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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강해 제 5장 나아만의 문둥병 치유
동족을 대상으로 한 종전의 사역과는 대조적으로 본장에서는 이방인을 상대로 한 엘리사의 사역을 소개한다. 이는 그의 사역이 만인 구원을 겨냥한 우주적 복음의 전파임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본장의 내용은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려 그 집의 여종인 히브리 소녀의 소개로 엘리사를 찾아와 고침을 받는 것과,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저지른 범죄를 대조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이방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증거함과 동시에 게하시를 통해 이스라엘의 패역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본장은 그 서두부터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는 주제에 대한 대답으로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유일하심에 대한 심도 깊은 논증을 전개하는 것이다. 나아만 장군의 치유에 대해서 예수께서도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의 신을 찾아 섬기면서 여호와를 배척하였으며,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나아만이 찾아와서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은 정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1.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친 기적 (5:1-19절)
본장의 전반부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과 하나님의 능력은 완전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를 어떻게 섭리하고 계신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아람’은 셈족의 후예로서 ‘수리아’라고 불리는 유목민족이다. 그들은 B.C 13세기경 다메섹에 정착하여 북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해서 우호관계, 적대관계를 반복했다. 특히 상업에 재능을 보여 여러 지역과 통상을 벌였기 때문에 그 언어가 동방 무역의 세계적 언어가 되었으며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된 후 신약시대에는 아람어가 팔레스틴에서도 통용되었다. 아람은 벤하닷 1세 때부터 이스라엘과 간헐적으로 전투를 벌였으며 나아만은 아람 군대의 총지휘관인 군대장관으로 그 이름의 뜻은 ‘공평한’ ‘은혜로운’이라는 뜻이다. 그는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였는데 ‘크다’라는 말은 전장에서 ‘수넴 여인’에게 붙인 ‘귀한’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인 ‘게돌’이다. 이처럼 나아만은 아람에서 영예를 얻고 존경을 받았으며 큰 영화를 누린 자였다. 그가 이렇게 존경을 받고 영화롭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인데 그 은혜는 여호와께서 나아만이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방인이 얻은 승리를 여호와의 구원으로 인한 결과라고 언급하는 것은 참으로 특별한 경우이다. 이것은 여호와만이 유일신이시며 이방인의 삶까지도 섭리하시고 주관하심을 나타낸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말하는 아람의 구원이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얻은 승리라는 것이다. 사가들의 전언에 의하면 길르앗 라못의 전투에서 아합을 죽이고 승리한 장군이 나아만이라는 것이다. 나아만은 능력있는 군대장관으로서 영화를 누렸지만 불행하게도 문둥병에 걸렸다. 이스라엘은 문둥병자를 추방하지만 아람은 문둥병자라도 왕과 아주 가깝게 지내며 정상적으로 공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아합 왕이 길르앗 라못을 원정한 이후로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잦은 분쟁이 있었는데 아람 군인들이 떼를 지어 이스라엘 국경을 침범하고 마을을 노략하였다. 그 당시에는 재물을 약탈할 뿐만 아니라 처녀들을 잡아 가기도 했는데 본문에 언급된 어린 소녀 하나는 아람 군인들에게 잡혀간 소녀로서 탁월한 용기와 재치를 지닌 소녀였던 것이다. 이 아이는 포로로 잡혀가서 나아만의 집에서 수종들며 고생하고 있었지만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주인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것이다. 소녀는 자기 주인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 걸린 것을 알고 측은히 여기며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소개한다. 이는 엘리사 선지자를 일컫는 말인데 엘리사가 사마리아에 있는 자기 집에 거주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작은 소녀를 통하여 엘리사의 명성이 이방 땅에도 전파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비천한 종을 들어 쓰시며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시는 것이다.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에서 온 어린 소녀의 말을 전해 듣고 이 사실을 왕에게 그대로 보고했다. 소녀는 주인의 아내에게 말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말하고 남편은 왕에게 고함으로 엘리사 선지자의 명성은 아람 땅에 널리 전파되었다. 아람 왕은 나아만 장군을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며 친히 친서를 써 주었는데 당시 아람 왕을 벤하닷 1세로 볼 때 이스라엘 왕은 여호람이었다. 엘리사 선지자는 여호람, 예후, 여호아하스, 요아스 4대에 걸쳐 왕을 섬겼는데 아직은 예후 왕조가 시작되기 전인 것이다. 나아만은 엄청난 선물을 준비했다. 즉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간 것이다. 은 십 달란트는 342kg이며, 금 육천 개는 두 달란트에 해당되며 68.4kg이다. 의복 열 벌 또한 매우 높은 가격의 선물이기 때문에 이러한 선물을 준비했다는 것은 나아만의 부귀가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하게 한다.
아람 왕은 엘리사를 이스라엘 종교의 제사장 정도로 생각하고 나아만 장군의 치료를 왕에게 부탁하면 왕의 명령을 받은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고쳐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에게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주소서.’라고 하면서 그의 병의 근원을 뿌리 채 뽑아달라고 청원했던 것이다. 아람 왕의 친서를 접한 이스라엘 왕은 극도로 당황했으며 슬픔과 분노의 표현으로 자기 옷을 찢었다. 이는 이스라엘 왕이 아람 왕의 위압에 눌려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왕이 이렇게 분노한 것은 그가 아람 왕의 말을 오해했기 때문인데 아람 왕이 자신에게 문둥병을 고쳐달라는 것인 줄로 착각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문둥병은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과 같은 중한 병으로 취급되었다. 또한 엘리사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인 것은 인정하지만 문둥병을 고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람 왕이 이러한 요청을 하는 것은 공연히 시비를 거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전에 벤하닷 왕은 사마리아를 침공하여 아합 왕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시비를 건 적이 있었기 때문에 또 다시 침공의 구실을 찾고자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이라고 오해했던 것이다. 왕궁의 소란한 사건에 대해 전해들은 엘리사 선지자는 사람을 왕에게 보내어 나아만을 자기에게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직역하면 ‘이스라엘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지만 이방인인 나아만은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정할 것이기 때문에 왕은 전쟁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은 나아만을 구원하여 그가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는 말이다.
나아만은 자신의 병거와 말들을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엘리사를 방문하였다. 이 모습은 수넴 여인이 취한 존경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아만은 자기의 직책과 부귀영화로 인한 교만 때문에 말에서 내리고자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병을 고치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사 역시 그를 정중하게 맞이하지 않았는데 이는 교만한 자는 결단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엘리사는 사환을 통하여 나아만에게 말씀을 전했다.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엘리사가 자기 임의로 말한 것이 아니라 문둥병의 정결 규례에 대한 율법에 근거한 것이었다.
*레14:8-9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영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이레를 머물 것이요 일곱째 날에 그의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의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율법에서 몸을 씻는 것은 문둥병이 완전히 고쳐지고 난 이후 정결하게 되었음을 증거하는 상징적 행위였다. 그러나 나아만에게는 깨끗하게 되기 위한 예비적 동작으로 몸을 씻는 행위를 명령한 것이다. 이와 비근한 예로 예수께서 한 소경을 치료하실 때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니 소경이 말씀대로 순종하자 눈이 밝아져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몸을 씻으라고 명령한 것은 치료 행위나 치료 후 정결 의식이라기보다는 ‘정결함을 받는 자는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는 율법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 것이다. 그것도 일곱 번 씻으라고 한 것은 완전한 순종과 인내를 요구한 것이다. ‘완전하다’ ‘만족하다’라는 히브리어 ‘솨바’는 ‘일곱’을 나타내는 수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행위를 명령한 것은 사람들이 흔히 소유하지 못한 믿음과 신뢰를 가져야만 치유받을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엘리사의 명령에는 두 가지 큰 의미가 있다.
첫째, 나아만의 인간적인 교만을 분쇄하기 위함이다.
나아만은 아람 국가의 최고 권력자인 군대장관이지만 엘리사는 평민으로서 이스라엘의 선지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인간적인 안목으로 볼 때 나아만이 교만한 자라면 엘리사의 명령에 불복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교만한 자에게 하나님은 결코 은총을 베풀지 않는 것이다.
*잠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잠16: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둘째, 나아만의 문둥병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치유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엘리사는 불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주술과 같은 처방을 내리기보다는 아주 평범한 일상의 일을 명했는데 그것은 혼탁한 요단강물에 몸을 씻으라는 것이었다. 나아만의 눈으로 볼 때 요단강은 아람의 맑은 강들에 비하여 혼탁한 강물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요단강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강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요단강을 건넜으며, 특별히 엘리야나 엘리사에게 있어서 요단강은 이적의 강이었다. 엘리야는 요단강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가서 승천하였고, 엘리사는 요단강을 건너오면서 선지자의 명예를 얻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으며, 예수님도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다. 또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실 때에도 요단강을 건너셨다. 그러므로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는다는 것은 이방인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들어가는 참으로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나아만은 엘리사의 태도에 대해 분노하며 물러갔다. 그 이유는 그의 편입견 때문이었다. 나아만은 그의 나라의 법대로 주술사는 병자를 고칠 때에 먼저 환자를 살펴보고 그의 신의 이름을 불러 신의 임재 아래 자기 손을 환자의 환부에 올려놓고 문지르며 흔들어 이적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자신의 방문에 대해 환영하고 체통을 세워주고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상좌에 앉히고 주술적 행위를 해 주지 않은 데에 불만을 토했던 것이다. 더구나 아람으로 돌아가는 길에 요단강물에 몸을 씻으라는 것을 무례한 일로 여겼던 것이다. 강물에 몸을 씻어 병이 나을 것 같으면 자기 나라에 있는 다메섹 강이 차라리 더 맑고 깨끗하다는 것이다. 다메섹에는 두 강이 있는데 아바나와 바르발이다. 이 중에 아바나는 대단히 맑고 깨끗할 뿐만 아니라 강물이 차기 때문에 희랍인들이나 로마인들은 이 강을 ‘황금의 강’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나아만의 생각은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몰랐고 특히 하나님의 이적이 오직 말씀에 순종함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인간적인 생각을 앞세웠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자신의 합리적인 생각을 따라 불순종했다면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보는 자마다 살 것이라고 하셨다. 말씀에 순종하여 놋뱀을 본 자는 다 살았는데 이는 구원의 원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보고 믿는 자마다 모두 구원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된 인간들을 위해 쉬운 방법으로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시지만 인간은 어리석은 이성을 고집하여 구원을 거부해 버리는 것이다.
나아만은 크게 분노하고 엘리사의 집을 떠났는데 이스라엘까지 순례한 그의 수고가 헛된 일이 될 뻔한 때에 지혜로운 그의 종들이 간청을 올린다. 종들은 나아만을 ‘내 아버지여’라고 부르면서 선지자의 말대로 행하기를 간곡히 요청한 것이다. 즉 종들의 말은 선지자가 무리한 요구를 한 것도 아닌데 그것을 굳이 거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일단 선지자의 말대로 행하여 보고 결론을 그 다음에 내려도 늦지 않다는 종들의 요청에 나아만은 요단강으로 향했던 것이다. ‘내려가서’라는 말은 사마리아에서 요단강으로 내려갔다는 의미도 있고 엘리사의 말에 순종했다는 의미도 있다. 나아만은 요단강물에 몸을 완전히 잠기게 했는데 10절에 ‘씻으라.’고 한 것과는 그 의미가 본질적으로 다르다. 나아만이 몸을 잠기게 했다는 이 말은 모세 오경에는 ‘피에 잠그다.’라는 말로 쓰이고 있으며, 어린 양의 피에 잠기는 것을 연상하게 한다. 따라서 나아만은 마치 침례를 받는 것같이 몸을 물속에 완전히 잠기게 함으로써 선지자의 명령보다 더 철저히 몸을 씻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병이 치유가 되고 그의 살이 어린 아이와 같이 부드럽게 회복된 것은 그의 철저한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나아만이 일곱 번 몸을 잠기게 했을 때 그의 몸은 완전히 회복되었는데 이와 같이 완전하고 철저한 순종만이 하나님의 기적을 창출하는 것이다.
병이 나은 나아만은 그대로 아람으로 향하지 않고 사마리아에 있는 엘리사에게 도로 왔다. ‘도로 오다.’라는 말 ‘와야 쇼브’는 ‘돌이키다’라는 뜻 외에 ‘새롭게 되다.’ ‘회개하다’라는 뜻이 있다. 엘리사에게 분을 품고 돌아갔던 그가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다시 엘리사에게 돌아온 것은 그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회개의 표시인 것이다. 이러한 나아만의 태도는 그가 자만과 교만으로 가득차서 선지자가 마중 나와 영접하기를 기다렸던 태도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이제는 자기 병거로부터 내려와서 엘리사 앞에 서서 겸손과 겸비의 모습을 갖추고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아울러 선지자에게 예물을 드렸다. 그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선지자는 이미 8절에 예언한 바가 있었는데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라는 말의 성취이며, 그의 고백은 본장의 핵심이다. 나아만은 오직 이스라엘에만 진정한 신이 계시고, 이스라엘 하나님을 통해서만 진정한 치유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나아만은 이방의 관례대로 은혜를 베푼 신에게 예물을 드리고, 그 신의 선지자에게 최선의 예우를 다하여 예물을 드렸다. 이러한 행위는 그가 회개했다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새로운 신앙을 소유했다는 것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나아만의 예물에 대하여 엘리사는 고사했는데 당시 이스라엘 전역에서는 기근이 횡횡하고 있었던 사실을 두고 볼 때 나아만의 선물을 거듭 거절한 것은 몇 가지 큰 의의가 있다.
첫째, 어떻게 해서든지 나아만의 마음에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참 섬김을 받으시는 분임을 확신시켜 주기 위함이다.
둘째,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이방의 선지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고 여호와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로 치유해 주시는 분임을 각인시키려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자들이 자신을 내세워 욕심을 채우며 자랑하고자 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나아만은 예물을 거절하는 엘리사에게 자기의 요구를 청원한다. 즉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달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나오는데 하나는 이 흙으로 제단을 쌓기 위함이라는 견해이다. 즉 아람에 돌아가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이스라엘 땅의 흙으로 제단을 쌓아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드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어서 나오는 그의 말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라고 한 것을 보면 이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다른 하나는 흙을 아람 땅에 뿌려 그곳을 성역화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바벨론 포로시기에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흙을 나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견해를 모두 수용한다고 해도 나아만은 다신론에 근거한 요청이었을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은 장소나 물건에 구애받지 않고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몰랐던 것이다. 나아만이 진정으로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를 섬길 목적이었다면 선지자에게 여호와를 섬기는 방법을 묻고 율법을 배웠어야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자신이 아람에 돌아가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왕과 함께 절을 할 때에 이 행위를 관대하게 용납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림몬’은 아람의 최고의 신으로서 폭풍의 신 ‘하닷’과 동일한 신이다. 사실 ‘림몬’은 ‘하닷 림몬’의 준말이며 후일에 희랍 신화에서 전능한 신으로 등장하는 제우스 신과 동일시 되었다. 나아만은 자신의 직무로 인해 부득이 하게 우상 앞에 절을 하게 되는 애로 사항을 토로하고 이 말을 거듭 반복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걱정과 염려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헌신하는 삶이며 성과 속을 넘나드는 이중적 삶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아만의 현실적이고 종교적인 갈등에 대해 엘리사는 한 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고 다만 그의 평안을 빌어 주었다. 사실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 고백했다 하더라도 그의 고백은 이적으로 자신의 병을 치료해 준 신에 대한 감사였을 뿐, 더 이상 유일신 여호와에 대한 진실한 신앙은 아닌 것이다.
2. 게하시의 범죄와 그 결과 (5:20-27절)
나아만의 치유가 자기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해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던 엘리사의 겸손과는 대조적으로 재물의 탐욕으로 인해 저질러진 저급한 거짓의 범죄 행위를 저질렀던 게하시의 행위가 기술되고 있다. 게하시의 범죄는 재물에 대한 탐욕과 함께 이중 삼중으로 연이은 범죄였다. 마치 다윗 왕이 밧세바를 취할 때에 범한 행각과 같이 죄악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 것이다. 나아만이 엘리사를 떠나 조금 갔을 때였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나아만의 예물을 거절하고 받지 아니한 엘리사의 행위에 불만을 품고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기를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고 결심한다. 이러한 그의 결심의 이면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첫째, 나아만이 가지고 온 재물에 마음이 빼앗겼기 때문이다.
엄청난 은금과 값비싼 의복은 게하시의 마음을 충분히 사로잡았을 것이다. 그 중에 일부만 받아도 그는 부자로 살아갈 수 있으며 더 이상 엘리사의 사환으로 수고하지 않고 자유로운 신분으로 독립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절호의 기회가 또 다시 온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게하시는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까지 한 것이다.
둘째, 선지자가 병을 고쳐주고 예물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물며 이방인의 불치의 병을 치유해 주고 대가를 받는 것은 죄가 아닌 것이다. 주의 종은 마땅히 섬김을 받게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만은 자신의 병을 고쳐주는 대가로 이미 선물을 준비했기 때문에 굳이 사양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게하시는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였는데 이 맹세는 엘리사의 맹세와 완전히 대조적인 것으로서 신성 모독적인 것이었다. 이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악인 것이다. 그의 맹세에는 두 가지 탐욕의 죄가 나타나는데, 첫째는 육신에 속한 자로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탐욕이다.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라는 그의 말과 같이 이는 육신에 속한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사망에 종노릇하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고의적인 범죄로서 저지르는 탐욕이다. ‘쫓아가서 취하리라.’는 말은 범죄를 위한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마치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 기회를 찾는 것과 비슷하다. 이는 우발적인 범죄가 아니라 계획적인 범죄인 것이다.
*잠6:14 그의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여 다툼을 일으키는 자라
*잠6:18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게하시는 혹시라도 나아만이 멀리 갈까 염려되어 그의 뒤를 달려갔는데 나아만이 게하시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그를 맞이했다. ‘내려’라는 말 ‘나팔’은 새가 급히 땅에 내릴 때 쓰이는 말로 리브가가 이삭을 보고 약대에서 갑자기 내리는 것에 이 말이 사용되었다. 나아만은 자신이 마치 아랫사람인양 윗사람을 존경하는 자세로 게하시에게 예의를 갖춘 것이다. 나아만은 게하시에게 ‘평안이냐’고 물었다.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취하리라.’는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급하게 달려오는 게하시가 나아만에게는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나아만은 혹시 엘리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게하시에게 평안을 물었다. 게하시는 일단 평안이라고 대답하고 자기가 달려온 이유를 말하는데 악을 도모하는 그의 생각은 대단히 기발한 것이었다. 당시 엘리사는 선지 생도들을 돌보고 있었기 때문에 선지 생도들을 위한 재물이 필요하다는 게하시의 이런 발상은 상대에게 충분히 인식될 수 있었고 나아가 게하시가 주문한 물량이 겨우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이었기 때문에 의심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게하시는 나아만을 속이기 위하여 자기 주인의 권위를 이용했으며, 자신의 탐욕을 위하여 거짓말도 서슴없이 하는 간악함을 보였던 것이다. 나아만은 게하시가 체면상 적은 재물을 요구한 것으로 생각하여 은 두 달란트를 받도록 강권하고 옷도 두 벌을 준비하여 두 사환에게 지우고 게하시와 함께 가게 하였다. 은 한 달란트는 34.5kg이기 때문에 두 달란트는 약 70kg에 가까운 무게이다. 여기에다 옷이 두 벌이면 게하시가 혼자서 가지고 갈 수는 없는 무게이다. ‘강권하여’라는 말 ‘이페라츠’는 ‘강요하다’ ‘누르다’라는 의미로서 나아만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알 수 있다.
일행이 언덕에 이르자 물건을 게하시가 직접 받아 집으로 운반하여 비밀리에 감추고 난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엘리사 앞에 나타났다. ‘네가 어디서 오느냐.’라고 묻는 엘리사의 질문에 게하시는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한다. 사람이 한 번 거짓말을 하게 되면 이어서 또 다른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나아만을 속였던 게하시는 이제 또 한 번 하나님의 사람이요 자신의 스승 앞에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의 덫인데 죄는 또 다른 죄를 불러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경우는 대개 몇 가지가 있다. 탐심, 두려움, 자랑, 교만, 비양심, 지나친 변명, 사탄의 유혹 등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게하시의 거짓말에 대해 엘리사는 그의 행적에 대해 소상히 말해 주었다.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개역성경에는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였다.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내 마음이 나가지 않았느냐.’이다. 즉 엘리사의 마음이 게하시와 함께 갔다는 것이다. 엘리사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게하시가 재물을 탐하는 그 현장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엘리사를 섬기고 있는 게하시가 엘리사의 그러한 능력을 알지 못하고 속이는 것을 책망한 것이다. 이는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서.’라고 말한 것과 동일하다. 엘리사는 게하시의 마음과 생각을 능히 감찰하고 보고 있었으며 그의 행위까지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사 당시 북이스라엘은 거짓 선지자들과 우상 숭배자들이 판을 치고 있었으며 이기심과 탐욕으로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게하시만은 이들과 달리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엘리사는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고 책망했던 것이다. 특별히 이방인인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고백하고 돌아가는 이때에 은을 받게 되면 이스라엘의 선지자 역시 림몬의 선지자와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이다.
탐욕으로 인하여 게하시가 받은 형벌은 두 가지이다.
첫째, 게하시 자신이 나아만과 같은 문둥병자가 된다는 것.
둘째, 그 병이 그의 자손 대대로 유전된다는 것이다.
그에게 내린 형벌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고 선지자의 직분을 오용한 데 대한 것이다. 이는 당시의 많은 거짓 선지자와 지도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이었다. 이방인인 나아만은 문둥병이 나아서 깨끗하게 되었지만 그 병이 이스라엘 사람 게하시에게 옮겨졌고 게하시의 문둥병은 그의 자손에게 전이되어 영원토록 이르게 되었다. 엘리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말대로 게하시에게 문둥병이 발하여 눈과 같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모세가 자기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어 볼 때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되었다고 할 때와 같은 것이다. 또한 모세를 탄핵했던 미리암이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는 경우와 동일하다. 이는 자연적인 문둥병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속인 죄와 탐심으로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이적적이고 특별한 형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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