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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 일본의 역사관을 비판한다.
제목처럼 이 책은 일본인이 일본의 역사관을 비판한 책이다. 자신들이 역사를 잘 못 판단한 것은 물론 이웃 나라 중국과 한국에 대한 역사관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책의 저자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는 1948년에 오사카에서 태어나 교토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박사가 되어 토쿄대학 교수로 지내다가 2002년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로, 현재는 토쿄대학 명예교수로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한국사를 연구하고 한·일역사관의 교류와 소통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저서로는 『조선토지조사사업사の연구』,『양반』,『나의 한국사 공부』,『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일본, 한국 병합을 말하다』(공저), 『근대 교류사의 상호인식』(공편) 등이 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역사 인식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대립이 존재한다. 대립은 오래전부터 존재하다가 특히 1980년대 이후 심각해지면서 앞으로도 쉽게 해결될 거라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사를 일본인의 입장에서 연구해온 나로서는 항상 이 문제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으며 나의 연구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문제 해결에 일조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고 살아왔다.
일본의 역사학은 2차 세계대전까지는 이른바 ‘황국사관’(천황제 중심으로 일본사를 파악하는 입장) 이었으나 2차 대전 패배를 계기로 그 전 역사학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토대로 진보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일본 내에는 근대일본의 한국·중국 침략과 지배에 관해서 보수와 진보 두 가지 조류가 대립하고 있지만, 일본사 전체에 대한 이해라는 면에서는 근본적으로 대립으로 보기는 어렵다.
내가 일본사람들이 듣기 거북한 말을 끊임없이 해온 것은 일본 그리고 일본과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이었으며 그런 면에서 후회는 없다. 나의 일본사 비판이 맞는 것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반응이 전혀 없다는 것이 가장 힘들게 했지만 이제 조금씩이나마 학계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연구는 한국사, 일본사라는 틀을 너무 강하게 의식한 것으로 다시, 새롭게 보려는 연구였다고 할 수 있다. 극복이라는 절실한 화두가 역사 인식을 오히려 강화할 위험도 있다고 여겨지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일 양국 근대역사학의 시발점부터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사나 일본사에서 고대사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했는가, 고대사가 왜 필요한가 등의 문제부터 고민해야 할 것이다. 최근에 이 문제에 관해서도 검토하자고 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는 그 부분까지 다루지는 못했다. 앞으로 과제로 삼고 싶다”라고 했다.
책은 일본인이 썼으므로 쉽게 이해하려 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책을 이해하려면 제목과 광고, 서평 등을 먼저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목을 옮겨본다.
О제1부 일본의 '봉건제'론과 탈아적(脫亞的) 일본사 인식
·제1장 일본 '국사'의 성립과 한국사 인식 '봉건제"론을 중심으로
·제2장 식민지기 일본과 한국에서의 '봉건제'론
·제3장 한·일 고등학교 역사교육의 세계사 인식과 '봉건제'론
·제4장 봉건제와 feudalism의 사이, 인문학과 정치학의 대화를 위해
·제5장 근세일본의 조선인식, 임진왜란의 기억을 중심으로
제2부 일본의 동아시아 인식
·제6장 평화의 시각에서 보는 일본 '근세화' 탈아적 역사이해 비판
·제7장 일본사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하여, '한일병합' 100주년에 즈음하여
·제8장 한국사 인식의 함정
·제9장 ‘방법으로서의 동아시아'를 다시 생각한다
·제10장 일본 동아시아 공동체론의 현주소
·제11장 후꾸자와 유끼찌의 유교 인식
일본의 역사관에서 주목할 점은 근세에 들면서 탈아적(脫亞的) 일본사 파악이라는 관점에서 한국과 중국, 이들과 일본 간 불가분의 관계를 먼저 중시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문제점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고대 한·일 관계에서 일본의 우월주의를 무조건적으로 전제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중세 봉건제의 우월 주장이다. 한국과 중국이 군현제를 유지한 봉건제와 대비하여 일본식 봉건제의 우월성을 의식했다는 점인데, 두 가지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은 일본과 중국이 아닌 일본과 한국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일본은 1870년부터 1890년 사이에 아시아주의라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일본사 인식에 크게 변모를 가져왔다. 일본의 역사를 한국과 중국에서 분리하되 이를 대신해 유럽 역사와 유사성을 도출하려는 방향으로 나간 것이다. 유럽식 봉건제, 즉 Feudalism의 번역어로 일본에는 중국, 한국과 다른 봉건시대가 존재했음을 주장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정치적 의미의 봉건제를 주장한 것은 아니고 경제사, 법제사 분야에 우월성을 먼저 주장한 것이다.
“중세 유럽의 봉건제도는 영주의 사령(私領),즉 식읍(食邑)의 차지(借地)에서 영주와 봉신(封臣)간의 종속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일본의 봉건제도의 성립은 이것과 시작이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매우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1906년 독일에 유학했던 나까타의 논문 일부인데, 논문은 이후 일본법제사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 게르만법과 일본 중세법의 친근성을 강조하면서 탈아(脫亞) 방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본은 시대 변천을 거치면서 새로운 역사서술 방향이 제시되었는데, 1896년 도쿄대를 졸업한 하라 카쯔로오는 『일본중세사』에서 “…왕조 문물의 발달이 무가시대에 이르러 쇠운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역사 편술을 상대(上代)는 상밀하게, 중세 이후는 간략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시 말해 가마쿠라 시대(1085∼1333)에서 아시까가 시대(1336∼1575)를 지나 토쿠가와 시대(1603∼1867) 초기 문교부흥에 이르는 역사를 일본의 역사 중에서 암흑시대로 보고 많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데에 기인했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본다. 이것은 상대에 중국에서 건너온 문물의 가치를 과대평가 한데서 온 것으로 실제로 당시 수입 문명은 결코 충분히 동화되고 이용되지 않았다”
하라는 종래의 고대 중시, 중세 경시 풍조는 그 폐해가 있었다고 하고 폐해로 인해 생긴 것이 ‘중국에서 도래한 문물의 가치를 과대평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하라의 동료였던 우찌다는 『일본근세사』에서 에도시대를 근세 유럽과 같은 시기로 보고 “중국에서는 명말, 유럽에서는 종교개혁 시대에 해당하는 이 시대에 일본에서 일어난 정치·경제·학문 및 사상의 변화는 서유럽의 중세에서 근세로의 과도기에 있었던 사건들과 현저한 유사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근세를 새롭게 인식한 일본은 한국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하기로 마음 먹은 것일까? “한국의 경제조직은 어떻게 말할 수가 없다. 국민경제라고 말할 수 없고 도시경제도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교통경제의 발달은 낮은 단계고 전국적으로 화폐경제의 보급을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남은 개념은 자족경제로서 촌락경제뿐이다. 한국의 ‘양반’은 영토적인 기초를 가지지 않았다. 한국은 국내에 양반이 많다는 것을 자랑하지만 한국의 진보를 방해하는 것이 다수의 양반임을 모르고 있다. 국가라는 개념을 가지고 한국의 정치조직을 자리매김한다 것도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독일 유학 후에 잠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경제학자 후꾸다 도꾸조오(福田德三)는 ‘한국사회 존재양식, 지배층인 양반의 특징, 경제의 발전 단계’등을 근거로 한국은 봉건제의 결여, 봉건제 이전 단계에서의 정체성이 정비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가 한국에게는 매우 바람직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고대의 일본은 동아시아의 압도적 영향으로 문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으므로 일본은 동아시아적 아이덴티디(일체감)를 거부하기 위해서 천황제를 들먹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들고나온 것이 중세봉건제다. 유럽과 유사하다는 봉건제, 즉 고대문명의 영향은 적고 표면적이었다고 하고 중세야말로 일본의 독자적 문명이 확립되기 시작한 시기라고 주장한 것인데, 바로 하라의 『일본중세사』가 그 대표적이다.
일본이 한국 지배를 합리화한 것으로는 ‘일선동조론’과 ‘정체론’ 두 가지가 있다. 한국은 아직 깨어나지 못한 나라로 한국을 보호국화하여 병합에 이르는 과정을 지배한 이념은 기본적으로 ‘정체론’을 바탕으로 했다. 그것은 ‘일선동조론’만으로는 한국 지배를 합리화하는데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병합과 함께 일본이 한국 지배의 이념으로 내세운 것은 일시동인(一視同仁 - 평등하고 똑같음)이었고. 그 정책적인 표현은 ‘동화정책’이었다. 따라서 한국 지배 정책 기본 이념은 ‘한국의 근대화론’이었으며 한국의 ‘봉건제 부재=근대화능력 부재’라는 도식으로 지배를 합리화하고자 했다.
일본의 ‘봉건제’론은 성립 시기부터 일본사를 동아시아사적 연관에서 분리하고 국민국가 형성을 위한 역사의식 육성과 아시아 침략 합리화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로서 2차 대전 후에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정착되기에 이른 것이다. ‘중세적 세계의 형성’은 전쟁 시기의 천황제 파시즘에 대한 저항의 산물로 높이 평가받고 있고 이것은 일본 ‘봉건제’론의 정착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한국을 ‘봉건제 부재’라고 규정했지만, 일본에 유학하기도 한 후꾸다의 제자 백남운은 신라말에서 조선왕조까지의 긴 기간을 봉건제로 보았다. 고려시대를 ‘전형적인 정력적 봉건사회, 조선왕조를 절대주의적 봉건체제’라고 보았는데, 백남운의 아시아적-조선봉건제론의 핵심적인 부분은 ‘집권적 토지 국유제’와‘중앙집권적 봉건국가’라고 규정한 것인데, 이 봉건제의 양태는 영주에 의한 구주(歐洲)나 일본형과 구별되는 아시아적 봉건제의 전형이며 일본의 주장에 반대된다.
결론적으로 일본은 중·근대 시기에 탈아시아 정책으로 서구에 버금가는 봉건제도를 실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18세기 말까지 세계 여러 지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가 서구를 능가하거나 적어도 동등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유럽의 봉건제를 기준으로 동아시아를 파악한다는 것 자체가 본말이 전도되었다. 동아시아적 봉건제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동아시아가 안고 있는 문제에 접근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19세기적 세계관으로 그 이전을 파악하려는‘봉건제’론은 서둘러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한·일 두 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 역사교육은‘자국사’와‘세계사’두 가지를 기본으로 가르치고 있다. 특히 고등학교 교육과정과 교과서는 역사교육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두 나라의 역사서술 방식의 차이는 무엇인가? 일본은 동아시아 관련성을 강조하면서도 중국의 역대왕조와 관련성에 한정하고, 한국에 대해서는 ‘조선에서 수입된 목면이 의류 자체로 일본인에게 사용된 점 등을 이해시킨다’라고 한 것이 유일하다. ‘아이누(홋카이도)와 류큐(오키나와)와의 중계무역 역할도 유의한다’고는 언급하고 있기는 하다.
이렇듯 일본은 한국과의 관계를 극히 제한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 한국은 전근대 일본사를 상대적으로 중시하고 있다. 근대국가로의 성장에 필요한 내적 요인들이 어떻게 성숙했는지를 다양한 지표에 입각해 탐구한데 이어서 내재적 발전에 있어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비교한다’고 하여 일본 교과서에 조선 후기에 대한 기술이 거의 없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일본은 토요토미 정권의 성립(1585년)을 중세와 근세를 나누는 분수령으로 간주하는데, 근세 메이지 유신(1868년)을 전후해 정한론이 나오면서 결국 한국침략과 지배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왜 되풀이 된 것일까? 먼저 임진왜란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므로 일본의 패배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도 과연 일본은 패배를 인정하는가?
임진왜란과 관련해서 일본은 참전했던 장수, 장병 혹은 승려들의 기록을 많이 남기고 있으나 공적인 기록은 토요토미 정권도 도쿠가와 정권도 남기지 않았다. 일본에서 정사의 편찬은 고대의 한 시기를 제외하고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은 《일본서기》를 위시한 정사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 몇 차례 편찬된 후에 율령국가가 쇠퇴하면서 정사 편찬이 이루어지지 않아 10세기 이후의 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 공식기록이 없고 또 최고 지휘자들이 쓴 기록도 극히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으로 이것은 『선조실록』이라는 사료뿐만 아니라 류성룡과 이순신 등 지휘자들이 쓴 기록이 남은 조선과는 비교된다. 이는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한 차이도 있겠지만 임진왜란이 일본의 패배로 끝났다는 인식이 없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
1799년 일본 영주들의 가보를 기록한 『관정가보』에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지휘자들의 기록들이 남아 있는데 그중에 해전 지휘자였던 와키자카 야스하루에 관해 ‘명나라 군대가 지키던 사천성을 공격해 공적을 세웠다. 울산 서생성에서 가토 기요마사군을 구출했다’등이 기록되어 있지만, 우리 수군과 싸워 패배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이런 경향은 와키자카 야스하루뿐만 아니라 대부분 승리한 기록, 공로를 세운 기록은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패했거나 불명예스런 경우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 한다. 유일하게 오토모 요시무네의 경우가 있다.
“분로쿠 2년 조선의 역(役) 때 이여송이 대군을 이끌고 코니시 유키나카가 지키고 있는 평양성을 공격했다. 코니시는 요시무네와 구로다 나가마사 등에게 사람을 보내어 원군을 청했으나 요시무네는 명나라 군대의 형세에 눌려 구원하러 가지 못했다. 타이코(太閤)는 이를 전해 듣고 매우 화를 내면서 요시무네의 행동은 일본의 치욕이라며 영지를 빼앗아 사타케 요시노부에게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요시무네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걸었는데, 이것은 도쿠가와 시대까지 다이묘로 존속한 가문의 경우 임진왜란 패배나 불명예 기록은 의도적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대부분의 일본 장수들은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고 개별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데 대해서는 의문조차 가지지 않았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국내 전투의 연장으로 인식했으나 막상 달려들고 보니 달랐던 것을 알게 되고 조선의 땅과 인구도 일본보다 넓고, 많다고 하는 등 조선에 대한 기본 정보도 없었다. 그런데 영토는 몰라도 당시 조선의 인구가 일본의 인구수와 별 차이가 없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제2부에서는 ‘일본의 동아시아 인식 문제’를 다룬다. 2001년 한·일 양국은 교과서 문제 해결을 위하여 ‘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만들었다. 여기서 토요또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한국측에서 왜 이런 전쟁을 토요또미가 일으켰는지 묻자, 일본측 연구자들은 답하지 못했다. 토요또미 개인의 문제다. 혹은 전국시대 통일과정 자체가 가지고 있던 필연적인 결과다. 무역 이익을 요구했던 것이다 등 여러 견해가 있지만 일본은 무사의 등장과 무사에 의한 통일정권의 성립이라는 근본적인 문제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 전쟁을 파악하려는 논의는 없었다. 현재 일본이 지향하고 있는 세계평화라는 관점에서 일본의 “근세화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현재적 의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저자는 지적했다.
일본은 일본의 근세화 시대를 도쿠가와 시대로, 중국의 근세화 시대는 송대 이후로 보는데 이는 유럽의 르네상스를 기준으로 한 것이어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적어도 18세기까지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럽을 기준으로 근세화를 파악한다는 것이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일본은 탈아로 동아시아의 ‘근세화’변동사항에는 대응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일본의 근세화는 동아시아적 동시성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과 한국의 근세화와 그 속에서 평화실현이라는 일본의 근세가 기본적으로 무위에 의해 평화가 담보되는 체제였다는 것이다. 일본의 근세를 ‘봉건제 확립’이라든지 ‘집권적 봉건제의 확립’이라고 이해해 긍정적으로 파악하려는 일본사 연구자들의 주류입장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평화 문제가 크게 부상하고 있는 현재 일본의 근세화가 남긴 부(負-책임)의 유산을 자각해야 한다.
일본은 21세기에 들어와서도 근대일본의 아시아 및 한국침략의 역사를 직시하고 진심으로 반성하려는 태도가 사회적 동의를 얻고 있다고 하기 어려운 상태다. 반성은커녕 오히려 근대일본의 역사를 영광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한국과 중국 등의 지적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은 거대한 역사적 전환점에 있다고 보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관점이다. ‘다시’동아시아의 ‘주변’지위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한일합방을 강행하던 100여 년 전 일본은 동아시아의 중심국으로 뛰어오르던 시절이었다. 2차대전 패배에도 불구하고 동서냉전의 국제관계 속에서 미국의 종속적 동맹자로서 계속 중심적인 지위를 점했으나, 냉전의 종결과 중국의 부활이라는 현 상황에서 이제는 ‘다시’동아시아 주변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다시’라는 말은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의 지위가 주변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일본은 역사 인식을 성찰하고 스스로 비판하며 지금까지 인식해온 역사 인식에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으로‘동아시아의 주변부로서의 일본사’라는 시각을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자각은 거의 보이지 않고 종래의 패러다임이 약간 수정된 채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일본인 스스로 일본사 이해를 비판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기 위해 저자는 이 글을 썼다고 했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해 혹은 전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전환의 기축에는 ‘유교모델’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데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이 동아시아 주변적 위치에 있을 때 일본은 유교모델을 거부함으로써 동아시아 중심으로 뛰어오를 수 있었고, 유교모델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점이 일본이 중심국으로 뛰어오른 결정적 요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유교모델 수용이라는 역사적 경험 부재는 일본의 진로를 제약할지 모른다.
‘유교모델’이란 유교(주자학)를 이념으로 그 이념실현을 위해 국가와 사회체제를 갖추는 것은 물론 유교에 깊은 지식을 가진 자를 시험을 통해 선발하고 그들이 예를 통해 국가를 통치하는 것을 말이다. 중국은 송대에 형성되어 명대에 확립되었고, 한국은 조선왕조의 성립을 계기로, 베트남은 여조(黎朝)시대에 본격화되었으며, 류큐도 도쿠가와 정권의 지배하에서 유교모델을 의식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근래에 일본에서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관련 연구가 있었는데 이토는 한국과의 ‘병합’을 반대했다, 그나마 나은 제국주의자였다는 견해가 주장되고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힘썼다고도 했으나, 이런 논지는 근대화 대상인 당시 한국의 상황에 대한 고찰은 빠져있다는 점이 논지를 흐리게 한다. 이토는 동아시아 삼국을 “공맹(公孟)의 도덕에 의해 인심을 유지하는 나라들”이라며 공통성을 인식하고 한국에 대한 교육방침에 유교 교육을 중시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한국 유생(儒生)은 편협하고 시세에 우원(迂遠-물정에 어둡다)함은 예상한바 이상이다”라고 하여 한국의 현실에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그의 이런 인식은 조선의 유교모델에 관해 인식이 거의 무지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이토의 강력한 추천으로 한국에 근대화된 법제도를 만들기 위해 내한한 우매 겐지로오(梅謙次郞)는 법을 제정하기에 앞서 한국에 대한 구관조사(舊慣調査)을 실시했다. 근대법인 일본의 민법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예상하고 전통적인 관습을 조사해 한국에 맞는 민법을 제정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사를 해보니 예상이 뒤집혀 근대적 소유권과 지극히 유사한 토지소유권이 한국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토지소유권을 인민에게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 따라서 내가 말하는 한국의 토지소유권이 온전히 일본의 오늘날의 토지소유권 관념과 일치하는가, 하지 않는가는 의심할 수 있으나, 요컨대 널리 소유권이라고 정할 수 있는 권리가 한국인민에게는 적어도 수백 년 전부터 인정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본보다 소유에 대한 인식이 뒤처져 있어야 할 한국이 근대적 소유권과 유사한 형태로 수백 년 전부터 존재해 왔음을 우매는 인식한 것이다. 이는 유교모델에 관한 것으로 이토에게 이런 인식은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에게는 시대적 제약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보다 한국에 대한 연구가 비약적으로 진전된 현재도 그러한 성과는 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조선시대 유교모델에 관한 일본의 인식은 지난 100년간 조금도 진보가 없었다는 말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1871∼1873년에 걸쳐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고 이를 실시하고자 했다. 호적제와 징병제 실시, 토지매매와 직업 이주의 자유, 지배층의 대도(帶刀) 표시, 종교 조사를 위한 종문인별제도(宗門人別制度)등은 폐지했다. 그러면서 이런 개혁의 상당 부분은 중국과 한국에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에는 이미 집권적 관료제 국가체제가 유교모델로서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개혁이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국민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의 상당부분을 이미 실현하고 있었던 한국과 중국의 구사회(舊社會)실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와 비교하여 일본의 위치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근대화 변혁을 추진하기 위해 무엇이 과제인지 불분명해져서 일본은 서구모델 수용이라는 과제를 절실한 것으로 인식하기 곤란하게 만드는 동시에, 전통을 문명으로 인식하고 서구문명을 상대화하려는 움직임이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현재 일본은 앞서가지만? 정치적, 사회적으로 주변 국가들에 뒤처지고 있다. 아직도 군주제가 존재하고 여성 천황을 인정할지 말지라는 만화적 논의가 계속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2008년 천 년 이상 지속되던 호주제가 폐지되었으나 일본은 남녀별성(男女別性) 논의도 담보상태다. 일본은 종래 인식대로 중심주의 패러다임에 안주하고 있다. 일본이 21세기 동아시아 나라들과 어떠한 관계를 구축할 것인가 하는 선택은 물론 한국·북조선·중국 나아가 베트남 등 여러 나라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유교모델’을 수용한 역사적 경험을 가진다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한일합방’10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한국과 일본에 관한 역사 인식 문제를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에 유감과 무력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문제는 병합을 옹호하느냐 혹은 적극적으로 찬성한 당시의 역사 인식이 아직도 극복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런 역사 인식이 지금도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일본의 침략행위를 옹호하거나 변호하는 보수적 국가주의적 역사연구와 일본의 침략행위를 비판하는 진보적 역사연구 구도로는 역사 인식이 재생산되는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의 소설 『바람과 파도』에도 묘사하고 있듯이 원나라가 고려를 공격할 때 그 선두에 섰던 사람들은 고려 유민들이었다. 또 청나라 군대의 핵심이었던 만주팔기(滿洲八旗)군에도 고려인이 대량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한국에서 국가라든지 민족이라든지 하는 것은 결코 확고한 틀이 될 수 없었다. 지금도 국가의 틀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일본은 외부에서 일본열도로 건너온 사람들의 자손이 다수 존재하지만, 그런 사실을 은폐하고 흔적을 말소해온 역사를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해외로 건너간 사람들의 존재도 말소해왔다는 사실에도 일본 역사학계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무인 또는 전사 집단이 돌출되어 일반서민과 동떨어진 성(城)을 만든 경우는 일본과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 뿐이다. 이를 진보의 증거로 삼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국 시민과 같이하지 않겠다는 극히 후진적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중국과 한국의 산성은 주민을 포함한 곳으로, 주민을 무시하는 방법으로 축성하고 전쟁 하지는 않았다.
근현대사에서 한국은 ‘일국의 독립’을 지키는 데 실패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구성원들이 ‘일신의 독립’까지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가혹한 희생이 따랐지만, 일국의 독립을 잃어버린 가운데서도 국가를 상대화하는 입장을 획득할 수는 있었던 것이다. 현재 한국은 민족주의가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고, 그것이 ‘독립의 상실’이라는 기억과 같이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민족주의를 공동화(空洞化)하기도 한다. 영어 열기와 미국 유학, 미국시민권 획득이라는 것들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2007년 해외 체류 인구가 100만 명 남짓으로 전인구의 1%에도 못 미친 일본에 비해, 한국은 미국에 300만, 중국에 200만 등 700만 이상 재외주재 한국인이 있다. 일국의 독립이라는 관점에서 국가를 상대화하는 경험을 축적해온 한국과 중국은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리하다.
전통과 주자학을 국가이념으로 보편주의적 입장에 있던 조선왕조에는 국가보다 이념 쪽이 상위에 자리매김했고 따라서 현실의 국가를 비판하는 현상이 종종 있어 왔다. 그리고 그것이 최고조에 달했던 것이 ‘개항기’이후였다. 그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고 내부는 심각한 정치적 대립이 생겨 일본과 중국, 구미 열강의 팽창정책에 신속하게 대등하지 못하면서 결국 국가의 ‘자립’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와중에도 보편적 이념의 실현을 지향했고 현재도 그러한 움직임은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국가와 개인의 양상은 중국에서도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반면에 일본에서는 여전히 국가를 정면에서 비판하는 일은 곤란해한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나 대역사건 혹은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같은 국가범죄를 새롭게 재단하는 일이 현재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에서 일본은 ‘방법으로서의 동아시아’즉 한국이나 중국, 나아가 오키나와, 베트남과 대비하여 일본의 역사와 사회를 상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에 일본은 동아시아 지역통합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해 왔으나, 21세기 들어 ‘동아시아공동체’이라는 큰 물결이 일면서 2004년에는 일본 주도하에 ‘동아시아공동체평의회’가 설립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평의회를 주도한 사람은 이토 겐이지(伊藤憲一 일본 국제포럼 이사장)으로 그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중심이 되어 출간한 『신지구일본사(新地球日本史)』의 집필자이기도 하다. 평의회가 동아시아공동체 구축에 어떤 태도와 정책을 제시할 것인지 관심이 쏠리고 있는 가운데 여기(한중일)에 더해 동북아(몽골·시베리아)까지 합친 연구기관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타케시마의 날’을 제정하기도 했던 시마네현 현립 시네마대학에서 2000년 동북아시아연구센터가 설립되었는데, 센터의 연구대상은 중국·한반도·몽골·동부시베리아까지로 좋게 말하면 일본의 다양성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일본의 지역구상과 통합에 혼란 상태를 내보이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들 단체들은 경제중심이라는 성격이 강하고 동아시아의 범위에 대해서는 서로 통일되어 있지 않은데 동아시아공동체 문제에 관한 일본의 애매한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동아시아공동체’는 동아시아라는 지역의 범위, 공동체가 왜 필요한가.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가? 인데 현재까지 일반국민들은 관심이 없고 소수만이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일본의 동아시론이란 무엇일까? ‘동아시아’라는 말을 먼저 쓰기 시작한 것은 역사연구자들이었다. 이들은 중국혁명의 성공, 미·일 안보 조약 개정 등에 자극받아 일본의 역사 현실을 동아시아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려고 했다.‘근대전환기에 일본은 독립을 지킬 수 있었는데 왜 중국은 반(半)식민지가 되었는가’하는 문제도 여기에 포함된다.
문제는 일본에서 논의되고 있는 이 동아시아공동체가 역사 인식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는가다. 일본 근대 침략의 역사, 그것에 대한 반성 없이는 ‘동아시아공동체’혹은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등 어떤 이름이든 문제의식이 약하다는 인상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런던정경대학 교수를 지낸 모리시마가 유언처럼 남긴 ‘동아시아공동체’론은 주목된다. 그는 『일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동아시아공동체를 제안한다』이다. 저자는 “일본과 한국의 경제력과 기술을 이용해서 중국과 북한의 오지를 개발하겠다는, 어쩌면 아주 단순한 것인데, 내가 주목하고 싶은 면은 동아시아공동체 결성이 일본을 신생시킨다는 발상과 그 아래 깔린 일본의 역사, 문화에 대한 모리시마의 인식 부분이다. 특히 모리시마가 말하는 일본과 중국의 비교는 경청할 만하다”고 하면서 모리시마의 책은 한국에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책을 요약해 설명하고 있다.
“천황제 국가에서 국민은 인권이 거의 없었다. 자기들이 그렇기에 조선인이나 중국인에게는 인권이 전혀 없다고 일본인들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난징대학살과 싱가포르 대학살 및 조선여성과 기타 아시아 여성을 위안부로 쓴 일은 당연한 것으로서 일본인은 그것을 중대한 일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의 군인이나 병사들은 천황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정신으로 식민지와 점령지 사람들을 죽이거나 위안부로 삼았던 것이다. 천황제 국가에서는 일본인의 윤리감각이 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시아의 상황은 공동체 창설이라는 조직혁신을 위한 유물론적 기초는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 현재 동아시아에서 일본과 한국은 강력한 자동차 생산국이고, 중국의 도로는 유럽의 그것과 비교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객기 이용을 확대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 다만 그런 정치적 제휴안을 제안할 수 있는 정치가가 없을 뿐이다. 만약 있다면 제일 그럴듯해 보이는 나라가 중국이고 그다음이 한국인데 절망적으로 없는 나라가 일본과 북한이다’저자의 개인적 견해일지라도 사리에 맞는 말인 것 같다.
이 책은 상당한 차원의, ‘급이 다른 책’이라는 생각을 하고,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고 곡해되는 부분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 또한 선한 마음으로 한국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한·일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에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책의 마무리라고 할까. 일본 근대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계몽사상가, 메이지유신 기획자며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창립자이기도 하고, 현재 일본 돈 1만엔 권 지폐에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후쿠자와 유끼찌(福澤諭吉, 1813∼1901)의 역사관에 대해 알아보는 것으로 독후감을 마칠까 한다. 후쿠자와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이루졌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크게 대립되고 있다. 후쿠자와는 1813년 오이타현(大分縣)에서 하급무사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으나 성장하면서 유교 인식에 오해하고 또 이를 주장했다. 그는 중국과 일본의 군신 관계를 똑같이 ‘선천적으로 정해진 것’으로 보았으나, 중국과 한국은 주군에 대한 충(忠)보다 부모에 대한 효(孝)를 우선시한다. 일본은 효보다 충을 우선시하는데, 후쿠자와는 일본유교의 이런 특수한 관념을 유교 본래의 모습으로 잘못 인식한 것이다.
일본은 막번 체제하에서 쇼군과 다이묘, 하따모토(旗本-도쿠가와 시대 쇼군의 직속 무사로 만석 이하 영토를 가진 무사) 및 일부의 상층 무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무사들은 자신의 지배영역을 독자적으로 보유하지 못하고 주군에 의지했다. 이전까지 크기의 차이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영토를 갖고 있었던 것과는 달랐다. 따라서 주군을 떠나는 일은 생활기반을 상실하는 것으로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주군이라도 무사는 주군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에 비해 중국의 사대부나 조선의 양반들은 관료로서 받는 녹봉 외에 자기 소유의 토지가 있었으므로 주군, 즉 임금이나 제후를 떠나는 일도 가능했다.
“사람은 하늘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 뜻은 하늘이 사람을 만들 때 누구에게나 다 똑같은 지위를 부여했으므로 태어날 때 상하 귀천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 같다. 일본 교과서에 반드시 나오는 후쿠자와의 말로, 요약하면 인간은 선천적으로 평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로 존재하는 인간 사이의 다양한 차이는 배우는가 배우지 않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는 주자 성리학에서 ‘인간은 모두가 성(性)과 이(理)를 갖고 태어나지만, 기(氣)의 방해를 받아 본연지성(本然之性)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올바르게 배움으로써 본연지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인간 즉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것을 후쿠자와는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는 전문(傳文)으로 표현했다.
후쿠자와는 중국은 권위와 권력이 황제 한 몸에 집중되어 있음을 비판하고, 일본은 무사 세력 등장 이후 지존(권위)과 지강(至强-권력)이 분리 되어 있다며 서양문명의 수용에 일본은 중국보다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역설했다. 서양문명의 수용, 다시 말해 근대화에 일본이 중국보다 한걸음 앞섰다는 후쿠자와의 주장은 설득력과 사실에서 부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기본적으로 중국과 한국은 유교에 대한 혹닉(惑溺-홀딱 빠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으나 두 나라가 왜 그 혹닉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일본이 중국, 한국과 달리 무사 정권이었던 도쿠가와 정권이 서양의 군사력에 대응하지 못한 것은 곧 정권의 존재 이유를 위태롭게 한 것이었으며, 개항 후 불과 10여년 만에 메이지유신으로 도쿠가와 정권은 패망했는데 무사들이 계속 정권을 잡는 것 자체가 유교 이념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유교에서 자유로웠던 일본은 서양 침략의 충격에 대응할 수 있었고 재빨리 서양문명 수용에 나섰지만, 대신 서양문명에 대한 비판의 계기를 잃었고, 반대로 중국과 한국은 유교의 이상을 계속 고집함으로써 서양문명에 대한 원리적 비판을 모색해야 했던 것이다.
후쿠자와는 근대 계몽사상가로서 일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의 사상은 1945년 일본의 패망 이후에도 이른바 계몽의 기수로 활약해 왔다. 그가 1885년에 발표한 「탈아론」은 중국과 한국에 대한 인식의 필연적인 귀결이었으며 그가 독선적 개혁구상이었던 조선의 ‘갑신정변’이 좌절됨으로써 일본이 한국과 중국에서 멀어진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후쿠자와 유끼찌는 겉으로 유교를 표방하면서도 유교를 비판했다. 후쿠자와뿐만 아니라 후쿠자와 연구자들도 유교에 관한 인식이 불충분했다. 그 원인은 일본식 유교와 중국, 한국의 유교가 지닌 차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유교에 대한 이해 결여가 중국과 한국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침략 정책을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근대에 일본이 한국과 중국을 침략하는 데 있어 유교 인식 문제가 핵심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말이다.
“세 나라 모두가 유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만큼 유교 문제에 초점을 맞춘 동아시아 역사의 재검토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