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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7월30일 토요일 [(녹)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수도회]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예레 26,11-16.24
† 복음 마태 14,1-12
◈ 오늘의 묵상
죽음의 순간에도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죽는 그 순간까지, 인간의 권력이 얼마나 추악할 수
있으며, 인간의 시기가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권력의 망토를 둘러쓴 이들이 자신의 야망이나 정략적 계산, 그리고
비열함으로 죄 없는 이들이나 진정한 영웅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것을 역사 안에서 수없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를 차지한 일에 대해
요한이 여러 차례 그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고 해서 그를 잡아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그 헤로디아의 딸이 자기 생일에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준 대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게 하고 그 머리를 쟁반에 담아
그 소녀와 그 어미에게 가져다줍니다.
요한을 감옥에 가둔 것이나 그의 목을 베어 버린 사건과 그 배경, 그리고
이 모든 모습을 곁에서 보고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참으로 어이가
없을뿐더러 인간의 비열한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 모든 것으로 예수님께서도 얼마나 잔혹하게 처형되실
것인지를 보여 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순교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어지지만, 결국은 예수님의
부활로 극복되었습니다. 더불어 우리 그리스도인은 또 다른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이겨 내고 날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해야 할 새로운
예언자들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구원
2016년 7월30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제1독서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이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6,11-16.24
복음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12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눈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내가 바라보는
나의 눈입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들이 응시하는 눈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하느님이 바라보시는 시선입니다. 이 중에서 어떤 눈이
가장 중요할까요?
나의 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자기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교만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게 되지요.
다른 사람들이 응시하는 눈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다른 사람의 시선만을 생각하다보니 늘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체면치례가 많아집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멋진 삶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속 빈 강정’과 똑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이 바라보시는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의 기준을 먼저 생각하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순간의 만족을
위한 겉치레를 따르지 않으며,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따라서
겸손한 마음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여러분들은 과연 어떤 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당연히 하느님이 바라보시는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실상은 나의 눈과 다른 사람들이 응시하는 눈길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나와 다른 사람들은 실제로 직접 보고 만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밝은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직접 볼 수는 없는
것처럼, 그보다 더 밝으신 주님이기에 보지 못할 뿐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때에는
마음이 불편해지고 힘들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는 어떤 눈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까? 그는 두 번째의 부류인 다른 사람의 시선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헤로데는 목 베어 죽인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나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으며, 엘리아의 영이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부활을 했으니 더 큰 힘을 지니게 되었고
그래서 기적을 베푸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찼던
헤로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세례자 요한이 다시 태어났다고
기쁘고 행복해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는 지금의 이 순간이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테고,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을 죽일 때만 해도 자신의 맹세를 깨뜨리는 것을
제일 무서워하고 겁냈습니다. 즉, 자신을 보고 있는 손님의 눈에 더
큰 신경 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는 주님의 눈을 더 무서워하고
겁냈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맞게 생활해 나갈 때,
주님께서는 더 큰 선물인 구원을 주십니다.
가장 축복받는 사람이 되려면 가장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C.쿨리지).
갑곶성지 성당의 신자들이 켜 놓은 초봉헌.
오프라 윈프리의 10가지 법칙(오프라 윈프리,
‘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 중에서)
1. 남들의 호감을 얻으려고 애쓰지 말라
2.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말라
3. 일과 삶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라
4. 험담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을 멀리 하라
5. 타인에게 항상 진실하라
6. 중독된 것이 있다면 지금 끊어라
7. 당신보다 나은 사람들로 주위를 채워라
8. 돈 때문에 일하지 마라
9. 당신의 권한을 남에게 넘겨주지 말라
10. 포기하지 말라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10가지 법칙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자신도
스스로 이런 법칙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지금 보다 더 나은 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갑곶성지에 사람들이 꽂아 놓은 기도봉헌.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삶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7월30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마태 14,1-12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마태 14,10)
"The Death of John the Baptist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삶
오늘 독서에서 사제와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예레미야를 두고 오히려 그 도성을 거슬러 예언했다고 하며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예레 26,11). 그러나 예레미야는
사판의 아들 아히캄의 도움으로, 백성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26,24).
한편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에게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듭 말합니다
(마태 14,3-4). 그러자 세례자 요한을 의인이라고 했던(마르 6,20)
헤로데는 자신의 사생활을 지적한 요한을 옥에 가두고 끝내 목을
베었습니다(마태 4,1-12).
헤로데 안티파스가 요한을 처형한 또 다른 이유는 정치적 불안감이었을
것입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는 요한 세례자가 세례운동의 인기를
악용하여 정치적 선동을 할까 염려해서 그를 체포하여 사해 동쪽에
있는 마케론테 요새에서 처형했습니다(유대고사, 18권 116-119항).
세례자 요한을 참수한 헤로데 안티파스는 요한이 소생하여 예수로
등장했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입니다. 자신이 죽인
요한처럼 예수님도 기적을 행하셨고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종말 설교를 하셨으며, 요한의 참수 후 예수님께서
드러나게 활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죽음은, 그 잘못을 따져 꾸짖는 ‘예언자들’을 없애려는 국가
권력의 횡포를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자신의 야욕을 채우려는 인간의 두려움과 불안이 낳는 비참한 결말을
보여줍니다. 또한 세례자의 죽음은 예수께서 당하실 구원의 죽음을
예시해 줍니다.
이러한 죽음은 이 세상에서 종종 일어나는 전형적인 모순이지요. 야망,
이해타산, 거짓과 뻔뻔스러움, 비열함, 그릇된 명예 등 차마 고백할 수
없는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권력과 명분을 앞세우고 무죄한 자들을
폭력으로 짓밟으며 자주 의인에게 부당한 죽음을 씌웁니다. 그뿐
아니라 불의 앞에서 비겁한 방관과 침묵을 한 민중들의 태도도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깊이 새겨할 할 점은 온갖 불의와 억압, 거짓과 폭력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주님의 음성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권고합니다. "여러분 마음의 귀를 기울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의 음성을
따르십시오. 그분의 계명을 여러분의 마음에 온전히 간직하시고,
그분의 권고를 정신을 다하여 이행하십시오.”(형제회 편지 7절)
사실 자신의 힘을 믿고 거기에 기대어 자기 뜻을 이루려 하는 이들은
늘 불안과 두려움에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의지하는
현세 재물과 인간적인 능력들은 늘 제한적이기에 그 자체로 불안정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렇게 살면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양심이
무뎌지게 되지요.
오늘도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내면의 소리에 충실히 응답하며,
주님께 의지하여 죄악을 폭로시키는 용기를 가져야겠습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 정의가 뒤따르지 않는 사랑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7월30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마태 14,1.7)
헤로데는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나쁜 지도자요 임금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실 다른 때 임금이었다면 그냥 별 이름도 없는 왕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별로 비난도 받을 일이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기술하고 있는 헤로데를 잘 뜯어보면
그는 우리네가 빠지기 쉬운 두 가지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네요.
한 가지는 소문에 너무 민감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과도한 헛맹세를 하는 등 말이 너무 앞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다른 사람의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나 가십성 이야기들에 현혹되어
떠도는 소문을 진실인 양 착각하지는 않겠지요?
소문은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고 진실일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다.
대부분 비스무리한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사실로 확인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런 소문에 현혹되면 사실과 진리에 근거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니
실수할 수밖에 없답니다.
말이 너무 앞서는 사람도 많은 실수를 하게 되고
결과를 책임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 사람은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헤로데를 못되고 나쁜 임금으로 평가하면서
우리도 소문과 헛맹세에 사로잡혀 산다면
웃기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런저런 소문이 들려오면
그냥 소문으로 흘려버리시고 말이 앞설 양이면
한번 더 생각하고 말을 좀 아껴보시기 바랍니다.
더운 날 영육간 건강하시길 빕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 주십시오."(마태 14, 8)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7월30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마태 14, 8)
사람보다 더 무서운 존재는 이 세상에는 없을 것입니다.
서로를 죽이는 악순환을 이제는 멈추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같은 의로운 이들이 이 땅에서
너무나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헤로데의 권력이 결코 우리를 속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의로움을 결코 죽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결코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그렇듯이 베이는 아픔까지도
끌어안고 가는 것이 구원의 여정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의인들의 피가 우리의 삶을 정화시켜 주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진실은 결코 폭력으로 해결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진실과 함께 걸어가는 성찰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서로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껴안는
것이 함께해야 할 삶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곧 헤로데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악마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의 진실된
모습이기를 저와 모든 이를 위해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민심은 천심
2016년 다해 7월30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이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독서: 예레미야서 26,11-16.24
옛날 중국 제나라의 위왕은 선정을 베풀어 많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가 하루는 지방의 관리들이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있는지를 알아본 후에 청렴한 관리들에게 상을 내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어느 한 지방의 관리를 궁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경에 대해 온통 나쁜 소문만 들리기에 은밀히 사람을 보내
알아보았더니 관리들은 청렴결백하였고 백성을 아끼고 인심이 후하고
배를 주리는 자가 없다 하니 경은 그 곳을 잘 다스린 것이 분명하오.
그런데도 내 주위의 대신들은 경을 악담하니 이는 경이 그들에게
아첨과 뇌물을 주지 않았다는 증거이니, 이 또한 바른 정치가의
모습이 아니겠소? 그래서 경의 수고를 치하하려 하오.”
왕은 그에게 포상으로 땅을 주었습니다.
다음날 위왕은 또 한 지방의 관리를 불렀습니다.
“경에 대한 칭찬이 들려 오길래 내가 은밀히 알아보았더니 그 고을의
땅은 황폐하고 백성들은 굶주리는 데도 경은 날마다 잔치를 베풀어
먹고 마시니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다는 것이었소. 그런데도 칭찬이
끊이지 않으니 이는 또한 경이 아첨에 능하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위왕은 대단히 노하여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한 뒤
귀양을 보냈다고 합니다.
민심은 천심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선거철만 되면
전기세 낮추어주고 물세 낮추어 주어서 집권당을 계속 찍도록
우민정책을 써서 민심이 오염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는 언론을 차단하거나 조작하고 알아야 할 권리를 박탈하는
등의 수단까지 동원될 때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백성들이 누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는지,
아니면 자기들의 사리사욕만 차리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다못해 본당에서도 사제나 수녀님들이 몇몇에게만 사랑을 받고
전체적으로는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그분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는 사제들과 동료 예언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을 거슬러 예언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하느님의 도시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거슬러
말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슬러 말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백성들 앞에 끌어냅니다.
사실 예수님도 똑같은 처지를 당하셨습니다. 안식일 예배를 중요하게
여기던 당시 안식일에 그들의 시선으로는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하셨고, 결정적으로는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허물어버리라고 하면서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다 내어 쫓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대사제들은 예수님을 군중들 있는 가운데서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알아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리옷 유다를 매수하여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예수님을 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판의 아들 아히캄이 고소하는
이들의 손에서 예레미야를 빼내어 백성들에게 넘겨서 결국 죽임을
당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백성들에게까지 미움을 받는 예언자는
없습니다. 백성들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잃을 것도 없고 그래서
눈이 맑아져 있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은 잃을 것이 많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까지도 이용하여 자신들의 소유를 지키려고 합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님이 자신의 재산 많은 것을 정당화하면서 다윗도
부자로 살았다는 성경말씀을 인용하며 설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 재산이 많은 종교인들은 그 설교에 동의하였을 것이지만, 만약
어떤 이가 종교인들은 예수님처럼 벌거벗겨지고 세상에서 가난한
예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 그를 죽이려 들 것입니다. 그러나
신도들은 알 것입니다. 아무리 그런 설교를 해도 그건 아니라는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민심은 천심이란 뜻입니다. 우리
자신들도 기득권자들이 아닌 민중, 혹은 일반 신자들의 요구를
존중할 줄 아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2016년 7월30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마태 14,1-12
나무의 수령을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중심에서부터 동그랗게
원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나무의 ‘나이테’라고 부릅니다.
움직일 수 없는 나무는 주변의 상황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때로 태풍이 불고, 천둥이 치기도 합니다. 심한 가뭄으로 대지가
타들어 가기도 합니다. 산불이 나기도 하고, 전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나이테는 그런 모든 아픔과 시련을 이겨낸 영광의 흔적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모든 나무는 세상의 온갖 풍파를 온
몸으로 견디며 우뚝 서있는 것입니다.
지구별에 등장한 인류는 다른 생명들에 비하면 ‘나이테’가 아직은
적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나이테는 독특하며, 주변의 다른 환경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직립보행이라는 나이테는 우리의
두뇌가 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시야가 더 높아지고,
우리의 성대는 더 많은 소리를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언어라는
나이테는 나약한 우리를 하나로 연대하게 해 주었습니다.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부족, 민족, 국가라는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문자라는 나이테는 우리의 지식을 통합하게 해 주었습니다. 문자는
사자의 이빨보다, 곰의 발보다, 독수리의 눈보다, 치타의 다리보다
강한 힘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문자를 통해서 역사, 문화, 신화,
철학을 발전시키게 되었습니다. 의미라는 나이테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면서 영원한 세상을 갈망하게 하였습니다. 지구라는
작은 별에 살면서 은하와 우주를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앞으로
인류는 어떤 나이테를 가지게 될까요?
인류의 역사는 두 가지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은
허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대면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동굴 속에서 보이는 희미한 빛은 진리가 보여주는
여명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동굴 밖에는 놀라운 세상이
펼쳐지듯이, 우리의 삶은 진리를 향한 여정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기에 시련과 아픔, 좌절과 고통은 이겨낼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신화, 종교, 철학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분명한 법칙과 질서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소리, 영적인 세상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수학, 과학, 경제는 이런 사고의 틀에서
발전하였습니다. 세상은 특정한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원자들은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법칙과 질서를 알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인간 중심의
세상이고, 인간이 만든 자본주의가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이 보입니다.
수치화된 디지털의 세상에서는 인격과 도덕, 사랑과 우정이 자리할
틈이 별로 없습니다. 이윤의 창출 앞에는 환경의 파괴도, 전쟁도,
폭력도 용인되는 상황입니다.
공자께서는 성숙한 인간의 나이테를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지학, 이립,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의 나이테를 말하였습니다.
학문을 배우고, 뜻을 세우고, 의혹이 없으며, 하늘의 뜻을 따르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 어떤 일을 해도 그르침이 없는 삶입니다. 제
나이가 50이 넘었는데, 아직은 세상이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유혹이라는 바람 앞에 늘
흔들리고 있습니다.
권력을 가졌지만,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헤로데는 하늘의 뜻을
몰랐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던 세례자 요한을 죽게
하였습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지만 세례자 요한은 하늘의 뜻을
알았습니다.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나이테를 남겨 주었습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새로운 삶에로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마치 여명의 눈동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였습니다.
7월의 끝자락입니다.
내 삶의 나이테를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하느님 앞에서 당당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7월30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마태 14,1-12
하느님 앞에서 당당하라.
한 사기꾼이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전화를 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잘못을 알고 있으니 이 계좌로
돈을 송금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공개하겠습니다.”
그랬더니 거액의 돈을 보낸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답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 같은 방법으로 못 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보낸 사람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드러낼 수 없는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잘못을 범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마음, 양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일잔치에
흥을 돋구어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헛된 약속을 하였고, 소녀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올 것”을 청했습니다.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왕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하려고 큰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평생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마음은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은 분입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분이
오시는 데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마르1,7).
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주님을 앞세웠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왕인 헤로데에게도 할 말을
다했습니다. 사실,“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막시 밀리안 콜베). 그러므로
참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때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1베드2,19).
자기를 포장하는 허세를 부려 위신, 체면을 지키려 한다면 결국은
그것뿐 아니라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되고 근심, 걱정, 불안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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