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착한 사마리아인들
대전에 도착한 나는 주인없는 아파트에서 하룻밤 지내고 이튿날 아침 짐을 챙겨 수원 처남집에 맡긴 후 안상인 신부 아파트로 향했다. 한국에 올 때는 배낭 한 개였던 짐이 두 달도 안돼 트렁크가 필요할 것 같다. 문제는 책이다. 여행 중 찾아 뵌 분들이 자신들의 저서를 선물한 것이다. 그분들로는 한 두권이지만 여행 중에는 꽤나 무거운 짐이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무척 감사할 일이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많은 책을 얻었는데 그 중에는 장서로 오래 간직해야 할 '간송문화' 같은 귀한 책도 있고 사제의 강론집과 에세이도 여러 권 있었다. 가볍게 읽을 책도 있었지만 책을 쓴 분들에게는 모두 소중한 기록일 것이다. "낙타는 깃털 하나에 넘어진다"는 말이 있다. 어느 한계점에 이르면 책 한권 무게도 엄청난 부담이 된다. 이러한 무게의 한계를 문경새재 길에서 실감한 적이 있다. 너무 힘들어 수안보에 도착하자 우체국을 찾아 배낭에서 책 두권과 옷 한벌을 꺼내 소포로 수원으로 보냈다. 그것만으로도 배낭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낀다. 그 후부터는 책을 받을 때마다 소포로 붙여 배낭 무게를 늘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또한 올 때는 겨울복장이었으나 5월이 가까워지자 초여름 날씨다. 필요할 때마다 시장에서 얇은 옷을 구입했는데 벗어놓은 겨울옷도 한 짐된다. 미국에 갈 때는 짐을 수화물로 부쳐야 했다. 안상인 신부 사제관은 분당선 한티역 부근에 있다. 서울대교구에서는 이곳에 30여 세대 아파트 한 동을 구입하여 은퇴신부 사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 층에 두 세대씩 16층 건물로 아랫층은 경당과 관리실이 있고 안 신부 사제관은 4층에 있었다. 이곳에서의 생활도 새벽에 함께 미사하고 식사하는 것 외에는 내 마음대로 문을 여닫고 드나들어 자유로웠다. 은퇴 후 멕시코에서 봉사활동으로 여생을 보내는 안 신부도 이곳에 머무는 것은 일년에 두세 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안상인 신부는 은퇴 후 여덟체질 감별에 따른 수경요법이라는 경혈자극 치료법을 배워 멕시코 지방 성당에서 환자를 돌보면서 그곳 성당과 신학교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는 은퇴 후 5년을 멕시코에서 의료선교 봉사하기로 하느님께 서원했으나 아직 건강에 문제가 없기 때문에 이번에 5년을 더 연장했다고 한다. 그곳 주교와 신학교 교장 그리고 본당신부는 안 신부를 은인으로 대환영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도 은퇴신부 가운데 나름대로 보람있고 활기차게 노후를 보내는 것 같아 존경스럽다. 나는 안 신부 사제관에 있으면서 때로는 그 분을 따라 흑석동 새벽미사에 참례하기도 하고 신부님을 따르는 신자들과 식사도 함께 하면서 10여 년만에 안 신부와 함께 생활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사제관을 거점으로 나는 매일 서울과 경기도 지방의 가보고 싶은 곳을 여행했다. 비로소 정처없는 방랑여행을 끝낸 것이다. 내가 1980년 대 초 구로동 공구상가 단지 신자모임인 임마누엘회를 이끌고 있을 때 여성회원들 가운데 여섯 명이 수녀원에 입회했다. 그분들과는 대부분 지금도 연락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수원의 성 빈첸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에만 세 분이 있다. 그 중 김 레오니 수녀와 연락이 닿아 그 분이 책임자로 있는 경기도 화성시 '사강 보금자리'를 방문하기로 했다. 나는 김 수녀와 사강보금자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남양 성모성지에서 만나기로 하고 수원역에서 버스를 탔다. 나는 남양성지 입구에서 내려 레오니 수녀가 도착할 때까지 남양성지를 둘러보았다. 옛 신자촌이 있었던 남양성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성모성지로 선포된 곳이지만 병인년(1866년) 전후에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한 순교성지이기도 하다. 치명일기와 증언록 등 기록에 남겨진 순교자들은 김필립보와 박마리아 부부, 정필립보, 김홍서 등 네 분이며 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남양옥에서 순교했다.
이곳에서는 수 만이 넘는 회원이 24시간 묵주기도를 이어가고 있으며 매년 여러차례 피크로스(PICROS)라는 도보 성지순례 기도운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남양성지에는 태아들의 무덤을 만들어 낙태 속죄 기도모임을 하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 '로사리오교'라는 조그만 다리를 건너자 남양성지라고 새겨진 맷돌이 놓여 있다. 맷돌은 옛날 신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형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주차장을 지나 성지로 들어가면 큰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나즈막한 동산에 둘러쌓인 가운데 원형으로 꾸며진 성모동산은 그 자체가 묵주 형태를 띠고 있다. 성지에는 대형 십자가와 성모상 그리고 커다란 돌을 묵주알로 사용한 대형 로사리오가 있다. 이날도 순례자들이 묵주알을 하나씩 끌어안으며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미국과 캐나다는 순교성인들이 많지 않은 탓으로 성모성지가 많이 만들어져 있다. 내가 사는 뉴욕 롱아일랜드에도 잘 꾸며진 마리안슈라인이 있어 가끔가는데 남양성지도 이에 못지 않게 아름답다. 나는 레오니 수녀를 기다리는 동안 성모동산을 한바퀴 돌면서 상징적으로 만들어진 낙태아 무덤에서 세상빛을 보지 못하고 살해된 태아들을 위해 기도했다. 내가 젊었을 때 한국은 산아제한을 빌미로 낙태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예비군 훈련장이나 거리에 수술차량을 세워놓고 길가는 사람을 붙들어 정관수술을 강권했던 시대였다. 정부에서는 곳곳에 '아들 딸 구별말고 하나 낳아 알뜰살뜰'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자식 많이 낳는 것을 죄악시했다. 나처럼 자식이 넷인 사람은 한국에서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제는 앞으로 인구가 줄어들어 경제, 국방, 복지 모든 면에서 큰 문제가 된다고 호들갑 떨면서 국가시책으로 출산을 장려하고 있으니 정부가 10년 앞도 내다보지 못한 것이다. 성지를 나오는데 멀리 레오니 수녀가 보인다. 장난삼아 시침떼고 지나치는데 수녀가 반갑게 붙든다.
우리는 인근 제부도 부둣가 수산물시장에서 싱싱한 해물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레오니 수녀가 운전하는 밴으로 보금자리로 향했다. 가는 길은 자동차가 겨우 한대 지나갈 수 있을 오솔길을 이리저리 빠져 나가야 했다. 레오니 수녀가 다 왔다고 해서 밖을 내다보니 커다랗고 번듯한 건물이 있어 나는 그곳인 줄 알았다. 그러나 사강보금자리는 큰 건물 한 귀퉁이에 있는 허름한 두 채의 작은 건물이 전부였다. 이곳에서 세 명의 수녀들이 12명의 치매, 중풍, 정신지체 환자 및 행려자 등을 돌보고 있다. 이곳은 공공복지의 사각지대이다. 즉 사강보금자리는 정부에서 정해 놓은 일정 조건에 해당되지 않아 다른 시설에 수용되지 못하고 아무런 복지혜택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돌보는 시설이다. 물론 정부에서는 일정한 기준을 만들어야겠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경우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사강보금자리는 처음 이 지역 신자들이 오갈 데 없이 거리에 쓰러진 행려환자들을 돌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신자들은 처음 이들을 꽃동네로 보내 주었으나 집단시설에 수용시키는 것보다는 직접 돌보기로 하고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대지를 매입하고 시설을 세웠다. 그러나 신자들의 힘으로 운영하는데 한계에 부딪치자 수원교구가 1994년 빈첸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에 위탁한 것이다. 나는 이곳을 살펴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곳에 있는 12명의 노인들은 수녀들의 수발을 받으며 다른 집단시설에서는 보기 힘든 편안한 모습을 보였다. 이곳은 하나의 가정이다. 세 명의 수녀들은 조리사도 없이 직접 음식을 만들고 청소와 설겆이 뿐 아니라 일주일에 두번 목욕까지 시켜드린다. 레오니 수녀는 부얶을 전담하는 조리사가 꼭 필요하지만 적은 급료에 외딴 곳이라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사실 수녀들까지 15명의 음식을 매끼 마련하는 일은 식당 경험자가 아니면 일반주부로서는 어려울 것 같았다.
레오니 수녀는 사강 보금자리는 후원금과 농사지은 고추를 팔아 운영비를 충당하는데 현상유지도 어려워 건물을 짓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한다. 원래 수녀회에서 인계받을 때부터 건물 한 동은 등기조차 없는 무허가 건물이기 때문에 낡아도 수리할 수 없어 시급히 신축해야 할 형편이라고 했다. 그러나 수원교구에서는 수녀회에 경영을 위탁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수녀회에서 알아서 해 주기를 바라고 한편 수녀회에서는 최선을 다해보고 안되면 철수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입장인 모양이다. 그러나 이곳을 책임진 수녀들은 의지할 데 없는 할아버지들을 그대로 놔두고 떠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한다. 수녀들은 할아버지들을 일방적으로 돌보아야 하는 피보호 대상자들이 아닌 한 가족의 어르신들로 생각하고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자들 뿐 아니라 일반 봉사단체에서 틈틈이 고추밭과 채마밭을 가꾸어 주는 노력봉사를 하기 때문에 수녀들이 할아버지들에게 신경을 쓸 수 있는 여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레오니 수녀는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은 남성 봉사자들이 없어 12명 할아버지들을 매주 두 차례 씩 목욕시켜 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사실 수녀들이 아무리 할아버지라지만 자기 몸을 스스로 못 가누는 남자의 알몸을 목욕시킨다는 것은 상상만해도 너무 힘들 것 같았다. 따라서 수녀들이 할아버지 양로원을 한다는 것은 할머니 양로원하는 것보다 몇 곱절은 힘들 것 같다. 이곳에서는 할아버지들의 신앙을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 노인들은 이곳에서 신앙을 얻어 열심히 기도생활을 한다. 나는 이곳을 보면서 대규모 집단 사회복지 시설보다는 이러한 가정 형태가 이상적인 복지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정부나 교회의 지원은 이름이 알려진 대규모 시설에 집중되기 때문에 이러한 시설들은 어쩌면 복지의 사각지대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날 저녁 레오니 수녀와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수도자로서의 삶에 대해 참으로 좋은 몫을 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아와 마르따의 역할은 어느 하나 경중을 가릴 수 없는 좋은 몫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날 밤 이곳에서 지내면서 내가 당장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 가슴아팠다. 이튿날은 주일이라 새벽에 레오니 수녀와 인근 남양성당 주일미사에 참례했다. 남양은 세월호 사건 희생자들이 집중된 안산시와 인접해 이곳에도 희생자들이 여러 명 있어 장례와 위령미사가 봉헌되고 있었다. 수원교구 주보를 보면 이 부근 성당마다 희생자들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수원교구에서는 안산 합동분향소 앞에 부스를 설치해 매일 저녁 위령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나는 레오니 수녀 차로 수원까지 가서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수원역에서 작별했다. 수원역 커피집에는 또다른 수녀 한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말씀의 성모영보 수녀회 소속 박마리아 수녀도 임마누엘회 출신이다. 박 수녀 역시 장애자 시설인 작은 프란치스코의 집을 책임맡고 있다. 나는 남은 일정에 워낙 틈이 없어 박 수녀가 일하는 현장은 가 보지 못했다. 다만 그 분의 언동이나 표정을 보아 그가 얼마나 봉사를 통해 내적 평화와 기쁨을 누리고 있는지 짐작이 된다. 다음 한국에 올 기회가 있다면 꼭 찾아보리라 결심한다. 나는 세상이 아무리 물질만능 시대로 야박하게 변해간다해도 이같이 그늘에서 봉사하는 착한 사마리아인들이 있는 한 절망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저녁은 마침 장모님 생신이라 수원에서 지낼 예정이다. 혹시 레오니 수녀의 사강 보금자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을 위해 그곳 연락처를 남긴다. 조금씩이라도 힘을 모은다면 큰 보람이 있을 것이다. (031) 357-8061 레오니 수녀.
(2014.9.18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