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5년11월08일(토요일)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용산 개관 20주년-20년의 이야기, 유물과 사람] 관람일정
탐방지 :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용산 개관 20주년-20년의 이야기, 유물과 사람]
[국중박 용산 20년 역사 함께한 유물과 사람들 이야기
뉴시스 기사 등록 2025.10.23. 09:43:33
12월28일까지 '20년의 이야기, 유물과 사람'
소장품 20점 찾아가는 특별 관람 프로그램
[서울=뉴시스]이수지 기자 =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 개관 20주년을 맞아 소장품과 박물관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행사를 마련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2일부터 12월 28일까지 상설전시관에서 특별한 관람 행사 '20년의 이야기, 유물과 사람'을 개최한다.
이 행사는 박물관의 주요 유물 20점과 박물관과 인연을 맺어온 사람 20명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관람 프로그램이다.
박물관 관계자는 "용산 개관 후 20년간 박물관 학술 연구와 큐레이팅 등 다양한 활동으로 새로운 가치를 축적하며 관람객들과 함께 성장해 온 여러 소장품들 중 20점을 선정했다"며 "상설전시관 곳곳에 전시 중인 소장품을 따라가는 여정에는 지난 20여 년간 각 유물과 남다른 인연을 맺어 온 박물관 사람 20여 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20년의 여정과 시간의 축적을 형상화한 상징 조형물이 설치돼 관람의 출발을 돕는다. 20여년의 여정과 시간 축적을 형상화한 조형물은 20점의 유물과 이야기의 표제, 전시 위치, 관람 방법 등을 안내한다. 함께 제시한 QR로 모바일 누리집(nmk20.com)에 접속해 20개 유물의 전시 위치를 확인하고, 각각의 전시실을 찾아 유물을 관람하며 오디오 등의 형태로 이야기를 함께 즐길 수 있다.
'20년의 이야기, 유물과 사람'은 나만의 관람 동선을 설계해 '알고 있는 유물'과 '한번쯤 가본 박물관'을 다른 관점에서 다시 찾게 한다.
▲경천사 십층 석탑 ▲아시아관의 중앙아시아 벽화 ▲야외 정원의 불상 ▲이사지왕명 큰칼 ▲달항아리 ▲반가사유상 ▲고구려 벽화 모사도 등 상설전시관 내외 곳곳을 따라가며 공간, 유물,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다.
관람객은 상설전시관 전시품 관람뿐만이 아니라 고구려실과 백제실 사이 선사·고대관 휴게실에 별도로 마련된 20주년 공간에서 설명문, 영상, 오디오, ‘이야기 책 등 다양한 매체로 이들의 이야기를 다시 보고, 듣고, 읽을 수 있다.
이번 행사에도 전시 관람 및 공간의 경험 외에도 관람 여정 중 획득한 온라인 스탬프 수량에 따라 사진 엽서, 리유저블 가방, 이야기 노트 등 특별히 제작한 한정판 기념품도 제공된다.
행사 기간 중 박물관 문화상품점에는 20주년 기념 스페셜 에디션 코너가 별도로 마련된다. 박물관문화재단과 용산 개관 20주년 기념 스페셜 뮷즈 10개 품목 25종이 새로 개발됐다.]
탐방코스: [이촌역~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에서 [용산 개관 20주년-20년의 이야기, 유물과 사람]를 관람~이촌역]
탐방일 : 2025년11월08일(토요일)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2시간33분 소요)
12:00~12:40 구산역에서 6호선을 타고 삼각지역으로 가서 4호선으로 환승하여 이촌역으로 이동 [40분 소요]
12:40~12:53 이촌역에서 탐방출발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로 이동 [13분, 710m 이동]
12:53~15:00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에서 [용산 개관 20주년-20년의 이야기, 유물과 사람]를 관람
[용산 개관 20주년 <20년의 이야기, 유물과 사람>
전시장소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전시기간 2025-10-22~2025-12-28
전시품 (대상품) 반가사유상 등 상설전시 대표 소장품 20점
전시요약 지난 20년간 박물관의 전시 큐레이팅, 조사연구 등으로 성장한 대표 유물 20점과 그 과정에 함께 한 박물관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명
담당부서 유물관리부 이동관 (02-2077-9394)
국립중앙박물관이 이곳 용산에 자리 잡은 지도 어느덧 20년이 되었습니다.
박물관은 사람이 함께하고 나누어야 완성되는 곳입니다.
용산에서의 2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 손길, 발걸음으로 박물관의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유물 곁에는 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가 되어 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물의 원래 모습과 본질을 찾아 이야기와 연출로 세상과 나누어 온 사람들입니다.
"20년의 이야기, 유물과 사람"에서는 유물 뒤에 가려져 있던 또 다른 주인공들의 20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이야기 속에는 유물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순간, 전시로 선보이기까지의 과정 등 지난 시간의 기억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박물관과 유물 그리고 관람객과 함께해 온 사람들의 열정과 고민을 함께 느껴보시기를 바랍니다.]
[고구려인의 삶과 생각이 담긴 고구려무덤벽화모사도
정석현 기자 asadal1212@hanmail.net
한국문화신문 기사 등록 2015.06.18. 20:04:53
[한국문화신문 = 정석현 기자] 무덤벽화란 무덤이라는 특별한 공간을 화폭으로 삼아 완성된 그림입니다.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죽은 자의 매장이며, 무덤이라는 별도의 공간은 내세에서의 삶을 위해 죽은 자가 머무는 곳이기도 하고, 내세의 삶이 꾸려지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무덤벽화는 바로 죽은 자의 내세(來世) 삶과 연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삼국시대 벽화무덤은 모두 110여 기에 이릅니다. 이 가운데 백제와 신라의 것 각 2기, 가야의 것 1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백제와 신라, 가야의 벽화무덤은 발견 사례도 적을 뿐 아니라 무덤을 만들고 벽화를 그린 시기도 6세기라는 특정 시기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와 달리 고구려에서는 벽화무덤이 3세기 중엽 이래 7세기 중엽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지금까지 고구려 벽화무덤은 집안, 환인지역에서 31기, 평양, 안악지역에서 76기 등 모두 107기가 발견, 조사되었습니다. 주로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집안과 평양 일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무덤 안을 그림으로 장식하는 이 새로운 장의(葬儀) 방식은 비록 고구려 자체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 특유의 역동적이고 자립적인 문화 토양 위에서 고구려 문화의 한 장르로 성장하였습니다. 고구려인들의 생활 모습과 종교, 사상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고구려사는 물론,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조선 식민통치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일제가 시행한 무덤벽화 조사
고구려 무덤벽화가 다시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00년대부터입니다. 1907년 프랑스 고고학자 샤반느(E. Chavannes)가 집안의 산연화총에서 벽화를 발견하고, 1908년 이를 학계에 보고함으로써 비로소 국제학계의 눈길을 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무덤벽화는 1908년의 정식보고 이전에도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는데, 1900년대 전반 강서군수에 의한 강서무덤의 조사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때의 조사는 학술적인 조사보다는 무덤 내부에 들어가 벽화를 확인하는 정도였습니다.
고구려 무덤벽화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 연구는 조선을 강점한 일제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1912년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에 의해 강서무덤(江西大墓, 中墓, 小墓)이 조사된 이래, 매년 벽화무덤에 대한 발견과 조사가 계속되었고, 아울러 벽화 모사작업도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일제에 의해 조사, 보고된 고구려 벽화무덤은 평양 지역에서 15기, 집안지역에서 12기 등 모두 27기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일제에 의한 고구려 무덤벽화 조사, 연구가 순수한 학술적인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조선의 식민통치를 정당화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자 조선총독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일제 어용학자들이 동원되어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러한 조사의 기록으로써 만들어진 것 가운데 하나가 “고구려무덤벽화모사도(高句麗古墳壁畫模寫圖)”입니다.
오바 츠네키치(小場恒吉)가 도맡아 하다시피 한 평양지역의 무덤벽화 모사작업의 결과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의 도쿄대학, 도쿄예술대학 등에 나뉘어 보관되어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12개 무덤 130여 점의 모사도가 소장되어 있는데, 그 양과 질에서 가장 뛰어납니다.
1930년대에 제작된 모사도로 80여 년 전 벽화의 상태를 확인하다
무덤벽화 모사작업은 벽화를 실물과 같은 크기로 현장에서 1차 모사도를 작성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아마도 비치는 얇은 종이를 벽화 면에 붙여 그림을 베껴낸 후, 물감으로 색을 맞춰내는 방식이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벽화 모사도는 현장에서 완성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끝손질 등의 최종적인 조정은 박물관 등의 실내에서 별도로 행해졌습니다.
컬러사진 찍을 수 없었던 당시로서 벽화의 색에 대한 정보를 기록함에는 모사에 의한 충실한 채색이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제작된 모사도에는 원 벽면에 그려진 그림은 물론 습기나 곰팡이 등으로 인한 오염, 회벽의 떨어짐이나 벽면의 부식 등과 같은 모사 당시 상황이 그대로 표현되었습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100∼70여 년 전의 벽화의 모습을 현재에 남긴 것으로, 그 기간 동안 벽화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변화를 읽어내는 것이 가능한 기록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고구려 무덤벽화는 고구려인들이 직접 남긴 실물자료로, 고구려 사람들의 삶과 생각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현재 고구려 무덤벽화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공개된 지 100년에 이르면서 벽화의 퇴색이나 훼손의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들 모사도는 향후 고구려 무덤벽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모사도와 실물 벽화와의 비교를 통해 오염과 떨어짐, 탈색 등에 의해 지워진 도상(圖像)을 복원할 수 있으며, 나아가 나날이 악화되어가는 고구려 무덤벽화의 보존과학적 처리방안 마련에도 유용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 국립중앙박물관(최장열) 제공]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1)
국보 지정(등록일) : 1962.12.2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수량/면적 : 1구
건립연대/시대 : 삼국시대
소유자(소유단체) :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 국립중앙박물관
국가유산 설명
의자 위에 앉아 오른발을 왼쪽다리 위에 올려 놓고, 오른쪽 팔꿈치를 무릎 위에 올린 채 손가락을 뺨에 댄 모습의 보살상으로 높이는 80㎝이다. 1912년에 일본인이 입수하여 조선총독부에 기증했던 것을 1916년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관(冠)을 쓰고 있으며, 여기에서 나온 2가닥의 장식은 좌우로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네모꼴에 가까운 얼굴은 풍만한 느낌을 주며, 광대뼈를 나오게 하고 입가를 들어가게 하여 미소 띤 얼굴을 만들었다. 상체는 당당하면서도 곧고 늘씬한 모습이며, 하체에서는 우아한 곡선미를 느낄 수 있다. 늘씬한 팔이나 체구에 비해서 손이나 발은 상대적으로 큼직한 편이다. 전체적으로 탄력이 있고 매끄러우며 부드럽고 율동적이어서 보살상의 우아한 모습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목 뒤로 돌아 양 어깨를 감싼 천의(天衣)는 새의 깃털처럼 치켜 올라갔다가 다시 가슴쪽으로 흘려내려 왼쪽 다리에서 교차한 다음, 양 무릎을 지나 두 팔을 감아 내렸다. 하체에 입은 치마는 다소 두툼해 보이는데 U자형 주름이 능숙하게 새겨져 있다. 왼발을 올려 놓은 타원형의 대좌(臺座)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머리 뒷부분에 흔적만 있을 뿐 광배(光背)는 없어진 상태이다.
1963년 방사선 투과법으로 촬영한 결과 내부의 결함이나 고친 흔적이 없으며, 재질이나 만든 기법이 매우 특이함이 밝혀졌다.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자세, 아름다운 옷주름, 명상에 잠긴 듯한 오묘한 얼굴 등으로 보아 한국적 보살상을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6세기 중엽이나 그 직후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2)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1962-2))
수량/면적 : 1구
국보 지정(등록)일 : 1962.12.20.
소 재 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삼국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국립중앙박물관
국가유산 설명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1)과 함께 국내에서는 가장 큰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높이가 93.5㎝이다. 1920년대에 경주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하나 근거가 없으며, 머리에 3면이 둥근 산 모양의 관(冠)을 쓰고 있어서 ‘삼산반가사유상(三山半跏思惟像)’으로도 불린다.
얼굴은 거의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풍만하고 눈두덩과 입가에서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에는 옷을 걸치지 않았고, 목에 2줄의 목걸이가 있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왼발은 내려서 작은 연꽃무늬 대좌(臺座)를 밟고 있고, 오른발은 왼쪽 무릎 위에 얹어 놓았다. 왼손으로는 오른 발목을 잡고 오른손은 팔꿈치를 무릎에 얹었으며, 손가락으로 턱을 살며시 괴고 있다. 하반신을 덮은 치맛자락은 매우 얇게 표현하여 신체 굴곡이 잘 드러나며, 연꽃무늬 대좌를 덮은 옷자락은 깊고 자연스럽게 조각되었다. 왼쪽으로 옥을 꿴 치마의 띠가 내려가고 있으며, 머리 뒷부분에는 긴 촉이 달려 있어 광배(光背)를 꽂았음을 알 수 있다.
단순하면서도 균형잡힌 신체 표현과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분명하게 조각된 눈·코·입의 표현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조각품으로서의 완벽한 주조 기술을 보여준다. 잔잔한 미소에서 느껴지는 반가상의 자비로움은 우수한 종교 조각으로서의 숭고미를 더해준다. 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보다 연대가 내려와 삼국시대 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경천사 10층 석탑(敬天寺十層石塔)
시대 고려 시대
관련국가 고려
1348년(충목왕 4)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탑.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광덕면(光德面) 부소산(扶蘇山) 경천사지에 세워져 있었다. 1909년경 일본의 궁내 대신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顯]가 해체하여 불법으로 일본으로 반출하였다가 반환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심하게 파손되었다. 반환 후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되다가 1959~1960년에 재건되어 경복궁 뜰에 전시되었고, 1962년에는 국보로 지정되었다. 1995년 경복궁 복원 계획의 일환으로 다시 해체된 후 복원되었으며, 2005년 용산에 국립중앙박물관을 개관하면서 이곳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1층에는 탑을 조성한 기록이 새겨져 있어 건립 연대와 조성 배경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이 탑이 1348년에 강융(姜融)과 원사(元使) 고용봉(高龍鳳) 등의 시주로 만들어졌으며, 원(元) 황제와 황실의 장수와 복을 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고용봉은 고용보(高龍普)라고도 불렸던 고려 출신의 원 환관이며, 강융 역시 부원(附元)적 성격을 띤 인물로 당대 원에서 권세를 누리던 기황후(奇皇后)의 지지 세력에 속하였다. 따라서 이 탑은 부원적 인물들이 원 황제와 황실의 장수와 번영을 기원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는 목적에서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3층으로 되어 있는 기단부(基壇部)는 아(亞) 자 형태이다. 탑신부(塔身部)는 10층으로 이루어졌는데 1~3층은 기단부처럼 아 자 형태이며, 4층 이상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각 면에는 부처와 보살 등의 문양을 빈틈없이 조각하였으며, 지붕은 기왓골이 분명한 화려한 목조 건축물의 모습이다.
의의
수법이나 양식 면에서 볼 때 고려를 대표하는 매우 독특하고 기교가 화려한 불탑으로, 원각사지 십층 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의 선구적 사례이다.]
[백자 달항아리는 18세기 이후 만들어진 둥근 형태의 큰 항아리를 이른다. 배가 둥그런 달항아리는 대개 높이가 40㎝ 이상으로, 전체를 물레질을 하여 성형하기 어려워 위아래를 따로 만든 후 이를 붙여서 완성한다. 따라서 몸체 중앙 부분에 접합한 흔적이 있으며, 완전한 원형이 아니고 자연스럽고 둥그스럼하다. 따사로운 순백의 색깔과 열사흘이나 열이레 달 같은 둥그런 몸에서 스며 나오는 옛사람들의 너그럽고 여유로운 마음이 느껴지는 달항아리는 옛 사람들의 심성과 생활 자세를 잘 보여준다.]
[금관총 출토 큰칼서 ‘이사지왕’명문 확인
최영창 기자
문화일보 기사 입력 2013-07-04 14:03
1921년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環頭大刀)에서 ‘이사지왕(爾斯智王·사진)’이라는 명문이 확인됐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은 3일 “금관총 출토 고리자루큰칼 세 자루 가운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의 칼집 하단 금속부 앞·뒷면에 ‘이사지왕’과 ‘십(十), 칼집 상단에 ‘이(爾)’가 선각(線刻)돼 있는 것을 확인했다”며 “신라 무덤에서 출토된 최초의 왕명(王名)이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또 다른 금관총 출토 고리자루큰칼에서도 ‘이(爾)’, ‘팔(八)’, ‘십(十)’이라는 명문이 확인됐다. 명문의 ‘이(爾)’자는 모두 약자인 ‘이()’자로 표기돼 있다.
금관총은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초까지 신라의 최고지배자를 마립간(麻立干)이라 부른 시기(내물왕∼지증왕)에 조성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가운데 규모가 중간급(봉분 지름 39.3m)에 속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군주는 503년(지증왕 4)에 비로소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는데, 5세기 중후반으로 편년되는 금관총 출토 대도에서 신라의 왕 이름이 등장한 것이다.
‘이사지왕’이라는 왕명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및 신라 금석문에서 발견되지 않아 현재로는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마립간 칭호를 썼던 내물·실성·눌지·자비·소지왕 중 한 명의 별칭으로 보거나 ‘신라에서 6세기 전반까지 고위 귀족도 왕으로 불렸다’는 일부 학계의 연구에 따라 당시 왕으로 불린 고위 귀족 중 한 사람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금관총의 주인공(피장자)과 ‘이사지왕’의 관계도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무덤의 주인공을 명문에 나오는 ‘이사지왕’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인 가운데, 그동안 피장자를 여성으로 추정해온 기존 학설에 따라 ‘이사지왕’을 금관총에 묻힌 여성의 남편 또는 가까운 친척으로 보는 주장도 제기됐기 때문이다.]
15:00~15:13 이촌역으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15:13~15:20 이촌역에서 삼각지역으로 가는 4호선 전철 승차 대기
15:20~16:00 4호선을 타고 이촌역에서 삼각지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40분 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