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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희망이 없어도 희망합시다. 혹독한 시련 가운데서도 꾸준히 희망합시다!
바야흐로 2025년, 정기 희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희년을 공식 선포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올 한해 우리 모두가 ‘희망의 순례자들’로 살아가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이기에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표현이 더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올 한 해 희망이 없어 보여도 희망하며, 깊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부단히 희망하는 ‘희망의 순례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희년의 주체이자 주관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당신과 함께 하는 매일 매순간이 희년임을 장엄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희년을 시작하는 우리를 향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초대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순례자는 단지 걷는 사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지닌 사람, 그중에서도 확실한 목적지를 지닌 사람이어야 하고, 성스러운 목적지를 지니고 있을 때라야 순례에 힘이 붙고 피곤한 여정도 잘 견딜 수 있습니다.”
희년이 시작되면 몇 가지 관련 행사가 뒤따릅니다. 전대사의 은혜 부여, 그에 따른 성지나 성당 순례...그중에 첫 번째 이루어지는 행사는 성전 문을 여는 것입니다. 작년 성탄 전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성문을 활짝 여시면서 희년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에 대한 광주대교구 김정용 베드로 신부님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희년이 시작될 때 성문을 여는 상징 행위는 교회가 우리의 소유나 배타적인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교회는 언제나 문이 활짝 열려있는 아버지의 집, 저마다 어려움을 안고 찾아오는 모든 이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누구나 흔쾌히 환대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내는 장소요 표지여야 한다. 그러니 그 누구도 교회의 소유자인 양 행세할 수 없다. 우리는 그저 하느님의 집에 더부살이하는 손님, 잠시 머물다 떠나는 나그네에 불과하다.
교회는 예수님처럼 세상에서는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부비고 살며,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세상,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사는 사람들의 연대 공동체인 것이다.”
신부님께서는 계속해서 오랜만에 맞이한 너무나 은혜로운 이 희년을 영원한 순례자인 우리가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명쾌하게 소개하고 계십니다.
“희망의 순례는 그저 자기만족이나 유희만을 위한 휴가나 수박 곁핥기식의 여행과 같은 것이 아니다. 또한 단순히 성지나 성당을 방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희망의 순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나서는 여정이다. 교회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것이다. 인간이 둘러쳐 놓은 모든 장벽, 모든 경계, 곧 모든 형태의 차별과 혐오의 문화, 배타성과 불평등의 장벽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다.
순례는 그저 고행이 아니다. 마치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처럼 설레고 신나는 여정이다.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을 만나는 행복한 여정이다. 예수님의 순례가 그러하였다.”(김정용, 희망의 순례자들, 바오로딸)
가치나 의미, 뚜렷한 목표의식이 부여된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라는 것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희망하는 것, 이 세상 것만을 희망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희망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혹독한 고통의 세월 속에서도 결국 만사를 선으로 이끄시는 임마누엘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하심을 굳게 믿으며, 또다시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는 기쁨 충만한 희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람들이 하는 큰 실수 중에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일입니다. 해석은 벌써 그 안에 ‘의심’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 말씀을 하시는 분보다 높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의대생들은 시체를 해부합니다. 이것이 해석과 같습니다. 해석은 자녀가 부모의 말에 하는 행동이 아닌 부모가 자녀의 말에 대해 하는 행위입니다.
제가 자주 쓰는 예화로, 부자가 두 아들에게 황무지 땅을 반으로 나누어 유산으로 주었습니다. 부자는 그 땅에 보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두 아들은 보물을 찾기 위해 열심히 황무지를 팠지만, 보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 아들은 아버지가 거짓말을 했다고 여겨 포기하고 폐인이 되었고, 한 아들은 이렇게 된 이상 농사나 지어보자고 해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는 행복의 길입니다. 그 말씀을 따르면 무조건 행복해집니다. 불행해지라고 자녀를 낳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니 부모의 말씀은 순종하기만 하면 행복해집니다. 만약 교만해져서 해석하려고 하면 자기 뜻대로 말씀을 조작하여 결국엔 순종하지 못하게 되고 불행에 떨어집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어떻게 바라보셨을까요? 당신께서 성취해야 하시는 ‘예언’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두루마리를 펴서 읽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누가 이루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성취하셨습니다. 누구의 말씀을 성취하셨습니까? 아버지의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서 헨젤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는 말을 엿듣습니다. 당시 유럽에 기근이 들 때 정말 아이들을 버리는 부모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가 떠나겠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어쩔 수 없이 헨젤과 그레텔을 데리고, 깊은 숲속으로 들어갑니다.
헨젤은 미리 준비한 흰 조약돌로 길을 표시하여 그레텔과 함께 집으로 돌아옵니다. 어머니는 더욱 분노하며 아이들을 다시 버리기로 합니다. 이번에는 헨젤이 빵 부스러기로 길을 표시하지만, 새들이 그것을 모두 먹어버려 길을 잃고 맙니다.
길을 잃고 헤매던 헨젤과 그레텔은 과자로 만들어진 집을 발견합니다. 배고픈 아이들은 집을 먹기 시작하지만, 사실 이 집은 마녀의 집이었고, 마녀는 헨젤을 살찌워 먹기 위해 가두고, 그레텔을 하녀로 부립니다.
아이들은 용기와 지혜를 발휘해 마녀를 속이고, 그레텔은 마녀를 오븐에 밀어 넣어 탈출합니다. 아이들은 마녀의 보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고, 이제 가족이 굶주릴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됩니다. 집에 돌아오니 계모는 이미 사라졌고, 아버지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맞이하며 기뻐합니다.
이 동화에서 아무래도 헨젤과 그레텔의 엄마의 상징은 마녀입니다. 마녀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은 하나하나 해석하여 나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낭패를 보게 됩니다. 해석해야 하는 말을 하는 대상은 결국 우리가 이겨야 살 수 있는 대상입니다. 그래서 동화에서는 처음에 어머니였다가 차차 계모로 바뀝니다.
우리가 성경을 그런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절대 참 창조자를 만날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해석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예언으로 받아들여 나에게서 성취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 창조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록펠러는 부자 크리스천이었지만, 수전노였습니다. 병이 들어 가난한 여자 아이의 치료비를 대 주고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라는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이때 비로소 하느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해석하지 않고 하나의 예언으로 자기에게서 실현시켰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 애썼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따라 그물을 던지겠습니다.”라고 응답하고 순종했습니다. 결과는 엄청난 물고기였습니다. 성경 말씀을 해석하려고 노력하지 맙시다. 그러면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을 죽여야 하는 대상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의심이 생긴다면, 그래서 돌 주머니를 차거나 빵 부스러기를 버려야 한다면, 그 엄마는 마녀처럼 불에 처넣어야 하는 상황과 같습니다. 반면 베드로처럼 말씀에 무조건 순종한다면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내가 그분을 창조자로 인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방황하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가서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에 순종하였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만나지 못한 하느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말씀을 해석하지 말고 순종할 용기를 내어봅시다. 말씀은 무엇이건 나에게서 성취될 예언입니다. 예언자는 예언이 성취될 때 자신을 보내신 분을 진정으로 만납니다. 성경은 해석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에게 성취되도록 순종해야 할 예언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4,14-22: 성경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
사탄을 힘차게 물리치신 뒤에 주님께서는 성령의 힘을 지니고 능력과 권위를 떨치며 갈릴래아로 가셨다. 그분은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고 백성들은 놀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분은 성령의 힘을 당신 힘과 권능처럼 사용하심으로써 찬미를 받으신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시어 두루마리를 펼쳐 당신에 관한 예언 이사 61,1-2을 읽으셨다. 이것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18절). 여기서 가난한 이들은 다른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들에게는 하느님도, 율법도, 예언자도, 정의도, 나머지 다른 덕들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잡혀간 포로들이었다. 오랫동안 사탄에게 묶인 채 사로잡힌 신세가 되어 그에게 복종했다. 바로 예수님께서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18절) 하려고 오셨다.
말씀과 그분의 가르침으로 눈먼 이들이 앞을 본다. 그분이 가르치시는 것은 ‘잡혀간 이들’만 아니라 ‘눈먼 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18절) 예수님께서 치유하여 떠나보내신, 짓밟히고 부서진 사람들이 바로 이 억압받는 사람들이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9절) 그때는 우리가 눈을 더 보게 되고, 사슬에서 풀려나고, 모든 상처가 치유되는 때이다. 즉 주님의 때, 주님의 은혜의 때가 되게 하는 가르침이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회중 앞에서 읽으시자, 그들은 배우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글을 읽나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분을 보고 있다. 그때,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 하시며 예언자 이사야가 말하는 이가 바로 당신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경 말씀을 구체적으로 사심으로써 그 말씀을 현실화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가난하고 하느님도, 율법도, 예언자들도 없는 영적으로 가난한 이방인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잡혀있는 자들을 풀어주시고, 사탄의 통치를 무너뜨려 어둠에 사로잡힌 이들을 영적인 빛으로 비추셨다. 그분은 죄 때문에 가슴이 부서진 사람들에게서 죄의 사슬을 끊어주셨다. 또한, 장차 생명을 주실 것이며 죄인들이라고 하는 그들이 의로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의 해이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구체적으로 이루심으로써 이사야서를 완성하셨다면, 그리고 이사야와 만나셨다면 우리도 그분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아냄으로써, 2000년 전의 예수님과 참으로 만나야 한다. 그분을 만나고 체험하는 방법은 그분의 말씀을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고 구원을 체험케 하는 그리고 그분을 만나게 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말씀의 실천을 통하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1938년 하버드 외과 대학 연구팀은 하버드대 남학생들을 모집한 뒤 평생에 걸쳐 그들의 삶을 추적 관찰했습니다. 일명 ‘하버드 그랜트 연구’입니다. 그러나 이는 인구학적으로 볼 때 일반화가 가능한 결과를 도출하기에 대상 범위가 너무 좁은 것으로 판단되어, 보스턴 빈민가 젊은이들도 포함해서 평생에 걸쳐 그들의 삶을 추적했습니다. 일명 ‘글루에크 연구’입니다.
이 연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행복을 주제로 최장기간 진행된 연구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 ‘행복한 삶의 조건은 무엇인가?’가 밝혀졌습니다.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준 것입니다. 금연, 금주, 체중, 운동, 순응적 대처방식, 교육, 인간관계. 이렇게 7가지 목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중에서 제일 중요한 한 가지를 뽑는다면 이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관계’
행복하고 건강한 노인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특징은 건강한 인간관계였습니다. 그래서 50세에 인간관계에서 가장 만족감을 느꼈던 사람들이 80세에 가장 건강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종종 인간관계를 끊으려는 분들을 만납니다. 인간관계를 끊으면 순간적인 만족은 얻을 수 있습니다. 또 편하고 홀가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기에게 가장 큰 해로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 말이 떠올려집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가셔서 하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의 구원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맺기 위해 직접 이 땅에 오신 것이었습니다.
앞서 ‘행복한 삶의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관계’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아니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구원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를 끊어버리게 되면 누가 손해일까요? 결국 자기 손해로만 다가옵니다.
동반자적 사랑의 관계가 주님과 우리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순간적인 만족을 위해, 또 자기 편한 것만 따지면서 그 관계를 외면하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가 모두 편견을 비난하지만, 아직은 모두가 편견을 가지고 있다(H. 스펜서).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1)
하느님의 눈은
우리 곁에 있는
형제의 눈동자에도
머물러 계신다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눈을 바라보며
그분의 현존에
깊이 머물러 살고 싶다면
그분의 눈동자에 비친
형제의 눈동자도
함께
바라보아야 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라고 말하는 건 거짓이고 위선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언자적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가식과 위선을 치료할 수 있는 곳은
그래서 바로 공동체입니다.
무조건 감싸고 감추는 게 치료약이 아니라
건강하게 그런 부분을 얘기할 수 있는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말씀이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고 열매를 맺을 때
공동체 영성도 뿌리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 영성은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사랑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헤아릴 길 없는
그 사랑을 습득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공동체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때로는 십자가를 끌어안는 것처럼
아플 때도 분명 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과 인간을 하나 되게 하고
사람들끼리도 하나 되게 만드는 기본 토대는
변함없이 ‘사랑’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시간
속에 함께 한
간절했던
말씀의
발자욱들을
봅니다.
사람답게
사는 삶이란
다름 아닌
말씀과 함께
사는 삶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오늘
말씀을 듣고
말씀이
우리 삶에
이루어질 것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하나 말씀에
동참하는 사람이
너무나 적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동참하는 삶은
오늘의 시간을
말씀으로
채우는 삶입니다.
말씀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너그러운
이해와
신뢰로 이끌며
소중한 공동체를
만드는 바탕이
됩니다.
공동체를
지탱하는 힘은
말씀입니다.
말씀과 멀어지면
우리 자신의
삶은 물론
공동체마저
무너뜨리는
어리석음이
됩니다.
오늘을
살게하며
오늘을
되살리는 것은
분명 말씀입니다.
신앙적인
실천을
뛰어넘으며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깨우쳐 줍니다.
말씀으로
오늘을 뜨겁게
살아가는
말씀의
오늘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말씀에
동의하고
말씀에
동참합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4,21)
'희년의 삶!'
오늘 복음(루카4,14-22)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4,18-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는 '희년'을 가리킵니다. 희년은 레위기 25장 8-13절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7번 반복하여 49년이 지난 그다음 해인 '50년째 해'입니다.
'희년의 본질'은 이사야 예언서 61장 1-2절의 말씀인 오늘 말씀(루카4,18-19)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기쁨과 자유와 해방'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희년이 돌아오면 땅도 쉬고, 빚도 탕감해 주고, 노예도 해방시켜 내보냈습니다.
이 '희년 선포'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분명한 목적과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기쁨과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희년의 삶'은 '기쁨과 자유와 해방의 삶인 부활의 삶'입니다. '주님께로 돌아와 다시 시작하는 삶'입니다. 따라서 희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회개'이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5년을 희년의 해(2024.12.24~2026.1.6)'로 선포하셨습니다.
각 교구마다 지정된 성지와 성당을 순례하고, 내가 먼저 회개하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도록 합시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4,20-21)
복음말씀
제1독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4,19―5,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을 19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0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21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1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2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4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14-22ㄱ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15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