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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시(西施)
춘추전국시대의 미인
본명은 시이광(施夷光).
양귀비와 더불어
동양에서 미인의 대명사로 일컫는
여자이다.
저라산 출신으로
오나라에 패망한 월왕 구천의
충신 범려가
서시를 호색가인 오왕 부차에게 바쳐,
결국 서시의 미색에 빠져
정치를 태만하게 한 부차를
마침내 멸망시켰다고도 전해진다.
이때 범려는 서시와 함께
정단이라는 미녀도 바쳤으나,
부차는 정단보다 서시를 더 총애했다.
그 일로 인해 정단은
상사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여러모로 말희, 달기, 포사 등과 함께,
고대 중국인들의
여성관을 엿볼 수 있는 인물이다.
아닌 게 아니라 다 패턴이 너무 똑같다.
1.1. 최후에 대한 설들
오나라 멸망 이후의 행적은 불분명하다.
한무제 이전의 역사를 다루는
역사서들 중
가장 신뢰도가 높은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이후의 행적이 전혀 언급되지 않기 때문.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 설은
범려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설로,
대중들에겐 잘 알려졌으나
정작 가능성은 적다.
그 까닭은 월나라 재상에서 퇴임한 뒤
범려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가
적지 않게 있으나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며
상인, 재상 노릇 등을 했다.),
이 중에 그토록 절세미녀였다는
서시에 대한 내용은
일언반구도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설은
사모하던 오자서를
월나라를 위해 살해한 후
죄책감으로 숨졌다는 설이다.
일설에는 몸에 돌이 매달린채
바다에 수장 당했으며,
그녀가 죽은 후
가리비가 잡혔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가리비의 속살이
서시의 혓바닥을 닮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세 번째 설은
그 외모가 나라를 망칠 것을 우려한
구천의 왕비
(범려의 부인이라는 말도 있다)가
꾸민 계략에 걸려
강에 빠져 익사했다고도 한다.
공자의 제자들이 적은 기록이며,
열국지에서는 이쪽을 채택했다.
정비석의 소설 손자병법에서는
이를 토대로
서시의 죽음과 범려의 행방불명을
실제와 좀 다르고
더 드라마틱하게 서술했다.
오가 망한 후
구천이 서시를 가지기 위해
범려에게 서시를 찾아오게 했는데,
범려는 서시를 데려오면
그녀로 말미암아 오가 망한 것처럼
월도 망한다고 간언하지만
구천은 범려에게
그녀에게 상을 준다는 명목으로
대려오라 달달 볶는다.
그렇게 떠나게 된 범려는
구천을 생각하며
"그의 관상이었던 고생은
함께 나눌 수 있지만,
기쁨은 함께 나눌 수 없던 것이 맞구나."
라고 하며,
월을 떠나야 겠다는 마음과
마지막 충의로써라도
경국지색인 서시를 죽여
월의 패망의 길은 막겠다는 마음으로
오로 향하게 된다.
오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범려는 서시를 찾았다는
부하의 말을 듣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향하게 된다.
그때 서시는 혼자서
부차가 그녀를 위해 만들어 준
연못 위에
화방형태의 배를 타고 있었는데
서시를 보게 된 범려는
그녀의 미모의 감탄하며
함께 도망치자 하지만,
서시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왜 도망칠 수 없는지 물어보니
"자신은 몸으로는 부차를 사랑했으며,
정신으로는 오 대부를 사랑했습니다.
두 사람을 사랑한 자신이지만
나라를 위해 희생해야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죽어야 마땅합니다."라고 한
그녀의 슬기로움을 보고
감탄한 범려는 다시 자기 배에 올랐고,
서시를 태운 화방은
지는 저녁노을 속으로
점점 희미하게 멀어져만 갔었다.
범려는 그 모습을 보며
"마치 선녀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구나."라고
말했다.
그때 갑자기 화방을 향해
번개가 내려쳤고,
깜짝 놀란 범려는
다시 화방쪽을 향해 노를 저어
그녀를 찾았지만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녀의 끝을 확인한 범려는
망명길에 오르기 전에
구천에게는
미녀를 조심하라는 경고와
하야의 편지를
대부 문종에게는
토사구팽의 일화를 담은 편지
전하고 망명길에 올랐다는 내용이다.
1.2. 일화
장자를 비롯한 사상가들은
서시를 좋게 보지 않았는데
나라를 망하게 한 것 이외에도
장자(莊子)천운편(天運篇)에 나오는
'효빈'{效顰 : 얼굴 찡그림(嚬)을
따라하다(效)}
설화가 그런 점을 잘 보여 준다.
서시봉심(西施捧心),
혹은 서시빈목(西施顰目)이라고도 하는
고사이며 빈축
(嚬蹙, 눈살을 찌푸리고
얼굴을 찡그림)으로도 잘 알려진다.
내용은 월나라의 절세미녀인 서시가
가슴앓이병이 있어
언제나 미간을 찌푸리는데
워낙 아름다운지라
그 표정마저 절색이었다.
그런데 이웃 마을의 추녀 동시(東施)가
그것을 보자 자기도
가슴에 손을 대고
미간을 찡그리며
마을을 돌아다녔더니
마을 사람들은 모두 기겁해
부유한 사람은
집으로 뛰어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나오지 않았으며
가난한 사람은
가족들을 이끌고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갔다는 이야기다.
이쯤 되면 저 추녀의 못생김도
가히 경국지색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서시의 찡그림을 따라 한
동시에게 잘못이 있는 거지만
서시가 그 빌미를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
별명은 침어(沈魚)와 경국(傾國)
침어는 길을 지나가던 서시가
얼굴을 씻기 위해
강에 얼굴을 비치니
그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
(서시를 보느라)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속으로 가라앉았다는(沈魚) 이야기.
그런데 사실 원문은
정 반대의 뜻이다.
毛嬙麗姬 人之所美也
魚見之深入 鳥見之高飛
麋鹿見之決驟 : 모장과 여희는
고운 여인이니
사람이 보고는 아름답다 하지마는,
물고기가 보고는
물속에 깊이 잠기며,
새가 보고는 높이 날아가고,
고라니가 보고는
마구 도망가 숨어 버린다.
사람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로 아름다운 것인지를
묻는 철학적인 화두에 가깝다.
그리고 서시와 정단이
오나라에 바쳐졌을 때
둘이 도착하자
그 아름다움을 구경하려고
군중이 몰려드는 바람에
성문이 부서졌으며,
둘을 본 오자서가
정단은
'성을 자빠뜨릴(傾城) 미인'이라 하여
받아들여도 괜찮다고 했으나
서시는 '나라를 기울어뜨릴
(傾國) 미인'이라 하여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 경국지색이라는
성어가 유래했다.
여담으로, 복어 요리 중
가장 으뜸이라 불리는 황복은
명나라의 만력제를 비롯하여
역사 속 수많은 귀족들과
왕족들의 주식이 되었는데
이 황복을
서시의 유방(...)이라고도 부른다.
복어의 모양이
유방의 모습과 같다하여
이렇게 부른다는 사람도 있고
복어의 정소 부위에 해당하는
위가 터졌을 때 나오는
흰 액체를 젖에 비유하여
서시유(西施乳)라 표현한다는
사람도 있다. 참고영상
차를 우리는 차호 중에도
아름다운 여인의 유방 모양을
본따 만든 것들을
특별히 서시호라고 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우리나라 속담
'제 눈에 안경'에 해당하는 말을
'정인안리출서시
(情人眼里出西施)'라고 한다.
직역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서시가 나타난다."라는 뜻.
2. 왕소군(王昭君)
양귀비, 서시, 초선과 더불어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
기원전 1세기경의 인물로,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
복주누약제 선우(復株累若鞮單于)의
처로
원래는 한나라 원제의 궁녀였다.
정확한 생몰연도는 불확실하다.
다만 호한야 선우와
결혼한 시기 등을 통해
출생 년도를 추정할 뿐이다.
본명은 장(嬙)으로
성과 합쳐 킹왕장(...)이 본명이지만,
자가 소군이기에
흔히 왕소군이라 불린다.
또 호한야 선우는
왕소군을 녕호 연지(寧胡 阏氏)로 봉했다.
훗날 사마소의 이름인
'소(昭)'를 피휘하여
왕명군(王明君) 혹은
명비(明妃)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양귀비나 초선 등에 비하면
일반 대중들에게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는 인물.
그러나 중국에서는
지지가 확고한 미녀이다.
포사, 양귀비 등
대부분 중국사에 등장하는 미녀들이
국가의 멸망에 관여하는
좋지 못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데 비해,
왕소군은 평화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
숭고한 여인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왕소군이 자의로 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정말 자신을 희생한 것인지는 불명.
2.1. 혼인 과정
한서 원제기에서는
경녕(竟寧) 원년(기원전 33년)
봄 정월에 호한야 선우가 입조하여
위와 같이 혼인을 요청하자,
대조(待詔) 액정(掖庭) 왕장(王檣)을
신부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서경잡기에 의하면,
평소 한원제는 후궁이 많아서
화공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뒤,
그걸 보고
누구와 동침할지를 결정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후궁으로 들어가서
황제 얼굴도 한 번 못 보고
죽는 여자도 많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화공인 모연수에게
예쁘게 그려 달라고
뇌물을 바쳐댔다.
하지만 왕소군만이
뇌물을 주지 않아서
황제의 총애를 받을 수 없었다.
당시 흉노와 전한은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흉노 지도자인 대선우 호한야가
한족 궁녀를 보내 라는 요청을 하여
적당히 후궁을 보내게 되었다.
원제는 그래서 초상화만 보고
흉노로 보내도 아깝지 않을
왕소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가기 전날에
왕소군을 만나보았더니
웬걸, 왕소군이 천하절색이었다.
그 아름다움을 접하고
넋이 나갔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
왕소군을 흉노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흉노에게 보내기 전에
하룻밤을 함께 했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하다.
그리고 초상화를 그린 모연수는
당연히 분노한 원제에 의해
처형되었다.
2.2. 유복한 노후
위에 나온 저런 사연 따위를
알 리 없는 호한야 선우는
'이런 미녀를 주다니
전한이 우리 흉노와
잘 지내고 싶다는 거구나'하고
입이 찢어져라 기뻐했으며
정중히 그녀를 대접했다.
그리고 당연히 호한야 선우의
연지가 되어 아들을 낳았고,
호한야 선우의 사후
당시 흉노족의 수계혼 관습대로
호한야 선우의 아들인
복주누약제 선우의
처가 되어 딸을 낳았다.
지금은 물론
당시 한족의 생각으로도
아버지의 처첩을
자식이 물려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패륜이었기에
이를 왕소군의 비극이라고
하기도 한다.
채옹의 '금조'에 따르면,
왕소군이
흉노의 수계혼 풍습에 따라
아들과 합방할 것을 강요받자
거부하고 자살했다고 전하며,
민간 전승에서는
심지어 국경을 넘어간 후
강물에 투신하여 자살함으로써
원제에게 절개를 지켰고,
흉노가 그 의기를 높이 사서
그곳에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왕소군은
사실 흉노 땅에서 오래오래 살면서,
한족 문화를 흉노에 전파하는 데에
많은 기여를 했다.
후한서 흉노 열전에
금조를 참고해서 쓴 범엽은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서모들은 모두
자기 아내로 들이지만,
친어머니는
들이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그 부분은 채택하지 않았다.
왕소군과는 상관이 좀 떨어지지만,
이 시기를 전후해
흉노와 한 왕조는
비교적 우호 관계를 유지했고
흉노의 침략 또한 사그라들었다.
왕소군을
비극적인 여인이라는 모습으로
인식할지언정
나쁘게 보지 않는 것엔
이런 점도 작용한 듯하다.
3. 양귀비(楊貴妃)
楊貴妃 (719년 ~ 756년)
3.1. 개요
당나라 현종의 후궁.
양귀비는 이름이 아니라
양(楊)씨 성에 귀비(貴妃)라는
직함이 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귀비 양씨.
정사에서는 양귀비의 본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야사 명황잡록(明皇雜錄)에서는
양귀비의 아명이
옥환(玉環)이라고 나와있기 때문에
양옥환(楊玉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본관은 포주(蒲州) 영락(永樂)이며
용주(容州)에서 출생했다.
17세 때 현종의 제18왕자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妃)가 되었다.
그러나 현종이 총애하던
무혜비(武惠妃)가 죽자
황제의 뜻에 맞는 여인이 없어
물색하던 중,
수왕비의 아름다움을 진언하는 자가 있어
황제가 온천궁(溫泉宮)에
행행(行幸)한 기회에
총애를 받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수왕의 저택을 나와
태진(太眞)이란 이름의
여도사(女道士)가 되어
세인의 눈을 피하면서
차차 황제와 결합하였으며,
27세 때 정식으로 귀비(貴妃)로
책립되었다.
이게 막장이라면 막장인데,
왜냐하면 무혜비의 아들이
수왕이기 때문이다(…).
즉, 원래 총비였던 시어머니가 죽자
며느리가 그 자리를 계승한 꼴.
참고로 전남편 수왕 이모는
천보 4년(745년) 경에
위소훈(韋昭訓)의 셋째 딸인 위(韋)씨를
새로운 왕비로 맞이하였고
전처인 양씨와의 사이에서는
두지 못했던 자녀를
후처인 그녀나
다른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많이 두게 된다.
두게 된다.
다년 간의 치세로
정치에 싫증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궁중에서는 황후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고,
세 자매까지 한국(韓國),
괵국(虢國), 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해졌다.
양귀비는 물론 자매와 친족에게까지
현종이 후대하니,
이런 상황을 백거이가 쓴 장한가에
묘사했다.
양귀비의 자매가 누린 부귀영화로
친척 오빠인 양국충(楊國忠) 이하
많은 친척이 고관으로 발탁되었고,
여러 친척이 황족과 통혼하였다.
양귀비가 남방(南方) 특산의
여지(荔枝)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그 뜻에 영합하려는 지방관이
급마(急馬)로 신선한 과일을
진상한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당시 양귀비의 옷을 만드는
전문인력만 700명이 넘었다고 하니
나라가 기울지 않을 리가 없다.
755년 양국충과의 반목이 원인이 되어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귀비 등과 더불어
쓰촨으로 도주하던 중
장안(長安)의 서쪽 지방인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을 때,
양씨 일문에게 불만이 폭발한
군사가 양국충을 죽이고
양귀비에게도 죽음을 강요했다.
현종도 이를 막을 방법이 없자
양귀비는 길가의 불당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중국 4대 미인, 또는 5대 미인의 한 명으로
정사(正史)에선 양귀비를
"자질풍염(資質豊艷)"이라 적었는데,
체구가 둥글고 풍만한 느낌의
미인이란 소리다.
요즘 같은 시대의 미인상과는
다소 거리가 먼 타입
(물론 요새라고 풍만한 걸
좋아하는 분들이 없지는 않지만.)
양귀비 이전에 현종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인 매비가 양귀비를 일컬어
비비(肥婢, 살찐 종년)라 욕했다는
일화도 있다.
다른 시절과는 달리
당나라 시절에는
중앙아시아의 영향을 받아
통통한 여자가 미인상이었다.
매비가 양귀비를 욕한 것은
한족과 중앙아시아의 심미안,
더 나아가면 문화간의 갈등이라고도
해석되는 부분이다.
양귀비는 가무(歌舞)에도 뛰어나고,
군주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총명을 겸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는 양귀비의 별명인
해어화(解語花)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말을 알아듣는 꽃,
얼굴만 예쁜 꽃 같은 후궁이 아니라
지적인 여자라는 의미로,
동시대의 이백은
그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했고,
백거이(白居易)는
귀비와 현종과의 비극을
영원한 애정의 곡(曲)으로 하여
장한가(長恨歌)를 노래하여
양귀비는 중국 역사상 가장 로맨틱한
여주인공이 되었다.
진홍(陳鴻)의 장한가전(長恨歌傳)과
악사(樂史)의 양태진외전(楊太眞外傳) 이후
윤색은 더욱 보태져서
후세의 희곡에도 좋은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양귀비 자신은
정치나 권력투쟁에는 관심이 없이
현종과 음악을 즐기며 지내는
생활에 만족한 편이었다.
다만 양국충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안록산이 장안을 방문했을 때,
살이 쪄서
뱃살이 무릎에 닿을 정도(!)인
그의 외모를 재미있게 여겨
홀딱 벗겨 목욕시켜
아기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돌아다녔다는
일화가 있다.
현종도 그걸 보고 웃으면서
아기 씻긴 값을 주었다고 한다.
후일 결국 안록산이
간신(양국충)의 토벌을 명목으로
난을 일으킨다.
야사지만 양귀비는
겨드랑이 냄새(암내)가 심했다고 한다.
곁에 있던 시종이
솜으로 코를 막고 다닐 정도라,
양귀비는 항상 향이 나는 주머니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고 한다.
당 현종은 고질적인 축농증이 있어
양귀비의 암내를 몰랐다고 한다.(...)
그럼 원래 남편인 수왕 이모는?
중국에서는 이때
양귀비와 안록산이 사랑에 빠져(!)
안록산이 양귀비와
다시 한 번 만나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는 내용의
희곡도 있지만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워낙 인기인이라
양귀비, 양귀비비사, 대당부용원 등
양귀비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여러 편 만들어졌다.
4. 초선(貂蟬)
백백화(白伯骅)의 초선배월도(貂蝉拜月图)
초선(貂蟬)
삼국지의 가공인물.
가공인물이지만
그야말로 삼국지의 히로인.
그리고 강동이교와 더불어서
삼국지연의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여자.
지혜와 담력,
그리고 자신의 정조까지 내버리는
희생 정신을 갖춘
초선의 인물상은 대단히 독특했으며,
덕분에 엄청난 인기가 있어서
가공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서시, 왕소군, 양귀비와 함께
중국 4대 미녀로 일컬어진다.
이 4대 미인을 가리켜
'침어낙안(浸魚落雁)의 용모,
폐월수화(閉月羞花)의 아름다움'이라고
일컫는데
이는 조식의 낙신부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코에이 삼국지 게임에 등장할 때는
가끔 자가 폐월로 나올 때가 있다. (삼국지 10 등)
4.1. 정사
초선의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배경은
삼국지 정사 여포전에 실려 있는
한 줄의 글귀이다.
정사 여포전 이 한 줄 글귀에 앞서
말한 관직에 있는 사람이 쓰는
관을 관리하는 '초선'이라는 직책을 가진
시녀를 결합한 것이
최초의 초선 캐릭터 모티브이다.
4.2. 연의
가공인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나관중의 창작은 아니고
연의 탄생 이전의
삼국지 문화에서부터
계속 등장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초선상으로
이미지가 완전히 정립된 것은
나관중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이전 삼국지 문화에선
초선이 여포의 처였는데
전란으로 헤어졌고
왕윤이 동탁을 청해
초선을 바치겠다고 한 뒤
여포를 초대하여 부부를 만나게 하여
갈등을 일으키는 식의 이야기였다.
나관중은 이를 손봐서
자신을 돌봐준 왕윤을 위해
지혜를 발휘하는 소녀 지사의 모습과 함께
천하무쌍인 여포를
자신의 치맛자락으로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요부의 모습이 혼재된
팜 파탈 캐릭터로 만들었다.
삼국지연의에서
왕윤의 시비인 10대 소녀로 등장하며,
왕윤에게 부탁을 받아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는
계략에 동원된다.
우선 여포에게 선을 보여
첩이 되기로 약속한 후,
동탁의 첩으로 들어가서
여포를 분기하게 한 다음,
둘 사이를 갈라놓아
여포로 하여금 동탁을 처치하게 만드는
계략이다.
연환계라고 불리는 대목으로
삼국지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 중 하나.
그야말로 고전 소설 범주에서는
극에 달한 심리전이라 할 수 있다.
왕윤이 동탁을 죽이고자 한탄을 한다.
이 때 갑자기 초선이 끼어들게 되고,
여포와 동탁 사이를 이간질하는
역할을 맡겠다고 자청한다.
먼저 왕윤이 여포를 불러들이고
초선을 보여준 다음,
초선을 여포에게 첩으로 주겠다고
말을 띄워둔다.
다음에는 동탁을 초청하여
동탁에게 가무를 보여주면서
그의 첩이 되도록 만든다.
여포가 '초선을 나에게 주기로 했는데
왜 동 태사(관직명)에게 보내느냐'라고
항의하자
동탁이 며느릿감으로
제대로 삼으려고 한다면서
데려갔다고 왕윤이 거짓말.
그러나 동탁은
자기의 침소로 초선을 데려갔고,
여포는 시녀에게 그걸 듣고 격분한다.
이때 여포가 동탁에겐 모른 척 하고서
초선을 흘끗흘끗 쳐다보다가
동탁이 그 사실을 깨닫고
여포를 내쫓는다.
이유가 나서서 동탁과 여포를
화해시키려 한 덕분에 약간 화해한다.
동탁이 궁궐에서 헌제를 보고 있을 동안
봉의정으로 달려가서 초선과 만난다.
뒤늦게 알아차린 동탁이 그 곳에 도착,
여포를 발견하고 뒤쫓다
방천화극을 던지기까지 하지만
여포는 피하고 도망친다.
그 와중에 이유가 도착하고,
이유의 간언에 따라
초선을 여포에게 주는 쪽으로
일단 얘기를 끝낸다.
이유는 물러나오면서
여포에게 동탁이 초선을 줄 것이니
참으라고 한다.
그러나 초선이 울며 매달리자
동탁은 화를 풀고,
또 초선이 "저런 사나운 가노(家奴, 노비)에게
절 주려고 하십니까"라 하자
동탁은 마음을 고쳐먹고
없었던 얘기로 한다.
다음 날 이유가 정한 대로 실행하라고 하자
동탁이 "넌 네 마누라를 남한테 줄 수 있냐"라면서
화를 내고는 쫓아낸다.
비로소 동탁과 여포 사이를 틀어지게 하려고
초선이 무슨 이유로인지는 몰라도
계교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얼추 짐작한 이유는
"이제 우리는 한낱 여자 하나 때문에
패망하는구나"라며 홀로 탄식한다.
동탁은 집을 아예 미오성으로 옮기고,
초선도 같이 데려간다.
여포는 언덕에서 미오성으로 옮겨가는
동탁의 행렬을 보고 있다가
초선이 가기 싫다는 듯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 다시금 격분한다.
여기서 왕윤이 나타나
여포에게서 사정을 듣고,
자신은 동탁이
여포에게 초선을 주려고 데려간 줄만 알았는데,
며느리 뻘 되는 아이를
자기가 취할 줄은 몰랐다며
오리발을 내밀면서
여포의 화를 더욱 부채질한다.
급기야 여포가
"그냥 확 동탁을 죽여버릴까?"라고
혼잣말을 하자
왕윤은 여포를 충동질하여
동탁은 역적이니
죽일 대의명분이 충분히 있다고
꼬드긴다.
여포는 왕윤에게 완전히 넘어가서
연애 감정과 충성심 버프로
동탁을 죽이기로 결심,
왕윤의 동지들(황완 등),
그리고 친구 이숙과 함께
계략을 꾸며
헌제가 동탁에게 황위를 넘기려 한다는
거짓 칙서를 미오성의 동탁에게 보내고,
여기에 혹한 동탁이
궁궐에 도착하자 기습하여 참살한다.
여기에서 초선은
단순히 계략의 도구로서
이용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동탁과 여포를
말로 속이는 지혜로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거의 대부분 남자들의 이야기인 삼국지에서,
여성이 드라마의 중심을 차지하는
몇 안 되는 장면이다.
그러나 본래의 삼국지연의에서는
그 뒤로는 그냥 여포의 첩이 되어버리면서
연환지계 때의 능동적 면모는 완전 증발하고
엑스트라로 전락한다.
원본 삼국지연의 16회에서
여포의 가족을 언급하면서
초선이 다시 언급 되는데
자녀를 낳지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나중에 서주에서 재등장할 때는
엄씨와 함께 진궁의 계책을 따르려는
여포를 붙잡고 말려서
결국 여포를 패망으로 몰고가는
역할을 맡게 된다.
하비성에서 진궁이 기각지계를 제안하는데
헌데 만일 여포가 성 밖으로 나간 사이
성 안의 장수들이 배신을 하면 어떻게 하냐는
엄씨와 초선의 간청에 의해
이 작전은 결국 무산된다.
이후 여포가 죽자
엄씨, 초선, 여씨 등
여포의 가족들은
허창으로 옮겨졌다.
아주 살짝만, 그것도 이름이 아니라
그냥 여포의 가족들이라고만 언급되기 때문에
초선이 어떻게 되었는지
언급조차 안되었다고 착각하는 독자들도 있다.
연의에서 초선의 행적이 서술되는 것은
이것이 끝이다.
4.3. 기타
상술한대로 연의에서는
여포가 패망한 후에
초선은 여포의 식구들과 함께
조조가 데려갔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후의 이야기는 전혀 써있지 않아서
후세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그래서 조조가 관우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적토마와 한 세트(...)로 보냈으나,
관우가 초선은 요물이라고 베어버렸다고 하는
'관운장월하참초선'이라는
경극이 태어났다.
물론 이 외에도
아예 관우의 아내가 된다던가
(비본 삼국지)
조조군에 합류해버린다던가
(삼국지 조조전)하는
해석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를 시초로
초선이 연환계가 성공한 후
자결을 하는 각색이 이루어진 작품이
여럿 있는데
아마도 초선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보다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창작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요시카와 에이지의 영향을 받아
초선을 자살시켜 버리면
삼국지연의에서는
커다란 문제가 생겨난다.
왜냐하면 초선은 분명히
그 뒤에도 나오기 때문이다.
때문에 연의의 내용을 그대로 전개하면
초선의 존재 자체가
이후 내용과 모순이 생기므로,
다른 평역작에서는 고심 끝에
여포가 초선과 닮은 여자를
새로 첩으로 들여
이름을 초선이라고 불렀다며
초선 MK2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다.
고우영 삼국지나 정비석 삼국지가
그 예 중 하나다.
5.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인물
焦先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인물.
하동 사람. 자는 효연(孝然).
세상에서는 그의 출신을 알지 못했고
어떤 사람은 그가 한나라 말에
태어났다고 한다.
관중에서 난리가 났을 때
집안 가족을 잃자
하저 사이 지역에서 숨어 살아
풀을 먹으면서 맹물을 마시거나
옷과 신발도 없이 사는 어려운 생활을 했으며,
당시 주남이라는 사람이 이를 보고
망명한 선비라면서
배를 보내 체포하고자 했는데,
같은 고향 사람인 후무양이
현에 이 사람은 미친 자일 뿐이라고 해
현에서 그의 호적에 주를 달아 따로 관리해
매일 쌀 다섯 되를 공급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볍고 쉽게 대했지만
길을 걸어도 지름길을 가지 않고
반드시 넓은 사거리로 다녔으며,
남의 것을 빼앗아 부자가 된 집의 밭에서
떨어진 이삭을 주워도
큰 이삭을 취하지 않았다.
배고파도 음식을 얻어먹지 않거나
추워도 옷을 얻어 입지 않았으며,
매번 외출할 때마다 부인을 보면
자신을 숨겨 나타내 보이지 않다가
그들이 지나간 후에야 나왔다.
스스로 달팽이 같은 집을 지어
그 안을 깨끗이 청소해
나무로 침대를 만들면서
풀로 자리를 깔아
추운 겨울이 오면
나무를 보아 불을 피워 목을 녹이면서
혼잣말을 했으며,
태화], 청룡 연간에
지팡이 하나를 짚고 남쪽으로 강을 건너게 되어
마침 하수가 범람하자 홀
로 아직 건널 수 없구나라고 말해
사람들이 그를 보고 미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의 말은 거의 다 효험이 있고 맞아서
사람들은 그를 은자라 불렀다.
위나라의 조예 때
옷을 걸치지 않으면서
불 속에 들어가서도 그을리지 않았으며,
물 속에 들어가도 몸이 얼지 않았다는
소문이 있어
두서가 하동태수일 때
초선을 불러 확인하니
모두 사실이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라 그가 89세 또는
100여 살까지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5.1. 관련 사료
고사전
박물지
신선전
예문류취
위서 관녕전 주석
태평광기
초선의 연환계로 인해
동탁이 죽음으로써
군웅할거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조조가 이교를 탐냈던 것으로 인해
오나라의 도독이었던 주유가
개전의지를 밝히고
그 결과로 유비가 형주를 먹고 입촉해서
삼국이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가공인물이기 때문에
간혹 우미인을 초선 대신
넣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여포는 정실 엄씨가 낳은 딸 여씨가
유일한 자식이라 애지중지했고,
첩 초선은 자식이 없었고,
둘째 부인 조표의 딸은
일찍 죽어 자식을 낳지 못했다.
우선 여포가 병력의 일부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조조군의 주력을 끌어들이면
그 사이 성에 남아있던 나머지 장수들이 출진하여
적의 등을 치고자 한 작전이었다.
반대로 만일 적이 성을 공격하면
여포의 별동대가 조조군의 등을 치고
하다못해 그게 뜻대로 잘 안 되었더라도
밖으로 나와있던 여포가 이끄는 별동대가
허창에서 올 군량 보급을 적절히 끊어주기만 하면
추운 겨울이라 지친 적은
결국 전의를 잃을 것이라는 게
진궁의 전망이었다.
사실 이후 나오는 여포와 부하들 간의 관계를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그것도 여포 잘못이긴 하지만...
근데 원문에서는
'여포의 처와 딸'이라고만 했기 때문에
'처'가 아닌 '첩'인 초선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반박도 있다.
226 ~ 233년이다.
233 ~ 237년이다.
6. 우미인(虞美人)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6.1. 소개
초한지에서의 묘사
虞 (?~?)
우(虞)는 흔히 우미인(虞美人),
혹은 우희(虞姬)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녀는
서시, 왕소군, 양귀비와 함께
중국 4대 미녀들 중 1명으로 손꼽히고 있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초한전쟁 당시에
한고조와 더불어 천하를 놓고 싸웠던
초패왕 항우의 애첩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 유명세에 비해서
그에 대한 기록은 매우 부족한 편이다.
항우의 애첩이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
자세한 이름도 알 수 없으며
전반적인 생애나 가족관계, 출생지 등도
온통 의문에 싸여있을 뿐이다.
역사속에 보이는 우에 대한 묘사는
사마천의 사기에 실린 간단한 기록이 전부이다.
그에 따르면,
우는 항우에게 총애를 받던 미녀로,
늘 그를 따라다니며 곁에서 모셨다고 한다.
항우는 말년에 이르러
해하 전투에서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하였다.
아무리 역발산기개세를 자랑하는
천하무적의 항우였다지만
이때는 병력과 양식이 부족하였을 뿐 아니라
한고조의 병사들에게 포위당하여
패색이 짙어진 상황이었다.
그날 밤, 항우는 자신의 최후를 예감했는지
군막에서 술을 마시면서
후세에 해하가(垓下歌)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노래를 불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항우가 노래를 부르자,
우희(虞姬)도 답가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하는 모두 후대의 문학작품 속 창작이다.
흔히, 항우와 함께 해하가를 부른 후에
그에게 짐이 되기 싫어서
자결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또한 후대의 창작일 뿐,
역사 기록에는 그런 이야기가 일절 없다.
다만, 항우가 우미인과
오추마를 걱정하며 눈물을 흘렸고,
이후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자결했거나
난전 중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은 편.
아니면 항우와 달리
극적으로 살았지만
조용히 숨어지내며 여생을 보냈거나.
6.2. 초한지에서의 묘사
이후 우는 우미인, 우희 등의 이름으로
초한지에 등장하게 된다.
실제 역사의 묘사를 따라서
항우의 여인으로 등장하며,
우미인이든 우희든
우씨 성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뜻이라 의미는 같다.
그 자체는 실존인물이지만,
삼국지연의의 초선만큼이나
창작적인 면이 많은 인물로,
앞서 언급하였듯이
정사에서의 기록은 몇 줄 되지 않으며
오늘날 알려진 그녀의 대부분의 행적은
후대의 문학작품에서 창작된 허구이다.
그러나 아예 허구의 인물인 초선과는 달리
최소한 실존했던 인물로 여겨지기 때문에
간혹 초선을 대신해
중국 4대 미녀에 들어가기도 한다.
판본에 따라서
항우와 만난 시기가 제각각이다.
오추마를 얻고 그 마을의 유지가
자신의 딸을 보냈다는 설이 있는데,
대체로 창작물들은 이 설을 채택한다.
다음으로 진나라의 수도를 점령할 때
그 궁궐에 있던 후궁 후보들 중
하나를 취했다는 말도 있는데,
영화 서초패왕에선 이를 좀 꼬아서
항우의 연인이었으나
진군에 납치되어 호해에게 겁탈당할 뻔하나
항우가 구출한다는 이야기로 각색한다.
마지막으로 제나라의 반란을 제압하면서
그곳의 유민으로 만났다는 말도 있다.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이 이를 채택했다.
완결편인 3권에서야 등장.
거기선 앳된 13~14세의 미소녀.
중국 드라마 초한쟁웅에서도
항우가 길을 떠나던 중
유민끼리 모여서 지내던 곳에
신세를 지면서 만나게 되는
설정을 채용했다.
역발산이라 불린 항우가 여자라고는 우미인 한 명 밖에 없었던지라, 둘의 이야기는 일종의 로맨틱한 이야기로 알려지게 된다. 게다가 항우의 숙적이었던 한고조 유방은 전투에서 패배해서 목숨이 위험할 때 가차 없이 부인인 여후를 버린 적이 자주 있어서 특히 비교가 된다.[4][5] 사실 따지고 보면 항우가 자신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했음에도 비운의 로맨티스트라는 이미지를 받고, 항우와 비교해 민간인 학살도 하지 않고 민심을 얻고 보살피는 데에 수고를 아끼지 않은 유방은 호색한에 치졸하고 잔혹한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씌워진 건 둘의 이러한 점들을 후세 창작물들에서 유독 부각시키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항우는 최후에 자기 부하들을 돌려보내며 자신만 혼자 남아 자결하고,[6] 거기다 상금 얻는답시고 유방의 부하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시체 훼손까지 한 것 때문에 더더욱 비극적인 이미지가 커졌다. 사실 항우가 한 짓을 생각하면 비극이라기보단 인과응보라고 봐야 하지 않나 싶지만.(...) 반면 유방의 경우에는 그의 말년과 사후 여후의 막장 행각까지 있었으니...[7]
다만, 우미인의 남동생인 우자기를 능력에 상관 없이 장수로 앉히기도 한 적이 있어서, 항우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아주 가까운 사람들만 챙긴다'는 것을 여기서도 보여준다. 물론, 우자기는 어디까지나 서한연의에 등장하는 가공인물이지만서도.
참고로 사면초가 상태에서 항우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자결했다는 이야기도 후세의 창작이다. 시신을 수습해 묻은 가묘에 꽃이 펴 '우미인초'가 피었다는 전설이 있다. 정사에는 포위된 항우가 연 술잔치에서 슬프게 춤추며 노래하자 모두 울었다는 이야기 이후로 언급이 없다. 하지만 패한 군주의 아내이니 별로 좋은 대접은 못 받았을 듯. 아무튼 이 항우와 우미인의 슬픈 이야기는 매우 인기 있는 이야기로, 경극 패왕별희(覇王別姬)의 소재가 되었다.
참고로 작가 이벽화가 경극 패왕별희를 가지고 근대의 이야기를 덧대어 쓴 소설이 있으며, 배우 장국영이 열연한 동명의 영화는 이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 밖에 국내 팬에겐 영화 서초패왕에서 관지림의 청초하고 가련한 연기가 유명하다.
남동생으로 우자기라는 인물이 있고 누나와 같이 초에서 일했지만, 누나가 죽자 따라 자결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