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혜초의 스님의 <<왕오천축국전>> 덕분에
천축(天竺)이 옛 인도(India)를 지칭했던 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정신게>에 보면
'천축'과 '인도'라는 말이 동시에 나온다(그러니까 나란히 병기倂記한 것은 아니고 양쪽 다 쓰고 있다).
인도서천지론가(印度西天之論家)
중하일역지고승(中夏日域之高僧)
현대성흥세정의(顯大聖興世正意)
명여래본서응기(明如來本誓應機)
석가여래능가산(釋迦如來楞伽山)
위중고명남천축(爲衆告命南天竺)
어, 신란스님 시대(12,3세기 일본)에도 '인도'라는 말이 쓰이고 있었단 말이야?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궁금하면 찾아봐야 한다. (인터넷이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검색으로 얻은 정보는 대략 이랬다-----
* 천축(天竺) : 한자문화권에서 과거에 전통적으로 '인도'를 가리킬 때 사용했던 말이다.
* 우리나라에서는
1. 신라 출신 혜초스님(704-787)이 남천축, 동천축, 서천축, 중천축, 북천축을 다섯 천축을 순례하고 기록한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라는, 인도 방문기를 남겼다.
신라출신 혜초스님은 일찍이 어린 나이에 입당(入唐)했는데, 정확한 출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722/723년설) 스무살에 당나라를 출발하여 727년에 당나라 장안(長安)으로 귀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오대산 보리사에서 입적할 때까지 신라로 돌아오지 않고 54년여를 경전 번역에 진력하며, 쭉 당나라에 머물렀다. 그런 혜초스님이 <<대당서역기>>의 존재를 몰랐을 리가 없을 텐데, 즉 7세기에 당나라 현장스님이 '인도(印度)'라는 이름으로 인도를 지칭하고 있는 기록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을 텐데, 그보다 100여년 후에 인도를 다녀오신 혜초스님은 인도를 '印度'가 아닌 '天竺'으로 쓰고 있다.
2. 일연스님(1206-1289)의 <<삼국유사>>(1281-1283 무렵 저술) '귀축제사조(歸竺諸師條, '천축으로 간 여러 스님들'을 다룬 챕터)'를 보건대 고려시대 당시에도 인도가 아닌 '천축'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그 외 우리 옛 기록에서 인도와 천축이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실력 부족으로 알아내지 못 함이 유감스럽다.
* 중국에서 인도를 지칭할 때
1. 사마천의 <<사기(史記)>>(BC98년경 시작ㅡ BC92/ 혹은 BC89년 완성) 에서는 '身毒(신독)'으로
2. 범엽의 <<후한서(後漢書)>>(AD398-445 성립) 에서는 '天竺(천축)'으로 (또는 天篤/천독으로도) 썼다.
3. 7세기......현장(玄奘)스님은 '天竺'이라는 말 대신 '印度'라고 기록한다.
기록상으로 "인도(印度)'라는 이름이 처음 보이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현장스님(602-664)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부터다.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印度'라는 말이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4. 현장스님 이후로도 '인도'로 정착된 것은 아니었던지, 이후 북송(北宋)대의 <<책부원귀(冊府元龜)>>(1005-1013 완성) 등 여러 기록들에도 '天竺'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 일본에서는 인도를
1. "고대부터 메이지시대 이르기까지 '天竺(천축)'이라는 이름으로 쓰고 있다" 天竺 - Wikipedia고 하는데,
신란(親鸞, 1173-1262/1263)이 <정신게(正信偈)>에서 '인도' '천축'을 동시에 쓰고 계신 것을 보면 印度와 天竺이 함께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메이지(明治) 이후, 일본에서는 '印度'보다는 통상 'インド로 표기한다.
----------정리하면---------------
1. '천축'이란 말은 서기 4~5세기 성립된 <<후한서>>에서 등장한다.
2. 중국에서 인도를 지칭하는 말은 '인도(印度)'나 '천축(天竺)' 외에도 '서역(西域)'이나 '신독(身毒)' '서천(西天)' '천독(天篤)' '현두(賢頭)' 등 여러 표기들이 있는데 인더스 문명 발상지인 신드(Sind/Sindh)의 음사(音寫) 표기임을 알 수 있다.
3. 당나라 때 현장의 <<대당서역기>>(7세기)에서 '인도'라는 말이 등장한다.
4. 현장보다 약 100년 후인 8세기, 인도를 다녀온 혜초스님은 '천축'으로 지칭한다.
5. 일본에서는 8세기(736년), 나라(奈良) 동대사 대불 개안식 때 "남천축 출신 보리세나(菩提僊那) 법사가 주재했다"는 기록을 비롯해서 메이지시대까지 '천축'으로 기록했다.
6. 그런데 13세기에 저술한 신란스님의 <<교행신증>>에 나오는 <정신게>에는 '인도'와 '천축'이 동시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인도'와 '천축' 양쪽이 둘 다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