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어제 풍성한 은혜 내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진리를 알고 기뻐하는 영혼들,
그리고 그로 인한 감사들로 가득한 신앙수련회였습니다.
하지만 단회성으로 그치지 않게 하시고 더욱 말씀 가까이 나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인자하심은 끝이 없습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자기의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의 의가 주렁주렁 달린 두루마기를 매일 주님의 보혈로 빠는 자 되게 하옵소서.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오늘도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3.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14.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15. 큰 물이 나를 휩쓸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가 내 위에 덮쳐 그것의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16.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에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17.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18. 내 영혼에게 가까이하사 구원하시며 내 원수로 말미암아 나를 속량하소서
19. 주께서 나의 비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나의 대적자들이 다 주님 앞에 있나이다
20. 비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불쌍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22.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23.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24. 주의 분노를 그들의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가 그들에게 미치게 하소서
25.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26. 무릇 그들이 주께서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하게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27. 그들의 죄악에 죄악을 더하사 주의 공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28.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본문 주해)
13~15절 : 사람들의 조롱은 여전하나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계속한다.
하나님이 ‘반기실 때’란 ‘은총을 베푸실 때’이다.
14~15절은 이 시의 첫 부분(1~2절)에 드렸던 탄식을 반복한다.
16~20절 : 하나님께 드리는 탄원과 간구이다.
“주님, 주님의 사랑은 한결같으시니, 나에게 응답해 주십시오. 주님께는 긍휼이 풍성하오니, 나에게로 얼굴을 돌려 주십시오.
주님의 종에게, 주님의 얼굴을 가리지 말아 주십시오. 나에게 큰 고통이 있으니, 어서 내게 응답해 주십시오.
나에게로 빨리 오셔서, 나를 구원하여 주시고, 나의 원수들에게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주님은, 내가 받는 모욕을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받는 수치와 조롱도 잘 알고 계십니다. 나를 괴롭히는 대적자들이 누구인지도,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수치심에 갈기갈기 찢어진 내 마음은 아물 줄을 모릅니다. 동정받기를 원했으나 아무도 없었고, 위로받기를 원했으나 아무도 찾지 못했습니다.”(새번역)
21절 : 사람들이 쓸개를 주고 초를 마시게 한 극한의 고통은(21절),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을 예시한다.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마27:34)
22~28절 : 시인의 절망적 탄식은 대적자들을 향한 깊은 저주로 이어진다.
“그들 앞에 차려 놓은 잔칫상이 도리어 그들이 걸려서 넘어질 덫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들이 누리는 평화가 도리어 그들이 빠져드는 함정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서, 못 보게 해주시며, 그들의 등이 영원히 굽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분노를 그들에게 쏟으시고, 주님의 불붙는 진노를 그들에게 쏟아부어 주십시오.
그들의 거처를 폐허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천막에는 아무도 살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그들은, 주님께서 매질하신 사람을 새삼스레 핍박하며, 주님께 맞은 그 아픈 상처를 덧쑤시고 다닙니다.
그들이 저지른 죄악마다 빠짐 없이 벌하셔서, 그들이 주님의 사면을 받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그들을 생명의 책에서 지워 버리시고, 의로운 사람의 명부에 올리지 말아 주십시오.”(새번역)
22~23절은 로마서 11장에 인용되었다.
“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롬11:9~10)
또 25절은 사도행전 1장에 인용된다.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행1:20)
이러한 인용들은 성령이 임하여 신약을 기록한 사도들이, 모든 성경이 예수님 자신을 증거 한다는 말씀대로(요5:39), 구약으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증거 한 것이다.
(나의 묵상)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경건한 시인(다윗)은 자신이 당한 고난과 탄원과 간구를 통해 장차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표현한다.
그리고 성령이 임한 사도들은 구약에 나타난 이러한 말씀들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한다.
이와 같이 구약과 신약은 온통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약속의 말씀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 22~28절은 원수들에 대한 어마어마한 저주를 퍼붓는 내용이다.
악한 본성을 가진 자로서 나는, 나를 무지 괴롭게 한 원수들에 대한 이러한 저주가 속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와......이래도 되나?’ 하는 마음이 든다.
그런데 곧 이러한 말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씀임을 깨닫게 된다.
본문의 시인은 원수들을 향하여 엄청난 저주를 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잠잠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오히려 자신을 조롱하는 자들,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 쓸개를 주고 초를 마시게 하는 자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렸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눅23:34b)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께서 시인의 저주보다 ‘더 엄청난 말씀’을 하신다.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고 또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이다.
그들에 대한 ‘저주’는 잘할 수 있지만(?), 그들을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왜 이런 가당치도 않은 말씀을 주시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하는 것을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손수 이루시겠다는, 주님의 의지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은 나의 구원만이 아니라, 나를 매일 십자가로 이끌어 가시는 것도 이루시는 것이다. 나를 십자가에 연합되게 하심으로 주님께서 이 일을 이루신다는 말씀이다.
주님의 열심과 주님의 의지가 있으니 나는 너무도 자유하다.
그렇다고 멋대로 살면서 방종하지는 않는다.
원수를 사랑하는 그 이종(異種)사랑을 주님께서 하게 해 주심을 믿으니, 나는 그저 주님께 붙어있으면 된다. 주님께 붙어있음은 날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감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조차도 성령께서 주도해 가시니 내 마음은 평안하기 그지없다.
그러면 때때로 주님께서 ‘야야~~너무 느슨한 거 아이가?’ 하시면 또 깜짝 놀라 눈물, 콧물 흘리며 주님 앞에 납작 엎드리겠지만 말이다.(*^^*)
이러니 어찌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까??!!
이 아침에 원수를 저주하는 시인의 탄식을 통해 주님에 대한 사랑이 마구 샘솟음을 느낀다.
이런 은혜를 어떻게 말로 다 풀어낼까?
(묵상 기도)
주님,
어제 들은 말씀,
‘다 이루었다’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오늘 본문을 통해 묵상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남들은 이미 알고 있는 은혜인지는 몰라도,
저는 새 은혜로 기뻐 춤춥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는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주님의 멍에가 쉽다는 말씀(마11:30)을 떠올립니다.
‘참으로 이해가 안됩니다’ 하던 자, ‘진정 그러합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성령님, 감사합니다.
내내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