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29
1월8일[주님 세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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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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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THYfRPpSlk
[한국외방선교회 권효준 탈시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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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강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 기다렸으며 갈구해왔던 주님과의 은혜로운 만남을 체험합니다. 그런데 첫 만남의 순간 예수님의 파격적인 모습에 깜짝 놀라는 동시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아마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의 만남의 순간에 대해 오랜 세월 동안 꿈꾸어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그분을 만나면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나? 그분을 만나면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하나?
그분께서 나를 보시고 과연 어떤 말씀을 하시고 어떻게 처신하실까? 혹시라도 선구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질책하시지는 않을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나를 당신 품에 꼭 끌어안고 등을 두드리시면서 잘했다고 칭찬하실까?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만나자 마다 다른 죄인들과 똑같이 세례를 받으려고 무릎을 털썩 꿇습니다. 너무나 당혹스러웠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일으켜 세우면서, 강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이러시면 안됩니다. 종인 제가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마땅한데,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 하지 않으시고, 다시금 무릎을 꿇고 묵묵히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기다리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마굿간 탄생부터 시작된 일관된 겸손의 덕을 계속 유지하셨습니다.
주인이시지만 종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하느님이시지만 한 인간 앞에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이토록 겸손하신 예수님의 모습에 하늘 아버지께서도 깊은 감동을 받으신 나머지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세례자 요한 역시 이러한 예수님의 한없는 겸손 앞에 큰 감동을 합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지를 예수님의 모습에서 온몸으로 배웁니다.
구세주 예수님께서 무대 위로 올라가시도록, 그분의 빛이 떠오르는 강렬한 태양처럼 활활 타오르도록 자리를 마련해드리는 것, 그리고 자신은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조용히 사라지는 석양처럼 조용히 물러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의 만남은 어떠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와의 만남을 통해 사람들은 우리의 겸손한 모습, 우리의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모습에 큰 감동을 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 공동체 생활, 내 삶의 모습을 통해 회개의 삶을 시작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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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946년 정월 초하루, 경북 금릉군 조마면에서 제사를 준비하던 김씨 문중 사람들은 종손 며느리의 출산 진통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제사도 늦추며 기다린 아이는 종갓집 첫 딸이 되었습니다. “내 눈물을 채우자면 한강도 넘칠 거예요. 항상 ‘너는 안 돼’ 라는 말을 듣고 자랐어요. 정월 초하루에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남동생은 아버지에게 얻어맞는 누나를 지키려다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그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런 환경을 도저히 견딜 수 없던 그녀는 무작정 미국으로 떠나왔습니다. “영어 한마디 못 하는 조그만 동양 여자아이를 누가 좋아했겠어요? ‘내 이름은 김태연입니다. 여러분의 친구가 되고 싶어요.’라고 쓴 종이를 들고 100군데 넘는 집을 돌아다녔어요. 딱 세 군데에서 문을 열어 주더라고요. 끊임없이 두드린 결과, 사람들이 마음을 열어 주었어요.”
미국인과 결혼 후에는 시댁 식구들에게 “역시 미개한 나라에서 온 사람은 별수 없다니까”라며 인종차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두 번의 유산, 그리고 오래가지 못한 결혼생활... 이후 살아남기 위해 청소부, 웨이트리스, 주유소 직원 등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해야 했습니다. 열심히 사는 와중에 자궁암 진단을 받았고 커다란 교통사고까지 당해 몸도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태권도를 할 줄 알았는데 그 덕분으로 학교에서 태권도를 가르치게 되었고 그 덕분으로 아이들을 아홉이나 입양하게 됩니다. 자녀들은 그녀에게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주었습니다.
창업의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은 청소 일을 할 때였습니다. 자주 보이는 곰팡이를 보며 ‘저 곰팡이를 모두 없앨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양아들 둘과 함께 이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설립한 ‘라이트하우스’는 반도체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미세 먼지 측정, 화학적 오염 등을 만들고 정화하는 시스템으로 미국 100대 우량 기업으로 동종 업계 세계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그녀의 구호는 이것입니다.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그도 할 수 있고, 그녀도 할 수 있는데, 나라고 못하겠습니까?)
그녀가 인터뷰한 곳 뒤에는 성모님의 사진이 있고 십자가 목걸이를 하는 것을 즐깁니다. 아마 천주교 신자일 것 같습니다. 동생의 죽음도 분명 그녀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 목숨보다 누나의 목숨을 지켜 주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종교도 분명 한 몫 하였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를 받은 이의 하루는 어떨까요? 김태연 회장은 152cm의 작은 키이지만, 한국이 낳은 여자 삼손으로 불리며 천재들이 몰려있는 1,000여 명에 이르는 자기 회사 직원들을 호령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저는 일을 힘들다고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너무나 저를 반짝 반짝하게 해주고 제 가슴을 설레게 하고, 또 무슨 연애를 하는 것처럼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또 신부가 된 것처럼 그냥 이렇게 마음이 막 들뜨기도 하는 거죠. ”
이것이 세례를 받은 이의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시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려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물론 자녀로서의 일도 해야 하지만, 그러한 일을 할 능력도 받았습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하느님 자녀로서의 자신을 증명해 가는 시간이기 때문에 아침부터 설레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훌륭한 운동선수들에게 경기에 들어가기 전에 기자들이 묻습니다. “지금 긴장되지 않나요?” 그러면 선수들은 말합니다. “아니요, 오히려 흥분됩니다.” 이것이 성공을 보장하는 기분입니다. 그만큼 이길 자신이 있는 것이고 믿는 대로 됩니다.
한 직원은 김태연 회장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거 알아요? 그녀는 세상을 볼 때 엄청난 장애물을 보지 않아요. 그녀는 허들을 보죠. 모든 사람이 넘을 수 있는 그런 허들을요.” 그녀도 맞받아칩니다. “절대 포기하면 안 돼요. 당신 꿈을 다른 사람이 훔쳐 가게 두지 말아요. 그 꿈은 당신 거예요. 오직 당신 거죠.”
아기들은 걸음마도 제대로 못 할 때부터 이미 부모처럼 뛰어다닐 수 있음에 가슴 설렙니다. 그리고 언젠가 하게 될 그 목표를 위해 오늘 할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것도 설레는 마음으로. 이것이 세례 받은 이가 아침을 시작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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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그리스도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저의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그리스도론도, 하느님 나라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우리의 삶이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담아낸다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론이고, 바로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표상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그리스도께 성령을 보내시어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아들로 선포하셨으니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저희도 언제나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의 삶일까요?
오늘 독서는 그 방법을 이렇게 알려줍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그렇습니다. 성실하게 공정을 펴는 것입니다. 민족들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 받은 신자로서 아름다운 모범을 보여준 분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변비가 심해서 도저히 관장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 환자는 정말 죽을 것 같다고 호소했습니다. 저는 가운만 걸치고 환자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환자의 딱딱하게 돌처럼 굳어있는 변을 파냈습니다. 환자는 울면서 고마워했습니다. 누구도 해 주지 않았던 일을 제가 해 드렸기 때문입니다. 환자는 자신이 전직 국회의원이었다고 하면서 정말 고마워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병원 앞을 지날 때면 과일을 가져왔습니다. 제가 결혼할 때는 어떻게 아셨는지 축의금도 보내셨습니다.
서울 숲 근처에 빌딩을 하나 사서 임대를 하였습니다. 임대료를 싸게 해 주었는데도 견디지 못하고 사업을 접었습니다.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돌려 드리니 그것만으로도 고마워했습니다.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있는 조카에게 무엇을 하면 좋겠는지 물으니 ‘치킨집’을 하라고 했습니다. 인테리어를 하고, 드디어 치킨집을 열었는데 말 그대로 대박이 났습니다. 몇 년간 운영을 해 보니 매년 1월은 적자였습니다. 서울 숲은 겨울에 사람들이 적게 오기 때문입니다. 1월 한 달은 휴업을 하고 직원들에게 유급휴가를 주었습니다. 직원들은 건강검진도 받고, 자기 계발도 하고,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휴가를 마친 후에는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수익이 커지면 직원들에게 월급 이외에 상여금을 더 주었습니다. 직원들은 더욱 친절하게 손님들을 대하였습니다. 가게에 있으면 손님들이 원하는 것이 보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온 손님이 유아용 의자와 이유식을 먹일 수 있도록 전자레인지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아이들과 함께 온 엄마들이 좋아했습니다. 와인을 가져와서 마셔도 좋은지 물어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와인을 가져다 놓았더니 사람들이 좋아했습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따뜻한 사랑으로 드러낸 간호사와 가게 주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바로 그분들이 세례 받은 신앙인의 모범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의 말과 행동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좋겠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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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7-11: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예수님의 세례가 바로 그분을 메시아로 축성하고 하느님의 아들로 세상에 선포하는 의미를 가르치고 있다. 나아가 그분이 수행할 구원 사명에 관한 어떤 것을 선포한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우리의 세례의 의미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전반부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을 제시하고(7-8절) 후반부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9-11절).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7-8절). 이것은 바로 예수께서 사탄을 쳐 이기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더 힘센 분으로 제시하는 것이다(마르 3,27; 루카 11,22; 사도 10,38 참조). 그러면서 요한은 자기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을 위한 자리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메시아는 더 큰 능력을 갖추신 분이시기 때문에 요한의 세례보다 더 강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쇄신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8절). 이 성령은 새로워진 하느님 자녀들에게 내적으로 생기를 주는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된다. 성령에 잠기게 하는 일, 이것이 예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믿는 모든 이들에게 베푸실 새로운 세례이다.
예수께서는 다른 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다.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세례를 통해 자신을 낮추신다. 즉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하느님의 무죄 선언을 받게 하려고(갈라 3,13-14; 2코린 5,21 참조) 몸소 저주받은 자, 죄인이 되시는 그 십자가상의 낮추심을 의미하는 행위이다. 이 행위는 예수께서 모든 사람과 동등한 자리를 취하시고, 죄인들인 모든 인간과 연대성을 가지심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와 더불어 계속 펼쳐지는 광경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구원 사명을 세상에 구현시키고자 하는 낮추심의 행위를 하늘이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며, 십자가상의 죽음이 실제로 그 정점을 이루게 될 만큼 그 어려운 사명에 대해 하늘이 확실히 보장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하늘이 열림의 의미이며,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시는 성령의 형상은 마치 비둘기가 새끼들 주위를 이리저리 날며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듯이, 아들에게 기울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의 정을 표현해 준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절). 여기서 사랑하는 이라는 형용사는 유일하다는 의미이며, “너는 내 아들이다.”라는 말씀은 시편 2,7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며, 유다 전승은 그것을 메시아적 의미로 해석하였다. 이것을 예수께 적용해 해석하여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와 그분의 메시아적 왕의 품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표현은 바로 야훼의 고통받는 종의 노래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1).
이 장엄한 천상 소리에는 초대교회의 신앙이 잘 반영되고 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재해석하여 그분의 공적인 사명을 스스로 낮춤과 죄인들과의 연대에서 인식한다. 예수께서는 천국에서 특별한 자리를 달라고 청하는 제배대오의 두 아들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38)라고 하셨다. 이 비극적인 세례는 바로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던 그 날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 성령은 이 길고도 극적인 구원의 여정에 예수께 힘을 주셨다. 이 힘은 바로 뒤이어 나오는 유혹 사화에서 사탄이 제시하는 세속적 메시아주의의 유혹을 물리치는 데 필요했던 힘이다.
예수님의 세례는 단순한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분의 세례는 이제 십자가 위에서 죽음과 이어지는 영광스러운 부활로 완성되는 구원의 사명을 담고 있다. 이에 비추어 우리의 세례까지도 연결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 인간들과의 연대성을 표현하는 것에서부터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을 따라 그분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세례를 기록하면서 우리의 세례도 기억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받은 세례도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면, 우리 자신의 세례 사명 역시 세상의 구원을 위한 세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도 살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가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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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1,4). 마르코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죄인들의 회개에 동참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여기서 ‘갈라지다’의 뜻으로 쓰인 그리스 말은 ‘찢어 내다’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로 하늘이 찢어지게 되고, 성령께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이 울려 퍼집니다. 천국 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안에 담겨 있는 신비를 묵상하며, 우리가 받은 세례성사의 은총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세례를 받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하늘을 찢어 천국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예수님께 하셨던 이 말씀의 주인공이 우리 모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예수님께 내려오셨던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도 오셔서, 하느님 나라로 다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우리를 절대로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여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은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그러니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결코 절망하지 마십시오. 죄의 힘에 지지 마십시오.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이 소중한 신비가 나와 함께 있다는 믿음과 함께, 우리의 영혼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고해소로 향하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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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정렬 모세 신부님]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
나는 태어난 지 3일 만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님이 신자라서 ‘물 부음 당하는 세례’를 받았다. 교우촌 공소라 전 국민이 성당에 다니는 줄 알았는데, 초등학교에 진학하니 신자는 우리 동네 사람들뿐이었다. 그리고 이름도 다두, 분도, 마리아가 아닌 또 다른 ‘속명(俗名)’이 있었고 우리가 부르는 이름은 ‘본명(本名)’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영성체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십이단(十二端) 기도문’을 외울 때는 ‘나는 왜 천주교 집안에 태어나 이 고생을 하는가?’ 푸념도 했었다. 그런데도 쉬지 않고 신앙생활을 이어 온 것은 주님 도우심의 은총이라 여긴다.
성탄 시기를 마치는 오늘 교회는 예수님이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을 기념하는 축일 미사를 봉헌한다. 저마다 세례를 받은 이유는 각양각색이지만 대부분 세례를 받고 신앙에 입문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행복도 얻고 또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례를 받고도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가 적은 걸 보면 예수님을 닮고 그렇게 살아가기가 어렵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세례받음에 대해 베드로 사도께서는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베드로 1서 3,21)이라 말씀하셨다.
결국 우리가 세례를 받은 것은 천당 입장권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올바른 양심을 살아내고 이기적 욕심을 버리고 그리스도화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보여주셨던 공생활의 삶은 욕심 없는 마음, 이타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 손해 보고, 고통스러운 삶도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부모가 자녀에게 세례를 줬거나 스스로 개인이 세례를 받는 것은 원초적으로 가진 우리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을 버리기 위한 약속의 행위이다.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비우고 내가 받은 세례를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해주 관찰사가 김대건 신부님께“당신이 천주교인이오?”라고 물었던 질문에 나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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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상택 리노 신부님]
<주님의 세례, 그 위대한 겸손>
지난 주일 우리는 나자렛 예수께서 모든 인간의 구원자, 즉 메시아이심을 공적으로 확인하고 드러내는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이 메시아 예수께서 당신 사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받으신 세례를 기념하는 주님 세례 축일을 거행합니다.
주님이 메시아로서 당신 사명의 수행을 세례받으심으로써 시작하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주님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온 인류를,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하는 위대한 사명입니다. 어디 인류뿐이겠습니까? 우주만물 삼라만상도 주님의 손길이 필요한 구원의 대상입니다.
이 위대한 사명을 주님은 당신의 세례 즉 물에 잠기심으로써 개시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기에 주님은 이것으로 당신의 위대한 일을 시작하십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세례의 의미는 바로 겸손입니다. 주님의 세례는 요르단강물에 잠기심이었습니다. 강은 땅보다 낮은 곳을 지나흐르고 강바닥은 땅바닥보다 훨씬 아래 놓여있습니다. 세례를 통해 주님은 강물에 잠기셨습니다. 강바닥까지 내려가셨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곳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겸손의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겸손을 또한 지극히 겸손하게 받아들이십니다.
일찍이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다.”라고 말했던 바로 그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것도 죄인들의 무리에 끼여 그들과 꼭 같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가히 겸손의 철두철미함, 겸손의 극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겸손에 가장 어울리는 주님의 외적인 모습이 바로 온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흔히 ‘야훼의 종의 노래’로 일컬어지는 이 예언의 말씀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주님이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세상 구원의 위대한 사명을 시작하셨고 마침내 그 사명을 완수하셨다는 것은 주님이 바로 당신의 겸손과 온유로써 이 세상을 구원하셨음을, 그리고 우리 역시 주님의 겸손과 온유로 구원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겸손과 온유로 구원받은 우리는 주님께 겸손과 온유의 빚을 졌다고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하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당신께 배우라고 대놓고 말씀하신 것은 이 구절이 유일합니다. 겸손과 온유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가치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신 셈입니다.
우리는 지금 날이 갈수록 겸손과 온유가 실종되어 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겸손은 흔히 굴종이나 무능으로, 온유는 쉽게 나약함이나 우유부단으로 치부되는 오만과 편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거칠고 험악한 시대에 우리 세례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주님이 보여주신 겸손의 그 위대함을, 온유의 그 위대함을 우리의 삶을 통해 증거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멍에를 더욱 기꺼이 메고 주님께 더욱 열심히 배워야겠습니다. 부러진 갈대를 확 꺾어버리기보다는 부드럽게 싸매어주고, 꺼져가는 심지를 훅 불어버리기보다는 정성껏 살려내는 주님의 그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삼아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그 위대한 사명에 동참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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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메시아로서 그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물로 베푼 세례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주실 세례와 비교됩니다. 세례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공관 복음서가 모두 이러한 의미의 세례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마태오 복음서도 특별히 의로움을 강조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이어 주는 주제는 의로움입니다.
오늘 독서인 이사야서는 희망에 찬 표현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공정을 세울 것이라는 내용이 반복됩니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대화는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것을 주저하는 세례자 요한과, 그것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의로움은 마태오 복음서가 강조하는 특징적인 낱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을 듣는 군중에게도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뛰어넘도록 요구하시고(마태오 5,20 참조), 요한이 가르치던 의로운 길을 걷도록 요청하시며(마태오 21,32 참조), 하늘 나라 또한 의로움과 관련되어 있다고 가르치십니다.(마태오 5,10 참조)
의로움은 제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통하여 모든 의로움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분의 길은 이렇게 공적 활동의 시작에서부터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도 여기에 화답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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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지난 제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면서 새삼 확신하는 점은, 저의 회심의 길(=호도스),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 살아가는 길은 바로 세례를 받던 순간부터 시작하였으며, 그 길은 이미 목적지에 도달한 여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행이란 본디 떠났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기에, 저를 포함한 모든 이의 영적 여행의 끝은 알파요 오메가이며 시작이요 마침인 예수님을 만나고 따르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1968년 12월 22일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기에, 저의 여정은 예수님과 함께 시작(=옛 존재, 거짓 자아: 육의 죽음)하고 예수님과 함께 마침(=새로운 존재, 참 자기: 영의 부활)하는 파스카 여정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받으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로 성탄 시기가 끝나고, 내일부턴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축일의 의미를 본기도에서 교회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그리스도께 성령을 보내시어,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아들로 선포하셨으니,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저희도, 언제나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런데 여러분도 저처럼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께서 왜 죄인이 받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을까?’라며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습니까?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때 우리가 받았던 세례에 대한 올바른 은혜를 깨닫게 되고, 주님의 참된 자녀로 충실히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의 사랑받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1,11 참조)임을 자각하면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또 다른 예수살기를 충실히 실행하고자 다짐하는 그 마음이 바로 연중시기를 살아가는 동력이라고 봅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 시대의 세례자 요한의 세례 운동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세리나 군인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요한의 설교를 듣고 자신의 그릇된 삶을 뉘우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례자 요한의 활동을 인정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 육화의 신비의 연장선상에서, “예수님께서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1,9)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행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몸소 받으심으로 죄 없는 분이 죄인들인 우리와 같은 죄 많은 인간이 되셨으며, 나약한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 사건은 단지 강생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께서 온전히 나약한 우리 중에 한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의미로, 우리와의 아름다운 연대와 일치를 공공연하게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사도 바오로가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해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게 하셨습니다.”(2코 8,9)고 증언한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낮아짐과 비움 덕분에 잃어버린 인간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였고,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세례를 통해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세례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의 공현이며,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구원 경륜의 계시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 사건은 숨겨져 있던 당신의 신적 정체가 계시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1,10 참조)고 합니다. 그 소리는 바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1) 하고 말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모습으로 오셨다, 함은 예수님에 의해 펼쳐질 새로운 세상은 곧 평화의 왕국임을 암시해 줍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 비둘기는 징벌의 시대를 마감하고 평화의 시대를 열어가는 동물로 등장합니다.(창 8.11 참조) 이렇게 예수님의 세례는 나자렛 사람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요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실 메시아라는 사실을 계시하는 엄청난 성사聖事의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 장면은 성서에서 가장 신비롭고 장엄하게 표현됩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시고, 하느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인간이 태초에 지은 원죄는 교만이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조물주이신 하느님과 같아지려 하였던 교만이 원죄였던 것입니다. 교만으로 말미암아 닫힌 하늘 문이 구세주 예수님의 낮추심으로 오늘 요르단강에서 열립니다. 하늘 문을 열게 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낮춤과 겸손’의 결과입니다. 이 낮춤과 겸손이 하늘과 땅의 막혔던 장막을 찢어버리고 소통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가장 작은 자로서의 낮아지심의 표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세례자 요한 역시 예수님 앞에서는 끊임없이 작은 자로서의 겸손을 보입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1,7) 우리 또한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이나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 앞에서 그렇게 낮아짐의 삶, 겸손의 삶을 살라는 초대입니다.
중국 현대사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루쉰’은 그의 첫 작품인 「광인일기에서 현대인들의 비극적인 삶에 대하여 이렇게 비판합니다. "자신은 사람을 잡아먹으려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잡아 먹힐까 두려워 모두 매우 의심쩍은 눈초리로 서로 얼굴을 훔쳐본다. 그런 생각을 버리고 마음 편히 일하고 길을 걷고 밥 먹고 잠을 잘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건 단지 문지방 하나, 작은 고비 하나 넘는 일인데, 그런데도 그들은 죽어도 그 한 발자국을 넘어서지 않겠단다." 사실 한 걸음도 안 되는 문지방을 넘을 수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의 비움이며 낮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 같은 비움과 낮춤이 없었기에 인간과 인간 사이, 하늘과 인간 사이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인간이 도무지 실행하지 않았기에 오늘 하느님께서 스스로 낮추시고 먼저 요르단강에 들어가시어 겸손되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각 사람은 주님의 눈에 과연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 마음에 드는 자녀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를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만약 그러한 인정을 받을 수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마음에 드는 아들 딸이 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겸손과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실천해야 합니다. 마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실행해야 합니다. 아빠 하느님 마음에 드셨던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 또한 주님 마음에 드는 아들과 딸이 되도록 낮아지고 작아지는 삶을 살아갑시다.
『나는 굳게 믿나이다.
진실하온 주님 말씀
성세 때에 맹세 충실하게 지키리다
주께서 나를 택하여 교회로 부르시오니
진심 감사 하나이다.』(가톨릭 성가 1번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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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우리 죄를 용서하러 오신 구세주께서 죄 많은 이들 틈에서 세례를 받으려고 기다리십니다. 허물과 잘못으로 가득한 우리는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때가 많은데, 티 없이 깨끗하신 우리 주님께서 겸손하게 당신을 낮추시고 요한에게 세례를 청하십니다. 사람들은 죄를 숨기고 부정하며 합리화하기 바쁜데, 죄에 물들지 않은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으십니다. 정작 죄지은 이들은 책임을 떠넘기고 처벌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아무런 죄도 없으신 그분께서 우리 대신 모든 책임을 떠맡으시고 우리 죄를 어깨에 짊어지시며 우리 대신 벌을 받으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단지 몸을 씻는 수단에 불과했던 물을 영혼을 씻는 구원의 도구로 변화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주었던 물의 세례에는 ‘정화’라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며 그에게 세례를 받으면, 죄를 용서받아 깨끗해진 상태로 구세주를 맞을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례는 ‘성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몸이 잠기면서 물이 성수(聖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시는 예수님께, 아버지께서 이렇게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로써 세례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드러내는, 하느님과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드러내는 ‘표징’이 되었기에 세례는 ‘성사’입니다.
그렇기에 세례성사는 우리에게 세 가지의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는 ‘정화’입니다. 더러워진 것을 물로 깨끗이 씻어내듯, 죄와 악으로 더러워진 우리 영혼을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그분께서 베푸시는 은총으로 깨끗하게 씻어내는 겁니다. 둘째는 새로운 ‘탄생’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세례명’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됩니다.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는건 나의 삶이 그 의미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신 분의 뜻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점점 그분의 모습을 닮아가는 겁니다. 셋째는 ‘관계 형성’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신뢰와 사랑으로 그분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하느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그분께서 기뻐하실 일을 하게 되지요.
세례를 통해 이토록 많은 은총을 받은 우리는 자신이 허물과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즉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순명과 실천으로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의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물에 들어가시어 물을 거룩하게 만드신 것처럼, 세상으로 들어가 세상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 세례의 소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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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노년기는 행복한 시기일까요? 아니면 불행한 시기일까요? 사실 노년기야말로 인간에 가장 행복한 시기여야 합니다. 많은 경험과 지혜의 축적으로 좋은 것을 극대화하고, 나쁜 것을 최소화하는 데 능숙해지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소한 일이 잘못되더라도 이러쿵저러쿵 따지지 않으며, 어떤 일이 중요한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잘 알게 됩니다. 감정으로 더 현명해지고, 그 지혜는 우리 사회에 큰 도움이 됩니다.
문제는 이 노년기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특히 나이가 들면 남들의 도움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늙음으로 인해 사람들이 자기 곁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으로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늙음보다는 당연히 젊음이 좋다고 말합니다. 노년기의 장점이 그렇게 많은데도 말이지요.
이를 극복하는 방법이 바로 ‘관계’에 있습니다. 사랑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부정적인 시각을 줄여나가고, 대신 긍정적으로 지금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특히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생각하면 모든 관계가 소중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지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고, 더 나은 관계를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가장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를 때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의 미래를 위해 너무나도 중요한 관계를 위해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을 찾아야 합니다.
이웃과의 관계만이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역시 너무나 중요합니다. 미루고 미루다가 관계 개선을 그분과 하지 못한다면 더 큰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웃에게 한 행동 하나하나를 하느님께 한 것으로 하겠다는 하느님의 큰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이웃과의 관계를 좋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십니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떤 것 같습니까? 사랑으로 이루어진 관계, 가장 좋은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는 세례를 받음으로 인해, 즉 자신을 가장 낮춘 상태, 어떤 이와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태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께서 굳이 받을 필요도 없는 세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은 관계를 맺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부정적인 관계가 아닌 긍정의 관계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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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서로를 향한 아름다운 고백>
마르코 1,7-11 (세례를 받으시다)
그때에 요한은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서로를 향한 아름다운 고백>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너는 내가
나처럼 빚은 사람이다
당신은 저를
당신처럼 빚으신 하느님이십니다
너는 내가
세상에 보낸 사람이다
당신은 저를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이십니다
너는 내가
나의 사람을 돌보게 한 사람이다
당신은 제가
당신의 사람을 돌보게 하신 하느님이십니다
너는 내가
나의 일을 맡긴 사람이다
당신은 제가
당신의 일을 하게 맡기신 하느님이십니다
너는 내가
늘 함께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제가
늘 함께하는 하느님이십니다
너는 내가
믿는 사람이다
당신은 제가
믿는 하느님이십니다
너는 내가
희망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제가
희망하는 하느님이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제가
사랑하는 하느님이십니다
너는 나에게
바로 나인 사람이다
당신은 저에게
바로 저인 하느님이십니다
너는 나와
갈림 없이 하나인 사람이다
당신은 저와
갈림 없이 하나이신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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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를 살려내기 위해서>
세례성사의 효과에서 가장 먼저 얘기하는 것이 ‘모든 죄를 용서 받는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16,16)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더군다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 죄인들인 군중 틈에 끼여서 아주 평범하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왜 죄인도 아니시면서 죄인들 속에서 세례를 받으셨을까?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러 세상 안에 직접 들어오신 것입니다. 마치 불 속에 있는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불 속에 뛰어들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사방팔방에서 모여들어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특별하지 않게 겸손한 모습으로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1,10-11)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는 주님의 세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전, 또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먼저 요르단강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영과 육신이시므로 성령과 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우리도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들, 딸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티토3,5-7)
일찍이 세례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2,7)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숨’을 불어 넣을 그릇을 만드는 일은 요한이 하고 그 그릇을 채우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의미는 ‘하느님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하느님의 생명을 받기 위해 그릇을 준비하는 일인데 그것은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는 회개요,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사도22,16)
우리는 가끔 세례 주신 분을 기억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교리를 가르쳐 주신 분들, 신부님, 수녀님, 대부, 대모를 기억합니다. 다들 고맙고 소중한 분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데 도움을 받았으니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그들은 나의 영적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분들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 세례를 받은 것도 중요하지만 은총은 분명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4,6) 그러므로 생명의 숨을 넣어주신 주님의 세례를 기억하고 우리의 세례를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새롭게 태어나면서 받은 이름, 세례명을 자주 불러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일깨우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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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비움의 여정>
-주님을 따름과 닮음-
어제의 주님 공현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이고 내일부터는 평범한 일상의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오늘은 두서없이 이런저런 단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음악은 잘 모르지만 요즘 임윤찬 피아니스트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대가의 풍모가 보이는 아주 젊은 분입니다. 영혼과 사랑이 담긴 동영상 쇼팡의 녹턴이 너무 아름다워 어제는 들으며 위로와 치유의 거룩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배경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그림과 너무 잘 어울린 곡이었습니다. 또 20세기 가장 존경받는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리흐테르’의 <회고담과 음악수첩>을 틈틈이 읽으며 그의 대가다운 고귀한 인품을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사제서품후 35년 동안 아마도 가장 많이 꿨던 꿈은 “하느님 꿈”일 것입니다. 바로 강론 꿈입니다. 꿈속에서 강론을 완성하고 너무 좋아해서 꿈이 깬후 잠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의 별을 본후 허전한 맘을 추스르며 강론을 쓴적이 헤아릴수 없이 많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저는 이를 복된 ‘하느님 꿈’이라 일컫고 싶습니다. 참 많이도 꿈중에 썼던 강론들입니다.
저는 여전히 일어나면 작년 8.15일부터 시작된 만세육창-“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만세-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후 강론쓰기로 하루를 시작하면 마음이 아주 상쾌합니다. 얼마전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만세삼창을 들었습니다. 2024.1.1.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자 제57차 세계 평화의 날 미사 시 강론 맨 끝부분 말마디가 저에게는 교황님의 성모님 만세삼창으로 들렸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함께 세 번 외치도록 초대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Holy Mother of God! Holy Mother of God! Holy Mother of God!)”
주님 공현 대축일은 인류의 빛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날로 우리는 세 신비를 기리는 데 바로 어제저녁 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이 이를 잘 요약했고 곡도 가사도 참 아름답고 흥겨웠습니다.
“오늘 별이 박사들을 구유로 인도하였고, 오늘 혼인잔치에서 물이 술로 변하였으며, 오늘 그리스도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도다. 알렐루야!”
바로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의 연장이라 할 수 있는 주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더불어 그분의 삶을, 그리고 우리의 세례와 삶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 미사 시 화답송 후렴 역시 어제 대축일 미사 화답송 후렴처럼 아름답고 흥겨워 하루 기도노래로 바치려 합니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주시리라-”
주님 세례 축일을 맞이하여 스치듯 떠오른 말마디-“비움의 여정; 주님을 따름과 닮음”-를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말구유에 탄생하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시종여일 비움의 여정을 사셨던 주님의 거룩한 생애였고 하느님은 충만한 생명의 부활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비움의 여정을 사셨던 주님을 따라 닮아가는 삶을 살라는 모범입니다. 이와 더불어 떠오른 두편의 비움을 갈망하는 자작시입니다. 욕심도 이보다 더 큰 욕심은 없을 것이나 거룩한 욕심이라 생각하며 자위(自慰)합니다.
“커져서 텅빈 공(空)이 되고
작아져 무(無)가 되어 살수는 없을까
물러나 하늘 배경이 되고
내려와 땅 마당이 되어 살 수는 없을까
온전한 사랑이 되어
예수님처럼!
참 아름답고 향기로운
무아(無我)의 삶이겠다
진아(眞我)의 삶이겠다
하느님같은 사랑이겠다”-1999.12.
무려 25년전 시이지만 지금 읽어도 여전히 새로우니 진리는 영원한 현재임을 깨닫습니다. 또 하나 다음해 주님 부활 축일 다음 파공날 다 외출한후 주방 앞에 환하게 핀 민들레꽃의 위로도 잊지 못합니다. 한달간 저를 위로하고 치유했던 “민들레꽃”이란 시입니다.
“민들레꽃
외롭지 않다
아무리
작고 낮아도
샛노란 마음
활짝 열어
온통
하늘을 담고(닮고) 있다”-2000.4.24.
비움의 충만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라 닮아갈수록 비움의 충만의 역설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비움은 그대로 겸손과 순종으로 직결되어 표현됩니다. 말 구유 안에 뉘어 계셨던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우리와 똑같이 세례를 받으니 정말 파격적이요 비움과 겸손의 절정입니다. 하느님의 겸손한 사랑의 표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분 위에 내려오시니 하느님의 기꺼운 화답입니다. 하늘로부터 들려온 예수님의 신원은 우리의 고귀한 신원도 확인시켜 줍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본격적으로 주님을 따르고 닮아가는 비움의 여정에 들어선 우리 하나하나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는 예수님과 우리를 통해 실현되게 되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주님을 따라 살아가며 닮아가야 할 내용입니다. 다음 주님의 종은 예수님이자 여러분 하나하나에 해당된다고 믿으시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우리 믿는 이들은 한 몸의 운명공동체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이어지는 예수님은 물론 우리들의 신원이자 사명입니다. “그”를 “너”로 바꿔 읽어 봅니다.
“내가 너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세상에 공정을 펴리라. 너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너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너는 지치거나 기가 꺾이는 일 없이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아, 이것이 예수님과 함께 실현시켜 가야 할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은 온통 깨어 있는 겸손하고 온유하고 부드럽고 고요하고 섬세한 모습입니다. 관상가과 신비가의 영성의 참모습을 보여줍니다. 결코 이기적 폐쇠적 자기 안에 갇힌 수인(囚人)이 아니라 주위에 활짝 환히 열려 있는 모습입니다. 이어지는 이웃을 위한 복음 선포의 사명이 이를 분명히 합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준다. 내가 너를 빚어 모두의 계약이 되고, 빛이 되게 하였으니, 1.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2.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3.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내기 위함이다.”
무지의 감옥, 무지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무지에 눈먼 중생들에게, 빛을, 길을, 희망을 잃은 중생들에게 우리 모두 주님의 빛이, 주님의 길이, 주님의 희망이, 주님의 해방자가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르고 닮아가는 비움의 여정에 항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에 우리 모두에게 부여되는 거룩한 사명이자 과제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평생성사인 성체성사의 은총이 세례성사를 완성시켜 주며 우리 모두 날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해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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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물귀신 작전>
오늘 주님께서는 세례를 주고 있는 세례자 요한에게 오셔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시는 주님을 세례자 요한이 알아보고 그럴 수는 없다고, 자기가 오히려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세례를 줄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당연하고 저라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제가 본당에서 새 영세자에게 세례를 주고 있는데 느닷없이 주님께서 나타나 그 줄에 같이 서 계신다면 저는 기절초풍할 것이고 왜 이러시나 하고 그 뜻을 몰라 당황할 것입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이 세례받으시는 이유랄까 뜻을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심오한 뜻이 있겠으나 오늘 저에게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우리 같이 힘을 합치자는 말씀 같고, 그래서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 뜻대로 사는 의로움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두가 그 대열에 참여해야 하는데 세례자 요한도 우리도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세례자 요한에게 “우리”라고 하시며 당신 구원사업의 파트너로 초대하시는데, 이는 대단한 신분 격상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초대하시는데 이 또한 우리를 세례자 요한처럼 여기시는 대단한 신분 격상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능력으로만 구원하신다면 말씀 한마디로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느님은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생겨나게 하셨고, 백인대장의 종을 말씀 한마디로 고쳐주실 정도로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셨고,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거룩한 뜻이기에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굳이 이 세상에 들어오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고 그리고 굳이 요르단강 물에도 들어가시어 우리와 똑같이 세례를 받으시는 겁니다.
이는 마치 물귀신 작전 같기도 합니다. 같이 죽자는 물귀신 작전인데 그러나 나쁜 뜻의 물귀신 작전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거룩한 죽음을 같이 죽자는 영적인 물귀신 작전입니다.
사실 세례의 의미가 이것 아닙니까? 죄에 대해서 죽고,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으려고 들지 않으니 당신이 먼저 죽으시며 같이 죽자고 하시는데 오늘 주님의 세례는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이 거룩한 물귀신 작전에 같이 참여하겠습니까?
제가 올해 들어 새로 강의를 준비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프란치스칸 영성 센터에서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한 학기 강의하게 되었고 또 수녀원 연 피정 강의도 맡게 되어 그 강의을 준비해야 합니다.
전에 같으면 매일 강론 올리며 특강 준비도 병행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솔직히 그럴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득이 새 강론을 올리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 대신 전의 강론을 올리는 것이 그나마 안 올리는 것보다 낫겠다 싶어 지난 강론을 올리기로 하였습니다.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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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1,11)
'세례의 의미!'
오늘 복음(마르1,7-11)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성령께서 예수님 위로 내려오시고, 하늘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1,11)
'주님 세례의 의미!'
'주님의 세례'는 인성(사람)과 신성(하느님)을 두루 갖추신 예수님의 신원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주님의 세례'는 우리가 받아야 할 세례의 모범이며,
이 모범을 통해서 '예수님의 인성(人性)'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로 선포되심으로써, '예수님의 신성(神性)'이 드러났습니다.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동방 박사들을 통해 주님의 탄생이 세상에 공현(公現)되었다면, '주님의 세례'는 세상 구원을 위한 그분의 활동인 공생활의 본격적인 시작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우리 세례의 의미!'
'세례(洗禮)'는 씻김의 행위입니다. 더러움(죄)을 씻어내고 깨끗해지는 행위, 새로남의 행위, 새로운 창조의 행위입니다.
이러한 세례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또한 나의 자비 기도를 통해서 계속 행해지고 있고, 또한 행해져야 합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기 위함이다."(이사42,6-7)
'주님세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세례, 나의 세례를 다시금 기억하고, 날마다 깨끗해지기 위해, 새로나기 위해 함께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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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MWCpesKvu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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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 11)
쏟아져내리는
세례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세례의 은총으로
삶의 풍랑을
이겨냅니다.
마음이 마음을
돌보듯
세례가
우리의 삶을
돌봅니다.
소중한 것을
지킨다는 것은
이와 같이
소중한 것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회개가 있고
사랑하기에
사랑의
세례가 있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들의 회개와
죄인들의 세례에
동창하십니다.
죄인들이
먼저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주님의 세례로
우리가 사는 곳
여기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시작임을
보여주십니다.
주님 세례로
우리는
사랑의
하느님 나라를
만났습니다.
주님 세례를
따르는 우리는
세례의
자녀들입니다.
세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보여주는
가장 큰
은총입니다.
늦은 때란
없습니다.
지금이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세례와 삶은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과 삶이
다르지 않듯이
사랑과 세례는
결국
하나입니다.
하느님 마음을
만나는 순간이
세례이며
하느님 나라를
만나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세례로
우리는
영원히
파기될 수 없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례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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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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