도 가야 한다는데
나는 통영 앞바다가 보고 싶다
서울에서 통영까지는 다섯 시간쯤 걸리던가
그런데 노트에 군데군데 흔적을 남기며 가는 이놈을 보노라니 바라나시 소 같다 길 가운데 떡하니 서서 갈 길을 방해하던
나는 가고 싶은 곳을 정정한다 갠지스 강에 가고 싶다 라고 쓴다
서울에서 바라나시까지는 몇 시간이 걸리더라 아침이 와도 오지 않는 야간열차를 기다려야겠지만
빠져나오지 못해 오후 내내 헤매던, 가도 가도 똑같은 곳에 도착하는 곳,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그 미로의 골목을 가고 싶다 라고 쓴다
시체를 태우면서도 울지 않는 머리를 빡빡 민 상주가 보고 싶다 라고 쓴다
그 곁에 어슬렁거리며 발목을 물고 도망가던 눈이 뻘건 개와 소들을 바라보며 라씨를 먹고 싶다 실컷 토하고 싶다 라고 쓴다
바라나시에는 눈이 오지 않는다 라고 쓴다
통영의 새벽엔 별이 한 움큼씩 쏟아진다 라고 쓴다
어릴 적 눈 오는 들판에서 눈을 꿈뻑이던 소를 본 적이 있다 소의 발자국 지워가던 눈을 바라본 적 있다 라고 쓴다
지금도 통영엔 흰 집이 푸른 바다에 섬처럼 떠있겠지 라고 쓴다
이 볼펜이 다 닳아지면 바라나시에도 눈이 올까 라고 쓴다
춤
버린 거울 속에 눈빛들 짙은 얼룩으로 자라고 있다
잘려나간 표정 너머 새들이 날고 있다
무덤에서 자라난 머리카락처럼 내 거울은, 내게서 버려진 것들 나도 모르게 키우고 있다
유행 지난 춤을 유행처럼 추고 있다
허공에 선 하나 긋기 위해 모든 뼈들을 다시 맞춘다
손끝에 힘주고 빼는 일 심장까지 들어왔다 나가는 파도를 그려내는 일
동그랗게 태아처럼 웅크렸다 발이 먼저 빠져나온 형상으로 쭈뼛거리는 일
몸의 부근을 기억하기 위해 나는 며칠 전부터 춤에 대해 궁리 중이다
어제는 병신춤의 대가가 돌아가셨고 석연찮은 몸의 중심으로부터 내 춤이 멀어져갔다
거울 속에서 의도적으로 몸이 빠져나왔다
텅 빈 마룻바닥에 앉아 밥을 먹는다
여러 개의 거울 앞에서 밥 먹는 연습을 한다
어느 거울에 눈을 맞춰야 할지 몰라 숟가락이 입을 비껴가는, 춤
몸이 먼저가고 눈이 따라오는 동작들
처음의 구름이 처음의 파도가 처음의 음악이 몸속에서 지연된다
내 걸음걸이엔 채 따라오지 못한 눈이 길 밖으로 나뒹굴고
몸의 기억으로 나는 간다
—계간 『시에』 2013년 가을호
김선미
경기도 안성 출생. 2009년 『시에』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