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은 외규장각 의궤의 특징을 보여주는 의궤 5책과 제작 당시 장정됐던 원표지 일부를 소개했다.
지난 4월14일부터 5월27일까지 4차례로 나뉘어 운송된 외규장각 의궤는 국립중앙박물관 제 10수장고에 보관돼 왔다. 해충이나 세균을 소독하는 작업인 훈증, 진열장에 넣어 보관하는 격납 작업을 거쳤다.
공개된 의궤 5책은 잔치, 장례, 존숭, 궁궐, 영건 등 분야별 의궤의 정수를 보여준다. 풍정도감의궤(豊呈都監儀軌), 장렬왕후존숭도감의궤(莊烈王后尊崇都監儀軌),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莊烈王后國葬都監儀軌),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懿昭世孫禮葬都監儀軌),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 등이다. 이중 풍정도감의궤,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 등 3책은 국내에 남아있지 않은 유일본이다.
분상용(分上用)인 풍정도감의궤는 1630년(인조 8) 3월 인목대비(1584~1632)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인경궁에서 인조가 올린 잔치 행사를 기록한 의궤다. 외규장각 의궤 중 최고(最古)의 의궤이자 잔치 관련 의궤 중 가장 오래된 의궤다. 풍정은 궁중의 잔치를 뜻하는 용어 중 하나다.
장렬왕후존숭도감의궤는 1686년(숙종 12) 5월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에게 존호를 올릴 때 의식 절차를 기록한 의궤다. 원표지를 유지하고 있어 어람본 의궤 표지의 재료와 장정 방법을 알 수 있다. 초록색 구름무늬비단으로 표지를 싸고 놋쇠로 변철을 댄 뒤 5개의 박을못으로 고정했다. 또 박을못 앞뒤로 둥근 국화무늬판을 대어 제본했다. 변철의 중앙에는 둥근 고리를 달았다.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는 1688년(숙종 14) 8월에서 12월까지 치러진 승하한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1624~1688)의 국장(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상장례)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상·하 2책으로 구성돼 있으며 이중 발인 반차도가 수록돼 있는 상책이 유일본이다.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는 1752년(영조 28) 5월,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의 장남인 의소세손(1750~1752)의 장례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상·하 2책으로 구성돼 있으며 상책에는 발인 발차도, 하책에는 부장품 등 채색도설이 수록돼 있다. 세손의 상장례인 예장이 입체적으로 기록돼 있는 보기 드문 자료다.
서궐영건도감의궤는 1830년(순조 30)~1831년(순조 31) 경희궁을 중건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융복전도, 회상전도를 비롯한 건물의 도형이 수록돼 있다.
외규장각 의궤는 대부분 '어람용'(御覽用) 의궤'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의궤는 왕이 보는 어람용 1건을 포함해 보관과 해당 기관 참고용인 분상용 등 보통 5~9건 제작됐다. 어람용과 분상용은 기록된 내용은 같지만 종이와 표지의 재질, 장정 방법, 서체와 그림의 수준 등에서 어람용이 월등하다. 글자의 크기, 간격, 편집의 차이 등으로 어람용이 분상용보다 보통 분량이 많다.
어람용은 고급 초기(草記)에 쓰던 종이인 초주지로 만들어졌으며 화원이 붉은색 안료를 써 내지를 붉은선 테두리로 장식했다. 표지는 무늬가 있는 초록비단이다. 분상용은 닥나무 껍질로 만든 두꺼운 종이인 저주지로 만들어졌으며 먹으로 목판에 찍어냈다. 표지는 붉은 베로 만들어졌다.
외규장각 의궤의 또 다른 특징은 대부분의 변철(邊鐵)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국내에도 어람용 의궤가 다수 있지만 대부분 사라지거나 변형된 상태다.
인조장릉천봉도감의궤와 인경·인현·인원왕후존숭도감 등 의궤의 원래 비단 표지도 함께 공개됐다. 개장 전 원래 상태를 보여주는 비단재질의 원표지는 17~19세기 어람용 의궤 장정의 변천 과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다양한 문양과 직조 기술이 사용돼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용한 고급 비단의 격조를 느낄 수 있다. 의궤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인계되기 전 1970년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297책 중 11책을 제외한 286책의 표지를 바꾼 뒤 별도로 보관해왔다.
190종 297권인 외규장각 도서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2개월간 강화도 강화읍성에 주둔하면서 약탈해간 문화재 중 일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외형적인 유물 등록작업을 마친 상태이며 향후 연구팀을 구성, 세부적인 조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19일부터 9월18일까지는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특별전을 개최한다.
○ 출처 : positive100@newsis.com
3. 조선 외규장각의궤 이야기
보령 25세이다. 9월에는 정조대왕의 사업으로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였다. 어떤 치적보다 문화관리를 우선 삼은 것이 놀랍다. 창덕궁 안에 규장각을 지었다.
왕실 유품을 전시하였다. 정조6년째인, 1782년, 2월이다. 정조는 강화도에도 규장각을 하나 더 설치하였다. 외규장각이라고 불렀다.
특별히 보존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서적, 왕실의 족보, 어필, 어제, 옥인, 금보를 강화도로 보냈다. 궁궐의 규장각보다 외규장각에 더 중요문화재를 보관하였다. 외규장각 도서의 수는 병인양요직전에는 1,042종 6,130책이란 방대한 수량이다.
외규장각 건물은 병인양요때 프랑스 군데가 불질렀다. 훗날 복원은 되었지만 원래와는 규모가 떨어진다. 보관된 자료도 빼앗기고 불탔으니 텅비었다. 외규장각은 "단층 기와집"으로 아담하게 지어진 것을 가끔 사진으로 보았다.
규장각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고종31년) 때 폐지되었다. 규장각 역할이 날로 중시되고 있다. 뉴스거리도 자주 등장한다. 급기야, 4월 14일, 외규장각이 뉴스거리로 올랐다.
"1866년 병인양요때 프랑스가 약탈해간 외규장각의궤(298권중 75권)가 145년만에 한국에 돌아왔습니다.(조선일보1면)" 145년이란 2011년부터 거슬러 올라 병인양요가 발생한 1866년까지이다. 어떤 의궤인지는 내부 목록을 공개하지 않았다.
프랑스측에서 공개를 못하게 했다고 하니 넌센스였다. "장렬왕후국장(莊烈王后國葬, 인조계비)", "영조대왕과 정순왕후 김씨혼례도"의 그림이 선명하게 신문에 올랐다. 그림을 살펴보면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세밀하다.
사람이 그림 속에서 걸어다니는 모습으로 비쳐진다. 보존을 오래하기 위해 자연열매에서 얻은 색감칠이라고 한다. 종이도 최고급지였고 장정에 깃든 손길은 감탄을 자아낸다. 하기야 임금이 항상 곁에 두고 보도록 꾸몄다고 한다.
진상품이란 의미를 지녔다. 이렇게 문화적 가치를 지닌 의궤를 프랑스나라가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 역사상 병인양요란 병인년(1866년)9월에서 11월에 일어난 서양인 노략질이란 뜻이다. 의궤(儀軌)란 의례(儀禮), 나라행사 기록물이다.
병인양요의 대강을 살펴보았다. 원인은 고종3년, 천주교 박해에 있었다. 천주교 신자가 2만명에 육박하였다. 철종임금은 천주교 신자를 묵인하였다.
철종임금 말년에는 자연히 외국인이 들어오니 프랑스 선교사가 입국하였다. 베르뇌 주교, 리델 신부가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벌렸다. 1864년 고종이 등극하였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프랑스와 조선의 동맹을 고집하였다.
흥성대원군의 집(운현궁)에 천주교도가 왕래한다는 가짜 소문이 나돌았다. 대왕대비 조씨는 대원군을 나무랐다. 대왕대비 조씨와 관료들의 비난에 쌓인 대원군은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1866년 고종 3년 1월, 대원군의 명령으로 천주교인 8천명이 학살되었다.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었다. 살아남은 리델 신부는 청나라땅 톈진(天津)으로 도망을 갔다. 텐진에 주둔하던 프랑스의 극동함대(極東艦隊) 사령관 로즈 제독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조선의 천주교 탄압의 실정을 알렸다.
1866년 음력 9월 1일이었다. 로즈 제독은 작은 군함 3척을 인솔하여 인천 앞바다에 도착했다. 음력 9월 11일 순무영(포도청)에서는 "프랑스 함대는 귀국으로 돌아가라"는 격문을 보냈다. 로즈 제독은 회답을 하였다.
"선교사가 죄없이 죽었기 때문에 왔다" 죽은 선교사 9명에 갈음하여 조선인 9천 명을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1866년 음력 9월 18일, 한성 근교 양화진(楊花津)·서강(西江) 일대에 나타났다. 한양은 점점 공포와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어영대장 이용희를 강화도로 파견하여 응징하게 하였다. 이용희 군대의 반격으로 프랑스 군대는 피해가 컸다. 로즈 제독은 목숨을 구하여 청나라로 돌아갔다. 음력 10월 11일 로즈 제독은 호위함인 "게리에르(Guerrière)"를 위시하여
군함 6척과 일본의 요코하마 주둔 해병대 300명을 태우고 재침공했다. 도합 1230 명을 이끌고 강화도 부근의 물치도(勿淄島)에 나타났다. 한강을 봉쇄하였다. 며칠 후에는 강화도까지 점령하였다.
프랑스 군대는 민간인 사살, 도적질, 외규장각을 습격하였다. 외규장각의 보물들을 훔쳐갔다. 왕실도서라는 것을 알았다. 전쟁이 끝나고 귀국하여 그들이 남긴 기록을 옮겼다.
"외규장각 서가 안에는 2절지 크기의 왕실에 관한 기록서가 있었다.
공자의 저서, 의학서적 등과 4절지 크기의 조선역사서 등이 있었다.
모두 수천 권이었다. 우리는 좋은 지질의 수많은 책을 보았다.
경첩, 걸쇠는 구리로 된 쇠붙이였다. 제본기술을 보고 감탄했다. 이책들은 비단천으로 싸여있었다. 모두 붉은색과 금빛으로 칠한 나무상자 속에 들어 있었다.
잘 정리된 왕실도서였다." 기록을 보면 문화재라는 것을 알고 훔쳐갔다. 11월 7일, 정족산정을 침략할때는 양헌수 장군의 선전에 대패하였다. 11월 22일, 프랑스 군대는 철수하였다.
병인양요는 조선군대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우리의 손실은 너무나 컸다. 외규장각에 있던 도서 중 345권, 은괴 19상자를 잃어버렸다.
잃은 것이 이나라 약탈당했다.
철수하면서 외규장각에 불까지 질렸다. 수천 권의 도서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전등사로 가는 길목에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역사를 고증하고 있다. 전등사 대웅전에는 군사들이 쓴 글자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전등사에 주둔하던 조선군이 남겨 놓은 흔적이다. 이 대목에서 슬픔이 북받친다. 정족산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고 삼랑성이라고 부른다. 정족산성에는 사고(史庫)가 있다.
장사각과 선원각이 있다. 정족산성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승리의 대가로 "조선왕조실록(조선숙종조4년 이후분량)"을 지킬 수 있었다. 전쟁은 승리만이 살아남는 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정족산성을 지키지 못했더라면 조선왕조실록도 빼앗겼을 것이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박병선 박사가 1993년의 어느날, 조선시대의궤를 발견하였다. 박사는 프랑스국립도서관 사서로 근무할때였다.
프랑스국립도서관 지하창고에서 발견한 것이다. 의궤반환이 도마에 오르면서 미테랑 대통령은 외규장각 도서 1권을 반환했다. 경부고속철도(KTX)차량을 납품하려는 의도였다. 경부고속철도 사업권을 딴 프랑스는 의궤반환은 지키지 않았다.
자국문화재라고 우겨댄다. 의궤의 일부가 145년 만에 고국으로 왔으나 대여(貸與)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무엇보다 국민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 문화재 사랑에 더욱 노력하여 프랑스인들이 미안함을 느끼게 만들어야 한다.
세계인을 향한 거센 바람을 일으켜야 되겠다. 조선의궤는 세계 유일무이(有一無二)하다. 섹스피어, 괴테, 일리아드, 미켈란젤로 어느 누구도 맞설 수 없는 대작(大作)이다.
다른 어떤 금은(金銀) 보화와도 바꿀 수 없는 자랑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하였다. 모든 것은 바르게 된다는 의미이다. 갓, 도포, 한자, 한글로 꾸며진 책과 그림을 프랑스인들이 얼마나 이해할까?
잃어버린 옛 이야기를 하루 빨리 듣고 싶다.
슬픈 역사를 되새겨 봅니다. 죄를 지어면 죄값을 받는다는 데 아닌 것을 봅니다. 의궤는 할말이 많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