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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日本(대일본)帝國(제국)朝鮮(조선)←1910년~1945년→
國旗(국기)
紋章(문장)
日本帝國(일본제국)의 最大版圖(최대판도)
日本帝國(일본제국) 憲法(헌법)原本(원본)에 明示(명시)된
國號(국호).
日本帝國(일본제국)의 領土範圍(영토범위)쇼와(昭和)
時代(시대) 初期(초기): ① 내지(ないし),日本本土(일본본토), ② 타이완(台湾), ③ 가라후토(樺太)(사할린 섬(サハリン島) 南部(남부),④ 朝鮮(조선), ⑤ 관동주(関東州),⑥ 남만주(南満州) 鐵道(철도), ⑦ 남양 군도(南洋諸島) 聯盟國際(국제연맹) 委任統治領(위임통치령).
大日本帝國(대일본제국)의 行政區域(행정구역)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徽章(휘장)
日本帝國(일본제국) 日本帝國(일본제국)의 植民地(식민지)
標語(표어)
內鮮一體(내선일체) 나이센잇타이(年齢センイトタイ)
國家(국가) 기미가요(君が代) 메뉴(メニュー)0:00
首都(수도) 京畿道(경기도) 京城(경성) 게이조(恵三) 北緯(북위) 37° 35′動徑(동경) 127° 0′政治(정치)~政府形態(정부형태)~立憲君主制(입헌군주제)~立法部(입법부)~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初代(초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Masatake Terauchi 2.jpg 1910年(년) 10月(월) 1日(일)~1916年(년) 10月(월) 14日(일) 陸軍(육군)大將(대장) 統監府(통감부)
第(제)3代(대) 統監(통감)內閣(내각)總理(총리) 歷任(역임)日本軍(일본군) 元帥(원수)
第(제)2代(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Hasegawa Yoshimichi.jpg 1916년년 10月(월) 14日(일)~1919年(년) 8月(월) 12日(일) 陸軍大將(육군대장) 日本軍(일본군) 元帥(원수).
第(제)3代(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Makoto Saito 2.jpg 1919年(년) 8月(월) 13日(일)~1927年(년) 12月(월) 10日(일) 海軍大將(해군대장)內閣總理(내각총리) 歷任(역임).
-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Kazushige Ugaki 2.jpg 1927年(년) 4月(월) 15日(일)~ 1927年(년) 10月(월) 1日(일) 陸軍大將(육군대장)臨示(임시)
第(제)4代(대)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Yamanashi Hanzo.jpg 1927年(년) 12月(월) 10日(일)~1929年(년) 8月(월) 17日(일) 陸軍大將(육군대장).
第(제)5代(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Makoto Saito 2.jpg 1929年(년) 8月(월) 17日(일)~1931年(년)6月(월) 17日(일) 海軍大將(해군대장) 內閣總理(내각총리)歷任(역임)
第(제)6代(대)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Kazushige Ugaki 2.jpg 1931年(년) 6月(월) 17日(일)~1936年(년) 8月(월) 5日(일) 陸軍大將(육군대장).
第(제)7代(대) 미나미 지로((南次郎) Minami Jirō 1931.jpg 1936年(년) 8月(월) 5日(일)~1942年(년) 5月(월) 29日(일) 陸軍大將(육군대장).
第(제)8代(대)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Kuniaki koiso.jpg 1942年(년) 5月(월) 29日(일)~1944年(년) 7月(월) 21日(일) 陸軍大將(육군대장), 內閣總理(내각총리) 歷任(역임).
第(제)9代(대)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Nobuyuki Abe as Member of Diet.jpg 1944年(년) 7月(월) 21日(일)~1945年(년) 9月(월) 28日(일) 陸軍大將(육군대장)內閣總理(내각총리) 歷任(역임).마지막 朝鮮總督(조선총독).
Emperor Meiji of Japan (1852年(년)-1912年(년) in 1890年(년).Emperor Meiji of Japan (1852-1912) in 1890.
1890年(년) 日本(일본)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1852年(년)-1912年(년).天皇(천황)
明治(명치)33年(년)1900年(년)、結婚の儀に臨む皇太子嘉仁親王(CrownPrince Yoshihito/Taishō Emperor:皇太子吉仁/大正天皇(황태자길인/대정천황)
結婚(결혼)의 儀式(의식)에 臨(임)하는 皇太子(황태자) 嘉仁(가인)
Hirohito in dress uniform(히로히토 드레스 유니폼).
Japanese Empire. Territory (1870–1895). Acquisitions (1895–1930). Acquisitions (1930–1942).日本帝國(일본제국). 領土(영토) (1870年(년) ~ 1895年(년). 引受(인수) (1895年(년)–1930年(년). 引受(인수) (1930年(년)–1942年(년).
日本(일본) 中部(중부) 야마나시 현(山梨県) 후지 요시다 아라 쿠라 야마 센겐(富士吉田アラクラブ山浅間) 公園(공원)에 있는 츄 레이토 탑(チューンレイトトップ)과 후지산(富士山).
總督(총독)→• 1910~1916→• 1916~1919→• 1942~1944→• 1944~1945.→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歷史(역사)~• 韓日合倂條約(한일합병조약)~• 3.1運動(운동)~• 太平洋戰爭(태평양전쟁)~• 韓半島軍政(한반도군정)~1910年(년) 8月(월) 29日(일)~1919年(년) 3月(월) 1日(일)`1941年(년) 12月(월) 4日(일)~1945年(년) 8月(월) 15日(일)~地理(지리)~面積(면적)→ 222,300 km2 → 內水面(내수면) 比率(비율)→ 2.8%~人文(인문)
公用語(공용어)~日本語(일본어)(公式(공식)~韓國語(한국어)(非公式(비공식)~人口(인구)→1944年(년) 어림→25,120,000名(명) →人口(인구) 密度(밀도)→113名(명)/km2 → 經濟(경제)→通貨(통화)→朝鮮(조선) 円(엔) →宗敎(종교)→國交(국교)→없음 事實上(사실상) 身土(신토) 其他(기타)→現在國家(현재국가)→大韓民國(대한민국)의 旗(기) 大韓民國(대한민국)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의 旗(기)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韓國(한국) 漢字(한자): 日帝強占期(日帝強占期), 日帝時代(일제시대)(韓國(한국) 漢字(한자): 日帝時代(일제시대), 倭政時代(왜정시대)(韓國(한국) 漢字(한자): 倭政時代(왜정시대) 또는 日本統治時代(일본통치시대)의 일본통치시대의조선(日本語(일본어): 日本統治時代の朝鮮)은 1910年(년) 8月(월) 29日(일) ~ 1945年(년) 8月(월) 15日(일) 日本(일본) 帝國(제국)의 植民地(식민지)로서 日本領(일본령) 朝鮮(조선)이 存在(존재)했던 期間(기간)을 가리킨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는 韓國(한국)의 歷史(역사)에서 韓國(한국)의 近現代史(근현대사)를 時代別(시대별)로 나누었을 때 約(약) 35年(년)동안 이어진다. 1910年(년) 韓日倂合(한일병합) 以後(이후) 總督(총독)이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를 通(통)해 日本天皇(일본천황)의 命(명)을 받아 統治(통치)하는 形式(형식)으로 植民支配(식민지배)가 이루어졌으며, 政治的(정치적) 및 外交的(외교적)으로 全的(전적)인 權限(권한)은 日本帝國(일본제국)에 있었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의 뜻은 日帝(일제)에게 强制(강제)로 占領(점령)당한 時期(시기)를 줄인말이다.
一般的(일반적)으로 이 時期(시기)를 日本(일본)의 韓半島(한반도) 支配(지배) 政策(정책)에 따라 세 時期(시기)로 區分(구분)하는데, 흔히 統治政策(통치정책)의 方向(방향)을 基準(기준)으로 '憲兵警察統治期(헌병경찰통치기)'(1910年(년)~1919年(년),'文化統治期(문화통치기)'(1919年(년)~1931年(년),'民族抹殺統治期(민족말살통치기)'(1931年(년~1945年(년)로 各各(각각) 指稱(지칭)한다. 1945年(년) 8月(월) 15日(일)에 日本(일본)의 降伏(항복)과 함께 解放(해방)되었으나 日本(일본)과 斷交(단교)하고 兩國關係(양국관계)는 끊어졌다.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는 以後(이후)에도 한동안 存續(존속)하여 9月(월) 2日(일) 美軍政(미군정)과 蘇聯軍政(소련군정) 駐屯(주둔) 後(후) 行政權引受引繼期間(행정권인수인계기간)을 거치며 9月(월) 28日(일)까지 維持(유지)되었다.
韓國(한국)의 歷史(역사)→韓國史(한국사)
時代史(시대사)→高麗(고려)→朝鮮(조선)→大韓帝國(대한제국)→日本帝國(일본제국)→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大韓民國(대한민국)→南北(남북)의 歷史(역사)→大韓民國(대한민국)→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目次(목차)
1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의 位置(위치),
2 統治區分(통치구분),
3 名稱(명칭),
4 背景(배경),
5 人物(인물),
6 歷史(역사)
6.1 武斷統治(무단통치)기 (1910年(년) ~ 1919年(년)6月(월).1月(월).1日(일) 韓日强制倂合(한일강제병합) 初盤(초반),6.1.2 土地(토지), 山林(산림)收奪(수탈)
6.2 文化(문화) 統治期(통치기) (1919年(년) ~ 1931年(년) 6月(월). 産米增殖(산미증식) 政策(정책)[産米增殖計劃(산미증식계획)은 1920年(년)부터 1934年(년)까지, 日帝(일제)가 朝鮮(조선)을 食量(식량) 供給地(공급지)로 만들기 위하여 實施(실시)한 植民地(식민지) 農業(농업) 政策(정책).]과 供出(공출)
6.3 民族抹殺(민족말살)・兵站火器地統治期(병참화기지통치기) (1931年(년) ~ 1945年(년) 6.3.1 日本(일본)의 大陸進出期(대륙진출기)
6.3.2 創氏改名(창씨개명)과 日本語(일본어) 强要(강요)
6.4 日本(일본)의 敗戰(패전), 蘇聯軍(소련군)·美軍(미군) 軍政(군정)과 獨立(독립).
7 李王(이왕) 7.1 李王世子(이왕세자)
7.2 李王世孫(이왕세손)
8 時代相(시대상)과 獨立運動(독립운동)의 展開(전개), 社會相(사회상) 8.1 1910年代(년대)의 國外(국외)와 國內(국내)의 民族運動(민족운동)과 啓蒙運動(계몽운동) 8.1.1 國外(국외)의 民族運動(민족운동)
8.1.2 民族資本育成運動(민족자본육성운동)
8.1.3 3·1 運動(운동)
8.2 1920年代(년대)의 社會(사회) 8.2.1 日帝公務員(일제공무원), 憲兵補助員(헌병보조원)의 人氣(인기)
8.2.2 1920年代(년대)의 民族解放運動(민족해방운동)
8.2.3 戀愛(연애) 思潮(사조)의 擴散(확산).
8.2.4 離婚率(이혼율)의 增加(증가).
8.2.5 物産獎勵運動(물산장려운동)과 民立大學期成會(민립대학기성회).
8.2.6 國內(국내) 勞動者(노동자)·農民(농민)의 大衆運動(대중운동)
8.2.7 新幹會(신간회), 槿友會(근우회)의 結成(결성)과 活動(활동).
8.2.8 家父長制(가부장제)의 解體(해체)와 離婚(이혼)의 公式化(공식화).
8.3 1930年代(년대) 社會相(사회상) 8.3.1 自由(자유) 戀愛論(연애론)의 擴散(확산).
8.3.2 브나로드(Benarod) 運動(운동)과 文盲退治(문맹퇴치) 運動(운동).
8.3.3 革命的(혁명적) 大衆(대중) 組織(조직) 建設運動(건설운동).
8.3.4 參政權(참정권) 獲得(획득) 計劃(계획)과 失敗(실패).
8.3.5 長期間(장기간)의 不況(불황)과 晩婚(만혼), 獨身者(독신자)의 登場(등장).
8.4 戰時體制(전시체제) 무렵 8.4.1 創氏改名(창씨개명) 事態(사태)
8.4.1.1 創氏改名(창씨개명) 事態(사태)仲裁(중재).
8.4.1.2 創氏改名(창씨개명) 斷行(단행).
8.4.1.3 徵用者(징용자)와 慰安婦(위안부)
8.5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末期(말기).
8.5.1 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의 活動(활동).
8.5.2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의 韓國人(한국인) 參政權(참정권)運動(운동).
8.5.3 韓國人(한국인) 貴族院(귀족원) 議員(의원)選出(선출)過程(과정).
8.5.4 抗日(항일) 武裝鬪爭(무장투쟁)과 光復(광복).
9 日帝(일제)의 統治(통치)와 政策(정책).
9.1 政治(정치), 行政(행정).
9.1.1 地方行政(지방행정).
9.2 言論(언론).
9.3 敎育(교육).
9.4 經濟(경제).
9.4.1 貨幣(화폐).
9.4.2 土地政策(토지정책).
9.4.3 農林政策(농림정책).
9.4.4 産業基盤(산업기반)産業(산업).
9.5.1 稅金徵收(세금징수) 및 納付(납부)
10 人口(인구).
11 歷代(역대)統治者(통치자).
12 其他(기타).
12.1 離婚(이혼)의 登場(등장)과 擴散(확산).
12.2 離婚率(이혼율) 急增(급증).
12.3 衛生(위생).
13 關聯項目(관련항목.)
14 脚注(각주).
15 關聯書籍(관련서적).
16 外部링크((외부link)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의 位置(위치)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는 京城府(경성부) 鐘路區(종로구) 景福宮(경복궁) 內(내)에 位置(위치)했다. 이때부터 景福宮(경복궁)은 試鍊(시련)을 겪어야했다. 以後(이후) 光化門(광화문)을 建春門(건춘문)쪽으로, 勤政殿(근정전)은 朝鮮(조선) 物産(물산)共進會(공진회)때 展示室(전시실)로 使用(사용) 되었다. 勤政殿(근정전), 光化門(광화문)뿐만 아니라 慶會樓(경회루), 建春宮(건춘궁), [思政殿[사정전:景福宮(경복궁) 안에 있는, 임금이 平常時(평상시)에 居處(거처)하는 殿閣(전각).]等(등)도 破壞(파괴)되거나 展示室(전시실)이 되었다.
統治(통치)區分(구분).
1910年(년)~1919年(년) 武斷統治(무단통치) 1920年(년)~1929年(년) 文化統治(문화통치) 1930年(년)~1945年(년) 民族抹殺政策(민족말살정책)
1910年(년) 韓日倂合條約(한일병합조약) 以後(이후), 大韓帝國(대한제국)은 完全(완전)히 日本(일본)에게 나라를 빼았겼고, 나라 이름도 다시 朝鮮(조선)으로 바뀌었다. 1919年(년) 까지 武斷統治(무단통치)를 하다가 3.1運動(운동)이 일어나고 總督(총독)이 이를 鎭壓(진압)하지 못하자, 總督(총독)이 사이토 마코토(斎藤誠)로 바뀌는, 卽(즉) 赴任式(부임식) 날 강우규(姜宇奎)의 爆彈(폭탄)에 맞았으나 죽지않고 統治(통치) 方法(방법)을 바꾸는데, 그게 文化統治(문화통치)이다.
사이토 마코토(斎藤誠)는 朝鮮(조선)의 甲富(갑부), 知識人(지식인), 政治人(정치인)들을 懷柔(회유)한뒤 親日派(친일파)로 만들었다. 또 獄(옥)에 갇힌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들도 꼬셔 密偵(밀정), 卽(즉) 스파이(spy)로 만들었다. 이걸 整理(정리)하면, 3.1運動(운동) 때문에 親日派(친일파)가 急速(급속)히 늘어났다고 보면된다. 以後(이후), 日帝(일제)는 民族抹殺政策(민족말살정책)을 主張(주장)하며 말로는 表現(표현)할수 없는 殘忍(잔인)한일들을 繼續(계속)해나간다.
名稱(명칭)
標準國語大事典(표준국어대사전)은 일제강점기(日帝強占期)라는 말을 쓰고 있다. 흔히 일제시대(日帝時代) 等(등)으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2007年(년) 9月(월) 20日(일) 國會決議案(국회결의안)에서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는 公式用語(공식용어)로 대일항쟁기(對日抗爭期)를 採擇(채택)하기도 하였다.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에서는 일제강점시기(韓國(한국) 漢字(한자): 日帝強占時期)라고 말한다.
背景(배경)
조르쥬 페르디난드 비고(Georges Ferdinand Vigo)의 諷刺畵(풍자화)(1887年(년) 日本(일본)과 中國(중국), 러시아(Russia)가 물고기(朝鮮(조선))를 노리고 있다.
러시아(Russia) 日本(일본:Japan)戰爭(전쟁) 當時(당시)의 政治諷刺(정치풍자) 그림葉書(엽서)日本(일본)의 帝國主義(제국주의): 産業化(산업화)를 通(통)해 資本主義(자본주의)가 된 國家(국가)들은 資本主義(자본주의)의 特性(특성)인 供給過剩(공급과잉) 問題(문제)에 必然的(필연적)으로 逢着(봉착)하게 되었다.
供給過剩(공급과잉)의 問題(문제)를 解決(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市場(시장)의 開拓(개척)이 必要(필요)했고, 市場(시장)을 開拓(개척)하는 가장 좋은 方法(방법)은 植民地(식민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거쳐 日本(일본)의 幕府 體制(막부체제)가 終熄(종식)되고 天皇(천황)에 의한 中央集權的(중앙집권적) 統治(통치)가 이루어지면서, 列强(열강)들의 技術(기술),制度(제도)를 받아들여 産業化(산업화)가 本格化(본격화) 되었다. 日本(일본)은 다른 國家(국가)와 같이 資本主義(자본주의)가 들어섰고, 이는 供給過剩(공급과잉)의 問題(문제)를 낳았다.
다른 列强(열강)들이 植民地(식민지)를 차지했던 것과 같이 日本(일본) 또한 똑같은 先例(선례)를 따르며 帝國主義化(제국주의화) 되었다. 따라서 朝鮮(조선)의 植民地化(식민지화)는 日本(일본) 帝國主義化(제국주의화)의 代表的(대표적)인 犧牲羊(희생양) 이 되는 것이다.
19世紀(세기) 後半(후반), 帝國主義(제국주의)의 植民地(식민지) 爭奪戰(쟁탈전)의 一環(일환)으로 탈아입구(Deaeration entrance:脱亜入欧)를 외치던 日本帝國(일본제국)은 朝鮮(조선)이 修交(수교)를 拒否(거부)하자 이를 名分(명분)으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가 韓半島(한반도) 侵掠(침략)을 위한 征韓論(정한론)을 提起(제기)하였다. 또한 當時(당시) 제정 러시아(Enactment russia)는 南下(남하) 政策(정책)으로 韓半島(한반도) 進出(진출)을 꾀하고 있었으며 朝鮮(조선)은 혼자 이에 맞설 힘이 不足(부족)했기 때문에 日本(일본)은 隣接(인접) 地域(지역)이 다른 列强(열강)의 植民地(식민지)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明成皇后(명성황후)는 興宣大院君(흥선대원군)과의 權力(권력) 다툼 때문에 初期(초기)에는 親日(친일) 開化派(개화파)를 支援(지원)했지만, 김옥균(金玉均) 等(등)이 失權(실권)을 잡으려는 이번에는 淸(청)나라 兵力(병력)을 使用(사용)하여 彈壓(탄압)했다. 淸日(청일) 戰爭(전쟁)에서 日本(일본)이 勝利(승리)하면 이번에는 러시아(Russia)를 끌어 들여 日本(일본) 勢力(세력)을 牽制(견제)하려고하는 等(등) 國益增進(국익증진) 보다는 勢力(세력)다툼에 바빴다.
1876年(년) 2月(월) 27日(일) 江華島(강화도) 條約(조약) 以後(이후) 日本(일본)은 朝鮮(조선)을 武力(무력)으로 掌握(장악)하기 위한 長期的(장기적) 計畫(계획)을 樹立(수립)하였고, 1894年(년) 淸日(청일) 戰爭(전쟁)과 1905年(년)의 러시아(Russia) 日本(일본:Japan)戰爭(전쟁)에서 勝利(승리)하며 韓半島(한반도)에 대한 侵掠(침략)을 可視化(가시화)했다. 以後(이후) 日本帝國主義者(일본제국주의자)들은 그 外(외)에도 主權國(주권국)인 大韓帝國(대한제국)의 國權(국권)을 無視(무시)하고, 英國(영국) 日本(일본) 同盟(동맹) 및 태프트-가쓰라(Taft-Kathura) 密約(밀약) 等(등)의 條約(조약)을 締結(체결)하며, 韓國(한국) 進出(진출)을 本格化(본격화)하였다.
日帝(일제)는 1905年(년) 11月(월) 17日(일) 武力(무력)을 同伴(동반)한 乙巳勒約(을사늑약)으로 大韓帝國(대한제국)의 外交權(외교권)을 侵奪(침탈)한 데 이어 韓日新協約(한일신협약)(1907年(년))과 己酉覺書(기유각서)(1909年(년) 等(등)으로 大韓帝國(대한제국)의 排他的(배타적) 權利(권리)를 漸漸(점점) 吸收(흡수)하였다.(이 時期(시기)의 仔細(자세)한 歷史(역사)는 大韓帝國(대한제국)이나 開化期(개화기) 等(등)의 項目(항목)을 參照(참조). 國內(국내)에서는 一進會(일진회)와 이완용(李完用)이 韓日合邦(한일합방)에 協力(협력)했다.
1909年(년) 7月(월)에 韓國(한국)의 吸收(흡수)가 日本(일본) 內閣(내각)에서 決定(결정)되었고, 以後(이후) 1909年(년) 10月(월) 26日(일) 안중근(安重根)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銃殺(총살)하였다. 그러나 이 事件(사건)을 名分(명분)삼아 日本內(일본내)에서 帝國主義者(제국주의자)들의 韓國(한국)合倂(합병)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져 오히려 倂合(병합)의 推進(추진)이 加速化(가속화)되었다. 윤치호(尹致昊)도 當時(당시) 이를 두고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暗殺(암살)이 韓日合邦(한일합방)을 더욱 促進(촉진)시켰다."는 記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1910年(년) 8月(월) 29日(일), 韓日倂合(한일병합) 條約(조약)이 締結(체결)되면서 大韓帝國(대한제국)은 滅亡(멸망)하고 韓半島(한반도)는 日本帝國(일본제국)의 領土(영토)로 編入(편입)되었다. 當時(당시) 日本(일본)은 大韓帝國(대한제국)을 '朝鮮(조선)'으로, 大韓帝國(대한제국)의 皇帝(황제)를 '李王(이왕)'으로 낮추어 불렀다. 結局(결국) 韓半島(한반도) 地域(지역) 全體(전체)가 日本帝國(일본제국)의 植民地(식민지)가 되어, 植民政府(식민정부)인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에 依(의)해 1945年(년)까지 35年間(년간)의 植民支配(식민지배)를 받게 되었다.
人物(인물)
권중현.김경.김구.김규식.김기창.김동리.김영랑.김좌진.나석주.덕혜옹주.문양목.박두진.박목월.박열.박영효.박제순.서재필.서정주.송몽규.안창호.양기탁.양세봉.여운형.유관순.윤동주.윤봉길.이건.이근택.이봉창.이상.이완용.이왕세자.이우.이육사.이재명.이종오.이중섭.이지용.이진.이학현.이해원.임천택.장인환.전명운.정재관.조지훈.지청천.최정익.한용운.홍범도.
歷史(역사)
무단 통치기 (1910年(년)~ 1919年(년) ~ 韓日强制倂合(한일강제병합) 初盤(초반)
武斷統治(무단통치)를 實施(실시)한 初代(초대) 朝鮮(조선) 總督(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는 强制倂合(강제병합) 直後(직후)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는 1910年(년) 9月(월)에 憲兵警察(헌병경찰)을 創設(창설)하고 武斷統治(무단통치)에 突入(돌입)하게 된다. 卽(즉) 憲兵(헌병)이 一般警察(일반경찰)의 行政(행정)까지 擔當(담당)하면서, 言論(언론)·集會(집회)·出版(출판)·結社(결사)의 自由(자유)를 剝奪(박탈)하고, 卽決(즉결) 處分權(처분권) 等(등)을 갖게 되는 것이다.
朝鮮總督(조선총독)은 日本軍(일본군) 現役(현역) 或(혹)은 日本(일본) 豫備役(예비역) 將星(장성) 中(중)에서 任命(임명)되었고, 日本(일본)天皇(천황)에 直屬(직속)되어 立法權(입법권)·司法權(사법권)·行政權(행정권) 및 軍隊(군대) 統率權(통솔권)까지 掌握(장악)하였다. 또한 天皇(천황)의 直屬(직속)이라 內閣(내각)이나 議會(의회)의 干涉(간섭)을 받지 않았다. 總督(총독) 아래에는 行政(행정)과 敎育(교육), 文化(문화)를 擔當(담당)하는 政務總監(정무총감)과 治安(치안)을 擔當(담당)하는 警務總監(경무총감)이 存在(존재)하였다.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는 2萬(만)여 명의 憲兵警察(헌병경찰)을 韓半島(한반도) 全域(전역)에 配置(배치)하고 韓國人(한국인) 中(중) 憲兵補助員(헌병보조원)을 採用(채용)하여 憲兵(헌병)들의 業務(업무)를 補助(보조)케 하여 憲兵(헌병) 中心(중심)의 抑壓(억압) 統治(통치)를 實施(실시)하였다.
憲兵警察(헌병경찰)은 治安(치안)業務(업무)와 함께,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 索出(색출) 等(등) 民生(민생) 全般(전반)에 關與(관여)하였는데, 여기에 當時(당시) 統治(통치)의 抑壓性(억압성)을 端的(단적)으로 보여 주는 制度(제도)가 朝鮮(조선) 笞刑令(태형령)으로, 甲午改革(갑오개혁) 때 廢止(폐지)되었던 笞刑(태형)을 復活(부활)시켜 韓國人(한국인)에게만 差別的(차별적)으로 適用(적용)하였다.
또한 이 時期(시기)에는 韓國人(한국인)의 各種(각종) 團體(단체)가 解散(해산)당하였다. 1911年(년) 新民會(신민회)를 解散(해산)시킨 105人(인) 事件(사건)이 代表的(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또 日帝(일제)는 新聞紙法(신문지법), 出版(출판)법, 保安法(보안법)을 通(통)해 韓國人(한국인)의 言論(언론), 出版(출판), 集會(집회), 結社(결사)의 自由(자유)를 制限(제한)하였다.
日本(일본)은 第(제)1次(차)朝鮮敎育令(조선교육령)에서 漢文敎育(한문교육)中心(중심)의 書堂(서당)을 廢止(폐지)하고 小學校(소학교)를 設立(설립)해 갔다. 旣存(기존)의 學校(학교)는 救濟專門學校(구제전문학교)으로 再編(재편)되었다.
土地(토지), 山林收奪(산림수탈)
日本(일본)은 植民支配(식민지배)를 위한 財政(재정)을 마련하고 日本人(일본인)의 土地(토지)收奪(수탈)을 圓滑(원활)하게 하기 위해 1912年(년)부터 施行(시행)된 土地調査事業(토지조사사업)을 進行(진행)하면서 期限附(기한부) 申告制(신고제)로 施行(시행), 이를 잘 알지 못한 農民(농민)들의 土地(토지)를 侵奪(침탈)하였고, 所有權(소유권)이 不分明(불분명)한 마을이나 門中(문중)의 土地(토지), 政府(정부)와 王室(왕실)의 土地(토지) 等(등)도 東洋拓殖株式會社(동양척식주식회사)에 넘겼다. 侵奪(침탈)된 土地(토지)는 日本(일본) 移民者(이민자)들에게 싼 값에 팔렸고 이 때에 從來(종래)의 慣習的(관습적) 耕作權(경작권)인 賭地權(도지권) 槪念(개념)이 無視(무시)되는 現像(현상)이 나타났다.
以外(이외)에도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의 許可(허가)에 依(의)해서만 會社(회사)를 設立(설립)할 수 있다는 會社令(회사령)이 公布(공포)되었는데 이것은 民族(민족) 資本(자본)의 成長(성장)을 抑制(억제)하여 結局(결국) 日本(일본) 企業(기업)이 大部分(대부분)의 重要(중요)産業(산업)을 獨寡占(독과점)하고, 一部(일부) 韓國人(한국인)이 精米(정미)과 皮革業(피혁업)에 從事(종사)할 수 있었다.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農林局(농림국)은 山林令(산림령)과 林野(임야) 調査令(조사령), 漁業令(어업령), 鑛業令(광업령) 等(등)을 發表(발표)했으며 資源(자원) 開發(개발)이나 會社(회사) 設立(설립) 認許可(인허가) 等(등)을 日本人(일본인)들에게 有利(유리)하게 함으로써 事實上(사실상) 資本(자본)을 流出(유출)시키고, 經濟的(경제적) 支配權(지배권)은 大部分(대부분) 日本人(일본인)에게 넘어가 韓國(한국)을 原料(원료) 供給地(공급지)와 商品(상품) 市場(시장)으로 轉換(전환)시키려고 하였다.
담배와 人蔘(인삼), 소금의 專賣制(전매제)를 實施(실시)하여 植民地(식민지) 財政(재정) 輸入增大(수입증대)를 꾀하였다. 그리고 이 時期(시기)에 新作路(신작로)와 幹線鐵道(간선철도), 港灣(항만) 施設(시설)을 整備(정비)하여 韓國(한국)의 食量(식량)과 原料(원료)를 日本(일본)으로의 輸送(수송)便宜(편의)를 돕고, 日本(일본) 商品(상품)의 韓國(한국) 販賣(판매)를 效率化(효율화)하였다. 한편 1920年(년) 17萬(만)여 名(명)이던 日本人(일본인) 居住者(거주자)들의 數字(숫자)는 불어나서 1940年(년)에는 70萬(만) 名(명)에 이르렀다.
一部(일부) 韓國人(한국인) 地主(지주)도 生産性(생산성) 向上(향상)으로 相當(상당)한 利益(이익)을 얻고 있었다. 그 代表的(대표적)인 人物(인물)이 (三星, Samsung) 그룹(group)의 創立者(창립자)인 이병철(李秉喆)이다. 그는 慶南(경남) 地主(지주)의 次男(차남)으로 태어나 日帝(일제)에 쌀의 流通(유통)으로 얻은 巨額(거액)의 資金(자금)을 밑천으로 1938年(년)에 大邱(대구)에서 三星(삼성) 商社(상사)를 設立(설립)하였던 것이 오늘날 三星(삼성)의 始初(시초)이다.
文化(문화) 統治期(통치기) (1919年(년) ~ 1931年(년)
文化統治(문화통치)를 實施(실시)한 朝鮮(조선)總督(총독) 사이토 마코토(斎藤誠).
3·1 運動(운동)에 依(의)해 日本(일본) 政府(정부)나 總督府(총독부) 側(측)에서는 旣存(기존)의 統治(통치)方式(방식)을 深刻(심각)하게 考慮(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이토 마코토(斎藤誠) 總督(총독)의 派遣(파견)을 起點(기점)으로 旣存(기존)의 强壓的(강압적) 統治(통치)에서 懷柔的(회유적) 統治(통치)로 그 方向(방향)을 旋回(선회)하게 된다.
그 結果(결과) 團體活動(단체활동) 및 言論(언론) 活動(활동)이 許可(허가)되기 始作(시작)하였고, 基礎的(기초적)인 初等 敎育(초등교육)과 農業敎育(농업교육)이 擴大(확대)되었다. 그러나 民立大學(민립대학) 設立(설립) 運動(운동)을 彈壓(탄압)하는 等(등) 民間(민간)의 高等敎育(고등교육)을 不定(부정)하는 모습이 나타났으며, 日本人(일본인)과 朝鮮人(조선인)을 差別(차별) 待遇(대우)하는 各種(각종) 惡法(악법)들은 殘存(잔존)하였다는 限界點(한계점)이 있었다.
“ 1.核心的(핵심적) 親日(친일) 人物(인물)을 골라 그 人物(인물)로 하여금 貴族(귀족), 兩班(양반), 儒林(유림), 富豪(부호), 敎育家(교육가), 宗敎家(종교가)에 浸透(침투)하여 階級(계급)과 事情(사정)을 參酌(참작)하여 各種(각종) 親日(친일)團體(단체)를 組織(조직)하게 한다.
2.各種(각종) 宗敎團體(종교단체)도 中央集權化(중앙집권화)해서 그 最高(최고) 指導者(지도자)에 親日派(친일파)를 앉히고 顧問(고문)을 붙여 御用化(어용화)한다.
3.朝鮮(조선) 問題解決(문제해결)의 成功(성공) 與否(여부)는 親日(친일)人物(인물)을 많이 얻는 데에 있으므로 親日(친일) 民間人(민간인)에게 便宜(편의)와 援助(원조)를 주어 秀才敎育(수재교육)의 이름 아래 많은 親日(친일)知識人(지식인)을 긴 眼目(안목)으로 키운다.
4.兩班(양반) 儒生(유생) 가운데 職業(직업)이 없는 者(자)에게 生活(생활) 方途(방도)를 주는 代價(대가)로 이들을 온갖 宣傳(선전)과 民丁(민정) 廉探(염탐)에 利用(이용)한다. 朝鮮人(조선인) 富豪(부호) 資本家(자본가)에 대해 日本(일본)·朝鮮(조선) 資本家(자본가) 連繫(연계)를 推進(추진)한다.
5.農民(농민)들을 統制(통제) 調整(조정)하기 위해 民間(민간) 有志(유지)가 이끄는 親日(친일)團體(단체)인 교풍회(矯風會), 진흥회(振興會)를 두게 하고, 이들에게 國有林(국유림)의 一部(일부)를 拂下(불하)해 주고 入會權(입회권)을 주어 懷柔(회유), 利用(이용)한다.”
— 사이토 마코토(斎藤誠) 總督(총독), 《朝鮮(조선) 民族(민족) 運動(운동)에 대한 對策(대책)》
또한 憲兵警察制(헌병경찰제)를 보통 警察制(경찰제)로 바꾸었지만 警察數(경찰수)와 裝備(장비)는 더욱 더 强化(강화)되었으며, '高等警察制(고등경찰제)'와 治安(치안) 維持法(유지법)을 導入(도입)하여 獨立運動(독립운동)을 막았다.
또 新聞(신문)에 대한 檢閱(검열)·削除(삭제)·廢刊(폐간) 等(등)이 持續的(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等(등) 民族主義(민족주의)에 대한 抑壓(억압)은 持續(지속)되었고 이에 反感(반감)을 가진 民族主義(민족주의) 勢力(세력) 內(내)에서 非妥協的(비타협적) 民族主義(민족주의)와 民族(민족) 改良主義(개량주의)로 分化(분화)하여 民族性(민족성)改造論(개조론)이 登場(등장)하였으며, 이는 自治運動(자치운동) (參政權運動(참정권운동)으로 發展(발전)해 나갔다.
酸味增(산미증:1920年(년)부터 1934年(년)까지, 日帝(일제)가 朝鮮(조선)을 食量(식량) 供給地(공급지)로 만들기 위하여 實施(실시)한 植民地(식민지) 農業(농업) 政策(정책).
政策(정책)과 供出(공출).
水豊(수풍)댐[水豐댐:平安北道(평안북도) 朔州郡(삭주군) 청수읍 수풍리에 있는 大規模(대규모) 중력(重力) 콘크리트 댐(Concrete dam). 1944年(년)에 完工(완공)되었다.]은 아시아(Asia)( 최대의 댐이었다.
한편으로 이 當時(당시)에는 日本帝國(일본제국)의 急擊(급격)한 工業化(공업화)로 因(인)한, 日本內(일본내) 食糧(식량)不足(부족) 問題(문제)를 解決(해결)하려는 産米增殖計劃(산미증식계획))이 樹立(수립)되었다.
土地(토지)를 改良(개량)하거나 水利組合(수리조합)의 役割(역할)을 增大(증대)하여 韓半島(한반도)의 米穀(미곡)生産量(생산량)을 增大(증대)시키는 試圖(시도)가 이루어졌으나, 오히려 增産(증산)되는 量(양)보다 日本(일본)으로 流出(유출)되는 量(양)이 더 높아져 韓半島(한반도)의 食糧(식량) 不足(부족)이 深刻(심각)해졌다. 거기다 增産(증산) 費用(비용)을 小作(소작) 農民(농민)에 轉嫁(전가)하여, 總督府(총독부)가 植民地(식민지) 地主(지주)를 擁護(옹호)하는 等(등) 植民地(식민지) 地主制(지주제)가 深化(심화)되어갔다. 이 計劃(계획)은 1930年代(년대)初盤(초반) 日本(일본)內部(내부)의 쌀공급넘침으로 잠시 中斷(중단)되었으나, 1930年代(년대)後半(후반) 大陸(대륙)侵掠(침략)이 加速化(가속화)되면서 다시 再開(재개)되었다.
또 第(제)1次(차) 世界(세계) 大戰(대전)을 通(통)한 日本(일본) 工業(공업) 資本(자본)의 成長(성장)으로 剩餘(잉여)資本(자본)을 通(통)한 植民地(식민지) 工業化(공업화)의 必要性(필요성)이 增大(증대)되었다. 이때 製絲(제사), 棉紡織(면방직) 等(등)의 輕工業(경공업) 中小(중소) 資本(자본)의 投資(투자)가 增加(증가)하였고, 一部(일부) 日本(일본) 大資本(대자본)의 投資(투자)가 있었다.
한편 韓國人(한국인) 資本(자본)의 會社(회사)와 工場(공장) 等(등)의 成長(성장)도 있었는데, 이러한 理由(이유)로 韓國人(한국인) 勞動者(노동자) 數(수)가 增加(증가)하였다. 이 때의 賃金(임금)差別(차별)과 劣惡(열악)한 勞動環境(노동환경)은 勞動爭議(노동쟁의)가 活性化(활성화)되는 契機(계기)가 되었다.
民族(민족)抹殺(말살)・兵站化基地(병참화기지)統治期(통치기) (1931年(년) ~ 1945年(년).日本(일본)의 大陸(대륙)進出期(진출기)
朝鮮人(조선인) 志願兵(지원병).志願者(지원자)倍率(배율)
1938年(년) 2,946 406 7.3~1939年(년) 12,348 613 20.1~1940年(년) 84,443 3,060 27.6~1941年(년) 144,743 3,208 45.1~1942年(년) 254,273 4,077 62.4~1943年(년) 303,394 6,300 48.2~合計(합계) 799,201 17,664 45.2.
1943年(년) 朝鮮人(조선인) 陸軍特別支援兵(육군특별지원병) 兵士(병사)
1931年(년) 日帝(일제)는 滿洲事變(만주사변)을 일으킨다. 日帝(일제)는 中華民國(중화민국)을 비롯한 大陸(대륙)으로의 侵掠(침략)을 本格化(본격화)하면서 韓半島(한반도)를 日本(일본)의 中國大陸(중국대륙)進出(진출)의 前進基地(전진기지)로 삼고, 이에 따라 日本(일본)의 經濟的(경제적) 支配 政策(지배정책)도 兵站基地(化병참기지화)로 旋回(선회)하였다.
이 時期(시기) 朝鮮(조선)思想犯保護觀察令(사상범보호관찰령) 等(등)을 公布(공포)하여 思想統制(사상통제)를 强化(강화)하였고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日帝(일제)가 만들어 낸 植民史觀(식민사관)의 하나로, 日本人(일본인)과 朝鮮人(조선인)의 祖上(조상)이 같다는 理論(이론). 日帝(일제)가 朝鮮(조선)을 統治(통치)하는 것에 正當性(정당성)을 附與(부여)하였다.]을 通(통)해 韓國(한국)・朝鮮(조선)民族主義(민족주의)에 대한 不正(부정)도 이루어졌다.
日帝(일제)는 大恐慌(대공황) 以後(이후) 선진 資本主義(자본주의) 國家(국가)의 保護貿易(보호무역) 强化(강화)로 棉紡織(면방직) 原料(원료)의 供給(공급)이 不足(부족)하였다. 이에 따라 韓國(한국)에 南面(남면) 北洋政策(북양정책)을 樹立(수립)하여 工業(공업)原料(원료)를 增産(증산)하기 위해 南部(남부)에는 綿花(면화) 栽培(재배)와 北部(북부)의 綿羊(면양) 飼育(사육)을 督勵(독려)하였다. 그리고 大陸(대륙) 進出(진출)을 위한 兵站基地(병참기지)화 政策(정책)에 따라, 鴨綠江(압록강)과 豆滿江(두만강) 一帶(일대)에 發電所(발전소)를 建立(건립)하고 鑛業(광업)分野(분야)가 成長(성장)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韓半島(한반도) 北部(북부) 地帶(지대)(現在(현재) 北韓(북한)에 軍需工場(군수공장)을 大擧(대거) 建立(건립)하였다.
1937年(년) 中日戰爭(중일전쟁)을 起點(기점)으로 侵略戰爭(침략전쟁)을 本格化(본격화)하면서, 國家總動員令(국가총동원령) 下(하)에 産米增殖計劃(산미증식계획)이 再開(재개)되고 米穀供出制(미곡공출제)가 施行(시행)되어, 韓國人(한국인)들은 食糧(식량)을 配給(배급)받게 되는 事態(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戰爭初期(전쟁초기)에는 志願兵制(지원병제)와 徵用制(징용제)를 實施(실시)하였는데, 1940年代(년대) 太平洋戰爭(태평양전쟁)이 勃發(발발)하면서 이러한 弊害(폐해)는 深化(심화)되었다.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는 滿洲事變(만주사변)과 中日(중일)戰爭(전쟁)에 動員(동원)할 人力(인력)과 軍資金(군자금), 軍需品(군수품)을 韓國(한국)으로부터 調達(조달)했으며, 徵用(징용)과 徵發(징발), 知識人(지식인)들을 通(통)한 自發的(자발적) 徵用(징용), 徵發(징발) 督勵(독려), 誠金(성금) 募金(모금) 等(등)의 多樣(다양)한 方式(방식)으로 勞動力(노동력)과 資本(자본)을 差出(차출)해갔다. 1941年(년)까지 約(약) 160萬(만) 名(명)의 韓國人(한국인)이 日本內(일본(내)의 工場(공장), 建設現場(건설현장), 炭鑛(탄광), 農場(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또한 朝鮮(조선)總督府(총독부)는 徵兵(징병) 制度(제도)를 實施(실시)하여 韓國人(한국인)을 戰爭(전쟁)에 動員(동원)하는 한편, 10代(대) 初盤(초반)에서 40代(대)에 이르는 女性(여성)들을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强制(강제) 動員(동원)하거나 軍需工場(군수공장) 等地(등지)에 보냈으며, 그 中(중) 大部分(대부분)을 中國(중국)과 南洋(남양)地方(지방)의 最前線(최전선)에 投入(투입)하여 日本軍(일본군)을 相對(상대)하는 日本軍(일본군)慰安婦(위안부)로 보냈다.
創氏改名(창씨개명)과 日本語(일본어) 强要(강요)
創氏改名(창씨개명)과 日本語(일본어) 使用(사용)을 强要(강요)한 徵集(징집)한 朝鮮(조선)總督(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郎).
韓國人(한국인)들을 完璧(완벽)한 日本人(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民族(민족)抹殺統治(말살통치)가 進行(진행)되어, 內鮮一體(내선일체)와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日帝(일제)가 만들어 낸 植民史觀(식민사관)의 하나로, 日本人(일본인)과 朝鮮人(조선인)의 祖上(조상)이 같다는 理論(이론). 日帝(일제)가 朝鮮(조선)을 統治(통치)하는 것에 正當性(정당성)을 附與(부여)하였다.]에 依據(의거)한 皇國(황국)臣民化(신민화) 政策(정책)이 實施(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日本(일본)은 皇國臣民(황국신민)의 敍事(서사)의 暗記(암기)와 神社參拜(신사참배) 및 日本語(일본어)의 使用(사용)을 强要(강요)하였다.
愛國班(애국반)을 通(통)해 國民生活(국민생활) 全般(전반)을 統制(통제)하였는데, 學校(학교)의 한글 敎育(교육)은 中斷(중단)되었고, 韓國(한국)의 歷史(역사)를 배울 수 없게 되었으며, 創氏改名(창씨개명)이 强壓的(강압적)으로 行(행)해졌다. 民族性(민족성)이 强(강)한 專門學校(전문학교)는 廢校(폐교)되거나 强制(강제) 改名(개명)당했다.
또한 "朝鮮(조선)이 日本(일본)領土(영토)인 以上(이상) 韓國語(한국어)는 日本語(일본어) 方言(방언)이며, 乃至(내지)사투리뿐이며 窮極的(궁극적)으로 燒滅(소멸)시켜야한다"는 朝鮮語(조선어)方言論(방언론)에 따라 韓國語(한국어)를 强制(강제)로 廢棄(폐기)하고 日本語(일본어)를 母國語化(모국어화)할 것을 要求(요구)하는 意見(의견)이 日本人(일본인) 言語學者(언어학자)들로부터 製出(제출)되었다.
1938年(년) 第(제)3次(차) 敎育令(교육령)에서 朝鮮語(조선어)가 수의(隨意)科目(과목)이 된 것을 始作(시작)으로, 公的(공적)자리에서의 朝鮮語(조선어)使用(사용)이 賞罰(상벌)의 對象(대상)이 되는 等(등) '國語(국어)(日本語(일본어)常用(상용)'運動(운동)이 本格化(본격화)되면서 公敎育(공교육)에서 朝鮮語(조선어)가 追放(추방)되기 始作(시작)했다.
1942年(년) 10月(월) 朝鮮語學會(조선어학회)의 主要(주요) 構成員(구성원)이 治安維持法(치안유지법) 違反(위반)으로 逮捕(체포)되는 朝鮮語學會事件(조선어학회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根據(근거)로 日帝(일제)當國(당국)이 朝鮮語(조선어)抹殺(말살)을 圖謨(도모)했다고 하는 主張(주장)도 있다. 한편, 1945年(년) 解放(해방)當時(당시), 南韓(남한)의 12歲(세)以上(이상)人口(인구)의 78%는 한글 文盲(문맹)이었다는 主張(주장)이 있으며, 이것을 가지고 日本語(일본어)强制普及政策(강제보급정책)의 問題性(문제성)을 指摘(지적)하는 主張(주장)도 있다.
그러나 現實的(현실적)으로 韓國語(한국어)가 日常生活(일상생활)이나 新聞(신문)따위에서 完全(완전)히 排除(배제)될수는 없었다.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에서도 1921年(년)부터 1945年(년) 解放(해방)에 이르기까지, 朝鮮語(조선어)能力(능력)試驗(시험)에 合格(합격)한 職員(직원)은 昇進(승진)과 給與(급여)면에서 有利(유리)한 待遇(대우)를 받았었다. 따라서 韓國語(한국어)가 計劃的(계획적)으로 抹殺(말살)된 痕迹(흔적)은 없었다고 主張(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學校(학교)에서 朝鮮語(조선어)授業(수업)밖의 모든 授業(수업)이 日本語(일본어)로 進行(진행)되었음에 비추어, 大部分(대부분)의 敎育課程(교육과정)에서 日本語(일본어)가 使用(사용)되었음을 알수 있다. 다만 1943年(년)當時(당시)까지도 日本語(일본어)를 解釋(해석)하는 朝鮮人(조선인)은 1,000名(명)당 221.5名(명)에 지나지않았다고 主張(주장)하는 資料(자료)도 있어 明確(명확)하지 않다.
日本(일본)의 敗戰(패전), 蘇聯軍(소련군)·美軍(미군) 軍政(군정)과 獨立(독립).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終戰(종전) 後(후) 戰犯(전범)으로 處刑(처형)된 日本(일본) 陸軍(육군) 中將(중장) 홍사익[洪思翊:1887年(년) 2月(월) 2日(일) ~ 1946年(년) 9月(월) 26日(일)은 大韓帝國(대한제국)과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日本(일본)의 軍人(군인)이며,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에 日本軍(일본군) 陸軍(육군) 中將(중장)을 지냈다. 韓國人(한국인)(朝鮮人(조선인) 出身(출신)으로 日本(일본) 陸軍(육군)士官學校(사관학교)와 日本(일본) 陸軍大學(육군대학) 出身(출신)으로 日本(일본) 陸軍(육군) 中將(중장)에 올랐으며,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終戰(종전) 以後(이후)에 필리핀 마닐라(Manila, Philippines)國際軍事裁判(국제군사재판)에서 戰犯(전범)으로 處刑(처형)되었다.]
建國準備委員會(건국준비위원회) 發足式(발족식)때 여운형(呂運亨)
1945年(년) 8月(월) 16日(일)서울 市內(시내)에 걸려 있던 日本(일본) 國旗(국기)를 내리고 美國(미국) 國旗(국기)를 揭揚(게양)하는 美軍(미군)(1945年(년)9月(월) 9日(일)
日本(일본)의 降伏(항복),
1945年(년) 8月(월) 15日(일) 太平洋(태평양) 戰爭(전쟁)에서 日本帝國(일본제국)이 敗戰(패전)하여 韓半島(한반도)는 獨立(독립)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는 卽時(즉시) 撤收(철수)한 것은 아니고 美蘇(미소) 軍政(군정)이 들어서기 前(전)까지 當分間(당분간)은 統治(통치)狀態(상태)를 維持(유지)하였었다. 聯合軍(연합군)에 依(의)해 韓國人(한국인) 出身(출신)의 戰犯(전범)들도 處刑(처형)되었다. 1946年(년) 通化事件(통화사건)으로 獨立軍(독립군)이 日本軍(일본군) 敗殘兵(패잔병)을 鎭壓(진압)하는 일도 있었다.
李王[이왕 殿下(전하)純宗(순종)께서는 어제 午前(오전) 11時(시) 30分(분)에 테라우치(寺內) 總督(총독)을 訪問(방문)하여 約(약) 30分間(분간) 總督(총독)과 歡談(환담)하신 後(후)에, 귀궁(歸宮; 宮(궁)으로 돌아옴)하였다는데, 李王(이왕) 殿下(전하)의 이번 訪問(방문)은 지난 7日(일) 爵位(작위) 授與式(수여식)을 行(행)하여 王家(왕가)의 의친(懿親; 정분이 두터운 친척)과 이조(李朝)의 功臣(공신)에게 各各(각각) 영작(榮爵; 영예로운 작위)을 준 것에 대하여 비상(非常)히 생각하셔서 答禮(답례) 次(차) 訪問(방문)하심이라더라.]
의민태자[懿愍太子, 1897年(년) 10月(월) 20日(일) ~ 1970年(년) 5月(월) 1日(일)는 韓國史(한국사)의 마지막 皇太子(황태자)이자 日本帝國(일본제국)의 軍人(군인)이다. 諱(휘)는 은(垠), 兒名(아명)은 유길(酉吉), 字(자)는 광천(光天), 雅號(아호)는 명휘(明暉), 명신재(明新齋)이며, 本貫(본관)은 全州(전주). 死後(사후)에 全州李氏(전주이씨) 大同宗約院(대동종약원)에서 문인무장지효명휘의민황태자(文仁武莊至孝明暉懿愍皇太子)라는 諡號(시호)를 올렸으나 正式(정식) 諡號(시호)가 아닌 賜諡(사시)이다. 皇太子(황태자)로 冊封(책봉)되기 以前(이전)의 爵號(작호)인 영친왕(英親王)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大韓帝國(대한제국)의 初代(초대) 皇帝(황제) 高宗(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純獻皇貴妃(순헌황귀비) 嚴氏(엄씨)이다. 순종(純宗)과 義親王(의친왕), 덕혜옹주(德惠翁主)와는 異腹(이복) 兄弟(형제)이다. 1897年(년)에 慶運宮(경운궁) 肅雝齋(숙옹재)에서 태어나 義親王(의친왕)을 제치고 病弱(병약)하여 아들이 없었던 純宗(순종)의 皇太子(황태자)로 冊封(책봉)되었다. 1907年(년)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依(의)하여 强制(강제)로 日本(일본) 留學(유학)을 떠났다.
1910年(년)에 韓日倂合(한일병합)으로 大韓帝國(대한제국) 皇帝(황제)가 李王(이왕)으로 格下(격하)되면서 李王世子(이왕세자)로 格下(격하)되었으며, 1920年(년)에 日本(일본)皇族(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내친왕(梨本宮雅子内親王)과 政略(정략)婚姻(혼인)을 하였다. 1926年(년)에 純宗(순종)이 昇遐(승하)하자 王位(왕위)를 繼承(계승)하여 第(제)2代(대) 昌德宮(창덕궁) 이왕(李王)이 되었다. 陸軍(육군)士官學校(사관학교)와 陸軍大學(육군대학)교를 卒業(졸업)하였고, 帝國(제국) 陸軍(육군)에 入隊(입대)하여 階級(계급)이 中將(중장)에 이르렀다.
1963年(년)에서야 昏睡狀態(혼수상태)인 채 大韓民國(대한민국)에 永久(영구) 歸國(귀국)하여 病床(병상)에서 生活(생활)하다가 1970年(년)에 昌德宮(창덕궁) 樂善齋(낙선재)에서 死亡(사망)하였다. 遺骸(유해)는 京畿道(경기도) 南揚州市(남양주시) 金谷洞(금곡동)의 洪裕陵(홍유릉)에 安葬(안장)되었으며, 元號(원호)는 영원(英園)이다.
마지막 皇太子(황태자) 英親王(영친왕)과 皇太子妃(황태자비) 이방자(李方子) 女史(여사)
이은(李垠)이 大韓帝國(대한제국)의 皇太子(황태자)였음에도 不久(불구)하고 帝國(제국)陸軍(육군)에 服務(복무)하였고, 日本(일본) 皇族(황족)과 結婚(결혼)하였으며, 그에 준하는 待遇(대우)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親日(친일)論難(논란)이 있다. 2009年(년)에 《親日人名事典(친일인명사전)》을 發刊(발간)한 民族問題硏究所(민족문제연구소)는 事實上(사실상) 볼모의 處地(처지)였다는 事實(사실)을 勘案(감안)하여 人名事典(인명사전) 名單(명단)에서 除外(제외)하였다
마지막 皇太子(황태자) 英親王(영친왕)과 皇太子妃(황태자비) 이방자(李方子) 女史(여사)이건 王子(왕자)와 그의 wife.
이건(李鍵:1909年(년) 10月(월) 28日(일) ~ 1990年(년) 12月(월) 21日(일))는 日本(일본)의 陸軍(육군) 軍人(군인)이다. 高宗(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義親王(의친왕) 이강(李堈)의 長男(장남)으로 李王家(이왕가)의 一員(일원)이자 大韓帝國(대한제국) 皇室(황실)의 後裔(후예)이다. 本貫(본관)은 전주(全州), 첫 이름은 勇吉(용길). 義親王(의친왕)이 1930年(년)에 强制(강제)隱居(은거)를 당하자 空位(공위)를 世襲(세습) 받아 ‘李鍵公(이건공) 殿下(전하)’로 불렸다.
大韓帝國(대한제국) 漢城府(한성부)에서 태어나 1930年(년) 日本(일본) 陸軍(육군)士官學校(사관학교) 42期生(기생), 1938年(년) 陸軍大學(육군대학)교 51期生(기생)으로 卒業(졸업)하였고, 日本帝國(일본제국) 陸軍(육군)에 入隊(입대)하여 中佐(중좌) 階級(계급)에 이르렀다. 1931年(년) 海軍(해군) 大佐(대좌) 마쓰다이라 유타카(松平豊)(옛 다카마쓰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토시(高松藩主松平料理豊島) 伯爵(백작)의 10男(남)의 長女(장녀)이자 히로하시 다다미쓰(広橋ダダミス)伯爵(백작)의 養女(양녀) 마쓰다이라 요시코(松平佳子)(英親王妃(영친왕비) 이방자(李方子)의 外四寸(외사촌)와 結婚(결혼)하였으며, 1947年(년) 모모야마 겐이치(桃山健一)(日本語(일본어): 桃山虔一)로 改名(개명)하고 1955年(년) 日本(일본)에 歸化(귀화)하였다.
이우(李鍝:1912年(년) 11月(월) 15日(일) ~ 1945年(년) 8月(월) 7日(일)는 日本帝國(일본제국)의 王公族(왕공족), 陸軍(육군)軍人(군인)이다. 朝鮮(조선)의 第(제)26代(대) 王(왕)이자 大韓帝國(대한제국)의 初代(초대) 皇帝(황제) 高宗(고종)의 다섯째 아들 義親王(의친왕) 李堈(이 강)의 次男(차남)으로 李王家(이왕가)의 一員(일원)이자 大韓帝國(대한제국) 皇室(황실)의 後裔(후예)이다. 本貫(본관)은 全州(전주), 初名(초명)은 성길(成吉)이며, 雅號(아호)는 염석(念石), 상운(尙雲)이다. 1917年(년)에 興宣大院君(흥선대원군)의 長孫(장손)이며 自身(자신)의 堂叔(당숙)인 이준용(李埈鎔)이 死亡(사망)하자 그의 養子(양자)로 入籍(입적)되어 雲峴宮(운현궁)의 4代(대) 宗主(종주)가 되었다. 雲峴宮(운현궁)을 相續(상속)한 後(후)에 空位(공위)를 世襲(세습) 받아 ‘李鍝公(이우공)殿下(전하)’라는 公族(공족)의 稱號(칭호)를 使用(사용)하게 되었다. 死亡(사망) 以後(이후)에 賜諡(사시)인 흥영군(興永君)에 追封(추봉)되었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朝鮮(조선) 京畿道(경기도) 京城府(경성부) 사동궁[寺洞宮:은 現在(현재) 서울특별시 鐘路區(종로구) 寬勳洞(관훈동)196番地(번지) 一帶(일대)에 있었던 大韓帝國(대한제국) 高宗(고종)의 庶出(서출) 5男(남)이었던 義親王(의친왕)의 私邸(사저)이자 친왕부(親王府)이다.]에 서 태어나 1933年(년) 日本(일본) 六軍(육군)士官學校(사관학교) 45期生(기생), 1941年(년) 陸軍大學(육군대학)교 54期生(기생)으로 卒業(졸업)하였고, 日本帝國(일본제국) 陸軍(육군)에 入隊(입대)하여 中佐(중좌) 階級(계급)에 이르렀다.
日本(일본) 政府(정부)에 依(의)해 日本人(일본인)과의 結婚(결혼)을 强要(강요)받았지만, 朝鮮人(조선인)과 婚姻(혼인)하기 위해 抵抗(저항)하여 박영효(朴泳孝)의 庶孫女(서손녀) 朴贊珠(박찬주)와 結婚(결혼)하였다. 1945年(년) 8月(월) 6日(일)에 日本(일본) 히로시마(広島:광도)에서 原子爆彈(원자폭탄)에 피폭되어 8月(월) 7日(일)에 히로시마시 니노시마(広島市ニノ志摩)에서 死亡(사망)하였다. 1945年(년) 8月(월) 15日(일)에 京城運動場(경성운동장)에서 葬禮式(장례식)이 擧行(거행)되었으며, 遺骸(유해)는 京畿道(경기도) 南揚州市(남양주시) 和道邑(화도읍) 倉峴里(창현리)의 雲峴宮(운현궁) 家族(가족) 墓地(묘지)에 安葬(안장)되었다.
1.高宗(고종) : 이태왕(李太王), 1910年(년) 10月(월) 1日(일) ~ 1919年(년) 1月(월) 21日(일)
2.純宗(순종) : 1910年(년) 10月(월) 1日(일) ~ 1926年(년) 4月(월) 25日(일)
3.英親王(영친왕) : 1926年(년) 4月(월) 26日(일) ~ 1945年(년) 9月(월) 2日(일)
李王世子(이왕세자)
1.英親王(영친왕) : 1910年(년) 10月(월) 1日(일) ~ 1926年(년) 4月(월) 25日(일)
2.이구(李玖 : 1931年(년) 12月(월) 29日(일) ~ 1945年(년) 9月(월) 2日(일)[이구:李玖, 1931年(년) 12月(월) 29日(일)~2005年(년) 7月(월) 16日(일)는 大韓民國(대한민국)의 建築家(건축가), 工學者(공학자), 敎育者(교육자), 事業家(사업가)이다. 아호(雅號)는 산남(山南)이고, 舊(구) 大韓帝國(대한제국)의 皇族(황족)으로 大韓帝國(대한제국) 皇室(황실) 第(제)3代(대) 首長(수장)인 英親王(영친왕) 李垠(이은)과 이방자(李方子)女史(여사)의 둘째 아들이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의 李王家(이왕가)의 이왕세자(李王世子)이기도 했으며, 신적강하[臣籍降下)란 日本(일본)皇族(황족)이 그 身分(신분)을 떠나 새로운 姓(성)을 받아 臣下(신하)들의 戶籍(호적)으로내려가는 것을 말한다. 사성강하(賜姓降下)라고도 하고, 그 같은 皇族(황족)을 흔히 사성황족(賜姓皇族)이라고 한다.
皇族(황족) 女子(여자)가 一般人(일반인) 집안에 시집 가는 境遇(경우)는 신적강가(臣籍降嫁)라고도 했으며, 皇族(황족)의 地位(지위)를 잃게 된다. 또 日本國(일본국) 憲法(헌법)施行(시행) 後(후)에는 國民主權主義(국민주권주의)에 入閣(입각)한 황적이탈(皇籍離脱)의 말이 利用(이용)된다.]로 李王世子職(이왕세자직)을 喪失(상실)하고 日本(일본)에 滯留(체류)하였다. 한때 美國(미국) 留學(유학)을 다녀오기도 했고, 大韓民國(대한민국)에 歸國(귀국), 서울大學校(대학교) 建築學科(건축학과)와 연세大學校(대학교) 建築工學科(건축공학과)에 出講(출강)하기도 했다. 生前(생전)에 建築事(건축사)와 大學講師(대학강사) 等(등)으로 活動(활동)했고, 全州李氏(전주이씨)大同宗約院(대동종약원) 總裁(총재), 宗廟祭禮(종묘제례) 奉行(委員會(봉행위원회) 總裁(총재)로도 活動(활동)하였다.
한때 歸國(귀국)하려 하였으나 大韓民國(대한민국) 初代(초대) 大統領(대통령)이자 먼 一族(일족)인 이승만(李承晩)(讓寧大君(양녕대군)의 直系後孫(직계후손)의 反對(반대)로 霧散(무산)되었고, 軍事政權(군사정권) 박정희(朴正熙) 때에 一時的(일시적)으로 歸國(귀국)하였으나 事業(失敗(사업실패) 等(등)으로 다시 日本(일본)으로 건너가 滯留(체류)하다 死亡(사망)했다. 회은세손(懷隱世孫)으로도 불리며, 死後(사후) 尊號(존호)는 자인온유덕성순수회은황세손(慈仁溫裕德性純粹懷隱皇世孫)으로, 이는 全州李氏(전주이씨) 大同宗約院(대동종약원)에서 追敍(추서)한 사시(私諡)이다.
一角(일각)에서는 그를 皇太孫(황태손)이라 부르나, 그를 太孫(태손)이나 世孫(세손)으로 冊封(책봉)해야 할 皇帝(황제)인 高宗(고종)이나 純宗(순종) 모두 죽은 뒤에 그가 태어났고, 大韓民國(대한민국)은 皇帝(황제)나 王(왕)이 다스리는 君主國(군주국)이 아니므로 그의 地位(지위)에 대한 것에는 論難(논란)의 餘地(여지)가 있다. 墓(묘)의 이름은 회인원(懷仁園)이다. 洪裕陵(홍유릉) 뒷편, 아버지와 어머니 옆쪽에 잠들어 있다.
李王世孫(이왕세손)
1.이진李晉:원손 이진(元孫 李晉, 1921년 8월 18일 ~ 1922년 5월 11일)은 大韓帝國(대한제국)의 皇族(황족)으로,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李王家(이왕가)의 元孫(원손)이자 英親王(영친왕)의 長男(장남)이며, 李玖(이구)의 兄(형)이다. 큰아버지인 純宗(순종) 李王(이왕) 生前(생전)에 出生(출생)한 李王世孫(이왕세손)이었으나, 生後(생후) 1年(년)도 안 되어 病(병)으로 死亡(사망)했다. 李王家(이왕가) 最初(최초)이자 最後(최후)의 李王世孫(이왕세손)(純宗(순종) 皇帝(황제) 養子(양자)이기도 하다.)
時代相(시대상)과 獨立運動(독립운동)의 展開(전개), 社會相(사회상)
1910年代(년대)의 國外(국외)와 國內(국내)의 民族運動(민족운동)과 啓蒙運動(계몽운동)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는 安岳事件(안악사건:1910년 11月(월) 안명근(安明根)이 서간도(西間島)에 武官學校(무관학교)를 設立(설립)하기 위한 資金(자금)을 募集(모집)하다가 黃海道(황해도) 信川(신천)地方(지방)에서 關聯(관련)人士(인사) 160名(명)과 함께 檢擧(검거)된 事件(사건)에서 始發(시발)된 105人(인)事件(사건)을 造作(조작)하여, 1911年(년) 윤치호(尹致昊), 李東輝(이동휘), 양기탁(梁起鐸), 김구(金九)따위의 新民會幹部(신민회간부)들을 大量(대량)으로 檢擧(검거), 檢束(검속)하여 新民會(신민회)를 解散(해산)시켰다. 이 일을 繼起(계기)로 김규식(金奎植), 이승만(李承晩) 等(등) 一部(일부) 基督敎界(기독교계) 人士(인사)들은 宣敎師(선교사)들의 도움을 얻어 海外(해외)로 亡命(망명)한다.
그 後(후)의 獨立運動(독립운동)團體(단체)들은 秘密(비밀)決死(결사)의 길을 걷게된다. 國權(국권)이 빼앗긴 以後(이후) 武斷統治(무단통치)가 强火(강화)되면서 旣存(기존)의 抗日運動(항일운동)이었던 抗日義兵(항일의병)運動(운동)과 愛國(애국)啓蒙(계몽) 運動(운동)은 日帝(일제)의 武斷統治(무단통치)로 漸次(점차) 衰頹(쇠퇴)하였다. 大部分(대부분)의 義兵(의병)系列(계열)들은 間島(간도)나 沿海州(연해주) 一帶(일대)로 移動(이동)하였다. 또한 各種(각종) 公職者(공직자)採用試驗(채용시험)과 各種(각종) 産業施設(산업시설)의 認許可(인허가)에서도 日本人(일본인)에게 優待(우대)惠澤(혜택)을 주게 되면서 朝鮮人(조선인)들의 反撥(반발)은 繼續(계속)되었다.
이러한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의 徹底(철저)한 彈壓(탄압)과 差別(차별)政策(정책)으로 因(인)해 韓國人(한국인)들의 抗日運動(항일운동)은 秘密(비밀)決死(결사) 形態(형태)로 變化(변화)하였는데, 敎育(교육)과 宗敎團體(종교단체)를 通(통)해 農民(농민)과 勞動者(노동자)와도 連結(연결)하여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들을 糾合(규합)하였다. 代表的(대표적) 團體(단체)로는 大韓(대한)光復會(광복회)와 獨立義軍府(독립의군부:1912年(년) 全羅南北道(전라남북도) 地方(지방)에서 組織(조직)된 獨立運動(독립운동)團體(단체), 松竹會(송죽회:1913年(년)경 平壤(평양)에서 組織(조직)되었던 女性獨立運動團體(여성독립운동단체), 朝鮮國權回復團(조선국권회복단) 等(등)이 存在(존재)한다.
특히 大漢光復會(대한광복회:1915年(년) 7月(월) 大邱(대구)에서 結成(결성)된 獨立運動團體(독립운동단체)는 義兵出身(의병출신)과 愛國啓蒙運動(애국계몽운동) 系列(계열)로, 軍隊式(군대식) 組織(조직)으로 構成(구성)되어 大邱(대구)에서 活動(활동)하였는데 軍資金(군자금)을 募集(모집)하고 慶尙道(경상도) 觀察使(관찰사)였던 親日派(친일파) 장승원(張承遠:1852年(년) ~ 1917年(년)은 朝鮮(조선)의 文臣(문신)이다. 字(자)는 공유(公裕), 號(호)는 운정(雲庭)이다. 慶尙北道(경상북도) 漆谷(칠곡) 出身(출신)이며 장석구(張錫龜)의 아들로, 判書(판서) 장석용(張錫龍)에게 出系(출계)하였다.
國務總理(국무총리)를 지낸 滄浪(창랑) 장택상(張澤相), 장직상[張稷相:日本式(일본식) 이름: 張元稷相 하리모토 지키쇼(張本保ちショー)1883年(년) ~ 1947年(년)은 大韓帝國(대한제국)의 官僚(관료)이며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의 官僚(관료) 兼(겸) 企業人(기업인), 大韓民國(대한민국)의 企業人(기업인)이다. 觀察使(관찰사) 장승원[張承遠: 1852年(년) ~ 1917年(년)은 朝鮮(조선)의 文臣(문신)이다. 字(자)는 공유(公裕), 號(호)는 운정(雲庭)이다. 慶尙北道(경상북도) 漆谷(칠곡) 出身(출신)이며 장석구(張錫龜)의 아들로, 판서 장석용(張錫龍)에게 出系(출계)하였다. 國務總理(국무총리)를 지낸 滄浪(창랑) 장택상(張澤相), 장직상(張稷相)의 아버지기도 하다.]의 아들이자 國務總理(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張澤相)의 둘째 兄(형)이며 本貫(본관)은 인동(仁同)이고 原籍地(원적지)는 慶尙北道(경상북도) 善山郡(선산군) 龜尾面(구미면) 인의리(只今(지금)의 慶尙北道(경상북도) 龜尾市(구미시) 인의동)이다. 解放(해방) 後(후)에는 企業人(기업인)으로 活動(활동)하며 이천전기를 運營(운영)하였다.]의 아버지기도 하다.1885年(년) 增廣文科(증광문과)에 兵科(병과)로 及第(급제)하여 承政院(승정원) 主書(주서)가 되고 . 이어 副修撰(부수찬), 校理(교리), 掌令(장령), 應敎(응교), 修撰(수찬), 掌樂院正(장악원정), 司僕寺正(사복시정) 等(등)을 거쳐 1897年(년), 通政大夫(통정대부)에 陞資(승자)되었다. 그 後(후) 靑松郡守(청송군수), 中樞院議官(중추원의관), 贊尉(찬위), 宮內府(궁내부) 特進官(특진관)을 지내고, 1904年(년)(光武(광무) 8年(년) 허위(許蔿)의 推薦(추천)으로 慶尙北道觀察使(경상북도관찰사)로 나아갔다. 1906年(년) 秘書監丞(비서감승)을 거쳐, 宮內府(궁내부) 特進官(특진관)에 이르렀다. 議政大臣(의정대신) 민영규(閔泳奎)가 지은 神道碑文(신도비문)이 있다.
大農土(대농토)를 所有(소유)한 大地主(대지주)였으며 박정희(朴正熙)의 아버지 박성빈[朴成彬: 1871年(년) 6月(월) 6日(일)(陰曆(음력) 4月(월) 19日(일) ~ 1938年(년) 9月(월) 4日(일)은 朝鮮(조선) 後期(후기)의 武官(무관)으로 大韓民國(대한민국) 大統領(대통령) 박정희(朴正熙)의 아버지이자 朴槿惠(박근혜)의 할아버지이며, 金鍾泌(김종필), 한병기[韓丙起:1931年(년) 6月(월) 8日(일) ~ 2017年(년) 4月(월) 21日(일)는 大韓民國(대한민국)의 外交官(외교관), 政治家(정치가), 國會議員(국회의원), 企業家(기업가)였다.]박정희(朴正熙)와, 前妻(전처) 金浩南(김호남)의 사위壻(서)로, 박정희(朴正熙)의 딸 朴在玉(박재옥)의 男便(남편)이었다.)의 妻祖父(처조부)이다.
沒落(몰락) 兩班家(양반가) 出身(출신)으로, 한때 東學農民運動(동학농민운동)에 加擔(가담)하기도 했다. 本貫(본관)은 高靈(고령) 한때 장승원[張承遠: 1852年(년) ~ 1917年(년)은 朝鮮(조선)의 文臣(문신)이다. 字(자)는 공유(公裕), 號(호)는 운정(雲庭)이다. 慶尙北道(경상북도) 漆谷(칠곡) 出身(출신)이며 장석구(張錫龜)의 아들로, 判書(판서) 장석용(張錫龍)에게 出繼(출계)하였다. 國務總理(국무총리)를 지낸 滄浪(창랑) 장택상(張澤相), 장직상(張稷相)의 아버지기도 하다.]의 집을 出入(출입)했으며 그 因緣(인연)으로 해서 박정희(朴正熙)의 둘째 兄(형) 朴武熙(박무희)는 그로부터 논 다섯마지기를 빌어 7:3의 比率(비율)로 小作(소작)하기도 했다. 박상진[朴尙鎭:1884年(년) 12月(월) 7日(일) ~ 1921年(년) 8月(월) 13日(일)은 韓國(한국)의 獨立(독립) 運動家(운동가)이다. 雅號(아호)는 고헌(固軒), 本貫(본관)은 密陽(밀양).]이 만든 光復會(광복회)에서 軍資金(군자금)을 要請(요청)하였으나 拒否(거부)하였고 密告(밀고)를 하려고 하자 1917年(년) 11月(월) 10日(일) 光復會員(광복회원)인 채기중(蔡基中), 강필순에 依(의)해 處斷(처단)당하였다.]等(등)을 處斷(처단)하는 等(등) 親日(친일)富豪(부호)를 處斷(처단)하여 獨立軍(독립군) 基地(기지)建設(건설)에 努力(노력)하였다.
獨立義軍府(독립의군부)는 高宗(고종)의 密命(밀명)을 받아 國權返還要求(국권반환요구)를 試圖(시도)하고 義兵戰爭(의병전쟁)을 計劃(계획)하였는데, 大部分(대부분) 儒生出身(유생출신)이였다. 이들은 高宗(고종) 皇帝(황제)의 復位(복위)의 復辟主義(복벽주의)를 내세웠으며, 新民會(신민회) 以後(이후)의 거의 모든 團體(단체)가 共和制(공화제)를 내세운 것과는 그 性格(성격)이 다르다. 松竹會(송죽회)는 平壤(평양)의 崇義女學校(숭의여학교)의 敎師(교사)와 學生(학생)이 中心(중심)이 되어 獨立運動(독립운동)資金(자금)을 募金(모금)하여 獨立運動(독립운동) 團體(단체) 傳達(전달)하였는데, 敎會(교회)를 通(통)한 民族意識高揚(민족의식고양)과 女性(여성)啓蒙運動(계몽운동)에도 努力(노력)하였다.
이 時期(시기)에는 改良書堂(개량서당)과 基督敎界(기독교계) 系列學校(계열학교)들이 擴散(확산)되었고, 愛國(애국)啓蒙運動(계몽운동)의 一環(일환)이었던 私立學校(사립학교)를 通(통)한 民族(민족)敎育(교육)運動(운동)도 存在(존재)하였다. 改新敎(개신교) 系列(계열) 學校(학교)들은 漢城府(한성부)를 中心(중심)으로 擴散(확산)되었고, 天主敎(천주교)系列(계열)學校(학교)들은 1920年代(년대)부터는 平壤(평양)을 中心(중심)으로 平安南道(평안남도), 北道(북도)와 咸鏡南道(함경남도), 北道(북도) 地域(지역)으로 擴散(확산)되었다. 이들 宗敎界(종교계)열 學校(학교)들은 英語(영어), 라틴(Latin)語(어), 西洋式(서양식) 機械技術(기계기술), 數學(수학), 物理學(물리학) 및 世界史(세계사), 聖書(성서) 舊約(구약)과 新約(신약) 等(등)을 가르쳤다.
國外(국외)의 民族運動(민족운동)
니콜라옙스크(Nikolaevsk) 事件(사건)[니콜라옙스크 사건(러시아(Russia)語(어):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日本語(일본어): 尼港事件 니코-지켄ニコ - ジケン)은 1920年(년) 2月(월)과 3月(월) 사이, 러시아 소비에트(Russian Soviet)聯邦(연방) 社會主義(사회주의) 共和國(공화국)의 붉은 군대(赤色軍, 敵軍(적군)가 하바롭스크(Khabarovsk) 地方(지방)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Nikolayevsknaamure)에 出兵(출병)한 日本軍(일본군)과 前套(전투)를 벌인 總稱(총칭)이다. 붉은 軍隊(군대)는 日本軍(일본군)을 後退(후퇴)시켰지만, 蘇聯軍(소련군)들은 非武裝(비무장) 日本人(일본인) 民間人(민간인)과 罪(죄) 없는 러시아(Russia)人(인) 住民(주민) 數百(수백) 名(명)을 虐殺(학살)하는 戰爭犯罪(전쟁범죄)를 일으킨 事件(사건)이다.
尼港(니항)事件(사건)으로도 불리는데, 니항(尼港)은 니콜라옙스크(Nikolaevsk)를 다르게 부르는 말이며 아무르 강(黑龍江(흑룡강) 下流(하류) 오크츠해(Octz Sea)를 만나는 어귀에 있는 都市(도시)의 地名(지명)이다.] 으로 불타서 내려앉은 日本(일본)領事館(영사관) (1920年(년), 日帝(일제)의 憲兵(헌병)統治(통치)에 依(의)해 많은 義兵(의병)部隊(부대)와 知識人(지식인)층 等(등) 愛國(애국) 啓蒙運動(계몽운동) 人士(인사)들이 海外(해외)로 移住(이주)하였다.
이에 滿洲(만주)의 간도(間島,西間島(서간도) 삼원보[三源浦:는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에 西間島(서간도)에 세워진 獨立運動(독립운동) 基地(기지)이다. 이시영(李始榮), 이상룡(李相龍)等(등)이 産業(산업)을 일으켜 民族(민족)의 經濟的(경제적) 土臺(토대)를 마련하고 靑少年(청소년)들을 모아 近代的(근대적) 敎育(교육)과 軍事訓練(군사훈련)을 시키면서, 滿洲(만주)에 同胞(동포)들을 武裝(무장)시켜 獨立(독립)戰爭(전쟁)을 治(치)룰 準備(준비)를 하였다. 3·1 運動(운동) 以後(이후) 獨立軍(독립군)은 이 三源浦(삼원보) 터전으로 武力(무력)抗爭(항쟁)을 펼칠 수 있었다.
現在(현재)의 中國(중국) 퉁화 시(通化市) 류화 현(龙华县)에 있는 삼원포조선족진(三源浦朝鲜族镇)에 該當(해당)하는 곳이다.
요녕성(遼寧省) 유하현(柳河縣)에서는 경학사[耕學社:1910年(년)에 이시영(李始榮), 이동녕(李東寧), 이상룡(李相龍) 等(등)이 中心(중심)이 되어 滿洲(만주) 遼寜省(요령성) 柳河縣(유하현)에 設立(설립)한 民間團體(민간단체)의 性格(성격)을 가진 抗日(항일)獨立運動(독립운동) 團體(단체), 韓族會(한족회), 扶民團(부민단)等(등)이 結成(결성)되었고, 獨立軍(독립군) 將校(장교) 養成(양성)을 위한 新興武官學校(신흥무관학교)가 만들어졌다.
北間島(북간도)에서는 民族學校(민족학교)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은 1906年(년) 滿洲(만주) 龍井(용정)에 設立(설립)된 韓國(한국)의 新學問(신학문) 民族(민족)敎育機關(교육기관)이다. 이상설(李相卨)을 中心(중심)으로 設立(설립)되었다가 1年(년)만에 廢校(폐교)되었다. 明東書塾(명동서숙)으로 承繼(승계)되었다.]과 明東學校(명동학교)가 設立(설립)되었고, 大倧敎(대종교) 人士(인사)들이 主導(주도)가 되어 중광단[重光團:1911年(년) 滿洲(만주)에서 組織(조직)되었던 抗日獨立運動團體(항일독립운동단체).], 정의단[正義團:1919年(년) 滿洲(만주)에서 組織(조직)되었던 獨立運動團體(독립운동단체).], 北路軍政署(북로군정서:1919年(년) 滿洲(만주)에서 結成(결성)되었던 獨立軍團體(독립군단체).)等(등)이 結成(결성)되어 武裝鬪爭(무장투쟁)을 위한 軍事組織(군사조직)이 꾸려졌다.
沿海州(연해주)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에 新韓村(신한촌: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에 러시아(Russia) 沿海州(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海蔘威]에 자리잡고 있던 韓人(한인)集團(집단) 居住地(거주지).]이 形成(형성)되어 民族運動(민족운동)이 根據地(근거지)가 되었다.
이에 13道(도) 義軍(의군)과 이상설[李相卨:1871年(년) 1月(월) 27日(일)(1870年(년) 陰曆(음력) 12月(월) 7日(일) 朝鮮國(조선국) 忠淸道(충청도) 鎭川(진천) 出生(출생) ~ 1917年(년) 陽曆(양력) 4月(월) 1日(일) 逝去(서거)은 大韓帝國(대한제국) 議政府(의정부) 참찬[參贊:朝鮮時代(조선시대), 議政府(의정부)에 속한 正二品(정이품)의 벼슬] 等(등)을 지낸 朝鮮(조선) 大韓帝國(대한제국)의 文臣(문신)이자,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의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이다.],
이동휘(李東輝: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新民會(신민회) 幹部(간부), 大韓民國(대한민국)臨時政府(임시정부) 國務總理(국무총리) 等(등)을 歷任(역임)한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가 主導(주도)하는 大韓光復軍政府(대한광복군정부)가 1914年(년)에 樹立(수립)되었고, 後(후)에 全露韓族會(전로한족회) 中央(중앙) 總會(총회)와 大韓(대한)國民議會(국민의회) 等(등)이 樹立(수립)되었다. 니콜라옙스크(Nikolaevsk:尼古拉耶夫斯克) 事件(사건)으로 獨立軍(독립군)과 붉은 軍隊(군대)는 日本軍(일본군)을 全滅(전멸)시켰다.
中國(중국) 管內(관내)의 상하이(上海)에서는 1918年(년) 김규식(金奎植), 여운형(呂運亨), 신채호(申采浩), 김구(金九) 等(등)이 主軸(주축)이 되어 新韓靑年黨(신한청년당)이 結成(결성)되었다. 이들은 파리(Paris)講和會議(강화회의)에 김규식(金奎植)을 派遣(파견)하였다. 이 團體(단체)는 後(후)에 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 基盤(기반)을 助成(조성)하는 도움이 되었다.
美州(미주) 地域(지역)에서는 안창호(安昌浩)가 主導(주도)한 大韓人國民會(대한인국민회)와 興士團(흥사단)이 結成(결성)되어 獨立運動(독립운동)資金(자금)을 支援(지원)하였고, 이승만(李承晩)은 大韓人(대한인) 國民會(국민회)에서 活動(활동)하다가 따로 大韓人(대한인)同志會(동지회)를 組織(조직)하고 基督敎學校(기독교학교)를 設立(설립)하였으며, 박용만(朴容萬)은 大朝鮮國民軍團(대조선국민군단)을 組織(조직)하여 國權回復(국권회복)을 위한 軍人(군인)을 養成(양성)하였다.
民族資本育成運動(민족자본육성운동)
김성수(金性洙)와 송진우(宋鎭禹) 等(등)은 植民治下(식민치하)의 朝鮮(조선)사람들이 日本制(일본제) 무명, 緋緞(비단)따위를 輸入(수입)하며 日本制製品(일본제제품)이 韓國(한국)에 流行(유행)하는것을 보고 日本(일본)의 資本(자본)이 韓國(한국)의 浸透(침투)를 憂慮(우려)하였다. 김성수(金性洙)는 民族産業(민족산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의 經濟自立(경제자립)運動(운동)에 影響(영향)을 받아 國內資本育成計劃(국내자본계획)을 세운다. 于先(우선) 그는 中央高普(중앙고보)의 學生(학생)들로 하여금 國産(국산) 무명옷을 校服(교복)으로 입게하였다.
김성수(金性洙) 等(등)은 무명옷을 校服(교복)으로 했을 때 仁村(인촌:金性洙, 1891年(년) 10月(월) 11日(일) ~ 1955年(년) 2月(월) 18日(일),)는 大韓帝國(대한제국)의 敎育人(교육인) 兼(겸) 言論人(언론인)·企業人(기업인)·近代主義(근대주의) 運動家(운동가)였으며, 大韓民國(대한민국) 初期(초기) 政治人(정치인), 言論人(언론인), 敎育人(교육인), 書藝家(서예가)였다. 全羅道(전라도) 高敞(고창)에서 出生(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漢城府(한성부)에서 잠시 幼兒期(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全羅道(전라도) 扶安(부안) 茁浦(줄포)에서 成長(성장)하였다.
本貫(본관)은 蔚山(울산)이며 朝鮮朝(조선조) 性理學者(성리학자)河西(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代孫(대손)이다. 자(字)는 판석(判錫), 雅號(아호)는 인촌(仁村)이다.]은 옷감의 國內(국내) 自體生産(자체생산) 및 調達(조달)을 생각하였다. 1917年(년) 紡織(방직)技術者(기술자)인 이강현(李康賢)의 建議(건의)를 받아들여, 日帝當國(당국)은 순순히 許諾(허락)하지 않았으나 結局(결국) 그의 事業(사업)을 承認(승인)해주었다.
1917年(년) 10月(월) 財政的(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廣木製造會社(광목제조회사) ' 京城織紐株式會社(경성직뉴주식회사)'를 윤치소[尹致昭:1871年(년) 8月(월) 25日(일) ~ 1944年(년) 2月(월) 20日(일)는 朝鮮(조선) 末期(말기)의 文臣(문신), 政治人(정치인)이자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의 金融人(금융인) 兼(겸) 企業人(기업인)이다. 朝鮮(조선)末(말)에 司憲府監察(사헌부감찰)을 거쳐 東學農民運動(동학농민운동) 때 農民軍(농민군)의 掠奪(약탈)에 맞서 倡義(창의)를 組織(조직)하였다. 以後(이후) 巡撫營(순무영) 別軍官(별군관), 徽陵參奉(휘릉참봉) 等(등)을 歷任(역임)했다.
日帝(일제)植民地下(식민지하)에서 實業家(실업가)로 活動(활동)하였다. 朝鮮商業銀行(조선상업은행) 監査(감사), 分院磁器(분원자기)株式會社(주식회사) 監査(감사) 等(등)을 지냈으며 1924年(년) 4月(월) 27日(일)부터 1927年(년) 4月(월) 26日(일)까지 할아버지 尹取東(윤취동)이 大地主(대지주)로서 집안을 일으켰고 윤치소(尹致昭) 亦是(역시) 大地主(대지주)로서 富(부)를 蓄積(축적)하였다. 大韓民國(대한민국) 第(제)4代(대) 大統領(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의 아버지이며 第(제)1代(대) 內務部(내무부) 長官(장관) 윤치영(尹致暎)의 兄(형)이다.
舊韓末(구한말)의 開化期(개화기) 政治人(정치인) 윤치호(尹致昊)의 四寸同生(사촌동생)이었다. 歷史學者(역사학자) 斗溪(두계) 李丙燾(이병도)와는 겹査頓(사돈)이었다. 또한 셋째 아들 尹源善(윤원선)이 興宣大院君(흥선대원군)의 曾孫女(증손녀)와 結婚(결혼)하여 高宗(고종)과 皇室(황실)의 姻戚(인척)이 되었다. 忠淸南道(충청남도) 出身(출신)으로 자(字)는 자경(子敬), 雅號(아호)는 동야(東野). 本貫(본관)은 海平(해평)이다.] 等(등)으로부터 引受(인수)하였다.
日本(일본)에서 導入(도입)한 도요타(トヨタ) 紡織機(방직기), 日本(일본)業體(업체)들과의 競爭(경쟁)을 위해 日本(일본)機械(기계)를 導入(도입)하여 生産量(생산량)을 增加(증가)시켰으며, 김성수(金性洙)는 機械(기계)의 性能(성능)을 直接(직접) 試驗(시험)하였다.
日本(일본)의 紡織會社(방직회사)들이 韓半島(한반도)에 進出(진출)해 있는 狀況(상황)에서 그가 市場進出(시장진출)을 確保(확보)하는 方法(방법)으로 創案(창안)해낸 것은 韓國人(한국인) 支社(지사)들을 株主(주주)로 公募(공모)하는 것이었다. 以後(이후) 그는 外部(외부) 資本(자본)의 浸透(침투)는 民族(민족)의 經濟(경제)를 갉아먹고, 外換(외환)의 流出(유출)을 促進(촉진)한다는 點(점)을 들어 韓國人(한국인) 인텔리(Intelli:智能)들을 說得(설득)해 나가기 始作(시작)했다.
1918年(년) 봄 김성수(金性洙)는 慶尙北道(경상북도) 慶州(경주)를 찾아 崔(최)부잣집의 後孫(후손) 최준[崔浚:1884年(년) 7月(월) 27日(일) ~ 1970年(년) 10月(월) 13日(일)은 大韓民國(대한민국)의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이자 企業人(기업인), 社會運動)家(사회운동가), 敎育人(교육인)이다. 號(호)는 문파(汶坡). 本貫(본관)은 慶州(경주), 慶尙北道(경상북도) 慶州(경주) 出身(출신)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贵族的义务) 主義(주의)를 實踐(실천)한 것으로 有名(유명)한 '慶州(경주) 崔(최)부잣집' 12代(대)로 마지막 '崔(최)부자'로 알려져 있다.全財産(전재산)을 獨立運動(독립운동)과 敎育事業(교육사업)에 投資(투자)했고,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때 白山貿易株式會社(백산무역주식회사) 社長(사장)으로 活動(활동). 日帝(일제)의 酷毒(혹독)한 監視(감시)속에서도 希望(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上海臨時政府(상해임시정부) 等(등) 많은 獨立運動(독립운동) 團體(단체)에 莫大(막대)한 資金(자금)을 支援(지원)했다.
嶺南大學校(영남대학교)의 前身(전신)인 民立(민립) (舊(구)大邱大學대구대학)의 設立者(설립자)이다.]을 訪問(방문)하였다. 김성수(金性洙)가 崔浚(최준)을 찾은 것은 京城紡織(경성방직)과 後(후)에 세우게 될 東亞日報(동아일보)에 地方(지방)의 有力人士(유력인사)들의 參與(참여)를 勸誘(권유)하기 위함이었다. 김성수(金性洙)가 慶北(경북) 慶州(경주)를 다녀간 지 1年(년) 後(후) 1919年(년) 10月(월) 京城紡織(경성방직)이 設立(설립)되었고, 崔浚(최준)은 京城紡織(경성방직)의 創立(창립) 發起人(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崔浚(최준)은 김성수(金性洙)와 안희제(安熙濟) 等(등)과 交流(교류)하면서 敎育(교육)의 重要性(중요성)을 깨달았다 한다.
김성수(金性洙)는 韓國人(한국인) 最初(최초)의 紡織會社(방직회사) 設立者(설립자)가 되었는데, 그해 11月(월) 釜山(부산)에 設立(설립)된 朝鮮(조선)紡織會社(방직회사)는 日本人(일본인)이 세운 것이었다. 中央學校(중앙학교)의 卒業生(졸업생) 中(중)에서도 윤주복(尹柱福) 等(등)은 그의 勸告(권고)로 규슈(九州)大學(대학) 紡績學科(방적학과)로 進學(진학), 卒業(졸업)한 뒤 京城紡織(경성방직)에 入社(입사)하기도 했다.
全國(전국)을 다니며 募集(모집)한 끝에 많은 株主(주주)와 後見人(후견인)들을 모았고 京紡創立(경방창립) 企人(기인)들의 株式(주식)은 3,790株(주)였고 16,210株(주)는 一般(일반)公募株(공모주)였다. 國內(국내) 衣類(의류)業體(업체)들이 日本(일본)의 綿織物(면직물) 輸入(수입)이 增加(증가)하면서 日本(일본) 綿織物(면직물)에 依存(의존)하여 製品(제품)을 生産(생산), 韓國(한국)의 綿織物(면직물)은 거의 掃滅(소멸)될 危機(위기)에 處(처)하자, 1918年(년)부터 中央商工株式會社(중앙상공주식회사)를 通(통)해 直接(직접) 綿衣類(면의류)를 生産(생산)하기 始作(시작)했다.
1919年(년) 10月(월) 5日(일) 김성수(金性洙), 박영효(朴泳孝) 等(등)은 明月館(명월관) 支店(지점) 太和館(태화관)에서 創立總會(창립총회)를 가졌다. 하지만 그것은 實際的(실제적) 出發點(출발점)은 아니었다. 京城紡織(경성방직)은 設立(설립)되자마자 坐礁(좌초)의 危機(위기)에 처했고 1926年(년)경에 가서야 操業(조업)正常化(정상화)에 成功(성공`)한다.
3·1運動(운동)
1918年(년) 美國(미국)의 大統領(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의 民族自決主義(민족자결주의)에 感化(감화)된 朝鮮(조선)의 知識人(지식인)들, 靑年(청년)층은 第(제)1次(차)世界大戰(세계대전)直後(직후) 展開(전개)된 世界的(세계적)인 民族 解放(민족해방) 運動(운동)의 潮流(조류)에 便乘(편승)하여 大規模(대규모) 解放 運動(해방운동)을 展開(전개)했다. 그러나 윤치호(尹致昊) 等(등) 一部人士(일부인사)들은 이 萬歲運動(만세운동)이 失敗(실패)할것이라고 展望(전망)하였다.
1919年(년) 3月(월) 1日(일) 낮 12時(시) 서울의 탑골公園(공원)에서 獨立宣言書(독립선언서)를 朗讀(낭독)하고 獨立(독립)을 宣言(선언)한 學生(학생)과 靑年(청년)들은 數十萬名(수십만명)의 群衆(군중)과 함께 「大韓獨立萬歲(대한독립만세)!」, 「朝鮮獨立萬歲(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온 거리를 휩쓸음으로써 3·1運動(운동)은 始作(시작)되었다. 萬歲示威(만세시위)는 日帝(일제)의 憲兵警察(헌병경찰)의 無慈悲(무자비)한 彈壓(탄압) 속에서도 삽시간에 全國(전국)坊坊曲曲(방방곡곡) 퍼져나갔고, 間島(간도)·시베리아(Siberia)·沿海州(연해주)·美洲地域(미주지역)까지 퍼져 나갔다.
200萬(만) 명이 넘는 民衆(민중)이 參與(참여)하여 約(약) 2個月(개월)에 걸쳐 鬪爭(투쟁)하는 동안에 232個(개)의 府(부)·郡(군) 가운데 229個(개)의 府(부)·郡(군)에서 示威(시위)와 暴動(폭동)이 일어났고, 1,491件(건)의 示威(시위)를 벌였으며 160個(개)가 넘는 日帝統治(일제통치) 機關(기관)을 破壞(파괴)했다. 그러나 4月末(월말)에 접어들면서 日帝(일제)의 集團虐殺(집단학살)·拷問(고문)·審問(심문)·放火(방화) 等(등) 武力彈壓(무력탄압)으로 3·1運動(운동)은 차츰 사그라졌다.
이 運動(운동)으로 政府樹立運動(정부수립운동)이 活性化(활성화) 되었고, 抗日武裝鬪爭(항일무장투쟁)을 促進(촉진)하였다. 또 獨立運動(독립운동)의 理念(이념)과 方法論(방법론)에 變化(변화)가 일어나 復辟主義(복벽주의)가 淸算(청산)되고 社會主義思想(사회주의사상)이 受容(수용)되어 多樣(다양)한 獨立運動路線(독립운동노선)이 登場(등장)하였다.
이로 因(인)해 또 運動(운동)의 主導(주도) 勢力(세력)으로 學生(학생)들이 民族運動(민족운동)의 中心(중심)으로 活動(활동)하였고, 農民(농민), 勞動者(노동자), 女性運動(여성운동)이 活性化(활성화)되는 契機(계기)가 되었다. 한편 윤치호(尹致昊) 等(등)은 朝鮮民衆(조선민중)의 犧牲者(희생자)를 냈음에도 指導者(지도자)들이 積極(적극) 앞장서지 않은 것을 悲觀的(비관적)으로 보기도 했다.
1920年代(년대)의 社會(사회).
1920年代(년대)에 이르러 料理(요리)집과 百貨店(백화점)이 流行(유행)하였다. 飮食店(음식점)으로는 明月館(명월관), 國一館(국일관), 千里駒(천리구) 김동성[金東成:1890年(년) 4月(월) 25日(일) 開城(개성) ~ 1969年(년) 8月(월) 18日(일)은 大韓民國(대한민국)의 政治人(정치인)·言論人(언론인)·漫畵家(만화가)이다. 第(제)2代(대) 國會議員(국회의원)이었다. 雅號(아호)는 천리구(千里駒)이고, 筆名(필명)도 千里駒(천리구)이다.
韓國(한국) 漫畫(만화)의 草創期(초창기)에 先驅者的(선구자적) 役割(역할)을 한 사람이다. 開城(개성) 韓英書院(한영서원)을 設立(설립)하는데 參與(참여)하였으며, 1915年(년) 美國(미국) 留學(유학)을 後(후) 歸國(귀국)하여 1920年(년) 東亞日報社(동아일보사)에 入社(입사)했다. 1948年(년) 以來(이래) 初代(초대) 公報處長(공보처장)을 지내고 政界(정계)에 投身(투신) 이승만(李承晩) 政權(정권)에서 2代(대) 民議院(민의원), 民議院(민의원) 副議長(부의장)을 지냈고, 박정희(朴正熙) 政權(정권) 때에는 民主共和黨(민주공화당) 中央常任委員(중앙상임위원) 等(등)을 지냈다.
仁村(인촌)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等(등)과 함께 《東亞日報(동아일보)》 創刊(창간)에 參與(참여)하였으며, 東亞日報(동아일보)·朝鮮日報(조선일보)·中央日報社(중앙일보사) 等(등)의 言論(언론)에서 記者(기자)와 作家(작가), 칼럼니스트(Columnist) 漫畵家(만화가)로 活動(활동)했다. 秘密裏(비밀리)에 太平洋(태평양) 軍縮會議(군축회의)를 參觀(참관)하였으며 上海(상해) 臨時政府(임시정부)나 이승만(李承晩) 等(등)의 動靜(동정)을 國內(국내)에 紹介(소개)하기도 했다.
解放(해방)後(후)에는 合同通信社(합동통신사) 社長(사장), 公報處長(공보처장) 等(등)을 歷任(역임)했다.]과 勤農(근농) 여운홍(呂運弘)이 運營(운영)하던 百花園(백화원), 府民館(부민관), 百貨店(백화점)으로는 和信百貨店(화신백화점) 等(등)이 有名(유명)하였다. 明月館(명월관)은 京城(경성), 釜山(부산), 도쿄(東京)에 支店(지점)이 있었는데 朝鮮人(조선인)이 運營(운영)하던 것이었다.
國一館(국일관)이나 和信百貨店(화신백화점) 等(등)은 8道(도)를 中心(중심)으로 大都市(대도시)에 支店(지점)을 두기도 했다. 和信百貨店(화신백화점) 外(외)에도 미쓰코시(三越)百貨店(백화점) 朝鮮支店(조선지점)이 登場(등장)하여 1945年(년) 9月(월)까지 京城(경성)에 支店(지점)을 두었다. 百貨店(백화점)의 登場(등장)으로 松商(송상), 灣商(만상), 柳商(유상) 等(등)의 商人(상인)들의 活動(활동)은 1930年代(년대) 以後(이후)로 크게 萎縮(위축)되었다.
映畵館(영화관)은 郡廳所在地(군청소재지), 府廳所在地(부청소재지)나 邑所在地(읍소재지), 市場(시장)이 存在(존재)하는 規模(규모)가 큰 면에 存在(존재)하였다. 敎育(교육)을 받지 못한 百姓(백성)들도 말과 單語(단어)는 理解(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映畵館(영화관)에 出入(출입)하였다. 그러나 映畵館(영화관)을 가기 힘든 奧地(오지)에는 各種(각종) 서커스(Circus)團(단), 曲藝團(곡예단)의 訪問(방문)에 人波(인파)가 몰려들었다.
텔레비전(television)은 1920年(년) 以後(이후)에 出現(출현)하였다. 라디오(radio) 補給(보급)은 舊韓末(구한말) 以後(이후) 擴散(확산)되었지만 얼굴과 화면이 登場(등장)하는 텔레비전(television)의 購入(구입)은 쉽지 않아 텔레비전(television)이 있는 집은 마을의 公會堂(공회당)처럼 活用(활용)되기 始作(시작)했다.
존타크 호텔(獨逸語(독일어): Sontag Hotel:孫凙:손탁:호텔(hotel) 等(등) 京城府內(경성부내)에 小數(소수) 存在(존재)하던 西洋式(서양식) Hotel(호텔).
(Hotel)이 京城府(경성부)의 朝鮮(조선)호텔(Hotel), 新羅(신라)호텔(Hotel) 等(등)을 始作(시작)으로 1920年代(년대) 以後(이후) 各地(각지)의 地方(지방) 大都市(대도시)로 호텔(Hotel) 과 모텔(motel)이 擴散(확산)되었다. 호텔(Hotel), 모텔(motel)의 登場(등장)과 함께 旅館(여관)과 旅人宿(여인숙), 民泊(민박) 等(등)도 擴散(확산)되었다.
日帝公務員(일제공무원), 憲兵補助員(헌병보조원)의 人氣(인기)
1920年代(년대)에 假面(가면) 朝鮮人(조선인)들의 憲兵補助員(헌병보조원), 日帝官僚(일제관료)에 많은 應試生(응시생)들이 應試(응시)하였다. 1922年(년) 巡査職(순사직) 競爭率(경쟁률)은 약 2.1對(대) 1 水準(수준)에 不過(불과)했으나 文化政治(문화정치)가 本格化(본격화)한 1920年代(년대) 中般(중반) 以後(이후)부터 그 競爭率(경쟁률)이 10對(대) 1을 웃돌았다.
結局(결국) 韓國人(한국인) 公務員(공무원), 憲兵補助員(헌병보조원) 受驗生(수험생)이 많아지자 競爭率(경쟁률)은 계속 높아졌다. 3.1 運動(운동) 直後(직후)에는 萬歲運動(만세운동)의 餘波(여파)로 應試生(응시생)이 적었지만 1920年代(년대)中般以後(중반이후), 憲兵補助員(헌병보조원)과 判任官(판임관)따위의 應試者(응시자)는 꾸준히 增加(증가)하였다.
1926年(년)의 憲兵補助員(헌병보조원) 856名(명)募集(모집)에 9千(천)193名(명)이 志願(지원), 約(약) 10.7對(대) 1의 競爭率(경쟁률)을 보였으며 1932年(년)에는 854名(명) 募集(모집)에 1萬(만)6千(천)193名(명)이 志願(지원)해 19對(대) 1로 競爭率(경쟁률)이 垂直(수직) 上昇(상승)했다.
19.6對(대) 1로 頂點(정점)을 찍은 1935年(년) 以後(이후) 巡査(순사)에 대한 選好(선호)는 1936年(년) 14.1對(대) 1, 1937年(년) 10.9對(대) 1로 내리막길을 걸었으나 1920年代(년대) 中般(중반)부터 太平洋戰爭(태평양전쟁)以前(이전)까지 競爭率(경쟁률)이 10∼20對(대) 1에 到達(도달)하였다.
1920年代(년대)의 民族解放運動(민족해방운동).
3·1運動(운동)以後(이후), 各(각)地域(지역)의 政府(정부) 統合(통합) 運動(운동)이 展開(전개)되었다. 民族(민족)의 獨立運動(독립운동)의 求心點(구심점)의 役割必要性(역할필요성)이 增大(증대)되었다.
以後(이후) 沿海州(연해주)의 大韓 國民 議會(대한국민의회)와 상하이(上海) 臨時政府(임시정부)가 解散(해산)한 뒤, 13道(도) 國民代表會議(국민대표회의)로 樹立(수립)된 漢城政府(한성정부)의 法統(법통)을 이어받아 中國(중국)의 프랑스 조계지(French Concession)였던 상하이(上海)에서 大韓民國臨時政府(대한민국임시정부)를 發足(발족)시켰다.
臨時政府(임시정부)는 初盤(초반)에는 大統領制(대통령제)를 標榜(표방)하였으며, 初代(초대) 大統領(대통령)은 이승만(李承晩)이었다. 이승만(李承晩)은 外交論者(외교론자)로 外交(외교)로서 獨立(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臨時政府(임시정부)는 1919年(년) 파리(Paris) 講和會議(강화회의)나 1921年(년) 워싱턴(Washington) 會議(회의)에 代表(대표)를 派遣(파견)하여 獨立(독립)을 呼訴(호소)했으나, 列强(열강)의 冷淡(냉담)한 反應(반응)으로 전혀 成果(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外交活動(외교활동)에 所得(소득)이 없고, 이러한 外交論(외교론)의 危機(위기) 속에 試圖(시도)된 이승만(李承晩)의 委任統治請願(위임통치청원)이 상하이(上海)로 알려지자 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 周邊(주변)에 모였던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들이 大部分(대부분)이 離脫(이탈)하여 民族(민족)의 代表機關(대표기관)의 命脈(명맥)을 잃게되었다. 以後(이후) 김구(金九)의 活躍(활약)으로 다시 살아나기까지 臨時政府(임시정부)는 긴 沈滯期(침체기)를 갖게 된다.
한편 間島(간도)와 滿洲(만주), 沿海州(연해주) 等地(등지)를 基盤(기반)으로 組織(조직)된 抗日武裝(항일무장) 團體(단체)들은 3·1運動(운동)을 契機(계기)로 平安北道(평안북도) 甲山(갑산)·咸鏡南道(함경남도) 惠山(혜산) 一帶(일대)와 鴨綠江(압록강)과 豆滿江(두만강)을 中心(중심)으로 한 國境(국경) 地方(지방)에서 激烈(격렬)한 武裝 鬪爭(무장투쟁)을 벌였다.
日帝(일제)는 國境地方(국경지방)의 獨立軍(독립군)을 뿌리 뽑지 않고서는 韓國(한국)을 支配(지배)할 수 없다고 判斷(판단)하고 大規模(대규모)로 軍隊(군대)를 動員(동원)하여 獨立軍(독립군) 討伐(토벌)에 나섰다. 이때 홍범도(洪範圖) 部隊(부대)는 北間島(북간도) 汪淸縣(왕청현) 鳳梧洞(봉오동)에서 埋伏(매복)하고 있다가 쳐들어오는 日本軍(일본군)을 全滅(전멸)시켰다 (1920年(년) 6月(월).
또 김좌진(金佐鎭)과 홍범도(洪範圖) 等(등)이 指揮(지휘)하던 獨立軍 聯合部隊(독립군연합부대)도 作戰上(작전상) 後退(후퇴)를 거듭하면서도 北間島(북간도) 和龍縣(화룡현) 靑山里(청산리)에서 埋伏(매복)하여 日本軍(일본군) 1,500여 名(명)을 殺傷(살상)하는 戰果(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結局(결국) 日帝(일제)의 討伐(토벌)에 밀려 蘇聯(소련)으로 들어갔는데, 여기서 各(각) 部隊(부대)들은 隊列(대열)을 整備(정비)하기도 前(전)에 獨立運動(독립운동)의 主導權(주도권)을 놓고 서로 對立(대립)했다. 1921年(년) 6月(월) 自由市(자유시) 慘變(참변)이 일어나 隊伍(대오)는 흩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試鍊(시련)을 겪은 武裝(무장)獨立運動(독립운동) 勢力(세력)들은 다시 結集(결집)하고자 民情(민정) 및 軍政機關(군정기관) 形態(형태)인 3府(부) 正義府(정의부), 參議府(참의부), 新民府(신민부)를 組織(조직)해 再整備(재정비)하고자 하였지만, 1925年(년) 日本帝國(일본제국)과 滿洲軍閥(만주군벌) 장작림간(ジャンジャクリム間)의 미쓰야(ミスよ) 協定(협정)이 締結(체결)되어 滿洲(만주)에서 活動(활동)하는 武裝(무장) 獨立運動(독립운동)이 크게 萎縮(위축)되었다.
1920年代(년대) 末(말)에는 南滿洲(남만주) 地域(지역)에 參議府(참의부), 正義府(정의부)가 統合(통합)하여 國民府(국민부)가 結成(결성)되어 훗날 朝鮮革命軍(조선혁명군)으로 結成(결성)되었으며, 北滿洲(북만주)에 新民府(신민부)는 革新議會(혁신의회)로 統合(통합)되어 한국독립부로 繼承(계승)된다.
이들은 韓中(한중)聯合作戰(연합작전)을 通(통)해 大甸子嶺戰鬪(대전자령전투:1933年(년) 지청천(池靑天)이 指揮(지휘)하는 韓國(한국)獨立軍(독립군)이 中國軍(중국군)과 聯合作戰(연합작전)을 展開(전개)하여 大甸子嶺(대전자령)을 지나는 日本軍(일본군)을 擊破(격파)한 戰鬪(전투).], 永陵街戰鬪(영릉가전투:1932年(년) 4月(월) 조선 혁명군(朝鮮革命軍)이 요령성(遼寧省) 신빈현(新賓縣) 영릉가(永陵街)에서 日本(일본) 關東軍(관동군)과 滿洲國軍(만주국군)을 물리친 戰鬪(전투)] 等(등)에서 勝利(승리)를 거두었다.
이와 같은 恐慌(공황)속에서도 勞動爭議(노동쟁의)·小作爭議(소작쟁의)·學生運動(학생운동)·思想運動(사상운동) 等(등) 一連(일련)의 抗日鬪爭(항일투쟁)은 꾸준히 展開(전개)되었고, 이 時期(시기)에 國內(국내)에서는 3 ·1 運動(운동) 以後(이후) 最大(최대)의 6·10 萬歲事件(만세)사건 1926年(년)과 光州學生運動(광주학생운동)(1929年(년)이 일어나 日本(일본)에 一擊(일격)을 加(가)했다.
또한 滿洲地方(만주지방)에서는 流亡民衆(유망민중)이 僑民會(교민회)를 組織(조직)하여 自活(자활)을 摸索(모색)하였으며, 많은 獨立運動(독립운동) 團體(단체)가 組織(조직)되어 國內外(국내외)에서 日本要人(일본요인)의 暗殺(암살), 破壞活動(파괴활동)을 積極的(적극적)으로 펴 나갔다.
戀愛思潮(연애사조)의 擴散(확산)
1920年代(년대)에는 西洋(서양)의 文物(문물)이 擴散(확산)되면서 小數(소수) 兩班家(양반가)에서만 입던 洋服(양복)과 드레스(dress), 원피스(one piece), 正裝(정장) 等(등)이 市中(시중)에 擴散(확산), 中小都市(중소도시)의 中産層(중산층)과 平民層(평민층)에게도 擴散(확산)되었다.
日本式(일본식) 옷에 反感(반감)을 품은 知識人層(지식인층)은 意圖的(의도적)으로 洋服(양복)을 사서 입기도 한다. 西洋文物(서양문물)의 影響(영향)을 받은 新女性(신여성)과 모던보이(Modern Boy)들은 儒敎的(유교적) 規範(규범)이 수그러든 자리에 사랑(love)과 戀愛(연애)를 積極(적극) 받아들였다. 1930年(년) 7月(월) 16一字(일자) 한 日刊紙(일간지)의 記事(기사)에는 이것이 상세히 描寫(묘사)되기도 했다.
“ 아이스컵피(Iced coffee:아이스커피)를 두 사람이 하나만 請(청)해 두 男女(남녀)가 대가리를 부비 대고 보리줄기로 쪽쪽 빠라 먹는다. 그래도 모자라서 혀끗을 빳빳히 펴서 아다시(ああ再び:Adashi)! 아이스고히가(Ice Gohiga:アイスゴヒが), 다이스키(ダイスキー:Daisuki), 다이스키요(Daisuki.:ダイス清)!(전 아이스커피(Ice Coffee:アイスコーヒー)가 좋아요, 좋아!) 와시모네(和紙モネ:Washimone)(나도 그래)!”
男女間(남녀간)의 戀愛(연애) 風潮(풍조)가 積極的(적극적)으로 擴散(확산)되고, 言論(언론)과 放送(방송)에도 報道(보도)되자 保守的(보수적)인 儒敎思想家(유교사상가)와 性理學者(성리학자)들은 日帝(일제)가 脫線(탈선)을 부추겨서 韓國(한국)을 滅亡(멸망)시키려 한다며 强(강)하게 反撥(반발)하였다.
道袍(도포)와 㖙(갓)을 쓴 儒林(유림)들이 放送社(방송사)와 新聞社(신문사)에 集團(집단)으로 몰려가 抗議(항의)를 하고, 言論社(언론사)를 찾아가 抗議(항의)하기도 했다. 日本(일본)에 留學(유학)한 僧侶(승려)들은 結婚(결혼)하고 歸國(귀국)하는 境遇(경우)가 大部分(대부분)이었다.
外貌(외모)와 能力(능력)을 따지는 計算的(계산적) 戀愛(연애)를 앞세우는 21世紀(세기)와 달리 當時(당시) 戀愛(연애)는 목숨을 바치는 境遇(경우)가 많았다. 이를 정사(情死) 事件(사건)이라 하였다. 1920年(년)부터 1940年(년) 무렵의 東亞日報(동아일보) 記事(기사)를 찾아보면 '自殺(자살), 情死(정사)'로 分類(분류)되는 記事(기사)만 8000件(건)이 넘을 程度(정도)로 當時(당시) 情死(정사)는 流行(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新女性(신여성)과 모던보이(Modern Boy)들은 사랑(love)에 미쳐 죽는 것을 '絶對美(절대미)의 極値(극치)'로 稱頌(칭송)했다. 悲戀(비련)의 事件(사건)은 商業的(상업적) 關心(관심)으로도 이어졌다. 김우진(金祐鎭)과 投身自殺(투신자살) 直前(직전)에 남겼던 윤심덕(尹心悳)의 '死(사)의 讚美(찬미)'를 노래로 한 音盤(음반)은 最初(최초)로 10萬(만) 章(장)을 突破(돌파)할 만큼 前例(전례) 없는 販賣額(판매액)을 올렸다.
絶世妓生(절세기생) 康明花(강명화)[平壤(평양) 妓生(기생)이었던 康明花(강명화)가 1923年(년) 6月(월) 溫陽溫泉(온양온천)에서 쥐약을 먹고, 사랑하는 男子(남자) 張炳天(장병천)의 품에 안겨 죽은 事件(사건)은 當時(당시) 사회에 큰 波長(파장)을 일으켰다. '自由(자유)戀愛(연애)를 부르짖는 雰圍氣(분위기)가 목숨을 끊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批判(비판)에서부터 '朝鮮(조선)女子(여자)로서 진정 사랑을 할 줄 알고, 줄 줄 아는 者(자)는 妓生(기생)을 除外(제외)하고는 없다'는 意見(의견)까지 社會(사회)가 크게 動搖(동요)했다.]의 飮毒自殺(음독자살)은 韓國(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代表的(대표적)인 事件(사건)이었다. 慶尙北道(경상북도)의 富豪(부호)의 아들 張炳天(장병천)을 사랑한 康明花(강명화)는 妓生(기생)이라는 理由(이유)로 손가락질 당하자 自身(자신)의 사랑에 대한 純粹性(순수성)을 證明(증명)하려 단발(斷髮)에 단지(斷指)까지 서슴지 않았다.
結局(결국) 康明花(강명화)는 張炳天(장병천)의 품에서 藥(약)을 먹고, 죽은 愛人(애인)의 뒤를 이어 張炳天(장병천)도 쥐藥(약)을 입속에 털어 넣는다.
또 돈 때문에 열일곱(17歲(세)의 나이에 마흔(40歲(세)이 넘은 男子(남자)에게 시집갔다가 離婚(이혼)한 뒤 카페(Cafe) 女給(여급)이 된 金峯子(김봉자)와 京城帝國大學(경성제국대학)을 卒業(졸업)한 有婦男(유부남) 醫師(의사) 盧炳雲(노병운)의 悲劇的(비극적) 情死(정사)는 1934年(년) 人氣歌手(인기가수)에 依(의)해 노래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同性(동성)애는 極惡(극악)한 犯罪(범죄)이거나 西洋(서양)의 禽獸(금수)같은 習性(습성)으로 여겨져 심한 彈壓(탄압)을 받거나, 精神科(정신과)에 入院(입원)되거나 쫓겨나기도 했다. 女子(여자)로 同性(동성)戀人(연인) 關係(관계)였던 김용주와 홍옥임의 同伴自殺(동반자살) 等(등)이 社會的(사회적)인 이슈(issue:發行物(발행물)가 되기도 했다.
離婚率(이혼율)의 增加(증가)
新(신)文物(문물)과 戀愛(연애)思潮(사조)의 擴散(확산)과 함께 離婚(이혼)도 登場(등장)하였다. 1920年代(년대) 도쿄(東京) 留學生(유학생)이 늘어나면서 舊時代(구시대) 女性(여성)을 配偶者(배우자)로 둔 男子(남자)들이 新女性(신여성)과 戀愛(연애)에 빠져 비롯된 現狀(현상)이다. 1930年代(년대)에는 ‘第(제)2 夫人(부인)’이라는 表現(표현)이 登場(등장)한다. 學業(학업)을 마친 新女性(신여성)들이 適當(적당)한 相對(상대)를 찾지 못해 妾(첩)이나 後娶(후취)로 들어감에 따라 이들을 ‘犧牲者(희생자)’로 理解(이해)한 表現(표현)이다.
1921年(년) 9月(월) 30日字(일자) 東亞日報(동아일보)는 날로 늘어나는 離婚(이혼)訴訟(소송)의 大部分(대부분)에 대해 “男便(남편)의 不足(부족)을 들어 女子便(여자편)에서 告訴(고소)함이 多數(다수)”라며 京城)地方法院(경성지방법원)에 提起(제기)된 事例(사례)들을 紹介(소개)했다. 當時(당시) 離婚(이혼) 事由(사유)의 相當數(상당수)는 經濟的(경제적)인 問題(문제)였다.
經濟的(경제적) 困窮(곤궁)을 解決(해결)하지 못한 男便(남편)이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아 女子(여자)가 離婚(이혼)을 請求(청구)한 것이다. 獨立運動(독립운동) 等(등) 政治的(정치적)인 理由(이유)로 滿洲(만주)로 간 男便(남편)이 歸家(귀가)하지 않아 家庭(가정)이 破綻(파탄)에 이른 事例(사례)도 많았다.
離婚(이혼)이 急增(급증)하자 東亞日報(동아일보)는 1924年(년) 新年(신년) 紙上特輯(지상특집)에는 各界(각계) 知識人(지식인)과 著名人士(저명인사) 10名(명)에게 ‘離婚(問題(이혼문제)의 可否(가부)’를 묻는 記事(기사)가 10回(회) 連載(연재)됐다.
離婚(이혼)을 贊成(찬성)하는 쪽에서는 “마음에 아니 맛는 夫婦間(부부간)에는 누가 反對(반대)를 하던지 단연히 離婚(이혼)을 하야서 洋洋(양양)한 前途(전도)를 그르치지 않는 것이 可(가)할 줄로 안다”(방성옥)거나 “실흔 사람과 엇지 百福(백복)의 原因(원인)이 된다하는 夫婦(부부)가 되겟슴닛가”(방정환(方定煥)라며 離婚(이혼) 決行(결행)을 促求(촉구)했다.
物産獎勵運動(물산장려운동)과 民立大學期成會(민립대학기성회)
民立大學設立運動(민립대학설립운동) 弘報廣告(홍보광고)(1923年(년) 3月(월) 20日字(일자) 東亞日報(동아일보)
實力(실력) 養成(양성)이 獨立(독립)의 길이라고 생각한 民族(민족)指導者(지도자)들은 實力(실력)養成(양성)을 위해서는 國民(국민) 箇箇人(개개인)이 스스로 배우고 깨달아야 된다고 判斷(판단)했다. 그는 國産品(국산품)을 愛用(애용)하는 것이 곧 民族(민족)經濟(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며 韓半島(한반도)에서 나는 物産(물산)을 購買(구매)해줄 것을 呼訴(호소)하며, 國産品(국산품) 愛用(애용) 運動(운동)을 펼쳐 나갔다.
또한 日本(일본) 留學(유학)의 急增(급증)과 日本人(일본인) 資本家(자본가)들에 依(의)한 學校(학교) 設立(설립)에 刺戟(자극)을 받아 1921年(년) 1月(월) 이상재(李商在), 이승훈(李昇薰), 윤치호(尹致昊),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俞鎭泰(유진태), 오세창(吳世昌) 等(등)은 朝鮮民立大學設立期成準備會(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發足(발족)하고 全國的(전국적)으로 發起人(발기인) 募集(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 運動(운동)은 1924年(년) 中盤(중반)을 起點(기점)으로 動力(동력)을 잃기 始作(시작)했다. 總督府(총독부)는 ‘不穩思想(불온사상)을 퍼뜨린다’는 理由(이유)로 期成會(기성회) 任員(임원)을 尾行(미행)하고 講演(강연)을 막았다. 1923年(년) 關東(관동)大地震(대지진)으로 經濟(경제)가 不況(불황)에 빠지고 1923年(년)∼1924年(년) 잇따른 가뭄과 洪水(홍수)로 罹災民(이재민) 救護(구호)가 時急(시급)해지자 民立大學(민립대학) 募金(모금)은 遲遲不進(지지부진)해졌다.
또한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의 隨時(수시) 干涉(간섭)으로 運動(운동)은 蹉跌(차질)을 빚다가 失敗(실패)하고 만다. 日本(일본) 資本(자본)의 浸透(침투)와 함께 新思想(신사상)의 出現(출현)으로 西洋(서양)製品(제품)이 急速度(급속도)로 擴散(확산)되자 1920年初(년초)부터 김성수(金性洙), 안재홍(安在鴻), 윤치호(尹致昊), 이광수(李光洙), 조만식(曺晩植) 等(등)은 講演(강연), 啓蒙(계몽) 活動(활동)을 다니며 國産(국산)物件(물건), 國內(국내)에서 나는 物品(물품)을 愛用(애용)해줄 것을 呼訴(호소)하였다. 國內(국내)에 좋은 製品(제품)이 있는데도 外製(외제)를 選好(선호)한다면 이는 外國(외국) 資本(자본)의 浸透(침투)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京城紡織株式會社(경성방직주식회사)의 國産品愛用宣傳廣告(국산품애용선전광고).
1922年(년) 이상재(李商在), 윤치호(尹致昊), 김성수(金性洙), 이승훈(李昇薰), 김병로(金炳魯) 等(등)의 主動(주동)이 되고 發起人(발기인) 1,170 名(명)을 確保(확보)하여 民立大學(민립대학) 期成會(기성회)를 出帆(출범)시키고 募金(모금)活動(활동)을 했다. 그러나 日帝(일제)當局(당국)의 彈壓(탄압)으로 失敗(실패)하고 말았다.
1923年(년)부터는 조만식(曺晩植)·안재홍(安在鴻)·송진우(宋鎭禹) 等(등)은 物産獎勵運動(물산장려운동)을 推進(추진)하였다. 그는 '입어라 朝鮮(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朝鮮(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이라는 口號(구호)로, 國內(국내)에서 生産(생산)된 國産品(국산품)을 愛用(애용)해줄 것을 呼訴(호소)하였다.
國內勞動者(국내노동자)·農民(농민)의 大衆運動(대중운동).
한편 1919年(년)의 3·1 運動(운동) 當時(당시)의 集團示威(집단시위)의 效果(효과)를 보고 크게 覺醒(각성)한 勞動者(노동자)·農民(농민)들에 依(의)해 勞農運動(노농운동)이 急擊(급격)히 發展(발전)했다. 1921年(년) 9月(월) 釜山(부산)의 埠頭勞動者(부두노동자) 5,000여 名(명)의 總罷業(총파업), 1923年(년) 8月(월) 平壤(평양)의 洋襪工場(양말공장) 勞動者(노동자) 2,000여 名(명)의 罷業(파업), 1923年(년) 9月(월)부터 1年(년)이 넘게 展開(전개)된 全羅南道(전라남도) 務安郡(무안군) 巖泰島(암태도) 小作爭議(소작쟁의), 1929年(년) 1月(월)부터 3個月(개월) 동안 繼續(계속)되었던 元山(원산) 總罷業(총파업), 그리고 1930年(년) 1月(월) 3,000여 名(명)의 女性(여성) 勞動者(노동자)들이 1個月(개월) 동안 展開(전개)했던 釜山 朝鮮紡織(조선부산방직) 罷業(파업) 鬪爭(투쟁) 等(등)이 代表的(대표적)인 鬪爭(투쟁)이었다.
이러한 經濟的(경제적) 生存權(생존권) 鬪爭(투쟁)이었던 勞農(노농)鬪爭(투쟁)은 漸次(점차) 抗日(항일)民族(민족) 運動化(운동화)되어 1930年(년) 5月(월) 咸鏡南道(함경남도) 新興(신흥)의 長豊炭鑛(장풍탄광) 勞動者(노동자) 300여 名(명)은 勞動組合(노동조합)의 設立(설립)을 妨害(방해)하는 日本人(일본인) 資本家(자본가)와 警察(경찰)에 맞서 炭鑛(탄광)施設(시설)과 舍宅(사택)을 부수고, 銃(총)을 쏘며 달려드는 警察(경찰)에게 도끼·망치·곤봉으로 맞서 肉薄戰(육박전)을 벌였다.
1930年(년) 7月(월) 咸鏡南道(함경남도) 端川(단천)의 2,000여 名(명) 農民(농민)들이 日帝(일제)의 山林(산림)政策(정책)을 反對(반대)하여 郡廳(군청)을 包圍(포위)·襲擊(습격)했다가 여러 名(명)이 日警(일경)의 銃彈(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러한 勞動者(노동자)·農民(농민)들의 大衆(대중)鬪爭(투쟁)은 生存權(생존권) 確保(확보)에서 出發(출발)한 싸움이었지만, 日帝(일제)의 植民地(식민지) 搾取(착취)와 支配(지배)構造(구조)를 反對(반대)하는 抗日(항일)의 性格(성격)을 띤 民族(민족)解放(해방) 運動(운동)의 一環(일환)이었다.
新幹會(신간회), 槿友會(근우회)의 結成(결성)과 活動(활동).
1927年(년) 2月(월) 14日(일), 新幹會(신간회) 創立(창립) 모습.
1927年(년) 2月(월) 14日字(일자) 朝鮮日報(조선일보)에서 新幹會(신간회) 創立(창립)을 報道(보도)하는 記事(기사).
1924年(년)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等(등)의 主導(주도)로 自治化(자치화) 運動(운동)을 目的(목적)으로 한 團體(단체) '연정회(硏政會)' 設立(설립)을 推進(추진)하였는데, 이는 所爲(소위) '民族改良主義(민족개량주의)' 혹은 '實力養成論(실력양성론)'이라는 美名下(미명하)에 일제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의 '文化政治(문화정치)'에 발맞춰 日帝(일제)와의 妥協(타협)속에 推進(추진)된 것으로, 非妥協(비Russia타협) 民族勢力(민족세력) 反撥(반발)로 中斷(중단)되고 말았다.
1920年代(년대)에는 러시아(Russia) 볼셰비키(Bolshevik) 革命(혁명)의 影響(영향)으로 共産主義(공산주의) 思想(사상)이 國內(국내)에 널리 퍼져 서울(Seoul)靑年會(청년회)·新思想硏究會(신사상연구회)·북풍회(北風會:在日(재일) 韓國人(한국인) 社會主義團體(사회주의단체)인 북성회(北星會)의 國內支部(국내지부)로서 1924年(년) 11月(월) 25日(일)에 서울(Seoul)에서 組織(조직)되었던 運動(운동)團體(단체)]等(등) 社會主義(사회주의) 思想團體(사상단체)가 大擧(대거)組織(조직)되었다.
社會主義者(사회주의자)들은 勞農運動(노농운동) 等(등) 大衆運動(대중운동)을 指導(지도)하는 한편, 共産黨(공산당) 建設(건설)에 힘을 기울여 1924年(년) 朝鮮(勞農總同盟(조선노농총동맹)과 朝鮮靑年總同盟(조선청년총동맹)을 結成(결성)했으며, 1924年(년) 4月(월) 朝鮮共産黨(조선공산당)을 地下(지하)에서 結成(결성)함으로써 共産主義(공산주의) 運動(운동)은 더욱 活潑(활발)하게 展開(전개)되었다.
이들 社會主義(사회주의) 勢力(세력)은 日帝(일제)의 治安維持法(치안유지법) 下(하)에서 活動(활동)을 하기 힘들어지자 公開的(공개적) 活動(활동)의 必要性(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여기 海外(해외)에서 國共合作(국공합작)과 民族(민족)有一黨(유일당) 運動(운동)과 같은 左右合作(좌우합작) 雰圍氣(분위기)가 불어오고, 國內(국내)에서 天道敎(천도교) 勢力(세력)과 社會主義(사회주의) 勢力(세력)의 連帶(연대)의 契機(계기)가 된 6·10 萬歲(만세) 運動(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社會主義(사회주의) 勢力(세력)은 正友會(정우회) 宣言(선언)을 通(통)해 우경화[右傾化:란 左派的(좌파적), 혹은 中途主義的(중도주의적)이였던 政治(정치)나 社會(사회)雰圍氣(분위기)가 漸漸(점점) 右翼(우익) ~ 極右(극우)으로 變化(변화)되는, 혹은 反共主義的(반공주의적), 保守主義的(보수주의적) 民族主義的(민족주의적) 色彩(색채)가 强(강)해지는 것을 말한다.] 反對(반대) 意味(의미)로는 左傾化(좌경화)가 있다.
主(주)로 經濟的(경제적), 社會的(사회적)인 危機(위기)일때 右傾化(우경화)가 深(심)해진다. 極端的(극단적)인 例(예)로는 經濟(경제) 大恐慌(대공황) 以後(이후) 이탈리아(Italy), 獨逸(독일), 日本(일본)의 軍國主義(군국주의), 파시즘(fascism)가 있다.] 되었고, 民族主義(민족주의) 勢力(세력)은 朝鮮(조선) 民興會(민흥회)를 結成(결성)하여 左派(좌파)勢力(세력)과의 連帶(연대)可能性(가능성)을 보여줘, 民族(민족) 有一黨(유일당)의 全段階(전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社會主義者(사회주의자)들은 民族主義者(민족주의자)들이 妥協的(타협적)인 民族(민족)改良主義者(개량주의자)와 非妥協的(비타협적) 民族主義(민족주의) 勢力(세력)으로 나뉘게 되자, 非妥協的(비타협적) 民族主義者(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1927年(년) 2月(월) 新幹會(신간회)를 結成(결성)했다.
新幹會(신간회) 結成(결성) 後(후) 各(각) 地方(지방)에서 新幹會(신간회) 支會(지회)가 잇달아 結成(결성)되었는데, 1928年末(년말)에는 모두 143個(개)의 支會(지회)가 組織(조직)되었으며, 會員數(회원수)는 2萬(만) 名(명)에 이르렀다. 新幹會(신간회) 本部(본부)와 各(각) 支會(지회)는 當時(당시) 活潑(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던 갖가지 大衆運動(대중운동)을 主導(주도)하거나 支援(지원)했다.
新幹會(신간회) 綱領(강령) 1.우리는 政治的(정치적) 經濟的(경제적) 覺醒(각성)을 促進(촉진)한다.
2.우리는 團結(단결)을 鞏固(공고)히 한다.
3.우리는 機會主義(기회주의)를 一切(일절) 否認(부인)한다.
특히 1929年(년) 11月(월) 光州(광주)에서 韓國人(한국인) 學生(학생)과 日本人(일본인) 學生(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난 衝突(충돌)로 光州學生抗日運動(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眞相 調査團(진상조사단)을 派遣(파견)하고 서울(Seoul)에서 大規模(대규모) 民衆(민중) 大會(대회)를 準備(준비)하여 全國的(전국적)인 抗日運動(항일운동)으로 發展(발전)시키고자 했다.
日帝(일제)는 民衆(민중)大會(대회) 事件(사건)을 빌미로 삼아 新幹會(신간회)의 中央(중앙)의 核心(핵심) 幹部(간부) 40여 名(명)을 逮捕(체포)했다. 이때부터 新幹會(신간회)의 活動(활동)은 움츠러들었고, 1931年(년) 5月(월) 社會主義者(사회주의자)들의 主導(주도)로 解消(해소)되었다.
家父長制(가부장제)의 解體(해체)와 離婚(이혼)의 公式化(공식화).
1920年(년)-30年代(년대)에는 封建(봉건)과 近代(근대)의 家族(가족)形態(형태)가 섞이기 始作(시작)하였다. 儒敎的(유교적) 思考方式(사고방식)에 대한 反撥(반발)과 反感(반감)으로 別居(별거)와 獨身(독신), 友愛(우애)結婚(결혼) 等(등) 對案(대안) 家族(가족)의 理念(이념)과 形態(형태)가 登場(등장)한다.
또한 朝鮮時代(조선시대) 中期(중기) 以後(이후) 男便(남편)이 夫人(부인)을 집안에서 逐出(축출)하는 疏薄(소박)형태의 離婚(이혼)만이 存在(존재)하던 韓國(한국)社會(사회)에 女性(여성)이 男便(남편)에게 離婚(이혼)을 提起(제기)하는 離婚(이혼) 形態(형태)가 漸次(점차) 急增(급증)하였다.
“ 昨年(작년)도 統計(통계)에 依(의)하면 朝鮮(조선)에서 決行(결행)된 離婚(이혼)件數(건수)가 팔천이백이십(8220十(십)여라 한다. 再昨年(재작년)의 육천구백구십일(6990日(일) 件(건)에 比(비)하면 增加(증가)한 수가 一年(일년)에 천이백(1200)여 件(건)이다…
所謂(소위) 유산知識階級(지식계급)에서는 男性(남성)이 女性(여성)을 離婚(이혼)하고 무산下流階級(하류계급)에서는 女性(여성)이 男性(남성)을 離婚(이혼)한다…. ” 블루 칼라(Blue collar)와 화이트 칼라(White collar) · 부르주아(Bourgeois) (有産階級(유산계급); — 東亞日報(동아일보) 1929年(년) 10月(월) 25日字(일자) 社說中(사설중)에서
傳統(전통)에서 近代(근대)로의 移行(이행)過程(과정)에서 登場(등장)한 過渡期(과도기) 現象(현상)의 하나가 이혼(離婚)이었다. 近代(근대)의 制度(제도)가 移植(이식)되고 新女性(신여성), 自由(자유)戀愛(연애) 等(등)으로 象徵(상징)되는 새로운 思潮(사조)가 流入(유입)되면서 離婚(이혼)도 增加(증가)하였다.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統計(통계)年譜(연보)에 따르면 1917年(년)과 1918年(년)의 離婚(이혼)件數(건수)는 1萬(만)542件(건)과 1萬(만)498件(건)으로 1萬(만) 件(건)을 넘기면서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最高(최고)를 記錄(기록)했다. 離婚(이혼)件數(건수)의 結婚(결혼) 件數(건수)에 대한 比率(비율)은 1910年代(년대) 7%였고 1920年代(년대) 以後(이후)에는 4% 안팎을 維持(유지)했다. 當時(당시) 離婚(이혼)은 新聞(신문)社說(사설)이 比重(비중) 있게 다룰 程度(정도)로 큰 社會問題(사회문제)였다.
1920年代(년대)에는 夫婦間(부부간)에 아이를 낳지 않고, 財産(재산)은 各自(각자) 財産(재산)을 갖고 있되 共同(공동)負擔(부담)으로 處理(처리)하는 友愛(우애)結婚(결혼)이 登場(등장)하였다. 以後(이후) '夫婦(부부)가 아이를 낳지 않고 서로 원하면 離婚(이혼)할 수 있다'는, 只今(지금) 봐도 破格的(파격적)인 條件(조건)의 '友愛(우애)結婚(결혼)'은 1930年代(년대) 知識人(지식인)들 사이에서 流行(유행)하였다.
이 무렵부터 나혜석(羅蕙錫), 金元周(김원주), 박인덕(朴仁德) 等(등)의 女性(여성) 運動家(운동가)들은 家父長制(가부장제)를 封建社會(봉건사회)와 전제정[ 專制政:國家(국가) 權力(권력)을 個人(개인)이 掌握(장악)하여 民意(민의)나 法律(법률)에 制約(제약)을 받지 않고 實施(실시)하는 政治(정치).]에 比喩(비유)하여 批判(비판)하는 한편, 離婚(이혼)을 할 自由(자유)를 要求(요구)하는 講演(강연)과 칼럼(column) 活動(활동)을 하기도 했다. 1920年代(년대) 初盤(초반) 當時(당시)의 社會(사회)에서는 離婚(이혼)을 犯罪(범죄)시, 터부시하였으나 離婚(이혼)이 增加(증가)하면서 1930年代(년대)에 가서는 公式(공식)席上(석상)에서 離婚(이혼)에 대한 批判(비판)은 사라지게 된다.
1930年代(년대) 社會相(사회상)~自由(자유) 戀愛論(연애론)의 擴散(확산).
1930年代(년대) 初(초)에는 自由(자유)戀愛(연애)를 부르짖은 新女性(신여성)들의 大膽(대담)한 宣言(선언)으로 連日(연일)新聞(신문)에 오르내렸다.
貞操(정조)는 肉體(육체)가 아닌 精神(정신)에 있다는 ‘新貞操論(신정조론)’을 외친 詩人(시인) 金元周(김원주)를 비롯해 貞操(정조)란 오직 趣味(취미)에 不過(불과)한 것이라는 '貞操趣味論(정조취미론)'을 내세운 나혜석(羅蕙錫), 性的滿足(성적만족)을 위해서라면 精神的(정신적)인 사랑 없이 肉體的(육체적) 結合(결합)이 可能(가능)하다는 '戀愛遊戲論(연애유희론)'을 主張(주장)한 허정숙(許貞淑) 等(등)은 話題(화제)가 되었다.
女性(여성)에게만 貞操(정조)를 要求(요구)하는 것이 不當(부당)하다는 抗拒(항거)를 넘어 女性(여성)도 ‘이것저것 맛 좀 보자’는 主張(주장)은, ‘愛慾(애욕)의 巡禮者(순례자)’라는 非難(비난)을 女性(여성)들에게서 듣기도 했다.
男便(남편)에게 慰藉料(위자료)를 주고 離婚(이혼)한 박인덕(朴仁德)의 離婚(이혼) 事件(사건)과 파리(Paris)에서 한 自由(자유)로운 戀愛(연애)와 艶聞(염문)이 話題(화제)가 된 나혜석(羅蕙錫) 等(등)은 連日(연일) 社會(사회)의 話題(화제)가 되었다.
윤치호(尹致昊) 等(등) 一部(일부) 社會(사회) 運動家(운동가)들은 離婚女(이혼녀)들에게 가해지는 批判(비판)에 맞서 이들을 辯護(변호)하였다. 그러나 愛情(애정)없는 肉體(육체)의 結合(결합)을 美化(미화)시킨 허정숙(許貞淑) 等(등)의 意見(의견)에 대해서는 連日(연일) 指彈(지탄)과 批判(비판) 與論(여론)이 登場(등장)하였다.
브나로드(Benarod) 運動(운동)과 文盲退治運動(문맹퇴치운동).
브나로드(Benarod) 운동 당시의 벽보물
1931年(년)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이광수(李光洙) 等(등)은 農村(농촌)의 文盲者(문맹자)가 많은 것을 보고, 農村啓蒙(농촌계몽)運動(운동)인 브나로드(Benarod) 運動(운동)(v narod movement)을 主導(주도)했는데 브나로드(Benarod) 運動(운동)이란, 러시아(Russia)語(어)로 '民衆(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이는 農村(농촌)에도 小學校(소학교)와 中等學校(중등학교)를 세우고, 나이가 많은 高齡者(고령자)와 壯年層(장년층)을 위해 夜學(야학)을 設置(설치)하여 글과 數字(숫자)를 깨우치게 하자는 것이 趣旨(취지)였다.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이광수(李光洙) 等(등)은 大學生(대학생)들과 大學(대학)出身(출신) 인텔리(Intelli)들에게 이를 呼訴(호소)했고, 이들의 呼訴(호소)에 심훈(沈熏), 최용신(崔容信), 곽상훈(郭尙勳), 박순천(朴順天) 等(등)의 大卒(대졸)出身(출신) 人材(인재)들이 各地(각지)의 農村(농촌)으로 가서 奉仕(봉사), 啓蒙(계몽)活動(활동)을 하게 된다.
1931年(년) 7月(월) 東亞日報(동아일보)에서는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旗幟(기치)를 내걸고 브나로드(Benarod) 運動(운동)이라 불리는 農村啓蒙(농촌계몽) 運動(운동)을 主導(주도)했다.
1929年(년)부터 學生(학생)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文盲(문맹)打破運動(타파운동)을 展開(전개)하였고, 社會的(사회적)으로 커다란 呼應(호응)을 얻었다. 1931年(년) 7月(월) 學生(학생)들은 東亞日報(동아일보)의 後援(후원)을 얻어 ‘브나로드(Benarod) 運動(운동)’라는 슬로건(Slogan) 아래 農村啓蒙(농촌계몽)에 나섰다.
이 運動(운동)은 學生(학생)啓蒙隊(계몽대)를 中心(중심)으로 하여 學生(학생)講演隊(강연대)·學生記者(학생기자)대로 나누어 展開(전개)되었다. 學生(학생)啓蒙隊(계몽대)는 男女(남녀) 高校生(고교생)으로 構成(구성)하여 한글과 算術(산술)을 가르쳤고, 學生(학생)講演隊(강연대)는 專門大學(전문대학) 以上(이상)의 學生(학생)들로 構成(구성)되어 學術講演(학술강연)·時局講演(시국강연)·衛生講演(위생강연)을 擔當(담당)했으며, 學生記者隊(학생기자대)는 高校(고교)와 專門大學生(전문대학생)으로 構成(구성)되며 旅行日記(여행일기)·故鄕通信(고향통신)·生活手記(생활수기) 等(등)을 新聞(신문)에 投稿(투고)하도록 하였다.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이광수(李光洙) 等(등)은 各種(각종) 啓蒙(계몽)과 칼럼(column)을 通(통)해 實力(실력)養成(양성)이 韓國人(한국인)들의 살 길이고, 實力(실력)養成(양성)을 위해서라면 一旦(일단) 文字(문자)와 말과 글을 알아야 한다고 力說(역설)하였다.
이들 自身(자신)이 앞장섰고 심훈(沈熏), 나혜석(羅蕙錫), 허정숙(許貞淑), 최용신(崔容信), 심대영 等(등)의 靑年(청년) 知識人(지식인)들이 이에 積極(적극) 同參(동참)하게 되었다. 數(수)많은 靑年(청년) 志士(지사)들의 同參(동참)으로 韓國人(한국인)의 言語(언어), 文字(문자) 識者率(식자율)은 1910年(년) 10%에서 1936年(년) 무렵에는 65%까지 上昇(상승)했다.
農村(농촌)地域(지역)은 文盲(문맹)과 飢餓(기아), 疾病(질병)이 蔓延(만연)하였으므로 農村(농촌)을 啓蒙(계몽)하겠다는 理想(이상)을 품은 大學生(대학생)들이 放學(방학), 或(혹)은 休學期間(휴학기간)을 利用(이용)해 農村啓蒙(농촌계몽) 運動(운동)에 參與(참여)하기 始作(시작), 全國的(전국적)으로 擴散(확산)된다.
그러나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의 學務局(학무국)과 警務局(경무국)으로부터 反日(반일)思想(사상) 鼓吹(고취)를 疑心(의심)하여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와 東亞日報(동아일보) 等(등)을 訪問(방문), 召喚(소환), 電話(전화) 抗議(항의) 等(등)을 하였지만 별다른 嫌疑點(혐의점)이 없어 브나로드(Benarod) 運動(운동) 自體(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1938年(년) 日帝(일제) 當局(당국)의 彈壓(탄압)을 받고 中斷(중단)되지만, 解放(해방) 以後(이후) 大韓民國(대한민국) 大學(대학)의 農村(농촌) 奉仕活動(봉사활동) (農活(농활) 運動(운동)으로 이어진다.
革命的(혁명적) 大衆(대중) 組織建設 運動(조직건설운동).
1930年代(년대)에 들면서 革命的(혁명적) 勞動 組合(노동조합)·農民 組合(농민조합) 運動(운동)이 活潑(활발)히 일어났다. 勞動組合(노동조합) 活動家(활동가)들은 地下(지하)에서 非合法的(비합법적)인 準備組織(준비조직)을 結成(결성)하고 表面(표면)으로는 合法的(합법적)인 勞動組合(노동조합), 罷業本部(파업본부), 勞動者(노동자) 親睦會(친목회) 等(등)을 結成(결성)하여 運動(운동)을 指導(지도)했다.
또한 工場(공장) 新聞(신문)·팜플렛(Pamphlet)·傳單(전단) 等(등)을 通(통)해 勞動者(노동자)들에게 8時間(시간) 勞動制(노동제), 最低(최저) 賃金制(임금제), 同一勞動(동일노동)·同一賃金(동일임금)을 宣傳(선전)하고 나아가 民族(민족)解放運動(해방운동)을 煽動(선동)했다.
革命的(혁명적) 勞動組合(노동조합) 運動(운동)은 工業施設(공업시설)이 集中(집중)된 興南(흥남)·咸興(함흥)·元山(원산) 一帶(일대)에서 가장 活潑(활발)하게 일어났다. 1931年(년)~35年(년)까지 革命的(혁명적) 勞動組合(노동조합) 運動(운동)을 하다가 日帝(일제)警察(경찰)에 逮捕(체포)된 사람의 數(수)는 全國(전국)에 걸쳐 1,759名(명)이나 되었다.
1935年(년) 3月(월) 30日字(일자) 東亞日報(동아일보). 咸鏡南道(함경남도) 端川(단천)에서 3000餘名(여명)의 農民(농민)들이 大規模(대규모)로 赤色 農民組合 運動(적색농민조합운동)을 일으켰다고 報道(보도)한 記事(기사).
農民組合(농민조합) 運動家(운동가)들은 農村(농촌) 內(내)의 旣存(기존)靑年 同盟(청년동맹)·女性同盟(여성동맹)·少年同盟(소년동맹)을 革命的(혁명적)農民 組合(농민조합)에 編入(편입)해 各各(각각) 農民(농민) 組合(조합)의 靑年部(청년부)·婦女部(부녀부)·少年部(소년부)로 만들어 力量(역량)을 强化(강화)하는 한편 農民(농민)의 利益(이익)을 위해 鬪爭(투쟁)했다.
革命的(혁명적) 農民 組合(농민조합)의 指導下(지도하)에 農民(농민)들은 激烈(격렬)한 反日(반일)民族(민족) 解放運動(해방운동)을 展開(전개)했는데, 특히 咸鏡北道(함경북도) 明川(명천)의 農民(농민)들은 洞(동)과 面(면)마다 戒嚴隊(계엄대)·同志(동지) 奪還隊(탈환대)·糾察隊(규찰대)·連絡隊(연락대) 等(등)을 組織(조직)하고 日帝(일제)의 暴力(폭력)에 맞서 싸우는 等(등) 鬪爭(투쟁)을 大衆的(대중적) 暴動(폭동)으로 發展(발전)시켜 나갔다.
革命的(혁명적) 農民(농민) 組合(조합)은 全國(전국) 70餘個(여개) 群(군)에 組織(조직)되었고, 1931年(년)~35年(년)에 警察(경찰)에 摘發(적발)된 革命的(혁명적) 農民 組合(농민조합) 事件(사건)은 43件(건), 檢擧(검거)된 사람은 4,121名(명)에 이르렀다. 中日(중일) 戰爭(전쟁)이 일어난 뒤 더욱 嚴酷(엄혹)해진 狀況(상황)에서도 革命的(혁명적) 農民(농민) 組合(조합) 運動(운동)은 秘密裏(비밀리)에 繼續(계속)되었다.
參政權(참정권) 獲得(획득) 計劃(계획)과 失敗(실패).
1936年(년)에는 韓圭復(한규복) 等(등)의 人物(인물)이 參政權(참정권)을 얻어낼 計劃(계획)을 세웠으나, 日帝(일제) 當局(당국)의 反對(반대)로 霧散(무산)되었다.志願兵制(지원병제)는 1930年代(년대) 中盤(중반)부터 一部(일부) 親日(친일) 有志層(유지층) 사이에서 自發的(자발적)으로 提起(제기)되었다. 먼저 박춘금(朴春琴)이 대의사(代議士)가 된 後(후) 日本國會(일본국회)에서 이 問題(문제)를 들고 나왔고, 그 後(후) 親日人士(친일인사)들에 依(의)해 여러 번 建議(건의)되었다.
1936年(년) 11月(월) 24日(일) 京城府會議員(경성부회의원) 조병상(曺秉相),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中樞院(중추원) 參議(참의)인 韓圭復(한규복) 等(등)이 中心(중심)이 되어 30餘名(여명)의 懇談會(간담회)를 열어 具體的(구체적)으로 이 問題(문제)를 推進(추진)키 위해 委員(위원) 8名(명)으로 期成會(기성회)를 構成(구성)하고 1937年(년) 발회식(發會式)을 가질 豫定(예정)이었다.
그러나 日本(일본) 當局(당국)은 이 問題(문제)가 參政權(참정권)하고도 關係(관계)가 있다 하여 一旦(일단) 中止(중지)시켰다. 以後(이후)에도 그는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에 參政權(참정권) 許容(허용)을 要請(요청)하였지만 拒絶(거절)당한다.
韓圭復(한규복)과 박춘금(朴春琴) 等(등)은 日本(일본)의 戰爭(전쟁)에 朝鮮人(조선인)들도 日本(일본)의 國民(국민)이니 參與(참여)해야 한다고 主張(주장)하였다. 그러나 日本(일본) 本國(본국) 政府(정부)에서는 이들의 韓國人(한국인) 學兵(학병) 參與(참여) 主張(주장)이 韓國人(한국인) 參政權(참정권) 獲得(획득)이 目的(목적)이라는 것을 看破(간파)하고 事前(사전)에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中日(중일) 戰爭(전쟁) 以後(이후) 兵力(병력)이 不足(부족)해지자 日本(일본)은 韓國人(한국인)들의 自發的(자발적) 學兵(학병) 參與(참여) 運動(운동)을 막지 않게 되었다.
長期間(장기간)의 不況(불황)과 晩婚(만혼), 獨身者(독신자)의 登場(등장).
1930年代(년대)에는 韓國(한국) 最初(최초)의 獨身者(독신자)들도 登場(등장)하기 始作(시작)하였다. 이에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와 社會(사회), 儒林(유림)들과 保守的(보수적) 知識人(지식인)들까지 나서서 이를 問題(문제)로 指摘(지적)하며 解決(해결)하려 하였다. 獨身者(독신자)의 登場(등장)과 30歲(세)가 넘어서 結婚(결혼)하는 晩婚者(만혼자)의 增加(증가)에 儒敎(유교)性理學者(성리학자)들과 保守的(보수적)인 知識人(지식인)들은 社會(사회)의 崩壞(붕괴)를 憂慮(우려)했고 末世(말세)라는 與論(여론)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1933年(년) 12月(월) 雜誌(잡지) '三千里(삼천리)'가 開催(개최)한 '晩婚打開座談會(만혼타개좌담회)'에서 나혜석(羅蕙錫)과 李光秀(이광수) 等(등)이 패널(panel)로 參與(참여)하여 이 問題(문제)를 討論(토론)하기도 했다.
“ 幸福(행복)한 結婚(결혼)보다 不幸(불행)한 結婚(결혼)이 많다는 點(점)에서 獨身(독신) 生活(생활)을 主張(주장)하는 건 當然(당연)해요. 女性(여성)의 경우 더욱 그렇죠. ”
— 나혜석(羅蕙錫)
“ 혼자 살기도 어려운 世上(세상)에 아내까지 얻어서는 生活(생활)할 道理(도리)가 없다 보니 젊은 男子(남자)들도 結婚(결혼)하지 않는 겁니다. 經濟的(경제적) 要因(요인)이 가장 큰 理由(이유)죠.”
— 李光秀(이광수)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中盤(중반), 韓國(한국)의 젊은이들은 美國(미국)과 유럽(Europe) 等(등)에게서 流入(유입)된 近代的(근대적) 個人主義(개인주의) 思潮(사조)의 流入(유입)과 女性(여성)의 自意識(자의식) 擴散(확산), 經濟的(경제적) 窮乏(궁핍), 民族的(민족적) 試鍊(시련)을 經驗(경험)하면서 家族(가족)과 結婚(결혼) 制度(제도)에 대한 極甚(극심)한 價値觀(가치관) 昏亂(혼란)을 겪었다.
또한 個人主義(개인주의) 思想(사상)을 罪惡視(죄악시), 터부시(Tabush) 하는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에 대한 反感(반감), 儒敎(유교)性理學者(성리학자)들과 保守的(보수적)인 知識人(지식인)들에 대한 反感(반감)으로 個人主義(개인주의)와 合理主義(합리주의), 快樂主義(쾌락주의) 思想(사상)은 漸次的(점차적)으로 擴散(확산)되어갔다.
1930年代(년대)의 經濟恐慌(경제공황)은 美國(미국)과 유럽(Europe)에도 影響(영향)을 미쳤고 日本(일본)과 아시아(Asia)에도 影響(영향)을 주었다. 經濟恐慌(경제공황)으로 失業(실업)과 貧困(빈곤)이 心覺(심각)했던 1930年代(년대)엔 晩婚(만혼) 風潮(풍조)와 結婚(결혼) 忌避(기피)가 社會現象(사회현상)으로 떠올랐다.
이에 社會(사회)著名人士(저명인사)들이 參與(참여)하는 '晩婚(만혼)을 打開(타개)하자'는 內容(내용)의 座談會(좌담회)까지 열게 된 것이다. 그러나 呼應度(호응도)는 낮았고 一時的(일시적)으로 晩婚(만혼)과 離婚(이혼)이 줄어드는 듯 하다가 다시 晩婚(만혼), 離婚(이혼), 獨身(독신)이 增加(증가)하게 된다.
戰時體制(전시체제) 무렵~創氏改名(창씨개명) 事態(사태).
1939年(년) 11月(월) 10日(일),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改定(개정)(制令(제령) 第(제)19號(호)하여 韓國(한국)에서도 日本式(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따르도록 規定(규정)하고, 1940年(년) 2月(월) 11日(일)부터 8月(월) 10日(일)까지 '씨(氏)'를 定(정)해서 製出(제출)할 것을 命令(명령)하였다.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總督(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郎)의 個人的(개인적)인 政策(정책)에서 出發(출발)한 것으로 日本帝國(일본제국) 朝政(조정)과 協議(협의) 없이 一方的(일방적)으로 推進(추진)한 政策(정책)이라 日本人(일본인) 內部(내부)에서도 强(강)한 反撥(반발)을 불러일으켰고, 1942年(년) 미나미 지로(南次郎)가 朝鮮(조선)總督(총독)에서 解任(해임)되는 原因(원인)이 되기도 한다.
미나미 지로(南次郎)에 依(의)해 發表(발표)된 以後(이후) 創氏改名令(창씨개명령)은 韓國人(한국인)의 集團(집단)反撥(반발) 外(외)에도, 日本(일본) 內部(내부)의 反對(반대)와 非難(비난),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內部(내부)에서도 總督府(총독부) 職員(직원)들의 集團(집단) 反撥(반발)에 부딪쳤다.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警務局(경무국)만 해도 創氏改名(창씨개명)에 反對(반대)하였다.
또한 日本(일본) 乃至(내지)에서도 反對論(반대론)이 거셌다. 植民地(식민지) 朝鮮(조선)과 日本(일본) 乃至(내지)에서 反對(반대)가 얼마나 거세게 일었던지 윤치호(尹致昊)는 1940年(년) 7月(월) 5日字(일자) 日記(일기)에서 미나미 지로(南次郎) 總督(총독)이 更迭(경질)될 것이라고 豫想(예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나미 지로(南次郎)는 創氏改名(창씨개명) 計劃(계획)을 밀어붙여 論難(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創氏改名令(창씨개명령) 施行(시행)을 發表(발표)하면서 韓國人(한국인) 社會(사회)는 論難(논란)이 일어났고, 春園(춘원) 이광수(李光洙) 等(등)은 創氏改名(창씨개명)을 公式(공식) 支持(지지), 自發的(자발적)으로 同參(동참)할 것을 宣言(선언)하기도 한다. 1939年(년) 12月(월) 12日(일) 이광수(李光洙)는 京城日報(경성일보)에 創氏改名(창씨개명)에 積極(적극) 同參(동참)하자는 趣旨(취지)의 칼럼(column)을 寄稿(기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광수(李光洙)는 앞장서서 創氏改名(창씨개명)하였다.
以後(이후) 그에게는 無數(무수)한 脅迫(협박)과 投書(투서), 非難(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創氏改名(창씨개명)은 不可避(불가피)한 일이며 日本(일본)과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는 우리가 願(원)하지 않더라도 强制(강제)로 創氏改名(창씨개명)하도록 措處(조처)할 것 이라고 답하였다.
創氏改名(창씨개명) 施行(시행)은 韓國(한국) 社會(사회)의 根幹(근간)을 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韓國人(한국인)들의 反撥(반발)은 거셌고, 親日(친일) 人士(인사)들조차 昏亂(혼란)에 빠졌다. 창씨(創氏)의 强壓(강압) 속에서도 이를 拒否(거부)하고 自決(자결)한 사람도 있었으며, 不當(부당)함을 誹謗(비방)하다가 拘束(구속)된 사람도 많았다.
日本(일본) 乃至(내지) 쪽에서는 특히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官吏(관리) 出身(출신)들이 總督府(총독부) 後援(후원) 機關(기관)으로 組織(조직)한 '中央朝鮮協會(중앙조선협회)'가 猛烈(맹렬)한 創氏改名(창씨개명) 反對(반대) 運動(운동)을 전개했다.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內部(내부)에서조차 治安(치안)을 擔當(담당)하는 警務局(경무국)을 中心(중심)으로 反對(반대)가 있었다.
日本人(일본인)들의 境遇(경우) 創氏改名(창씨개명)을 施行(시행)함으로써 韓國人(한국인)과 日本人(일본인)의 區別(구별)·分離(분리)가 어렵다는 理由(이유)를 들어 創氏改名(창씨개명)을 反對(반대)했는데, 韓國人(한국인)들에 대한 差別(차별)의 弱化(약화)를 두려워했던 理由(이유)가 컸다.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는 創氏改名(창씨개명)이 內鮮一體(내선일체)의 完成(완성)이라고 宣傳(선전)했으나, 日本(일본)議會(의회)의 對政府質問(대정부질문)에서는 '朝鮮(조선)에 本籍(본적)을 둔 朝鮮人(조선인)은 日本(일본)으로 本籍(본적)을 옮기는 것을 禁止(금지)하고 있으며, 日本人(일본인)도 朝鮮(조선)으로 本籍(본적)을 옮길 수 없다'며 韓國人(한국인)과 日本人(일본인)의 分離(분리)·差別(차별)은 繼續(계속)될 것임을 드러냈다.
日本人(일본인)들은 創氏改名(창씨개명)을 施行(시행)함으로써 韓國人(한국인)과 日本人(일본인)의 區別(구별), 分離(분리)가 어렵다는 理由(이유)를 들어 創氏改名(창씨개명)을 頑剛(완강)하게 反對(반대)했다. 韓國人(한국인)들의 創氏改名(창씨개명) 反對(반대) 만큼 日本人(일본인)들의 反撥(반발)도 거셌다.
日本人(일본인)의 反對(반대) 與論(여론)이 意外(의외)로 높았던 것을 두고 後日(후일) 교토대(京都大) 人文科學硏究所(인문과학연구소)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敎授(교수)는 다른 무엇보다 韓國人(한국인)에 대한 差別(차별)의 弱化(약화)를 두려워 했기 때문이라고 指摘(지적)한다.
總督府(총독부) 內部(내부)에서도 創氏改名(창씨개명)에 反撥(반발)했는데, 특히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警察(경찰)은 韓國人(한국인)이 똑같이 日本式(일본식) 이름을 쓰게 되면, 그가 韓國人(한국인)인지 日本人(일본인)인지 區別(구별)이 쉽지 않다는 反論(반론)을 提起(제기)했으며, 內地側(내지측) 日本人(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憂慮(우려)가 높았다는 것이다.
創氏改名(창씨개명) 事態仲裁(사태중재).
윤치호(尹致昊)
1940年(년) 1月(월) 初(초) 總督府(총독부)는 創氏改名(창씨개명)이 韓國人(한국인)들의 希望(희망)에 依(의)해 實施(실시)하는 것으로 日本式(일본식) 姓氏(성씨)의 設定(설정)을 强制(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但只(단지) 日本式(일본식) 姓氏(성씨)를 定(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라고 發表(발표)했다.
1940年(년) 1月(월)부터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南次郎) 總督(총독)은 創氏改名(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主題(주제)의 談話文(담화문)을 發表(발표)했고 이는 韓國(한국) 社會(사회)에 論難(논란)이 되었다. 1月(월) 4日(일) 미나미 지로(南次郎)總督(총독)은 韓國人(한국인)들에게 創氏改名(창씨개명)을 强要(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闡明(천명)했다.
그런데 그가 뒤이어 韓國人(한국인)들이 創氏改名(창씨개명)하면 흐뭇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點(점)을 分明(분명)하게 示唆(시사)하는 바람에 商況(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總督(총독)에게 아부하는 韓國人(한국인) 知識人(지식인)들은 당연한 것이라며 總督(총독)을 추켜세웠고, 結局(결국) 1940年(년) 2月(월)부터 創氏改名(창씨개명)이 大大的(대대적)으로 單行(단행)된다.
한편 韓國(한국)의 政治(정치) 指導者(지도자) 中(중) 윤치호(尹致昊)는 創氏改名(창씨개명)에 否定的(부정적)이었다는 理由(이유)로 1940年(년) 5月(월) 1日(일)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警務局(경무국)으로 召喚(소환)되었다가 풀려났다. 5月(월) 1日(일) 午前(오전)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警務局(경무국)에서 召喚(소환)照査(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午前(오전) 11時(시) 그는 總督府(총독부)에서 미나미 지로(南次郎) 總督(총독)을 面談(면담)했다. 미나미 지로(南次郎)總督(총독)과의 面談(면담)에서 그는 創氏改名(창씨개명) 期日(기일)을 延期(연기)해 달라고 付託(부탁)했다.
“ 저는 內鮮一體(내선일체)를 完成(완성)하는 手段(수단)으로 朝鮮人(조선인)들의 創氏改名(창씨개명)을 贊成(찬성)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政策(정책)에 反對(반대)하는 사람들이 開陳(개진)하는 세 가지 理由(이유)를 總督(총독) 閣下(각하)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創氏改名(창씨개명)을 反對(반대)하는 이들은 도쿄(東京)에서 創氏改名(창씨개명)을 反對(반대)하고 있다는 理由(이유)를 듭니다. 전 이것이 合當(합당)한 事由(사유)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總督府(총독부)가 도쿄(東京)에 있는 特定(특정) 人士(인사)들의 意見(의견)을 追從(추종)해서 朝鮮(조선)의 細部政策(세부정책)을 立案(입안)해 實行(실행)하지는 않을 거라는 事實(사실) 때문이지요.
2.創氏改名(창씨개명)을 反對(반대)하는 이들은 朝鮮(조선)에 居住(거주)하고 있는 日本人(일본인)들이 創氏改名(창씨개명)을 反對(반대)한다는 理由(이유)를 듭니다. 創氏改名(창씨개명)으로 日本人(일본인)과 朝鮮人(조선인)의 區別(구별)이 사라지게 될까봐 그렇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朝鮮人(조선인) 모두가 日本式(일본식) 이름을 갖게 되면 自記(자기)들의 優越感(우월감)이 사라지게 될까봐 憂慮(우려)하는 日本人(일본인)들이 있다는 겁니다.
저는 特定(특정) 部類(부류)의 日本人(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 優越感(우월감)을 打破(타파)하기 위해 戰力(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總督(총독) 閣下(각하)께 우리 朝鮮人(조선인)이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創氏改名(창씨개명)을 反對(반대)하는 朝鮮人(조선인)들은 지난 數百 年(수백년) 동안 朝鮮人(조선인) 이름을 간직해온 우리 朝鮮人(조선인)들이 지금처럼 金氏(김씨), 李氏(이씨) 等(등)으로 살면서도 忠良(충량)한 日本(일본) 臣民(신민)이 되지 말라는 法(법)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전 이 主張(주장)에 꽤 說得力(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朝鮮人(조선인)들이 充分(충분)한 時間(시간)을 갖고 이 問題(문제)를 決定(결정)할 수 있게 마감時限(시한)을 오는 8月(월) 11日(일)로부터 6~10個月(개월) 정도 늦추면 어떨까 싶습니다. ”
創氏改名(창씨개명) 斷行(단행).
1940年(년) 京城府廳(경성부청) 民願局(민원국) 戶籍課(호적과)에 찾아가 創氏改名(창씨개명) 登錄(등록)을 하는 京城府(경성부) 住民(주민)들.
1940年(년) 1月(월)부터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南次郎) 總督(총독)은 創氏改名(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勸告(권고) 形式(형식)으로 創氏改名論(창씨개명론)을 發表(발표)했다.
그리고 1月(월) 4日(일) 미나미 지로(南次郎) 總督(총독)은 韓國人(한국인)들에게 創氏改名(창씨개명)을 强要(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闡明(천명)했다. 一部(일부) 韓國人(한국인)들은 總督(총독)이 韓國人(한국인)을 配慮(배려)한다며 總督(총독)의 뜻을 讚揚(찬양)하였다.
그러나 1939年(년) 12月(월)부터 創氏改名(창씨개명)에 自發的(자발적)으로 同參(동참)하자고 勸告(권고)한 이광수(李光洙) 조차 總督(총독)의 希望(희망)하는 사람에 한해서 創氏改名(창씨개명)을 해도 좋다는 主張(주장)에 疑惑(의혹)을 提起(제기)한다.
이광수(李光洙)는 '當局(당국)은 創氏改名(창씨개명)을 强要(강요)하는 일은 (絶對(절대)) 없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갖가지 手段(수단)과 方法(방법)을 動員(동원)해서 우리가-우리들 大部分(대부분)이-創氏改名(창씨개명)하도록 措處(조처)할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點(점)과 '우리 어른들이야 創氏改名(창씨개명)할 必要(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入學(입학)과 就職時(취직시)에 (各種(각종) 差別待遇(차별대우)를 받을 것'이라며 創氏改名(창씨개명) 拒否(거부) 以後(이후)의 不利益(불이익)을 豫想(예상), 憂慮(우려)하였다.
윤치호(尹致昊)는 거듭 創氏改名(창씨개명) 期日(기일)을 延期(연기)해달라고 請(청)했고, 그 뒤, 윤치호(尹致昊)의 請(청)을 받아들인 미나미 지로(南次郎) 總督(총독)은 創氏改名令(창씨개명령) 時限(시한)을 늦춰 1941年(년) 1月(월)부터 創氏改名(창씨개명)이 大大的(대대적)으로 斷行(단행)된다. 創氏改名(창씨개명)에 始終(시종) 否定的(부정적)이었던 윤치호(尹致昊) 亦是(역시) 創氏改名(창씨개명)을 拒否(거부)할 境遇(경우)에 가해질 不利益(불이익)을 念慮(염려)하였다.
'當局(당국)이 이미 創氏改名(창씨개명)하기로 決定(결정)한 以上(이상), 그들은 朝鮮人(조선인)들이 創氏改名(창씨개명)하도록 반드시 措置(조치)를 取(취)할 것이다. 그들은 創氏改名(창씨개명)을 拒否(거부)하는 著名(저명)한 朝鮮人(조선인)들을 反日分者(반일분자)로 블랙리스트(Blacklist)에 올릴 것'이라는 點(점)을 指摘(지적)했다.
그러나 一部(일부) 韓國人(한국인)들은 自發的(자발적)으로 創氏(창씨)에 參與(참여)하였고 京城府廳(경성부청)과 區廳(구청), 各(각) 府廳(부청)과 郡廳舍(군청사) 等(등)에는 創氏改名(창씨개명)을 하러 自發的(자발적)으로 몰려든 住民(주민)들로 因(인)해 混線(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半面(반면)에, 創氏改名(창씨개명)의 强要(강요)를 拒否(거부)하고 自決(자결)한 사람도 있었으며, 不當(부당)함을 誹謗(비방)하다가 拘束(구속)된 사람도 나타났다.
한편, 이와 같은 創氏(창씨)의 强壓(강압) 속에서도 一部(일부) 人士(인사)들은 끝내 이를 拒否(거부)하였고, 6個月間(개월간) 申告(신고)하도록 했으나 3個月(개월)이 지나도록 申請率(신청률)이 7.6%에 不過(불과)하자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는 行政力(행정력)과 警察力(경찰력)을 總動員(총동원)해 創氏改名(창씨개명)을 하도록 더욱 脅迫(협박)하고 强要(강요)해 申告(신고) 磨勘(마감) 時期(시기)까지 80%인 322萬(만) 家口(가구)가 創氏改名(창씨개명)하였다.
창씨계출(創氏屆出) 初期(초기)에는 一部(일부) 親日派(친일파)들이 自發的(자발적)으로 創氏改名(창씨개명)을 하려고 몰려들어 京城府廳(경성부청)과 區廳(구청), 그 밖의 府廳(부청)과 郡廳舍(군청사) 等(등)이 混雜(혼잡)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韓國人(한국인)의 希望(희망)에 따라 實施(실시)하게 되었다는 創氏改名(창씨개명)은 1940年(년) 5月(월)까지 창씨계출(創氏屆出) 호수(戶數)가 7.6%에 불과하자,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는 行政力(행정력)과 警察力(경찰력)을 總動員(총동원)해 創氏改名(창씨개명)을 하도록 脅迫(협박)·强要(강요)하여 申告(신고)磨勘(마감) 時期(시기)까지 322萬(만) 家口(가구), 79.3%로 創氏率(창씨율)을 끌어올렸다.
創氏改名(창씨개명)은 1946年(년) 美軍政(미군정)과 蘇聯(소련) 軍政(군정)에 依(의)해 廢止(폐지)된다.
徵用者(징용자)와 慰安婦(위안부).~慰安婦(위안부) 募集(모집) 廣告(광고)들.
1944年(년) 8月(월)14日(일) 버마 미치나(Burma Michina)에서 美軍(미군)의 審問(심문)을 받는 韓國人(한국인) 慰安婦(위안부)의 모습.
中日(중일)戰爭(전쟁) 以後(이후)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와 日本(일본) 政府(정부)에서는 本格的(본격적)으로 慰安婦(위안부)와 徵用者(징용자)들을 募集(모집)하였다. 이 渦中(와중)에 職工(직공)을 差出(차출)한다는 廣告(광고)를 보고 속임수로 끌려간 이들도 있고 一部(일부)는 廣告(광고)를 보고 自發的(자발적)으로 慰安婦(위안부)나 徵用(징용)으로 가기도 했다.
植民地(식민지) 朝鮮(조선), 一部(일부) 日本(일본) 女性(여성)과 타이완(Taiwan), 中國(중국) 大陸(대륙), 동티모르(East Timor), 필리핀(Philippines), 小數(소수)의 네덜란드(Netherlands) 女性(여성)들이 있었다. 日本軍(일본군) 司令部(사령부) 或(혹)은 軍納(군납) 業體(업체)에서는 慰安婦(위안부)를 募集(모집)하기 위해 新聞廣告(신문광고), 雜誌廣告(잡지광고), 放送(廣告방송광고) 等(등)을 通(통)해 募集(모집) 廣告(광고)를 냈다. 하지만 强制(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한다. 被害者(피해자)는 最小(최소) 4萬名(만명)에서 最大(최대)30萬名(만)명)으로 推定(추정)된다고 한다.
“ 慰安婦(위안부)支給大募集(지급대모집) 慰安婦(위안부)를 급히 大募集(대모집) 年齡(연령) : 17歲(세) 以上(이상) 30歲(세) 計(계)(以下(이하).
勤善(근선) (勤務(근무)지) : 後方(후방) ○○部隊(부대) 위안부(慰安婦).
月給(월급) : 300圓(원) 以上(이상)(前借(전차) 3000圓(원) 計下(계하)
— 京城日報(경성일보) 1944年(년) 7月(월) 26日字(일자)에 報道(보도)된 慰安婦(위안부) 募集(모집) 廣告(광고).
“ 『軍(군)』慰安婦(위안부) 急求(급구).
行先地(행선지) : ○○部隊(부대) 慰安所(위안소).
支援資格(지원자격) : 年齡(연령) 18歲(세) 以上(이상) 30歲(세) 以內(이내) 身體(신체) 康健(강건)한 女性(여성).
募集期日(모집기일) : 10月(월) 27日(일)부터 11月(월) 8日(일)까지.
契約級待遇(계약급대우) : 本人(본인) 面接後(면접후) 卽時決定(즉시결정). 支給
募集人員(모집인원) : 數十名(수십명), 希望者(희망자) 左記場所(좌기장소)에 支給間(지급간)의(到着(도착)하여 質問(질문)할 것.
京城府(경성부) 鐘路區(종로구) 樂園町(낙원정) 195番地(번지), 朝鮮旅館內(조선여관내) 광3-263號(호), 허씨(許氏)
— 每日新報(매일신보)에 報道(보도)된 慰安婦募集記事(위안부모집기사).
1944年(년) 當時(당시) 慰安婦(위안부) 募集(모집)은 京城府(경성부) 鐘路區(종로구) 樂園町(낙원정)에 있었으며 徵募(징모) 擔當者(담당자)는 許氏(허씨) 였다. 다만 軍人(군인)이 募集(모집)할 境遇(경우)에는 所屬(소속) 部隊(부대)와 官等姓名(관등성명)이 記入(기입)되었다. 一部(일부) 慰安婦(위안부)들은 募集廣告(모집광고)를 보고 찾아가기도 했다. 中日(중일) 戰爭(전쟁) 以後(이후) 日本(일본)의 植民地(식민지)에서는 慰安婦(위안부) 募集廣告(모집광고), 放送(방송) 等(등)이 실렸다. 그러나 韓國(한국)에서 이를 拒否(거부)한 言論(언론)은 朝鮮日報(조선일보)와 東亞日報(동아일보)만이 有一(유일)하였다.
1937年(년)부터 1940年(년)까지 徵用者(징용자)와 慰安婦(위안부) 差出(차출) 或(혹)은 供出(공출), 自願(자원)徵用者(징용자), 自願(자원) 慰安婦(위안부)의 數(수)가 急增(급증)함에 따라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에서도 더이상 韓國人(한국인) 知識人(지식인)들의 參政權(참정권) 要求(요구), 自治權(자치권) 許容(허용) 要求(요구)를 拒絶(거절)할 수 없게 되었다.
1940年代(년대) 初(초) 인도네시아(Indonesia) 수마트라섬(Sumatra Island) 팔렘방(Palembang)에도 朝鮮人(조선인) 慰安婦(위안부)들이 있었고, 팔렘방(Palembang)에 있던 慰安婦(위안부)들은 ‘第(제)1明月館(명월관)’과 ‘第(제)2明月館(명월관)’ 두 곳에 나뉘어 있었고, 明月館(명월관)은 日本軍(일본군)에 協助(협조)하며 慰安婦(위안부)를 管理(관리)하는 韓國人(한국인) 兄弟(형제)가 運營(운영)하였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末期(말기)~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의 活動(활동).
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 主導下(주도하)의 獨立運動(독립운동)은 1920年代(년대) 中盤(중반) 大體(대체)로 沈滯(침체) 되었으나, 김구(金九)의 主導下(주도하)에 다시 活潑(활발)하게 進行(진행)되었다.
김구(金九)는 1932年(년) 1月(월) 8日(일) 이봉창(李奉昌)을 시켜 日本(일본) 天皇(천황)을 暗殺(암살)하려 하였으나 失敗(실패)하였다. 그러나 이 事件(사건)으로 海外(해외)의 同胞(동포)들이 激勵(격려) 便紙(편지)와 資金(자금)을 보내왔다.
김구(金九)는 이덕주(李德柱)와 兪鎭植(유진식)에게 日本(일본) 總督(총독)의 暗殺(암살)을 指示(지시)하여 本國(본국)으로 보냈다. 또한 윤봉길(尹奉吉)을 시켜 상하이(上海) 事變(사변) 勝戰(승전)記念(기념) 天長節(천장절)에 爆彈(폭탄)을 던져 적잖은 日本人(일본인) 死傷者(사상자)들을 發生(발생)시킴으로 成功(성공)하였다.
以後(이후) 두 天皇(천황) 暗殺(암살)의 主謀者(주모자)로 手配(수배)된 김구(金九)는 숨어 다녀야 했으나 난징(南京)으로 거처를 옮긴 國民黨(국민당) 政府(정부)는 이러한 事件(사건)들로 臨時政府(임시정부)를 協力(협력)對象(대상)으로 생각하였고, 김구(金九)를 支援(지원)하였다. 日本(일본)의 影響力下(영향력하)에 들어간 上海(상해)에서 避身(피신)하여 1933年(년)에는 장제스(蒋介石)와 항일 戰線協力(전선협력)에 合議(합의)하였다.
이 무렵에 양기탁(梁起鐸)이 1933年(년) 10月(월) 國務令(국무령)에 選出(선출)되어 1935年(년) 10月(월)까지 在職(재직)한다. 그러나 日本軍(일본군)이 中國(중국)을 侵攻(침공)함과 함께 臨時政府(임시정부)는 상하이(上海)를 脫出(탈출)해야 하는 狀況(상황)에 이르러 난징(南京)과 長沙(창사)를 거쳐 1940年(년)에는 충칭(重慶)으로 그 本據地(본거지)를 옮기게 된다.
重慶(충칭)에서 國民黨(국민당)과 美國(미국)의 도움을 얻어 光復軍(광복군) 總司令部(총사령부)를 創設(창설)하고,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이 太平洋(태평양) 戰線(전선)에서 擴大(확대)된 1941年(년) 12月(월) 9日(일)에는 聯合軍(연합군)에 加擔(가담)해 日本(일본)에 대해 宣傳布告(선전포고)를 發表(발표)하지만, 本國(본국) 奪還(탈환) 作戰(작전)의 準備中(준비중)에 日本(일본)의 降伏(항복)을 맞이하게 된다.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의 韓國人(한국인) 參政權(참정권) 運動(운동).
박춘금(朴春琴) 日本(일본) 帝國議會衆議員(제국의회중의원) 議員(의원) 當選(당선)되었을때.
1940年(년)부터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는 日本(일본) 本國(본국)에 韓國人(한국인)의 參政權(참정권)을 許諾(허락)해줄 것을 要求(요구)하였다. 1932年(년) 12月(월) 박영효(朴泳孝)가 貴族院(귀족원) 議員(의원)에 勅任(칙임)된 例(예)가 있었고, 1941年(년)에 윤덕영(尹德榮)과 박중양(朴重陽)이 選定(선정)되었는데 박중양(朴重陽)은 이때 貴族院(귀족원) 議員職(의원직)을 辭讓(사양)했다.
그러나 박중양(朴重陽)은 1945年(년) 4月(월) 3日(일) 두 번째로 貴族院(귀족원) 議員職(의원직)에 任命(임명)되자 이때는 受容(수용)한다. 1943年(년)에는 李軫鎬(이진호)가 勅選(칙선)되고 있었지만, 制度(제도)로서 規定(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때까지의 貴族院(귀족원) 議員(의원)은 任命(임명)되면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것을 拒絶(거절)한 人物(인물)은 박중양(朴重陽)이 有一(유일)했다.
1936年(년) 韓圭復(한규복), 박춘금(朴春琴) 等(등)의 韓國人(한국인) 參政權(참정권) 運動(운동)을 警戒(경계)하였지만 1940年(년) 太平洋(태평양) 戰爭(전쟁) 以後(이후) 兵力(병력), 物資(물자)의 不足(부족)으로 韓國(한국)에서 兵力(병력), 物資(물자)를 供出(공출)해가면서 韓國人(한국인)에게도 그에 대한 給付(급부)를 주어야 한다는 與論(여론)이 나타났다. 1940年(년)부터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는 日本(일본) 本國(본국) 政府(정부)에 韓國人(한국인)들에게도 參政權(참정권)을 줄 것을 要求(요구)하여 1945年(년)에 비로소 日本(일본) 議會(의회)를 通過(통과)하였다.
日本(일본) 帝國(제국) 國會(국회)의 上院格(상원격)이었던 貴族院(귀족원)에 韓國人(한국인) 出身(출신) 議員(의원)이 選出(선출)된 背景(배경)은 韓國人(한국인)들의 參政權(참정권) 要求(요구)가 받아들여진 結果(결과)였다. 徵兵制(징병제)가 日本(일본) 本國(본국)의 一方的(일방적)인 要求(요구)에 依(의)해 實施(실시)되었던 것에 比(비)해, 參政權(참정권) 問題(문제)의 解決(해결)은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가 作成(작성)한 原案(원안)대로 貫徹(관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貴族院(귀족원) 議員(의원)의 勅選(칙선)議員(의원) 7名(명)은 1945年(년) 4月(월) 3日(일)에 選任(선임)되었는데 김명준(金明濬), 박상준(朴相駿), 박중양, 송종헌(宋鍾憲), 윤치호(尹致昊), 이진용(李珍鎔), 한상룡(韓相龍) 等(등)이었다. 한편 韓國人(한국인) 몫의 下院格(하원격)인 衆議員(중의원) 議員(의원) 23名(명)은 議會(의회)가 滿期(만기)되면 選擧(선거)에 依(의)해서 選出(선출)될 豫定(예정)이었다.
1945年(년) 當時(당시) 韓國人(한국인) 貴族院(귀족원) 議員(의원)으로는 박영효(朴泳孝), 윤덕영(尹德榮), 이진호(李軫鎬), 윤치호(尹致昊), 金明濬(김명준), 박중양(朴重陽), 박상준(朴相駿), 송종헌(宋鐘憲), 이기용(李埼鎔), 한상룡(韓相龍) 等(등)이 選任(선임)되었다. 初期(초기)에 박영효(朴泳孝), 윤덕영(尹德榮), 이진호(李軫鎬), 金明濬(김명준), 박상준(朴相駿), 송종헌(宋鐘憲), 이기용(李埼鎔), 한상룡(韓相龍) 等(등)을 選定(선정)하고 1945年(년)에는 박중양(朴重陽), 윤치호(尹致昊)를 追加(추가)로 選任(선임)하였다.
韓國人(한국인) 知識人(지식인)과 官僚(관료)들의 參政權(참정권) 要求(요구)에 答辯(답변)을 回避(회피)하던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는 自發的(자발적)으로든, 打發的(타발적)으로든, 勸告(권고)에 依(의)해서든 韓國人(한국인)들이 太平洋(태평양) 戰爭(전쟁)에 强制(강제) 徵集(징집)되거나 自願(자원)해서 入隊(입대)하자 이를 契機(계기)로 本國(본국) 政府(정부)에 繼續(계속)해서 韓國人(한국인)의 參政權(참정권)을 許諾(허락)해줄 것을 要請(요청)했다. 1940年(년)부터 總督府(총독부)의 要求(요구)는 結局(결국) 1945年(년) 1月(월)에 가韓國人(한국인) 貴族院(귀족원) 議員(의원) 選出(선출) 過程(과정).
박중양 일본 제국의회귀족원 의원을 역임하였다.
韓國人(한국인)에 대한 參政權(참정권)의 附與(부여)가 法律(법률)로써 實現(실현)된 것은 1945年(년) 1月(월)의 日本(일본) 議會(의회)를 通過(통과)한 法律(법률) 第(제)34號(호) '衆議員(중의원) 選擧法(선거법) 中(중) 改定法(개정법) 율안'과 勅令(칙령) 第(제)193號(호) '貴族院領(귀족원령) 中(중) 改正案(개정안)'에 依(의)해서였고, 參政權(참정권) 附與(부여)는 韓半島(한반도)와 타이완(台湾)에서 同時(동시)에 이루어졌다.
이를 두고 史學者(사학자) 김유리는 參政權(참정권) 問題(문제) 解決(해결)이 늦어졌다는 評(평)을 내리기도 했다. '參政權(참정권) 問題(문제)의 解決(해결)은 韓半島(한반도)에 대한 徵兵(징병) 實施(실시)가 發表(발표)되었던 1942年(년)의 始點(시점)에 이루어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徵兵制(징병제) 發表(발표) 時期(시기)에도 아무런 言及(언급)조차 없었고, 오히려 徵兵制(징병제)와는 '別途(별도)로 考慮(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主張(주장)되었다.고 批判(비판)했다. 그는 '徵兵制(징병제)와는 '別途(별도)로 考慮(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主張(주장)되고 있었던 問題(문제)가 2, 3年(년)의 潛伏(잠복)期間(기간)을 거친 後(후) 韓國人(한국인)들의 强(강)한 要求(요구)라는 口實(구실)을 빌어 解決(해결)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었던 理由(이유)가 무엇인지 考察(고찰)해 볼 必要(필요)가 있을 것이다.'고 批判(비판)한다.
原來(원래) 貴族院(귀족원) 議員(의원)의 被選擧權(피선거권)은 日本(일본)은 '帝國(제국)臣民(신민)인 男子(남자)로서 年齡(연령) 30歲(세) 以上(이상)인 사람'으로 規程(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韓國人(한국인)들에게 附與(부여)된 參政權(참정권)도 一部(일부) 制限(제한)이 있는 것이었다. 먼저 貴族院(귀족원) 議員(의원)의 境遇(경우)는 韓半島(한반도)와 타이완(台湾)에 居住(거주)하는 만 30歲(세) 以上(이상)의 男子(남자)로서 名望(명망)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勅任(칙임)된 사람 10名(명) 以內(이내)를 參加(참가)시키며, 7年(년) 任期(임기)로 하였다.
이 10名(명)의 貴族院(귀족원) 議員(의원) 가운데 몇 명씩을 配當(배당)할 것인가에 대한 名文(명문) 規程(규정)은 없었으나, 7名(명)을 韓半島(한반도)에, 나머지 3名(명)을 타이완(台湾)에 割當(할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貴族院(귀족원) 議員(의원)들은 1945年(년) 4月(월)에 鈴木(령목)內閣(내각)이 成立(성립)한 直後(직후)의 臨示(임시)議會(의회)에 參加(참가)하고 있다.
原來(원래) 日本(일본) 出身(출신) 日本(일본) 貴族院(귀족원) 議員(의원)의 任期(임기)는 終身(종신)이었음에도 不久(불구)하고 韓半島(한반도)와 타이완(台湾) 出身(출신) 議員(의원)의 任期(임기)를 7年(년)으로 한 것은 또 다른 差別(차별)을 만든 것이었다.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의 建議(건의)를 受容(수용)한 日本(일본) 政府(정부)는 時間(시간)이 지나면 下院格(하원격)인 衆議員(중의원)에도 韓國人(한국인)을 參加(참가)시킬 計劃(계획)이었다. 衆議員(중의원)에 있어서는 公選(공선)選擧(선거))에 依(의)해야 한다는 原則(원칙)에 立脚(입각)해 있는 만큼 選擧(선거)의 方法(방법)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問題(문제)가 가장 重要(중요)하게 擧論(거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대해 日本(일본) 本國(본국)과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모두 普通選擧(보통선거)는 避(피)해야 한다는 것이 基本(기본) 立場(입장)이었고, 때문에 選擧(선거) 方法(방법)은 制限選擧(제한선거)에 依(의)할 것으로 決定(결정)되었다. 卽(즉) 選擧權(선거권)을 制限(제한)하는데 있어 基準(기준)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日帝(일제)는 直接(직접) 國稅(국세) 15圓(원) 以上(이상)을 納付(납부)하는 사람을 選擧權者(선거권자)로 決定(결정)하고 있었다.
이것은 日帝(일제)가 이미 實施(실시)하고 있었던 地方自治(지방자치) 團體(단체) 議員(의원) 選擧(선거)의 境遇(경우) 보다도 그 資格(자격) 基準(기준)이 훨씬 더 强化(강화)된 것인데, 當時(당시) 都會(도회), 府會(부회), 邑會(읍회), 面協議會(면협의회) 選擧(선거)의 選擧權(선거권)도 그 資格(자격) 基準(기준)이 國稅(국세) 5圓(원) 以上(이상)으로 規程(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朝鮮人(조선인) 衆議員(중의원)은 日本帝國(일본제국) 貴族院(귀족원)과 衆議員(중의원)에 案件(안건)이 繫留中(계류중)에 있던 8月(월) 日本(일본)의 敗戰(패전)으로 解放(해방)되면서 全面(전면) 白紙化(백지화)된다.
大韓(대한)光復軍(광복군)
抗日武裝(항일무장) 鬪爭(투쟁)과 光復(광복)~朝鮮)義勇隊(조선의용대)
日帝(일제)가 1931年(년) 9月(월) 滿洲(만주)를 侵掠(침략)하여 그해末(말)까지 전(全)滿洲(만주)를 占領(점령)하자, 滿洲(만주)에 있던 韓國人(한국인)들은 卽刻(즉각) 武裝(무장)을 하고 日本軍(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먼저 양세봉(梁世鳳)· 이청천(李靑天) 等(등) 民族主義者(민족주의자)들이 이끌었던 朝鮮革命軍(조선혁명군)과 韓國獨立軍(한국독립군)은 中國人(중국인)들과 손을 잡고 韓中聯合作戰(한중(연합작전)을 展開(전개)해 熾熱(치열)하게 抵抗(저항)했으나, 日帝(일제)의 集中的(집중적)인 攻擊(공격)을 받아 차츰 萬里長城(만리장성) 以南(이남)의 中國(중국)으로 後退(후퇴)하고 말았다.
한편 社會主義者(사회주의자)들은 1932年(년) 봄에 韓國人(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던 東滿洲(동만주)를 中心(중심)으로 여러 地域(지역)에서 遊擊隊(유격대)를 結成(결성)하고 게릴라(Guerrilla:游击队) 活動(활동)等(등) 展開(전개)해 反日(반일) 鬪爭(투쟁)에 나섰다.
中國(중국) 管內(관내)에서는 1937年(년) 中日(중일)戰爭(전쟁)이 일어나자, 김원봉(金元鳳)·윤세주(尹世胄)·한빈(韓斌)·김학무(金學武) 等(등) 130餘名(여명)이 中國(중국) 國民黨(국민당)의 도움을 받아 1938年(년) 10月(월) 朝鮮義勇隊(조선의용대)를 創設(창설)했다.
朝鮮(조선) 義勇隊(의용대)는 中國軍(중국군)을 도와 日本軍(일본군) 捕虜(포로) 審問(심문) 對敵(대적) 心理戰(심리전), 敵後方(적후방)에서 벌이는 諜報活動(첩보활동) 및 宣撫工作(선무공작)等(등)에 從事(종사)했다.
朝鮮(조선) 義勇隊(의용대)의 主力(주력) 部隊(부대)는 1941年(년) 봄에 황허 강(黃河)을 건너 韓國人(한국인)이 많이 사는 화베이(華北)地方(지방)으로 活動(활동) 舞臺(무대)를 옮겼다. 義勇隊員(의용대원)들은 이곳에서 八路軍(팔로군)과 協力(협력)하여 호가장(最好的价钱) 戰鬪(전투), 反掃蕩戰(반소탕전) 等(등) 여러 戰鬪(전투)에 參加(참가)하여 크게 活躍(활약)했다.
한편, 中日(중일) 戰爭(전쟁) 勃發(발발) 後(후) 日本軍(일본군)에 쫓겨 자싱(嘉兴)·항저우(杭州)·창사(长沙) 等地(등지)로 轉戰(전전)하면서 試鍊(시련)을 겪어야 했던 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는 1940年(년) 충칭(重庆市)에 安着(안착)했는데, 그해 9月(월) 幹部(간부) 12名(명)으로 韓國(한국) 光復軍(광복군)을 創設(창설)했다. 光復軍(광복군)은 1942年(년) 화베이(华北)로 가지 않은 朝鮮(조선) 義勇隊(의용대)의 殘留(잔류)部隊(부대)를 吸收(흡수)하여 隊列(대열)을 늘리는 한편, 1943年(년) 8月(월) 光復軍(광복군) 8名(명)을 미얀마(缅甸:Myanmar) 戰線(전선)에 派遣(파견)해 英國軍(영국군)을 도와 太平洋(태평양) 戰爭(전쟁)에 참전했다.
戰爭(전쟁)이 차츰 日本(일본)에게 不利(불리)하게 돌아가자 日本(일본)은 韓國人(한국인)의 海外(해외) 短波放送(단파방송) 聽取(청취)를 嚴重(엄중)히 團束(단속) 하였지만 京城(경성) 放送局(방송국)의 職員(직원)이 獨立運動(독립운동) 次元(차원)에서 美國(미국)의 소리 韓國語(한국어) 放送(방송)을 들은 것이 日本(일본)警察(경찰)에 의해 들켜 數(수)많은 放送人(방송인)들이 獄苦(옥고)를 치른 短波(단파) 放送(방송) 밀청 事件(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945年(년) 8月(월) 15日(일), 日本(일본)의 敗戰(패전)으로 光復(광복)이 찾아옴으로서 韓國(한국)의 모든 獨立運動(독립운동)도 막을 내리게 되었으나, 日本(일본)과 斷交(단교)했다. 한편, 같은 날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朝鮮(조선)의 北(북)쪽 淸津市(청진시)에서는 蘇聯(소련)이 日本(일본) 帝國(제국)과 戰爭(전쟁)을 繼續(계속) 하고 있었으며 8月(월) 16日(일)에 淸津市(청진시)를 解放(해방)시켰다.
日帝(일제)의 統治(통치)와 政策(정책)~政治(정치), 行政(행정).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는 1910年(년) 10月(월) 2日(일)部(부)로 韓國(한국) 13道(도)의 觀察使(관찰사)를 屠場官(도장관)으로 名稱(명칭)을 바꿨다가 1912年(년)부터 道知事(도지사)로 바꾸었다. 또한 道知事(도지사) 아래 副知事(부지사)를 두어 道知事(도지사)의 業務(업무)를 保佐(보좌)하게 했고, 吏房(이방), 戶房(호방), 禮房(예방) 등 各(각) 房(방)을 近代式(근대식) 各(각) 局(국)과 課(과)로 나누었다.
또한 規模(규모)가 큰 部處(부처)에는 局長級(국장급)을, 작은 部處(부처)에는 課長級(과장급)만을 두어 例下(예하) 行政體系(행정체계)를 構成(구성)하게 했다. 行政機關(행정기관)은 面里制(면리제)와 洞制(동제), 五家作統法(오가작통법)에 依(의)한 統班制(통반제)였던 것을 都市地域(도시지역)은 동(洞) 代身(대신) 日本式(일본식) 行政區域(행정구역) 名稱(명칭)인 정(町)을 쓰게 하였다. 또한 府(부) 中(중)에서도 規模(규모)가 큰 府(부)는 다시 몇개의 洞(동)을 묶어 한개의 구(區)로 나누었다.
官僚(관료)들의 職位(직위)는 軍屬(군속), 面束(면속)으로 稱(칭)하고, 旗手(기수),書記(서기), 技士(기사), 主事(주사), 事務官(사무관), 書記官(서기관) 等(등)의 職位(직위)를 適用(적용)하고 差等(차등)으로 月給(월급)을 支給(지급)하였다.
또한 憲兵(헌병)과 警察(경찰)의 搜査(수사), 檢閱(검열) 等(등)의 便宜(편의)를 위해 韓國人(한국인) 出身(출신)의 巡査(순사)補助員(보조원)과 憲兵補助員(헌병보조원) 等(등)의 事務(사무)補助員(보조원)을 採用(채용)해서 썼다.
또한 1920年代(년대) 부터는 直接(직접) 韓國人(한국인)이 巡査(순사), 憲兵(헌병), 訓導(훈도) 等(등)의 公開採用(공개채용) 試驗(시험)에 繼續(계속) 挑戰(도전), 應試(응시)하기도 했다.
3·1 運動(운동)의 불씨가 남아있던 1922年(년) 巡査職(순사직) 競爭率(경쟁률)은 約(약) 2.1對(대) 1 水準(수준)에 不過(불과)했으나 文化政治(문화정치)가 本格化(본격화)한 1920年代(년대) 中般(중반) 以後(이후)부터 그 競爭率(경쟁률)이 10對(대) 1을 웃돌았다. 1926年(년)에는 856名(명) 募集(모집)에 9千(천)193名(명)이 志願(지원), 約(약) 10.7對(대) 1의 競爭率(경쟁률)을 보였으며 1932年(년)에는 854名(명) 募集(모집)에 1萬(만)6千(천)193名(명)이 志願(지원)해 19對(대) 1로 競爭率(경쟁률)이 垂直(수직) 上昇(상승)했다. 巡査(순사) 等(등)에 대한 19.6對(대) 1로 頂點(정점)을 찍은 1935年(년) 以後(이후) 巡査(순사)에 대한 選好(선호)는 1936年(년) 14.1代(대) 1, 1937年(년) 10.9對(대) 1로 내리막길을 걸었으나 1920年代(년대) 中般(중반)부터 太平洋(태평양) 戰爭(전쟁) 以前(이전)까지 競爭率(경쟁률)이 10∼20對(대) 1에 이를 程度(정도)로 巡査職(순사직)이 높은 人氣(인기)를 謳歌(구가)했다.
이를 두고 延世大學校(연세대학교)의 將臣(장신)은 "巡査(순사)는 朝鮮人(조선인) 社會(사회)에서 좋지 못한 이미지(image:영상)에도 不久(불구)하고 法律(법률)로 保障(보장)된 권한 탓에 해마다 높은 志願(지원)율을 보였다"고 指摘(지적)하면서 "官吏(관리)의 最末端(최말단)인 까닭에 志願者(지원자)의 學歷水準(학력수준)은 普通學校(보통학교) 卒業者(졸업자)가 80% 程度(정도)를 차지했다"고 分析(분석)했다.
地方行政(지방행정)~慶尙南道廳(경상남도청)~平安北道廳(평안북도청)
1914年(년) 朝鮮(조선)의 行政區域(행정구역).~1945年(년) 朝鮮(조선)의 行政區域(행정구역).
出生(출생) 申告(신고)나 死亡(사망) 申告(신고)는 邑事務所(읍사무소), 面事務所(면사무소)의 戶籍係(호적계)에서 申告(신고)를 받았다. 그러나 國民(국민)大多數(대다수)가 글자를 모르는 文盲率(문맹율)이 높아 동네의 里長(이장), 統長(통장), 정장(町長)이 거둬서 邑(읍), 面事務所(면사무소)에 申告(신고)하였다. 따라서 出生(출생)이나 死亡(사망) 直後(직후) 一週日(일주일)에서 1個月(개월) 以上(이상)이 지난 뒤에 出生(출생) 申告(신고)나 死亡(사망) 申告(신고) 處理(처리)가 되었다.
또한 當事者(당사자)가 가서 出生(출생) 申告(신고), 死亡(사망) 申告(신고)를 하지 않고 里長(이장), 統長(통장), 町長(정장)이 一括的(일괄적)으로 모아 一週日(일주일)에 1~2回(회), 或(혹)은 장날 邑事務所(읍사무소), 面事務所(면사무소)에 나가서 申告(신고)하였는데 종이나 筆記具(필기구)에 적어가거나 단순히 口述(구술) 暗記(암기)로 외워서 申告(신고)하는 것이 普通(보통)이었으므로 生年月日(생년월일)이 不正確(부정확)하거나, 陽曆(양력)과 陰曆(음력)을 헷갈리거나, 死亡(사망) 날짜가 正確(정확)하지 않거나, 出生(출생), 死亡(사망)申告(신고) 當時(당시) 이름글자가 바뀌어서 엉뚱한 이름으로 登錄(등록)되는 일도 不知其數(부지기수)였다.
또한 移送(이송)이나 옮기던 中(중) 개울 혹은 山沙汰(산사태) 等(등)의 事故(사고)로 遲延(지연)되는 일도 存在(존재)하였다.
大韓帝國(대한제국)이 滅亡(멸망)하던 1910年(년) 8月(월)까지만 해도 戶籍(호적)과 姓氏(성씨)가 없었던 韓國人(한국인)들 中(중)에는 日帝(일제)의 强要(강요)로 억지로 兩班家門(양반가문)의 姓氏(성씨)나 主人(주인)집 姓氏(성씨)와 이름을 부여받아 戶籍(호적)에 登載(등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戶籍(호적)書類(서류)는 太平洋(태평양) 戰爭(전쟁) 期間(기간)과 解放(해방) 直後(직후) 1945年(년) 8月(월)~10月(월) 사이 日帝(일제) 官公署(관공서)에 대한 분풀이성 掠奪(약탈)과 破壞(파괴), 6.25 戰爭(전쟁) 直後(직후)의 火災(화재) 等(등)으로 大部分(대부분) 消失(소실)되었다.
戶籍(호적) 書類(서류)들은 暗記(암기)와 筆記(필기), 手記(수기)로 記錄(기록)하였고 종이는 잘 찢어졌으며, 먹물로 쓰거나, 잉크도 저질이라 쉽게 번졌으므로 行政(행정)書類(서류)에는 거짓과 誤謬(오류)로 된 內容(내용)도 많았다. 이러한 混線(혼선)은 解放(해방) 뒤에도 1950年(년) 韓國(한국) 戰爭(전쟁) 直後(직후)까지도 繼續(계속)되었다.
言論(언론)
當時(당시) 韓國(한국)의 各(각) 新聞(신문)과 雜誌(잡지), 廣告(광고) 等(등)의 發行(발행)에 制限(제한)은 없었으나 嚴格(엄격)한 檢閱(검열)이 進行(진행)되었다. 新聞(신문)과 雜誌(잡지), 廣告(광고)는 한글 專用(전용) 또는 國漢文(국한문) 混用體(혼용체), 日本語(일본어)와 漢字(한자)를 섞은 日漢字(일한자) 倂用體(병용체) 等(등)의 廣告(광고), 報道(보도)가 나갔다.
1940年(년) 太平洋(태평양) 戰爭(전쟁) 以後(이후)에도 한글 報道(보도)를 禁止(금지)하지는 않았다. 또한 東亞日報(동아일보), 朝鮮日報(조선일보), 朝鮮中央日報(조선중앙일보) 等(등)에는 韓國人(한국인) 獨立運動(독립운동), 自治運動(자치운동) 等(등)에 대한 記事(기사)들, 亡命(망명)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들의 消息(소식), 現況(현황)도 種種(종종) 報道(보도)되었다.
그러나 獨立運動(독립운동)과 自治(자치)運動(운동)에 대한 擁護(옹호)論調(논조)를 싣던 朝鮮日報(조선일보)와 東亞日報(동아일보)는 여러 번 檢閱(검열), 停刊(정간), 廢刊(폐간), 休刊(휴간), 復刊(복간) 等(등)을 反復(반복)하다가 1940年(년) 最終(최종) 廢刊(폐간)되었다. 以後(이후) 每日新報(매일신보)를 비롯한 小數(소수)의 親日言論(친일언론)이 活動(활동)하였다.
1924年(년)부터는 朝鮮放送公社(조선방송공사)(韓國放送公社(한국방송공사) KBS의 前身(전신)이 京城(경성)에서 開通(개통)되어 放送報道(방송보도)되었다. 라디오(radio)는 1930年代(년대) 以後(이후) 邑面單位(읍면단위) 一般(일반) 家庭(가정)까지 普及(보급)되었지만, 텔레비전(television)은 郡單位(군단위) 以下(이하)에는 거의 普遍的(보편적)으로 普及(보급)되지 않았으므로 TV 視聽率(시청률)은 극히 低調(저조)하였다.
敎育(교육)~公立普通學校(공립보통학교).
朝鮮(조선)에서는 1895年(년) 甲午改革(갑오개혁)으로 近代敎育(근대교육) 制度(제도)가 始作(시작)되었지만, 1906年(년) 時點(시점)에서도 國民學校(초등학교)가 全國(전국)에서 40個校(개교) 未滿(미만)이며, 兩班(양반)의 子弟(자제)는 書堂(서당)에서 私敎育(사교육)을 받는 境遇(경우)가 많았다. 書堂(서당)은 三泉程度(삼천정도) 있던 것 같지만, 內容(내용)은 漢文(한문) 敎育(교육)이 中心(중심)이었다. 數學(수학)이나 한글 等(등)의 敎育(교육)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다.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는 大韓帝國期(대한제국기)에 韓國人(한국인)이 著述(저술)한 各級(각급) 學校用(학교용) 敎科書(교과서)들을 沒收(몰수)하여 使用(사용)을 禁止(금지)시켰고, 그 代身(대신) 日本人(일본인) 著作(저작)의 敎科書(교과서)로 代替(대체)시켰다. 總督府(총독부)는 民族(민족)敎育(교육)을 금지시키기 위해 '朝鮮敎育令(조선교육령)' 과 '私立學校規則(사립학교규칙)' 등을 制定(제정)하여 學校(학교)의 設置(설치)와 敎育內容(교육내용)을 總督府(총독부)가 統制(통제)하기 始作(시작)하였다.
大韓帝國(대한제국) 時期(시기)에 設立(설립)된 高等敎育(고등교육) 機關(기관)들을 비롯하여 數(수)많은 書堂(서당) 들의 登錄(등록)이 取消(취소)되었다. 日本(일본)은 代身(대신) 全國(전국)에 普通)學校(보통학교) (只今(지금)의 初等學校(초등학교)를 設置(설치)했다. 初等學校(초등학교)는 合倂直前(합병직전)에는 40個(개) 程度(정도)였던 것이 1943年(년)에는 4271個(개)까지 增加(증가)했다. 高等敎育(고등교육)의 側面(측면)에서, 1924 年(년)에 京城帝國(경성제국) 大學街(대학가) 設置(설치)되었다. 그러나 朝鮮人(조선인) 學生(학생)은 30 ~ 40 % 程度(정도)에 머물렀다.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는 1930年代(년대)에 들어오자 日本語(일본어) 普及(보급) 政策(정책)을 積極的(적극적)으로 推進(추진)하였다. 敎育當局(교육당국)은 私立學校(사립학교)에서의 韓國語(한국어) 敎育(교육)과 그 使用(사용)을 統制(통제)하기 始作(시작)하였다.
官廳(관청)에서는 韓國(한국) 農民(농민)의 民願(민원)도 公用語(공용어)인 日本語(일본어)를 使用(사용)할 境遇(경우)에만 接受(접수)하도록 하여 韓國語(한국어) 使用(사용)을 抑制(억제)하였고, 또한 1935年(년)부터는 한글을 農民(농민)들에게 가르치는 學生(학생)들의 하기 啓蒙運動(계몽운동)을 總督府令(총독부령)으로 制裁(제재)하였으며, 1938年(년)에는 '國語常用化(국어상용화)' 政策(정책)으로 朝鮮語(조선어) 敎育(교육)을 廢止(폐지)하고, 韓國語(한국어) 使用(사용)을 禁止(금지), 日本語(일본어)를 使用(사용)하도록 强要(강요)하였다. 1938年(년) 한해 全國(전국)에 3,660餘個(여개)의 日本語(일본어) 講習所(강습소)를 만들어 韓國(한국)農民(농민)들에게 日本語(일본어)를 배우게 하고, 日本語(일본어) 使用(사용)을 强要(강요)하였다.
또한 韓國人(한국인)을 威壓(위압)하기 위해 一般(일반)官吏(관리)나 敎員(교원)에게도 制服(제복)을 입히고 칼을 차고 修業(수업)에 任(임)하도록 하였다. 戰時下(전시하)의 日帝(일제)는 中學生(중학생)은 勿論(물론)이고 國民學生(국민학생)까지‘勤勞保國(근로보국)‘이라는 美名(미명)아래 軍事施設工事(군사시설공사)에 强制(강제)로 動員(동원)하기까지 하였다.
日帝(일제)는 日本語(일본어) 專用(전용)政策(정책)에 妨害(방해)가 된다는 判斷(판단)아래 1942年(년)에는 朝鮮語學會(조선어학회) 會原(회원)과 學者(학자)들을 逮捕(체포), 投獄(투옥)하기도 하였다. 咸興(함흥)의 女學校(여학교) 學生(학생)이 韓國語(한국어)로 對話(대화)하다가 日本(일본)警察(경찰)에 發覺(발각)되어 取調(취조)를 받던 中(중), 辭典編纂(사전편찬)을 擔當(담당)하던 朝鮮語學會(조선어학회) 會員(회원)이 關聯(관련)되었다는 것이 알려졌고, 이를 빌미로 朝鮮語學會(조선어학회)를 獨立運動(독립운동) 團體(단체)로 몰아 關聯者(관련자)들을 拘束(구속)하였던 것이다.
1944年(년) 日本(일본)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따르면 南韓(남한)의 1700萬(만) 人口(인구) 中(중) 773萬(만) 3000名(명)이 글을 읽고 쓰지 못했다. 이는 日本(일본)支配下(지배하)에서 韓國語(한국어) 敎育(교육)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으며, 韓國人(한국인)에 대한 敎育的(교육적) 差別(차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解放(해방)直前(직전)인 1944年(년) 韓國(한국)에 居住(거주)하는 人口(인구) 中(중) 3%만이 日本人(일본인)이었으나 綜合大學(종합대학) 卒業者(졸업자)의 50%, 單科大(단과대), 師範大(사범대), 技術專門大(기술전문대) 卒業者(졸업자)의 47%, 中等學校(중등학교) 卒業者(졸업자)의 44%, 2年制(년제) 中學校(중학교) 卒業者(졸업자)의 73%가 日本人(일본인)이었다.
經濟(경제)~貨幣(화폐)~1938年(년)에 發行(발행)된 朝鮮銀行(조선은행) 100円券(엔권) 貨幣(화폐).
貨幣(화폐)는 1911年(년)부터 日本(일본) 円貨(엔화) 銅錢(동전)이 使用(사용)되었다. 1921年(년) 1月(월) 1日(일)부로 光武(광무)와 隆熙(융희)라는 年號(연호)가 새겨진 銅錢(동전)과 銀貨(은화)들의 使用(사용)이 全面(전면) 禁止(금지)되었다.
그러나 建陽(건양), 光武(광무), 隆熙(융희) 年號(연호)가 새겨진 大韓帝國(대한제국) 時期(시기)의 銅錢(동전)들은 數量(수량)도 많아서 산골 奧地(오지)에도 널리 分布(분포)된 狀態(상태)였고, 一部(일부) 僞造(위조)된 建陽(건양) 銅錢(동전), 光武(광무) 銅錢(동전), 隆熙(융희) 銅錢(동전)이 大量(대량)으로 鑄造(주조)되어 流通(유통)된 狀態(상태)였다. 總督府(총독부) 經濟局(경제국) 當局(당국)에서는 1921年(년) 1月(월) 1日(일)부로 大韓帝國(대한제국) 銅錢(동전) 流通(유통) 禁止令(금지령)을 내렸지만, 事實上(사실상) 이들 建陽(건양), 光武(광무), 隆熙(융희) 年號(연호)가 쓰인 銅錢(동전)은 1930年(년)경까지 市中(시중)에 通用(통용)되었고, 當局(당국)이나 府廳(부청), 郡廳(군청), 區廳(구청), 및 各(각) 銀行(은행), 協同組合(협동조합) 等(등)에서도 이를 事實上(사실상) 默認(묵인)하였다.
通用(통용) 貨幣(화폐)로는 中國(중국) 위안화(元:Yuan), 美國(미국) 달러화(Dollar:美元), 센트화(Cent:分)가 使用(사용)되었다. 有史(유사) 以後(이후)로 中國(중국) 葉錢(엽전)이 普及(보급)된 傳統(전통)이 繼續(계속) 이어지고 開城(개성)과 各地(각지)의 商人(상인)들이 中國(중국) 商人(상인)들과 貿易(무역)하였으므로 1913年(년) 以後(이후)에는 中華民國(중화민국) 銀杏(은행)에서 發行(발행)한 元貨(원화)가 流入(유입)되었다.
美國(미국)의 센트화(Cent:分)와 달러화(Dollar:美元),는 1880年代(년대)부터 朝鮮(조선)에 登場(등장)한 美國人(미국인) 宣敎師(선교사)와 醫師(의사)들을 通(통)해 韓半島(한반도) 各地(각지)에 流入(유입)되어 使用(사용)되었다.
自體(자체) 貨幣(화폐) 發行(발행)이 不可能(불가능)했던 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와 各種(각종) 獨立運動(독립운동) 團體(단체) 等(등)에서는 반쯤 世界(세계)通用貨(통용화)로 쓰이던 日本(일본) 円貨(엔화)와 中國(중국) 위안화(元:Yuan), 美國(미국) 센트화 센트화(Cent:分)와 달러화(Dollar:美元)나 金銀(금은)과 佩物(패물)들을 主(주)로 거두어갔다.
土地政策(토지정책)
日本(일본)은 韓日倂合(한일병합) 以後(이후) 곧바로 새로운 土地政策(토지정책)을 推進(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日本(일본)은 1910年(년) 土地照査局(토지조사국)을 設置(설치)하고 1912年(년) ‘土地調査令(토지조사령)’을 發布(발포)하였다.
이 事業(사업)은 全國(전국)의 土地(토지)를 測量(측량)하여 所有權(소유권),價格(가격) 그리고 지적(地籍)을 確定(확정)한다는 名分(명분)으로 實施(실시)한 것이었는데 까다로운 申告主義(신고주의)에 익숙하지 않은 農民(농민)들이 申告節次(신고절차)를 밟지 않아 土地(토지)를 빼앗기는 事例(사례)가 많았다.
또한 동중(洞中) 或(혹)은 문중(門中)의 공유지(公有地)나 역둔토(驛屯土), 궁장토(宮庄土) 等(등)을 비롯한 國有地(국유지)에 도지권(賭地權)이라는 土地(토지)를 영구히 耕作(경작)할 수 있었고, 또한 土地(토지)所有主(소유주)의 承諾(승낙) 없이도 他人(타인)에게 自由(자유)로이 賣買(매매),讓渡(양도),抵當(저당),相續(상속)할 수 있는 物權的(물권적) 權利(권리)가 土地所有權(토지소유권)이 없다는 理由(이유)로 總督府(총독부)나 有力(유력)한 人士(인사)들에게 넘어갔다.
그 結果(결과) 13萬(만) 5千(천) 町步(정보)의 驛屯土(역둔토)와 4萬(만) 6千如(천여) 町步(정보)의 民有地(민유지)가 總督府(총독부) 所有(소유)로 되었다. 1930年(년)까지 總督府(총독부)가 所有(소유)한 土地(토지)는 全國土(전국토)의 40%에 該當(해당)하였다.
그 課程(과정)에서 약 10萬(만) 件(건)에 달하는 所有權(소유권)紛爭(분쟁)이 있었으나 總督府(총독부)의 彈壓(탄압)으로 默殺(묵살)되었다.
土地調査事業(토지조사사업)과 竝行(병행)하여 日本人(일본인)의 農業(농업)移民(이민)이 10倍(배)로 急增(급증)하고, 그들의 所有(소유)農地(농지)는 4倍(배)로 增加(증가)하여 큰 地主(지주)로 成長(성장)해 갔다.
總督府(총독부)의 地稅(지세)收入(수입)도 1919年(년) 現在(현재) 1911年(년)의 두 倍(배)로 늘고 課稅地(과세지)는 10年(년) 사이에 52% 增加(증가)하였다.
小數(소수)의 地主(지주)들은 이 事業(사업)으로 賭地權(도지권)을 갖고 있었던 自作農(자작농)들은 大部分(대부분) 沒落(몰락)하여 小作農(소작농)과 農業勞動者(농업노동자)로 轉落(전락)하거나 火田民(화전민) 或(혹)은 滿洲(만주) 等地(등지)로 떠나가는 事例(사례)가 많았다.
1918年(년) 當時(당시) 小作農(소작농)과 自小作兼農(자소작겸농)은 全體(전체) 農民(농민)의 77%에 달하였으며, 3%의 地主(지주)가 耕作地(경작지)의 50% 以上(이상)을 所有(소유)하는 植民地(식민지) 地主制(지주제)가 成立(성립)되었다. 原來(원래) 우리나라는 小作(소작)이라는 말이 없었고, 地主(지주)와 作人(작인) 사이에는 서로 對等(대등)한 協力關係(협력관계)라는 뜻의 竝作(병작)이라는 말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 러한 竝作(병작)이 小作(소작)으로 바뀐 것은 作人(작인)의 地位(지위)가 그만큼 格下(격하)되었음을 意味(의미)한다.
農林(농림)政策(정책).
日本(일본)은 鑛山(광산),漁場(어장),山林(산림) 等(등) 資源(자원)에 대한 開發(개발)을 强化(강화)하였다.
朝鮮鑛業令(조선광업령)(1915年(년)에 依(의)해 韓國人(한국인)의 鑛山經營(광산경영)을 抑制(억제)하고, 미쓰이(三井),고하(古河) 等(등) 日本(일본) 鑛業資本(광업자본)이 들어와 仁川(인천),甲山(갑산) 等(등) 主要(주요) 鑛山(광산)을 차지했다.
1920年(년) 現在(현재) 日本(일본)의 所有(소유) 鑛山(광산)은 全體(전체)의 80%를 넘어서고 韓國人(한국인) 鑛山(광산)은 0.3%에 不過(불과)하였다.
漁業分野(어업분야)에서는 朝鮮漁業令(조선어업령)(1911年(년)에 의해 舊韓國(구한국) 皇室(황실) 및 個人所有(개인소유) 漁場(어장)이 日本人(일본인) 所有(소유)로 再編成(재편성)되었다.
日本人(일본인)은 漁業技術(어업기술)에 있어서 한발 앞섰기 때문에 漁民(어민) 1人當(인당) 漁獲高(어획고)에도 4倍(배) 以上(이상)의 差異(차이)가 나타났다.
또한 山林(산림)에 대해서도 1908年(년)의 ‘森林法(삼림법)’과 1911年(년)의 ‘森林令(삼림령)’, 1918年(년) 林野照査事業(임야조사사업)을 通(통)해 日本人(일본인)에게 拂下(불하)하였는데, 全體(전체) 森林(삼림)의 50% 以上(이상)이 總督府(총독부)와 日本人(일본인) 所有(소유)로 넘어갔다.
특히 鴨綠江(압록강),豆滿江(두만강) 流域(유역)의 木材(목재)를 大大的(대대적)으로 伐採(벌채)하여 莫大(막대)한 利得(이득)을 챙겼다. 日本(일본)은 우리 民族企業(민족기업)을 抑制(억제)하기 위하여 ‘회사령(會社令)’(1910年(년). 12月(월)을 다시 公布(공포)하여 會社(회사)를 設立(설립)할 境遇(경우) 總督府(총독부)의 許可(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그 結果(결과) 舊韓末(구한말)에 設立(설립)된 電氣(전기),鐵道(철도),金融(금융) 等(등) 큰 企業(기업)은 日本(일본)의 미쓰이(三井),미쓰비시(三菱) 等(등)에게 넘어갔고, 人蔘(인삼),소금,鴉片(아편) 等(등)은 總督府(총독부)에서 專賣(전매)하였다.
韓國人(한국인) 企業家(기업가)는 主(주)로 精米業(정미업),皮革業(피혁업),製粉業(제분업),窯業(요업),紡績業(방적업),農水産物加工業(농수산물가공업) 等(등) 主(주)로 輕工業(경공업)에 限定(한정)되었다.
1919年(년) 現在(현재) 全體(전체) 工場(공장)의 資本金(자본금)에서 日本人(일본인)은 91%를 차지하고, 韓國人(한국인)은 6%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産業(산업)
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後期(후기) 國際的(국제적)으로 孤立(고립)되어 있었던 日本(일본)은 軍需品(군수품)에서 國産原料(국산원료)를 使用(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日本(일본)政府(정부)는 技術者(기술자)와 科學者(과학자)를 總動員(총동원)하여 褐炭(갈탄)으로 石油(석유)를 만드는 方法(방법)이나 아주까리씨나 소나무 뿌리를 利用(이용)해 潤滑油(윤활유)를 만드는 方法(방법) 等(등)을 冊子(책자)로 記錄(기록)한 《記述總動員要綱(기술총동원요강》을 配布(배포)했다.
이런 自力更生(자력갱생), 自給自足(자급자족) 經驗(경험)의 遺産(유산)은 北韓(북한) 地域(지역)의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이 그대로 繼承(계승)하게 되었다.
社會基盤(사회기반) 産業(산업).
交通(교통) 部門(부문)에서는 새로운 鐵道(철도)가 新說(신설)되고, 幹線道路(간선도로)가 補修(보수)되었으며 電氣(전기)와 電信網(전신망)이 擴張(확장)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施設(시설)은 韓國人(한국인)의 租稅負擔(조세부담)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日本(일본) 植民統治(식민통치)의 手段(수단)으로 利用(이용)되었다.
金融(금융) 部門(부문)도 一本(일본)이 掌握(장악)하였다. 朝鮮銀行(조선은행)(1911年(년), 朝鮮殖産銀行(조선식산은행)(1918年(년) 그리고 東洋拓殖株式會社(동양척식주식회사)가 金融界(금융계)를 掌握(장악)하고, 地方(지방)에는 金融組合(금융조합)이 浸透(침투)하여 庶民金融(서민금융)을 統括(통괄)하였다.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는 “植民地(식민지) 經營(경영)을 위한 經費(경비)는 植民地(식민지)에서 마련한다”는 原則下(원칙(하)에 財政收入(재정수입)을 높이기 위해 稅金(세금)을 大幅(대폭) 强化(강화)하였다. 所得稅(소득세), 收益稅(수익세), 消費稅(소비세), 交通稅(교통세), 附加稅(부가세), 特別稅(특별세) 以外(이외)에 各種(각종) 雜夫金(잡부금)이 賦課(부과)되어, 이들 收入(수입)은 主(주)로 韓國人(한국인)을 다스리고 土木工事(토목공사)를 일으키는 費用(비용)으로 支出(지출)되었다.
또한 工場(공장)이나 施設設立(시설설립)에 대한 認許可(인허가)에 대해서도 日本人(일본인)에게는 優待惠澤(우대혜택)을 주거나 韓國人(한국인) 出身(출신) 人士(인사)들의 認可審査(인가심사)를 지나치게 嚴格(엄격)하게 하는 等(등)의 差別(차별)을 加(가)하였다. 이를 두고 윤치호(尹致昊)는 韓日倂合(한일병합) 條約締結(조약체결) 以後(이후) '兩班(양반)의 나라'에서 '認許可(인허가)의 나라'로 變(변)했다고 指摘(지적)하기도 했다.
植民地的(식민지적) 經濟構造(경제구조)에서 貿易(무역) 또한 日本(일본)中心(중심)으로 改編(개편)되었다. 輸出(수출)의 90%, 輸入(수입)의 65%가 日本(일본)으로 集中(집중)되었는데, 쌀, 잡곡, 잎담배 等(등)이 主要(주요)輸出品(수출품)이었고, 옷감,輕工業製品(경공업제품)이 들어왔다.
이러한 貿易構造(무역구조)가 日本(일본) 資本主義(자본주의)의 發達(발달)을 促進(촉진)시키는 데 寄與(기여)한 것은 勿論(물론)이다. 結局(결국) 被支配(피지배) 韓國人(한국인)들은 國權喪失(국권상실)과 더불어 日本(일본) 資本主義(자본주의)의 原料(원료) 供給地(공급지)와 商品(상품)市場(시장), 그리고 租稅負擔(조세부담)을 져야 했다.
稅金(세금)徵收(징수) 및 納付(납부)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는 當時(당시) 國民(국민)에게 住民稅(주민세), 居住稅金(거주세금)인 地方費(지방비), 面費(면비), 敎育稅金(교육세금)인 學校組合費(학교조합비)와 學校費(학교비)를 거두었다.
1919年(년) 當時(당시) 全羅南道(전라남도)에서 거둔 地方費(지방비) 34萬圓(만원), 面費(면비) 43萬圓(만원), 學校組合費(학교조합비) 7萬(만) 4千圓(천원), 學校費(학교비) 2萬(만) 2千圓(천원) 等(등) 基本稅金(기본세금)은 86萬(만) 6千圓(천원)이었다.
1920年(년)에는 地方費(지방비) 91萬圓(만원), 面費(면비) 94萬圓(만원), 學校組合費(학교조합비) 41萬(만) 8千圓(천원), 學校費(학교비) 51萬(만) 7千圓(천원) 等(등) 基本稅金(기본세금)은 278萬(만) 5千圓(천원)으로 急擊(급격)히 引上(인상)되었다.
土地(토지)에 대한 稅金(세금)도 있었다.
土地稅金(토지세금)은 地稅(지세)와 附加稅(부가세)를 거두었다. 土地(토지)에 賦課(부과)하는 附加價値稅(부가가치세)는 建物(건물), 논농사, 밭농사, 商街(상가) 等(등) 目的(목적)에 따라 若干(약간)의 差異(차이)가 있었다.
1919年(년) 尹致昊(윤치호)의 牙山郡(아산군) 屯浦面)屯浦面(둔포면) 農地(농지)에 대한 地稅(지세)는 1919年(년) 地稅(지세) 1期分(기분) 203圓(원) 58錢(전), 附加稅(부가세) 1期分(기분) 18圓(원) 32錢(전), 1919年(년) 地稅(지세) 2期分(기분) 97圓(원) 67錢(전), 附加稅(부가세) 2期分(기분) 8圓(원) 14錢(전)이었다.
1920年(년) 地稅(지세) 1期分(기분) 205圓(원) 90錢(전), 附加稅(부가세) 1期分(기분)은 61圓(원) 66錢(전)이고, 1920年(년) 地稅(지세) 2期分(기분)은 185圓(원) 30錢(전), 附加稅(부가세) 2期分(기분)은 61圓(원) 77錢(전)이었다.
그밖에 厚生費(후생비)와 國防費(국방비)를 거두었다. 滿洲事變(만주사변)과 中日(중일)戰爭(전쟁), 太平洋戰爭(태평양전쟁) 때는 國防費(국방비)로도 不足(부족)해 各種(각종) 慰問金(위문금)과 誠金(성금)을 거두었고, 强制的(강제적)이지는 않았지만 國防獻納金(국방헌납금)이라는 寄附金(기부금)도 募集(모집)하였다.
이러한 稅金(세금)은 個人(개인)이 直接納付(직접납부)하는 境遇(경우)도 있었으나 극히 드물었다. 稅金(세금)은 各地(각지)의 銀行(은행)과 協同組合(협동조합)에서 거두었고, 銀行(은행)과 協同組合(협동조합)이 있는 面內(면내)나 邑內(읍내)까지 나가기 힘든 시골 僻村(벽촌)이나 오지에서는 邑事務所(읍사무소), 面事務所(면사무소)에서 調達(조달)하거나 里長(이장), 統長(통장), 정장(町長)이 거둬서 邑(읍), 面事務所(면사무소) 或(혹)은 邑內(읍내), 面內(면내), 市內(시내)의 銀行(은행)과 協同組合(협동조합)에 納付(납부)하고, 손으로 필기한 領收證(영수증)을 받아서 各(각) 집에 傳達(전달)하였다.
人口(인구)~人口(인구) (1910年(년)-1942年(년)~1944年(년) 朝鮮(조선)의 人口密度(인구밀도).
1905年(년), 大韓帝國(대한제국) 內務部(내무부)의 人口(인구)照査(조사)에 依(의)하면, 韓國(한국)의 人口(인구)는 5,793,976名(명)이었다. 그러나 大韓帝國(대한제국)의 人口調査(인구조사)는 不正確(부정확)했다.
農業(농업)技術(기술)의 發達(발달)과 耕作地(경작지)의 增加(증가) 等(등)에도 不久(불구)하고 肅宗(숙종) 43年(년)(1717年(년)11月(월) 14日(일) 實錄(실록)에 依(의)한 全國(전국)의 戶數(호수) 總計(총계)는 155萬(만) 7709戶(호), 人口(인구)는 683萬(만) 9771名(명), 英祖(영조) 23年(년)(1747年(년)12月(월) 28日(일)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서울의 戶數(호수)는 3萬(만) 4153戶(호), 人口(인구)는 18萬(만) 2584名(명)이며 8道(도)의 戶數(호수)는 172萬(만) 5538戶(호), 人口(인구)는 734萬(만) 318名(명)(男(남) 353萬(만) 9107名(명), 女(여) 380萬(만) 1211名(명) 等(등)에 비해 적었기 때문이다.
大韓帝國(대한제국) 內務部(내무부)의 照査(조사)資料(자료)는 事實上(사실상) 亡國(망국)으로 前(전)의 不正腐敗(부정부패) 等(등)으로 行政力(행정력)이 크게 減少(감소)한 結果(결과)로 推定(추정)된다.
1905年(년)에 締結(체결)된 第(제)2次(차) 韓日(한일) 協約(협약)에 依(의)해 그 以後(이후)부터 韓國(한국)의 人口(인구) 照査(조사)는 日本(일본)이 實行(실행)하였다.
日本(일본) 統治(통치)가 始作(시작)된 1910年(년)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따르면 韓國(한국)의 人口(인구)는 13,128,780名(명)이었다.
一般的(일반적)으로 이것도 相當數(상당수)가 漏落(누락)된 數字(숫자)로 보고 있다. 韓國(한국) 史學者(사학자) 中(중) 하나인 李離和(이이화)는 1910年(년) 무렵에는 1,742萬(만) 名(명) 정도였을 것으로 推定(추정)한다.
日本(일본) 統治(통치)가 끝나기 前(전)의 해(1944年(년)에는 25,120,174名(명)이었다.(日本(일본) 內(내) 記錄(기록) 人口(인구)增加(증가)의 理由(이유)가 1920年(년) 韓半島(한반도)에 居住(거주)하던 日本人(일본인) 17萬名(만명)이 70萬名(만명)이라는 莫大(막대)한 數字(숫자)로 增加(증가)한 人口(인구)를 더한 것이라는 主張(주장)이 있다.
平均(평균) 壽命(수명)은 20代(대)부터 40代(대)까지 늘어나고 人口(인구)는 1910年(년) 推定(추정) 1300萬(만), 1942年(년)까지 32年間(년간) 2500萬名(만명)이 되었다.
歷代(역대) 統治者(통치자).
역대,이름,사진,취임,이임,이력.
第(제)1代(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1910年(년) 10月(월) 1日(일)~1916年(년) 10月(월) 14日(일) 陸軍大將(육군대장), 元帥(원수), 受賞(수상).
第(제)2代(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916年(년) 10月(월) 14日(일)~1919年(년) 8月(월) 12日(일) 陸軍大將(육군대장), 元帥(원수).
第(제)3代(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1919年(년) 8月(월) 12日(일)~1927年(년) 12月(월) 10日(일) 大將 海軍(해군대장), 受賞(수상).
第(제)4代(대)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1927年(년) 4月(월) 15日(일)~1927年(년) 10月(월) 1日(일) 陸軍大將(육군대장).
第(제)5代(대)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1927年(년) 10月(월) 1日(일)~1929年(년) 8月(월) 17日(일) 陸軍)大將(육군대장).
第(제)6代(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1929年(년) 8月(월) 17日(일)~1931年(년) 6月(월) 17日(일) 海軍大將(해군대장), 受賞(수상).
第(제)7代(대)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1931年(년) 6月(월) 17日(일)~1936年(년) 8月(월) 5日(일) 陸軍大將(육군대장).
第(제)8代(대) 미나미 지로(南次郎),1936年(년) 8月(월) 5日(일)~1942年(년) 5月(월) 29日(일) 陸軍大將(육군대장).
第(제)9代(대)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1942年(년) 5月(월) 29日(일)~1944年(년) 7月(월) 24日(일) 陸軍大將(육군대장), 受賞(수상).
第(제)10代(대)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1944年(년) 7月(월) 24日(일)~1945年(년) 8月(월) 15日(일) 陸軍大將(육군대장), 受賞(수상).
其他(기타)
部下(부하)(日本語(일본어): 子分(자분) 꼬붕), 指導者(지도자)(日本語(일본어): 親分(친분) 오야붕), 양동이인 빠게스(일본어: バケツ), 거짓을 뜻하는 가라(ガラス), 구라(グラ), 造作(조작)된 것을 뜻하는 야매(ヤメ), 구멍(穴)을 뜻하는 빵꾸(穿刺), 엑기스(エキス), 추리닝(ジャージ) 等(등)의 單語(단어)는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부터 나타나서 活用(활용)되던 單語(단어)들이다.
離婚(이혼)의 登場(등장)과 擴散(확산).
傳統(전통)에서 近代(근대)로의 履行過程(이행과정)에서 登場(등장)한 過渡期(과도기) 現相(현상)의 하나가 이혼(離婚)이었다. 近代(근대)의 制度(제도)가 移植(이식)되고 新女性(신여성), 自由戀愛(자유연애) 等(등)으로 象徵(상징)되는 새로운 思潮(사조)가 流入(유입)되면서 나타난 風景(풍경)이다. 旣存(기존)의 價値觀(가치관)과 儒敎的(유교적) 道德意識(도덕의식)에 대한 사람들의 幻滅(환멸)과 懷疑(회의)가 繼續(계속)되면서 韓日合邦(한일합방) 以後(이후) 媤父母(시부모)와 男便(남편)들에 대한 女子(여자)들과의 葛藤(갈등)과 暴力(폭력) 事件(사건) 等(등)이 繼續(계속)되었고, 離婚率(이혼율)도 꾸준히 增加(증가)하였다.
1920年(년) 以後(이후) 韓國(한국)에는 TV와 라디오(radio), 新聞(신문)이 普及(보급)되면서 外國(외국)의 消息(소식)을 接(접)하게 되었고, 허정숙(許貞淑), 김일엽(金一葉), 박인덕(朴仁德), 김활란(金活蘭) 等(등) 知識人層(지식인층) 女性(여성)들이 女性(여성) 啓蒙運動(계몽운동)을 推進(추진)하면서 女子(여자)들 亦是(역시) 權利(권리)를 主張(주장)하기 始作(시작)하였다. 1920年(년) 以後(이후) 들어서는 離婚(이혼)이 登場(등장)하였으며 1920年代(년대)에는 드물었지만 1930年(년) 무렵에 가서는 뉴스(news)에 種種(종종) 報道(보도)가 될 만큼 離婚(이혼)이 늘어나게 되었다.
1921年(년) 9月(월) 30日字(일자) 東亞日報(동아일보)는 날로 늘어나는 離婚(이혼)訴訟(소송)의 大部分(대부분)에 대해 “男便(남편)의 不足(부족)을 들어 女子(여자) 편에서 告訴(고소)함이 多數(다수)”라며 京城地方法院(경성지방법원)에 提起(제기)된 事例(사례)들을 紹介(소개)했다.
當時(당시) 離婚(이혼) 事由(사유)의 相當數(상당수)는 經濟的(경제적)인 問題(문제)였다. 經濟的(경제적) 困窮(곤궁)을 解決(해결)하지 못한 男便(남편)이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아 女子(여자)가 離婚(이혼)을 請求(청구)한 것이다.
그러나 經濟的(경제적) 理由(이유) 外(외)에도 旣存(기존) 價値觀(가치관)의 掃滅(소멸)로 男性(남성)들은 父母(부모)나 집안에서 골라준 女性(여성), 원치않는 女性(여성)과 굳이 結婚(결혼)生活(생활)을 維持(유지)할 必要(필요)가 있느냐는 疑問(의문)이 提起(제기)되었다.
女性(여성)들 사이에서는 원치않는 結婚(결혼)生活(생활), 幸福(행복)하지 않은 結婚(결혼)生活(생활)을 굳이 維持(유지)해야 하느냐는 視覺(시각)과 媤宅(시댁)과 媤父母(시부모)의 差別待遇(차별대우)를 받으면서까지 結婚(결혼)生活(생활)을 維持(유지)할 수 있느냐는 不滿(불만)이 터져나왔다.
獨立運動(독립운동) 等(등) 政治的(정치적)인 理由(이유)로 滿洲(만주)로 간 男便(남편)이 歸家(귀가)하지 않아 家庭(가정)이 破綻(파탄)에 이른 事例(사례)도 많았다. 離婚者(이혼자)의 增加(증가)와 함께 獨身者(독신자) 數(수)도 增加(증가)하기 시작하였다.
離婚率(이혼율) 急增(급증).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統計(통계)年譜(연보)에 따르면 1917年(년)과 1918年(년)의 離婚(이혼) 件數(건수)는 1萬(만)542件(건)과 1萬(만)498件(건)으로 1萬(만) 件(건)을 넘기면서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最古(최고)를 記錄(기록)했다. 離婚(이혼)件數(건수)의 結婚(결혼) 件數(건수)에 대한 比率(비율)은 1910年代(년대) 7%였고 1920年代(년대) 以後(이후)에는 4% 안팎을 維持(유지)했다.
以後(이후) 離婚率(이혼율)은 1945年(년) 光復(광복)直前(직전)까지 每年(매년) 1萬(만) 件(건) 안팎을 維持(유지)하게 되었다.
當時(당시) 離婚(이혼)은 新聞(신문) 社說(사설)이 比重(비중) 있게 다룰 정도로 큰 社會(사회)問題(문제)였다.
우리나라 最初(최초)의 女性(여성) 西洋(서양)畫家(화가)인 나혜석(羅蕙錫)은 파리(Paris)에서 天道敎(천도교) 敎領(교령) 崔麟(최린)과의 스캔들(scandal)로 男便(남편) 김우영(金雨英)과 離婚(이혼)한 뒤 1934年(년) 雜誌(잡지) ‘三千里(삼천리)’에 ‘離婚告白書(이혼고백서)’를 公開(공개) 發表(발표)해 全國(전국)을 들끓게 했다.
그女(녀)는 男便(남편)과의 結婚(결혼)生活(생활)이 ‘個性(개성)에 대한 理解(이해)가 없는 本能的(본능적) 사랑이었을 뿐’이었다고 했다. 이어 박인덕(朴仁德)의 離婚(이혼), 허정숙(許貞淑)의 離婚(이혼) 等(등) 女性(여성) 解放運動家(해방운동가)들의 離婚(이혼)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舊韓末(구한말)의 性理學者(성리학자) 老人層(노인층)과 男子(남자) 知識人層(지식인층)은 格下(격하)게 反撥(반발)하였지만 離婚(이혼) 러시(Rush:돌진)는 막지 못했다.
“ 昨年度(작년도) 統計(통계)에 依(의)하면 朝鮮(조선)에서 決行(결행)된 離婚(이혼)件數(건수)가 8220餘件(여건)이라 한다. 再昨年(재작년)의 6921件(건)에 比(비)하면 增加(증가)한 數(수)가 一年(일년)에 1200件(건)이다. ...以下(이하) 中略(중략)...
所爲(소위) 부르주아(Bourgeois:資本主義(자본주의) 社會(사회)에서, 生産(생산) 手段(수단)을 所有(소유)하고 勞動者(노동자)를 雇用(고용)하여 企業(기업)을 經營(경영)하는 사람:인 有産階級(유산계급),有産知識階級(유산지식계급)에서는 男性(남성)이 女性(여성)을 離婚(이혼)하고 無産下流階級(무산하류계급)에서는 女性(여성)이 男性(남성)을 離婚(이혼)한다. ”
— 東亞日報(동아일보) 1929年(년) 10月(월) 25日字(일자) 社說中(사설중)에서...
離婚(이혼)이 急增(급증)하자 1924年(년)의 新年(신년) 紙上特輯(지상특집)에는 各界(각계) 知識人(지식인)과 著名人士(저명인사) 10名(명)에게 ‘離婚(이혼) 問題(문제)의 可否(가부)’를 묻는 記事(기사)가 10回(회) 連載(연재)됐다.
離婚(이혼)을 贊成(찬성)하는 쪽에서는 “마음에 맞는 夫婦間(부부간)에는 누가 反對(반대)를 하던 당연히 離婚(이혼)을 하여서 洋洋(양양)한 前途(전도)를 그르치지 않는 것이 可(가)할 줄로 안다”(방성옥)거나 “싫은 사람과 억지 百福(백복)의 原因(원인)이 된다하는 夫婦(부부)가 되겠습니까”방정환(方定煥)라며 離婚(이혼) 決行(결행)을 促求(촉구)했다.
衛生(위생)
道立(도립)議員(의원) 等(등) 病院(병원)이 次例(차례)로 세워져 病院(병원) 數(수)는 增加(증가)했다. 이 病院(병원)의 醫師(의사)의 大部分(대부분)은 日本人(일본인)이고 日本人(일본인)을 위한 病院(병원)인 면도 있었지만, 朝鮮人(조선인)도 診療(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各(각) 郡(군)에는 邑(읍)이나 規模(규모)가 큰 面單位(면단위) 地域(지역)에 病院(병원)이 한두 곳 정도 있거나 病院(병원)이 存在(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隣近(인근) 邑(읍)이나 面(면), 郡廳所在地(군청소재지) 等(등)으로 나와야만 했다. 運送(운송) 手段(수단)이 人力車(인력거)와 自轉車(자전거), 오토바이(motorcycle) 等(등)이 全部(전부)였고 自動車(자동차) 保有率(보유율)은 邑面(읍면)에 한 大道(대도) 없는 곳이 있을 程度(정도)로 극히 微弱(미약)했으므로 傳染病(전염병)이나 緊急(긴급) 疾患(질환)이 發生(발생)하면 大部分(대부분)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死亡(사망)하거나, 移送(이송) 途中(도중)에 死亡(사망)했다.
衛生(위생)은 生活面(생활면)에서의 衛生(위생)指導(지도) 및 集團(집단) 豫防(예방) 接種(접종)을 해 當時(당시) 韓半島(한반도)에서 流行(유행)했던 콜레라(cholera:[醫學(의학)] 法定(법정) 急性(급성) 傳染病(전염병)의 하나. 콜레라(Cholera)菌(균)이 原因(원인)으로, 大槪(대개) 汚染(오염)된 물이나 飮食(음식)에 包含(포함)되어 입을 通(통)해 體內(체내)로 들어와 小腸壁((소장벽)을 덮는 粘膜(점막)에 感染(감염)을 일으킨다.
쌀뜨물과 같은 泄瀉(설사)와 嘔吐(구토)에 依(의)한 脫水(탈수) 症狀(증상), 筋肉(근육)의 痙攣(경련) 等(등)을 일으키며, 脫水(탈수)가 深(심)해지면 精神(정신)이 昏迷(혼미)해지거나 昏睡狀態(혼수상태)가 되어 쇼크(shock)로 죽을 수도 있다.
豫防法(예방법)은 徹底(철저)히 衛生(위생)을 維持(유지)하는 것이며, 특히 깨끗한 食水(식수)를 使用(사용)하는 것이다.], 天然痘(천연두:[醫學(의학)] 法定(법정) 傳染病(전염병)의 하나. 天然痘(천연두) 바이러스(virus)에 依(의)하여 일어난다.
熱(열)이나 頭痛(두통)이 나며 紅疫(홍역)처럼 온몸에 발진(發疹)이 생겨 딱지가 저절로 떨어지기 前(전)에 긁으면 얽게 된다. 傳染力(전염력)이 매우 强(강)하며 死亡率(사망률)도 높다.],
페스트(pest:해충:페스트(pest)菌(균)에 依(의)한 全身(전신) 感染(감염)疾患(질환). 1∼6日(일)의 潛伏期(잠복기) 後(후)에 嘔吐(구토), 泄瀉(설사) 等(등)의 消化器(소화기) 症狀(증상)으로 始作(시작)되어, 治療(치료)를 하지 않을 境遇(경우)에 血管(혈관) 內(내) 凝固(응고), 急性(급성) 呼吸(호흡) 不全(부전), 腎不全(신부전)과 쇼크(shock)로 進行(진행)되는 致命的(치명적)인 疾患(질환)이다.] 等(등) 傳染病(전염병)에 依(의)한 乳兒(유아)死亡率(사망률)이 減少(감소)했다.
그러나 出産(출산) 後(후) 乳兒(유아) 나 어린이의 死亡(사망) 致死率(치사율)은 村長(촌장) 統長(통장), 町長(정장)이 一括的(일괄적)으로 받아 다가 邑(읍), 面事務所(면사무소)에 申告(신고) 處理(처리)하기 때문에 正確(정확)한 統計(통계)는 잡히지 않는다.
또한 大韓帝國(대한제국) 時代(시대)부터 많은 거지는 돌다리 아래 驛(역) 周邊(주변) 陸橋(육교) 周邊(주변)에서 生活(생활)했다. 衛生(위생)狀態(상태) 不良(불량)으로 各種(각종) 疾病(질병)과 傳染病(전염병)의 溫床(온상)으로 取扱(취급)되었고, 돌다리나 나무, 石材(석재) 陸橋(육교)가 崩壞(붕괴)되거나 덩치큰 自動車(자동차)가 지나가다가 橋梁(교량)과 陸橋(육교)가 崩壞(붕괴)되면 그대로 事故(사고)로 死亡(사망)하였다.
또한 各種(각종) 洪水(홍수) 때도 거지들은 失踪(실종)되었으나 아무도 이들을 찾지 않았다. 正確(정확)한 人口數(인구수), 統計(통계)에 잡히지 않은 거지들은 死亡後(사망후)에도 死亡申告(사망신고) 等(등)의 節次(절차) 없이 府廳(부청), 郡廳(군청), 邑(읍),面事務所(면사무소)에서 任意(임의)로 火葬(화장)해서 아무데나 뿌렸다.
關聯項目(관련항목).
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韓國(한국)의 獨立運動(독립운동),親日派(친일파),日本帝國(일본제국).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皇民化政策(황민화정책) 皇國 臣民化(황국신민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日帝(일제)가 만들어 낸 植民史觀(식민사관)의 하나로, 日本人(일본인)과 朝鮮人(조선인)의 祖上(조상)이 같다는 理論(이론). 日帝(일제)가 朝鮮(조선)을 統治(통치)하는 것에 正當性(정당성)을 附與(부여)하였다.]
日帝殘滓(일제잔재).臺灣一致時期(대만일치시기).~
京城竹忝町斷頭乳兒事件(경성죽첨정단두유아사건)
1933年(년) 5月(월)16日(일) 午前(오전) 7時(시)30分(분), 京城(경성) 西大門(서대문)警察署(경찰서)에 急報(급보)가 날아들었다.
“여기는 竹忝町(죽첨정:只今(지금)의 西大門區(서대문구) 忠正路(충정로)竹添町三丁目(죽첨정삼정목) 금화장 附近(부근)인데 殖産銀行(식산은행) 쓰레기 埋立地(매립지)에 몸통 없는 아이 머리가 發見(발견)되었으니 급히 와보시오.”
植民(식민) 支配(지배) 23年(년)째. 總督府(총독부)는 朝鮮(조선)의 治安(치안)狀態(상태)가 世界的(세계적)이라고 自負(자부)했다. 京城(경성)은 滿洲(만주)처럼 馬賊(마적)떼가 들끓지도 않았고, 상하이(上海)처럼 白晝(백주)에 갱단이 銃擊戰(총격전)을 벌이지도 않았다. 總督府(총독부)는 京城(경성)이 이렇듯 ‘安全(안전)한 都市(도시)’가 된 것은 日本(일본)의 ‘優秀(우수)한’ 警察(경찰)組織(조직) 德分(덕분)이라고 자랑해왔다.
그런데 그처럼 ‘安全(안전)한 都市(도시)’ 한복판에서 白晝(백주)에 어린아이를 목 잘라 殺害(살해)한 事件(사건)이 發生(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殘酷(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凶惡犯罪(흉악범죄)의 發生(발생)은 民心(민심)을 흉흉하게 할 뿐 아니라 자칫 朝鮮(조선)의 治安維持(치안유지)를 主要(주요)한 名分(명분)으로 삼았던 植民(식민) 支配(지배)의 正當性(정당성)을 威脅(위협)할 수 있었다. 總督府(총독부)는 犯罪(범죄)를 豫防(예방)하지 못한 이상, 한시 바삐 犯人(범인)이라도 檢擧(검거)해 失墜(실추)된 威信(위신)을 回復(회복)해야 했다.
提報(제보)가 接受(접수)되자 京城(경성)市內(시내) 全(전) 警察署(경찰서)에 非常(비상)이 걸렸다. 先發隊(선발대) 30餘名(여명)이 허둥지둥 오토바이(motorcycle), 自動車(자동차)를 몰아 現場(현장)에 到着(도착)했다.
그러나 現場(현장)에는 어디서 所聞(소문)을 들었는지 이미 구경꾼 數十名(수십명)이 雲集(운집)해 있었다. 警察(경찰)은 卽刻(즉각) 非常警戒線(비상경계선)을 긋고 금화장 앞길과 麻浦(마포) 가는 電車線路(전차선로)에 騎馬警官(기마경관)을 配置(배치)해 一般人(일반인)의 出入(출입)을 統制(통제)했다. 이어 기무라(木村) 署長(서장) 以下(이하) 西大門警察署(서대문경찰서) 幹部(간부) 全員(전원)이 現場(현장)에 나타났다.
京城(경성)地方法院(지방법원) 檢查局(검사국) 요다(依田) 檢事(검사)의 指揮下(지휘하)에 現場(현장)照査(조사)가 始作(시작)됐다. 京畿道(경기도) 警察府(경찰부) 노무라(野村) 刑事課長(형사과장)은 寫眞班(사진반)을 데리고 와서 事件現場(사건현장) 곳곳을 누비며 數十(수십)장의 證據寫眞(증거사진)을 찍었다. 市內(시내) 各(각) 新聞社(신문사)와 通信社(통신사))는 記者(기자)를 急派(급파)하고 서둘러 號外(호외)를 發刊(발간)했다.
事件(사건)現場(현장)은 慘酷(참혹)했다. 잘린 머리의 뒤통수는 두치 반이나 깨어져 腦髓(뇌수)가 흘러내렸고, 埋立地(매립지) 곳곳에 핏자국과 腦髓(뇌수)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깨어진 두개골 안쪽으로는 날카로운 칼로 腦髓(뇌수)를 파낸 痕迹(흔적)이 역력했다. 치마폭, 종이, 낡은 수건 세 겹으로 감싼 머리는 쓰레기 埋立場(매립장) 귀퉁이에 깊지 않게 묻혀 있었다. 머리를 옮기는 途中(도중)에 흘린 것으로 推測(추측)되는 피가 전찻길 건너 麻浦(마포) 方向(방향)으로 이어졌다.
警察犬(경찰견) 여러 마리를 풀어 逃走(도주)한 犯人(범인)을 追跡(추적)했지만, 핏자국이 끊긴 프랑스(France) 大使館(대사관) 附近(부근)에서 맴돌 뿐 決定的(결정적)인 端緖(단서)를 찾지 못했다.아이의 머리를 照査(조사)한 京城帝國大學(경성제국대학) 醫科部(의과부)는 하루만에 剖檢(부검) 結果(결과)를 내놓았다.
1933年(년) 5月(월)16日(일) 午前(오전) 7時(시)30分(분), 京城(경성) 西大門(서대문)警察署(경찰서)에 急報(급보)가 날아들었다. “여기는 竹忝町(죽첨정)(只今(지금)의 西大門(서대문)구 忠正路(충정로) 竹添町三丁目(죽첨정삼정목) 금화장 附近(부근)인데 殖産銀行(식산은행) 쓰레기 埋立地(매립지)에 몸통 없는 아이 머리가 發見(발견)되었으니 급히 와보시오.” 植民支配(식민지배) 23年(년)째. 總督府(총독부)는 朝鮮(조선)의 治安(치안)常態(상태)가 世界的(세계적)이라고 自負(자부)했다.
京城(경성)은 滿洲(만주)처럼 마적떼가 들끓지도 않았고, 상하이(上海)처럼 白晝(백주)에 갱단(Gang)團(단)이 銃擊戰(총격전)을 벌이지도 않았다. 總督府(총독부)는 京城(경성)이 이렇듯 ‘安佺(안전)한 都市(도시)’가 된 것은 日本(일본)의 ‘優秀(우수)한’ 警察(경찰)組織(조직) 德分(덕분)이라고 자랑해왔다. 그런데 그처럼 ‘安全(안전)한 都市(도시)’ 한복판에서 白晝(백주)에 어린아이를 목 잘라 殺害(살해)한 事件(사건)이 發生(발생)한 것이다.
斷頭(단두) 乳兒(유아) 事件(사건)을 報道(보도)한 ‘新東亞(신동아)’ 1933年(년) 7月號(월호) 記事(기사)와 搜査本部(수사본부)가 設置(설치)됐던 1930年代(년대) 當時(당시)의 西大門(서대문)警察署(경찰서).
이처럼 殘酷(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凶惡犯罪(흉악범죄)의 發生(발생)은 民心(민심)을 흉흉하게 할 뿐 아니라 자칫 朝鮮(조선)의 治安(치안)維持(유지)를 主要(주요)한 名分(명분)으로 삼았던 植民支配(식민지배)의 正當性(정당성)을 威脅(위협)할 수 있었다. 總督府(총독부)는 犯罪(범죄)를 豫防(예방)하지 못한 이상, 한시 바삐 犯人(범인)이라도 檢擧(검거)해 失墜(실추)된 威信(위신)을 回復(회복)해야 했다.
提報(제보)가 接受(접수)되자 京城(경성)市內(시내) 전 警察署(경찰서)에 非常(비상)이 걸렸다. 先發隊(선발대) 30餘名(여명)이 허둥지둥 오토바이(motorcycle), 自動車(자동차)를 몰아 現場(현장)에 到着(도착)했다.
그러나 現場(현장)에는 어디서 所聞(소문)을 들었는지 이미 구경꾼 數十名(수십명)이 雲集(운집)해 있었다. 警察(경찰)은 卽刻(즉각) 非常警戒線(비상경계선)을 긋고 금화장 앞길과 麻浦(마포) 가는 電車線路(전차선로)에 騎馬警官(기마경관)을 配置(배치)해 一般人(일반인)의 出入(출입)을 統制(통제)했다. 이어 기무라(木村) 署長(서장) 以下(이하) 西大門警察署(서대문경찰서) 幹部(간부) 全員(전원)이 現場(현장)에 나타났다.
京城地方法院(경성지방법원) 檢查局(검사국) 요다(依田) 檢事(검사)의 指揮下(지휘하)에 現場調査(현장조사)가 始作(시작)됐다. 京畿道(경기도) 警察府(경찰부) 노무라(野村) 刑事課長(형사과장)은 寫眞班(사진반)을 데리고 와서 事件現場(사건현장) 곳곳을 누비며 數十(수십)장의 證據寫眞(증거사진)을 찍었다.
市內(시내) 各(각) 新聞社(신문사)와 通信社(통신사)는 記者(기자)를 急派(급파)하고 서둘러 號外(호외)를 發刊(발간)했다.
事件現場(사건현장)은 慘酷(참혹)했다. 잘린 머리의 뒤통수는 두치 반이나 깨어져 腦髓(뇌수)가 흘러내렸고, 埋立地(매립지) 곳곳에 핏자국과 腦髓(뇌수)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깨어진 두개골 안쪽으로는 날카로운 칼로 腦髓(뇌수)를 파낸 痕迹(흔적)이 역력했다.
치마폭, 종이, 낡은 수건 세 겹으로 감싼 머리는 쓰레기 埋立場(매립장) 귀퉁이에 깊지 않게 묻혀 있었다. 머리를 옮기는 途中(도중)에 흘린 것으로 推測(추측)되는 피가 전찻길 건너 麻浦(마포) 方向(방향)으로 이어졌다.
警察犬(경찰견) 여러 마리를 풀어 逃走(도주)한 犯人(범인)을 追跡(추적)했지만, 핏자국이 끊긴 프랑스(France) 大使館(대사관) 附近(부근)에서 맴돌 뿐 決定的(결정적)인 端緖(단서)를 찾지 못했다.
正午(정오)쯤 現場調査(현장조사)가 끝났고, 아이 머리는 곧장 京城帝國大學醫學部(경성제국대학의학부)로 옮겨져 剖檢(부검)에 들어갔다. 記者(기자)들의 집요한 質問(질문) 攻勢(공세)에 기무라(木村) 署長(서장)은 事件(사건) 槪要(개요)를 짤막하게 言及(언급)했다.
“아직도 血色(혈색)이 鮮明(선명)한 것으로 보아서 犯行(범행)은 今日(금일) 새벽에 있었다고 봅니다. 怨恨(원한)이나 癡情關係(치정관계)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京城(경성)에서는 近來(근래)에 없는 重大(중대)한 事件(사건)입니다. 萬全(만전)을 다하여 犯人(범인)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犯行(범행) 現場(현장)은 딴 곳인 것 같습니다. 아직 搜査(수사) 中(중)이므로 더 仔細(자세)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東亞日報(동아일보)’ 1933年(년) 5月(월)17日字(일자)‘
犯行(범행)은 대체 어디서 일어났을까? 被害者(피해자)는 누구인가? 凶惡(흉악)한 犯罪(범죄)의 動機(동기)는 무엇인가? 모든 게 五里霧中(오리무중)이었다.
動搖(동요)하는 民心(민심).
事件(사건)이 알려지자 京城(경성)은 一時(일시)에 술렁였다. 아이를 키우는 父母(부모)는 혹시 自己(자기) 아이가 犧牲(희생)되지나 않았을까 해서 놀러 나간 아이를 찾느라 미친 듯 골목을 누볐고, 癩病患者(나병환자), 乞人(걸인), 막벌이꾼들은 혹시나 自身(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숨을 죽였다.
福德房(복덕방), 茶房(다방), 카페(Cafe), 빨래터 가릴 것 없이 사람 모인 곳에는 온통 凶惡無道(흉악무도)한 事件(사건) 이야기였다.
“아마 문둥병자의 짓일 걸세. 머리는 갖다 버리고 골과 몸뚱이는 삶아 먹은 게야. 나는 꼭 그렇게 보이는 걸.”
“아니야 그렇다면 왜 골을 내어 먹나? 나는 등창병자가 그랬거나 아니면 간질쟁이 犯行(범행)인 것으로 밖에는 생각나지 않는데 그래.”
“그도 그럴듯하지만 내 생각에는 모진 女子(여자)의 소행이라고 보이는 걸. 무슨 男便(남편)에게나 本妻(본처)에게 怨恨(원한)을 가지고서 하늘이 怒(노)할 犯行(범행)을 한 거야.”
“제 子息(자식)은 그리 못해. 어찌 산것의 목을 베냐 말이야.”
(“ 두 乳兒(유아)事件(사건)의 全貌(전모)”, ‘新東亞(신동아)’ 1933年(년) 7月號(월호).
며칠 굶은 거지가 아이를 誘拐(유괴)해 病者(병자)에게 팔아먹은 것이다, 屍體(시체)를 파다가 몸은 먹고 머리만 갖다 버린 것이다….
時政(시정)에는 구구한 臆測(억측)이 亂舞(난무)했다. 유례없는 凶惡犯罪(흉악범죄)를 접한 治安當局(치안당국)은 管轄(관할) 西大門警察署(서대문경찰서)에 搜査本部(수사본부)를 設置(설치)하고, 京城市內(경성시내) 警察(경찰)을 總動員(총동원)해 搜査(수사)에 나섰다. 電話(전화)벨(bell)이 울리고, 오토바이(motorcycle)가 내달리고, 搜査隊(수사대)가 出動(출동)했다. 警察署(경찰서)와 派出所(파출소)는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端緖(단서)는 네 가지뿐. 아이 머리, 치마폭, 종이, 낡은 手巾(수건)이었다. 當時(당시)는 DNA 檢査(검사)가 開發(개발)되기 以前(이전)이었고 被害者(피해자)의 몸통이 없어 指紋(지문)을 감정할 수도 없었다. 그렇듯 劣惡(열악)한 條件(조건)에도 하루 만에 剖檢(부검)결과가 나왔다.
“性別(성별) 男兒(남아). 年齡(연령) 만 1歲(세) 內外(내외). 살아있는 아이의 목을 벤 것. 犯行(범행)時間(시간)은 發見時刻(발견시각)부터 10時間(시간) 以內(이내).”
京城(경성)帝國大學法醫學部(제국대학법의학부) 구니후사(國房) 敎授(교수)는 송곳니가 났으니 만 1歲(세) 內外(내외)이고, 핏자국이 마른 정도로 보아 犯行時間(범행시간)은 10時間(시간) 以內(이내)이며, 머리를 짧게 잘랐으니 사내아이라고 ‘명쾌하게’ 說明(설명)했다. 擔當刑事(담당형사)는 머리를 싼 치마폭이 高級(고급) 製品(제품)임을 根據(근거)로 가난한 집 아이는 아니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事件(사건) 發生(발생) 다음 날에는 머리를 싼 종이가 쌀 봉투임을 밝혀내는 ‘凱歌(개가)’를 올렸다.
事件(사건)發生(발생) 하루 만에 警察署(경찰서) 人員(인원)을 總動員(총동원)하여 不眠不休(불면불휴)로 活動(활동)하여 그 두부(頭部)를 싸서 버린 종이주머니의 出處(출처)를 알아낸 西大門警察署(서대문경찰서)에서는 그것을 有一(유일)한 단서로 삼아 가지고 한층 더 猛烈(맹렬)히 活動(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종이주머니의 出處(출처)는 알았으나 이것을 使用(사용)하는 집이 쌀집, 과자점, 가루집 等(등) 무척 많으므로 종이를 사가지고 간 人物(인물)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일일이 印象(인상)을 記憶(기억)하기 어려워서 警察(경찰)이 搜査(수사)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朝鮮日報(조선일보)’ 1933年(년) 5月(월)18日字(일자).
警察(경찰)은 麻浦(마포) 一帶(일대) 쌀집과 과자점을 샅샅이 뒤진 끝에 犯行(범행)에 使用(사용)된 쌀 봉투가 ‘최춘홍쌀집’에서 쓰는 봉투라는 事實(사실)까지 밝혀내고, 쌀집 顧客(고객)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追窮(추궁)했다. 그러나 별다른 嫌疑點(혐의점)은 찾지 못했다.
警察(경찰)은 ‘科學的(과학적) 搜査(수사)’를 通(통)해 그밖에 몇 가지 ‘重要(중요)한’ 情報(정보)를 얻었다. 腦髓(뇌수)를 파낸 痕迹(흔적)으로 보아, 犯人(범인)은 癩病(나병), 梅毒(매독), 癎疾(간질), 등창병 따위의 治療(치료)에 쓸 腦髓(뇌수)를 얻을 目的(목적)으로 아이를 죽였다, 쌀 봉투에 묻은 흙과 事件現場(사건현장)의 흙이 다른 것으로 보아 아이는 다른 곳에서 殺害(살해)된 後(후) 遺棄(유기)됐다, 목과 뒤통수에 남은 칼날의 痕迹(흔적)으로 보아 犯人(범인)은 칼 쓰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 警察(경찰)의 搜査網(수사망)에 걸리지 않고 교묘하게 자취를 감추는 것으로 보아 犯人(범인)은 매우 ‘영리한 者(자)’다….
世界的(세계적)으로 ‘優秀性(우수성)’을 자랑하는 日本(일본)警察(경찰)도 不實(부실)한 但書(단서) 앞에서는 束手無策(속수무책)이었다.
時間(시간)이 흐를수록 事件(사건)은 迷宮(미궁) 에 빠져들었고, 警察(경찰)의 無能(무능)함을 叱咤(질타)하는 목소리는 커져갔다. 事件(사건) 發生(발생) 사흘째 되던 날, 기무라(木村) 署長(서장)은 動搖(동요)하는 民心(민심)을 意識(의식)해 이렇게 말한다.
“아직 犯人(범인)을 逮捕(체포)하지 못했습니다.
事件(사건)이 五里霧中(오리무중)으로 들어간다고 꾸지람을 해도 하는 수 없습니다. 그러나 科學的(과학적) 搜査(수사)方法(방법)은 있습니다. 하여튼 보십시오. 最先(최선)을 다해 努力(노력)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좋은 結果(결과)를 볼 겁니다. 언제쯤 잡히겠느냐고요? 그것은 아직 確言(확언)을 못하겠습니다.”
(‘東亞日報(동아일보)’ 1933年(년) 5月(월)18日字(일자).
白晝(백주)에 아이 머리가 나뒹군 지 한참이 지나도 保護者(보호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아이의 保護者(보호자)가 事件(사건)에 關聯(관련)됐을 可能性(가능성)을 示唆(시사)했다. 그러나 아무리 肆惡(사악)한 人間(인간)이라도 父母(부모)로서 제 子息(자식)의 목을 베었을 리는 없고, 아이의 保護者(보호자)와 犯人(범인)의 ‘陰險(음험)한 去來(거래)’ 아래 犯行(범행)이 자행됐을 것이라는 觀測(관측)이 有力(유력)했다.
이러한 推理(추리)대로라면 아이의 保護者(보호자)는 親父母(친부모)가 아니라 팔아먹을 目的(목적)으로 아이를 얻어와 기르는 사람일 蓋然性(개연성)이 컸다. 이렇듯 어설픈 推理(추리)로 因(인)해, 개구멍받이를 기르는 가난한 사람이 애꿎게 搜査(수사)의 標的(표적)이 됐다.
아기무덤 受難(수난)時代(시대).
西大門(서대문)警察署(경찰서) 刑事隊(형사대)는 事件(사건) 發生地(발생지)를 中心(중심)으로 竹籤征(죽첨정),中林洞(중림동), 합동 一帶(일대)에 흩어져 거의 모든 家庭(가정)을 戶口調査(호구조사)했다.
개구멍받이를 키우는 사람이 發見(발견)되면 마치 犯人(범인) 取調(취조)하듯 照査(조사)했고, 조금이라도 疑心(의심) 가는 點(점)이 發見(발견)되면 가차없이 留置場(유치장)에 가뒀다.
아이 머리 탓에 애매한 개구멍받이 保護者(보호자)들이 受難(수난)을 겪은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실속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믿었던 戶口調査(호구조사)마저 水泡(수포)로 돌아가자, 잔뜩 毒(독)이 오른 警察(경찰)은 난데없이 삽자루를 들고 나섰다.
18日(일)(事件(사건) 發生(발생) 사흘째)부터는 最近(최근)에 죽은 어린아이를 埋葬(매장)한 共同墓地(공동묘지)를 파보기 始作(시작)했다.
第一着(제일착)으로 龍山(용산)警察署(경찰서) 孔德里(공덕리)駐在所(주재소)에서는 그 管內(관내)에서 最近(최근)에 죽어 埋葬(매장)된 아이가 셋이 있으므로 巡査(순사)를 派遣(파견)하여 阿峴里(아현리) 467番地(번지) 이창호와 孔德里(공덕리) 252番地(번지) 최용석 두 名(명)을 염리共同墓地(공동묘지)로 데리고 가서 墓地管理人(묘지관리인) 송태식을 入會(입회)시키고 지난 16日(일)(事件 當日(사건당일)에 埋葬(매장)한 李氏(이씨)의 딸 영애의 무덤과 15日(일)에 埋葬(매장)한 崔氏(최씨)의 아들 동식의 무덤을 파보았다. 그러나 모두 다 머리가 확실히 붙어 있으므로 結局(결국) 헛물이었다. 또 한 명은 父母(부모)가 出他(출타)하고 없어 19日(일)에 다시 데리고 가서 무덤을 파보기로 하였다. 이와 같이 犯罪(범죄)의 단서를 捕捉(포착)하기 위해 가엾게 죽은 어린아이 무덤의 受難時代(수난시대)를 演出(연출)하고 있다.
(‘朝鮮日報(조선일보)’ 1933年(년) 5月(월)19日字(일자).
警察(경찰)은 무덤이 아니더라도 疑心(의심) 가는 곳이면 어디든 일단 파고 보았다. 한동안 京城市內(경성시내)에서는 ‘삽질’하는 警察(경찰)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이런 삽질은 意外(의외)의 結果(결과)를 낳기도 했다.
5月(월)18日(일) 午前(오전), 西大門警察署(서대문경찰서) 搜査隊(수사대) 최태준 巡査(순사)는 봉래정 附近(부근) 언덕을 巡察(순찰)하다가 파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애 屍體(시체) 한 구를 發見(발견)했다.
極度(극도)로 神經(신경)이 銳敏(예민)해진 警官(경관)들은 이것이 사라진 아이의 몸뚱이일 것이라는 생각에 興奮(흥분)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埋葬(매장)된 屍體(시체)를 파보았다. 그러나 不幸(불행)히도 시체에는 머리가 붙어 있었다. 한 살가량 되어 보이는 女子(여자)아이 屍體(시체)였다. 斷頭(단두) 乳兒(유아) 事件(사건)과는 無關(무관)하지만 或時(혹시) 또 다른 殺人事件(살인사건)이 아닐까 하여 剖檢(부검)해본 結果(결과) 病(병)을 앓아 죽은 아이를 暗埋葬(암매장)한 것이었다.
아이 머리가 發見(발견)된 금화장 쓰레기 埋立地(매립지) 現場(현장). ‘東亞日報(동아일보)’ 1933年(년) 5月(월)17日字(일자)에 실린 寫眞(사진)이다.
이튿날 午後(오후) 龍山警察署(용산경찰서)는 언덕에 갓난아이를 暗埋葬(암매장)한 痕迹(흔적)이 있다는 提報(제보)를 받고 刑事(형사)를 急派(급파)했다. 그러나 埋葬(매장)된 屍體(시체)를 파보니 아이의 목뿐만 아니라 탯줄까지 붙어 있었다. 이렇듯 警察(경찰)의 總力戰(총력전)은 종종 어처구니없는 해프닝(Happening)을 演出(연출)해 世人(세인)의 嘲弄(조롱)을 받았다.
어린애 목 자른 事件(사건)을 搜査(수사)하는 中(중)에 抱腹絶倒(포복절도)할 ‘난센스(Nonsense)’ 한 막. 18日(일) 午後(오후) 2時(시)경 西大門(서대문)서 刑事(형사)들이 눈에 불을 켜 가지고 事件發生(사건발생) 現場(현장)인 금화장 뒷 山(산) 入口(입구)를 지키고 수상한 사람을 점검하고 있었다. 앞에는 勞動者(노동자)같이 보이는 사람이 뭉굴뭉굴하게 생긴 무슨 物件(물건)을 넣은 가마니를 등지고 가고, 뒤에는 物件(물건)임자 같아 보이는 사람이 따라가는 것을 刑事(형사)가 發見(발견)하고 檢問(검문)을 하고자 “게 섰거라” 高喊(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가마니를 지고 가던 사람은 짐짝을 집어던지고 줄행랑. 옳다! 이것이야말로 나흘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던 어린아이 몸뚱이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刑事(형사)들은 한달음에 달려가서 가마니를 들춰보았다. 이크! 가마니 속에 있는 물건은 틀림없이 屍體(시체)는 屍體(시체)이다. 그러나 기다리던 아이의 屍體(시체)가 아니고 개 죽은 시체. 失望(실망)한 刑事(형사)들은 어이가 없어 뒤통수를 치면서 발길을 돌렸다.
이 난데없는 개 시체인 즉 시외 왕십리 김삼갑이란 사람이 고기를 먹으려고 남의 집에서 기르는 개 한 마리를 몰래 때려 잡아가지고 짐꾼을 얻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러한 난센스 한 막을 연출한 것이라고 한다.
(‘난데없는 개 시체’, ‘조선일보’ 1933년 5월19일자)
실패와 실수를 거듭하면서,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자랑하던 일본 경찰의 체면은 여지없이 구겨졌다. 사건 발생 나흘째, 노무라 형사과장은 다음과 같이 시인하기에 이른다.
“몇 가지 수사 방침은 이미 지시하여 실행해보았으나 지금의 형편으로는 모두 실패한 셈이외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였으니 어느 때에나 해결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소이다. 당분간 두고 볼밖에는 도리가 없겠고 또는 지금 생각하여 실행해 보려는 방침은 더욱이나 말할 수 없소이다.” (‘동아일보’ 1933년 5월20일자)
乞人(걸인) 恐惶時代(공황시대)
5月(월)20日(일), 事件(사건) 發生(발생) 닷새째(5일째). 때 이른 장맛비가 내렸다. 근 120여 時間(시간) 동안 京城市內(경성시내) 全(전) 警察(경찰)은 잠 한숨 제대로 못 자고 百方(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나 ‘영리한’ 犯人(범인)은 좀처럼 꼬리를 잡히지 않았다.
警察(경찰)은 容疑者(용의자) 檢擧(검거)는커녕 누가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科學的(과학적) 搜査(수사)’를 한답시고 닷새(5일)동안 공연히 헛심만 쓴 셈이었다.
서슬이 시퍼렇던 警察(경찰)의 威勢(위세)도 한풀 꺾였고, 自信(자신)했던 ‘科學的(과학적) 搜査(수사)’도 限界(한계)에 다다랐다. 이제는 僥倖(요행)이라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온종일 장대비가 쏟아지자, 개천에서 어린애 몸뚱이가 떠내려오지 않을까 하여 警察(경찰)은 쏟아지는 비를 가르며 京城市內(경성시내) 개천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그러나 공연히 옷만 적실 뿐 所得(소득)이 없었다.
혹시나 端緖(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하여, 警察(경찰)은 누더기로 갈아입고 거지 巢窟(소굴), 阿片中毒者(아편중독자) 巢窟(소굴)로 뛰어들기도 했다.
所管(소관) 西大門署(서대문서)는 日曜日(일요일)임에도 不久(불구)하고 署員(서원) 全部(전부)를 거지服裝(복장)으로 또는 막벌이꾼으로 變裝(변장)하여 가지고 只今(지금)까지 책상머리에서 科學的(과학적)으로 세운 搜査方針(수사방침)에서 一變(일변)하여 實地(실지)로 ‘모루히네(Moruhine:모르핀)’ 中毒者(중독자)처럼 或(혹)은 막벌이꾼처럼 친히 그들의 巢窟(소굴)에 들어가서 이날 하루를 보내어 눈치코치며 오고 가는 말에서 새로운 端緖(단서)를 求(구)하고자 하였지만 아무런 所得(소득)도 얻지 못했다.
(‘東亞日報(동아일보)’ 1933年(년) 5月(월)22日字(일자).
5月(월)22日(일), 事件(사건) 發生(발생) 一週日(일주일)째. 搜査(수사)는 持久戰(지구전)으로 들어갔다. 노무라(野村) 刑事課長(형사과장)은 “자리를 걸고 一週日(일주일) 내로 事件(사건)을 解決(해결)하라”며 일선 部下(부하)들을 壓迫(압박)했다. 道警察府(도경찰부)는 새로운 搜査方針(수사방침)을 下達(하달)했다.
1. 집 잃은 젖먹이 아이 戶口調査(호구조사)
2. 養育(양육)을 맡아 기르는 아이 發育狀態(발육상태) 確認(확인)
3. 私生兒(사생아)나 饑餓(기아)를 기르는 집의 養育狀況(양육상황)
4. 癎疾病(간질병), 문둥병, 精神病者(정신병자)의 行方追跡(행방추적)
5. 土幕民(토막민)과 乞人(걸인) 徹底(철저) 照査(조사).’ 下層民(하층민)과 全面戰(전면전)을 宣布(선포)한 것이었다.
道警察府(도경찰부)의 指示(지시)에 따라 京城市內(경성시내) 各(각) 警察署(경찰서)는 管內(관내) 乞人(걸인)과 癩病患者(나병환자)를 일제히 檢擧(검거)했다. 西大門警察署(서대문경찰서)는 癩病患者(나병환자) 4名(명), 乞人(걸인) 39名(명) 해서 總(총) 50餘名(여명)을 檢擧(검거)했다. 鐘路警察署(종로경찰서)는 60餘名(여명)을 잡아들였고, 東大門警察署(동대문경찰서)는 90餘名(여명)을 檢擧(검거)하는 氣焰(기염)을 토했다.
돈 없어서 빌어먹는 것, 병들어서 아픈 것이 무슨 罪(죄)가 된다고, 乞人(걸인)들과 癩病患者(나병환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留置場(유치장)에 갇혔다. 한동안 市內(시내) 各警察署(각경찰서)에는 이들이 내뿜는 惡臭(악취)가 振動(진동)했다.
警察(경찰)은 그간 받은 嘲弄(조롱)과 受侮(수모)에 대해 화풀이라도 하듯, 애꿎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乞人(걸인) 대장(臺帳)’이니 ‘문둥병환자 臺帳(대장)’이니 하는 駭怪(해괴)한 書類(서류)를 만들었다. 바야흐로 ‘아기무덤 受難時代(수난시대)’는 가고 ‘룸펜(Room Pen) 受難時代(수난시대)’ ‘乞人(걸인) 恐惶時代(공황시대)’가 到來(도래)한 것이다.
乞人(걸인)을 잡아들여 端緖(단서)가 잡히지 않으면 룸펜(Room Pen)을 잡아들이고, 그래도 端緖(단서)가 안 나오면 癩病患者(나병환자), 癎疾患者(간질환자)를 잡아들이고, 그래도 端緖(단서)가 잡히지 않으면 寡婦(과부), 庶母(서모), 繼母(계모)까지 잡아들였다.
일반 民衆(민중)은 警察(경찰)의 武力(무력)을 非難(비난)하는 편도 적지 않다. 西大門警察署(서대문경찰서)에서는 별의별 方法(방법)으로 搜査(수사)에 힘써왔으나 그다지 效果(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게 되매 이제는 管內(관내)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어린아이를 낳았다가 죽어서 埋葬(매장)하였다는 집을 일일이 搜査(수사)하여 當事者(당사자)를 묻은 場所(장소)에 데리고 가서 반드시 파보게 하고 있다.
그리고 寡婦(과부), 庶母(서모), 繼母(계모) 等(등)을 엄밀히 照査(조사)하여 每日(매일) 平均(평균) 五六名(오륙명)씩 데려다가 嚴重(엄중)한 取調(취조)를 繼續(계속)하는 中(중)이다.
(‘朝鮮日報(조선일보)’ 1933年(년) 5月(월)31日字(일자).
警察(경찰)은 마구잡이로 잡아들인 下層民(하층민)을 事件(사건)이 解決(해결)될 때까지 放置(방치)했다.
事件(사건) 發生日(발생일)인 16日(일) 以後(이후) 西大門警察署(서대문경찰서)에서 붙들었다가 풀어준 사람이 百餘名(백여명)에 달하는데, 警察署(경찰서)의 말을 들으면 現在(현재)에도 삼십(30)餘名(여명)이 拘禁中(구금중)이라 한다.
(‘東亞日報(동아일보)’ 1933年(년) 6月(월)3日字(일자).
日本警察(일본경찰)은 ‘科學的搜査(과학적수사)’에서 發揮(발휘)하지 못한 ‘優秀性(우수성)’을 下層民(하층민)과의 全面戰(전면전)에서는 한껏 뽐냈다. 제아무리 ‘영리한’ 犯人(범인)이라도, 疑心(의심) 가는 點(점)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는데야 버틸 才幹(재간)이 있겠는가? 下層民(하층민)과의 全面戰(전면전) 以後(이후) 搜査(수사)는 彈力(탄력)을 받았고, 좀처럼 잡히지 않던 解決(해결)의 실마리가 하나 둘 나타나기 始作(시작)했다.
마침내, 容疑者(용의자) 檢擧(검거).
6月(월)1日(일), 事件發生(사건발생) 17日(일)째. 드디어 容疑者(용의자)가 檢擧(검거)됐다. 事件(사건) 自體(자체)가 獵奇的(엽기적)인 만큼 容疑者(용의자)도 犯狀(범상)치 않은 人物(인물)이었다. 容疑者(용의자)는 巫堂(무당) 家族(가족) 다섯명(5명)과 ‘뻐꾸기’라는 別名(별명)으로 불리던 下手人(하수인)이었다. 事件發生(사건발생) 當時(당시) 핏자국을 쫓던 警察犬(경찰견) 한 마리가 프랑스(France)大使館(대사관) 近處(근처) 巫堂(무당)집 門前(문전)에 이르러 꼬리를 휘두르고 더 나아가지 않았다.
개는 그 집으로 뛰어들어 걸레를 물고 왔다. 警察(경찰)은 일찌감치 집 主人(주인)을 容疑線上(용의선상)에 올리고 搜査(수사)했다. 下層民(하층민)과 全面戰(전면전)을 벌인 以後(이후) 警察(경찰)은 巫堂(무당) 一家族(일가족)과 下手人(하수인)을 逮捕(체포)하여 留置場(유치장)에 가두고 連日審問(연일심문)해온 참이었다. 巫堂家族(무당가족)은 “아니다” “모른다”로 一貫(일관)했지만, ‘뻐꾸기’는 一週日(일주일) 만에 白旗(백기)를 들었다.
有力(유력)한 嫌疑者(혐의자)로 市內(시내) 竹籤征(죽첨정)에서 貸金業(대금업)을 하다 죽은 박준화의 아들과 그의 全家族(전가족) 5名(명)은 西大門署(서대문서)에 檢擧(검거)되어 嚴密(엄밀)한 取調(취조)를 받고 있다.
그들은, 박준화가 살아있을 때 등창이라는 梅毒性(매독성)의 惡疾(악질)로 오랫동안 苦生(고생)하다가 여러 가지 藥(약)을 써도 도무지 듣지 않으므로, 世上(세상)이 傳(전)하는 迷信(미신)에 依(의)하여 그 近處(근처) 酒店(주점)에서 雇傭(고용)살이를 하는 뻐꾸기를 시켜 아이를 사다가 殺害(살해)케 하여 腦(뇌)와 몸을 삶아서 먹었다는 嫌疑(혐의)를 받고 있다 한다.
그러나 그들은 犯行(범행) 一切(일체)를 否認(부인)하고 있다.
(‘東亞日報(동아일보)’ 1933年(년) 6月(월)2日字(일자).
警察(경찰)이 밝힌 事件(사건)의 涇渭(경위)는 다음과 같다. 高利貸金業者(고리대금업자) 박준화는 4月(월)22日(일) 등창병으로 앓아 누웠다.
처음에는 팥알만한 腫氣(종기)가 오른편 등과 겨드랑이에서 났는데, 韓藥房(한약방)에서 藥(약)을 지어와 써봤지만 별반 差度(차도)가 없었다. 病勢(병세)가 날로 惡化(악화)되자 家族(가족)들은 病院(병원)에 가서 治療(치료)받을 것을 누차 勸(권)했다.
그러나 박준화는 先親(선친)이 病院(병원)에 가서 사흘 만에 죽었으니 안 가겠다고 버티며 入院(입원)을 拒否(거부)함은 물론, 洋藥(양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腫氣(종기)는 漸次(점차) 擴大(확대)되어 나중에는 등 全體(전체)가 등창으로 덮였다.
그러자 巫堂(무당) 노릇 하는 아내 李氏(이씨)는 어떻게든 男便(남편)을 낫게 해볼 作定(작정)으로 널리 藥(약)을 구하던 中(중) 등창병에는 젖먹이 아기 골이 좋다는 말을 듣고 이것을 求(구)하려고 努力(노력)했다.
巫堂(무당) 李氏(이씨)는, 그 집에 出入(출입)하며 물도 길어다 주고 허드렛일도 해주던 일명 ‘샌전(청진동) 뻐꾸기’ 이성근을 시켜 널리 이 ‘藥(약)’을 求(구)하게 했다. 술과 돈에는 사족을 못 쓰는 뻐꾸기는 各地(각지)로 돌면서 어린애를 求(구)했다.
그는 結局(결국) 東大門(동대문) 밖 안암리 가난한 집에서 자기가 기르겠다고 말하고 그 집 아이를 데려왔다. 뻐꾸기는 데려온 아이에게 天人共怒(천인공노)할 犯行(범행)을 저질렀다.
박준화는 뻐꾸기가 구해온 ‘藥(약)’을 먹었지만, 病勢(병세)는 도리어 惡化(악화)됐다. 박준화는 迷信的(미신적)인 方法(방법)으로는 蘇生(소생)할 可望(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最後(최후)의 希望(희망)으로 세브란스(Severance) 病院(병원)에 入院(입원)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入院(입원)한 다음날 죽었다.
巫堂(무당)집을 수색하니 ‘物的(물적) 證據(증거)’가 쏟아졌다. 어른들만 사는 집에서 어린애 누비저고리 두 벌, 어린애 치마 한 벌, 어린애 버선 두 켤레가 나왔다.
그리고 피 묻은 巫堂(무당)의 치마 한 벌과, 쇠간인지 말간인지 사람간인지 肉眼(육안)으로는 識別(식별)이 不可能(불가능)한 正體不明(정체불명)의 動物(동물) 肝(간)이 들어있는 藥湯(약탕)이 發見(발견)됐다.
이처럼 有力(유력)한 物的(물적) 證據(증거)를 들이대도 巫堂(무당) 家族(가족)들은 犯行(범행)을 自白(자백)하지 않았다. 巫堂(무당) 李氏(이씨)는 어린애 옷가지는 어린애를 위하여 굿할 때 쓰는 것이고, 치마에 묻은 피는 생리 때 묻은 것이고, 肝(간)은 病問安(병문안) 온 사람이 등창병에 좋다며 가져온 쇠간이라 했다.
事件(사건)을 前後(전후)해 巫堂家族(무당가족)이 수상한 行動(행동)을 했다는 이웃의 證言(증언)도 있었다.
“事件(사건)이 發生(발생)되던 날 警察犬(경찰견)을 쫓아 刑事隊(형사대)가 여러 번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경하기에 熱中(열중)하였으나 그 집에서는 수양녀 경옥이가 몹시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 눈으로도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疑心(의심) 나는 것은 事件(사건)이 發生(발생)되기 전날에 그 집 大門(대문)을 물로 깨끗이 닦아놓은 것입니다. 닦아놓을 必要(필요)가 있다면 사람이 보는 데서 해도 좋을 것인데 언제 닦았는지 동네 사람이 보지 못했다 하니 아마 깊은 밤에 닦은 것이라 보겠습니다. 사람들의 말은 피가 묻어서 그리한 것이라 하나 보지 못했으니 알 수 있습니까.”
(‘東亞日報(동아일보)’ 1933年(년) 6月(월)3日字(일자).
巫堂家族(무당가족)에게는 분명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無罪(무죄)를 證明(증명)할 決定的(결정적) 證據(증거)가 있었다. 박준화는 5月(월)12日(일) 午前(오전) 세브란스(Severance)病院(병원)에 入院(입원)하여 이튿날 死亡(사망)했다.
그 事實(사실)은 세브란스(Severance)病院(병원) 診療(진료)記錄(기록)과 死亡診斷書(사망진단서)에 分明(분명)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아이의 머리가 發見(발견)된 것은 5月(월)16日(일) 午前(오전) 7時(시)30分(분)이고, 剖檢結果(부검결과) 死亡時刻(사망시각)은 빨라야 15日(일) 밤 9時(시)30分(분)이었다. 아이의 골을 빼먹었다는 박준화가 아이보다 먼저 죽은 것이다.
뻐꾸기는 事件(사건) 경위는 물론 아이의 몸뚱이를 묻은 곳까지 일러줬다. 그만큼 信憑性(신빙성) 있는 自白(자백)이었다.
‘東亞日報(동아일보)’ 1933年(년) 6月(월)3日字(일자). 寫眞(사진)은 斷頭(단두) 乳兒(事件유아사건)의 容疑者(용의자)로 指目(지목)된 巫堂(무당)집과 ‘뻐꾸기’가 露宿(노숙)하던 곳이다.
西大門警察署(서대문경찰서) 搜査隊(수사대)는 뻐꾸기의 自白(자백)에 依(의)하여 自動車(자동차)와 오토바이(motorcycle)로 出動(출동)하여 금화산 一帶(일대)를 午前(오전) 11時(시)경부터 搜査(수사)했으나 問題(문제)의 屍體(시체)는 發見(발견)되지 아니하였다.
뻐꾸기의 自白(자백)에 依(의)하면 確實(확실)히 금화산 附近(부근)에 묻었다 하나 屍體(시체)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벌써 뻐꾸기가 버린 屍體(시체)를 아직 逮捕(체포)되지 아니한 다른 共犯者(공범자)가 어디로 옮긴 것이나 아닌가 하여 搜査方針(수사방침)을 돌려세우기로 되었다 한다. (‘東亞日報(동아일보)’ 1933年(년) 6月(월)3日字(일자).
대체 어찌 된 노릇일까?
이성근은 뻐꾸기 소리 흉내를 잘 내어 본명 代身(대신) ‘뻐꾸기’란 別名(별명)으로 通(통)했다. 청진동에서 나서 자랐기 때문에 ‘샌전 뻐꾸기’라고도 불렸다. 그는 새문밖(西大門(서대문) 一帶(일대)에서 술 잘 먹기로 有名(유명)하고, 술 먹으면 行悖(행패) 부리기로 有名(유명)했다. 술만 먹으면 자리와 처지를 가리지 않고 뛰고 춤추고, 술을 준다면 어떤 일이라도 사양치 않는 주광(酒狂)이었다.
‘뻐꾸기’ 울음에 춤추는 警察(경찰).
‘주정뱅이 뻐꾸기’ ‘새문밖 피에로 뻐꾸기’로 通(통)하는 그에게도 한때는 ‘골동취미가’ ‘젠틀맨’ 生活(생활)을 하던 時節(시절)이 있었다. 그가 새문밖 日本人(일본인) 모 과자점에 뜨내기꾼으로 있을 때는 어디서 주워오는지 방안에다 옥거울 같은 骨董品(골동품)을 모아놓았으며, 燕尾服(연미복)을 어디선가 얻어 입고 中折帽(중절모)를 쓰고 다닌 때도 있었다. 또 스님의 長衫(장삼)을 求(구)해서 입고 스님 흉내를 내고 돌아다니면서 동네 사람을 웃긴 적도 있었다.
괴인(怪人) 뻐꾸기의 변화 많은 상황은 결코 이뿐만 아니다. 그가 最近(최근)에 동네사람 물이나 길어주고 때로는 아이들 屍體(시체)를 운반하는 極端的(극단적) 천역을 할 뿐 아니라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막천석지(幕天席地)의 판에 박아놓은 武牢(무뢰)한이지만, 日本人(일본인) 모 과자점에 門客(문객)처럼 지내기 전에는 堂堂(당당)한 그 시절 ‘모던보이(Modern Boy)’로 머리는 ‘올백’으로 부치고 열손가락에 금반지를 끼고 새문밖 한량으로 이름을 날린 黃金時代(황금시대)도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색주가를 찾아 다니며 왼종일 이태백 노름을 하다가도 주머니 돈이 떨어질 때는 손가락에 꼈던 금반지를 서슴지 않고 뽑아 던져 새문밖 기사(騎士)의 호기를 보인 적도 한두 차례가 아니라고 한다.
(‘괴인 뻐꾸기 전반생’, ‘朝鮮日報(조선일보)’ 1933年(년) 6月(월)4日字(일자).
當代(당대)의 모던보이(Modern Boy) 뻐꾸기가 영락한 것은 전적으로 술 때문이었다. 술 때문에 가산을 蕩盡(탕진)했고, 술 때문에 日本人(일본인) 商店(상점)에서도 쫓겨났다.
西大門(서대문)郵遞局(우체국)에서 郵便配達夫(우편배달부) 生活(생활)을 한 적도 있었지만 곧 그만뒀고, 얼음 장사, 고구마 장사 等(등) 별별 장사를 다해봤지만 한 가지도 잘되는 것이 없었다.
天下(천하)의 룸펜(Room Pen)이 된 뻐꾸기는 竹籤征(죽첨정)으로 들어와 허드렛일 동냥일로 먹을거리를 구했다.
世上(세상)을 非難(비난)하고 사람을 咀呪(저주)한 그에게 後生(후생)을 편히 보내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그저 아무 집이나 가서 일해주고 밥이든, 술이든, 돈이든 주는 대로 받아서 그날그날 살았다.
하늘을 이불로 땅을 담요로 삼아 추운 겨울에도 길바닥에 쓰러져 잤다. 그러다 주면 먹고 때리면 성내는, 精神的(정신적)으로 다소 이상이 있는 者(자)가 되고 말았다.
警察(경찰)은 뻐꾸기가 싸움 잘하고 사고 잘 치는 것만 알았지, 精神的(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 금화산 일대를 아무리 뒤져도 아이 몸통이 나오지 않자 警察(경찰)은 뻐꾸기를 再次(재차) 取調(취조)했다. 뻐꾸기는 범행 당시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正確(정확)히 記憶(기억)할 수는 없지만, 埋立地(매립지)에 머리를 버리고 난 後(후) 몸통은 따로 챙겨 금화산을 넘은 것이 分明(분명)하다고 말했다. 警察(경찰)은 금화산에서 홍제내리까지 며칠 밤낮을 샅샅이 뒤진 後(후)에야 뻐꾸기의 정신에 이상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죽은 아이의 몸통을 찾는 過程(과정)에서 또 하나의 괴사건이 發生(발생)했다. 뻐꾸기의 陳述(진술)에 따라 금화산 一帶(일대)를 뒤지던 刑事隊(형사대)가 산꼭대기에서 목매 죽은 30代(대) 후반 男性(남성)의 死體(사체)를 發見(발견)한 것이다.
목매 죽은 것은 분명한데 노끈이 사라지고 없었다. 警察(경찰)은 短頭(단두) 乳兒(유아) 事件(사건)과 關聯(관련)된 人物(인물)일 수도 있다고 判斷(판단)하고 노끈을 찾느라 또 한 차례 騷動(소동)을 벌였다. 노끈은 死體(사체)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하루 만에 發見(발견)됐다. 確認(확인) 結果(결과) 죽은 男性(남성)은 정동학이란 人物(인물)이고, 生活苦(생활고)를 悲觀(비관)해 自殺(자살)한 것이었다. 또 虛蕩(허탕)이었다.
목 없는 死體(사체) 發見(발견).
“과연 산 아이의 목을 벤 것일까? 혹시 죽은 아이의 목을 벤 것은 아닐까?”
6月(월)3日(일), 事件(사건) 發生(발생) 19日(일)째. 精神(정신)이상자 뻐꾸기의 自白(자백)으로 사흘을 헛고생한 警察(경찰)은 同一(동일)한 方法(방법)으로 搜査(수사)를 해봐야 별반 所得(소득)이 없을 것임을 깨달았다.
搜査(수사) 指揮部(지휘부)는 事件(사건)을 根本的(근본적)으로 再檢討(재검토)하여 ‘생아참두(生兒斬頭)’에서 ‘사아단두(死兒斷頭)’로 搜査方向(수사방향)을 바꾸고, 事件發生(사건발생) 5日(일) 前(전)까지 죽은 아이의 무덤을 낱낱이 發掘(발굴)하도록 指示(지시)했다.
6月(월)5日(일), 事件發生(사건발생) 21日(일)째. 아닌게아니라 염리共同墓地(공동묘지)에서 머리 없는 아이 屍體(시체)가 發見(발견)됐다. 阿峴里(아현리)에 사는 한창우는 事件(사건) 發生(발생) 5日(일) 前(전) 腦膜炎(뇌막염)으로 죽은 한 살 난 딸 기옥을 염리共同墓地(공동묘지)에 安葬(안장)했다.
西大門警察署(서대문경찰서) 特別搜査(특별수사)대 10餘名(여명)은 밤 9時(시), 한창우와 埋葬(매장)에 參與(참여)한 그의 兄(형), 같은 집에 사는 배구석과 그의 아내 네 사람을 帶同(대동)하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기옥의 무덤을 파게 했다. 관 뚜껑을 열자 희미한 손전등 불빛 아래 머리 없는 아이 屍體(시체)가 나타났다.
단지 무덤 속 아이의 머리가 없다는 理由(이유)만으로 네 사람은 現場(현장)에서 逮捕(체포)됐다. 쓰레기 埋立場(매립장)에서 發見(발견)된 아이 머리가 사라진 한기옥의 머리라는 어떤 證據(증거)도 없었다.
그러나 搜査本部(수사본부)는 머리 없는 死體(사체) 發見(발견) 消息(소식)에 마치 犯人(범인)을 잡기라도 한 듯 기뻐했다. 剖檢(부검) 結果(결과)와 附合(부합)하지 않는 점이 많아 머리와 몸통을 對照(대조)하고 난 後(후) 容疑者(용의자)를 檢擧(검거)하는 것이 順序(순서)였지만, 特別搜査隊(특별수사대)는 몸통이 發見(발견)됐다는 消息(소식)이 알려지면 ‘영리한’ 容疑者(용의자)가 逃走(도주)할 憂慮(우려)가 있다는 理由(이유)에서 한기옥의 머리 없는 死體(사체)가 發見(발견)된 卽時(즉시) 容疑者(용의자) 檢擧(검거)에 나섰다.
1933年(년) 6月(월)7日(일) 京城帝國大學(경성제국대학)醫學部(의학부)에서는 머리 없는 아이 몸통과 몸통 없는 아이 머리를 맞춰보는 歷史的(역사적)인 剖檢(부검)이 實施(실시)된다.
剖檢場(부검장)에 들어가는 搜査(수사) 首腦部(수뇌부)를 담은 ‘東亞日報(동아일보)’ 1933年(년) 6月(월)8日字(일자) 寫眞(사진).
6月(월)6日(일) 새벽, 장대 같은 비가 퍼붓고 있었다. 노무라(野村) 刑事課長(형사과장)은 20餘名(여명)의 特別搜査隊員(특별수사대원)을 염리共同墓地(공동묘지) 산꼭대기에 配置(배치)했다. 目標(목표)는 山(산) 아래 阿峴里(아현리) 움집촌이었다.
特別搜査隊員(특별수사대원)은 山(산) 頂上(정상)에서 세 方面(방면)으로 一時(일시)에 달려들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10여 家族(가족) 男女(남녀) 30餘名(여명)을 檢擧(검거)했다. 노무라(野村) 刑事課長(형사과장)은 이들을 道警察府(도경찰부)에 가두고 搜査本部(수사본부)를 西大門警察署(서대문경찰서)에서 道警察府(도경찰부)로 移轉(이전)했다.
일단 容疑者(용의자)는 檢擧(검거)했고, 다음은 몸통 잃은 머리의 主人(주인)이 한기옥이 맞는지 確認(확인)할 次例(차례)였다. 아이 머리와 한기옥의 몸통을 맞춰보니 크기는 거의 一致(일치)했다. 그러나 凶測(흉측)하게 損傷(손상)된 아이 머리를 본 한창우가 自己(자기) 딸의 얼굴이 아니라고 强力(강력)히 否認(부인)했다.
6月(월)7日(일), 事件(사건) 發生(발생) 23日(일)째. 온 國民(국민)의 關心(관심) 속에 京城帝國大學(경성제국대학) 醫學部(의학부)에서 死體(사체)의 剖檢(부검)이 實施(실시)되었다.
執刀(집도)는 구니후사(クニフサ) 敎授(교수)가 맡았고, 요다(ヨーダ) 檢事(검사), 노무라(野村) 刑事課長(형사과장), 기무라(木村) 署長(서장) 等(등) 搜査(수사) 首腦部(수뇌부)가 入會(입회)했다. 事案(사안)의 重大性(중대성) 때문인지 통상 한 時間(시간)이면 끝나는 剖檢(부검)이 세 시간이나 이어졌다. 剖檢結果(부검결과) 예상대로 머리와 몸통은 同一人(동일인)의 것임이 判明(판명)됐다.
被害者(피해자)가 한기옥임이 밝혀지자 犯人(범인)은 독 안에 든 쥐와 같았다. ‘用意周到(용의주도)한’ 警察(경찰)은 머리 主人(주인)이 밝혀지기도 前(전), 새벽 奇襲作戰(기습작전)을 通(통)해 容疑線上(용의선상)에 오를 만한 人物(인물) 全員(전원)을 逮捕(체포)해두었기 때문이다.
남은 일이라곤 30名(명)의 容疑者(용의자) 中(중) 犯人(범인)을 가려내 罪(죄) 없는 사람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犯人(범인)은 한창우의 집 건넛방에 사는 배구석이었다. 그는 檢擧(검거)된 지 사흘 만에 犯行 一切(범행일체)를 自白(자백)했다.
배구석의 自白(자백)이 있은 後(후) 警察(경찰)은 竹籤征(죽첨정)으로 出動(출동)하여 共犯(공범) 윤명구를 逮捕(체포)했다.
이로써 白晝(백주) 京城(경성) 한복판에 나뒹군 아이 머리를 둘러싼 大騷動(대소동)은 23日(일) 만에 終決(종결)됐다.
배구석과 한창우는 忠北(충북) 음성에서 農事(농사)를 짓다가 4年(년) 前(전) 上京(상경)한 이래, 阿峴里(아현리) 貧民街(빈민가)에 집을 얻어 방 한 칸씩 쓰고 있었다.
배구석은 石炭商店(석탄상점)에서 일하는 家難(가난)하지만 善良(선량)한 勞動者(노동자)였다. 배구석의 知人(지인)인 엿장수 윤명구에게는 癎疾病(간질병)을 앓는 아들이 있었다.
5月(월)11日(일) 한창우의 딸 한기옥이 죽자, 윤명구는 배구석에게 한기옥의 무덤을 파서 腦髓(뇌수)를 꺼내달라고 付託(부탁)한다. 배구석은 죽은 아이 腦髓(뇌수)로 산 아이 病(병)을 낫게 해달라는 윤명구의 懇曲(간곡)한 付託(부탁)을 拒絶(거절)하지 못했다. 배구석은 5月(월)15日(일) 밤 한기옥의 무덤을 파헤쳐 머리를 베고 腦髓(뇌수)를 꺼내 윤명구에게 주고 그 代價(대가)로 2圓(원)을 받는다.
이 事件(사건)의 主人公(주인공) 윤명구는 定州(정주) 出生(출생)으로 어려서는 漢學(한학)을 工部(공부)하다가 家勢(가세)가 貧寒(빈한)하여 15~6歲(세) 때부터 農事(농사)를 지었다. 그 後(후) 農事(농사)에도 失敗(실패)하고 시골에서 이 장사 저 장사를 했으나 그 亦是(역시) 여의치 못하므로 昨年(작년) 8月(월)에 南扶餘(남부여)對(대)하여 서올로 올라와 엿장사 行商(행상)을 하여 그날그날 살았다.
그와 같은 生活(생활)을 하여 오는 동안에 子息(자식)을 여럿 나았으나 現在(현재)에 데리고 있기는 큰아들 천구, 둘째아들 정구, 셋째아들 진구(假名(가명)-編輯者(편집자)인데, 셋째아들 진구는 세 살 되던 때부터 癎疾病(간질병)이 있어서 恒常(항상) 그것을 念慮(염려)하고 여러 가지 藥(약)도 써보았으나 效驗(효험)이 없으므로 傳(전)하는 迷信(미신)에 依(의)하여 사람의 腦髓(뇌수)를 먹으면 낫는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求(구)하다가 이와 같은 言語道斷(언어도단)의 犯行(범행)을 한 것이라 한다.
윤명구의 品行(품행)은 얌전하여 同僚(동료)들 사이에도 稱讚(칭찬)을 받아왔으며 술 한 모금 마시지 않는다 한다. (‘東亞日報(동아일보)’ 1933年(년) 6月(월)8日字(일자).
윤명구는 子息(자식)의 病(병)을 고치려는 善(선)한 마음에서 남의 子息(자식) 死體(사체)를 毁損(훼손)하는 끔찍한 罪(죄)를 犯(범)했다. 그러나 한기옥의 腦髓(뇌수)를 먹은 後(후) 윤진구의 癎疾(간질) 症勢(증세)는 惡化(악화)될 뿐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6月(월)8日(일)은 여러 사람에게 뜻 깊은 날이었다. 기무라(木村) 署長(서장)은 오랜만에 활짝 웃으며 記者(기자)들을 만났고, 23日(일) 동안 休日(휴일)도 없이 칼잠을 자며 勤務(근무)했던 4000여 警察(경찰)은 오랜만에 두다리 뻗고 잠들 수 있었다.
竹籤征(죽첨정) 윤명구의 집에는 철모르는 정구와 진구가 아비도, 어미도, 兄(형)도 없이 하루를 보냈다. 뻐꾸기와 巫堂家族(무당가족)은 열흘 만에 西大門警察署(서대문경찰서) 留置場(유치장)을 나갔다. 以上(이상) -끝-梁芳秀(양방수) 祖國(조국)의 歷史(역사)를 찾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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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일 2021-02-07 오전 12:38~ 참 귀중한 자료입니다. 저장해 두고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