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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 (14부) 어렸을 때와 장성한 사람
https://youtu.be/-bRc99RSods?si=CH8OpNRtdxegwW30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 (14부) 어렸을 때와 장성한 사람
말 씀: 고린도전서13:11
부 르 심: 요한계시록22:10~12
교 독 문:83번, 빌립보서4장
찬 송:135(133), 384(434),485(534),179(167)
기 도:
1)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에 자라가게 하옵소서
2)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되게 하옵소서
3)장성한 자의 하나님의 사랑으로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게 하옵소서
4)예수한국, 복음통일(자유통일), 주사파척결, 성령충만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 14번째 시간입니다.
어렸을 때가 있어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릴 수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말씀으로 이번 시간에는 “어렸을 때와 장성한 사람“이란
제목으로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어렸을 때 어린 아이 같이 말하고 어린 아이 같이 깨닫고
어린 아이 같이 생각하는 것이 장성한 사람이 되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는
예수님의 사랑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
라(고린도전서13:11)”
1> 십 칠세의 소년 요셉이 말하는 것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다“는 것은 내 말하는 것이 사랑의 말로 위로하고
힘이 되고 희망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내 말만 들으면
마음을 상하게 하고 미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예로 17세의 요셉의 말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창세기37)”
요셉의 이야기를 처음 소개할 때 요셉이 어떤 아이인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그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아”서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로
더불어 함께 있었지만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 허물을 거듭 말하는 것은 이간질하는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네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야곱의 아내가 레아와 라헬과 빌하와 실바입니다.
레아가 아들 여섯 명과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여섯 명의 이름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볼론입니다.
딸의 이름은 디나입니다.
라헬의 아들은 요셉과 베냐민입니다.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은 단과 납달리입니다.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은 갓과 아셀입니다.
야곱의 아들 12명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요셉은 “그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아”서 그 아비의 첩 빌하의 아들 단과 납달리,
그 아비의 첩 실바의 아들 갓과 아셀에게 무시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요셉의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아”서 빌하의 아들과
실바의 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고자질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약점을 일러바치는 일을 하지 말고
형에게 존중하는 말을 하는 것이 되어야겠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여자들의 이름을 말하는 것
예수님의 족보에는 유대인의 이름들만 들어 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들 이름을 언급하여 그 이름을 기록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믿음으로 그 이름을 말하여 사랑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신약성경 첫 책이 되는 마태복음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족보를 가진 두 나라가 있는데 이스라엘과 대한민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한 그 이름을 기록함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생명책의 이름이 기록되어 천국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장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기록한 여자 이름들의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기록된 여자들의 이름은
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그리고 마리아입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의 다말은 원래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그러나 며느리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가 제대로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자신의 처한 사정을 보임으로 유다가 자신의 잘못한 것을 돌이키었습니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으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창세기38:26)”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에서 라합은 여리고성의 기생입니다.
그러나 여리고성을 정탐하러 온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숨겨주었습니다.
라합은 자신이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믿어 너희를 도와주었으니
“나와 나의 집에 가족들을 살려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증표로 기생 라합의 집에 붉은 줄을 매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수2:18)”
두 정탐꾼 중 한명의 이름이 살몬입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입니다.
룻은 모압 여자입니다. 모압 여자 룻은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어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에 갔습니다.
베들레헴의 유력한 보아스와와 결혼하였습니다.
결혼하여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았습니다.
다윗의 아내는 아홉 명입니다.
다윗의 아내들의 이름은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유일하게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입니다.
다윗이 아내들에게서 낳은 아들들은 많았지만 유일하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들 솔로몬의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누가복음 3장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상향식에서는 누가복음3장 31절부터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다윗이 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뱃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에서는 솔로몬이 빠져 있고
대신에 나단이 들어가 있습니다.
나단 역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아들중에 한 명입니다.
역대상 3장 5절에는 밧세바의 아들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은 이러하니 시므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 네 사람은 다 암미엘의 딸 밧수아(밧세바)의 소생이요(대상3:5)”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그 흠이 있는 여자들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그 이름을 기록하였습니다.
그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의 믿음이 되어
어린 아이의 말하는 것을 버리는 것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 깨닫는 하나님의 은혜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15:10)”
사도 바울은 거듭나기 전은 말하는 것과 깨닫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아 미숙하였습니다.
바울이 성령충만하여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고
장성한 사람이 되어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는 것입니다.
1> 어린 아이의 것과 장성한 자의 것
어린 아이의 일은 젖이나 먹어서 말하는 것과 깨닫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장성한 사람의 단단한 식물을 씹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만 있지말고
장성한 자의 단단한 식물을 씹을 수 믿음으로
나아가는 지각을 사용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아직도 어린 아이의 것이 되어 머물러 있는지
돌아보아 의의 말씀을 경험하도록 하십시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브리서5:12)”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오래 출석하고 오래 동안 예배를 드렸지만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젖이나 먹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릴 때의 말하는 것과 깨닫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면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오르지 사람의 사랑만 생각하여
불평과 불만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는 장성한 사람의 믿음으로 단단한 식물을 씹을 수 있는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한 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브리서5:14)”
2> 어린 아이의 율법주의의 사울
사울은 다메섹상의 예수님의 빛을 받기 전까지는 말하는 것과 깨닫는 것과
생각하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을 율법으로 의롭다고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여
큰 자라는 이름을 뜻을 가진 사울이었습니다.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사도행전9:2)”
사울은 율법의 아는 지식을 가지는 것이 의롭게 여겼습니다.
그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아서 말하는 것이 율법이요, 깨닫는 것이 정죄함이요,
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을 잡아 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일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아니합니다.
누군가가 장성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압도적인 징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육은 어린 아이에서 더 이상 장성한 사람이 될 수 없도록
매를 들지 못하게 합니다.
장성한 사람의 권위가 없으므로 대게 어린 아이에서
아직도 젖을 먹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빛 아래 있지만 말고
하나님의 빛이 모든 세계에 있어 “빛이 있으라”는
그 빛이 내 마음 속까지 비추어져야 하겠습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울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갈 때에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사울을 비추었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사도행전9:5)”
사울이 그리스도인을 결박하여 잡아오는 것은 곧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눈이 멀었습니다. 지금까지 율법이 최고인줄을 알고
배우고 배운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었던 사울은 말하는 것과
깨닫는 것과 생각한 모든 것이 어린 아이의 젖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이 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아
예수님의 제자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니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사도행전9:17)”
율법주의자, 로마시민권, 베냐민 지파, 언어 능통한 자,
가말리엘의 수업을 받은 최고의 학벌 등 자랑할 것이 많은 사울의
그 모든 것은 말하는 것과 깨닫는 것과 생각하는 것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율법이 아닌 은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만 있지 말고 예수님의 은혜를
받는 거듭남이 있어야 할 줄을 믿습니다.
다메섹 도상의 거듭난 체험으로 직가에서 성령충만으로 장성한 사람이 되어
그동안의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아야 할 것은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고 장성한 사람이 되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할 수 있고
예수를 그리스도라 힘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행9:20)“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사도행전9:22)”
사울이 힘을 더 얻는 것은 성령충만의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하면 그리스도인은 유대교를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벗어나 기독교로 개종한 사울은 누구보다
앞장 서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2:14)”
하나님 앞에서 장성한 사람의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장성한 사람으로 자라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세상에는 지식이 많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또한 같은 지식을 공유해야 살아갈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말세에 우리에게는 지식이 더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지식을 습득하고 있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지식을 가져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사울은 율법주의로 살아갈 때는 율법을 아는 지식이 최고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서 큰 자의 사울이 작은 자로 이름을 바꾸고 나서
예전의 모든 지식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립보서3:7~8)”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린 아이의 가진 지식으로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은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씹지 못하여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의 어린 아이의 일로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자라가는 장성한 자의 것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벧후3:18)”
3.다니엘 때에는 “인봉하라”는 것과 때가 가까우면“인봉하지 말라”
종말에 관한 예언의 책으로 구약을 대표하는 것은 다니엘서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언서는 요한계시록입니다.
다니엘서에 다니엘서 2장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의 꿈에 대한 예언이 있고
다니엘서 7장에는 다니엘이 꿈을 꾼을 네 짐승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왕의 꿈에 하나님이 큰 신상을 보이셔는데 왕이 어린 아이 같아
꿈을 말하지도 해석하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후일에 일어날 일을
다니엘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을 주심으로 알게하셨습니다.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다니엘2:21)”
다니엘서 7장에 다니엘이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네 짐승을 보았습니다.
네 짐승이 차례대로 망하고 영원히 살아 계시며 가장 높으신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기 백성이 유리한 쪽으로 심판하십니다.
때가 되어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으니 성도들의 나라가 천년왕국인 것입니다.
다니엘 12장에는 7년 환난 중 전 3년 반이 끝날 때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대군 미가엘이 일어나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 삼분지 일을 이기어
하늘에서 땅으로 내어 쫓기는 것입니다.
다니엘에게는 이 말을 간수하고 봉함하게 하였습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다니엘12:4)”
다니엘이 천사장 가브리엘이 알려준 70이레 중 한 이레는
봉함할 말씀이었습니다.(다니엘서9:20~27)
다니엘의 때는 BC 500년경입니다.
다니엘의 70이레 중 한 이레는 7년 환난입니다.
마지막 천년왕국이 이를 때까지 한 이레 즉 7년 환난은 봉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찌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다니엘12:9)”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할 때가 가까웠으니 열린 성경이 되어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봉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요한계시록22:10)“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요한계시록이 봉함된 책으로 착각하여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같이 닫혀 있으면 안되겠습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습니다.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는 열린 성경이 되어 요한계시록을 봉함하지 말고
교회들을 위하여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되어야겠습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고 오른편으로 던지는
지혜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쌍문동 산소망교회 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