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두기가 1단계로 완화됐던 지난 11월7일오후 북구 양산동 호수공원.
광주아버지합창단 35명은 코로나19로 지친 시민들을 노래로 위로하기 위해 무대에 섰다. 이날 김일성(64·남구 봉선동)씨도 생애 첫 무대 신고식을 치렀다. 30여 년동안 교편을 잡아온 그는 다른 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일을 찾다 광주아버지합창단 ‘신입 단원’에 이름을 올렸다.
긴장한 기색은 역력했지만 그는 1년 동안 갈고 닦은실력을 후회 없이 지역민들에 선보였다. 나비 넥타이와 신사복 차림을 한 ‘광주 아버지들’ 35명은 혼신을 다한 ‘메아리’로 1시간 분량 공연을 채웠다.
합창곡으로 다시 태어난 ‘임을 위한 행진곡’과 ‘잡초’, ‘그대 눈 속의 바다’, ‘태양의 눈’ 등 다양한 가곡과 트로트로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날 객석을 채운 관객 가운데 김일성씨의 첫 무대를응원하러 온 딸 혜지(31)씨도 있었다.
“과묵하고 엄해보이기만 했던 아버지가 설렘 반 기대반으로 공연을 기다리는 모습이 생소하게 다가왔어요.집안의 가장(家長)으로 가족들을 위해 어떤 일이든 앞장서던 아버지가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행복하게 활동하는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앞으로 아버지의 ‘1호 팬’이될 계획입니다.”
최근 들어 수많은 음악경연 프로그램이 봇물처럼 터져나오며 노래에 대한 관심은 어느 때보다 뜨겁지만, 진심을 담은 공연을 접하는 일은 쉽지 않다.
광주아버지합창단의 무대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이 땅의 아버지가 지닌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오롯이관객에 전한다.
이 합창단은 ‘광주·전남에 거주하는 노래를 사랑하는아버지’를 지원 자격으로 내걸고 있다.
광주아버지합창단은 지역 의료시설과 청소년 보호시설 등을 꾸준히 찾아 희망의 노래를 전하고 있다. 봄과가을 정기 연주회를 열어 아내와 자녀, 손주들을 초청해한 해 동안 가다듬은 선율을 선보인다.
3년 전에는 전주를 찾아 전국에 있는 아버지합창단들과 기량을 겨루기도 했고, 올해 40주년을 맞은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행사 무대에 올랐다. 10여 년 전부터는광주합창제에 참여하며 어엿한 지역 합창계 선배 역할을하고 있다.
올해는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무대에 설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방역 지침을 지키며 11월 자선음악회와 28번째 정기연주회를 무사히 치렀다. 특히 이번 정기연주회는 ‘코로나 극복을 위한 치유음악회’라 이름 짓고 지역 합창단 ‘맘마 싱어즈’와 코로나19의 빠른 종식을 기원했다.
이처럼 지역민에 기쁨을 퍼뜨리는 광주아버지합창단이 생겨난 때는 모순적이지만 가장 힘들었던 IMF 외환위기 때였다.
사회에서, 가정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는 아버지들은삶의 무거운 짐을 뒤로하고 서로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위해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광주아버지합창단은 1대 지휘자 김성일씨가 단원을모집하면서 시작됐고, 20여 명의 아버지들이 의기투합하면서 1998년 3월 1일 창단했다.
올해 창단 22주년을 맞은 광주아버지합창단원은 50명으로 크게 불어났다. 30대부터 최고령 75세까지, 교사와의사·회사원·택시기사·자영업자 등 직업도 다양하다.별다른 입단 심사는 없지만 광주아버지합창단은 완전한 화음을 이뤄내기 위해 연습벌레를 자처한다.
매주 월요일 오후 8시 아버지들은 연습공간인 북구 중흥동 전남대학교 동창회관에서 화성을 연습한다. 코로나19 확산세가 컸던 시기에는 단원별로 멘토링을 벌이며 ‘연습과 방역’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정기연주회와 자선음악회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 부족했음에도 완벽한 호흡을 보여줬던 비결이 여기에 있다.
지난 4년 동안 광주아버지합창단을 이끌어 온 추영식(68) 단장은 “음악으로 이어온 봉사활동은 오히려 합창단원들에게 비타민 같은 존재가 됐다”고 말한다.조선대학교 외국어대학장을 지낸 그는 퇴임한 뒤 18년 동안 교탁 대신 보면대를 잡고 있다.
“돌이켜보면 힘들고 어려울 때 마다 아버지는 늘 우리가정과 사회의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매서운 추위를 견뎌낸 한 겨울의 매화처럼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더욱 다듬어진 아버지들의 멋진 ‘함성’을 전하고 싶었어요.
지루한 장마 같은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관객들 앞에 공연할 날을 기대하며 단원들과 열심히 무대를 준비해왔어요. 공연을 보러 온 가족들이 건네는 응원의 말 한마디는그동안의 시름을 눈 녹듯이 씻어주곤 하죠.”
지난해 6월 지인의 소개로 합창단원이 된 노병철(42)씨는 합창이 지닌 본연의 ‘선한 영향력’에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다.
“세상에서 목소리만큼 뛰어난 악기가 있을까요? 저마다 직업을 가지고 바쁜 일상 속에서 생계를 잇고 있지만태생적으로 지닌 제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노래를 부르다 보면 어느새 불협화음은 사라지고 조화가 생기더라고요. 자라는 제 아이에게도 합창이 지닌정화와 상생의 장점을 알려주고 싶어요.
”광주아버지합창단의 발자취는 인터넷 카페(sdb.modoo.at)에서 볼 수 있다. 문의 010-8624-0444.
백희준 광주일보
지난해 정기공연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