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엘레지
지금도 내가 노래방에 가면 꼭 불러보는 노래가 있다. <해운대엘레지>다. 그 노래는 나에게 해운대 백사장에 수없이 밀려왔다가 가는 파도처럼 추억이 밀려오게 한다. 그는 나에게 그리움만 남긴채, 이제는 정말 두번 또다시 만날 길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을 못잊어 흐느끼게 한다. 종대가 금년 봄에 이승을 떠났다.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따님 전화 하나로 만사는 끝나버렸다. 둘이 스므살 때다. 부산 두구동 그의 집엔 넓은 장미정원이 있고, 옆엔 맑은 냇물이 흘렀다. 달빛 아래서 둘은 키타를 치며 <Moon river>를 불렀고 <돌아오지 않는 강>을 불렀다. 그 종대는 '돌아오지 않는 강으로 불리는 그 강'( There is a river, called the river of no return)을 영원히 건너가버린 것이다. 남부터미널에서 뻐스를 타고 부산으로 가노라니 옛 일이 차창에 주마등인양 스쳐갔다. 그는 내 초등학교 동창으로 부고로 진학했지만, 방학이면 꼭 나하고만 어울렸다. 둘 다 운동을 잘했고 체격이 좋았다. 그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은 무송이라면 나는 맨손으로 버드나무를 뿌리채 뽑은 노지심이었다. 먼저 입대한 것은 나였다. 나는 63년도에 철수라는 친구를 자살로 잃고 자원입대하여 항만사 229 자동대대 운전병이 되었다. 나는 친구 따라갈려고 GMC에 자살용 실탄을 숨기고 다녔고, 서면 하이에리아 부대 옆 사창가에서 헌병을 구타하고 헬멧과 완장을 빼았아, 제부지역 15P 전 헌병대에 비상이 걸리게도 했다. 나는 카뮤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뭐르소처럼 죽음이 무섭지 않았다. 그때 종대는 부산고에서 퇴학 당한 후 금정산 중턱에 토굴을 파놓고, 하루 종일 운동만 하다가, 하산하면 건달들과 어울려 다녔다. 말하자면 온천장 깡패였다. 그 종대가 육군 이등병 계급장을 단 나를 만나자마자 즉시 해병대에 입대했다. 얼마 후 부산진 역파에 괴물이 하나 나타났다. 마이가리 하사 계급장을 하얀 해병대 헬멧에 붙인 엄청난 거구 때문에 그를 태운 해병대 찦차는 한쪽으로 차체가 비스듬이 기울어 있었다. 종대는 운전교육대 훈련병인 내가 외출 나갈 때마다 자갈치로 안내했다. 그는 돈이 얼마던지 있었다. 휴가병은 기차 안에 수없이 많았고, '어이!' 거구의 해병대 헌병이 손가락짓만 하면 휴가병은 우리가 마실 술값을 얼마던지 알아서 제공하곤 했다.
그후 종대는 제대하여 동사무소에 근무했는데, 그때 박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한국의 청년들은 왜 이런가? 독일의 청년 나치스 당원이나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애국청년단을 만들고 데모 만능 사상은 종식시켜야 한다'는 요지였다. 이 편지는 대통령에게 보고되었고, 대통령은 해운대 조선비치호텔에 왔을 때 종대를 불렀다. 덩치 작은 대통령은 거구의 종대에게 호감을 느꼈을 것이다. 현재 어떤 일을 하느냐고 묻고, 동사무소에 근무한다고 하자, '그럼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싶은가?' 하고 물었다. 그때 종대 대답이 걸작이었다. '부산 시민의 건강을 위해서 서면 위생계서 일하고 싶습니다.' 아주 똑떨어지게 몫 좋은 장소를 콕 찍어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박통이 싱긋이 웃으며, 배석한 부산시장더러, '어이 임자! 이 친구 이야기 들었지?' 하고 갔고, 종대는 즉시 서면으로 자리가 옮겨졌고, 그때부터 종대 서랍 속엔 봉투가 저절로 쌓이더라고 한다. 그래 나는 방학때 마다 부산에 초대되었고, 그 덕에 나는 부산 광복동, 해운대, 송정 등 근사한 곳은 다 갔다. 그때 가난한 제대 복학생인 나와 사귀라고 공주사대 출신 부산 브니엘 여고 선생을 송정 해수욕장으로 불러낸 것도 종대다. 나역시 그를 끔직히 대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은 그가 종암동 학교에 와서 벽보를 보고, '어이! 저기 장학생 명단에 있는게 누고?' 하는 바람에 학교 근처 하월곡동에서 마시고, 2차로 청계천 6가 진출하여 마신 바람에 두 달치 하숙비에 해당되던 그 돈을 한 잎 남기지 않고 다 쓴 적 있다.
차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며 장례식장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 였다. 조문객들 다 돌아간 식장에는 하얀 상복을 입은 부인만 있었다. 젊은 시절 꽃처럼 아름답던 부인의 수척한 눈빛이 마음 아팠다. 옛 일이 떠올랐다. 부인은 가덕도 출신인데, 경남여고 졸업하고 처음 종대와 맺어질 때는 애련한 한송이 동백꽃 이었다. 그처럼 고울 수 없었다. 종대네 집은 삼촌이 박통 누님 사위였고, 떵떵거리며 곤양성 성 위에 살았다. 그래 종손 며느리 될 처녀가 양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노인들 말이 많았다. '우짜모 좋것노?' 종대는 나에게 전화로 물었고, '가만 있거라. 내려가서 보자!'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이렇게 셋은 서대신동에서 만나 송정해수욕장에 가서 백사장에서 밤을 새웠다. 밀려오는 파도가 달빛에 부서지던 밤에, 수많은 이야기는 볓빛에 뿌려졌고, 수없는 노래는 파도에 묻히었다. 노틀담 꼽추처럼 생긴 종대다. 옆의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처럼 가날픈 처녀가 옥이씨다. 이튿날 아침, ‘우짜꼬?’ 종대가 묻자, '우짜긴 뭘 우째? 뜯어 치아뿌라 자석아! 내가 옥이씨 데리고 살란다.' 나는 그렇게 선언했다. 그 말은 옥이씨도 옆에서 들었다. 그래 옥이씨는 평생 내가 전화 걸면 애교스런 경상도 사투리로 그리 반가워 할 수 없었다. 언제 셋이 부산서 노래방 갔을 때는 '이 노래를 옥이씨에게 바칠랍니다' 나는 이리 선언하고 <동백 아가씨>를 불렀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품에 겨워...꽃잎이 빨갛게 물이 들었소’. 밤 깊은 상가에서 만나서 그녀의 눈에 맺힌 이슬을 보니,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그날 나는 잠 한숨 붙이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렇게 종대와 이별하고 올라온 얼마 후다.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를 읽다가 '인생은 외롭지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라는 대목을 읽다가 문득 종대가 너무나 그리웠다. 그래 집에 전화를 걸어보니, '지금 거신 전화는 결번이오니, 확인하시고 ...' 하는 멘트가 나온다. 허망해서 동창록을 뒤져보니, 주소는 옛날 집 주소라 틀린 것이고, 따님에게 전화해도 '없는 번호 입니다. 확인 후 다시 걸어주십시오.'라는 멘트가 나온다. 부산 사는 동창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몰랐다. 인생 끝자락이란 이런 것인가. 갑자기 발을 헛디딘 것처럼 휘청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 불로그에는 흘러간 옛노래가 많이 저장되어 있다. 스콧 맥킨지의 <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마리린 몬로의 <The River of No Return>, 앤디윌리암스의 <Moon river> 같은 노래다. 그런데 최근에 음반보호법이런 것이 생겨 그 노래들이 몽땅 날라가고, '관리자에 의해 중단된 동영상 입니다'는 멘트만 남아있다. 떠난 것은 항상 우리를 허전하게 한다. 그 노래 함께 부른 사람이 이승을 떠나면 더 허전하다. '쏴아아!' 우리 세 사람이 송정 모래밭에서 밤에 불렀던 <해운대 엘레지> 노래가 귓가에 생생히 들려왔다. 이제 나는 물 빠진 갯가에 홀로 선 셈인가. 멜랑꼬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 '이제는 정말 두번 또다시 만날 길이 없다면, 못난 미련은 던져버리자 저 바다 멀리멀리.' 가사의 한구절 한구절이 너무나 아프게 가슴을 친다.
(2014년) |
첫댓글 가슴이 뭉클해 옵니다.그 아름다운 이름을 잊어 버리고 살려니 참으로 삶이 버급기만 합니다.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는것 이젠 잊어 버릴때도 된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