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
오후의 시간이 방 안으로 천천히 들어온다. 창밖에서는 하루가 여전히 움직이고 있을 텐데 소파 위 두 사람에게만큼은 시간이 잠시 멈추었다. 한 사람은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손을 이마 가까이에 올린 채 잠들었고, 다른 한 사람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기댔다. 양말을 신은 발끝까지 힘이 풀렸다. 누가 먼저 잠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깊은 낮잠 속으로 들어가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한다. 잠든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가장 조용한 순간인지도 모른다고.
자연에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무도 밤이면 잎의 활동을 낮추고 꽃도 때가 되면 꽃잎을 오므린다. 새들도 날개를 접고 둥지에 몸을 묻는다. 들판의 풀도 계절이 바뀌면 성장을 멈추고 뿌리 속으로 생명을 거두어들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멈춤 속에서 다음 생을 준비한다. 자연에게 쉼은 게으름이 아니다.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생명의 방식이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다. 우리는 아침이면 일어나 움직이고 저녁이면 잠자리에 든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낮에 잠드는 일을 게으름처럼 여기게 되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은 부지런하고 잠시 쉬는 사람은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몸은 시계보다 정직하다. 피곤하면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어깨가 처진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생각도 어느 순간 흐릿해진다. 몸이 보내는 신호다. 이제 잠깐 멈추어도 된다는 자연의 작은 권유다.
낮잠은 거창하지 않다. 푹신한 침대가 없어도 된다. 소파 한쪽이면 어떻고 의자에 등을 기대면 또 어떤가. 햇볕이 드는 마루에 누워도 좋다. 어린 시절 여름날을 떠올리면 어른들은 마루에 누워 부채를 배 위에 올려놓고 잠깐씩 낮잠을 잤다. 매미는 목청껏 울고 마당의 장독대 위로 햇살이 쏟아져도 사람은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었다. 낮잠에서 깨어난 뒤 마시는 찬물 한 사발은 세상 어떤 음료보다 시원했다.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쉼은 생존의 한 부분이다. 고양이는 햇볕이 따뜻한 곳을 찾아 몸을 둥글게 말고 잠든다. 새들은 안전한 가지를 골라 깃털 사이로 부리를 묻는다. 겨울을 나는 생명들은 활동을 줄여 에너지를 아낀다. 생명은 끊임없이 달리는 방법만 배우지 않았다. 멈출 때를 아는 지혜도 함께 익혀 왔다. 그래서 자연의 시간에는 달림과 멈춤이 나란히 존재한다.
사람의 삶도 다르지 않다. 젊을 때는 쉬는 시간이 아까웠다. 해야 할 일이 많았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았다. 조금만 더 가면 무언가를 이룰 것 같아 몸이 보내는 신호를 외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알게 된다. 삶은 얼마나 오래 달렸는가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쉬어야 다시 걸을 수 있고 잠시 눈을 감아야 다시 세상을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
소파 위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표정이다. 체면도 없고 꾸밈도 없다. 깨어 있을 때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지만 잠든 사람에게는 그런 경계가 사라진다. 하루 동안 짊어졌던 생각과 걱정을 잠시 내려놓고 한 마리 동물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잠든 얼굴에는 묘한 평화가 있다. 나이를 먹은 얼굴의 주름까지도 그 순간만큼은 부드럽다.
어쩌면 낮잠은 몸이 스스로에게 건네는 작은 위로일 것이다. ‘오늘도 많이 움직였으니 잠깐 쉬어 가자.’ 몸은 말 대신 졸음으로 우리를 설득한다. 그 신호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자연의 리듬 안으로 들어간다. 바람이 잠잠해졌다 다시 불고, 파도가 밀려갔다 다시 돌아오듯 사람에게도 움직임과 멈춤이 반복되어야 한다.
살다 보면 우리는 쉬는 법보다 견디는 법을 먼저 배운다. 아파도 참고 피곤해도 버티며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나무는 사계절 내내 꽃을 피우지 않는다. 겨울에는 잎을 내려놓고 빈 가지로 선다. 그 침묵의 계절이 있기에 봄이면 다시 연둣빛 잎을 내민다. 사람에게 낮잠도 그런 작은 겨울일지 모른다. 몇십 분 동안 세상에서 물러나 몸과 마음을 비워 두는 시간이다.
소파 곁 탁자에는 펼쳐진 종이와 필기구가 놓여 있다. 조금 전까지 누군가는 무언가를 읽거나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은 그대로 두고 사람은 잠들었다. 참 좋은 풍경이다. 일이 사람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지금 끝내지 않아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햇살은 자리를 옮기며 하루는 제 갈 길을 간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하나둘 눈을 뜰 것이다. “내가 잠들었나?” 하며 서로를 바라보고 웃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신문을 펼치거나 물 한 잔을 마시며 남은 오후를 시작할 것이다. 낮잠 전과 똑같은 하루 같지만 몸은 조금 가벼워지고 마음에는 작은 여백이 생겨 있을 것이다.
생명은 쉼과 움직임 사이에서 오래 살아왔다. 숲도 쉬고 새도 쉬고 강물조차 굽이를 만나면 속도를 늦춘다. 인간이라고 언제나 앞으로만 달릴 수 있을까. 때로는 소파에 몸을 맡기고 세상의 소음을 잠시 닫아도 좋다. 낮잠은 하루에서 빠져나간 시간이 아니라 다시 하루 속으로 돌아오기 위해 마련한 작은 쉼표다.
오늘도 누군가는 그 쉼표 하나를 찍고 있다. 고개를 기대고, 두 눈을 감고,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잠들어 있다. 그 평화로운 얼굴을 바라보니 알 것 같다. 잘 살아간다는 것은 쉬지 않고 걷는 일이 아니라, 걸어야 할 때와 멈추어야 할 때를 알아가는 일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