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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일시 : 10월 23일(금) 오전 11시
▪︎만남장소 : 4호선 숙대입구역 6번출구 안
▪︎걷기코스 : 약 5km 완만한 도로 및 산길.
숙대입구역 -> 남영아케이드 -> 용산고/이태원터 -> 조선은행사택지 -> 지월장 -> 영락보린원/전생서터 -> 108하늘계단 -> 해방타워/숭실학교터 -> 신흥시장 -> 한양도성유적전시관/조선신궁터 -> 남산공원 -> 회현역
▪︎뒤풀이: 남대문시장 막내회집
▪︎ 준비물
- 명찰, 찬조금 천원
- 맛난 간식, 생수, 과일, 성인음료, 안주...
- 간이의자, 돗자리, 썬캡, 비상약....
▪︎ 준수사항
- 약속시간 10분 전 도착하기
- 늦을 때는 미리 연락하기
- 자연 훼손하지 않기
- 쓰레기 남기지 않기
- 무단 이탈하지 않기
- 신입 참석회원 친절하게 대하기
- 배려하는 마음으로 참여하기
- 대장 의견 따르기
▪︎가이드
- 트레킹코스와 시간은 가이드의 판단에 따라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 가이드는 트레킹 안내만 할 뿐 안전은 각자 개인 책임이며, 참가시 이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 대장 춘수 010 6620 7858
- 총무 쩡이야
해방촌의 행정구역상 명칭은 용산동2가입니다. 일제시대 일본군 20사단의 사격장으로 사용됐던 이 곳은 광복 직후부터 귀환동포, 이북에서의 월남동포들이 들어와 정착하게 되면서 마을을 형성했고 이름도 '해방촌'이라고 불리우기 시작했습니다. '8.15해방 덕으로 생겨난 마을'이라는 뜻이였습니다. 남산과 지금의 용산미군기지, 후암동과 이태원동사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행정구역상 용산동2가의 구역은 넓으나, 주거지는 일부에 불과합니다.
남영아케이드(용산공설시장)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에 지어진 서양식 쇼핑몰 아케이드다. 건물은 콘크리트 외벽에 높은 천장을 가졌으며 9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고도 비교적 보존이 잘 된 상태다. 입구엔 ‘남영 아케이드’라는 한글 간판이 달려있어 복고풍 운치가 느껴진다.
1920년 <동아일보>에 따르면 일제는 용산 경정(京町·삼각지)에 공설 시장을 설치했다. 그러나 위치가 좋지 않아 1922년 10월에 이르러 지금의 자리인 연병정(남영동)으로 옮기면서 시장을 찾는 이가 많았다고 나온다. 이후 몇 차례 화재로 인해 수리를 거치다 해방 후 우리 국민이 인수해 약 1449㎡ 면적에 30여 개 점포가 가득 찼으며, 종로나 노량진에서도 물건을 사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남영동은 용산 미군기지와 바로 맞닿은 지역으로 일제강점기엔 연병정(鍊兵町)으로 불리며 인근에 일본인이 많이 거주했던 동네다. 아직까지도 일본군의 가족이나 군무원들이 살았던 적산가옥(敵産家屋)이 일부 남아 있는데, 용산공설시장은 군인이나 일본 사람들이 먹거리와 생필품을 사기 위해 찾던 시장이었다.
적산(敵産)은 적의 재산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적산가옥은 패망한 일인 소유의 재산 중 주택을 지칭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38선 이남을 통치한 미군정청은 법에 의거해 남한 내 모든 일인 소유재산을 인수하였다. 동시에 1945년 11월 12일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재산과 토지 등을 인수하였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 12월 9일 법률 제74호로 귀속재산법이 제정되고, 1950년 3월에 시행령이 공포되면서 1956년 9월까지 20만 7842건의 귀속재산이 처리되고 8천여 건만 남을 정도로 적산 불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해방 당시 75만 명(일본인 제외)이었던 서울인구가 전재동포(戰災同胞)의 귀환과 월남인 그리고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로 인해 1949년 5월 137만 5838명에 달해 3만 8천여 채의 적산가옥으로는 서울의 심각한 주택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자연히 미군정기부터 적산 불하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다. 적산가옥의 불법 점유로 인한 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각 경찰서에는 관재청이나 각 시도 적산관리처의 의뢰에 따라 불법 점유 문제를 담당하는 명도제 순경들이 배치되기도 했다.
적산가옥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으로 DH하우스가 있다. 디펜던트하우스(Dependent House)로 불린 이 주택들은 장충동, 신당동, 약수동, 청파동, 후암동 등에 위치한 군정청의 관사를 의미했지만, 일제강점기 일인 회사의 중역들이 살았던 대지 200∼500평에 건평이 100평이 넘는 호화주택들이 많았기 때문에 DH하우스는 호화주택의 대명사가 되었다.
한양도성의 3대문 밖에는 역원(驛院)이 엄청 큰 규모로 있었다. 북대문(숙정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된 곳이니 역원이 없었다. 지방을 오가는 관리들이나 상인들, 나그네, 짐꾼들이 쉬며 숙식도 하고, 우마차도 쉬며 한양으로 들어 갈 준비, 지방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곳이었다.
동대문 밖에는 관동지방으로 통하는 보제원 (普濟院)이 있었는데, 현재의 안암오거리에 있었다. 서대문 밖에는 중국과 북쪽지방으로 통하는 홍제원(弘濟院)이 있었는데, 현재의 홍제동 사거리와 무악재 사이 홍제역 2번 출입구 근처에 있었다. 남대문 밖에는 삼남지방과 통하는 이태원(梨泰院)이 있었는데 바로 용산고등학교 자리다.
조선 초기에는 李泰院(이태원)으로 한문표기가 달랐는데, 산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 도성 안의 부녀자들이 빨래터로 이용하였고 소나무숲이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항복하고 우리 나라에 귀화한 일본인들이 거주하였다 하여 이타인(異他人)으로 부르기도 하였고, 왜군들과의 혼혈들이 거주한 곳이라 하여 이태원(異胎院)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그 뒤 효종 때 이곳에 배나무가 많다 하여 지금의 이태원(梨泰院)으로 바뀌었다.
이태원이 있던 지역에는 광복 이후 급증한 서울인구의 집단거주지역으로 바뀌어 문화촌 · 해방촌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주변의 미8군 주둔지역과 연계한 이태원상가가 새로운 상업문화를 형성하여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서울 남산의 남서쪽인 용산구 후암동에는 이른바 ‘문화주택(文化住宅)’이라는 일본식 주택들이 밀집해 있다. 일제강점기 1920년대부터 일본인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일본식에 서양식을 섞은 건물들이 생겨났고 당시 전통주택과 다른 이들을 문화주택이라고 불렀다. 현재도 300여채의 문화주택이 남아 이국적 풍경을 띤다. 일본식 문화주택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지월장(指月藏)이다. 1920년대 초 황해도에서 철도사업을 하던 일본 서선식산철도주식회사 상무이사였던 니시지마 신조의 별장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게스트하우스로 사용되고 있다.
1920년대는 한인 지식인과 일본인주거지를 통해 간헐적으로 문화주택이 공급되었다면, 1930년대에는 서울의 인구 급증에 따른 주택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서울의 영역이 확장되기 시작하고,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주거지가 대대적으로 개발되면서, 본격적으로 상업화된 문화주택이 공급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에 건축된 서대문밖 홍난파 주택과 후암동의 조선은행 사택 그리고 장충동과 신당동의 무학(舞鶴)주택지와 서대문밖 충정로에 위치한 금화장 문화주택지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건축된 문화주택의 경우 건축양식은 서구식 주택임에도 불구하고 일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탓에 문화주택보다는 일식주택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문화주택에 대한 선풍적인 인기는 1930년 조선일보에 실렸던 만평에서도 잘 나타난다. 결혼적령기의 여성이 “나는 문화주택만 지어주는 이면 일흔 살도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만평과 은행으로부터 무리하게 빚을 얻어 지은 ‘文化住宅’을 여름철 모기로 인한 화근에 비유한 '蚊禍住宅'이라 부른 것은 당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문화주택 관련 세태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서구식 문화주택에 대한 높은 사회적 선호도는 해방 후에도 지속되어, 전후 복구사업 중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급되었던 공공주택은 서구식 거실중심의 주택으로 지어졌고, 이들 주택은 예외 없이 문화주택이라 불렸다. 문화주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새마을운동 시기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 지방의 낙후된 취락구조 개선 사업의 성공적인 사례를 소개하는 경향신문 기사에는 “우람한 철대문에 초인종이 달렸고 상수도가 부엌까지 들어오는... 알루미늄샤시로 창문을 달았고, 고급 미장합판으로 마루와 천장”을 만든 주택을 문화주택으로 지칭하며 이러한 모습은 모두 대도시 문화주택 못지않게 번듯하다고 묘사하고 있다.
전생서는 조선시대 궁중의 각종 제사 때 쓸 가축을 기르는 일을 맡았던 조선시대의 관아입니다. 고려시대 장생서(掌牲署)를 계승한 관아인 전구서의 이름을 전생서(典牲署)로 바꾸고 이곳에 설치되었는데,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전생서 터가 있는 건물은 현재 ’영락보린원(永樂保隣院)‘으로 영락교회가 인수해 운영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가마쿠라 보육원‘이 전신이었고 당시 조선의 고아들을 돌보았던 일본인 선교사 소다 가이치가 운영했던 곳입니다.
소다 가이치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침탈당하고 개신교 대부흥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던 대한제국에 들어와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일본어 교사로 교육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종교부 총무로 재직하고 있던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의 전도로 1906년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후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인 지도자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고 석방운동을 전개했다. 2년 뒤 일본 보육인 사다케 오토지로를 통해 보육의 길을 걸으면서 1896년 경성부 용산구 후암동에 사다케가 설립한 '가마쿠라 보육원'의 경성지부장으로 부임하여 1921년부터 1000명 이상의 조선인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아내 우에노 다키도 1926년에 교사를 그만두고 보육 활동에 합류하였다.
1961년에는 사회인사가 된 고아원 동문들의 도움과 한경직 목사의 초청으로 특별기편을 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윤태일 서울특별시장으로부터 서울특별시 시민증을 받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로부터 일본인 최초로 문화훈장을 받았다. 1962년 3월 28일 가마쿠라 보육원의 후신인 '영락보린원'에서 고아들을 돌보며 생활하다가 향년 94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1950년 1월에 세상을 떠난 우에노 다키 여사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안장되었다. 소다 부부는 양화진에 안장된 단 둘뿐인 일본인이기도 하다.
108 하늘계단은 서울 용산구 후암동과 해방촌을 잇는 독특한 명소이자 우리 근현대사의 아픈 기억을 간직한 역사적 장소입니다. 이 계단은 1943년 일제가 태평양 전쟁 등의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경성호국신사의 참배길로 조성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인들의 노동력과 재산이 강제로 동원된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해방 후 신사는 해체되었고, 실향민과 귀환 동포들이 계단 주변에 모여 살면서 자연스럽게 해방촌의 삶을 지탱하는 상징적인 통행로가 되었습니다. 2015년에는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가파른 경사 탓에 주민들과 교통약자들의 통행이 매우 지약했으나, 2018년 11월에 경사형 승강기가 설치되면서 계단을 직접 오르지 않고도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계단 주변에 예쁜 타일 벽화와 포토스폿,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들어서며 해방촌 골목길 투어의 필수 코스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여름철에는 능소화가 피어나는 아름다운 경관으로도 유명합니다.
숭실학교는 평양에 있었는데 미국인 선교사 베어드가 설립한 미션스쿨이었다. 신사참배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폐교되었다. 6.25전쟁 후 북한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이곳에 피난민들이 모금하여 학교를 다시 세웠단다. 그 '숭실 중고등학교'는 지금은 은평구 신사동으로 이전했다.
유명한 문익환 목사가 이 학교 출신인데, 시인 윤동주와 함께 다녔단다. 물론 '평양숭실학교'를 다녔다. 이 학교 출신 중에 유명 인사가 무지무지 많다. 장준하, '가고파' 등을 작곡한 김동진,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도 이 학교 출신이며 박통시절 육군참모총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백인엽,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선생, 정치인 조만식, 조병옥, 소설가 황순원...셀수 없을 정도다. 현 민주당 대표인 김민석은 서울숭실고를 졸업했다.
옛 서울숭실학교터인 현 '해방타워' 부근이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가 있었던 곳이다. 그러니까 '서울숭실학교'는 일본신사를 깨부수고 그 자리에 민족학교를 세운 것이다. 일제의 신사가 있던 아픔의 장소에 신사참배를 거부한 학교가 터를 잡아 교육의 산실로 거듭났던 역사적인 의의가 있는 터입니다.
남산 아래 첫 번째 마을 ‘해방촌’은 해방 이후 해외에서 귀국했던 동포들이 모여 살던 작은 마을이었다. 실향민들과 주변 지역의 주민들이 계속해서 모여들며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때부터 이곳 시장은 ‘신흥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약 70여 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해방촌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신흥시장은 1960년대 초 판잣집을 허물고 시멘트로 지어진 건물이 여러 채 들어서면서 당시에는 슬레이트 지붕이 이어져 있는 앤티크한 느낌의 공간이었다. 1970~80년대는 신흥시장이 최전성기를 이루었던 시절도 있었는데, 1990년대부터는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해 믿기지 않게도 2014년까지는 사람의 발길이 뚝 끊겼을 정도다.
신흥시장이 다시금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서울시가 2015년 12월부터 해방촌을 ‘도시재생활성지역’으로 선정한 이후부터다. 이를 계기로 대대적인 환경 개선을 통해 현재는 공방과 카페, 맛집 등이 즐비한 서울의 가장 대표적인 핫 플레이스로 변모했다. 또한 특유의 지형과 건물 배치 덕분에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 예능 촬영지로 소개되며 대중에게 알려져 지금은 놀라우리만큼 유명한 곳이 되었다. ‘해방촌 신흥시장’이라는 명칭이 해방촌과 신흥시장을 따로 부르던 시절을 뒤로하고 지금은 하나의 이름으로 쓰여진 것도 최근의 일이다.
해방촌 신흥시장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잠시 유명세가 주춤했지만, 최근 ‘서울특별시 건축상’ 대상을 수상하며 제3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제42회 서울시 건축상에 유아이이건축사사무소가 설계한 해방촌을 품은 새 지붕 ‘클라우드(CLOUD)’가 선정된 것. 기존 지붕에 낡고 더러웠던 구조물 대신 유니크한 지붕을 설치하여 시장의 미관을 크게 향상시킨 가설 건축물이다. 전통 시장이 '힙스터 거리'로 변신하게 된 건축물로 인정받아 최근에는 무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도 사로잡고 있다.
해방촌 신흥시장은 서울시가 추진한 해방촌의 특색을 살린 6년여 도시재생사업이 완료되며 많은 가시적인 성과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주변 노후 보행로, 계단에 대한 정비와 CCTV 설치, 해방촌에 있는 주택들에 대한 리모델링 등 해방촌 신흥시장 자체의 변신에만 국한하지 않고 지역이 모두 활기를 띨 수 있는 도시재생사업의 모범 사례로 남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남산에는 조선신궁이라는 거대한 신사가 있었습니다. 1925년 완공된 이 시설은 여의도 면적의 두 배에 달하는 43만 제곱미터 대지에 15개 건물을 갖춘 규모였습니다. 일본 천황가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셨으며, 메이지 천황이 사용했던 검을 하사받아 신궁으로 격상되었죠. 당시 연간 200만 명에서 250만 명이 참배할 정도로 식민 통치의 상징적인 공간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한일병합 이후 황민화 정책을 위해 관립 신사를 건립하고 민간 신사를 지원했습니다. 1920년 기공식을 시작으로 5년간의 공사 끝에 1925년 진좌제가 열렸습니다. 조선교육회는 학생들의 헌금을 모아 나무를 심는 헌목 운동을 벌이기도 했죠.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총독부가 신사 참배를 강요하면서 하루 평균 5천 명에서 7천 명이 찾는 곳으로 변모했습니다.
1945년 8월, 일본인들은 스스로 승신식을 치르고 시설을 해체했습니다. 다른 지역 신사들이 한국인에 의해 불태워진 것과 달리, 이들은 남은 시설을 소각하고 신물을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 해방 후에는 이곳에 우남공원을 조성해 80세의 이승만 대통령을 우상화시키며 조선신궁 자리에 동상을 세우고 전국의 학생들이 참배하도록 했었다. 남산 정상에 있는 팔각정의 이름도 우남정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엔 조선신궁 자리에 식물원을 만들었죠. 이후 그 자리에는 남산공원이 조성되었고, 현재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들어서 있습니다.
본래 국사당은 서울 남산 꼭대기(지금은 팔각정이 위치)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국가 안녕을 위해 세운 이 제사시설에는 무학대사 등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1925년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국사당이 자기들의 신사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면서 결국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이전 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그곳에서 기도하던 자리라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첫댓글 춘수대장님 ~
공지 감사드립니다
함께 합니다 ~
참가 신청합니다.
주부식님 ~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내 단골집을 우째 알고.....선자 사장이 퇴원했나 확인하러 가야지!!
송지학운영위원님 ~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이날부터는 식사 하셔도
되나요 ? 어제는 길동무님들이 애처로운 마음이었내요~~
춘수 == 대장님
지나간 긴 역사 글 끝까지 잘 읽었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유심수님 ~
길동무 방문 감사드립니다 ~
누님 수고하셨습니다
부디 참가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시기를~
오늘도 행사가 있어 아침에 나가 늦게 들어와 길동무에 늦게 글 쓰게 되네요
참석합니다. 이쪽 코스는 처음 가보는 길인데 2-3군데 이런 곳이 있었나 기대 되네요.
하지만 척추가 좋지 않아 의사가 가파른 길은 다니지 말라고 해서 조금 걱정이 되네요.
몽블랑님~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춘수
대장님
공지 감사합니다
함께 합니다~^^
라밴다2운영위원님 ~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참가합니다.
아우라님 ~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참석합니다
해피콜 운영위원님 ~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참가합니다
실비님 ~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참석합니다.
물보라님 ~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참석 합니다
토토투투대장님 ~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참석합니다.
초상비님 ~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참석합니다.
싼타루님 ~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참석 합니다~~
막내회집은
가끔 모임 했던
정겨운 집 입니다.
포시즌대장님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태평성대 참석합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태평성대님 ~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함께합니다 ~🙋
낭만조아대장님 ~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참석합니다
인정이님 ~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참석합니다
은빛님 ~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참석합니다.
주산나님~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막차로
참석합니다
자연애님 ~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참가자 명단
01 춘수
02 쩡이야
03 주부식
04 송지학
05 몽블랑
06 라밴다2
07 아우라
08 해피콜
09 실비
10 물보라
11 토토투투
12 초상비
13 싼타루
14 포시즌
15 태평성대
16 낭만조아
17 인 정이
18 은 빛
19 주산나
20 자연애
참가자 명단
01 춘수
02 쩡이야
03 주부식
04 송지학
05 몽블랑
06 라밴다
07 아우라
08 해피콜
09 실비
10 물보라
11 토토투투
12 초상비
13 싼타루
14 포시즌ㅂ
15 태평성대
16 낭만조아
17 인 정이
18 은 빛
19 주산나
20 자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