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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우리 인간이 살길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접촉입니다!
“온몸에 나병이 걸린”이라는 표현을 읽을 때마다, 왠지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오랜 세월 익숙하게 사용되어온 병의 명칭들이 환자들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나 차별적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기에, 최근 대대적인 변경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과거에 몽고증이라고 했었는데, 특정 인종을 비하한다는 지적에 WHO는 병의 발견자 이름을 따 다운증후군으로 바꾸었습니다. 간질이라는 질환은 어감부터가 좋지 않고, 사회적 낙인을 찍는 표현이기에 뇌전증으로 변경했습니다. 정신분열증은 마음의 조화가 깨어져 온다는 의미로 조현병으로 바꾸었습니다. 치매 역시 다분히 부정적 이미지가 크므로 인지저하증으로 바꾸기 위해 논의 중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 역시 발병의 원인이 되는 균을 찾아낸 사람의 이름을 따 한센병이 공식 용어가 된 지 오래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성경 말씀 안에 차별적 언어, 낙인을 찍는 언어가 남아있지는 않은지 눈에 불을 켜고 살펴볼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환자의 증세는 꽤 심각했습니다. 균이 온몸으로 퍼졌습니다. 마땅한 치료제도 없던 시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깊어져 가는 상처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일, 조금씩 사라져가고 떨어져 나가는 자신의 신체를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는 일 뿐이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가 즉시 하는 일은, 혹시나 밤사이에 기적이 일어나서 내 몸이 나은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감에 자신의 피부를 만져 보았습니다. 즉시 역시나 하며 좌절하며 들짐승처럼 울부짖었습니다.
은혜롭게도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그는 치유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계신 고을로 찾아갔습니다.
율법 규정상 그는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뵙자마자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청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율법 규정을 어기십니다. 그와 접촉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환자의 절박한 처지, 경탄할만한 적극성, 예수님을 향한 굳센 믿음, 그 결과는 즉각적인 치유와 구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온 몸이 종기로 뒤덮인 한 가련한 인간과 측은지심으로 가득 찬 하느님이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환자가 지니고 있었던 수많은 죄와 상처, 종기, 고름은 뜨거운 하느님 사랑의 불꽃에 모두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그 대신 태초의 보송보송한 애기 피부로 아름답게 재생되었습니다.
결국 죄인인 우리, 결핍과 상처투성이뿐인 우리 인간이 살길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접촉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은총을 얻기 위해 조건을 거는 일은 괜찮을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해주시는 내용입니다. 나병환자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병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에게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십니다. 마치 율법을 준수하지 못했기에 나병에 걸린 것이라는 느낌까지 듭니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치유는 회복입니다. 그런데 치유해주실 수 있는 분은 만드신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장난 자동차를 원숭이가 고칠 수는 없습니다. 만든 인간만이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치는 인간은 앞으로 그 자동차가 망가지지 않게 만들어진 법칙대로 사용되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병원에 가서 피부병약을 짓고 의사가 술은 절대 마시면 안 된다고 하는데 계속 마시겠다고 하면 약을 지어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더 해로워질 수 있습니다. 치유와 순종은 이 세상에서도 하나로 엮여있습니다. 순종하기 싫어하는 이유는 치유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치유와 같은 은총을 청하면서 주님의 뜻에 더 순종하겠다고 약속을 하면 치유가 더 빨리 일어나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주님께서 은총을 주시는데 그러한 조건을 다는 게 굳이 필요할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치유를 통해 순종을 배우게 하심으로 순종을 배울 자세가 되었다면 더 빠른 치유를 주실 것은 같습니다.
이냐시오 로욜라는 스페인의 귀족이자 군인이었으며, 1521년 전투 중 대포알에 의해 다리가 산산조각 나는 중상을 입으면서 그의 인생이 크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붙자, 이냐시오는 다리를 다시 부러뜨리고 교정하는 극도로 고통스러운 절차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육체적 자유를 포기하고 의사에게 순종해야 하는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긴 회복 기간에, 이냐시오는 오락거리를 찾았으나 집안에는 종교 서적만 남아있었습니다. 특히 성인의 삶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그는 점차 깊은 영적 감동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강제된 고요함과 신체적 회복의 시간은 그에게 영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육체가 의료 권위에 대한 순종을 통해 치유되었듯이, 그의 영혼도 신적인 영감에 순종함으로써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세속적 야망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를 필요성을 점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육체적·영적 치유의 이중 과정은 이냐시오에게 겸손과 권위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이러한 변혁은 그를 예수회 창설과 영신 수련 집필로 이끄는 깊은 영적 여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냐시오의 경험은 고통 속에서도 순종이 어떻게 깊은 치유와 새로워진 삶의 목적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성 프란치스코는 1202년, 프란치스코는 콜레스트라다 전투에 참전했으나 포로로 잡혀 약 1년 동안 감옥에 갇혔습니다. 풀려난 후, 그는 아시시로 돌아왔지만 심각한 쇠약과 병에 시달렸습니다. 이 회복 과정에서 프란치스코는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영적 갈등도 겪었고, 자신의 과거 세속적 삶의 공허함을 깊이 성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전기 작가인 토마스 첼라노의 『성 프란치스코의 첫 번째 전기』에 따르면, 프란치스코는 이 시기에 하느님께 열렬히 기도하며, 자신을 치유해 주시고 삶의 목적을 명확히 해 주신다면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자신의 자유, 야망, 안락함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고난이나 조롱을 받아야 한다 해도 이를 기꺼이 감내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치유와 율법의 준수는 하나입니다. 요한 9,1-7을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태생 소경을 치유해주시는데, 그가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어야만 치유가 완성되게 해 주셨습니다. 치유보다 더 큰 목적은 순종을 가르치시는 일입니다.
2열왕 5,1-14에서 나아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사는 순종을 강요합니다.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씻게 시키는 것입니다. 처음엔 거부하지만, 그 말에 순종하게 될 때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히즈키야의 치유(2열왕기 20:1-11)도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죽어야 할 운명인 히즈키야가 눈물로 청원하자 그의 생을 15년 연장해주셨습니다.
치유의 과정은 곧 순종의 과정입니다. 만약 치유의 은총이 있고 난 뒤에도 순종보다는 더 큰 욕심을 내게 된다면 치유가 은총이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치유를 원하기 전에 내가 무엇에 순종해야 할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먼저 드립시다. 그러면 분명 더 빠르게 치유해 주시고 더 큰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5,12-16: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의 지엄한 권능과 나병 환자의 굳은 믿음이 짝을 이루고 있다. 그 환자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다. 자기 죄를 부끄러워하는 마음과 겸손의 표시이다. 그는 자기 상처를 내보이며 고쳐달라고 간청한다. 이 간청 속에 이미 믿음이 충만하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12절) 주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불결함 때문에 자신이 없었다.
나병 환자 치유는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의 일부로서, 그분은 신성으로는 능히 병을 다스리고 당신의 인성으로는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뻗으심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주님께서는 환자의 간청을 받아 주시고 당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음을 감추지 않으신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13절) 또한 당신의 전능한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신다. 그러자 곧 나병이 사라지고 환자의 괴로움도 끝났다.
나병 환자는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깨끗해진 데 대한 예물을 바치라는 분부를 듣는다. 사제에게 몸을 보이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병이 나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모세의 법규에 따라 예물을 바치게 하심으로써, 주님은 또한 당신이 율법을 폐지하지 않고 완성하러 오셨음을 보여주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시면서도 언제나 기도하시는 분이셨다. 그분이 그렇게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열심히 기도하며 살아가야 하겠는가!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멸시하고 또 쓰라린 수치로 가득 차 있을 때도, 예수께서는 한센병 환자를 고쳐주듯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해 주시고자 언제나 기다리고 계신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복음의 나병 환자와 같이 우리는 주님 앞에 나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는 손댈 수 없는 자에게까지 손을 대시고,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시며,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에게 향하고 있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알아야 하며, 나 자신이 그러한 사랑과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도 또한 다른 이를 그러한 사랑과 용서로써 대하여야 함을 나병 환자의 치유에서 알아야 할 것이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자신의 모습, 많은 경우 죄로 인해 더럽혀진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느님 앞에 진실하게 인정하고 그분의 용서를 치유를 청하며, 용서받은 우리 자신이 이제 우리의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줄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 자녀의 삶을 다시 한번 다짐하면서, 언제나 용기를 갖고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며 주님께 의탁하여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사실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우울함에 왜 그런지 모르겠다면서 자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신과 의사 선생님께서 자신의 책에서 절대로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사람의 부류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그 부류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 번째는 날라리입니다. 날라리는 즐겁게 사는 것에만 집중하기에 우울증을 모릅니다. 그래서 일도 안 하고, 공부도 안 합니다.
두 번째는 뺀질이입니다. 뺀질이는 자기 사랑이 지독해서 남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만 즐겁고, 자기 몸만 편하게 됩니다. 당연히 일도 안 하고, 모든 의무와 책임을 거부합니다. 우울증을 앓을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은 띨띨이입니다. 일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한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사는 게 늘 즐겁습니다. 우울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셋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사회생활이 괜찮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행복하지만, 주변은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울증 걸린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이 정신과 의사는 말씀합니다. 저 역시 때로는 우울합니다. 아마 저도 조금 괜찮은 사람인가 봅니다.
육체적인 병, 정신적인 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병이 과연 100% 자기 탓일까요? 아닙니다. 자기 탓이 전혀 없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때로는 열심히 사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스스로 자책하고,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안의 좋은 점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찾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병’은 무조건 자기 탓이었습니다. 자기 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고칠 수 없는 병의 경우는 아주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은 어떠했을까요? 죄책감도 있었을 테고, 죄인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죄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두가 육체적 정신적 질병과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자책하고, 좌절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희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깨끗해지길 원하신다는 것, 따라서 주님께 나아가고 함께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실패는 좀 더 현명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일 뿐이다(헬리포드).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1요한 5,5)
거칠고
척박한 세상을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영혼의 숲으로
건너가는 방법은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따라
그분께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더듬어가는 길뿐이라네.
세상을 이기는
은밀한 비법이
그 여정 안에 숨겨져 있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나병은 사람들로 하여금
손을 대면 안 된다는 인식이 강한 질병이었고,
그런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죄인 취급을 당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 친히 당신의 손을 대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다른 이에게 사랑의 손길로 다가가는 행위는
그 자체로 생명을 줍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손이 가고,
그 손이 생명력을 갖게 해 줍니다.
‘엄마 손’이 약손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거나
효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애정과 사랑을 듬뿍 담은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에
생명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죽었던 것이 살아나고,
아팠던 것이 깨끗하게 낫습니다.
오늘 저는 내 손이
다른 사람을 죽이고 파괴하는 손이 아니라
‘엄마 손’처럼 다른 사람을 살리는
약손일 될 수 있도록 살아야 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외딴 곳에서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치유의 힘은 거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 13)
차고도 맑은
겨울 바람이
다시
아침을 엽니다.
하늘 나라의
깨끗한 소식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의 병고는
깨끗하게 됩니다.
고치지 못할 것이
없으신 하느님의
치유입니다.
하느님의 치유로
아픈 우리는
깨끗한 기쁨을
다시 맛봅니다.
미처 알아내지
못한 아픔까지
맡겨드립니다.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는
깨끗해지는
기쁨입니다.
깨끗한
복음의 길이
고통에서
빠져나오는
구원의
길이 됩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거는 것이
새로워진
삶입니다.
내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삶의 참맛은
지금부터입니다.
두려움을 빼고
절망을 빼면
다시
깨끗해지는
우리의
생활입니다.
우리가 없다면
우리의 생활도
없습니다.
우리의 생활을
다시 깨끗이
하시는
하느님과 함께
이 춥고도
맑은 오늘을
다시 기쁘게
기도하며
다시 기쁘게
발걸음을
옮깁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자신을
치유하십니다.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깨끗이
치유하는
깨끗한
치유의 날
되십시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하여라."(루카5,13ㄴ)
'마음의 나병!'
오늘 복음(루카5,12-16)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5,12ㄷ) 그러자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며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신 것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에 대한 예수님의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준 사건'이며, 동시에 '하느님께서는 벌주시는 분이 아니라 고치고 살리는 분이심을 알려준 사건'입니다.
'나병'은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병'이었습니다. '몸의 지체가 문드러지는 문둥병'이었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전염성이 강한 병이었고, 불결한 병이었기 때문에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을 살아야만 했던 '소외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그를 고쳐주십니다.
육신의 나병이 있듯이, '마음의 나병'도 있습니다.
마음의 나병은 '마음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소외된 병'입니다.
'내 마음 안에 성령의 열매들(사랑.기쁨.평화.인내.호의.선의.성실.온유.절제)이 아닌 육의 열매들(교만.탐욕.인색.음욕.분노.질투.게으름)로 채워진 병'입니다.
'죄중에 있는 상태', 그래서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의 병'이 곧 '마음의 나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1요한5,5)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려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이기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마음의 나병을 몰아냅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성령과 물과 피>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5,5-13
사랑하는 여러분,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6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7 그래서 증언하는 것이 셋입니다.
8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9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증언은 더욱 중대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느님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 관하여 친히 증언해 주셨습니다.
10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이 증언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에 관하여 하신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1 그 증언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12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13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2-16
12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1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14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15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1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