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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민족상
국민훈장 무궁화상
닛케이 아시아 국제대상
대통령상 발명상
프랑스 국가공로훈장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개발도상국인 대한민국의 실정에 맞게 경제적 가치가 있는 산업 기술을 중시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연구원을 영입할 때, 현재 대한민국은 당신들이 필요하나 과학자들이 원하는 사치스러운 기초연구말고 정부나 산업계를 위한 연구를 해야 한다며 노벨상을 받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말을 신경쓰지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자신을 중용한 박정희와 관계가 좋았다. 1965년 경공업 수출로 연간 2천만 달러를 벌어들인 것을 자축하는 자리에서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에게 계집애들 머리카락을 팔아 번 돈이 뭐가 자랑스럽냐고[10] 찬물을 끼얹었다. 기분이 상한 박정희에게 일본의 전자제품 수출은 10억달러가 넘는다며 기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후 이어진 것이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 연구소의 임금이나 예산 문제에 있어서도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최형섭이 원하는 데로 연구소 살림을 꾸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직 은퇴 이후 과학기술정책 자문을 받으며 최고 지도자의 리더십과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과학 연구 자체를 좋아하여[11], 과기처 장관이 되자 오히려 아쉬워했다고 한다. 은퇴 이후에도 명예 연구원 활동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이외에는 자동차를 좋아해서 어릴 적에 자신만의 자동차를 만들고 싶어했으며 커서도 자동차 회사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국가와 국민에 대해 책임감과 윤리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고, 일관된 원칙을 지킨 특별한 인물이에요." 일본 과학계의 거목인 히라사와 료 도쿄대 명예교수는 송곡(松谷)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1920~2004년)과의 인연을 묻는 질문에 눈시울을 붉히며 이렇게 말했다. 1986년에는 포스코의 전신인 포항제철 중앙연구소(현 포스코 기술연구원)와 포항공대(현 포스텍)가 태동할 때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도쿄대 연구실에 정중한 초청장을 보내 연구소와 대학 설립을 의논한 사람이 당시 포항제철 고문으로 있던 최 전 장관이다. 이는 두 거목의 인연을 만든 시작점이었다. 제가 일본에서 연구소도 세워봤고 정부 일을 많이 했는데, 최 전 장관이 이런 사람을 찾고 있었다고 해요. 최 전 장관이 와세다대를 졸업해 일본 과학계의 사정을 잘 아는 것도 인연이 됐습니다. 최 전 장관은 사내 부설 연구소 형식인 일본식 기업 연구소를 설립하려 했던 것 같은데, 제가 연구원들을 면접한 뒤에 보다 독립적인 형태의 연구소가 낫겠다고 조언했어요.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서상희 연구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노터데임 대학교 대학원 지도 교수였던 B. D. Cullity 교수가 본인의 모교인 미네소타 주립대학교에 추천해 장학금을 받도록 주선해주었다고 한다.[2] 상술한 캐나다의 연구체제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비록 기각되긴 했으나 연구소를 대상으로한 회계감사를 하지말아달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3] 당시 대한민국은 두뇌유출로 외국으로 간 인재가 많았는데, 이를 국내로 영입하기 위해서 10만원 정도의 월급을 제시했다고 한다. 1970년대의 대학 교수들이 3만원, 대통령이 7만원 받았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대우이나 실제로 해외에서 온 인재들에겐 봉급의 30%정도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에 더해 집이나 교육 등의 문제를 최대한 지원해주었다고 한다.[4] 해외 인재 영입에 드는 막대한 비용이 국내 대학교수나 정치권으로부터 최형섭이 많이 공격받는 부분이었다.[5] 트랜지스터 연구 등으로 노벨상을 수상하는 등 당대 최고의 연구소로 자유로운 연구와 기초 과학을 중시했다[6] 기초 과학 연구보단 기업의 의뢰나 상업적인 가치가 있는 연구를 주로 하는 연구소로 복사기 등을 개발 및 상용화하는데 기여하였다.[7] 다만,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개발한 기술과 유사한 기술을 해외에서 유치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바람에 기업 간 마찰이 있기도 하였다.[8] 기초과학을 중시하지 않은 성향은 노벨상에 굶주린 우리나라에서 공격받는 원인 중 하나였다. 물론 그렇다고 기초과학을 완전 배제하진 않은 것이 대학의 연구지원을 하는 한국과학재단을 설립 및 운영하기도 했다.[9] 광물의 표면이 가진 물리적, 화학적 특징을 이용해 경제적 가치가 있는 광물을 골라내는 방법이다. 잘게 분해된 광물에 공기방울을 부착해 경제성 있는 광물만 떠오르거나 가라앉게 하여 선별한다[10] 당시 수출액 3위 품목은 가발이었다.[11] 집안이 유복한 덕분에 어릴 적부터 자신만의 연구실을 만들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의 전 공학자, 교육인, 관료이다. 본관은 해주이다. 종교는 개신교이다. 호는 송곡(松谷)이다.
1920년 경상남도 진주군에서 태어났다. 대전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채광야금학과를 졸업했다. 1944년 귀국 후, 조선광업주식회사에서 일하다 1946년 경성대학 광산야금과 교수로 부임했다. 1953년 미국 유학을 떠나 노터데임 대학교 대학원 물리금속학 석사를 졸업하고. 1955년 대학을 옮겨[1]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대학원 화학야금학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1959년 미국에서 귀국한 후, 서울대학교 교수, 한국해사대학교 교수 등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국산자동차주식회사 부사장, 상공부 광무국장으로 재직하다가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963년에 캐나다의 앨버타 대학교와 엘도라도 금속연구소로 떠나 지르코늄 추출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1여년의 연구 이후 귀국해 캐나다에서의 연구 경험을 소개하는 글을 대한화학회지에 실었다. 이를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읽고 최형섭을 초빙해 과학기술 발전, 교육 방안, 연구소 채제 및 운영 방향 등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에 관여하고 곧바로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소장에 부임했다. 5년 뒤인 1971년에는 제2대 과학기술처장관 등을 지냈다. 7년 6개월간 과학기술처장관에 재직했는데, 이는 대한민국 역대 최장수 장관 기록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소장직에 있을 때 연구의 자율성과 연구환경의 조성[2], 해외 인재 영입[3][4] 등으로 국내 과학기술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소장으로서 그가 목표한 것은 산업 현장에 즉시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연구소 설립을 지원한 미국 측에선 벨 연구소[5]를 모델로 삼을 것을 제안했으나, 바텔기념연구소[6]를 모델로 삼았다. 기업에게 성공적인 기술이전을 한 사례는 선경그룹의 자기테이프를 꼽을 수 있다[7].
1971년 과학기술처장관으로 임명되자 과학 기술의 기반 구축 및 강화, 산업기술의 정략적 개발 ,과학 기술의 풍토 조성을 목표로 하였다. 먼저, 기술개발촉진법·기술용역육성법 등 여러 관계법령을 제정하고, 대덕연구개발특구를 조성하는 등에 일조하여 대한민국의 과학기술개발 기반을 다졌다. 산업과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기술을 선호한 성향에 맞게 관련 기술에 중시했다[8]. 과학 기술의 대중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전국민의 과학화 운동 등을 지원하였다.
공직에서 은퇴한 뒤에는 태국,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등 개발도상국들의 과학기술정책 자문을 맡아 활동하며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개발 전략이란 저서를 작성하였다. 또한, 중국, 일본 등의 나라와 기술개발협력을 시도하였다. 사후 이태규를 뒤를 이어 2번째로 현충원에 안장된 과학기술인이 되었다.
최형섭의 업적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부유선광(浮遊選鑛)[9] 이론이다. 미네소타 대학원 시절, 지도 교수인 쿡 교수 하에서 공저자로 이름을 올린 Flotation characteristics of hematite, goethite and activated quartz with 18-carbon aliphatic acids and related compounds 논문은 지금도 부유선광, 산화철 관련 논문에 인용되는 논문이다. 그 외에도 실용적인 연구를 중요시했던 성향에 맞게 여러 특허도 등록했다. 상술한 지르콘 관련 연구를 통해 지르콘사의 제련이나 지르콘 관련 정제 및 제조 기술 등을 등록해 대통령상 등 여러 상을 수상했다. 이외에도 부유선광을 통해 저품위의 철로부터 고품위의 철을 뽑아내는 기술 등 여러 기술의 특허를 등록했다.
5.16 민족상
국민훈장 무궁화상
닛케이 아시아 국제대상
대통령상 발명상
프랑스 국가공로훈장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개발도상국인 대한민국의 실정에 맞게 경제적 가치가 있는 산업 기술을 중시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연구원을 영입할 때, 현재 대한민국은 당신들이 필요하나 과학자들이 원하는 사치스러운 기초연구말고 정부나 산업계를 위한 연구를 해야 한다며 노벨상을 받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말을 신경쓰지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자신을 중용한 박정희와 관계가 좋았다. 1965년 경공업 수출로 연간 2천만 달러를 벌어들인 것을 자축하는 자리에서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에게 계집애들 머리카락을 팔아 번 돈이 뭐가 자랑스럽냐고[10] 찬물을 끼얹었다. 기분이 상한 박정희에게 일본의 전자제품 수출은 10억달러가 넘는다며 기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후 이어진 것이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 연구소의 임금이나 예산 문제에 있어서도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최형섭이 원하는 데로 연구소 살림을 꾸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직 은퇴 이후 과학기술정책 자문을 받으며 최고 지도자의 리더십과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과학 연구 자체를 좋아하여[11], 과기처 장관이 되자 오히려 아쉬워했다고 한다. 은퇴 이후에도 명예 연구원 활동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이외에는 자동차를 좋아해서 어릴 적에 자신만의 자동차를 만들고 싶어했으며 커서도 자동차 회사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국가와 국민에 대해 책임감과 윤리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고, 일관된 원칙을 지킨 특별한 인물이에요." 일본 과학계의 거목인 히라사와 료 도쿄대 명예교수는 송곡(松谷)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1920~2004년)과의 인연을 묻는 질문에 눈시울을 붉히며 이렇게 말했다. 1986년에는 포스코의 전신인 포항제철 중앙연구소(현 포스코 기술연구원)와 포항공대(현 포스텍)가 태동할 때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도쿄대 연구실에 정중한 초청장을 보내 연구소와 대학 설립을 의논한 사람이 당시 포항제철 고문으로 있던 최 전 장관이다. 이는 두 거목의 인연을 만든 시작점이었다. 제가 일본에서 연구소도 세워봤고 정부 일을 많이 했는데, 최 전 장관이 이런 사람을 찾고 있었다고 해요. 최 전 장관이 와세다대를 졸업해 일본 과학계의 사정을 잘 아는 것도 인연이 됐습니다. 최 전 장관은 사내 부설 연구소 형식인 일본식 기업 연구소를 설립하려 했던 것 같은데, 제가 연구원들을 면접한 뒤에 보다 독립적인 형태의 연구소가 낫겠다고 조언했어요. 매일경제 기사
6. 둘러보
[1]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서상희 연구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노터데임 대학교 대학원 지도 교수였던 B. D. Cullity 교수가 본인의 모교인 미네소타 주립대학교에 추천해 장학금을 받도록 주선해주었다고 한다.[2] 상술한 캐나다의 연구체제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비록 기각되긴 했으나 연구소를 대상으로한 회계감사를 하지말아달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3] 당시 대한민국은 두뇌유출로 외국으로 간 인재가 많았는데, 이를 국내로 영입하기 위해서 10만원 정도의 월급을 제시했다고 한다. 1970년대의 대학 교수들이 3만원, 대통령이 7만원 받았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대우이나 실제로 해외에서 온 인재들에겐 봉급의 30%정도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에 더해 집이나 교육 등의 문제를 최대한 지원해주었다고 한다.[4] 해외 인재 영입에 드는 막대한 비용이 국내 대학교수나 정치권으로부터 최형섭이 많이 공격받는 부분이었다.[5] 트랜지스터 연구 등으로 노벨상을 수상하는 등 당대 최고의 연구소로 자유로운 연구와 기초 과학을 중시했다[6] 기초 과학 연구보단 기업의 의뢰나 상업적인 가치가 있는 연구를 주로 하는 연구소로 복사기 등을 개발 및 상용화하는데 기여하였다.[7] 다만,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개발한 기술과 유사한 기술을 해외에서 유치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바람에 기업 간 마찰이 있기도 하였다.[8] 기초과학을 중시하지 않은 성향은 노벨상에 굶주린 우리나라에서 공격받는 원인 중 하나였다. 물론 그렇다고 기초과학을 완전 배제하진 않은 것이 대학의 연구지원을 하는 한국과학재단을 설립 및 운영하기도 했다.[9] 광물의 표면이 가진 물리적, 화학적 특징을 이용해 경제적 가치가 있는 광물을 골라내는 방법이다. 잘게 분해된 광물에 공기방울을 부착해 경제성 있는 광물만 떠오르거나 가라앉게 하여 선별한다[10] 당시 수출액 3위 품목은 가발이었다.[11] 집안이 유복한 덕분에 어릴 적부터 자신만의 연구실을 만들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의 전 공학자, 교육인, 관료이다. 본관은 해주이다. 종교는 개신교이다. 호는 송곡(松谷)이다.
1920년 경상남도 진주군에서 태어났다. 대전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채광야금학과를 졸업했다. 1944년 귀국 후, 조선광업주식회사에서 일하다 1946년 경성대학 광산야금과 교수로 부임했다. 1953년 미국 유학을 떠나 노터데임 대학교 대학원 물리금속학 석사를 졸업하고. 1955년 대학을 옮겨[1]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대학원 화학야금학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1959년 미국에서 귀국한 후, 서울대학교 교수, 한국해사대학교 교수 등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국산자동차주식회사 부사장, 상공부 광무국장으로 재직하다가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963년에 캐나다의 앨버타 대학교와 엘도라도 금속연구소로 떠나 지르코늄 추출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1여년의 연구 이후 귀국해 캐나다에서의 연구 경험을 소개하는 글을 대한화학회지에 실었다. 이를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읽고 최형섭을 초빙해 과학기술 발전, 교육 방안, 연구소 채제 및 운영 방향 등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에 관여하고 곧바로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소장에 부임했다. 5년 뒤인 1971년에는 제2대 과학기술처장관 등을 지냈다. 7년 6개월간 과학기술처장관에 재직했는데, 이는 대한민국 역대 최장수 장관 기록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소장직에 있을 때 연구의 자율성과 연구환경의 조성[2], 해외 인재 영입[3][4] 등으로 국내 과학기술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소장으로서 그가 목표한 것은 산업 현장에 즉시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연구소 설립을 지원한 미국 측에선 벨 연구소[5]를 모델로 삼을 것을 제안했으나, 바텔기념연구소[6]를 모델로 삼았다. 기업에게 성공적인 기술이전을 한 사례는 선경그룹의 자기테이프를 꼽을 수 있다[7].
1971년 과학기술처장관으로 임명되자 과학 기술의 기반 구축 및 강화, 산업기술의 정략적 개발 ,과학 기술의 풍토 조성을 목표로 하였다. 먼저, 기술개발촉진법·기술용역육성법 등 여러 관계법령을 제정하고, 대덕연구개발특구를 조성하는 등에 일조하여 대한민국의 과학기술개발 기반을 다졌다. 산업과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기술을 선호한 성향에 맞게 관련 기술에 중시했다[8]. 과학 기술의 대중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전국민의 과학화 운동 등을 지원하였다.
공직에서 은퇴한 뒤에는 태국,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등 개발도상국들의 과학기술정책 자문을 맡아 활동하며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개발 전략이란 저서를 작성하였다. 또한, 중국, 일본 등의 나라와 기술개발협력을 시도하였다. 사후 이태규를 뒤를 이어 2번째로 현충원에 안장된 과학기술인이 되었다.
최형섭의 업적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부유선광(浮遊選鑛)[9] 이론이다. 미네소타 대학원 시절, 지도 교수인 쿡 교수 하에서 공저자로 이름을 올린 Flotation characteristics of hematite, goethite and activated quartz with 18-carbon aliphatic acids and related compounds 논문은 지금도 부유선광, 산화철 관련 논문에 인용되는 논문이다. 그 외에도 실용적인 연구를 중요시했던 성향에 맞게 여러 특허도 등록했다. 상술한 지르콘 관련 연구를 통해 지르콘사의 제련이나 지르콘 관련 정제 및 제조 기술 등을 등록해 대통령상 등 여러 상을 수상했다. 이외에도 부유선광을 통해 저품위의 철로부터 고품위의 철을 뽑아내는 기술 등 여러 기술의 특허를 등록했다.
5.16 민족상
국민훈장 무궁화상
닛케이 아시아 국제대상
대통령상 발명상
프랑스 국가공로훈장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개발도상국인 대한민국의 실정에 맞게 경제적 가치가 있는 산업 기술을 중시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연구원을 영입할 때, 현재 대한민국은 당신들이 필요하나 과학자들이 원하는 사치스러운 기초연구말고 정부나 산업계를 위한 연구를 해야 한다며 노벨상을 받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말을 신경쓰지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자신을 중용한 박정희와 관계가 좋았다. 1965년 경공업 수출로 연간 2천만 달러를 벌어들인 것을 자축하는 자리에서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에게 계집애들 머리카락을 팔아 번 돈이 뭐가 자랑스럽냐고[10] 찬물을 끼얹었다. 기분이 상한 박정희에게 일본의 전자제품 수출은 10억달러가 넘는다며 기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후 이어진 것이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 연구소의 임금이나 예산 문제에 있어서도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최형섭이 원하는 데로 연구소 살림을 꾸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직 은퇴 이후 과학기술정책 자문을 받으며 최고 지도자의 리더십과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과학 연구 자체를 좋아하여[11], 과기처 장관이 되자 오히려 아쉬워했다고 한다. 은퇴 이후에도 명예 연구원 활동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이외에는 자동차를 좋아해서 어릴 적에 자신만의 자동차를 만들고 싶어했으며 커서도 자동차 회사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국가와 국민에 대해 책임감과 윤리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고, 일관된 원칙을 지킨 특별한 인물이에요." 일본 과학계의 거목인 히라사와 료 도쿄대 명예교수는 송곡(松谷)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1920~2004년)과의 인연을 묻는 질문에 눈시울을 붉히며 이렇게 말했다. 1986년에는 포스코의 전신인 포항제철 중앙연구소(현 포스코 기술연구원)와 포항공대(현 포스텍)가 태동할 때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도쿄대 연구실에 정중한 초청장을 보내 연구소와 대학 설립을 의논한 사람이 당시 포항제철 고문으로 있던 최 전 장관이다. 이는 두 거목의 인연을 만든 시작점이었다. 제가 일본에서 연구소도 세워봤고 정부 일을 많이 했는데, 최 전 장관이 이런 사람을 찾고 있었다고 해요. 최 전 장관이 와세다대를 졸업해 일본 과학계의 사정을 잘 아는 것도 인연이 됐습니다. 최 전 장관은 사내 부설 연구소 형식인 일본식 기업 연구소를 설립하려 했던 것 같은데, 제가 연구원들을 면접한 뒤에 보다 독립적인 형태의 연구소가 낫겠다고 조언했어요.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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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서상희 연구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노터데임 대학교 대학원 지도 교수였던 B. D. Cullity 교수가 본인의 모교인 미네소타 주립대학교에 추천해 장학금을 받도록 주선해주었다고 한다.[2] 상술한 캐나다의 연구체제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비록 기각되긴 했으나 연구소를 대상으로한 회계감사를 하지말아달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3] 당시 대한민국은 두뇌유출로 외국으로 간 인재가 많았는데, 이를 국내로 영입하기 위해서 10만원 정도의 월급을 제시했다고 한다. 1970년대의 대학 교수들이 3만원, 대통령이 7만원 받았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대우이나 실제로 해외에서 온 인재들에겐 봉급의 30%정도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에 더해 집이나 교육 등의 문제를 최대한 지원해주었다고 한다.[4] 해외 인재 영입에 드는 막대한 비용이 국내 대학교수나 정치권으로부터 최형섭이 많이 공격받는 부분이었다.[5] 트랜지스터 연구 등으로 노벨상을 수상하는 등 당대 최고의 연구소로 자유로운 연구와 기초 과학을 중시했다[6] 기초 과학 연구보단 기업의 의뢰나 상업적인 가치가 있는 연구를 주로 하는 연구소로 복사기 등을 개발 및 상용화하는데 기여하였다.[7] 다만,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개발한 기술과 유사한 기술을 해외에서 유치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바람에 기업 간 마찰이 있기도 하였다.[8] 기초과학을 중시하지 않은 성향은 노벨상에 굶주린 우리나라에서 공격받는 원인 중 하나였다. 물론 그렇다고 기초과학을 완전 배제하진 않은 것이 대학의 연구지원을 하는 한국과학재단을 설립 및 운영하기도 했다.[9] 광물의 표면이 가진 물리적, 화학적 특징을 이용해 경제적 가치가 있는 광물을 골라내는 방법이다. 잘게 분해된 광물에 공기방울을 부착해 경제성 있는 광물만 떠오르거나 가라앉게 하여 선별한다[10] 당시 수출액 3위 품목은 가발이었다.[11] 집안이 유복한 덕분에 어릴 적부터 자신만의 연구실을 만들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