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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어떻게 쓸 것인가 / 김학(전북대평생교육원수필창작 전담 교수)
1.들어가는 말
문학은 예로부터 모든 예술 가운데 으뜸의 자리에 있어 왔다. 문학이란 인간의 사상, 감정, 정서, 상상 등을 문자와 기호로 표현하는 예술행위다. 예술에 다양한 장르가 있듯이 문학에도 또 여러 갈래가 있다. 시, 소설, 수필, 평론, 희곡 이것이 이른바 문학의 5대 장르다. 여기에 시나리오를 추가하면 문학의 6대 장르가 된다. 오늘은 문학의 여러 장르 가운데 미래문학이라는 수필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Ⅱ. 수필이란 무엇인가
수필이란 시보다는 길지만 소설이나 희곡, 평론보다는 훨씬 짧은 글이다. 원고지 15장 안팎의 짧은 글 속에 자신의 인생체험 그리고 자연관찰 등 다양한 주제를 자유롭고 진솔하게 나타내는 언어예술이 바로 수필이다. "수필이란 독자의 마음에 정신적 그린벨트를 만들어주는 언어예술"이다. 수필을 영어로 번역하면 Essay다. 수필과 영어의 Essay가 약간 다르게 해석하는 이들도 있지만, 일찍이 수필가 윤오영은 "수필은 동양적인 에세이요, 에세이는 서구적 수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수필이란 말을 영어로 번역하면 Essay요, Essay란 영어 단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수필이란 뜻이다. 굳이 수필과 Essay를 구분할 필요는 없다. 동양에서 처음으로 수필이란 말을 사용한 사람은 12세기 중국 남송 때 사람인 홍매(洪邁)란 사람이다. 그는 용재수필(容齋隨筆)이란 책을 썼는데 그것이 처음으로 수필이란 말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의 현곡수필(懸谷隨筆), 조선시대에 연암 박지원이란 분이 일신수필(馹訊隨筆)이라고 사용하기도 했다. 서양에서는 16세기 프랑스의 몽떼뉴가 처음으로 수상록(Les Essais)이란 책을 냈고, 그 뒤 2년이 지나서 영국의 베이컨이 수상집을 출판하면서 서양에서 수필의 붐이 일었다. 일찍이 아나톨 프랑스는 수필문학이 미래문학으로서 온 문예를 주름잡을 것이라고 공헌한 바 있다. 그것을 반영이라도 하듯 전국 모든 대학의 국문학과에서 수필론을 정규 교과과정으로 가르치고 있을 뿐 아니라 중앙일간지와 문예지의 문화센터나 각 대학의 평생교육원, 백화점문화센터 등에서 수필을 공부하는 문학도들이 줄을 잇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수필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이유다.
* 왜 수필을 공부해야 하는가
수필은 다른 어느 문학 장르보다도 생활과 직결되는 문학장르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에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수필이다. 당장 청소년들이 부모나 은사 또는 남녀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왜 편지를 쓰는가? 수신자에게 내 뜻을 바르게 전하고 수신자가 내 편지를 읽고 감동하여 내 주장을 선뜻 들어주기를 바라서일 것이다. 상대를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진솔한 문학인 수필의 형식을 빌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구나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논술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도 수필 쓰기 실력은 절대로 필요하다. 또 대학에 가면 4년 동안 레포트나 주관식 시험, 또는 졸업논문을 쓰는 데도 필요할 뿐 아니라 대학 졸업 후 취직시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학과실력보다 오히려 <자기 소개서>를 잘 써서 제출해야 시험관의 눈에 띄게된다. 그뿐이 아니다. 직장에 들어가서도 각종 문서를 기안하거나 각종 프로젝트를 기획하는데도 기본적으로 문장력이 없어서는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수필 쓰기 능력을 배양해 두어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의 구성과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 구성
수필은 대개 4단계로 구성된다. 제목, 서두, 내용, 결미가 그것이다. 수필은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 구성법과 유사하다. 제목은 방송의 타이틀이며, 서두는 방송의 오프닝멘트, 내용은 컨텐츠, 결미는 방송의 클로징멘트와 같다. 방송사의 프로듀서들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 때 타이틀 즉 제목을 공모할 정도로 크게 신경을 쓴다. 신문이나 잡지의 제목 뽑기도 중요하기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수필을 쓸 때도 좋은 제목을 지어서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있도록 온갖 지혜를 짜낼 필요가 있다. 서두도 대단히 중요하다. 리모콘 시대라서 시청자는 30초 정도 보다가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바로 채널을 돌려버린다. 수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텔레비전이 시청자를 다른 채널에 빼앗기지 않으려면 프로그램 서두부터 매력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수필도 다를 바 없다. 산뜻하며 참신한 서두로 출발해야 독자를 붙잡아 둘 수 있다. 그러기에 텔레비전에서의 '30초 전쟁'이란 말은 수필에서도 통용될 수밖에 없다. 내용이나 결미도 독자의 관심과 공감을 자아내도록 꾸며야 한다. 프로그램을 시청한 시청자나 한 편의 수필을 읽은 독자가 머리를 끄덕이거나 공감의 미소를 짓도록 하면 그 작품은 일단 성공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좋은 수필을 쓰려면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자주 시청할 필요가 있다.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면서 줌 인, 줌 아웃, 팬 등 다양한 카메라 촬영기법에 관심을 갖기 바란다. 그러한 촬영기법은 입체적인 수필을 쓰는 요령이라 해도 좋다.
Ⅲ. 좋은 수필을 쓰려면
지금은 읽을 거리가 넘치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다른 문학작품집 등 수필 읽기로부터 시간을 빼앗아 가려는 라이벌 매체들이 너무 많다. 라이벌 매체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좋은 수필을 써야한다.
*좋은 수필은 어떻게 써야 할까?
첫째, 읽기 쉬운 글이어야 한다.
문장이 쉬워서 독자가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표현은 쉽게 하되 내용은 심오하고 구수하면서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 맛 좋은 음식점이라고 소문이 나면 멀고 가깝고 따지지 않고 식도락가들은 모여든다. 좋은 수필이라고 여겨지면 독자는 그 수필을 끝가지 읽게 된다.
둘째, 간결하면서도 짧은 글이어야 한다.
미사여구가 없는 간결한 문장은 수필의 기본이다. 수필의 문장은 잎새를 모두 떨궈버린 겨울 나무와 같아야 좋다. 형용사나 부사 등 군더더기가 없는 문장은 곧 나목(裸木)과 같다. 일반적으로 수필 한 편의 길이를 200자 원고지 15매 안팎으로 생각하지만 수필의 길이는 더 짧아져야 한다. 활자매체에서도 그렇지만, 인터넷에서는 짧은 수필이 더 인기가 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영국의 처칠 수상도 "나는 짧은 말과 쉬운 문구를 즐긴다."라고 했다지 않던가? 최근에는 원고지 5매 짜리 수필이 등장하고 있다.
셋째, 정이 넘치는 글이어야 한다.
수필은 원래 정(情)의 문학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서로 정으로 교감할 수 있어야 한다. 따사로운 정이 글 속에 배어 있다면 좋은 수필이라 할 수 있다.
넷째, 즐거움과 재미를 주는 글이어야 한다.
세상살이에 지친 독자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는 독자가 즐거움과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 좋다. 독자가 한 편의 수필을 읽고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면 금상첨화의 글이다.
다섯째, 품격을 갖춘 글이어야 한다.
유치한 감정이나 저속한 표현, 야비한 내용은 독자에게 천박한 느낌을 주게 된다. 글은 곧 사람이라고 한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볼 일이다. 순수하고 단아하며 품위가 있는 어휘를 사용해야 한다. 정확하고 겸손하며, 감동적인 말에 유머와 위트가 담긴다면 아름답고 서정적인 수필이 될 것이다.
여섯째, 진솔한 글이어야 한다.
꾸미거나 과장이 없는 진실한 문장이어야 한다. 수필은 거짓이 아닌 참의 문학이다. 꾸며낸 이야기는 소설에서는 허용되지만 수필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진실하고 겸손한 말을 사용해야 한다. 수필이 거짓을 담았을 때 그런 글은 이미 수필의 범위를 벗어난 글이다. 일기에 거짓 내용이 있을 수 없듯 수필에서도 거짓이 담겨서는 안 된다.
일곱째, 아름답고 순수한 우리말을 사용한 글이어야 한다.
품위와 여운이 있어야 하고, 명확하면서도 리듬을 살린 문장이어야 좋은 수필이다.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간접적이면서도 은근한 문장이 좋다. 가급적 외래어나 한문 투의 말은 피해야 한다. 아나운서가 우리말을 갈고 닦듯 수필가는 우리 언어의 파수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불필요한 약어(略語)사용을 피하고, 비속어와 반복어, 상투적인 언어 따위를 사용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수필의 특성을 알고 써야
첫째, 수필은 자기 반성의 문학이다.
수필이 '내탓'부터 출발하지 않고 '네 탓'부터 시작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기 반성을 통해 독자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수필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1인칭문학이다.
둘째, 수필은 무형식의 문학이다.
시나 소설, 희곡 등은 일정한 형식이 있다. 그러나 수필은 일정한 형식이 없다. 제재에 따라, 수필가의 개성에 따라 수필창작의 형식이 모두 다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수필의 형식은 다양하다.
셋째, 수필은 다양한 제재의 문학이다.
인간국보라고 자칭했던 양주동 박사는 우수마발(牛茱馬勃)이 모두 수필의 제재라 했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코로 맡아지는 것, 피부로 느껴지는 것, 마음에 다가오는 것, 머리로 생각되는 것 등 모든 것을 수필이란 그릇에 담을 수가 있다. 수필은 용광로와 같은 문학 장르이다.
넷째, 수필은 고매한 인격의 문학이다.
수필가는 포용력이 있어야 하고, 항상 역지사지(易地思之) 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입장을 바꿔 생각할 줄 알아야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자세로 글을 쓰면 편향된 글, 일방적인 글에서 벗어나 독자의 공감을 살 수 있다.
다섯째, 수필은 해학적 비평정신의 문학이다.
알베레스란 사람은 수필은 지성을 바탕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의 문학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적절한 유머와 위트를 곁들이고, 또 사회문제까지도 주제로 다뤄 문제제기를 하는 것도 수필의 몫이 되어야 한다.
여섯째, 수필은 예술성과 철학성을 융해시킨 문학이다.
수필에 예술성과 철학성이 담기면 품격 높은 문학수필이 될 수가 있다. 수필이 정통문학의 반열에 오르려면 꼭 필요한 과제가 바로 이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일곱째, 수필은 겸손의 문학이다
자기 자랑을 내세우거나, 남의 잘못을 꾸짖는 것은 수필가의 바른 자세가 아니다. 자기 반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여덟째, 수필은 간결한 문장으로 쓰는 문학이다.
한 문장에서 같은 어휘가 되풀이되거나 동일 어법이 중복되지 않도록 글을 써야 한다. 많은 소재를 노트에 기록해 두거나 스크랩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필요할 때 사용하기 위해 돈을 저금통장에 넣어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장의 단락(paragraph)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독자가 내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짜임새 있는 글이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완성한 원고는 오래 묵혀두고 퇴고(推敲)를 거듭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등단을 서두르거나 원고발표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좋은 작품이라고 스스로 판단될 때에만 원고를 발표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수필을 썼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좋은 작품을 발표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의 이웃, 동물이나 식물 등 우주만물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바라보며 자기만의 독창적 표현법을 찾아야 한다. 좋은 수필의 소재는 바로 거기에 있다.
*바람직한 수필가의 자세
수필은 머리로 쓰지 말고 발과 가슴으로 써야 한다. 농촌의 마당에서 벌레나 풀잎, 곡식 등 먹이를 자유롭게 주워먹는 암탉이 건강한 달걀을 낳듯, 수필가는 발로서 수필 소재의 현장을 답사하고 그 감흥을 글로 써야 한다. 또 수필가는 거리를 지나다 만난 걸인에게 동전 몇 닢이라도 쥐어줄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을 지녀야 좋은 수필을 빚을 수 있다.
*초보자의 수필 쓰기 3단계
유명 수필가의 좋은 작품을 원고지에 옮겨 써보자. 서예공부를 할 때 선생님의 글씨체를 받아서 흰 종이가 까맣게 되도록 반복해서 써보는 것처럼 하라는 말이다. 또 유명한 수필을 선택하여 내용을 자기 식으로 바꿔보자. 그런 다음 자기만의 독창적인 소재로 자기 글을 써보자. 초보 운전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숙달된 운전자가 되는 지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Ⅳ. 나가는 말
2002 한·일 월드컵 축구에서 유사이래 처음으로 한국 축구를 4강으로 끌어올린 거스 히딩크 감독은 대표선수들의 기초체력을 강화시켜서 그처럼 좋은 성적을 올렸다. 문학 특히 수필을 공부하는 데도 히딩크 훈련방식은 통용된다. 축구 선수의 기초체력 강화는 바로 수필 쓰기에서 꼭 필요한 한글 맞춤법 등 문법공부를 철저히 해야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그러한 바탕 위에 수필의 탑을 쌓아야 한다.
수필은 바로 생활문학이다. 수필이란 안경을 끼고 우리네 일상을 바라보면, 평소에 사소하게 여겼던 일상사들이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암탉이 많은 먹이를 주워먹어야 튼튼하고 영양가 높은 달걀을 낳듯 많은 독서와 다양한 체험을 쌓아야 좋은 수필을 쓰게 될 것이다.
쓰면 쓸수록 어려운 게 수필이긴 하지만 쓰면 쓸수록 재미가 붙는 것도 또한 수필이다.
耳目口鼻(이목구비) 김 학
耳目口鼻! 사람의 얼굴 여기저기에 자리 잡은 중요부위들이다. 아니 소나 돼지, 개 등 동물들도 다 가지고 있으니 사람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 선인들은 왜 ‘귀․눈․입․코’로 순서를 매긴 것일까?
“사람의 몸이 열 냥이라면 눈이 아홉 냥”이란 속담을 생각하면 눈이 가장 중요할 듯싶다. 그렇다면 目耳口鼻라고 해야 옳다.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란 속담을 보면 입이 더 중요할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口耳目鼻라고 해야 옳다. 말하는 기능과 먹는 기능을 가진 입이야말로 훨씬 중요할 테니까. 그런데 왜 귀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서 耳目口鼻라고 한 것일까? 귀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을 귀머거리, 눈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을 봉사, 입으로 말을 못하는 사람을 벙어리라 한다. 또 코로 숨을 쉬지 못한 사람을 시체라 하지만 냄새를 맡지 못하는 사람은 또 무엇이라고 부를까?
귀머거리라고 하면 언뜻 ‘헬렌 켈러’, 봉사하면 심청 아버지 ‘심학규’, 벙어리하면 ‘벙어리 삼룡’이가 떠오른다.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통해서 익히 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구라는 역경을 딛고서 우리 앞에 우뚝 선 과거인물이거나 가상인물들이다.
만약 이목구비가 고장 나면 지체 없이 병원으로 달려가야 한다. 귀나 코에 이상이 오면 이비인후과를, 눈이 고장 나면 안과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입이 고장 나면? 목구멍이 아프면 이비인후과로, 이빨이 아프면 치과로 가야한다. 이것으로 미뤄보더라도 눈이 가장 소중하다고 해야겠는데 왜 귀 다음 순서에 배치했는지…….
나는 때때로 이목구비가 고장 난 사람들을 부러워할 때가 있다. 정치판 돌아가는 꼴이 신문․방송에 나오면 못 보고 못 듣는 봉사나 귀머거리가 부럽고, 오염된 공기나 구린내를 만나면 코가 고장 난 사람이 부럽다.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정치인들이나 말을 잘못해서 오랏줄에 묶여 가는 사람들을 보면 벙어리가 낫겠다 싶다. 이래서 일체유심조일까?
아리랑을 들으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최기춘
우리나라 사람들의 애환을 가장 잘 나타낸 노래는 아리랑이다. 아리랑을 연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아리랑(我理朗)은 참 나를 깨우치는 즐거움을 표현한 노래라고 한다. 아리랑은 연가라고 생각하고 부르면 연가처럼 느껴지고, 참 나를 깨우치는 즐거움을 노래한다고 생각하면서 부르면 또 그에 걸맞은 노래가 된다. 슬플 때 부르면 슬퍼지고 즐거울 때 부르면 즐거워지기도 한다. 맥 빠지게 부르면 맥이 빠지고 힘차게 부르면 힘이 난다. 응원가로 불러도 된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불러도 그 분위기에 맞는 노래가 된다. 지역에 따라 노랫말이나 곡조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 모두의 얼과 한이 깊이 새겨진 노래임엔 틀림없다.
항상 들어도 정겹고 즐거운 아리랑을 머나먼 캄보디아 땅 앙꼬르와트의 타프롬사원 가는 길에 들으니 반갑기도 하고 괜히 어깨에 힘이 주어졌다. 아리랑을 연주하는 사람들은 베트남과의 전쟁에서 부상을 당하여 팔이 없거나 발목이 없는 전상자들이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전상자들이 연주하는 우리의 정겨운 노래 아리랑을 들은 인정 많은 우리나라 관광객들은 너도나도 서슴없이 지갑을 열었다.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주는 성금을 받고 아리랑을 연주하는 캄보디아인들은 대한민국을 연호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계속했다. 우리의 아리랑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고 싶었으나 캄보디아 말을 못해 안타까웠다.
우리나라도 6․25전쟁 뒤 전상자들이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떠올라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 대부분이 맨발로 걸어가는 모습도 눈에 띠었다. 우리 또래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저들의 모습과 비슷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조물자로 들여온 우유가루를 배급받아 책보에 싸들고 다니며 먹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사원 입구에는 굶주리고 헐벗은 어린이들이 조잡하게 만든 목걸이나 피리 같은 걸 들고 “한국 돈 천원, 1달러”를 외치며 물건을 파느라 줄지어 서 있었다. 굶주려 뼈만 앙상하여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갓난아기를 안고 구걸하는 여인들도 눈에 띠었다. 가이드는 어설픈 동정심으로 도와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가이드의 만류를 묵살하고 지갑을 열 수밖에 없었다.
타프롬사원은 1186년경 자야바르만 7세가 그의 모친을 위하여 지었다고 한다. 티프롬사원은 나무를 구경하는 것인지 파괴된 문화유적을 구경하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800여 년 전에 사원을 짓고 조경수로 심은 나무들이 사원파괴의 주범인지, 사원을 지키는 파수꾼 인지 헷갈렸다. 유적지를 돌아보며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나무들의 모습도 기기묘묘하여 문화유적만큼이나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티프롬사원의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된 석조물과 규모로 봐서 자야바르만 7세가 티프롬사원을 지을 때는 지구상에서 번영을 누리고 사는 강대국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불구의 몸으로 뜻도 모를 남의 나라의 민요를 부르며 구걸하는 캄보디아 전상자들과 굶주리고 헐벗은 어린이들은 누구를 원망해야할까? 국가의 흥망성쇠는 다수 국민들에게도 책임이 있겠지만 대부분 소수 지배계층들의 영향이 크다. 우리의 역사를 뒤돌아봐도 그렇다.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이 캄보디아 국민들의 모습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캄보디아를 생각하면 유서 깊고 찬란한 앙꼬르와뜨의 문화유적보다도 아리랑을 연주하는 전상자들과 헐벗고 굶주린 어린이들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우리의 아리랑이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돈벌이의 수단이 아니라 흥겨워서 부르는 노래가 되었으면 좋겠다.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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