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적인 조직의 기준
1. 공동생활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가?
공동생활은 위험한 점이 더 많습니다. 남편보다는 아내에게 더 힘든 일입니다.
공동생활을 주장하는 것은 성경적인 이유가 아닙니다. 지도자의 성품과 결함때문에 그것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동생활이 권위적인 그리스도인 아래에서 시행된다면 얼마나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성도들을 위협할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는 첫째는 성경이고, 둘째는 하나님입니다.
지도자가 성경적인 근거를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겁을 주고 있습니까? 게다가 모든 재정을 한 개인이나 소그룹이 관리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지도자는 지금 무엇보다도 강력한 도구를 손에 쥐고 있는 것입니다. 공동생활에 권위주의를 덧입히려는 생각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당신이 속한 조직이 누구로부터 나온 일을 하느냐가 문제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까? 어떤 사람의 정신적 욕구로부터 나온 일입니까?
어떤 운동의 분위기와 정신을 결정짓는 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틀릴 확률은 50%입니다.
공동생활은 아주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잠재적인 해악을 끼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그 공동생활이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진다면 말입니다.
2. 여성을 어떻게 대우하는가?
여성들은 권위주의의 주된 피해자입니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권위주의적 운동 가운데 훨씬 더 잘 지냅니다.
'머리 덮개'를 쓰는 문제가 그 조직 안에서 얼마나 강조되는가를 살펴보십시오. 이것은 권위주의와 관련된 문제이며 권위 아래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3. 지도자들은 권력을 어느 정도 행사하는가?
'누구에게 얼마나 순복해야 하는가' 그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두신 것일까요?
지도자라는 이름의 어떤 '사람'이 우리 위에 누군가를 둔 것일까요?
성경의 두가지 진술 방법
1) 대놓고 분명하게 진술하는 방법 (신약의 서신서)
2) 묘사하거나 예를 드는 방법(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의 묘사와 예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사유 재산의 소유에 대한 벌이 아닙니다. 그들의 죄는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지도자'와 '어른'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통제력이나 조종 비슷한 것이라도 행사하는 일에 대한 묘사나 실례를 신약에서 단 한군데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지도자와 장로의 권위는 아주 좁고 제한적이었습니다.
분열의 같은 패턴이 반복됩니까? 1년 동안 그리스도인 리더였다가 그 다음 해에는 사탄에 속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이 지표는 이 단체가 매우 위험한 상태임을 나타내줍니다.
4. 어려운 상황 가운데 지도자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지도자의 내면의 영적상태가 얼마나 강건한지 알 수 있는 좋은 척도가 됩니다. 사역이 어려울 때 우리는 지도자의 진면목을 알 수 있습니다. 비난과 방어는 그의 내면이 아주 불안정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사역에도 확신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대부분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통제력을 아주 많이 행사할 수 있는 조직을 하나 세우게 됩니다.
떠난 사람들 가운데 그 단체를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방문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 지 살펴보십시오.
5.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통제력을 행사하는가?
결혼 상대자를 골라 준다거나 개인적인 삶에 깊이 관여한다는 것은 그 단체가 매우 위험한 상태임을 나타내줍니다.
6. 배타성이나 유일성을 보이는가?
7. 지도자의 심리적 기질은 어떠한가?
모든 사람을 통제하려는 기질을 가진 사람인가? 이런 사람은 심리적 결함을 가진 사람이며, 권위주의적인 사람입니다.
8. 단체에 대한 순응을 요구하는가?
집단의 압력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통제하고 조종하는데 의도적으로 그리고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는가?
지도자들에게 책 <동물농장>을 권유해보라.
-'상처받은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편지'(진 에드워드) 중에서
한 두가지만 나타나도 그 단체에서 웃으며 걸어나오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런데 제가 속했던 단체는 여덟가지 다 해당됩니다. 복수 리더십도 의미가 없습니다. 어차피 지도자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하니까요.
이 책을 읽으며 참 마음이 씁쓸하네요.
제가 있었던 단체가 가장 최악의 단체였다는 사실을 이렇게 간단하게 알 수 있다는 것에 한번 씁쓸하고,
문제의 핵심은 지도자의 '마음의 동기'임을 알게 되면서 두번 쓸쓸합니다.
최악의 단체를 만든 그 사람은 절대로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마음의 동기를 너무 늦게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놀랍게도 반복됩니다.
인간의 본성은 무너지기 어려운 벽입니다.
조직의 그들이 그렇게 강조하던 성경과 하나님은 그들의 의도를 숨길 수 있는 좋은 도구였습니다.
무지하고 마음이 열린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만만한 먹잇감이었을까요?
우리는 밝게 자세히 알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직 이런 조직에서 상처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댓글 세례 요한은 어찌하여 만인이 들어야 할 회개의 메시지를 예루살렘 성의 번화가에서 외치지 아니하고 사람이 살지않는 땅, 물이 없고 건조한 땅, 광야에서 외쳤던가? 사람들더러 들으라고 외치는 것인가, 아니면 듣지 말라고 외치는 것인가?
"광야에서"를 모르고는"회개"를 알 수 없고 "회개"가 없는 "광야에서" 역시 있을 수 없다. 세례요한이 외친 "회개"의 말씀은 구체적인 현실인 "광야에서"의 삶이 있음으로 온전해지고 진실해진다
오늘날 우리들의 회개 역시 관념과 머리 속에서만의 회개로는 의미가 없고,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터전이 광야로 바뀌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조직이 된 종교에서 상처를 받고 나왔다고 해도 다시 어딘가 조직에 또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이 많다. 도시의 아파트에서 관념으로만 회개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오지 않는다면 그들이 했다는 구원얻는 회개란 의미가 없으며 거짓말이다.
자신의 삶의 자리는 여전히 예루살렘 도성이면서, 머리 속으로 회개하고 마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친다고 회개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회개는 머리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두 발로 하는 것이다. 두 발을 움직여서 우리 삶의 터전을 바꾸는 것, 예루살렘 도성에서 광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사40:3)"
어디서 끊어 읽느냐에 따라 두가지 번역이 가능하다. 두번째 단어에서 끊어 읽으면, 그 뜻은 "한 소리가 외친다. "광야에서 야훼의 길을 예비하라"고"가 된다. 개역성서 사40:3도 이렇게 이해하였다. 그러나 세번째 단어에서 쉬었다가 읽으면, "한 소리가 광야에서 외친다. "야훼의 길을 예비하라"고"가 된다.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이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하여 광야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는 바, 회개를 외치는 자나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나 모두 광야로 나간 것이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 40장 3절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가 광야에서, 사막에서, 준비할 것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광야로 나아가야 할 대상은 세례요한만이 아니라 유대인들 모두이며 오늘날 우리들 모두인 셈이다.
결혼상대를 골라주거나ㅎㅎ~개인의 삶에 깊이 관여하여 통제 하려는 속셈~통일교나 대학 캠퍼스 선교회 사역한다는 사람들이 많이 써왔죠~~
공감가는 글 입니다~~~
심지어 자기말에 순종하지 않으면 오늘까지는 구원받은 형제라 했다가 다음날엔 불신자라고 하기도 한답니다.
구원도 뗐다 붙였다하는 권위적인 종교 조직이 거의 대부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