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명령하시니
더러운 귀신들이 다 물러가지 않는가!”
하면서 서로 수군거렸다.
(루가 4,31-37)
They were all amazed and
said to one another, "What is there about his
word? For
with authority and power he commands the unclean spirits, and they come
out."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통해서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현세적인 데에 매인 인간은 하느님의 선물을
어리석음이라고 여기며 받아들이지 않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소란 피우는 마귀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으셨다. 그러자 마귀 들린
이에게서 마귀가 나갔고, 이를 목격한 모든 사람이 크게 놀랐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지금 우리가 해방되어야 할 더러운 영이 무엇인지 성찰해 봅니다. 우리는 각자의 상처와 욕망에서 자라난
병든 영들에 사로잡혀 있을뿐더러 시대 전체를 휘감으며 수많은 사람의 영적 생명을 앗아 가는 악한 기운에도 짓눌려 있습니다. 그러기에 개인의 내적
회심으로 이끄는 기도와 성찰만이 아니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뿌리 깊은 시대의 병든 부분을 식별하고 변화시키려는 노력 또한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바오로 사도가 오늘 독서에서 호소하는, 현세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선물을 제대로 알아보는 영적 삶을 위한 터
잡기입니다. 특히 사회 병리적 현상과 왜곡된 시각들에서 한 개인이 벗어나기 어려운 것은, 그것이 어제오늘이 아니라 근대적 삶의 기나긴 과정
속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는 때때로
예술가들의 예언자적 직관에서 발견하는데, 그 좋은 보기가 19세기 미국의 작가 멜빌의 단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입니다. 이 소설은 ‘근대적
삶의 허무함을 보여 주는 슬프면서도 참으로 순수한 작품’이라 할 만합니다. 작가는 뉴욕 월가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필경사로 일하는 주인공의
‘하고 싶지 않다’라는 ‘부정’의 대답으로 ‘근대적 삶’의 요구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부정’의 원인과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조금은 수수께끼
같은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큰 여운을 남깁니다. “바틀비는 워싱턴에서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의 말단 직원으로 일하다가 갑자기
해고되었다. (중략) 사면 편지를 받았어야 할 사람은 절망에 빠져 죽었고, 희망적인 편지를 받았어야 할 사람은 희망을 품지 못하고 죽었으며,
희소식이 담긴 편지를 받았어야 할 사람은 구제받지 못한 불행에 짓눌려 죽었다. 생명의 임무를 받아 나섰건만 편지들은 죽음으로 질주한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더러운 영’은,
눈에 보이는 업적에 도취되고 풍요의 그늘에서 ‘배달되지 않는 편지’에 희망을 상실한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서려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성령께서 복음을 통해 주시는 살아 있는 영을 찾을 때 비로소 ‘더러운 영’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농부가 큰
소를 끌고 집에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도둑이 이 소를 뺏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런 방법을 써 보았습니다.
먼저 이 농부가
가는 길 앞을 앞질러 가서 한적한 장소에 아주 좋은 가죽신 한 짝을 발견하기 쉽도록 놓아두었습니다. 농부는 길을 가다가 이 새 가죽신 한 짝을
발견하고는 손에 집어 들었지요. 가죽신이 너무 좋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한 짝만 있으니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에 아쉽지만 그냥 그 자리에
두고는 자기 갈 길을 갔습니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글쎄 탐 났던 좋은 가죽신의 나머지 한 짝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
농부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농부는 “이런
횡재가 있나! 한적한 곳이니까 지나가는 사람도 없으니 아직 그 가죽신이 그대로 있겠지?”라고 말하면서 소를 나무에 묶어두고는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떨어져 있는 가죽신을 주워서 신나게 다시 소가 있는 곳으로 갔지요. 하지만 묶어둔 소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도둑이 되돌아가는 농부의 모습을 보고는 얼른 소를 가져갔기 때문이지요.
횡재했다고
생각했지만, 횡재가 아닌 낭패를 겪게 되었습니다. 좋은 가죽신 하나를 얻었지만, 자신의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소를 잃었기 때문이지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도 비슷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상의 유혹에 흔들려서 소중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우리는 아니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와
염려 덕분에 성모 발현지 성지순례를 잘 마쳤습니다.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서 가장 많이 느낀 것은 바로 세상의 유혹에 흔들려서 소중한 것을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을 간직하지 말라는 것이었지요.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아이들의 모습, 또한 성인성녀들의 모습. 그리고 성모님의 말씀 또한 세상
것이 중요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세상의 유혹에 자주 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나약함과 부족함을 기억하면서 유혹꺼리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방법을 오늘 복음을 통해 전해주십니다. 즉, 마귀의 유혹이 시작될 때 지체하지 말고, 그 유혹이 멈출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유혹이 적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유혹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유혹을 단호하게 끊어야 어떤 해도 입지 않고
내게서 떠나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가장 중요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의 유혹을
단호하게 끊어버리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 아시겠지요?
내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나의 적이 된다.(랄프 왈도 에머슨)
펠리컨의 새끼
사랑(유인수, ‘펠리컨의 새끼 사랑)
펠리컨이라는 새가
있습니다. 이 새의 주머니는 펠리컨의 위가 담을 수 있는 양의 무려 3배나 더 담을 수 있습니다. 펠리컨의 주머니는 먹이를 잡을 때 사용할 뿐만
아니라, 새끼들에게 먹이를 줄 때도 사용합니다.
북극 지방에 햇빛이
잠깐 비추는 몇 개월 동안 먹이를 이 주머니에 저장한 후, 먹이를 구할 수 없는 추운 겨울에는 새끼들에게 저장한 먹이를 나누어주어 겨울을 나게
합니다. 그러나 추운 겨울을 나기 전에 먹이가 떨어지면 펠리컨은 제 가슴살을 찢어 새끼들에게 먹입니다.
병에 걸려 죽어
가는 새끼에게는 자신의 핏줄을 터뜨려 그 피를 입에 넣어줍니다. 어미 펠리컨은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새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칩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펠리컨을 사랑과 희생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바로 주님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리고 우리도 닮아야 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분노와 평화 -인영균신부-
더러운 영이 예수님께 반항하며 독이 올라 소리를 지릅니다.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사
람은 선한 영을 모셔야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 있습니다. 악한 영은 사람을 혼란과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트리고 자기 분열로 이끌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을 받았습니다”(1코린 2,12)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 곧
성령을 마음에 모시고 살 때 우리는 참다운 내적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매일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면 마음에 성령을 모시고 살게 됩니다.
더러운 영이 이미 알아차린 것처럼 예수님은 악마를 멸망시키려 오셨기 때문입니다.
지 금 격한 분노와 원망의 소용돌이 속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마음에 독기 서린 분노가 자리잡고 있습니까? 그러면 이는 더러운 영에게 내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때 정신을 다시 똑바로
차리고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께 우리 자신을 봉헌합시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주님이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러면
깊은 평화가 솟아날 것입니다.
하느님 능력의
소유자
-반영억신부-
“등불 하나가 천년
어둠을 물리친다.” 는 옛 말이
있습니다. 빛을 가지고 있으면 어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빛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둠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물론 빛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악의 세력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권능으로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고 그분의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숨어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생명의 숨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빛을 선택하면
어둠이 물러나고 어둠을 선택하면 빛이 물러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빛은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빛을 발하게
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며 대항을
시도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4,34.
35). 하시며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 내셨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 능력을 사도들을 비롯한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루카10장 17이하에 보면 제자들이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인정하고 잘 관리하고 성장시켜야 하겠습니다.
오늘 날의 시대는
너무나 시끄럽고 번잡하고 자극적입니다. 마귀들이 더는 일할 데가 없을 정도로 모든 삶의 자리를 점령했다고도 합니다. 유혹이 많고 번잡한 시대에
하느님의 권능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 먼저 침묵과 고독으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침묵 속에서 절망과 혼란을
이겨내는 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 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야고4,7-8)
하고 말하였습니다. 알게 모르게 다가오는 어둠의 세력, 곧 하느님보다는 인간의 욕심을 부추기는 마음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합니다.
20세기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자신을 채울수록 텅 비어가니. 많은 것을 움켜쥐면서 나는 오히려 모든 것을 잃었다. 쾌락과 즐거움에
사로잡히면서 나는 오히려 실망과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세상 것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결국 그
끝은 파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6-8).
우리가 하느님의 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구인사발령으로
많은 신부님들이 새 소임지로 이동하십니다. 부임지에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결코 인간적인 욕심이나 인정에 매달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4,34) -김대열신부-
선한 영도 아닌,
악의 영에 사로잡힌 이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구절을 대하는
순간 떠오르는 또 다른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6)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지요.
왜, 이 말씀이
떠올랐을까요? 요즘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우리 신앙인들의 삶 안에서 보여지는 숨길 수 없는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악마의 세력조차
거부하지 못하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그분의 모든 것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 우리 안에서 그분의 말씀과는 너무도 상반된 생각과 행동을 품고 보이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분명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모순을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선택 기준은 복음입니다. 즉, 내 앞에
놓여진 상황에 어떤 태도가 복음적인가를 식별하고 선택한다는 말입니다. 길이시며,
진리이시고 생명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통해서 옳은 길을 가고자 한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너무도
답답하고 이기적인 신앙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언제든지 마음에
들면 몸에 걸쳤다가, 싫증나면 떼어내는 장신구와 같은 신앙을 보이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때로는 두려움
때문에 선택한 길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려는 비겁한 신앙도 만납니다.
사제들이,
수도자들이 길거리에 나섰습니다. 불의에 항거하는
미사가 집전됩니다. 힘없고 기댈 배경
없는 이들을 위해 교회가 하나가 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복음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불신을 조장하고 매도하려고 합니다. 권력의 하수인이나
방조자가 되어 옳은 세력을 적대시합니다. 악의 힘조차 알고
있는 예수님의 마음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악마의 노림수를
경계해야 합니다. 악마는 선한 세력을
교묘하게 유혹하고 속이고 분열을 이끌어냅니다.
하지만 유혹을
이겨내는 식별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그리고 그 안에 녹아 있는 그분의 마음을 떠올리면 됩니다. 무엇보다도 그분께서
왜 이 세상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는지를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의 기준은 분명해집니다.
옳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에는 중립이
없다”는 교황님의 말씀이 유행어처럼 퍼지고 있습니다만, 결코 가볍게 들어 넘길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시끄럽게 하지
말고, 기도하고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기도 없이,
사랑하는 마음 없이, 용서하고자 하는 결단 없이 복음적 눈물을 흘릴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가 불이익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삶으로 외치는 이가 있다면,
그들은 기도와
사랑과 용서의 과정을 거친 이들이라고 믿어도 됩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념집단도 아니고 이익집단도 아닙니다. 복음정신이 좋아
복음정신을 살고자 하는 이들의 만남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올바른
권위 사용법
-양승국신부-
‘권위!’하면
일단 드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약간은 부정적이고 답답하고 억압적인 느낌입니다. 너무 오랜 세월 일인독재 치하에서 갖은 고난을 겪은 우리 민족이어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릇된 권위를 밥 먹듯이 남발한 일부몰지각한 지도층 인사들로 인해 그런지 ‘권위!’하면 우선 와 닿은 느낌은
강한 거부감입니다.
이런
권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많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사회, 균형 잡힌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올바른 권위의 사용은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고 꼭 필요한 것입니다.
관건은
참된 권위와 그릇된 권위를 식별하는 노력이며, 권위의 올바른 사용 문제입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참된 권위인지 아닌지 식별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기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권위의
사용방법을 바라보면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권위는 종래 종교지도자들이 보여주었던 권위와는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권위였습니다. 예수님 권위의 원천은 인간이나 법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권위의 원천은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왔습니다. 한없는 측은지심, 연민과 자비의 하느님이 그 원천입니다. 우리
죄인의 구원을 위해 한없이 자신을 낮추신 겸손하신 하느님이 예수님 권위의 원천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참된 권위와 그릇된 권위의 식별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권위가 안 인간을 살리는 권위인가 죽이는 권위인가 하는
것입니다. 강자들의 이익을 위해 약자들을 억압하고 힘으로 내리누르는 권위라면 그릇된 권위입니다. 자신들의 목적 추구를 위해 무지막지하게 폭력을
사용하고 있다면 그릇된 권위입니다. 이웃을 힘들게 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게 만들며 고통으로 몰고 가고 있다면 분명히 그릇된
권위입니다.
이웃의
얼굴에 미소를 돌게 하고 충만한 기쁨을 주는 권위라면 올바른 권위입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잘 살게 해주는 권위는 참된
권위입니다. 인간 사이에 생겨나는 다툼이나 분쟁들을 지혜롭게 중재하고 풀어나가는 권위라면 참된 권위입니다. 결국 공동선에 이바지하고 있는
권위하면 올바른 권위입니다.
방한
중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참된 권위의 사용법에 대해서 너무나 상세하고 명확하게 온 몸으로 보여주고 가셨습니다.
사회의
지도자, 교회의 봉사자, 한 조직의 책임자, 가정의 리더로 참된 권위를 실천하고 싶다면 교황님께서 방한하신 후 출국하시기 전까지의 4박 5일간의
행보와 우리에게 건네신 말씀을 하나 하나 반추하다보면 즉시 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다 >
-전삼용신부-
오 헨리의 단편
중에 [강도와
신경통]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강도가 한밤중에
어느 집에 권총을 들고 들어갔습니다.
잠자는 주인을
깨우며 “손
들엇”하였습니다.
잠결에 깨어난
주인은 벌벌 떨면서 왼손을 겨우 들었습니다.
그러자 강도는 또
고함을 칩니다.
“오른손 마저
들엇?”
그래도 집주인은
왼손만 조금 더 높이 들 뿐입니다.
그러자 강도는 또
다시“오른손 마저
들엇!”하며 고함을
지릅니다.
그때 그 집주인은
벌벌 떨면서 “미안하지만 오른손은
신경통 때문에 들 수가 없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강도는
“신경통?
젠장.
나도 신경통 때문이
이 짓을 하고 있는데!”하는
것입니다.
그 강도 역시
오른손이 신경통으로 마비가 되어 제대로 일을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집에
들어가 사람을 위협하고는 물건을 훔쳐내는 짓을 하였던 것입니다.
신경통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 강도는 당장 사람을 죽이거나 물건을 빼앗으려는 생각은 잊고 신경통 이야기를 꺼냅니다.
주인도 신경통
이야기에 공포나 두려움을 잊고는 어떻게 신경통을 치료하느냐,
무슨 약을 쓰느냐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밤새도록 있다가 새벽녘에는 서로 멋쩍게 헤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생각은 강도짓을
해야 하지만 마음은 생각을 넘어섭니다.
연민이 생기고
소통을 하게 됩니다.
비록 이것이
소설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도 사람이
살다보면 생각대로 알 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생각대로 안
돼 죄를 짓게 되기도 하지만,
위 소설처럼
생각대로 안 되어 좋게 끝나게도 됩니다.
교황님은 한국
일정을 마치시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향한 교황님의 행동이 균형을 잃은 것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렇게 아픈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정치적인
균형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고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교황님께서도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지니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교황님이 당신
생각을 넘어서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잘못된 행동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황님의 그런 선택이 참으로 인간적이고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따듯한 모습으로 여겼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항상 진리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은 항상
한계가 있고 하느님의 지혜에 비길 바가 못 됩니다.
그래서 매순간
자신의 생각과 결정대로만 행동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황님은
그저 마음에 따라 행동하니 하느님의 뜻대로 행동하게 되신 것입니다.
이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교황님은 그때
당신의 생각을 따르셨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죄의
성향을 따랐던 것도 아닙니다.
바로
‘마음’을
따르셨습니다.
마음은
‘감정’이란 말과도 매우
헛갈리는 말이지만 감정과는 거의 반대말에 가깝습니다.
감정은 오히려 죄에
가깝고 자주 변하지만,
마음은 하느님의
뜻에 가깝고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감정이나 마음이 둘
다 인간의 지혜나 생각과는 다르게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이 되지 않을 때,
그런 움직임이
감정에서 나오는 것인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명확히 구분해야합니다.
왜냐하면 감정은
죄로 이끌고 마음은 평화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녀에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매를 들어 흠신 패 주었다면,
그것은 마음에서
나온 행동일까요 아니면 감정에서 나온 행동일까요?
우리는 그 행동
다음에 마음이 평화로운지 아니면 불편한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마음은 하느님의
영을 담는 그릇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느님의 영을 받았기에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또 그 영을 통해서
그분의 뜻을 따를 에너지를 얻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분의
영을 받은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녔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영을 우리
마음에 담으면 우리 마음이 성령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마음으로
행동하게 된다면 우리는 누구의 심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행동하였기 때문입니다.
나의 지혜로
행동하려 했다면 심판을 받아야하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행동하였다고 한다면,
누가 그리스도를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오로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습니다.”
판단 받지 않는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 마음이 편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지혜로
행동하건,
아니면 세상의
영이나 나의 육체적인 감정에 따라 살면 마음이 불편해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엔
하느님의 법이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법에
어긋나면 양심의 가책이 일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삽시다.
그러면 항상 마음이
평화롭고 무엇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사람의 판단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아직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못한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판단
받지 않을 때 참 평화가 오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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