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타종교에서도 신에게로부터 엄청난 혜택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후 그 다음이 문제가 되어 그 은혜를 깡그리 없애버리는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허다하게 목격하게 된다. 은혜를 아주 값비싸게 받아서 아주 값싸게 없애버리는 주책을 부리게 된다.
또한 은혜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곳인 노회나 총회 그리고 기타 교회 안이나 밖에서 사용되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은혜라는 의미를 살펴보면 대충, 적당히,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은근 슬쩍 넘어가자는 뜻을 담고 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은혜라는 뜻과 동일한 것인지 궁금하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예를 언급한 책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을 하나하나 거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수많은 간증과 설교 집, 그리고 기타 기독교서적 안에 담겨 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자주 접할 수 있는 단어다. 그런데 그 은혜가 너무나 헤프게 사용되고 있으며 값싸게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은혜를 받은 것을 말하라고 하면 아마 들어주는 데만 최소한 한두 시간 이상 걸릴 것이다. 사도 바울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로라.(고전 15:9, 10)라고 언급하고 있다.
몇 달 전부터 유 준 장로님이 찬양한 곡으로 진한 감동을 받고 있다. 그 가사의 내용은
내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2번)
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은 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하나님의 자녀된 것은(2번)
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하나님의 자녀된 것은
내가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은 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은(2번)
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은(3번)
간단한 찬양가사이지만 얼마나 은혜로운 감동을 담고 있는지 이루 말할 수 없다. 과거에는 은혜로운 간증집회를 아마 500회 이상을 했지만 지금은 그런 간증집회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런 간증보다 말씀 속에 경험한 은혜를 증거 하다보면 내가 어떤 은혜가 임했는지 모두 다 나타나기 때문이다.
은혜를 받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 내용을 몰라서 다시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에 대한 원형과 본질을 다시 거론한다는 것도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은혜를 받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초점을 맞춰 살아가야 할지 우리들에게 크나큰 관건이 아니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은혜를 받지 못해서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은혜를 받지 않았는데 받은 것처럼 흉내 내는 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입으로는 은혜를 거론하지만 말과 행동에서 은혜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은혜에 대해서는 이미 자주 피력해왔기 때문에 여기서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이미 앞서 은혜로 살아간다면서 대충, 적당히, 부담 없이 신앙 생활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어쩌면 더 원칙적이며 완벽하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가? 과거보다 더 진실하게 더 정확하게 더 완벽하게 더 원칙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은혜로운 생활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은혜를 받았다는 말은 더욱 진실하게, 더욱 완벽하게, 더욱 정확하게, 더욱 원칙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일 때 은혜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보다 더 못하게 아니면 과거의 습관이 다시 나타날 때는 은혜가 소멸되었음을 직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대충 넘어가려고 할 때 마귀사탄에게 속는 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완벽하게 더 정확하게 더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하더라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원리원칙대로 살아가게 되면 또 다시 율법적인 생활로 전락하게 된다. 따라서 무엇이 원칙대로 살아가는 것이며 완벽하게 정확하게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할 때 나의 노력과 최선의 방법을 선택할 때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꼴이 되고 만다.(갈 3:3) 참으로 은혜로운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내가 드러나고 나의 옛 사람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고 오직 주님의 모습이 드러날 수 있는 은혜로운 방법은 없을까?
현재 치유사역을 하시는 모 장로님은 치유를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고치셨네요. 하나님께서 치료하셨네요. 참으로 감사하네요.” 자신의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데도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습이었다. 식사시간이 지나 “식사하러 갑시다.” 하면 괜찮다고 하시며 손사래를 친다.
교통비하시라고 돈을 건네줬다면 가다가 봉투를 열어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런데 집으로 가실 때까지 그리고 집에 가서도 봉투를 열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차후에 봉투를 열어 보셨겠지만....... 평소에는 농사를 짓고 남은 시간에 치유사역을 하시는데 얼마나 하나님 중심으로 사역을 감당하시는지,
그 외에도 일반 평신도들이 오히려 직분자들이나, 목회자들보다 더욱 은혜롭게 신앙 생활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은혜롭게 살아가면서 너무나 과시하다 보면 교만으로 치달아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소경의 상태가 되어버린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 그러나 그 은혜를 얼마나 잘 간직하며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관건이다.
또 다른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몸부림쳐야만 하는가? 그러나 몸부림을 쳐야만 되는 분들이 있다. 하지만 몸부림을 치지도 않았는데 은혜를 쉽게 받는 분들이 있다. 중요한 어떤 모양으로 은혜를 받지만 그 은혜를 소중히 여기며 은혜 위에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에게 항상 문제로 대두되기 때문이다.
은혜를 받는 방법론보다는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주시런지 알 수 없지만 내게 합당한 은혜를 달라고 소망과 염원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남이 받은 은혜를 탐을 내서 그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은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남들과 전혀 다른 은혜를 그 어느 누구도 받지 못한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라. 똑같은 은혜를 받은 인물이 없다는 사실을 남들이 받지 않는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말을 할 때 언어가 불투명하여 전달할 때 어려움이 있는데 찬송만 하면 발음이 정확해지는 은혜를 갖고 있다. 그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은혜를 갖고 있다.
잔 다르크라는 영화를 보고 심령이 변화 받아 참회하였던 은혜를 똑같이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이 나의 힘과 노력으로 된 것도 아니며 최선을 다해 얻어진 것이 아니다. 다만 주님께서 나와 한 몸이 되어진 가운데 얻어진 은혜라는 사실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독특한 은혜를 받았으면 하는 것이다.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면 그때부터 신앙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문제다. 이제 새로운 출발이라는 각오 속에 더욱 진실하게. 더욱 정확하게, 더욱 완벽하게, 더욱 원칙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말씀을 깨닫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예배드리는 것도 헌신과 봉사에도 더욱 더 달라져야 한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 마당에 어떤 은혜를 사모하실는지 진정 내게 주시는 합당한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진정 은혜의 본질과 원형을 찾아 나섰다면 끝까지 가봐야 한다. 목회자들이나 일반 성도들 가운데 은혜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과거 애급에서 경험한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금광 같은 귀중한 금맥을 찾았는데 파 볼 생각은 안 하고 더 쉽게, 더 편하고, 부담 없는 곳으로 찾아 나선다. 코가 석자가 되어서 그런지 자신의 일에 바빠서 은혜로운 곳을 찾아 나선다고 하지만 자신의 안일과 안목, 육체의 정욕에 따라 일을 진행시킨다. 무엇에 사모해야 하며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목회자들이 모이는 곳에 많은 장사진들이 모여 물건을 판매하는데 가장 많이 사는 물품이 목회정보도 아니며 목회에 관련된 것이 아닌 건강식품이나 일반 물건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정 자신들에게 맡겨진 양 떼들에게 좋은 꼴을 먹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물건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욕을 위해 구하고 있다면 다시 생각해봐라.
과거 받은 은혜를 또 다시 얻으려고 하지 마라. 남들이 받은 은혜를 체험하고자 몸부림치지 말라. 그 사람에게만 주시는 은혜보다는 내게 합당한 은혜를 경험해야 한다. 은혜의 본질이 무엇이며 원형이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하면 내게 합당한 은혜를 얻을 수 없다. 그런 은혜를 사모하며 남들이 받을 수 없는 은혜를 받기 위해 몰입해야 한다.
다시 한 번 유 준 장로의 찬양의 가사를 눈물이 날 때 읽어보거나 찬양을 해보라.
내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2번)
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은 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하나님의 자녀된 것은(2번)
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하나님의 자녀된 것은
내가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은 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은(2번)
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은(3번)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첫댓글 담아갈께요.. 샬롬!!
감사드립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