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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2일(화)
* 시작 기도
(시 144:12-15) 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들과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양식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잇돌들과 같으며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우리 수소는 무겁게 실었으며 또 우리를 침노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우리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주님...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받는 복은 대부분 물질의 부요함이나 자녀들이 아름답게 성장하는 것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보기에 가장 아름답고 귀한 것들로 표현한 것이지요.
그런데 신약을 사는 우리는 그것이 진짜 복인 줄 알고 그것에 치심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오늘을 사는 이 종 역시 그렇게 물질에 마음을 빼앗길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물질이나 눈에 보이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가득합니다.
이런 나에게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내 안에 예수로 부요하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사는 이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시 69:29-36
제목 : 무리가 거기에 살며 소유를 삼으리로다.
29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30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31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32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33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34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35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에 살며 소유를 삼으리로다.
36 그의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살리로다.
* 나의 묵상
다윗은 그 마음이 몹시 괴롭고 슬퍼서 주의 구원을 바라며 주님의 돌보심을 구한다.
그의 상황이나 형편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달라진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의 이름을 높이며 감사로 찬송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되새김질하고 굽이 갈라진 정한 제물인 황소로 제사하는 것보다 다윗과 같이 처절한 상황에서도 주의 이름을 높이며 감사로 찬송하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마음이 겸손한 자들이나 온유한 자들은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나아가 육신적 영적 환경적으로 비천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보고 기뻐할 것이므로 주를 찾아 섬기는 자들은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소망을 가질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비천하고 가난한 자들의 간구를 들으시며 또한 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를 결코 모른 척 하지 않으신다.
이런 하나님을 천지만물이 다 찬양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의 성읍을 세우실 것이다.
그러면 주의 사람들이 그곳에 살며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주의 사람들의 자손들이 그 땅을 상속하며 주를 사랑하는 자들이 그들과 함께 살 것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들이나 가까운 친족의 반역으로 인하여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져 들어간다.
거기에 큰 물이 그를 엄습하여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위경에 놓이기도 하였다.
다윗을 공격하는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다윗의 신전의식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인본주의로 공격한다.
이에 반하여 다윗은 그들을 이용하여 악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 사탄의 공격임을 영적으로 깨닫고 그에 대한 진멸을 하나님께 간구한다.
다윗은 그의 육신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를 통하여 미리 본다.
그로 인하여 엎드린 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실제로 행동하시는 것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21절의 쓸개와 초에 대한 말씀의 성취는 마태복음 27장과 요한복음 19장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고 이를 이루신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자신을 가리켜 가난하고 슬픔에 빠져 있다고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을 구한다.
다윗은 비록 왕이지만 그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괴롭고 슬픈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당장 그의 괴로움과 슬픔의 상황이 바뀌거나 변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미리 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감사함으로 주님을 찬양한다.
이런 감사의 찬양은 그 어떤 제물로 드리는 제사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살면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비록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그 이후에 그런 외적인 경건의 모습만 드러내고 중심은 전혀 주님께 드리지 않는 자들의 거짓된 행태를 하나님께서는 꾸짖으신다.
(사 1:11-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자들을 주님께서는 꾸짖으셨다.
(막 7:11-16)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억지가 아니라 감사가 중심이 된 진리여야 한다.
요한복음 4장에서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여인은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묻는데, 주님께서는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중심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요 4:20-24)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매일 매 순간이 예배자의 모습이어야 한다.
그것은 그의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중심이 항상 주님께 닿아있어야 함을 의미하며 예배의 시간은 지금 이 때인 것이다.
그 예배를 무엇보다 감사로 드리는 것이다.
감사란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어떠한 상황과 형편이 와도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감사이다.
내게 이루어진 일이 내 뜻과 충돌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면 거기에는 감사가 아니라 오히려 평화가 깨지고 만다.
그 속에는 고민과 갈등 불만과 원망 등이 자리 잡고 결국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라도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면 거기에는 감사가 임한다.
이 감사는 곧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신뢰하는 자의 모습이기에 그것이 참된 예배자이다.
옷을 아무리 예쁘고 단정하게 입고 올지라도, 헌금을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교회에서 직분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그것이 예배자의 모습일 수 없다.
다만 그에게 닥친 고난의 상황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감사로 나아가는 자가 진정한 예배자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셨다.
(요 6:38-40)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당하는 모든 질고와 모욕 수치에 대하여 전혀 반응하지 않고 다 받으셨다.
그 이유는 그것이 비록 자신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지만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받으신 주님은 결국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시고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부활하셔서 아버지 품속으로 들어가셨다.
그곳은 다름 아니라 창세전의 세계인 아버지의 나라이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자식들이나 친족들의 반역으로 인하여 견딜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고통을 초월한 감사의 제사를 드린다.
감사의 제사는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리는 제사보다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산 제사이다.
이런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누릴 나라는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들은 마당만 밟고 가는 무늬만 있는 신자가 아니다.
지성소에까지 들어가 주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이다.
(35-36)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에 살며 소유를 삼으리로다. 그의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살리로다.
결국 이 곳이 하늘지성소이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요 아버지 품속이다.
내가 날마다 나아가야할 곳이 바로 이곳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그 나라를 가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그저 천국은 죽어서 가는 것쯤으로 알았기 때문에 항상 삶이 이중적이었다.
이 땅에서는 예수 믿으니까 천국가는 티켓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으면 천국간다는 식이 바로 나의 신앙의 실체였다.
그러니 내 삶에는 항상성이 있을 리 만무하였다.
하늘지성소를 바라고 소망하는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그저 이 땅에서 누리는 즐거움과 쾌락이 좋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완전히 깨지게 되었다.
나의 이성과 생각이 철저히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복음이 내게 찾아왔다.
이 복음은 나의 그동안의 모든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내가 생각하던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철저하게 나 중심적으로 내 뜻만을 추구하던 이기적인 자였었다.
그러나 그런 나를 이제는 하나님 중심으로, 나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인 영생을 위하여 날마다 복음으로 살게 하신다.
그리고 오늘도 말씀 앞에 나아가 영원을 현재로 누리는 참 예배자로 서기를 원한다.
내 안에 말씀과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 지금 이 시간 무덤 안에서 주님과 만나 말씀으로 교제하는 예배의 자리, 이 자리가 나의 하늘지성소이다.
구약 시대 염소와 송아지로 드리던 제사는 모형과 그림자이다.
제사장의 직분도 짐승의 제물도 모두 모형과 그림자인 것이다.
이제 그 제사장의 직분을 주님께서 받으시고 주님과 함께 날마다 교제하며 사귐이 있는 자들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셔서 그 직분을 왕 같은 제사장 직분으로 받았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짐승의 제물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님은 단번에 죽으시고 그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하늘지성소에 들어가셨다.
이처럼 오늘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함께 무덤에 장사되며 함께 새 생명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럴 때 우리 또한 날마다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하늘지성소로 들어가 거기서 참된 자유와 평강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참된 감사의 예배이다.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하늘지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게 임하는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 하던 자가 여기 있습니다.
이 땅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들이 내 인생의 전부인 줄로 생각하고 그것에 얼마나 치심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 나는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언제나 마당 신자로써 성전의 마당만 밟고 가는 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주님이 계시는 성소 곧 지성소로 들어오라고 부르시는데 나는 내 마음에 내키면 들어가고 내 뜻에 맞지 않으면 왔다가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자로 지금까지 살아왔나이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들어간 지성소는 결코 하늘지성소가 아니었음을 고백합니다.
그곳 역시 내 생각의 지배를 받는 땅에 속한 장소였나이다.
이제 내게 주어진 상황과 문제가 어떠할지라도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그곳을 나의 무덤으로 삼고 주의 말씀과 성령으로 늘 함께 교제하며 사귀는 참 예배의 자리, 주의 성소가 되게 하옵소서.
어두컴컴한 자리요 소망이 없어 보이는 침침한 자리이지만 그 자리가 바로 지성소이며 무엇보다 주님이 함께하시는 하늘지성소임을 믿습니다
육신의 질고로 고난 가운데 있는 주의 자녀들을 긍휼히 보시고 그들이 있는 자리가 주님의 죽으신 십자가가 되게 하시며 주님이 묻히신 무덤의 성소가 되게 하소서.
하여 그 자리에 함께 죽고 함께 묻혀 주님과 말씀으로 교제하는 성소를 짓게 하소서.
그곳이 그들에게 소망의 빛이 비치는 하늘지성소가 될 줄 믿습니다.
오늘도 주의 은혜의 빛이 감사로 주께 나아가는 이들에게 세상의 그 어떤 빛보다 밝고 따사로운 빛으로 비춰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