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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머나먼정글 원문보기 글쓴이: 젊은미소
사살 된 공비 시체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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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늦은 가을 저녁.
일과를 끝내고 신도종 서장이하 간부들이 바둑을 두고 있던
전북 부안 경찰서에 부안군 산내면 지서로부터 중계리에 공비가
출현했다는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6·25전쟁 이전 부안 관내에는 자생한 소규모 공비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남로당 부안 군당으로서 총인원은 9명 이었다.
나중에 지리산 일대에서 기세를 올리던 공비들의 규모에 비하면
작은 규모였지만 민폐가 극심했다.
남로당이 불법화되고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자 입산(入山)한
공비들로서 이들은 다른 남로당 군당들에 비하면 골수분자들로
상당히 투쟁적이었다.
[전쟁 전 입산자들은 구빨치로 분류된다.]
여순 사건 뒤에 체포된 14연대 반란병들.
이들은 대거 지리산으로 도주해서 신빨치의
주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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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변산의 기상봉 아래 있는 천연암 근처에 주 아지트를
두고 부근 마을, 특히 산내면 중계리를 ‘민주 부락’[ 이 당시
민주란 말은 공산주의자들이 전문으로 쓰던 용어였다.- 나중에
남한 군경들에게 통비 부락[通匪 部落]으로 불리게 된다.]으로
장악해 놓고 열흘에 한번 정도 약탈을 자행했다.
거리 관계 때문인지 이들은 특히 산내면 일대에 심한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부안 군당의 공비들은 외팔이 부대로 통하고 있었다.
군당의 책임자는 장순언의 장남인 장모[張某]였다.
그는 고향인 부안군 산내면 진백리에서 진백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진백 수산 강습소를 나와 남로당 부안 군당에
입당, 산에 들어갔다.
말단 대원이던 시절 그는 경찰 토벌대와 총격전을
벌이다 머리에 부상을 입고 왼쪽 팔은 절단이 되었다.
그해 5월 경 그가 군당 책임자가 되면서 부안 군당을
외팔이 부대라 칭하게 되었다.
국민 학교 시절 그이 생활 기록부에는‘두뇌가 명석하고 비교적
활발함' 이라 적혀 있었다.
공비 토벌은 각 경찰서 경비계장의 업무였다.
공비 출현의 보고가 접수되었는데도 토벌작전에 경험이 없는
경비계장은 우왕좌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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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은 출현 공비의 토벌 작전과 지휘를 경험자인 경무계장
김두운 경감에게 요청했다.
그렇지 않아도 단조로운 경무계장의 업무에 지루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김두운 경감은 이 지시를 반갑게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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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경찰이 주요 도로에 설치한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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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먼저 경비계장이 가져온 5만분지 1의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공비들의 기동선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으므로 무턱대고
출동할 수는 없었다.
일단 주 아지트가 있다는 천연함에서부터 지도상에 붉은 선을
긋고 보니까 다음의 예상 출몰 지역은 상여봉 밑 마을이나
상서면 개암사 아랫마을일거라는 것이 손금 보듯 빤히
들여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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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그리스 펜으로 공비 근거지와 출현 지점을 직선을 그어
연결하고 이 직선 주변을 분석해서 공비가 필히 통과 할 목을
찾아내는 것이 김 두운 씨의 목잡기 비법의 첫 단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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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군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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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경비계장에게 정예 10명만 선발하라고 부탁했다.
쫓는 쪽의 입장에선 적의 2,3배 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지만 이 당시의 공비, 소위 구빨치 시대에는
어느 지역이나 무장을 절반도 못해 있던 형편이었다.
공비들은 두 부락을 그냥 지나쳤으므로 다음 부락 어디에선가는
약탈을 자행할 것이었다.
늦더라도 다음 출몰 시까지 기다려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어디에 나타나든 나타나 주기만 한다면 그때 출발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공비들은 맨몸으로 하산할 때는 시간당 약 6킬로미터를
보행하고 약탈을 마친 뒤 짐을 지고 돌아 갈 때는
3 킬로미터도 보행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지트로 돌아가는 예상 기동선만 정확히 판단한다면
시간은 넉넉했다.
적은 현재 아지트에서 약 8 킬로미터 이상 벗어나 있을 터였다.
시간은 저녁 7 시가 이미 지나 있었다.
예상했던 상여봉 아랫마을을 지나쳤거나 현재 약탈이
진행되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신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개암사 아랫 부락이리라.
바드재를 넘어 보안면 쪽으로 갈 확률은 없었다.
지도상 그쪽은 산이 얕고 민가가 많았다.
나는 저들의 목적지가 개암사 아랫마을일거라고 단정하고
대원들에게 식사를 하도록 했다.
시간은 충분해 보였다.
우리도 서장실에서 식사를 마쳤다.
그 때였다.
다시 비상 전화통이 비명을 질렀다.
경비계장이 화닥닥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상서면 지서에서 걸려온 것이었다.
10리 떨어진 개암사 쪽에서 계속 총성이
들린다는 보고였다.
출현 지역은 적중했지만 저들의 걸음은 생각보다 빨랐다.
“비상! 비상!”
경비계장은 고함을 지르며 부리나케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사찰계장도 따라가 보겠다고 나섰다.
우리는 즉시 출동했다.
적이 아지트로 돌아갈 기동선은 너무도 빤했다.
저들이 지나쳐 왔던 길을 되밟아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므로
새재를 지나 뱀사골을 거쳐 천연함 아지트에 이르는
기동선을 따라 갈 것이었다.
밤 8시 읍내를 벗어나자 한밤중을 방불케 했다.
도로에서 멀찍이 물러나 앉은 마을에서 듬성듬성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정겨웠다.
차는 밤길을 가르며 출렁출렁 마구 달렸다.
나는 스리쿼터 적재함에 탔다.
조수석에는 행선지를 일러준 사찰주임만 탔을 뿐
경비계장도 적재함에 대원들과 함께 타도록 지시했다.
이윽고 차는 길가의 작은 마을 앞을 지나쳐 멈추었다.
이 마을 서쪽 1킬로 지점에 공비 통과의 예상 목인
새재가 있었다.
대원이 가리키는 새재를 보며 나는 후레쉬의 불빛으로
지도를 비춰보았다.
예상이 적중한다면 틀림없는 위치였다
나는 전원을 하차시키고 차를 멀리 대피시켰다.
멀리서 대기하고 있다가 총소리가 나면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영 불쾌했다.
위치로 보아 마을 앞쪽은 불리할 상 싶었다.
적들도 마을을 가로지르지는 않을 터인데
우회 길을 우리의 매복 지점 훨씬 전에서
돌아 버린다면 허사였다.
나는 대원을 이끌고 비탈 밭을 멀리 돌아
마을 끝으로 갔다.
누런 반달이 산위에서 떠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마른 고춧대가 서있는 비탈 밭머리에서 산으로 오르는
길이 가르마처럼 나있었다.
그 길은 밭둑길로 이어져 희미하게 마을로 뻗어있었다.
나는 그 곳 밭머리를 잠복지접으로 결정하고 10여 명의 대원들을
일일이 위치를 지적해서 순서대로 배치했다.
마른 고춧대가 무성하게 서있어서 완벽한 은폐가
가능한 좋은 잠복지점이었다.
거기다 둑길 아래의 위치는 밭뙈기들은 아래로 비탈이
져 있어서 밭고랑에 엎드려 바라보니 둑길은 그대로 달빛아래
다 노출이 돼있었다.
또한 귀를 땅에 대고 기울여 접근해오는 적의 부대를
청음[廳音]으로 감시할 필요도 없었다.
달빛 아래 멀리 마을까지도 희미한 윤곽이 드러나 보였다.
나는 절대 정숙을 명하고 종대(縱隊) 잠복 병력의 중앙인
5번과 6번의 중간에 자리 잡고 엎드렸다.
그 자세로 몇 십 분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