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唐新羅國師子山▨▨▨▨▨敎諡澄曉大師寶印之塔碑銘幷序」
朝請大夫守執事侍郎賜紫金魚袋臣崔彥撝奉 敎撰」
崔潤奉 敎書兼篆」
原夫眞宗寂寂强▨立敎之門▨▨▨▨▨▨傳心之旨其要也玄機玄境其宗也佛語佛心名言不見其始終視聽莫知其規矩爰有乘時大士出世神人不假言津獨逝而直歸性海寧遵意路孤征而深入禪」
山必有穿鑿異端信其邪見▨▨▨▨▨▨▨心猿每閙於毒林待以良緣知之善誘引斯迷者吾得之」
大師焉 大師諱折中字▨▨俗姓▨▨▨▨鵂嵩人也其先因宦牟城遂爲郡族父曰先幢藝高弓馬名振華夷孝慈載於史官功業藏於王府作郡城龜鏡爲閭里棟梁母白氏假寐之時夢一天」
女謂之曰阿要必生智子因以寳▨▨▨▨▨娠 大師焉以寶曆二年四月七日 誕生生有曹姿不曾兒年七歲覩禪侶之乞食者因慕出家遂辭二親於是孤逝至五冠山寺謁珍傳法師爰於摩頂之時」
便契息心之旨仍居慈室落釆▨▨▨▨謂▨後代之染道人於是復現者衆口喃喃且與救蟻沙彌不可同年而語哉年十有五直詣浮石因聽雜華尋方廣之眞詮究十玄之妙義義學沙門始聞其語方認其」
心猶如孔詣膺門竟作忘年之友▨▨▨▨守爲幷日之交至十九於白城郡長谷寺受具足戒 大師上壇之日忽看紫氣直起壇中此寺有老僧謂衆曰此沙彌不是凡人非一朝一夕之故仍觀此驗合得」
戒珠必是後代之誘引迷途先標▨端也選思前夢宛若合符於是精護浮囊遠尋絶境企聞楓岳長潭寺有道允和尙久遊華夏纔返故鄕特詣禪扉敬投五體和尙曰靈山別後記得幾生邂逅相逢來何暮矣」
大師旣蒙入室深感慈風適我願▨因玆師事焉 和尙曩於中國先謁南泉以此南泉承嗣於江西江西繼明於南岳南岳卽曹溪之冡子也其高峻可知矣所以 大師從此服膺不離左右得嗣東山之法」
何▨震旦之遊其後徑詣道譚禪▨▨ 慈忍禪師纔見摳衣便如舊識謂曰相逢之晚引於領多時 大師便指眼前水瓶曰瓶非瓶時如何荅曰汝名什摩 大師荅曰折中 禪師云非折中之時阿誰」
荅曰非折中之時無人如此問 禪師云名下無虛士折中不奈何閱人知幾个如汝者無多所以十六年久住禪院深探理窟遂踐忘言之境終歸得意之塲可謂靑出於藍而藍無靑絳生於荳而茜無絳者」
也所以不出戶而知天下者於大師見之矣入海探珠登山釆玉亦何常師之有於是乎生者焉以後杖錫荷瓶巡叅知識中和二年前國統大法師威公聞大師之萍跡無處安之便戚於懷如呑棘刺」
怱▨究谷山寺秦請住持雖然▨▨丹誠蹔因駐足所恨近於京輦不愜雅懷爰有師子山釋雲大禪師竊承 大師德冠華夷居無處所尋遣神足實表丹情云老僧所住之居非宜小器 大師駐此合盖」
相▨不是吾師何人得住乞▨廻盖來止松門 大師莫逆遠誠仍依來意便携禪衆往以居之此寺也萬壑屛開千巖壁立誠海東之佳境亦天下之福田也 大師戾止之辰遠方來者朝三暮四雨」
驟風馳桃李無言稻麻成列此時」......
징효대사(澄曉大師) 보인지탑비명(寶印之塔碑銘)
이지관 번역
유당(有唐) 신라국(新羅國) 사자산(師子山) 흥▨▨▨(興▨▨▨) 교시(敎諡) 징효대사(澄曉大師) 보인지탑비명(寶印之塔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조청대부(朝請大夫) 수집사시랑(守執事侍郞)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최언휘(崔彦撝)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최윤(崔潤)은 교지에 의하여 비문과 전액(篆額)을 쓰다.
살펴 보건대 진종(眞宗)은 본시 적적하건만 억지로 교(敎)의 문을 설립하였고, (결락) 전심(傳心)의 취지를 제창하였으니, 그 추요는 현기(玄機)라야 알 수 있는 현경(玄境)인 것이며, 그 종지(宗旨)는 불어(佛語)와 불심(佛心)이므로 이름과 말로써 그 시종(始終)을 엿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보고 듣는 것으로도 규구(規矩)를 알 수 없다. 여기에 때를 타고 원력(願力)으로 출세한 신인(神人)이 있으니, 그는 언진(言津)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홀로 걸어가 바로 성해(性海)로 돌아갔으니 어찌 의로(意路)를 따라 외로이 선산(禪山)에 들어갔다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반드시 이단(異端)을 천착하고 그 사견(邪見)을 믿어서 (결락) 마음이 마치 원숭이처럼 날뛰어 항상 삼독의 숲을 요란하게 하다가 홀연히 좋은 인연을 만나 선유(善誘)임을 알았다. 이와 같이 미혹한 중생(衆生)을 인도하는 분을 우리가 만났으니, 그가 곧 징효대사(澄曉大師)이시다.
대사의 휘(諱)는 절중(折中)이요, 자(字)는 (결락) 속성은 (결락) 휴암(鵂嵒) 사람이다. 그의 선조가 모성(牟城)에서 벼슬살이하다가 드디어 군족(郡族)이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선동(先憧)이니, 기예는 궁술과 기마에 뛰어났으며 명성은 화이(華夷)에 떨쳤다. 효자(孝慈)는 사관(史官)에 실렸고, 공적은 왕부(王府)에 간직되어 군성(郡城)의 귀감이며 여리(閭里)의 동량이었다. 어머니는 백씨(白氏)로 비몽사몽 중에 한 천녀(天女)가 나타나 이르되 “아미(阿㜷)께서는 반드시 지혜 있는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 하면서 아름다운 보배 구슬을 전해 받고는 대사(大師)를 임신하였다. 그 후 보력(寶曆) 2년 4월 7일에 탄생하니, 날 때부터 성스러운 자태를 지녔고, 일찍부터 아이들과 같이 장난하지 아니하였다. 일곱 살 때 걸식(乞食)하는 스님을 보고 흠모하여 출가(出家)할 것을 결심한 다음, 드디어 양친(兩親)을 하직하였다. 외롭게 오관선사(五冠山寺)에 가서 진전법사(珍傳法師)를 배알하니 법사가 이마를 만져 주는 순간 문득 식심(息心)의 뜻에 계합하여 곧 자실(慈室)에 있게 되었다. 머리를 깎고 (결락) 위(謂) (결락) 모두들 말하기를 “후대(後代)의 칠도인(漆道人)이 여기에 다시 나타났다”면서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구의사미(救蟻沙彌)와 더불어 어찌 같은 자리에 놓고 비교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열다섯 살 때에 곧바로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잡화경(雜華經)을 배워 방광(方廣)의 진전(眞銓)을 찾았으며, 십현(十玄)의 묘의를 연구하였다. 의학(義學)하는 사문들이 비로소 그 말을 듣고서야 그 마음을 알게 되었으니, 마치 공융(孔融)이 응문(膺門)에 나아가서 마침내 망년(忘年)의 벗을 삼은 것과 같았으며, (결락) 수(守)하여 병일(幷日)의 교우(交友)가 되었다. 열아홉 살 때 백성군(白城郡) 장곡사(長谷寺)에서 구족계를 받고자 하였을 때, 대사(大師)가 계(戒)를 받으려고 계단에서 수계의식을 행하려 상단(上壇)하는 날, 갑자기 자색 기운이 단중(壇中)에서 솟아올랐다. 이를 본 어떤 노(老)스님이 대중들에게 말하되, “이 사미(沙彌)는 범인(凡人)이 아니다.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닦은 공이 아니니, 이러한 증험을 보인 것은 마땅히 이미 계주(戒珠)를 받은 것이라 하겠다. 이는 반드시 후대(後代)의 미혹한 중생을 제도할 큰 재목(材木)이므로 수계하기 전 먼저 이러한 상서를 나타낸 것이다”라 하였다. 돌이켜 태몽(胎夢)을 생각하니 참으로 합부(合符)하였다.
이로부터 정미롭게 부낭(浮囊)을 보호하며 멀리 절경(絶境)을 찾아다니다가 풍악산 장담사(長潭寺)에서 도윤화상이 오랫동안 중국에 가서 유학하고 귀국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곧 선비(禪扉)로 찾아가서 오체투지하고 예배를 드렸다. 화상이 이르되 “영산에서 서로 이별한 후 몇 생(生)이나 되었는가. 우연히 서로 만남이 어찌 이다지도 늦었는가”하였다. 대사는 이미 입실을 허락받았고 스님의 자풍(慈風)에 깊은 감명을 느꼈으므로, 나의 원에 적합하다면서 화상(和尙)을 사사하였다. 화상은 지난 날 중국(中國)에 가서 먼저 남전화상(南泉和尙)을 친견하고 법을 이어 받았으니, 남전(南泉)은 강서도일(江西道一)을 계승하였고, 강서(江西)는 남악회양(南岳懷讓)을 승사하였으므로 남악(南岳)은 곧 조계혜능(曹溪慧能)의 몽자(冡子)이니, 그 고매(高邁)함을 가히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대사(大師)는 도윤을 모시면서 좌우(左右)를 떠나지 아니하고, 동산(東山)의 법을 이어받게 되었다.
이 때 “내 어찌 진단(震旦)에 유학하는 것을 늦추리요”하고는 그 후 곧바로 도담(道譚)선사에게 나아가 (결락) 자인(慈忍)선사를 함께 친견하고 예배를 드리니, 처음 뵙는 것 같지 않고 구면과 같음을 느꼈다. 도담선사가 말하되 “늦어서야 상봉(相逢)하였으니 그동안 얼마나 되었는가”하거늘, 이에 대사(大師)가 앞에 놓여 있는 물병을 가리키며 “병이 곧 병이 아닐 때는 어떠합니까”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이름이 무엇인가” 대사(大師)가 또 답하되 “절중(折中)입니다”하였다. 선사(禪師)가 이르되 “절중(折中)이 아닐 때에는 누구인가” 대답하되 “절중(折中)이 아닌 때는 이와 같이 묻는 사람도 없습니다” 선사가 이르되 “이름 밑에 허사(虛事)가 없으니, 이제 절중(折中)은 어찌할 수 없구나! 내가 많은 사람을 상대하였지만, 그대와 같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하였다.
그러므로 16년 동안 선방에서 진리를 깊이 탐구하여 드디어 망언(亡言)의 경지를 밟았으며, 마침내 득의(得意)의 마당으로 돌아갔으니, 참으로 푸른색이 쪽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더 푸르고, 붉은 빛을 꼭두서니에서 뽑아냈지만 꼭두서니보다 더 붉다고 하겠다. 이런 까닭에 집 밖을 나가지 아니하고도 천하(天下)를 두루 아는 자를 대사(大師)에게서 볼 수 있었다. 바다에 들어가서 구슬을 찾고, 산에 올라가 옥(玉)을 캐는데 있어 어찌 정(定)해 놓은 스승이 있으리요. 이에 다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였다. 행장을 짊어지고 행각하면서 선지식을 친견하였다.
중화(中和) 2년에 전 국통인 대법사(大法師) 국공(威公)이 대사(大師)가 주처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파 마치 가시가 목에 걸린 것과 같았다. 생각 끝에 왕에게 주청(奏請)하여 곡산사(谷山寺)에 주지(住持)하도록 하였으니, 애써 주선해준 단성(丹誠)에 못 이겨 잠깐 주석하였지만 경연(京輦)과 가까운 것이 마음에 맞지 아니하였다. 이때 사자산(師子山)에 석운대선사(釋雲大禪師)가 있었는데, 징효대사(澄曉大師)의 덕은 화이(華夷)를 덮었는데도 정해진 거처(居處)가 없음을 알고 신족(神足)을 보내어 간절한 성의를 표하여 말하되, “노승(老僧)이 있는 이 곳은 작은 그릇이 있을 곳이 아니니, 대사(大師)가 여기에 주석한다면 가장 적합할 듯합니다. 만약 스님이 아니면 누가 이 도량(道場)을 감당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속히 왕림(枉臨)하여 송문(松門)을 지켜달라”고 요청하였다. 청을 받은 대사(大師)는 그 성의를 거역할 수 없어 곧 선중(禪衆)을 데리고 그 곳에 주석하였다. 이 절의 경치는 천봉만학이 마치 병풍처럼 열려 있고, 층암 절벽의 절경이어서 참으로 해동(海東)의 가경(佳境)이며, 또한 천하(天下)의 복전(福田)이라 할 수 있었다. 대사(大師)가 여기에서 려지(戾止)함으로부터 먼 곳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아침에는 셋, 저녁에는 넷으로 끊임없이 모여들어, 마치 비처럼 모이고 바람과 같이 달려와서 도리무언(桃李無言)이나 하자성혜(下自成蹊)하여 도마(稻麻)와 같이 열을 이루었다.
-계속-
출처: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변역: 이지관 (전 조계종총무원장이셧던 대종사 지관 스님)
첫댓글 보물 612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