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1편 :無意識의 짐을 덜어 냄 > 누구라도 할 수 있는 觀想 祈禱 入門書
관상 기도(觀想 祈禱)의 정규적인 수련을 통하여 내적 정화의 작업이 진행되면 다섯 번째의 사고가 떠 오른다. 이 작업은 일종의 신적인 치유와 같은 것인데, 이것은 우리의 의식을 비우고 장애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우리의 정신과 정서와 신체에 은총이 자유롭게 흘러 들어올 수 있도록 각자에게 적합하게 맞추어진 것이다.
어렸을 적에 가졌던 충격적인 정서적 경험들의 후유증이 우리의 신체와 신경 계통에 긴장, 불안, 기타 각종 심리적 방어 체제 등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실험적으로 점점 증명되어 가고 있다. 일상적인 수면과 휴식으로는 이것들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내적 침묵과 이 깊은 침묵이 가져다 주는 깊은 휴식 중에 이러한 정서적 장애 요소가 부드러워지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신체에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즉 인간을 해롭게 하는 요소들을 배설해 내는 능력-들이 이 장애들을 없애기 시작한다. 정신은 물론 인간의 신체는 자신의 건강에 해로운 것들을 비우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기도 시간 동안에 무의식(無意識) 속에 있던 정신적 쓰레기들이 사고의 형태로 우리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는데, 이 사고들은 어떤 긴급성과 힘과 감정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당신은 이것들이 어떤 근원들로부터 떠오르는지 알지 못한다.
보통은 뒤죽박죽인 사고나, 애매하면서도 긴급한 불편함을 동반한다. 그것들을 단순히 받아들이면서 그것들과 싸우지 않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관상 기도(觀想 祈禱)로 해서 흘러나오는 깊은 평화가 우리의 정서적 장애를 털어 내기 시작하면서, 우리 인격의 어두운 부분이 우리의 자아 성찰 안으로 들어오개 되고 이것이 늘어 간다. 우리는 우리 가족에게 친구에게 직장의 동료들에게 아주 잘해 오고 있다고 행복스럽게 믿지만, 위와 같은 역동적 상황이 우리 안에 일어나기 시작할 때, 우리가 이와 같은 소위 좋은 뜻으로 가졌던 관계가 아주 더러운 행주 더미처럼 보이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 맏었던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일은 신성한 빛이 우리의 마음을 더 밝게 비추어 주기 때문에 일어난다. 하느님의 사랑이 비추면 그 사랑으로해서 우리가 사실은 이기적임을 깨우쳐 준다.
마치 우리가 희미한 불빛의 방에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 장소는 꽤 깨끗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거기에 1,000와트짜리 전등 100개를 켜고 방 전체를 확대경으로 들여다 보자. 그러면 수많은 종류의 작은 미물들이 기어 다니는 것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마 당신은 너무 놀라 거기 꼼짝 못하고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내면(內面)도 이와 같다. 하느님께서 전압을 올리시면 우리의 동기는 아주 다른 성격을 띠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만일 신뢰하지 않는다면 , 우리는 "이 길 말고도 하느님께로 가는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을 거야."하면서 그 상황을 벗어나려 할 것이다.
크리스찬 금욕주의 전통에 있는 자아 지식은 우리 내면의 감추어진 동기, 정서적 욕구와 요구 등에 대한 성찰이며, 이러한 동기와 욕구와 요구들은 우리 내면에 침투하여, 우리가 그것들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사고와 감정과 활동 등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내가 수도원장이었을 때, 수도원장은 그 수도원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인데, 어떤 젊은 수도자들은 무의식적으로 나를 자신의 진짜 아버지처럼 대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나는 그들이 어렸을 때에 가졌던 권위적 존재와 정서적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나를 나의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 것이다.
당신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표면적 사고들에서 떠나면 자신의 동기에 대해 더 날카로운 지각을 갖게 되고, 그 때에 당신이 늘 의존하며 살던 가치 체계가(이전에는 솔직하고 완전하게 부딪쳐 보지 않았던) 어렸을 적의 태도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모두 신경 질환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관상 기도(觀想 祈禱)를 정규적으로 실천하면 당신의 정신적 건강에 대한 자연적 자원이 다시 살아나, 당신의 삶에 해를 끼치는 거짓 가치관을 알아 보게 된다. 당신의 무의식 속에 묻혀 있던 어릴 적의 정서적 반응 체제가 이제는 아주 명백하게 인식 속에 떠오르게 된다.
만일 당신의 정신 안에 당신을 하느님께 열어 드리지 못하게 하는 장애가 있으면, 하느님의 사랑은 이러한 것들이 무엇인지 당신에게 보여 주실 것이다. 당신이 이러한 것들을 떠나 보내면 당신은 점차 하느님의 현존을 만나게 되고 또 그 현존을 즐기게 된다.
관상 기도(觀想 祈禱)가 주는 내적 역동은 자연적으로 당신의 도덕을 향상시키는데 국한되지 않고, 당신이 현실을 지각하고 반응하는 방법의 변화도 가져다 준다. 이러한 과정은 의식의 구조적인 변화도 포함한다.
당신의 내적 평화로부터 오는 안도감을 경험하면서 당신은 당신 인격의 어두운 면을 똑바로 바라보고,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더욱 갖게 된다.
모든 인간은 거룩해 질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이 낮은 의식의 수준에서부터 역사적으로 진화되어 왔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더 큰 삶, 더 많은 행복을 추구하고,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려는 자연적 성향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동물과 같은 본능적 행동의 성향, 그리고 무의식적인 수준으로 되돌아가려는 파괴적 성향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러한 퇴행 상태에서 아무런 행복도 얻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인간 조건의 그러한 면은 늘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다.
풀턴 쉰 대주교는 "야만성은 우리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래에 있다."고 늘 말하여 왓다. 다른 말로 하면, 난폭함이나 다른 본능적 충동들이 씨앗으로 남아 있어서 그것들을 잘 제어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갖가지 악마처럼 튀어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은총이 우리 안에 완전히 흘러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성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관상 기도(觀想 祈禱)는 이러한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정신 분석에서, 환자는 과거의 충격적 경험들을 상기함으로써, 그것들을 더 건강하게 사는 행동 체제로 완성해 가게 한다.
당신이 관상 기도(觀想 祈禱)를 매일 충실히 하다 보면 이러한 정신적 상처는 당신에게 다시 충격을 주지 않으면서 치유될 것이다. 당신이 이러한 기도를 여러 달 하고 나면, 어떤 강하고도 정서적인 사고들이 떠오름을 경험할 것이다.
그것들은 대부분의 경우, 당신의 어린 시절에 풀리지 않은 문제처럼 경험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것들이 당신의 기도 시간에 당신을 괴롭힐지라도 인간의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사고들은 아주 가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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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2편 :無意識의 짐을 덜어 냄 > 누구라도 할 수 있는 觀想 祈禱 入門書
무의식(無意識)의 내용들의 짐이 내려지기 시작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거꾸로 가고 있다고 느낀다. 그들이 기도(祈禱)를 시작하자마자 경험하는 것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정신 산만뿐이어서 관상 기도(觀想 祈禱)가 더이상 불가능하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실상은 당신이 그 정신 산만의 상태가 지속되기를 원하거나 아니면 일어나서 기도를 끝내 버리려고 하지 않는 한 관상 기도(觀想 祈禱)에 정신 산만 같은 것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얼마나 많은 사고(思考)를 가졌냐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분심이 얼마나 많든, 어떠한 것이든, 당신의 기도(祈禱)의 진지성에 아무런 영향도 없는 것이다. 만일 기도(祈禱)가'사고(思考)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당신의 묵상과 관계없는 이 사고들이 정말로 산만하게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관상(觀想)은 사고(思考)의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믿음 속에서 당신의 의지가 하느님이 현존하심에 동의하는 것이다.
무의식(無意識)에서 정서적 찌꺼기들을 털어 내는 데는, 정서적으로 충전된 사고들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가장 빈번한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당신의 무의식(無意識)속에 숨어 있으면서, 당신의 결정에 많은 영향을 주던 정서적 갈등들이 당신이 知覺하지 않는 사이에 풀린다.
그 결과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당신은 아주 더 큰 행복감과 내적 자유를 누리게 된다. 당신이 기도(祈禱)시간 중에 안타깝게 느끼던 바로 그 사고(思考)들이 오랫동안 당신의 신경계에 쌓였던 마음의 상처에서,당신의 정신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祈禱)에서는 사고(思考)들과 침묵(沈默) 그 두 가지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설프긴 하지만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보자. 어느 셋집에 쓰레기 사람이 제때에 쓰레기를 잘 치워 가지 않는다고 치자. 어떤 세든 사람은 부득이 아파트의 목욕탕에 쓰레기를 두게 된다. 이 때에 목욕을 하려면 이 쓰레기들을 먼저 옮겨 놓아야 한다.
기도(祈禱)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생긴다. 우리가 영적 여정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시작을 하면, 성령께서 제일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정서적 쓰레기들을 제거하는 일을 하신다.
성령께서는 우리 내면을 완전히 채우시고, 우리의 전 신체-영적 유기체를 변형시키고는, 이 유기체를 하느님 사랑의 융통성 있는 도구로 삼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안에 장애물이 있는 한은(그중 어떤 것들은 우리가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를 온전히 채우지 못하신다. 그의 사랑과 열정으로 그분은 우리의 욕탕을 치우기 시작하신다.
< 사 랑 의 열 정 >
이러한 일을 하시는 하나의 방법은, 관상 기도(觀想 祈禱)의 작업으로 시작한 수동적 정화의 방법이다. 향심 기도(向心 祈禱)는 우리를 하느님의 손에 맡겨 드리는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정화를 당신의 손으로 해 주십사 하고 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 지식의 과정을 마주 대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접촉하고 , 나아가서는 나의 참 자아와 접촉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당신이 지루하고 견디기 어렵다고 느껴서 조용히 앉아 사고들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것보다는 다른 길을 택하고 싶더라도 거기에 머물러 있어라. 이것은 마치 빗줄기 속에 우산도 없이 서서 흠뻑 젖어 드는 것과도 같다.
당신이 투덜거려 봤자 소용이 없다. 당신은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길은 당신이 사고(思考)의 폭우 속에 빠져 드는 것을 받아 들이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라. "비에 젖어도 좋다." 그리고는 그 비를 즐겨라.
어느 기간 동안의 기도가 좋았는지 아닌지를 생각하지 않았을 때에는, 당신의 기도(祈禱)는 잘되고 있는 것이다. 일단 그것을 생각할 때에는 그 기도(祈禱)는 잘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많은 사고(思考)들로 흠뻑 젖어서 어떻게 달리 할 수 없을 때, 그날의 기도(祈禱)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순순히 받아 들여라. 당신이 몸부림을 덜 칠수록 그것은 더 빨리 지나가고 만다. 내일이나 며칠 후에는 더 잘 될 것이다.
의식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들을 받아 들이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 수련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당신 기도의 심리적 내용들을 중화시키는 태도를 개발하라.
그렇게 하면 당신이 사고(思考)를 가졌다 해도 거기에 더 이상 방해(妨害)를 받지 않게 될 것이다. 당신의 무기력을 하느님께 바치고 평화 속에서 그분의 현존을 기다려라. 당신이 참고 기다리면 그 사고(思考)들은 지나가고 만다.
여기에 기억할 만한 것 하나를 말하고자 한다. 무의식(無意識)의 짐을 덜어 내는 과정 중에 때로 특정한 미소나, 고통, 가려움, 혹은 강한 감정들이 일어나는데, 당신은 이러한 것들이 당신의 심성 어디에서 오는지 알기를 원하고 또 이것들이 당신의 이전의 어떤 시절과 연관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다.
덜어 내는 과정에서는 어떤 특정한 옛날 사건들과 관련 짓지 않는 것이 이 과정의 특징이다. 말하자면 이 과정은 모든 찌꺼기들 그리고 복합적으로 떠오르는 심리적 폐기물들을 풀어 내는 과정이다. 이것은 쓰레기를 버리는 것과 같다. 쓰레기 속에 있는 달걀 껍질과 오렌지 껍질을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당신은 단지 그것들 전부를 던져 버려라. 아무도 그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라고 하거나, 그것들을 평가하라고 당신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당신은 모든 것을 하나의 쓰레기 자루에 넣어서 버리기만 하면 된다.
당신의 영적 성장과 직접 관련되어서 당신의 삶에 어떤 외적 어려움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것은 당신 자신에 대한 더 깊은 지식을 갖게 하고 또한 다른 가족과 친구와 또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동정을 갖게 하도록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하나의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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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3편 :無意識의 짐을 덜어 냄 > 누구라도 할 수 있는 觀想 祈禱 入門書
< 질 문 1 > 나는 기도어를 마음 속에 일어나는 사고들에 대해 저항하는 수단으로 썼다고 생각한다. 괴롭히는 정서들을 다루지 않으면서 그 정서 속에 빠진다는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답 변 1 > 무의식의 짐을 덜어 내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심한 안절부절 못함, 육체적 고통, 두려움과 불안과 같은 정서들을 다루는 하나의 방법은 일이 분 동안 그 고통스런 감정 위에 쉬면서 그 고통이 당신의 기도어가 되도록 허용하라.
다른 말로 하면, 정서를 떠나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단순하게 그 정서를 느끼는 것이다. 고통스런 정서들이나 심지어 어떤 육체적 고통도 그것들을 완전히 받아들일 때에 소멸되는 경향이 있다. 큰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면서 일어나는 다른 현상들은 가려움, 눈물, 웃음 등이다.
어떤 사람들은 향심 기도(向心 祈禱)중에 웃음의 발작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이전에 농담(joke)을 들었지만 그 때에는 어떤 마음이나 성격 상태 때문에 웃지 못했던 것이 이제 다시 생각나고 이제는 겸손해졌거나 자유로워져서 그것을 웃을 수가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당신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옛날의 어떤 슬픔이 그 때에는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표현하도록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관상 기도(觀想 祈禱) 는 당신의 삶에서 끝내지 못했던 어떤 것들을 끝내도록 도와서 뒤엉킨 것처럼 보이는 감정이나 사고의 형태로 그 정서들이 표출되도록 만들어 준다. 이것이 정화의 역사(役事)라고 할 수 있다.
강하게 느끼는 두려움, 불안, 혹은 노여움 등이 현재의 경험과 무관할지도 모른다. 그것들을 앉아서 견디어 내는 것이 그것들을 위로하는 것보다 더 이롭다. 향심 기도(向心 祈禱)의 목적은 평화를 체험하는 데 있지 않고 무의식 속에 있는 장애를 비워 버림으로써 하느님과 영원한 일치의 상태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관상 기도(觀想 祈禱)가 목적이 아니라, 관상의 상태가 수련의 목적이며, 어떠한 낭만적이고 위로가 되는 경험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의식을 신비스럽게 재구성하여서 오는 하느님 현존(現存)의 인식(認識)을 항구하게 지속하게 하려는 것이다.
당신 삶의 어떤 시점에서, 한밤중일 수도 있고, 전철 속에서 혹은 기도 중에, 신경 계통과 정신 안에 마침내 필요한 변화가 이루어진다. 그 특정한 단계의 영적 여정은 그 스스로 해결을 가져와서 당신은 이전에 가졌던 문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의식이 재구성되는 것은 정규적인 수련에서 오는 열매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는 특정 체험을 목표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당신이 이전에 전혀 경험하지 않은 의식의 상태를 당신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를 기대하는 것은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일 뿐이다.
수련을 계속하면 결국 의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여정의 이 단계에서 가장 의미있게 일어나는 일은 인격의 정감 시스템에 평온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정서가 왔다갔다 하는 것으로부터 당신은 자유를 얻는데,그것은 그 정서의 변화를 갖게 했던 당신의 거짓 자아(falseself)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 때에는 정서들은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나타나면서, 그것들이 당신을 흥분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이것이 참으로 내적 혼란에서의 놀라운 해방인 것이다.
어떤 정서적 경험 때문에 당신이 안절부절 못하고, 흥분을 느낄 때, 그냥 기다리는 것보다 더 시간을 잘 보내는 방법은 없다. 언짢은 정서로부터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을 밀어내려는 유혹을 크게 받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당신의 주의가 부드럽게 그 정서로 옮아가도록 허용하면서, 그 정서 속에 잠기면 당신은 좋은 자쿠지(Jacuzzi:물이 분출하도록 만든 욕조)에 들어간 것처럼 하느님이 당신을 껴안아 주시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서 단지 느끼기만 하면 된다.
당신이 만일 장님이었다가 시력을 회복하였다면 당신은 아주 추한 것도 감사(感謝)하게 볼 것이다. 당신이 아무런 정서(情緖)도 가지고 있지 않다가 어느 정서(情緖)를 느끼게 되면 유쾌하지 못한 정서(情緖)라도 감격스럽게 느낄 것이다.
사실상 언짢은 정서(情緖)란 없다. 다만 당신의 거짓 자아가 그렇게 해석할 뿐이다. 극단적으로 정서가 교차하는 일은 그것을 그저 받아들임으로써 해소될 것이다.
이것을 실습하려면, 먼저 그 정서(情緖)들을 알아보고 분간하여야 한다. "그래, 나는 화났다. 공포에 떨고 있다. 몹시 두렵다. 불안해 하고 있다." 등등. 어떤 감정이든지 좋은 면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근본이시므로, 어떤 점에서는, 죄 의식도 하느님에게서 온다. 만일 당신이 고통스런 감정을, 그것이 마치 하느님인 양, 껴안으면 당신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존하는 모든 것의 근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떠나 보냄"이란 말은 단순한 단어가 아니다. 당신이 무엇을 떠나 보내려고 하는가에 따라서 그것은 아주 미묘하고 중요한 뉘앙스를 가진다.
만일 어떤 사고(思考)가 당신을 산란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떠나 보냄은 그 사고(思考)에 마음 쓰지 않음을 뜻한다. 만일 그 사고(思考)가 당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 사고(思考)는 쉽사리 떠나가지 않을 것이고,그래서 당신은 다른 어떤 방법을 써서 떠나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는 하나의 방법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그 사고(思考)에 파묻혀서 그 사고(思考)를 분간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처음에는 가능하지 않겠지만 계속 노력하면서 어떻게 되는지 보라. 관상 기도(觀想 祈禱)의 기본적인 훈련은 떠나 보내는 훈련이다.
이 다섯 번째 종류의 사고(思考)에 대하여 말한 것을 종합하면, 관상 기도(觀想 祈禱)는 관상 기도(觀想 祈禱)가 지향(指向)하는 어떤 큰 실재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완성하는 전 과정의 일부인데 이 완성을 위해서는, 우리가 무의식의 수준에서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 드릴 것을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어떤 때는 평화롭지만 어떤 때는 사고(思考)와 정서들 때문에 매우 억눌리게도 된다. 두 가지 경험은 모두 완성과 치유의 같은 과정의 일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경험들은 똑같이 평정과 감사의 마음과, 한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가지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 모두는 변형(變形)의 과정을 이룩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사고들이 계속 폭포처럼 쏟아져 괴로움을 당할 때, 거룩한 단어를 애써서 당신의 상상에 떠올리려고 하거나, 당신의 정신에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힘겹도록 그 단어를 되풀이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정신 속으로 스며드는 어떠한 다른 사고들을 다루는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그것들을 다루어야 한다.
어떠한 사고에도 저항하지 말고, 매달리지 말고 또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라. 이것이 당신의 의식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는 다섯 가지 사고들을 다루는 적절한 반응들이다.
----------o----------o--<제9장 3편:無意識의 짐을 덜어 냄 > 끝 ----------o---------o------ <제9장 4편 :無意識의 짐을 덜어 냄 > 누구라도 할 수 있는 觀想 祈禱 入門書
< 질 문 2 > 내가 기도에서 빠져 나왔을 때, 내가 울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슬프지는 않았다. 나는 묵상중에 어느 부분에서도 슬퍼하고 있었다고 보지는 않았다.
< 답 변 2 > 당신은 만일 서방 수도 생활의 창시자인 누르시아의 '베네딕토' 성인께서 늘 울고 계셨다는 것을 알면 아마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것이 그분이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하여 드리는 아주 특징적인 반응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때로는, 아무 말을 할 수도 없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고, 아무 느낌도 없는 때가 있다. 이 때의 유일한 반응은 무한히 선하신 하느님의 현존에 잠기는 것이다.
눈물은 슬픔을 나타내기도 하고 기쁨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것들은 또한 다른 길로는 표현하지 못하던 온 정서 덩어리를 털어 버리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 祈禱 중에 눈물이 흐르거든 그것을 恩寵으로 받아 들여라.>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선물로 받아들여라. 이것은 고통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기쁨일 수 있다. 기쁨이 아주 커지면 고통스러울 수가 있다.
祈禱 중에 祈禱에 대한 어떤 체험이나 성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다. 기도(祈禱) 후에 그것들을 되돌아볼 기회(機會)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祈禱 중에 눈물이 흐르거나 입에 미소를 띠었다든가,눈썹이 씰룩하든가, 가려움이나 통증(痛症)을 느끼게 되면 그것들을 다른 사고(思考)들과 똑같이 취급하라. 그렇게 취급하여서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오라.
이 기도(祈禱)는 내적 고요 속에서 하느님을 알게 되기 위하여, 사고에 의존하는 우리의 인간적 성향을 떠나 보내는 기술 습득이다. 그러므로 그것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털어 버려야 한다.
우울하다는 생각이나, 기분이나 감정이 며찰 동안 지속되면 이것은 우리의 심령이 일생 동안 쌓였던 처리 안 된 정서적 잠재들을 비우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라.
이것이 지나게 되면 우리의 심리 상태는 틀림없이 호전 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음식을 토해내는 것과 같다. 저녁식사 중에 이런 일이 생기면 물론 불쾌하겠지만 토하고 나면 기분은 훨씬 좋아질 것이다.
물론 기도(祈禱) 시간 내내 어떤 신체적 통증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면 당신은 실제로 어떤 병을 가지고 있를지도 모르니 의사를 찾아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때때로 이것들은 정서적인 것들이 당신의 신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다가 풀어지면서 일시적인 통증(痛症)이나, 눈물이나, 웃음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는 기도(祈禱) 중에 폭소를 억누르지 못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이전에는 재미있게 생각하지 않았던 무의식 속의 어떤 것에 부딪치고는 이제야 마침내 그 농담의 뜻을 알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가 깊어지면서 자신의 인격 속에 숨어 있던 어두운 면을 인정할 능력이 각자의 알맞은 리듬에 따라서 생긴다.
좋은 정신 치료자는 환자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상대할 능력이 생길 때까지 기다린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다.
겸손과 신뢰가 깊어지면 인격의 어두운 면을 더 쉽게 인정하게 된다. 결국 자신의 인간적인 가난함과 무기력함의 중심에 다다르게 되고 거기에 다다른 것을 즐겁게 생각하게 된다.
그때에 당신은 하느님의 창조적 활동의 자유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 이유는 거기에서 자신의 인격이나 재주에 대해 이기적이거나 집착적인 태도를 더 이상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제 완전히 하느님의 손에 맡겨졌다. 내적 자유(內的 自由)가 바로 기도(祈禱)의 목표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자유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자유, 참 자아로 사는,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변형되는 자유, 바로 그 자유(自由) 말이다.
< 질 문 3 > 정적의 祈禱에는 치유라고 하는 차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적어도 그것이 나의 경험이다. 어떤 사람은 치유할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커다란 마음의 상처가 있을 때에 정적의 祈禱는 이러한 상처를 진정시키는 고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다.
< 답 변 3 > 그렇다. 그것이 중요한 효과의 하나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내적 침묵(內的 沈默) 속에서 성령(聖靈)은 은밀하게 우리의 영혼에 기름 발라(塗油) 주시고 가장 깊은 상처를 치유하신다고 가르쳤다.
< 질 문 4 > 영혼(靈魂)뿐이 아니고 신체(身體)도 치유(治癒)하시는가?
< 답 변 4 > 정신 신체적 질병(psychosomatic illness: 정신적 원인에서 생기는 신체적 질병: 역자 주)은 확실히 정서 생활(情緖 生活)에 평화(平和)가 왔을 때에 치유(治癒) 될 수 있다.
< 질 문 5 > 나는 하느님께서 우리 눈에서 당신의 하시는 일을 감추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겸손(謙遜)을 위해서, 바오로에게 가시를 주신 것과 비슷한 그 무엇을 말이다.
< 답 변 5 > 관상 기도(觀想 祈禱)는 확실히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당신이 말한 것처럼 어떤 연약(軟弱)함을 견디어 내도록 도와 주는 것이다. 만일 어떤 타입의 사람들이 기도에 아주 성공적이라고 한다면 가끔 그들이 현실로 끌어내려질 필요가 있다.
향심 기도(向心 祈禱)의 방법은 단지 관상 기도(觀想 祈禱)로 들어가기 위한 입구일 뿐이다. 일단 관상 기도(觀想 祈禱)의 경험이 발전하게 되면 그것에 대해 말하기가 더욱 어려워지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경험은 일상적인 정신적(精神的) 생활(生活)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영장 물 속의 광선들을 상상해 보자. 그것들이 물에 닿을 때까지는 하나로 합쳐진 광선이었으나 물 속에서는 그것들이 한 줄기 빛과는 전혀 다르게 된다.
물 속의 빛은 여기저기서 온다.(난반사를 통해:역자 주) 그와 비슷하게, 관상 기도(觀想 祈禱) 속에서 얻은 하느님 체험은 그것을 어떻게 구별해서 말하기 어렵다.
그것에 대해 말할 것이 적을수록, 더 하느님의 현존 속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것 안에 그리고 모든 것을 통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의 시야(視野) 밖에 있는 것과 같다.
어떤 것이든 처음 시작할 때는 경이롭게 보이지만 일단 거기에 익숙해지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 그랬던 것처럼 정서적인 먼지를 일으키지는 않게 된다.
영적인 여정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생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관상 기도(觀想 祈禱)가 매우 신비하게 보인다. 그 경험이 그들에게는 정말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그 경험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당신이 말했던 종류의 연약함, 당신이나 남이 보기에 분명한, 그러한 연약함은 자기 자신은 물론 남에게도 그 경험을 감추게 하는 좋은 수단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친구들의 거룩함을 남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감추시기 좋아하신다.
----------o----------o--<제9장 4편:無意識의 짐을 덜어 냄 > 끝 ----------o---------o------
<제9장 5편 :無意識의 짐을 덜어 냄 > 누구라도 할 수 있는 觀想 祈禱 入門書
< 질 문 6 > 기도 생활이 성장하면서도, 사람들은 아직도 사고와 관상의 순간이 교차하는 경험을 하는가?
< 답 변 6 > 무의식이 비워지면서 좀더 성숙한 인간적 성품의 덕이 쌓아지고, 결과적으로 은총이 자유롭게 흘러 들어감으로써 눈에 뜨이는 태도의 변화가 나타난다. 관상 기도(觀想 祈禱)에서 체험한 신적 일치는 그 때에만 일어나지 않게 된다.(즉 항상 일어난다: 역자 주) 매일 생활에서 침묵의 순간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현실은 더욱 투명하게 보이고 신적인 원천(즉 하느님: 역자 주)은 침묵(沈默)의 순간(瞬間)들을 통하여 비추일 것이다.
무의식(無意識)이 비워진 다음에는 기도 초기에 머리 속을 지나가던 사고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정화의 과정은 끝난 셈이다. 그러고 나면 하느님과 일치한다는 인식이 계속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그것을 방해할 장애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현실에는 아무런 잘못된 것이 없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며, 우리가 자신 안에 있는 장애로 인해 현실을 적절히 연관 짓지 못하는 데 있다. 우리 안의 모든 장애가 걷힌 다음, 하느님 현존의 빛이 언제나 우리의 영을 비추는데, 심지어 우리가 활동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도 그렇게 된다. 우리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태에 압도당하는 대신, 이제는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참 자아의 지배하에서 살아가게 된다.
아마도 관상 기도(觀想 祈禱)의 발달 중 첫 단계는, 우리의 일상적 심리 세계의 속박으로부터 독립하고 있다는 자각일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단지 신체로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인식, 또 사고와 감정으로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인식 말이다.
이제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외적인 사물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 하지는 않게 된다. 우리의 영적인 성질도 인식하게 된다. 우리의 영은 삼위 일체 하느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이러한 깨달음이 다른 모든 현실의 부분을 이루어서, 열심히 활동하는 중에서도, 상황이나, 외적 사물이나, 혹은 우리의 감정과 사고에 압도당하는 일이 없게 된다.
그러나 모든 외부 현실에서 독립하고 또 거리를 두게 되었다는 경험은 절대적 독립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참 자아를 확인하는 것일 뿐이다. 더 발전하면 또 다른 자각이 생긴다. 무의식의 창고가 비워졌을 때, 우리 내부의 심오한 수준에 대한 인식에도 이르게 한다.
이것이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의 기초가 된다. 당신이 만일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당신은 참 자아가 당신 안에서 표현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심을 인식하게 되고, 더 나아가 모든 이가 이러한 잠재력을 향유하고 있다는 자각도 얻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의 그리스도" 이것이 성숙한 크리스찬 공동체를 나타내는 좋은 표현이다. 당신보다 더 큰 어떤 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그 아름다움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의 원천도 반영하게 된다.
이제는 하느님이 내재하시는 어떠한 것과도 일치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다른 모든 사람 안에 살아 계시다는 깨달음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자발적으로 사랑을 보일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들을 인격, 인종, 국가, 성별, 신분 혹은 다른 특성들로(당신이 좋아하든 않든 간에) 보는 대신에, 이제는 아주 깊은 것, 즉 그 사람이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게 된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긴급히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를 보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잠재적 초월성이 아직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커다란 동정심을 가져온다.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사랑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게 만들고, 우리의 새로운 독립감은 새로운 관계로 이끌어 가는데, 이 관계란 보통 일반적 관계와 같이 의존에 바탕을 둔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관계이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더 큰 자유로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게 하는데, 그 이유는 더 이상 자신의 이기적인 목표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닥치는 현실을 현실 그대로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적인 사랑은 옷을 입듯이 입었다 벗었다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하나의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실에 대해 반응하는 올바른 방법이다. 그것은 나 자신을 포함하여 존재들(하느님이 존재이신 것 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창조물과 모든 섭리: 역자 주)과 맺는 올바른 관계이다.
그리고 그 관계는 일차적으로 들이는 관계인 것이다. 누구도 자신이 신으로부터 받은 것 이상의 사랑을 가지지는 못한다. 일단 그 사랑을 받으면 현재 상황에 알맞은 방법으로 우리의 이웃에게 이것을 전해야 하는 것이 하느님 사랑에 대해 응답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 질 문 7 > 하느님과의 一致의 상태를 하루종일 유지하는 것이 이 祈禱의 目的인가?
< 답 변 7 > 그렇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렇게 잘 지속되지는 않는다. 祈禱가 발전하면서 후에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더욱 일치에 가까워 가고 있다는 증거가 나타난다. 그리고는 감각에 영향을 주는 回想의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하느님과 일치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이 더 높은 수준의 의식의 상태로 몸을 준비시키라고 내가 하는 말의 뜻이다. 육체적 황홀경은 신체의 허약함 때문이다. 하느님의 강력한 의사 소통에 견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감각의 포기 상태에서 신체로부터 탈혼하게 된다.
이러한 단계를 이미 거친 신비가는 신체적 황홀경을 경험하는 일이 적다. 그들은 신체적 상태와 이루는 영적인 교신(communication)을 잘 조화시켜서 이전처럼 불편한 상태를 경험하지 않으면서도, 그것들(하느님께서 주시는 교신)을 받아들일 만큼 신체가 강하게 된다.
이제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된다. 만일 당신이 禪에서 말하는 "十牛圖"를 알고 있다면 열 번째의 소는 大悟 覺醒 후 평범한 삶으로 돌아온 것을 뜻함을 알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처음 시작한 삶과 이루게 된 삶 사이에 어떤 구별을 지을 수가 없다는 것을 상징하며 다른 점은 평범성 안에 왖전한 변형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뿐이다. 사람들이 평범한 삶을 거룩하게 살 수 있도록 된 것은 은총이 승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회상 속에 잠겨드는 그러한 순간이 온다. 그 후 모든 것이 잘 조화를 이룬 다음에는 잠겨 드는 은총을 의식적으로 체험하지 않더라도 같은 은총이 주어진다.
이전에 하느님과 일치했던 정도 혹은 그 이상으로 평범한 일상 활동을 자유스럽게 영위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성령으로부터 왔다고 할 수 있을 때에는 온전한 의미(意味)의 기도(祈禱)를 계속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보다 못한 상태라면 우리는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하여 무슨 방법을 써야 한다.
존재함(being)과 행위함(doing)에는 차이가 있다. 일단 자신의 존재가 그리스도로 변형을 이룬 다음에는 그 사람의 모든 행위는 그 내적 변형으로 도유(塗油)된다.
나는 이것이 마더 데레사의 커다란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 분은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카메라가 그분을 쫓아 가는 것은 그분의 신체적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하느님의 신비스런 마력을 발산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이 이렇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지만, 그분의 영적 상태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확신한다. (그분의 행함이 아니라 그분의 변형된 존재의 상태가 그분의 매력이라는 뜻이다: 역자 주)
이것이 바로 觀想 祈禱가 이끌어 주는 변형의 종류라고 말할 수 있다. 영적인 발전의 낮은 수준에서는 매우 쉽게 지쳐 버린다. 그러나 앞으로 더 나아가도록 도전이 따르는데 우리가 이 도전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그 여정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성모님보다 더 영적으로 성장하신 분은 없다. 그 이유는 그분의 성장을 막을 아무런 내적 장애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에게 있어서 은총 안에서의 성장이란, 끊임없는 시련을 받으면서, 일상적인 인간적 조건 상태에서 성장하셨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분은 가장 무거운 시련을 받으셨다. 변형으로 일치하면, 덜 발전한 크리스찬보다 훨씬 더 큰 시련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만일 영적인 성장을 하고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영적 성장을 쌓아 가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하느님께서 이 거룩해진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지는 않으시리라고 확신한다.
하느님은 거룩해진 사람들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신다. 만일 하느님께서 그 사람들을 거짓 자아에서 해방시켜 주셨지만 거기에는 어떤 목적이 있으셨을 것이다.
이제 누가 내적 부활, 변형으로 일치함에 이르고, 더 이상 정서적 혼란을 겪지 않고 그것들이 모두 성덕으로 바뀌었다고 하자.
그리스도는 이러한 사람들 속에 경이스러운 방법으로 살고 계시며, 그들 또한 그분과의 영원한 일치를 인식한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이러한 각성의 상태를 버리고 이전에 그들이 감당했던, 혹은 그보다 너 나쁜 시련을 받으라고 하셨다고 치자. 그들의 하느님과의 일치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들의 정신 수준에서는 이 일치가 완전히 감추어 진다.
이것이 대리적 고통(vicarious suffering)의 형태이다. 변형적 일치는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공짜표가 아니다.
어떤 이에게 이것은 완전한 고독과 적막의 생활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신적 일치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도적 활동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 어떤 이에게는 어떤 특수한 지향이나 혹은 전 인류를 위한 극심한 신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을 뜻할 수 있다. 예수께서 그분의 신성한 위엄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인류의 구원자가 되신 것과 같은 이유로, 그들의 변형된 인류애 때문에 그들의 고통들은 커다란 가치를 갖게 된다.
소화 데레사는 최후의 병상에서 그 때까지 큰 즐거움이었던 천국에 대한 생각을 더 이상 즐길 수 없었다. 그렇지만 성녀는 자신의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받은 것으로 보아 변형적 일치에 이르렀음이 분명하다.
데레사 성녀가 어렴풋이 인식했듯이 성녀는 그 당시의 불신자들 때문에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이성주의의 와중에서 살았고, 그때는 인간적 지력을 숭배하는 데서 오는 오만함이 절정에 다다랐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영적 여정의 가장 큰 시련은 변형적 일치를 이룬 다음에 올 수 있다. 그렇다고 일치가 사라지지는 않는데 그것이 아주 순수하면, 빛줄기가 진공관을 통과하듯 그것을 감지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하느님의 아들을 닮는 가장 심오한 길인데, 바오로가 말하듯,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상태의 결과를 짊어지시려고 하느님이시기를 스스로 포기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허약함을 스스로 체험하시고 우리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려고, 하느님과의 고유한 일치의 관계의 특권을 포기 하셨다.
이러한 희생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었으면서도 하느님의 요청에 따라 이 상태를 향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견디기 힘든 시련으로 들어간 사람들에 의해서만 닮아 질 수 있다. 이것은 많은 신비가와 성인들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어떤 이가 한번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면, 그 삶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그러한 삶이 되며, 그 삶은 경이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당신이 그들에게서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확실히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것이 당신이 영적 여정에서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모든 기대를 포기함으로써만이 아메리칸 인디언의 觀想 祈禱 용어인 치유의 호수(Medicine Lake)에로 이끌릴 것이다.
觀想 祈禱는 여러 가지 단계와 변천을 거치게 된다. 당신을 혼동하게 만드는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한다. 주님께서는 책을 통해서, 어떤 사람을 통해서, 그리고 혹은 당신 자신의 인내를 통하여 도움을 주실 것이다.
때때로 하느님은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시기도 한다. 어쩌면 불가능한 상황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영적 여정에서 상당히 앞설 것이다.
당신은 고독과 실존적 처절함에 부딪칠 것이다. 이 세상에 당신을 이해하거나 도와 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낄 것이며, 하느님은 몇 억 광년이나 멀리 떨어져 계신 것처럼 느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준비의 과정이다. 하느님은 농부와 같이 당신 영혼의 땅에서 40배 60배가 아니라 100배의 수확을 올릴 수 있도록 준비하신다.
그것은 땅이 잘 갈아져야 함을 뜻한다. 그것은 마치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혼 위를 트랙터로 한 방향으로 그 다음에는 다음 방향으로 또 그 다음에는 빙빙 돌면서 땅을 가시는 것과 같다. 그분은 그 흙이 고운 모래같이 잘 갈아질 때까지 그러기를 거듭하신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을 때 씨를 뿌리신다.
아니면 자라나는 나무를 상상해 보자. 처음에는 나무 기둥과 가지 뿐이다. 그 후에 잎이 돋는다. 이 때에 나무는 아름답게 보인다.
이 때를 당신이 처음에 내적 침묵에 들어가기를 배운 때에 생기는 즐거움에 비길 수 있다. 잎이 난 뒤에 꽃이 피는데 이 때가 깊은 만족의 시기로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꽃은 곧 시들고 땅에 떨어진다. 열매는 계절의 마지막에 열리는데 그것도 나무에서 익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나뭇잎이 돋아나고 꽃이 필 때 여정의 끝에 다다랐다고 생각하지 말라. 영적 여정은 멀고 먼 여정이다.
그뿐만 아니라, 여정은 당신의 체험이 순환함(cycling)을 보게 되는데, 이때에 처음에 시작한 곳으로 되돌아가서 아무런 진전이 없었던 것으로 느끼기도 할 것이다. 순환함은 마치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다.
당신이 시작한 곳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층 높은 수준에 있는 것이다. 독수리는 태양을 향해 빙글빙글 돌면서 제자리에 오지만 실은 수직상으로 더 높은 곳에 이른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의하면, 우리의 영혼으로 들어오는 거룩한 빛은 어둠의 빛줄기이다. 어두운 방에 비치는 빛줄기가 보이는 것은 먼지 때문이다. 만일 먼지가 없다면, 그 방을 통과하는 그 빛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觀想 祈禱가 완전히 발전했다는 상징인데. 그 상태가 너무 순수해서 그것을 받는 이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변형이 진전하여 외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람은 어떤 성사(聖事)보다도 하느님을 더 잘 나타낸다.
이것이 바로 무염 시태 축일의 의미인 것이다. 우리도 성모님의 시초의 모습-하느님 현존과 활동을 순수하게 투과시키시는 모습-을 가지라고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다.
觀想 祈禱는 관상 상태에 이르게 해주는 학교이며, 하느님은 이것을 이용하여 우리가 일치의 상태에 머물도록 해주신다. 이 상태에 들어가면,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흘러 들어옴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에 성령께서 영감을 주시고 성령께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되어 주신다.
----------o----------o--<제9장 :無意識의 짐을 덜어 냄 > 끝 ----------o---------o------
곧 이어 제10장 :<向心 祈禱의 要約>이 연재(連載) 되오니 많은 愛讀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5年4月27日(月)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http://cafe.daum.net/bluepinetreesenior > 카페지기 '베드로 문' 2022년9월13일(화)에 다시 옮겨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