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인간의 유한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열 여섯 살,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마치 인생을 다 살아본 듯한 시건방짐으로 인생이 허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했으니 이른바 개똥철학을 한 것입니다. 올바르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한 철학의 결핍은 결국 염세주의에 빠지게 되어 세상의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자살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런 시점에 그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여고인 K여고 3학년생 둘이 백운대 인수봉에 올라 음독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인은 염세주의였습니다. 세상에 싫증을 내고 세상을 포기한 것입니다. 나는 이때 어린 나이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들도 나처럼 염세주의에 빠졌고, 그래서 죽었는데, 내 인생이 이러한 비극적 결과로 끝나야 한다면 이는 진짜 비극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때부터 생각을 바꾸고 삶의 패턴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죽음처럼 허무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듬해 나의 성격은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고1 때는 학교에서 쉬는 시간도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키며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않아 항상 혼자였는데, 고2가 되어서는 내가 있는 곳에는 친구들이 모여 들었고 나는 분위기 메이커가 되어, 주변이 항상 밝고 활기가 넘쳐났습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 후에 지금까지 나는 항상 밝고 긍정적이며 무슨 일이든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했습니다. 이러한 나의 변화된 모습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지금도 내게 그런 변화를 가져온 것이 무엇인지는 스스로도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면 인생의 허무함을 죽음으로 끝내고 싶지 않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인생을 허무하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그 시절 내 안에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나 싶습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주위로부터 '인생의 허무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애써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내 안 한 쪽 구석에서 일어나는 거부감을 느끼게 됩니다. 애시당초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까? 그런데 지금 와서 왜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하나, 하는 반감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게 허무하고,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다 죽게 될텐데 왜 저 사람은 이러한 인생 이치를 모르고 살아온 듯이 지금 와서 딴 소리 하는가 이 말입니다. 인생이 허무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안에, 그 사람의 삶의 역사에 짙은 허무가 깔려 있는 사람입니다.
대부분 인생이 허무하고, 덧없이 빠르게 지나갔다고 인생의 덧없음을 말하는 사람들의 현재는 별로입니다. 지금 그러하기에 지금까지의 삶도 모두 별로이고 허무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얼렁얼렁 대충대충 별 볼 일없이 껍데기 같은 삶을 살아와서 현재는 남는 게 아무 것도 없는 허무를 맛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시간이란 그 당시에는 지루하고 지겨운 삶이었고 늙어서는 하는 일 없이 덧없게 휙~ 하니 빨리 지나가는 세월입니다. 또 반대로 뭔가 열심히 속이 꽉 찬 듯 알차게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육욕의 소욕을 따라 욕심을 부리며 욕심으로 채워 온 사람 역시 허무하기는 매일반입니다. 이전에 쌓아놓은 명예나 권력의 자리나 욕심껏 축재한 많은 재물들이 이제 죽음을 인식하게 된 나이가 되어서는 미래의 나와는 상관 없는 것들이 되어버려 이 또한 지나가는 것들이기에 허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사람들은 인생이 허무하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나의 삶은 덧없고 허무한 삶이었습니다. 삶의 목적도 그리고 새로운 삶의 변화도 없기에 그저 지루하고 덧없는 세월이었습니다. 젊을 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재미로 뭐가 뭔지 생각 없는 삶을 살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한 마디로 '철부지의 삶'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정말 철없는 철부지의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철부지의 삶은 아무리 열중하고 재미있어도 그리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그 무엇이 있어도 그것은 결국 허무로 끝나게 됩니다. 뚜렷한 삶의 목표도, 왜 살아야하는지의 존재 이유도 그리고 이런 삶의 결과가 어떻게 전개될지도 모르고 나중에서야 깨닫는 후회로 치달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주도하며 살아왔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허무에 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에 의해 움직여지는 삶은 그 끝에서 유한한 인간의 절망과 허무를 맛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전적으로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실수나 실패가 없기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도 없고 그래서 허무에 이르지도 않습니다. 은혜의 삶은 감사만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위 사진 속의 노부부 뒷 모습이 어떻게 보여지십니까? 허리도 굽고 지팡이와 옆 사람에게 의지해야 되는 연약한 모습입니다. 저들의 뒷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를 바라봅니까? 어떻습니까? 피하고 싶습니까? 그러나 그 모습은 반드시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내게 다가옵니다. 다시 한 번 다른 시각으로 저들을 바라보십시오.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허무와 회한도 있지만, 지금까지 부부가 아름다운 동행으로 서로 사랑하며 같은 길을 걸어 올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아마 저들은 감사하고 있을 것입니다. 후회처럼 큰 고통은 없기에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지금 여기서(Now & Here) 최선의 삶을 살면 됩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내 뜻대로 안 되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놀랍게도 나는 바람과 같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후로, 그 믿음으로 항상 주님의 도우심에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동안 나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졌고, 더욱 많은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됐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그저 감사할 뿐이고, 더욱 주님께서 주관하시는 살아 역사하시는 삶의 현장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삶과 죽음은 나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나듯이 죽음 역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르게 찾아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인간의 유한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재 내게 주어진 현실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내 길이 인도되기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이기에 거기엔 결코 절망이나 허무가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나의 삶은 결국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일이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감사와 기도 뿐입니다.
Abraham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