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중재 하에 큰 틀에서 에너지 인프라(기반 시설)에 대한 공습을 중단하기로 했지만, 세부적인 실행 단계에서는 아직 풀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24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러-우크라 대표단과 '셔틀 외교'를 펼칠 계획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 18일 푸틴 대통령과의 2번째 전화 통화에서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공습 중단과 흑해 해상 안전 운항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는 앞서 공중및 해상 휴전을 주장해온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압박해 '30일간 전면 휴전'이라는 양보를 얻어냈지만(11일 제다 회담), 푸틴 대통령에 대한 설득에는 끝내 실패했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 이튿날(19일)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미-러 부분 휴전안에 대해 설명하는 전화 통화를 했다.
하지만, 침이 입에서 마르기도 전에 러-우크라 양국은 서로 부분 휴전 합의를 위반했고 비난하는 '설전'을 벌이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부분 휴전의 세부 내용에 대한 상호 합의 혹은 이해가 부족한 탓으로 보인다.
젤렌스키-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 정상회담/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군사전문 매체 딥 스테이트(deep state)는 21일 러시아군이 쿠르스크주(州) 탈환 작전을 계속하면서 핵심 도시인 수드자를 넘어 우크라이나 국경쪽으로 진격 중이라고 전했다.
양측의 휴전 위반 설전이 벌어진 곳은 '수드자 가스 계량 시설'(газоизмерительная станция "Суджа", 가스관을 통해 가스를 반출하고 그 양을 측정하는 장비들이 설치된 시설/편집자)이다. 우크라이나군이 점령한 지역 내에 위치해 있지만, 러시아군이 탈환작전을 펴는 작전 구역 내에 들어 있는 에너지 관련 시설이다. 러시아 에너지 기업인 가스프롬의 천연가스가 우크라이나 영토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우렌고이-포마리-우즈고로드 가스관의 출발 지점이다.
이 가스 계량 시설이 20일 밤(21일 새벽)에 포격을 받아큰 불이 났다.
수드자 가스 계량시설을 태우고 있는 화염/텔레그램 영상 캡처
러시아 측의 주장은 두가지다. 러시아 외무부는 우크라이나군이 이 시설을 포격했다고 비난했다. 일부 군사 전문 블로거들 사이에서는 우크라이나군이 가스관에 폭발물을 설치해 폭파시켰고, 불이 남아 있는 가스로 옮겨붙으면서 큰 화재가 났다는 주장이 나온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21일 "우크라이나가 계량 시설 공격의 범인"이라면서 "최고 사령관(푸틴 대통령)이 내린 에너지 시설에 대한 공습 중단 명령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중대 범죄를 수사하는 러시아 연방수사위원회도 우크라이나가 가스 시설을 폭파한 건 '테러 행위'라고 규탄했다.
우크라이나는 정반대의 주장을 편다. 우크라이나 총참모부는 페이스북 성명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군이 수자 가스 계량 시설을 포격했다고 비난했다"며 "이런 비난은 근거가 없으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음해 공작"이라고 반박했다. 성명은 또 "이 시설은 러시아군에 의해 반복적으로 포격을 당했다"며 "적(러시아군)은 오늘도 이 시설을 포격했다"고 비난했다.
문제는 이 시설을 누구의 것으로 보고, 휴전 위반 여부를 판단할 것이냐는 점이다. 비록 자국내에 있는 시설이지만, 우크라이나군이 아직 장악하고 있으니, 러시아군이 이 시설을 타격한 것도 휴전 위반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우크라이나군이 점령한 이 시설을 (철수 전에) 폭발물을 설치해 폭발시킨 것을 공습 위반으로 볼 수 있느냐? 등의 문제 제기가 여럿 있을 수 있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푸틴-트럼프 대통령 간 전화 합의 내용의 뉘앙스(세부 사항)가 서로 달랐다는 사실이다. 크렘린은 합의 발표문에서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공습 중단으로, 백악관은 '에너지 및 인프라'에 대한 공습 중단으로 서로 다르게 적었다. '및'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구 차이는 엄청나다.
러시아군의 오데사 공습으로 난 화재를 진압하는 모습/텔레그램
예컨대, 20일 밤 우크라이나 남부 오데사 등 주요 도시가 러시아군의 드론 공격을 받아 시설 피해가 적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측은 간밤에(20일밤~21일 새벽) 러시아가 드론 214대를 동원해 주요 도시 곳곳에 공격했다고 비난했다. 특히 오데사에서는 쇼핑센터와 주변 상점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일부 건물과 사회 기반 시설이 피해를 입었다. 1시간 만에 무려 15건 이상의 폭발이 일어났다는 보고도 있다.
러시아측은 공격 대상이 에너지 기반 시설이 아니었으니 휴전 위반은 아니다고 강조하고, 우크라이나측은 위반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특히 러시아의 이번 오데사 공격에는 새로운 드론 전술이 펼쳐졌다는 주장도 나왔다. 러시아의 한 군사 텔레그램 채널은 "러시아군은 흑해 바다위에 수많은 드론을 띄운 뒤 작전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한꺼번에 오데사로 진입시켰다"며 "떼를 이룬 드론들이 2㎞ 상공에서 일제히 급강하하는 바람에 격추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채널은 "이같은 새 전술이 한 도시의 군사 목표에 대한 공격으로는 훨씬 더 효과적"이라며 "러시아군의 새로운 전술인지, 일시적인 작전이었는지 곧 드러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분 휴전을 에너지및 인프라에 대한 공격 중단이라고 주장하는 젤렌스키 대통령은 즉각 엑스(X·옛 트위터)에 러시아 공습을 알리며 "러시아에 대한 공동 압박, 더 엄격한 제재, 우리에 대한 더 강력한 방위 지원"을 서방 측에 요청했다.
그러나 페스코프 대변인은 "(수드자 계량 시설과 같은 에너지 인프라를 공격한) 키예프(키이우)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군대는 현재 미-러 간 합의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인프라를 공격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휴전 실행상의 이견은 오는 24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미-러, 미-우크라 사이에서 진행될 '셔틀 외교'에서 해소되기를 기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