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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인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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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자료모음방 스크랩 우리나라 성씨의 유래
심메마니 추천 0 조회 59 08.11.12 23: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양조씨(漢陽趙氏)
□ 시조 조지수(趙之壽)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고려조에서 조순대부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문헌이 실전되어 거의 선대와 벼슬하던 왕조 및 생존 연대는 상고할 수 없고, 묘소의 소재도 확실하지 않아 옛날 묘소가 있었다는 함경남도 영흥군 서면 은곡동에 제단을 모아 춘추로 향사해왔었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내왕이 막혀 그곳 소식조차 알 길이 없게 되었다.
본관은 그의 후손들이 문천군 용진에서 세거하다가 조선 개국 때 한성으로 옮겨 크게 번성하고 명문 거족의 기반을 닦았기 때문에 한양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 한양조씨의 번성
시조 조지수(趙之壽)의 후손에서 총관공파(摠官公派)와 판도공파(版圖公派)로 대별된다.
한양조씨에서는 3명의 조선 개국공신이 배출되었는데, 태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인옥(仁沃)과 태종 때 찬성사를 지낸 온(溫)은 총관공파이며, 태조 때 우의정을 지낸 영무(英茂)는 판도공파이다.
대표적 인물은 광조(光祖)이다. 개국공신 온의 현손으로 당대의 이름난 도덕가요 성리학자였다. 이이(李珥)는 김굉필(金宏弼) ․조광조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등 4인을 ꡐ동방사현(東方四賢)ꡑ이라 일컬을 정도였다.
한양조씨의 인물은 총관공파에서 많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도 판도판서 인벽(仁璧)의 아들 4형제(溫 ․涓 ․侯 ․師)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 조씨의 본관
본관은 문헌에 대략 200여 본이 전하나, 몇 본이 현존하는지는 미상이다.
그 중에서 풍양(豊壤) ․한양(漢陽) ․양주(楊州) ․임천(林川) ․배천(白川) ․함안(咸安) ․순창(淳昌) ․횡성(橫城) ․평양(平壤) ․김제(金堤) ․직산(稷山) 등 10여 본이 대본(大本)으로, 이들이 전체 조씨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조씨의 상계(上系)는 일정하지 않다. 이들은 다른 성씨와는 달리 동성(同姓)이라고 해서 반드시 ꡐ한 할아버지의 자손ꡑ임을 내세우지 않는다. 또, 조씨들끼리는 전통적으로 타본(他本)이라도 통혼(通婚)하지 않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 있다.
조씨 중에서 양주 ․평양 ․임천 ․배천 등은 송대(宋代)의 귀화족으로 알려져 있다.
조씨는 조선 개국공신 40여 명 가운데 8명으로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602명, 상신 19명, 문형(양관대제학) 10명, 왕비 3명, 청백리 6명과 판서급 수십 명을 배출하였다.
1975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가구수 15만 1,999가구, 전국 가구구성비 2.3 %로 249성 중 제7위였고, 1985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87만 7,050명에 가구수 20만 7,895가구로 274성 중 역시 제7위로 나타났다.
□ 한양조씨의 인물
■ 조인옥(趙仁沃)
[ ?~1396 (?~태조5) ]
1373년(공민왕22) 음보로 산원이 되고, 1378년(우왕13) 판전의시사를 거쳐 다음해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 종군했다.
위화도에서 회군, 최영(崔瑩) 등 구세력의 숙청에 가담했다.
이어 전법판서에 승진, 회군공신이 되고, 1389년 정도전(鄭道傳)등과 우왕을 폐위시키고, 창왕을 옹립한 뒤 신진세력의 중신인물로서 척불숭유와 전제개혁을 적극 지지하여 신진개혁의 기반을 닦는데 크게 활약했다.
1392년 밀직제학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이 해 정도전 등과 이성계를 추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중추원부사가 되고, 개국공신 1등에 올랐다.
1395년(태조4) 한성군에 봉해지고, 다음해 정조겸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태조묘에 배향되었다.
■ 조온(趙溫)
 1392년 조선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이 되고 한천군에 봉해졌다.
다음해 서북면 도순문사로 수주에 쳐들어온 왜구를 격파했고,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 친군위 도진무로 방원을 도와 공을 세워 정사공신2등이 되고, 중추원사를 거쳐 의흥삼군부 좌군동지절제사, 상의문하부사, 지문하부사를 역임했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 참찬문하부사로서 방간등의 군사를 평정, 삼사 좌사에 오르고, 다음 해 참찬의 정부사로 좌명공신 4등에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이 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02년 의정부 찬성사, 동북면 찰리사를 지냈다.
청렴검소하기로 유명하였다.
■ 조광조(趙光祖)
 [ 1482 ~ 1519 (성종 13~중종 14) ]
조선 중기의 문신․성리학자.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시호는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14세 때 어천도 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회천에 무오사화로 유배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1515년(중종10)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전적, 감찰을 역임하며 왕의 신임을 얻고, 입시할 때마다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을 것을 역설했다.
그 후 정언, 수찬에 이어 호조, 예조의 정랑을 거쳐 1517년 교리로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을 겸임,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해 여씨향약을 8도에 실시하게 했다.
다음해 부제학이 되어 미신 타파를 내세워 소격서의 폐지를 강력히 주청,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를 없애게 했다.
1519년 대사헌에 승진, 세자빈객을 겸했으며 현량과를 실시하여 자기 일파의 신진사류인 소장학자들을 요직에 안배하는 한편,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내는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마침내 훈구파의 반발을 야기시켰다.
훈구파의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은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하게 하고,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走肖爲王>이란 글자를 써 벌레가 갉아먹게 한 다음,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서 왕에게 바쳐 의심을 조장하는 한편,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케 한다’고 무고했다.
이에 조광조의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낀 왕은 그를 투옥,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변호로 사형을 면했으나 능주에 유배, 훈구파의 끈덕진 공격으로 사사되었다.
정암 조광조는 이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집 걱정하듯 하였네
 하늘이 이땅을 굽어보시니
 내 일편단심 충성을 밝게밝게 비추리
영의정에 추증, 문묘에 배향되고 증주의 죽수서원, 양주의 도봉서원, 회천의 우현사 등에 제향되었다.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安 )의 천거로 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전적 ․감찰 ․정언 ․수찬 ․교리 ․전한 등을 역임하고 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것은 국왕 교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사림파 등용, 훈구정치(勳舊政治) 개혁을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이었다. 
국왕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이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에 힘써 노력하여 정체(政體)를 세우고 교화를 행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앞 시기의 사화(士禍)와 같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것을 역설하였다. 
성리학 이념의 전파를 위해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김굉필 ․정여창(鄭汝昌)에 대한 관직 추증을 시행하였으며, 나아가 뒤의 두 사람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여 전국에 반포하게 한 것은 사림파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1518년에 천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급제자는 주로 사림파 인물들이었다.
훈구정치를 극복하려는 정책들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추진되었다.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 때에 좌의정을 지냈다는 이유로 반정(反正) 후에 폐위된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반정공신들의 자의적인 조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도교 신앙의 제사를 집행하는 관서로서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몰아 혁파한 것도 사상적인 문제인 동시에 훈구파 체제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었다. 
급기야 1519년에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부당한 녹훈자(錄勳者)가 있음을 비판하여 결국 105명의 공신 중 2등공신 이하 76명에 이르는 인원의 훈작(勳爵)을 삭제하였다. 
이러한 정책 수행은 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에 의해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는 공격을 받았으며, 벌레가 ꡐ조광조가 왕이 될 것(走肖爲王)ꡑ이라는 문구를 파먹은 나뭇잎이 임금에게 바쳐지기도 하였다. 
결국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지지를 업은 훈구파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킴에 따라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러나 후일 사림파의 승리에 따라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 왕도(王道)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으며, ꡒ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ꡓ는 진술로 압축한 바와 같이 도학정치의 구현인 지치라고 표현하였다. 
동시에 그러한 이념은 사마시에 제출한 답안인 <춘부(春賦)>에 나타나듯이 자연질서 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따뜻하고 강렬한 확신이 기초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점은 후대 사림들에게 경계해야 할 점으로 평가되었다. 
훈구파의 반격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한때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이념과 정책은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조선 후기까지의 모든 사족(士族)은 그가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도통(道統)의 정맥(正脈)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이라는 점에 정파를 초월하여 합의하고 추앙하였다.
그것은 학문의 전수 관계로 인한 것만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한 노력에 대한 경의였다.
문집에 《정암집》이 있다.
■ 조지훈
"얇은사 하이얀 고깔은으로 시작하는 시 「승무」로 유명한 시인 조지훈( 1920~1968)이 이곳 일월면 주곡리 사람이다. 지훈(芝薰)은 호이며 본명은 동탁(東卓)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등단해 한국의 고전적인 미와 불교적 세계를 노래하였으며 박목월, 박두진과함께 "청록파" 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는 시인의 이름으로 돋보이지만 그것은 청년기의 일이고 중년에 학자로서 활동한 것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1942년에 조선어학회에서 낸 『큰사전』 편찬에 참여하였고 1947년 부터는 고려대학교 교수로서 『한 국문학사대계』를 기획하여 간행하는 등 학문적 활동도 활발하였다. 시집으 로는 "역사앞에서" 등 여러 권이 있고, "지조론, 한국문화사 서설" 등의 저 술도 남겼다.
이곳 주곡리 주실 마을은 한양조씨의 동족마을이기도 해서 350년 된 마을의 아늑한 분위기도 느껴볼 수 있다. 한양조씨는 조선 중기인 350년 전쯤에 조 광조 친족의 후손이 사화를 피해 들어와 정착하게 되면서 마을을 이루었고 주실 조씨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조지훈이 태어난 집은 본래 조선 중기 인조 때에 이곳 주곡리 주실마을에 입 향한 시조 조전의 둘째 아들 조정형이 지은 집으로 주실 마을의 대종가인 호 운종택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일부가 불에 타 1963년에 크게 고쳐 지었으 며 옛집의 맛은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 경상북도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근에는 조지훈의 시비를 그의 생가 앞에 마련하여 문학기행을 하는 사람들 이 즐겨 찾고 있다.
그리고 시비는 영양읍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봉화 재산 가는길로 조금달리다 가 생가가 있는 마을 입구에 느티나무와 아가시아 나무숲속에 "빛을 찾아가 는 길"이 새겨진 조지훈의 시비가 서 있다. *조지훈(1920-1963)* 
시인. 본명은 조동탁(越東卓). 경북 영양출생. 47년 혜화 전문학교서 불교를 배우고 39년 "문장(文章 : 3號)"에 "고풍의상(古風衣裳)"으로 추천되어 문단 에 나서서 청록파(靑鹿派)의 한 사람으로 46년 "봉황수(鳳凰愁)", "산우집( 山雨集)" "풀닢단장" 등 주옥같은 명시를 많이 남겼다.  
그는 자신의 작품 계열을 1. 민족 정신의 표현, 2. 자연 교감(交感)과 패여 정조(覇旅情調)의 표현인 "파초우(芭蕉雨)", "완화빈(玩花빈)", 3. 서경(敍景 )과 선감각(禪感覺)을 표현한 "마음", "고사(古寺)", 4. 자연과 인간에 대한 적료감(寂廖感)과 희구를 표현한 "풀잎단장", 5. 해방 후의 민족적 비분(悲憤)을 그린 "암혈(岩穴)의 노래", "불타는 가슴", 6. 자연과 인정을 노래한 "아침", "풀밭에서" 등 산문체 시로 나누어 말했다. 
박목월, 박두진 등 다른 청록파 시인들이 뒤에와서 시 세계의 근본적 변혁을 가져온 데 반하여 그는 초기의 자연친화(自然親和)의 시 세계를 비교적 많이 유지해 왔다. 고 전적 제재를 가지고 민족 정서를 섬세한 언어로 균형과 조화의 미를 이루면 서 한편으로 선적(禪的)인 깊이를 간직함으로서 심오하고 아늑근 느낌을 주 는 것이 그 시의 특징이다. 
56년 자유 문학상 수상, 해방 후 경기여고 교사, 조선어학회 편찬원, 서울시 문화위원회 위원, 문교부 국어심의회 의원, 한국시인헙회장(67), 고려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했다.
□ 유적지
■ 죽수서원
전남 화순의 죽수서원은 문정공 정암 조광조(l482~1519)와 혜강공 학포 양팽손(l488 ~l545) 을 배향한 서원으로 전남지방에서는 순천의 옥천서원에 이어 두번째로 l570년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정암은 중종 l4년(l5l9) 기묘사화의 화를 입어 능성현에 유배되었다. 이때 평소 정암선생을 흠모하고 생원시와 현량과에 함께 등용되는 등 여러모로 인연이 깊었던 학포선생도 관직을 삭탈당하여 고향인 능성현에 와 있었다.
이에 자연히 조석으로 만날 수 있게 된 정암과 학포는 서론 강론하면서 의리를 교환하였다. 그러나 정암선생이 유배된지 1개월 정도에 사사를 당하자 학포는 은밀히 시신을 거두어 쌍봉사 골짜기 일명 조대감골에 장사지내고 서운태 (서원터)마을에 모옥을 짓고 춘추로 문인 제자들과 함께 제향하였다.
이후 선조 1년 (1568)에 정암선생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조정에서는 정암을 향사할 서원의 건립이 논의되었고 선조 3년(1570) 다시 능성현령 조시중의 협조로 천일대 옆(현위치)에 서원을 짓고 죽수란 사액을 받았다. 그후 1613년 서원을 중수하였고 l630년 도내 유림들과 조정에서는 사계 김장생 등의 발의로 학포선생을 죽수서원에 배향하였다.
l868년 죽수서원 훼철령에 따라 훼철되어 위패는 매안하였고 단만을 마련하고 제향하였다. l97l년 능주의 유림과 제주양씨 후손들이 도곡면 월곡리에 죽수서원을 복원하였다.그러다가 l983년 다시 한양조씨 조국조를 중심으로한 정암선생 후손들에 의하여 원래의 위치이자 죽수서원 사액을 받은 모산리에 죽수서원 복원을 추진,월곡리의 건물을 이건하고 신축하였다.
서원의 경내는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내삼문과 좌우로 둘러진 담장에 의해 제향구역과 강학구역으로 분리된 전학후묘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1989년 동재를 신축하고 1994년 외삼문 보수, 1997년 내삼문을 보수하였다.
■ 조동(趙洞)마을의 전설
중동은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가운데마을 혹은 간데말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고친 것이다. 성산제2동의 행정관할동인 중동은 갑오개혁때 처음으로 한성부 구역으로 편입되었다.
곧 한성부 북부 연희방 성산리계 중동이었는데 1911년 4월1일에는 경성부 연희면 중동이 되었다가 1914년 4월1일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중리로 되었다.
1949년 8월15일 서대문구 은평출장소 ‘중리(中里로)’로 되었다가 이듬해 3월15일 서울시조례 제7816호와 서울시조례 제979호에 의거 남가좌동 일부가 중동으로 포함되면서 서대문구에서 마포구로 관할구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다.
중동은 ‘조동(趙洞)’이라고도 하는데 한양조씨(漢陽趙氏)가 오래 살았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1945년에 발간된 「조선의 전설」이라는 책에 의하면 이 마을에는 고려때 한양조씨의 시조가 되는 조지수(趙之壽)가 토착세력으로 자리잡아 촌장노릇을 하고 있었다.
후일 첨의중서(簽議中書)까지 오른 후 개경으로 떠나면서 이곳에는 가장 아끼는 아들 한 사람을 남겨 두면서 마을을 잘 지켜 나갈 것을 당부하였다.
그래야만 주변 마을에서도 서로 믿고 의지해서 모두가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했는데 이때부터 ‘조동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구로다라는 사람이 쓴 <조서느이 전설>책에는 중동의 한양조씨 촌장이 살던 곳은 자손이 번성해서 영원히 후손이 끊어지지 않을 곳이라 했는데 지금 중암중학교가 세워져 있는 곳이 중동의 중앙이 되므로 한양조씨 조지수 집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중동은 일부 지역만 전형적인 주택지로 남아 있을 뿐 대부분은 개발 예정지로 확정되어 있어 주변의 정경은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지 못하다.
그러나 <조선의 전설>에 기록되었던 고려 때 한양조씨의 시조 마을이라면서 저자의 표현대로 자손이 번성해서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곳의 지형 지세를 갖춘 곳임을 몇몇 풍수학자들은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중동이 본래의 간데말로 되돌려 올 수 있는 지역이 될 것은 일산 지역의 신도시 개발과 강서․가양지구의 아파트 조성으로 그 사이에 끼인 간데말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 내고 있는 셈이다. ///

 
 

 

 

020505 성씨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32  `한산이씨   
한산이씨(韓山李氏)
□ 시조 이윤경
시조는 고려 숙종 때 호족으로서 권지호장직(權知戶長職)에 오른 이윤경(李允卿)이다. 중시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다.
이곡(李穀)은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으로 당대의 대문장이며, 우탁 이동(易東),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였으며 고려 충숙왕 7년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벼슬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공민왕 때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변계량(卞季良) 등의 학자와 명신을 배출하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의 아들 목은(牧隱) 색(穡)이 1362년 홍건적의 난에 왕을 호종하여 공을 세워 한산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한산으로 하였다.
□ 본관지 한산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韓山面)
본래 한산군의 땅으로서 한산읍내의 북쪽이 되어 북부면이라 하여 고촌, 죽동, 신동, 종지, 호암, 산성, 외상, 외하, 동자, 유산, 내하, 산음, 교촌, 서외, 서내, 내상의 16개 동리를 관할.
일제 대인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동상면의 원산, 야인, 신곡, 여사, 사곡, 나교, 동지, 토산, 송림, 축산, 송상, 송중, 송하, 오곡, 단상, 단중, 단하, 단서, 갈마, 녹양의 20개 동리와 동하면의 상동, 하동, 하서, 온동, 신후, 화산, 용두, 신성의 8개 동리와 임천군 홍상면의 포촌리, 교항리, 고읍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한산면이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 하여 죽촌, 종지, 호암, 성외, 동산, 지현, 원산, 여사, 나교, 동지, 송림, 축동, 송산, 송곡, 단상, 단하, 마양, 연봉, 온동, 용산, 신성의 21개리로 개편 관할.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송림리를 떼어 마산면에 넘겨주고, 화양면의 구동리를 병합해서 현재 21개리를 관할하게 됨. 동쪽은 부여군, 양화면, 남쪽은 화양면과 금강 건너 전라북동 옥구군, 나포면, 서쪽은 기산면, 북쪽은 마산면에 닿음.
한사모시로 유명한 고장이다
□ 가문의  번영
고려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李穡)을 비롯하여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 대문장가 이산해(李山海) 등으로써 이름난 한산이씨는 조선시대 상신 4명, 대제학(大提學) 2명, 청백리(淸白吏) 5명, 공신 12명과 문과 급제자 195 명을 배출했다.
이종선(李種善)은 명문으로서 여흥부사 등을 지내고 1417년 풍해도와 충청도의 도관찰사를 역임한 후 문성유후(門城留後)에 이어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냈다.
이맹균은 1385년 문과에 급제, 성균직학(成均直學)을 거쳐 조선개국 후 1418년 충청도관찰사가되고 이듬해 한성부윤을 지냈으며 1425년 진위사(陳尉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와 병조의 판서, 대사헌 등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이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고려 말의 석학(碩學)이요, 대유(大儒)로서,조선조 성리학 발전에 공헌한 이색은 원나라 제과에 급제,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조선이 개국하자 여주, 장흥 등지로 유배되고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가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간신들에의해 주중폭사(舟中暴死)하였다.
유명한 사육신의 한사람인 이개 또한 한산이씨 가문을 불사이군의 충절로서 빛낸 인물이었다. 그는 1436년 문과에 급제하여 훈민정음의 창제에 참여,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한 뒤 1456년 직제학에 이르렀다. 성삼문(成三門),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근세인물로는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를 들 수 있다.
□ 주요 인물
■ 목은 이색
(1328~1396) 고려 말의 문신이며, 학자. 자는 영숙이고, 호는 목은. 삼은의 한 사람
찬성사 곡의 아들로 이제현의 문인이다. 1341년(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국하여 1352년(공민왕 1) 전제개혁, 국방개혁,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1373년 한산군에 봉해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뒤에 ‘이초의 옥’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으나 수재로 함창에 안치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에 봉하여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관련하여 금주로 추방되었다가 여흥, 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에 봉하여지고 이성계의 출사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으로 가던 도중에 죽었다.
목은 선조의 시
<부벽루>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잠시 부벽루에 올랐더니
빈 성터 위엔 구름은 천추일세
인마는 떠나고 오지 아니하니
천손은 지금 어디에 노니는가?
긴 한숨 쉬고 풍등에 으지하니
산은 푸르고 강물은 절로 흐르누나.
■ 이홍조
(1595~166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여확, 호는 수은으로 찰방 문영의 아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병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동에서 의병을 모아 영남의병대장 전식과 함께 서울로 진격하다가 화의성립으로 중도에 해산하였다. 그 공으로 1638년 자여도찰방에 서용되었으며, 그 뒤 의금부도사, 회인현감을 역임하였다. 그 때 조정에서 점차 당쟁이 심해지자 벼슬에 뜻을 잃고, 몇 차례 관직이 제수되었지만 모두 거절하고 일월산에 은거하여 독서로 소일하였다.
■ 이개(李塏)
1456년(세조 2) 2월에 집현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이해 6월에 성균관사예 김질(金#질18)의 고변에 의하여 성삼문 등 육신(六臣)이 주동이 되어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발각되었는데,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유성원(柳誠源)과 함께 국문을 당하였다.
이때 그는 작형(灼刑)을 당하면서도 태연하였다고 한다. 성삼문 등과 함께 같은날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는데,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갈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ꡒ우정(禹鼎:夏나라 우왕이 9주의 쇠를 거두어 9주를 상징하여 만든 아홉 개의 솥)처럼 중하게 여길 때에는 사는 것도 또한 소중하지만․홍모(鴻毛:기러기의 털, 즉 아주 가벼운 물건의 비유)처럼 가벼이 여겨지는 곳에는 죽는 것도 오히려 영광이네․새벽녘까지 잠자지 못하다가 중문 밖을 나서니․현릉(顯陵:문종의 능)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고나!ꡓ. 이때 이개의 매부인 전 집현전부수찬인 허조(許#조21)도 자결하였는데, 단종복위의 모의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 이병연(李秉淵)
1671(현종 12)~1751(영조 27). 조선 후기의 시인.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일원(一源). 호는 사천(#사34川) 또는 백악하(白嶽下). 산보(山甫)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속(涑)이다. 병성(秉成)의 형이다.
백산(白山)이라는 곳에 살았다.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이며, 벼슬은 음보(蔭補)로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시에 뛰어나 영조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졌다. 문인 김익겸(金益謙)이 그의 시초(詩抄) 한 권을 가지고 중국에 갔을 때 강남(江南)의 문사들이 ꡒ명나라 이후의 시는 이 시에 비교가 안 된다.ꡓ라고 그의 시를 극찬하였다고 한다.
일생 동안 무려 1만300여수에 달하는 많은 시를 썼다고 하나, 현재 시집에 전하는 것은 500여수 뿐이다. 그의 시는 대부분 산수․영물시로, 대개 서정이 두드러지고 깊은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특히 매화를 소재로 55수나 되는 시를 지었는데, 이는 대개 은일적인 기분을 표현한 것으로 생(生)에 대한 깊은 애정을 은연중 표현하고 있다. 중국의 자연시인 도연명(陶淵明)의 의경을 흠모하였던 것 같다.
80세가 넘도록 시작 생활을 계속하였다.
■ 이산해(李山海)
 [1539 ~ 1609 (중종 34~광해군 1) ]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여수(汝受). 호 아계(鵝溪) ․종남수옹(終南睡翁). 시호 문충(文忠).
 진사를 거쳐 1561년(명종 16) 문과에 급제하여 응교에 올라 사가독서를 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이조좌랑을 비롯하여 형조판서에 승진하고 이어 이조판서․대사성을 지낸다.
1578년(선조 11) 대사간에 이르러 서인(西人)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등의 죄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1590년 영의정에 올라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光國)공신에 책록되었고 이듬해 정철이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일으키자 아들 경전(慶全)으로 하여금 정철(鄭澈)을 탄핵하게 하여 유배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사(兩司)로부터 국정(國政)을 그르치고 왜적(倭敵)을 들어오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파직, 백의(白衣)로 평양에서 다시 탄핵을 받아 강원도에 귀양갔다가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로 복관되고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600년 영의정에 재임(再任),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다. 6세 때 글씨를 잘 써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고 서화(書畵)에 능하여 대자(大字)와 산수묵도(山水墨圖)에 뛰어났다. 선조 때 문장 8가(文章八家)라 일컬었다.
 조정에서는 동인(東人)에 속하였으나 다시 북인(北人)에 속하였다가 마지막에는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었다.
 저서로 《아계유고(鵝溪遺稿)》가 있고, 글씨에 《조정암광조묘비(趙靜庵光祖墓碑》(용인)가 있다.
■ 토정 이지함
자 형백(馨伯)․형중(馨仲). 호 수산(水山)․토정(土亭). 시호 문강(文康). 토정비결(土亭 訣) 저자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 토정이라는 호가 붙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현령 이치(李穉)의 아들이며, 북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의 숙부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李之蕃)에게서 글을 배우다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갔다. 경사자전(經史子傳)에 통달하였고,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에도 해박하였다. 1573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6품직을 제수받아 포천 현감이 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였다. 1578년 아산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의 구호에 힘쓰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에 큰 관심을 가졌다.
박순(朴淳)․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 교유했으며, 당대의 일사(逸士) 조식(曺植)은 마포로 그를 찾아와 그를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의 사회경제사상은 포천 현감을 사직하는 상소문 등에 피력되어 있는데,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관계를 강조하고 광산 개발론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것이었다. 《토정비결》은 이지함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찾아와 1년의 신수를 보아 달라는 요구로 지은 책으로, 이지함과는 관계없이 그의 이름을 가탁한 책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지함은 주자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는 사상적 개방성을 보였으며, 이러한 까닭으로 조선시대 도가적 행적을 보인 인물들을 기록한 《해동이적(海東異蹟)》에도 소개되어 있다.
또한 이지함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김계휘(金繼輝)의 질문에 이이가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지함의 기인적 풍모를 대변해 주고 있다. 171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보은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는 《토정유고(土亭遺稿)》가 전한다.
■ 이철경(李喆卿)
1914~1989. 서예가. 호 갈물.
본적을 강원도 원성군 지정면 간현리로 두고, 1914년 6월 3일 경기도 개성시에서 출생하여 1989년 6월 14일 서울에서 76세를 1기로 영면했다. 그는 교육자, 의사, 한글학자, 민족주의자인 이만규의 3녀로, 전 서울고교 교장이었던 교육자 서정권의 부인으로, 가수이자 방송인인 둘째 아들 서유석 등 3남 2녀의 어머니로, 40년을 교육자로, 60년을 예술가로, 수십 년을 여성운동가로 일인 다역의 삶을 살아온 추앙 받는 모범여성이다.
그는 예술가로의 우리말조차 사용하기 어렵던 일제시기와 현대를 살면서 자신의 전공인 음악 보다 한글서예가로 남궁억(1863~1939), 윤백영(1888~1986) 등과 더불어 한글궁체의 서 예술화 활동을 왕성하게 해왔고, 더불어 오늘의 한글서예를 정착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철경․각경(珏卿)․미경(美卿) 세 자매가 모두 한글서예에 침혹(沈惑)하여 뛰어난 필재(筆才)를 발휘하였는데, 각경과는 쌍둥이다.
1935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 1938년부터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강사, 배화․이화․진명․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하였고, 1960년부터 1979년까지 금란여자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일찍이, 1948년 문교부 검인정교과서 검정위원과 서예교과서 심사위원을 역임하였고, 갈물한글서회를 창설하였으며, 대한주부클럽연합회 회장, 여성교육자회 회장, 사단법인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한일여성친선협회 이사,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단 자문위원,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 회장, 국정자문위원 등을 두루 역임하여 여성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8회에 걸쳐 개인전을 열었고, 미경과 자매전을 캐나다와 미국에서 열었으며, 1991년 《갈물 이철경서 집》을 발간하였다. 이밖에도 많은 단체전에 참가하였으며, 수상으로는 1929 ~1930년 동아일보사 주최 전국학생작품공모전 서예부문에 입상하였고, 1969년 제1회신사임당상, 1974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저서로는 《궁체쓰는 법》․《초등글씨본》․《중등글씨본》․《한글습자 가정편지틀》․《한글서예》․《한글》 등이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관동별곡〉․〈속미인곡〉․〈김활란박사 묘비〉․〈신사임당동상 명문〉․〈육영수여사 묘비〉․〈유관순열사 기념비〉․〈독립선언문〉․〈고당 조만식선생 어록비〉․〈이승만박사 어록비〉․〈나의 소원〉(白凡 金九) 등이 있다.
갈물 이철경(李喆卿)은 본적을 강원도 원성군 지정면 간현리로 두고,  1914년 6월 3일 경기도 개성시에서 출생하여 1989년 6월 14일 서울에서 76세를 1기로 영면했다. 그는 교육자, 의사, 한글학자,
□ 유적지
■ 수송영당
서울 종로구 수송동
향사일 양력 5월 5일, 10월 10일
■ 서산서원
경상북도 기념물 제43호
서산서원은 1771년(영조 47)에 이 지방 유림들의 공의로 이색 선생과 이홍조 선생의 학덕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62년에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묘우인 숭덕사는 맞배지붕으로 그 안에 이색 선생을 주향으로 하여 이홍조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 압각수
압각수(鴨脚樹)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92 중앙공원 내에 있는 은행나무 이름인데, 동구여지승람에 의하여 고려 공양광2년(1390)에 이초와 윤이가 명나라 태조에게 공양왕과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치려하여 이를 반대한 이색 등을 살해하고 이현보 등은 유배하였다고 무고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이색등 10여명이 옥에 갇히는 소위 "이초의 난"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는데 마침 큰 홍수를 만나 이색등은 이 압각수에 올라 화를 면하였다. 이 소식을 왕이 듣고 이는 이색 등이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하는 것이라 하여 석방하였다고 하는 일화를 간직하고 있는 유서깊은 나무이다. 압각수라는 이름은 잎의 모양이 오리류의 발가락을 닮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는 주장과 나무뿌리가 물오리발처럼 발가락 사이가 붙어 있어 생겼다는 주장이 있다. 이 은행나무는 수령 약 900년, 높이 30㎝, 밑둘레 8m이다.
■ 한산이씨 묘역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에 있는 조선시대 묘역.
1989년 12월 29일 경기도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되었다. 한산이씨 종친회가 소유하고 있다. 고려 말 학자 이색(李穡)의 후손인 한산이씨의 묘역이다.
신도시 개발지역인 분당지구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전체 규모는 87,000여 평으로 해발고도 약 70m의 영장산(靈長山) 일대에 조성되어 있다. 동․서․북쪽에 한산이씨 묘역임을 알리는 한산이씨묘산입수비(韓山李氏墓山入首碑)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2기는 중앙공원을 조성하면서 공원으로 이전하였다.
정남쪽에는 이지함의 조부(祖父)로 봉화현감(奉化縣監)을 지낸 이장윤(李長潤)을 비롯하여 이질(李秩), 이지숙(李之菽), 이증(李增), 이확(李穫), 이집(李潗), 이정(李程) 등의 묘역이 있다.
남동쪽에는 이증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이경류(李慶流), 이경류의 애마(愛馬), 이증의 손자인 이정룡(李廷龍) 등의 묘역이 있다. 남서쪽에는 이오(李奧), 이원(李垣), 이한(李漢), 이병건(李秉健) 등의 묘역이 있다.
남서쪽 중앙공원 입구 쪽에는 1722년(경종 2)에 이장윤, 이질, 이지숙의 유사(遺事)를 기록하여 건립한 한산이씨삼세이하유사비(韓山李氏三世以下遺事碑)가 있다.
비문(碑文)은 후손 이병연이 지었고 크기는 높이 198cm, 너비 80cm이다. 그밖에 이증의 신도비(1695), 이정룡의 신도비(1728), 이경류의 정각비(旌閣碑:1727)가 있다.
한산이씨의 세장지(世葬地:대대로 묘를 쓰고 있는 땅)이자 사패지(賜牌地:나라에서 내려준 땅)로서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 오랫동안 조성되어왔기 때문에 묘제(墓制) 및 석물(石物) 양식 연구에 중요하다.
■ 월하능
고양시 성사동에서 도내동쪽으로 이어진 69번 군도로를 따라 강고개를 지나면 군부대가 하나 있고, 그 군부대 우측으로 나 있는 도로를 따라 300m 정도 들어가면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의 자연촌락명칭이 월하능이다.
월하능 지명에 대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조선조 현종 때 선대왕인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능을 구하던 조정의 지관이 이 곳을 지나다가 국왕의 능자리로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날이 저물어 결정하지 못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자, 주위의 지형을 다시 살펴보니 간밤의 지형과는 달리 골짜기가 좁아 왕능으론 좋은 명당자리가 되지는 못했다 한다. 그 후 이 곳을 달밤에 본 능자리라 하여 월하능이라 하며 지금은 약 6호 정도의 집이 있다.
지관이 본 월하능 지점에는 현재 광목공의 묘소가 있다. 광목공은 목은의 3형제 중 둘째인 인제공의 장남이다. 이 묘소는 현재 군부대 바로 앞에 있는데, 조선시대에 건립된 묘표의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광목공의 이름은 이숙야이며 목은 이색의 손자이다.

 
020419 성씨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31  `창원황씨   
창원황씨 (昌原黃氏)
 □ 시조
황석기(黃石奇) 황충준(黃忠俊) 황양충(黃亮沖)
창원황씨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각각 선조를 달리하는 8파가 있는데, 이들 8파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밝혀진 것이 없으며, 족보도 각기 따로따로 편찬한다.
시중공(侍中公)파 : 황신. 토황(土黃)으로도 불리운다.
공희공(恭僖公)파 : 황석기(회산군). 당황(唐黃)으로도 불리운다.
호장공(戶長公)파 : 황량충.
그 밖에 예빈동정공파(황성찬), 전서공파(황윤기), 호장공파(황우용), 규정공파 등이 있다.
시중공파의 시조 황신의 원조는 고려때 문하시중을 지낸 황충준이며 그후의 세계는 알수가 없으나, 창원황씨가 확실하다고 한다.
공희공파의 파조 황석기(黃石奇)는 원래 고려 공민왕 때의 중서문하 평장사이었다. 종래에는 그가 원나라 사람으로 고려 공민왕 때 노국공주를 수행하여 고려에 온 것으로 전해졌으나, 이미 이전에 그는 고려에서 여러 벼슬을 지내고 1339년에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 등 활약한 사실이 '고려사'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1348년 고려 제29대 충목왕이 죽자 황석기는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30대 충정왕의 승습(承襲)을 청하게 되었는데, 그 이듬해에 앞서 원나라에 와 있던 공민왕(江陵大君)이 원나라 위왕(衛王)의 딸 노국공주와 결혼하여 귀국하게 되자 황석기는 그 때 따라왔던 것이다.
□ 대표적 인물
시중공파 ․호장공파 ․공희공파 등 3파에서 고루 인물을 배출하였다.
■ 시중공파
시중공파에서는 자(梓) ․인검(仁儉) ․인점(仁點) 3부자가 유명하다.
․황자(梓) : 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고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기행문 '갑인연행록'과 '경오연행록'을 편술하였다.
․황인검(仁儉) : 황자의 큰아들. 형조판서를 지냈다.
․황인점(仁點) : 황자의 둘째 아들. 영조의 딸 화유옹주와 결혼, 정조 때에는 동지 겸 사은사가 되어 일곱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 호장공파
호장공파에서는 사우(士祐) ․응규(應奎) ․섬(暹)의 3대가 두드러진다.
․황사우(士祐) : 호조, 예조,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역임하였다.
․황응규(應奎) : 황사우의 아들. 이퇴계의 문하생으로 임진왜란 때 절충장군에 오르고 돈녕부지사를 지냈다.
․황섬(暹) : 황사우의 손자. 부제학, 대사헌이 되었으나, 계축옥사(1613) 이후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소북파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柳永慶)의 처남이다.
■ 공희공파
․황상(裳) : 황석기의 아들. 문하찬성사․서강도원수 등을 지냈다.
․황형(衡) : 황상의 6세손. 공조판서를 지냈다.
․황기(琦) : 황형의 아들. 직제학․대사간을 거쳐 도승지, 경기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황신(愼) : 황형의 증손. 이율곡(李栗谷)의 문하생으로 정여립의 옥사(1589) 때 정언(正言)으로서 대신들이 서로 직언을 회피한 사실을 논박하다가 좌천되기도 했으나, 후에 공조, 호조판서를 지냈다.
이 밖에 창원황씨의 인물로는
․황구하(龜河) : 영조 때 노론의 중진으로 이조판서를 지냈다.
․황사영(嗣永) : 신유박해 때 순교한 백서(帛書)사건의 주인공이다.
․황기천(基天) : 순조 때의 명문장이며 명필이다.
․황재영(在英) : 고종 때의 학자이다.
․황필수(必秀) : 명의(名醫)이다.
□ 본관지
창원은 경상남도 남쪽에 위치한  산업도시이며 도청소재지로, 고대 금관가야(金官伽倻 : 경상남도 김해지방에  부족국가를 형성하였던 6가야 중의  하나)에 속했었다.
본래 의창현과 회원현의  합명인데 의창현은 신라의 굴자군을 경덕왕이 의안으로 고치고, 회원현은 신라의 골포현을 경덕왕이 합포로 고쳐서 의안군에 속하게 하였다가 1018년(현종 9) 의안․합포를 모두 금주에 예속시켰다.
그 후 의안은 의창으로, 합포는 회원으로 고쳐서 모두 현령으로 승격하였고, 1413년(태종 13)에는 의창현과 합포현을 합쳐 창원부가 되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창원군이 되었다.
1973년 정부의 중화학공업 시책에 따라 창원군의 상남면과 웅남면,  창원면의 일부를 마산시에 편입시켰고 1980년에는 창원시가 되었다.
□ 집성촌과 성세
  경기도 강화군 하점면 일원
  경남 함안군 칠원면 유원리
  평남 강동군 고천면 구암리 일원
  전남 영광군 감산면 월흥리
  황해도 신천군 궁흥면 마궁리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 남한에 총 53,591가구, 220,810명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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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황씨(昌原黃氏)는 황씨의 도시조인 황낙(黃洛)의  후손으로, 창원백에 봉해진 병고의 지손에서  계대를  알지 못하는 다음 3파로 크게 분류한다.
 첫째, 고려 충정왕 때 도첨의 참리를 지냈고 회산군에 봉해져서 문하평장사에 오른 황석기(黃石奇)를 파조로 하는 회산군계와
둘째, 시중을 역임한 황충준(黃忠俊)을 파조로 하는 시중공계가 있으며,
세째는 호장공계 황양충(黃亮沖)의 계통이다.
<조선씨족통보>에는 위 3파를 포함, 8파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연원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각 파별 대표적인 인물로는 회산군계 파조인 석기의 아들 상이 고려 충혜왕 때 호군이 되어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추충익 찬공신 을 포함하여 여러 번 공신에 녹훈되었으며, 특히 홍건적의 난과 왜구의 침입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워 문하찬성사를  지내고 회산부원군 에 봉해졌으며, 서강 도원수 등을 지냈고 무예에 능하여 궁술로 이름을 떨쳤다.
조선 성종 때 무과와 중시에 장원한 형은 석기의 현손이며 선공감정 예헌의  아들로 많은 무공을 세워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 판서에 이르렀다.
그  아들 기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직제학과 대사간을 지냈고 경기도 관찰사 때 선정 베풀었다.
한편 정랑 대수의 아들 신은 당대에 이름난 학자 성혼과 이이(李 珥)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선조 때 알성문과에  장원한 수재였고, 공조, 호조판서에 올라 위성이등공신으로 회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태종의 암살  계획을 추진했던 일호와 정조 때 학자 운조는 영조 때 노론의 중진으로, 이조 판서에 오른 귀하, 학자로 유명했던  근중․경종 형제와 가문을 빛냈다. 시중공계에서는 일세조를 판윤을 지낸 신으로 하는  계통과, 대를 일세조로 하는 계통이 있다.
숙종 때 문과에 올라 정언․지평․사간 등을 거쳐 부제학과 호조 참판을 지낸  자와 그의 맏아들로 형조 판서를 역임한 인검,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둘째 아들 인점 3부자가 유명했다.
호장공계의 사우는 중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지평․응교 등을 지냈고, 대사헌을 거쳐 호조․예조․이조 판서 때  알성문과에 올라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 동지돈령부사에 이르렀다. 그 외 순조 때 명문장과 명필로 이름을 날린 기천과 고종 때 학자 재영, 명의 필수 등이 가문을 빛냈다.

020419 성씨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30  `덕수이씨   

덕수이씨(德水李氏)
□ 시조 : 이돈수(李敦守)
시조는 고려 신호위중랑장(神虎衛中郞將) 돈수(敦守)이다.
덕수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05명, 상신 7명, 대제학 5명, 공신 4명, 청백리 2명을 배출했는데, 그 중에는 율곡(栗谷) 이이(珥)와 충무공 이순신(舜臣)장군 등 뛰어난 인물이 들어 있다.
상신 ․대제학 ․청백리에 오른 인물을 보면 중종 때  대제학 ․좌의정 행(荇), 명종 때  영의정 기(  ), 선조 때  대제학 이이(珥), 인조 때  대제학 식(植), 숙종 때  대제학 ․좌의정 단하(端夏), 대제학 ․영의정 여(  ), 영조 때  좌의정 집(  ) ․은(  ), 정조 때  영의정 병모(秉模), 선조 때  대사헌 ․청백리 유중(有中), 인조 때  예조판서 ․청백리 안눌(安訥) 등이며, 그 중 식과 단하는 부자 대제학이다.
□ 본관지 덕수(德水)
덕수(德水)는 경기도 개풍군(開豊郡)에 속해 있던 옛 지명이다. 본래 고구려의 덕물현(德勿縣) 또는 인물현(仁物縣)이었는데 통일신라의 경덕왕(景德王)이 덕수현(德水縣)으로 개칭하였다.
후에 해풍군(海豊郡)과 합하여 풍덕부(豊德府)로 승격하였으나, 나중에 개성부(開城府)를 제외한 구(舊) 개성군(開城郡)과 합하여 개풍군(開豊郡)이 되었다.
시조(始祖) 이돈수(李敦守)는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냈으며, 2세 이양준(陽俊)은 조산대부(朝散大夫)로 흥위위보승장군(興威衛保勝將軍)을 역임하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동지추 밀원사(同知樞密院事)․어사대부(御史大夫)․이부 상서(吏部尙書) 등에 추증되었다.
그 후 3세조 이소가 고려 고종(高宗)때 남성시(南省試)에 급제하여 통의대부(通議大夫)로 전법 판서(典法判書)와 지삼사사(知三司事)․세자내직랑(世子內直郞) 등을 역임했다.
개풍군 중면 덕수리 군장산(軍壯山) 아래에 있는 3세 소의 묘는 공자(孔子)를 낳게 한 이산(尼山)을 닮았다는 여니산(如尼山)을 주산으로, 동쪽에 군자암(君子岩), 북쪽에 성인암(聖人岩), 서쪽에 대장암(大將岩), 남쪽에 성현암(聖賢岩)을 거느린 야자형(也字形)의 명당(明堂)으로 소문난 명당(明堂)이다.
3세조(소)의 아들 형제 중 장자인 윤온(4世)이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상호군(上護軍)을 역임, 나라에 공을 세워 선충경절공신(宣忠勁節功臣)에 책록되고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첨의정승(僉議政丞)․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추증되어,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이 때부터 후손들은 중랑장 이돈수(李敦守)를 시조로 하고 누대로 세거해 온 덕수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명현(名賢)을 많이 배출시켜 명문의 지위를 굳혔다.
□ 인물
■ 이천선(李千善: 윤온의 아들)
고려 말에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수사공 주국(守司空柱國)에 올라 낙안백(樂安伯)에 봉해졌던 5세조
■ 7세조 변(邊: 수사재시사 공진님의 아들)
1419년(세종 1) 문과에 급제,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와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대제학(大提學)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지내고 궤장을 하사받았으며, 성종(成宗)이 즉위한 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특히 변(邊) 님은 "내 평생에 남을 속인 일이 없다"고 떳떳하게 자부하였다.
■ 변(邊)의 손자 9세조 거
1480년(선종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과천 등에서 탐관오리를 다스렸고,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장악원정(掌樂院正)을 거쳐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언관(言官)으로 있을 때 부정이 있으면 벼슬의 상하를 가리지 않고 탄핵하여 호랑이 장령(掌令)으로 속칭되었다.
■ 의석(宜碩:10세)의 증손 율곡(栗谷) 이(珥:13세)
1536년(중종 31) 부친 찰방(察訪) 원수(元秀)와 어머니 신부인(申夫人: 기묘명현 신명화의 딸)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태어나시던 날 밤에 어머니 신씨가 꿈을꾸셨는데, 흑룡(黑龍)이 바다로부터 솟아올라와 침실로 날아 들어왔기 때문에 어릴때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부르기도 하셨다.
율곡(栗谷) 님은 말을 배우면서부터 글자를 아셨다고 하시며, 세살때 외조모가 석류(石榴)를 가지고 묻기를 "이것이 무엇 같으냐" 하니, "붉은 가죽주머니 속에 부서진 구슬을 넣었도다(紅皮囊入紅珠)"  답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주야로 해통해 하던 율곡은 어느 날 연히불가(佛家)의 글을 보시고 그 사생설(死生設)에 깊이 느낀 바 있어 그 학문의 간편청정(簡便淸淨)함을 기뻐하여 세상 일을 버릴 생각을 하였다.
열아홉 되시던 해에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가 벗들에게 글을 보내시어 고별하고, 이내 절에 거주하면서 계(戒: 5계와 250계가 있는데 이를 지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함)와 정(定 : 마음에 동요됨이 없고 안정된 것)을 굳게 하여 침식까지도 잊고 생활하다가 그 후 얼마 안되어 불교가 이치에 가까운 듯하면서 진(眞)을 혼란하게 함을 알고, 불교 학문을 모두 버리고 유학(儒學)에 전심하였다.
22세에 성주 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 행(11세)의 증손 안인(安仁)
임진왜란 후 면천(沔川)에 초당(草堂)을 짓고 벼슬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만 진력했으며, 행의 현손 식(植: 안성의 아들)은 광해군(光海君) 때 여러 관직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에 서 물러났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다시 등용되어 대제학(大提學)과 예조(禮曹) 및 이조(吏曹)의 참판(參判)을 역임하였고,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심양(瀋陽)에 잡혀갔다가 돌아와 대사헌(大司憲)과 형․이․예조의 판서(判書)를 지냈다.
■ 무맥(武脈)을 형성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12세).
‘순신(舜臣)은 1545년(인종1) 한양(漢陽) 에서 정(貞:11세) 님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시어 1579년(선조 9)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에 이르렀고, 선무1등공신(宣武一等功臣)으로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봉해졌다.
충성심이 강하고 전략에 뛰어나 용장(勇將)으로서 임진왜란때 출전하는 전투마다 승리하였으며, 적의 기세를 꺾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였고, 곡창지대인 전라도일대를 방어함으로써 군량미 확보에 만전을 기하 는등 위기에 처한 국가를 지키는데 큰공을 세웠다. 무인(武人)으로서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후손들에게 <대장부가 세상에나서 쓰이게되면 국가에 죽 음을 바칠 것이요, 쓰이지 않으면 들에서 밭을 가는것도 족하다 하시고. 권귀에 아첨하여 한때 의 영화를 도적질한다면 나는 심히 부끄러워할 것이다.> (大丈夫生用則效死不用則耕於野足矣 若 取媚權貴李竊)라 유훈(遺訓)을 남겨 대대로 지키도록 당부하였다. 충무공 순신 님의 조카 완(莞)님은 노 량해전(露梁海戰)에서 충무공이 전사하시자 아군의 사기를 위하여 시체를 배안에 숨겨두고 독전 (督戰)하여 대승을 거두시었고, 인조(仁祖)가 즉위하자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오르시어 이 괄(李 适)의 난군을 토평하여 의주부윤(義州府尹)이 되시었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의주(義州)에서 청병(淸兵)과 전투를 하시다가 손가락에 적의 화살을 맞아 더 싸울수 없게되시자, "하늘이 나를 돕지 않는구나"하시며 개탄하시고는 탄약을 쌓은 위에 종제인 신(藎)과 함께 누워 불을 질러 폭사(暴死)하시었다. 순신 님의 5대손으로 1702년(숙종 28) 무과(武科)에 급제하신 봉상(鳳祥) 님은 형조 참판(刑曹參判)․포도대장․훈련대장 등을 역임하시다가 권신(權臣) 이광좌(李光佐)의 미움을 받아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로 좌천되어 영조(英祖)때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때 난군에게 피살되시었다. 장신에 길고 장엄한 수염과 호탕한 음성으로 주위를압도하시였던 봉상 님의 죽음에 어머니 정씨(鄭氏)는 "내 아들이 선조의 유훈에 어김없이 나라를위해 죽었으니 통곡할 필요가없다"하고는 울지를 않았다고 한다.
■ 한성판윤(漢城判尹) 광하(光夏)의 아들 집
영조(英祖)때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실록청 총재관(實錄廳摠裁官)으로 <경종실록(景宗實錄)> 편찬에 참여.
■ 군수(郡守) 선연(善淵)의 아들로 선원에게 입양했던 덕흠(德欽)
윤증(尹拯)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만년에 성력(星曆)․상수(象數)․기예(技藝)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여 명망을 떨쳤다.
■ 영조 때 좌의정(左議政) 은(이조판서 주진의 아들)
왕명(王明)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淸)나라에 가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5천여 권을 구득하고 돌아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를 역임하였으며,
■ 연(演)의 아들 병모(秉模)
순조(純祖)때 영의정(領議政)에 오르시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
■ 한말(韓末)의 춘영(春英)
민비(閔妃)가 시해(弑害)되자 안승우(安承禹) 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단양(丹陽) 등지에서 일본군(日本軍)을 격파했고, 류인석(柳仁錫)의 막하에서 중군(中軍)이 되어 조령(鳥嶺)․달천(達川)․안보(安保) 등지에서 일본 연합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 내금위장(內禁衛將) 민하(敏夏)의 아들 세영(世榮)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을 모집하여 항일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민화(敏華)와 일영(鎰永)도 항일투쟁과 방공전(防共戰)에 혁혁한 훈공을 세우셔 명문 덕수이씨의 전통을 더욱 빛내셨다.
■ 이기진 李箕鎭 [1687~1755]
본관 덕수(德水). 자 군범(君範). 호 목곡(牧谷). 시호 문헌(文憲). 1717년(숙종 43) 진사(進士)가 되고, 그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21년(경종 1) 헌납으로 왕세제(王世弟)에 책봉된 연잉군(延燥君:英祖)에 대해 흉언(兇言)을 퍼뜨린 유봉휘(柳鳳輝)의 처단을 주청하다가 그해 신임사화(辛壬士禍)로 파직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교리(校理)가 되고 이듬해 시독관(侍讀官)으로 사화를 일으킨 소론들에 대한 징토(懲討)를 철저히 할 것을 극간하여 한때 영조를 격노하게 했다. 같은 해 승지(承旨)를 지내고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 때 왕세자 관례(冠禮) 때 봉전문(封箋文)을 빠뜨린 사건으로 파면되었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상경하여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난이 평정된 후 다시 고향에 내려갔다. 1729년 재기용되어 함경도관찰사․형조판서․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744년 홍주목사(洪州牧使)가 되고 이듬해 재차 경기도관찰사․의금부판사를 지냈으며,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749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51년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 때 《한봉도(汗峰圖)》를 지어 올렸고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가 되었다. 문집에 《목곡집(牧谷集)》이 있다.
□ 유적지
■ 덕수이씨 육세팔효정문 德水李氏六世八孝旌門
충북 영동군 양산면 원당리에 있는 덕수이씨 일가의 효행을 기리는 정문.
충북기념물 제109호
8평 목조
1999년 9월 15일 충청북도기념물 제109호로 지정되었다. 1794년(영조 40)에 영조의 령으로 선조(宣祖) 때부터 영조(英祖) 때까지 덕수이씨 일가의 6대에 걸쳐 배출된 6명의 효자과 2명의 효부 2명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6명의 효자는 학수, 탱, 만춘, 채, 복초, 종철이고 2명의 효부는 장씨, 김씨이다.
정문(旌門)이란 조선시대에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집 앞이나 마을 입구에 세웠던 문으로 작설(綽楔)․홍문(紅門)․생정문(生旌門)이라고도 한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에 홑처마 맞배지붕을 올렸는데 벽을 나무 창살로 처리하여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고 좌우 측벽에는 박공과 아랫부분이 일직선인 풍판(風板:비바람을 막기 위해 박공에 이어서 대는 나무판)을 갖추고 있다. 1971년 5월에 보수를 하면서 정문 둘레에 시멘트 벽돌담을 설치했는데 전통적인 목조건물인 정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아쉽다
■ 이의무신도비 李宜茂神道碑
충남 당진군 송산면 도문리에 있는 이의무의 신도비.
소재지 : 충남 당진군 송산면 도문리 산 79-1
1989년 12월 29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313호로 지정되었다. 도문리 능안마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덕수이씨 묘역이 있는데, 그 위쪽에 이의무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비의 두전(頭篆)에는 ꡐ증령의정이공신도명(贈領議政李公神道銘)ꡑ이라고 적혀 있다. 비명의 서(書)는 좌의정 홍언필(洪彦弼)이 지었고, 글씨는 성균진사 신효중(申孝仲)이 썼다.
높이 153㎝, 너비 90㎝, 두께 57㎝의 화강석 농대석에 비신을 올렸다. 이수와 비신이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너비는 90㎝, 두께는 27㎝이다. 이수를 포함한 비신의 높이는 270㎝, 순수한 비신 부분의 높이는 197㎝이다. 바로 옆에는 높이 286㎝, 너비 190㎝, 두께 70㎝ 크기의 화강석 귀부가 놓여 있는데 이것이 원래 이 신도비의 귀부이다. 중간에 마손되어 1851년 12대손 필신(必信)이 지금의 농대석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비신 뒷면에 새겨져 있다. 이 비의 이수에는 쌍용이 다투는 듯한 형상이 정교하고 아름답게 조각되었다.
□ 성세
덕수이씨는 중종~영조대에 이르는 약 300년간 성세를 보였는데, 문인파계와 무인파계의 두 집안으로 갈라진 것이 특색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덕수 이씨(德水李氏)는 남한에 총 10,580가구, 43,5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덕수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
■ 덕수 장씨 (德水張氏)
 시조 : 장순룡(張舜龍)
 시조 장백창(張伯昌, 일명 장순용, 시호는 공숙)은 아랍계[이슬람계] 사람으로 원나라 세조 때 필도치라는 벼슬을 지냈는데, 1275년(고려 충렬왕 1년) 충렬왕비인 제국공주를 배행하여 고려에 왔다가 덕수현에 살면서 금자광록대부, 문하찬성사를 지내고 덕수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덕수현을 식읍으로 하사 받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덕수를 본관으로 하였다.
 [ 대표적 인물 ]
 장유(維) : 조선 인조 때 명신이며 대제학,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이정구, 신흠, 이식과 더불어 조선시대 한문학의 4대가로 일컬어진다.
 장운익(雲翼) : 장유의 아버지. 중국어에 능통하여 주청사로 명나라를 내왕하였다.
 장옥(張玉)
 장정(張珽) :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 1등에 오르고 하원군에 봉해졌다.
19,366명. (1985년)
■덕수김씨 (德水金氏)
 시조 : 김니(金泥)
 덕수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해풍김씨'로 분적한 김숭선(金崇善)의 손자 김니가 조선에 현감을 지내고 덕수에 적착 세거하였으므로 그를 시조로 하고 분관을 덕수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으나, 일설에 의하면 숭선의 8세손 수연을 시조로 하여 계대하는 계통도 있다.
4,385명. (1985년)
020412 성씨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29  `영해박씨   
영해박씨(寧海朴氏)
 
 □ 유래
시조 박제상(朴堤上)은 신라 눌지왕때  충신으로 유명하며 신라 파사왕의 6세손이다.
신라 내물왕 때 이손 신랑주간 등을 지냈고, 418년(눌지왕 1년) 삽량주(경북 양산군) 태수로 있던 박제상은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있던 눌지왕의 첫째 동생 복해(卜海, 또는 보해)를 탈출시켜 귀국했으며 집에도 들르지 않고 다시 일본에 특파되어 볼모로 잡혀있던 눌지왕의 둘째 동생 미사흔(未斯欣, 또는 미해)을 탈출시켜 귀국하게 하였다.
자신은 체포되어 발 가죽을 벗기고 갈대위를 걷게 하고, 쇠를 달구어 그 위에 세우는 등의 고문을 당하며 일본 신하가 될것을 강요 당하였으나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며 거절하고 박다진 목도(木島 : 기시마섬)에서 화형을 당해 죽었다. 지금도 갈대 위가 붉은 것은 박제상 피의 흔적이라고 한다.
박제상이 부인 김씨에게는 알리지 않고 일본으로 떠난 뒤 그 사실을 알고 쫓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자 망덕사(望德寺) 남쪽 모래 위에서 몸부림치며 통곡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은 그 모래를 장사(長沙)라 하였으며,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하여 돌아오려 하자 부인은 다리를 뻗은 채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곳을 벌지지(伐知旨 : 뻗치다의 고유음)라 하였다.
박제상이 돌아오지 않자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두 딸과 치술령(述嶺: 수릿재. 울산, 경주 경계에 있음.)에 올라가 남편을 부르며 통곡을 하다가 죽어서 망부석이 되었다. 이 망부석은 현재도 유명한 망부석이며 사람들이 부인 김씨를 치술신모(수릿재 신모)라고 하여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두 딸 박아기, 박아경 또한 아버지를 부르며 통곡을 하다 죽으니 세 모녀를 "호국삼신여"라 칭하고 치술 신모사를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고 국대부인에 봉했다.
왕이 박제상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대아찬에 추증하고 단양(영해)군에 봉했으며, 박제상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그의 둘째 딸을 미사흔과 결혼시켰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26세손 중시조 박천명(朴天命)이 고려 때 전법사판서를 지냈으며 벽상공신으로 예원(영해)군에 봉해지자 본관을 영해로 하였다.
참고: [삼국유사 1권 내물왕과 김제상 - 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 [일본서기]

□ 영해(寧海)
영해(寧海)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동북부(東北部)에 위치한 땅이름이다.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우시군(于尸郡)을 통일신라(統一新羅) 때 유린군(有隣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초에 예주(禮州)로 하였다가 1259년(고종 46) 덕원소도호부(德原小都護府)로 승격하였다.
그 후 예주로 다시 고쳐지고 1310년에 영해부(寧海府)로 개칭하였으며 1895년에 군(郡)이 되었으나 1913년  영덕군에 통합되어 일부지역은 영해면으로 남아 있다.
영덕군(盈德郡) [야시홀, 야성]
경상북도 여러 군의 하나.
본래 고구려의 야시홀군(也尸忽郡)인데, 신라 때에 야성군(野城郡)으로 고치고, 고려 초에 영덕군으로 고쳤는데 제8대 현종 9년 (1018)에 예주(禮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다시 현령(縣令)으로 고쳤다.
조선 제3대 태종 15년(1415)에 지현사(地縣事)를 두었다가 다시 현령(縣令)으로 고쳐서 읍내(邑內), 동면(東面), 서면(西面), 중남(中南), 외남(外南), 북면(北面)의 5개 면을 관할하다가, 제26대 고종 32년(1895) 지방 관제 개정에 따라 남면과 서면을 새로 설치하여 7개 면이 되었다.
일제 때인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영해군(寧海郡)의 남면, 서면, 묘곡, 읍내, 북초(北初), 북이(北二), 오서(烏西)의 7개 면과 진보군(眞寶郡) 동면의 낙평동(洛坪洞)과 청하군(淸河郡) 죽북면(竹北面)의 하옥리 일부를 병합하여, 영덕, 오보(烏保), 지품, 달산, 남정, 축산, 영해, 병곡, 창수의 9개면, 116 동으로 개편 관할하였는데, 1934년 4월 1일 행정 구역 변경에 의하여 영덕면을 갈라서 소월, 오포, 상직, 하직, 화전, 금호, 강구, 삼사의 8개 리와 오보면의 하저, 금진의 2개 리로 강구면을 신설하고, 영덕면의 삼화, 옥류, 오천의 3개 동은 지품면에, 남호, 남정, 중화, 우곡의 4개 동은 남정면에 떼어 붙이는 동시에, 오보면의 석동, 노물, 매정, 오보, 대란, 삼계, 창포, 태부의 8개 리를 영덕면에 갈라 붙여서 오보면을 없애서 행정에 편리하게 하였음. 동쪽은 동해바다, 서쪽은 청송군과 영양군, 남쪽은 영일군, 북쪽은 강원도 울진군에 닿음. 지품면의 곳곳에서 나는 한지는 "영덕 한지"라 하며, 강구면의 축산항에서 잡히는 오징어, 명태, 해초와 특히 큰 게는 "영덕 대게"라 하여 크고 맛 좋기로 유명하며, 또 영덕을 중심으로 흐르는 오십천에서 나는 은어는 흰 테를 두르고 있는데, 그 맛이 매우 좋아 이조 때에 일등 전상품이었다 함.
□ 대표적 인물
박경(經), 박원계(元桂), 박자청(子靑) 등이 있다.
■ 박원계(朴元桂)
19세에 문과에 급제,전주목의 사록 겸 장서기가 되고 뒤에 권지전교 교감을 거쳐 예문관 검열로 충선왕이 연경에 있을 때 충실히 모셔 총애를 받았다.
1335년(충숙왕 복위4) 감찰장령이 되어 기강을 바로잡고,집의에 승진,뒤에 강릉도 존무사가 되었다가 전법판서를 역임했다.
■ 박자청(子靑)
창경궁과 이웃해 있는 창덕궁은 1405년 태종이 개성에서 다시 한양으로 돌아올 때 이궁으로 지은 궁궐이다. 한때 정궁인 경복궁 동쪽에 있다 하여 창경궁과 함께 동궐로 불러졌다.
당시 박자청이라는 내시 출신의 무관이 공사의 총감독을 맡았고, 윤신달과 이양달이 풍수를 맡았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박자청은 경복궁의 경회루 창건 때에도 총감독을 맡은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창덕궁 인정전은 태종 5년 1405년에 창덕궁이 창건될 때 처음 지어졌으며 태종 18년에 더 큰 규모로 고쳐 지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광해군 때 중건되었다.
1803년 순조 때 창덕궁 내전에서 발화한 화재로 인해 다시 불타버렸고 그 이듬해 새로 지었는데 지금의 건물은 몇 차계의 보수공사가 있기는 했으나 순조 때의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건물은 조선 말의 것이지만 돌로 만들어진 기단부의 월대만은 조선초기의 역사를 간직한 유물로 그 당시 궁궐공사의 총감독 박자청의 솜씨라고 한다.
박자청은 당대 토목건축의 일인자로 모든 궁궐공사에 설계와 감역을 도맡아 했던 인물이다.
경복궁 안의 경회루(국보 제224호)는 태종의 명에 의해 공조판서 박자청이 당시 기술로는 난 공사임에도 불구하고 이루어낸 인공연못 위의 대규모 누각이다.
□ 기타
21,299명이 있다.(1985년)
‘영해’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에는 김(金), 동(董), 박(朴), 신(申), 이(李)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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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329 성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27  `안동김씨   
안동김씨(安東金氏)

□ 선(先)안동김씨와 우(後)안동김씨
안동김씨에는 신라김씨의 시조인 태보공(諱 閼智)의 후손으로서, 본관명은 같으나 그 시조를 달리하는 두 종중(宗中)이 있다. 선(先) 안동김씨와 후(後)안동김씨이다.
안동김씨라 하면 일찍이 선 안동김씨만을 일컬어 왔다. 그런데 ‘후(後) 안동김씨(신안동김씨)’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선 안동김씨(구안동김씨)’란 말을 쓴다.
□ 안동김씨 시조
■ <三國遺事>(一然 著) 기록
永平3年 庚申(一云 中元 六年. 誤矣. 中元盡二年而已), 八月四日, 弧公夜行月城西里, 見大光明於始林中(一作鳩林), 有紫雲從天垂地, 雲中有黃金櫃, 掛於樹枝, 光自櫃出, 亦有白鷄鳴於樹下.以狀聞於王, 駕幸其林, 開掛有童男, 臥而卽起, 如赫居世之故事, 故因其言, 以閼智名之. 閼智卽鄕言小兒之稱也. 抱載還闕, 鳥獸相隨, 喜躍 足倉足倉 .王擇吉日, 冊位太子. 後讓於婆娑不卽王位, 因金櫃而出, 乃姓金氏, 閼智生熱漢, 漢生阿都, 都生首留, 留生郁部, 部生俱道(一作仇刀), 道生未鄒, 鄒卽王位, 新羅金氏自閼智始.
■ 해석
영평3년(서기 60, 탈해왕 4년) 경신(혹은 중원 6년이라고 하나 잘못이다. 중원은 2년뿐) 8월 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月城)의 서리(西里)를 걷는데, 큰 빛이 시림(始林-혹은 鳩林) 속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자주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뻗쳐 있었고, 그 구름 속에는 한 황금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빛은 바로 그 궤로부터 나오고 있던 것이었고, 그 나무 밑에서는 흰닭이 울고 있었다.
이 모습을 왕(석탈해왕)께 아뢰자 왕은 친히 그 숲으로 행차, 궤를 열어 보았더니 그 속에서는 어린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누워 있다가는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의 고사와 같았는데(혁거세가 알지라고 한) 왕은 그 말로 인하여 '알지'라고 이름하였다. 알지는 곧 우리말로 '아기(小兒)'를 일컫는다. 왕은 이 사내아이를 안고 대궐로 들어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라와 뛰놀고 춤추었다.
왕은 길일을 택하여 세자로 책봉했으나 알지는 뒤에 파사왕에게 사양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에서 나와 성을 김(金)씨라 했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仇道 혹은 仇刀라 함)를 낳고, 구도는 미추(未鄒)를 낳았는데, 미추가 왕위에 올랐으니 신라의 김씨는 알지에서 시작되었다.
■ 신라김씨 시조 태보공(太輔公. 大輔公) 위(諱) 알지(閼智)
시조인 태보공(휘 알지)은 서기 60년(신라 탈해왕 4년) 8월 4일, 신라의 서울인 서라벌(금성) 서쪽 계림(鷄林, 始林)의 숲속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금궤(金櫃)에서 태어났다.
탈해왕은 ‘하늘이 준 아들’이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씨를 김씨로 사성(賜姓)하였다.
금궤 속에서 나온 동남(童男)이 마치 박혁거세(朴赫居世)의 고사와 같아(혁거세가 ‘알지’라고 한) 그 말로 인하여 '알지'라 했다. 이 '알지'는 향찰(鄕札)로 표기한 것으로 '소아(小兒), 아이, 아기'를 일컫는다. 향찰은 순 우리말을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표기하던 신라시대의 문자였다.
당시 탈해왕(脫解王)은 '알지'를 태자로 책봉했으나, 후에 알지는 이를 사양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으며 그 6대손인 '미추(未鄒)'가 왕위에 올랐다.
'알지'를 신라김씨(안동김씨 포함)의 시조로 모신다.
안동김씨는 평장사(平章使) 휘 숙승(諱 叔承-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손자)을 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경순왕의 8대손으로 고려조의 명장이신 충열공(忠烈公) 휘(諱)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충열공은 고려조에 삼별초를 평정하고 왜적을 섬멸하여 정난 정국공신이 되고, 벼슬이 도원수에 이른 뒤 상락군 개국공에 봉해진 사람이다.
선 안동김씨는 신라김씨의 시조이신 태보공(太輔公) 휘 알지(諱 閼智)의 후손 중 한 성씨이다. 김해김씨(金海金氏)를 제외한 대부분의 김씨는 바로 태보공의 후손이다.
생년 및 몰년 미상.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김은열(金殷說)의 둘째 아들. 고려조 때 공부시랑(工部侍郞), 평장사(平章事) 역임. 안동김씨(선)의 시조로 모신다.
후 안동김씨는 고려 태사공(泰師公-金宣平)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태사공은 신라 말에 고창(古昌-안동의 옛이름)의 성주였는데 신라가 후삼국으로 나뉘어 각축을 벌이고 있을 때 후백제의 견훤군을 격파하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귀부하여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고, 벼슬이 태광태사(泰匡泰師)에 이르렀던 사람이다. 이리하여 그 후손들이 본관을 안동으로 하였으며, 조선 중기에 도정(都正)을 지낸 김극효(金克孝)를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그밖에 지절파, 원수파, 열파 등 3파가 있다.
안동김씨는 신라 왕손이며 고려왕의 외손(外孫)으로서 고려 500년간 대대로 공경장상(公卿將相)이 끊이지 않았다. 고려가 망하자 모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켜 8도에 흩어져 은거하였고, 그 후 형성된 세거지(世居地)를 중심으로 후손들이 번성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 안동김씨 중시조 충렬공(忠烈公) 휘 방경(方慶) 
충렬공(忠烈公). 1212년(강종1)---1300년(충열왕26).
자(字)는 본연(本然), 시호는 충렬(忠烈). 신라 경순왕의 후손, 한림학사 효인(孝印)의 아들. 고종 때 음보로 16세에 산원(散員)이 되어 식목녹사(式目錄事)를 겸하고, 감찰어사를 거쳐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에 이르렀다. 이 때 몽고병이 침입하여 주민들과 함께 위도(葦島)에 들어가 저수지를 만들고 제방을 쌓는 등 농토를 개간, 농사를 짓게 했다.
1263년(원종 3)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승진하였고, 뒤에 상장군으로서 남경 유수로 좌천되었으나, 전에 서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서북 여러 성에서 진정이 있어 다시 서북면 병마사가 되었다.
형부상서, 추밀원 부사를 거쳐 1269년(원종 10)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을 때,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猖)을 세우자 원나라 황제 세조가 보낸 맹격도의 2천군사와 함께 임연을 치려고 동경에 이르렀으나, 왕이 복위된 것을 알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갔다.
1270년에 장군 배중손(裵仲孫) 등이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삼별초(三別抄)를 이끌어 난을 일으켜 진도로 들어가 연안을 침범하자, 이듬해 몽고의 장군 흔도(炘都)와 홍다구(洪茶丘)등과 함께 진도를 함락시키고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적장 김통정(金通精) 등이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탐라에 들어가서 성곽을 쌓고 항거하자, 1273년(원종 14)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서 원나라 장군 흔도, 홍다구(洪茶丘)와 함께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삼별초를 쳐서 이를 완전히 평정했다.
그 후 시중(侍中)이 되고 원나라에 들어가 세조로부터 금안등을 하사받고, 돌아와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작위를 더 받았다.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원나라에서 합포(合浦:馬山)에 정동행성을 두고, 일본을 정벌할 때 중군장으로 출정, 2만 5천명의 여원 연합군과 함께 쓰시마섬(對馬島)를 친 다음 본토로 향하는 도중 풍랑으로 패하고 돌아왔다.
1278년에는 앞의 일본 정벌 중에 좌군수 김신이 익사할 때 이를 구하지 않았던 부사 위득유(韋得濡)를 파면하고, 진도의 삼별초를 공략할 때 전투를 소흘히 하고 재산을 약탈한 낭장 노진의(盧進義)의 가산을 몰수케 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이들로부터 '국왕과 원나라 공주 및 다루가치를 제거하고 강도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무고를 받았다. 이에 흔도, 홍다구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고 나서 청도로 귀양갔다가 충렬왕의 변호로 석방되었다.
1281년(충렬왕 7) 원나라가 다시 일본 정벌을 할 때 고려군 도원수로서 종군, 일본 이끼조를 거쳐 하까다에 이르러 승리를 거두었으나 태풍과 적의 기습을 당하여 참패하고 돌아왔다.
그 후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에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 判典理司事 世子師)로 치사(致仕)하고. 상락군 개국공이 되었다.(上洛郡開國公-'郡'은 고려 五等爵의 하나. 종2품으로 국공(國公)의 아래. 식읍(食邑) 이천호(二千戶)를 봉하는데, 公은 식읍(食邑) 일천호(一千戶), 실봉(實封) 삼백호(三百戶)를 받음).
충선왕 때 공은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정일품)으로 추증됐다. 89세에 별세, 안동에 묻혔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안동김씨에서는 이 김방경을 중시조로 삼고 세수(世數)를 정한다.
■ 신라김씨의 분관(分貫) 및 개성(改姓)
 미추가 262년 신라 13대 미추왕(味鄒王)에 올라서 신라의 김씨 왕조가 시작되었는데, 신라는 총 56명의 왕 중에 김씨가 38명이다.
이 신라김씨는 조선시대까지 총 600여개의 본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1985년 경제 기획원의 인구조사에서는 약 270여개 본관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신라 29대 무열왕(武烈王)의 5세손인 김주원(金周元)을 시조(始祖)로 하는 강릉김씨,
신라 45대 신무왕(神武王)의 셋째아들인 김흥광(金興光)을 시조(始祖)로 하는 광산김씨,
신무왕(神武王)의 후손인 김영이(金令胎)를 시조(始祖)로 하는 영산(永山, 영동)김씨,
문성왕(文聖王)의 8세손 김선궁(金宣弓)을 시조(始祖)로 하는 선산(일선)김씨,
문성왕(文聖王)의 5세손 김락(金樂)을 시조(始祖)로 하는 당악(唐岳)김씨
등을 제외한 대부분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손들이다.
경순왕(敬順王: 김알지의 28세손)은 후백제 견훤이 경애왕을 죽게 한 뒤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나, 935년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냈다.
경순왕은 아홉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첫아들 김일(鎰)과 김굉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아들은 낙랑공주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 중 마의태자(麻衣太子)로 잘 알려진 김일은 망국의 한을 품고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으로 입산(入山)하였다.
김일(鎰)은 부안김씨, 
둘째 김굉의 아들 김운발(金雲發)은 나주김씨,
셋째 김명종(金鳴鐘)은 경주김씨의 영분공파,
넷째 김은열(金殷說)은 경주김씨 은열공파,
다섯째 김석(金錫)은 의성김씨,
여섯째 김건, 일곱째 김선(金鐥)은 언양김씨,
여덟째 김추(金錘)의 아들(김위옹)은 삼척김씨,
아홉째 김덕지(金德摯)는 울산김씨 등이 되었다.
이 중에서도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고, 둘째아들 김숙승(金叔承)은 안동김씨로, 5세손 김봉기(鳳麒)의 넷째아들은 김녕김씨로 분관했다.
김방경의 넷째아들은 대구김씨로,
7세손은 도강김씨로,
13세손은 밀양김씨로,
5세손은 서흥김씨로,
그 후손 중 안악김씨, 안산김씨가 나왔고,
14세손은 야성(영덕)김씨로 분관하였다.
김녕에서 분관하여 양근김씨, 9세손에서 양주김씨, 후손에서 연주김씨, 4세손에서 영광김씨, 후손에서 영산(靈山)김씨, 15세손에서 월성김씨, 8세손에서 전주김씨, 첫째아들 김정구의 11세손에서 청풍김씨 등으로 분관하였다.
기타 첫아들 김일(鎰) 후손은 통천김씨, 여덟째아들 김추의 아들 김우(金佑)는 희천김씨, 여섯째 아들 김건의 후손은 영월김씨, 홍주김씨 등으로 분관하였다.
■ 신라김씨에서 다른 성(他姓)으로 갈려간 성씨
신라김씨에서 다른 성(他姓)으로 갈려간 성씨는
김행(幸)이 안동권씨(權氏)로,
김순식(順式)은 강릉왕씨(王氏)로,
김궁예(弓裔)의 후손 김순백(珣白)은 광산이씨(李氏)로,
세광은 감천문씨(文氏),
김은열(殷說)의 13세손 김영규(永奎)는 수성최씨(崔氏) 등으로 각각 개성(改姓)하였다.
□ 인물
■ 선 안동
조선시대에는 태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익원공(翼元公) 휘 사형(諱 士衡), 시민(時敏), 응하(應河) 두 분의 충무공(忠武公), 4분의 정승(政丞-士衡,石質,壽童,自點), 5분의 호당(湖堂-讀書堂의 고친 이름. 젊고 재주 있는 문신으로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쉬면서 공부하던 곳. 澍, 弘度, 瞻, 緻,), 6분의 청백리(淸白吏-石武, 目卒, 斗南, 時讓, 延壽, 卞光), 5분의 장신(將臣) 등이 배출되었고 수많은 고관대작(高官大爵)과 충신열사(忠臣烈士)가 끊이지 않아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일컬었다.
대표적인 주요 역사적 인물을 개략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김선(小宣)  : 김방경의 장자.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를 지냈다.
․김흔(小斤) : 김방경의 차자. 찬성사를 지냈다.
․김순(恂): 김방경의 三子. 삼사판사(三司判事)를 지냈다.
․김윤(小侖): 김방경의 四子. 밀직사지사(密直司知事)를 지냈다.
․김승용(承用) : 김선의 아들. 대제학을 지냈다.
․김승택(承澤) : 평장사를 지냈다.
․김영돈(永暾) : 고려조에 좌정승역임. 조적의 난 평정. 1등공신. 상락부원군이 되었다.
․김영후(永煦) : 우정승을 지냄. 후손이 조선 전기에 세력을 떨쳐 사실상 '구안동'의 주축이 되었다.
․김질(石質) : 좌의정을 지냈다.
․김시민(時敏) : 진주목사로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을 이루었다. 영의정에 추증. 시호는 충무공.
․김수동(壽童) : 영의정을 지냈다.
․김찬(瓚) : 이조판서를 지냈다.
․김자점(自點) : 인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김제갑(悌甲) : 원주목사로 임진왜란 때 순절했다.
․김시양(時讓) : 병조판서를 지내고 판중추부사를 역임.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김휘(徽) : 김시양의 아들. 이조판서를 지냈다.
․김득신(得臣) : 숙종 때의 유명한 시인이며 참판을 지냈다.
․김응하(應河) : 무장(武將)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응해(應海) : 김응하의 동생. 훈련대장을 지냈다.
․김중기(重器) : 훈련대장을 지냈다.
․김구(九) : 백범(白凡). 독립운동가, 정치가. 3.1운동후 중국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의 경무국장과 내무총장을 지냈으며, 1928년에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다. 1940년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었고, 해방이 되자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하여 독립당 당수 등으로 있다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 후 안동김씨(신 안동김씨)
조선 중기에 와서 성씨 운(姓氏 運)이 크게 일었는데, 인조 때 도정공의 아들로서 우의정을 지내고 대문장가인 선원 김상용과 좌의정을 지낸 청음 김상헌 형제가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신안동김씨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300년 동안에 15명의 정승과 6명의 대제학, 1명의 호당, 1명의 청백리, 9명의 장신(將臣), 그리고 3명의 왕비를 배출하였다.
순조 이후 철종까지 약 60년 동안은 이 장동김씨 일문이 정권을 좌우하는 세도정치 가문으로서 대명문(大名門)을 이루었다.
★군) 김정호(金正浩) 고종4(정묘, 1867) 식년시(式年試) 甲科1
★서) 김홍도(金弘度) 중원(重遠) 남봉(南峯) 명종3(무신, 1548) 별시(別試) 甲科1


■ 구안동과 신안동의 과거합격 비교
조선 인조 이전까지는 안동김씨 문과합격자의 대다수가 구안동이나 인조 때 영상 김자점이 역모로 죽음을 당한 후 구안동의 세가 위축되고, 또한 순조 이후 신안동이 세도정치를 하면서부터는 문과합격자 거의가 신안동임.
왕대별로 안동김씨 급제자중 구안동김씨 /신안동김씨 급제자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태조 1/1 (구안동김씨/안동김씨) 정종 0/0   태종 4/5  세종 3/3  문종 1/1  단종 2/2  세조 2/3  예종 0/0  성종 6/8  연산 4/6  중종 11/13 인종 0/0   명종 9/10 선조 15/20  광해 11/12  인조 10/17  효종 0/2  현종 3/5  숙종 11/24  경종 5/8   영조 18/43  정조 1/1 순조 2/29  헌종 7/30  철종 0/22  고종 2/45  순종 0/0 
선 안동김씨(先 安東金氏)와 후 안동김씨(後 安東金氏)는 이처럼 그 시조를 달리하기 때문에 서로 일가(一家)는 아니며, 자고로 서로 통혼을 하였고 지금도 합법적으로 혼인할 수 있다.
□ 성세
1985년 경제기획원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남한에 살고있는 안동김씨(구)는 총 95,735가구에 398,240명이다. (안동김씨 대종회 잠정 추정인원---2000. 12. 현재 약 60만명)
□ 세도가 안동김씨의 처음 거주지는 청운동
노론 벽파가 時派에 대해 정치적 보복을 하는 와중에 노론 가문의 김조순(金祖淳)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자신의 딸을 순조의 妃(비)로 들이는 데 성공, 이후 63년간의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개막시킨다. 더욱이 1804년 정순왕후가 사망하자 김조순은 일족 지배의 정치 구도를 만들었다. 그의 권력은 그의 가문에서 계속 왕비를 들임으로써 그의 아들과 손자대로 이어졌다.
김조순의 집은 紫霞洞(자하동:지금의 청운동)에 있었다. 자하동은 경복궁의 서북쪽 창의문 아래 북악과 인왕산 사이다. 자하동을 줄여서 ‘자동’이라고도 했는데, 급하게 부르면 壯洞(장동)으로 들렸다. 이런 까닭으로 세상에서 안동김씨를 장동김씨 또는 壯金(장김)라고 불렀다. 壯金이란 호칭은 김조순이 집을 校洞(교동)으로 옮긴 후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교동에는 김조순 사후에도 그의 아들 金左根(김좌근)과 손자 金炳冀(김병기)가 살았다.
순조․헌종․철종은 모두 壯金의 세도정치 에 휘둘리는 허수아비 임금이었다. 더욱이 철종은 부모와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농사를 짓다가 壯金에 의해 갑자기 서울로 불려 올라와 창덕궁 인정전에서 즉위했다. 壯金의 부패는 극에 달했다.
1963년 음력 12월 말 ‘강화도령’ 철종이 후사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새로 왕위에 오른 이가 흥선군 李昰應(이하응)의 둘째 아들 命福(명복), 즉 高宗(고종)이다. 13세의 명복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순전히 아버지 흥선군이 翼宗(익종: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21세에 요절하여 추존됨)의 비인 조(趙)대비과 밀의하여 상호 동맹관계를 굳혀 놓았기 때문이다.
왕실의 관례상 임금이 후사 없이 사망할 경우에 후계왕 지명권은 왕실의 최고 어른에게 있었다. 이 시점에 조대비는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었다. 조대비는 장김(壯金.안동김씨)에 한이 많이 맺혀 있었다. 야망을 감추고 보신을 위해 파락호 행세를 함으로써 壯金에게 ‘상갓집 개’로 취급당했던 흥선군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고종이 즉위하자 흥선군을 대원군(임금의 아버지)으로 높였다. 고종이 태어난 潛邸(잠저)는 옛 書雲觀(서운관:觀象監)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雲峴宮(운현궁)’이라 불렸다. 지금의 종로구 운니동 114-10번지, 덕성여자대학 옆이다.
흥선대원군의 저택으로 사용되던 운현궁은 크게 증축되었다. 한때 대원군은 운현궁과 창덕궁 사이에 특별한 통용문을 만들어서 그만이 이 곳을 통해 입궐했다.
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하려 들자 세도가 壯金의 일원인 김흥근(金興根)은 조정에서 드러내 놓고 반대했다.
“옛날부터 임금의 아버지는 정치에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 부귀나 누리게 해야 합니다”
대원군은 이런 김흥근을 장김 가운데서도 가장 미워했다. 김흥근의 별장이 북문 밖 삼계동(지금의 종로구 付岩洞 자하문 터널 윗 동네)에 있었는데, 서울에서 경치가 제일 좋았다. 대원군은 그 별장을 사려고 했지만, 김흥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팔 수 없으면 하루만이라도 거기서 놀 수 있도록 빌려 주시오”
원래 정자는 누가 빌어서 놀기를 청하면 빌려 주는 것이 서울의 풍습이었다. 이쯤 되자 김흥근은 마지못해 빌려 주었다.
김흥근에게 정자를 빈 대원군은 그 정자 구경을 하자면서 고종을 모시고 갔다. 일이 이렇게 되자 김흥근은 그 정자를 다시는 쓸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임금이 노닐던 곳은 신하가 놀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는 삼계동에 가지 않아 마침내 대원군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
대원군의 아호를 따서 명명한 별장 石坡亭(석파정)의 사랑 채는 원래 자리에서 가까운 세검정의 궁중 요리점 石坡廊(석파랑:종로구 홍지동 125번 지)에 이축되어 있다.
대권을 장악한 대원군은 壯金의 세력을 삭감하고 부정부패에 철추를 내렸다. 또한 안으로는 유교적 민본정치의 부흥과 부국강병을 추구하고, 밖으로는 열강의 도전과 침략 을 배격하는 鎖國攘夷(쇄국양이) 정책을 강행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정책이 결실을 맺기 전에 서구 세력의 파도가 먼저 밀어닥쳤다. 러시아는 수차례에 걸쳐 두만강을 넘어와 통상을 강요했다. 대원군은 천주교도를 통해 프랑스․영국과 3국동맹을 체결,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비밀교섭을 추진했다. 당시 조선에는 베르뇌 등 프랑스 신부 12 명이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고, 신도수가 2 만여 명에 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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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329 성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27  `밀양박씨   
밀양박씨(密陽朴氏)

□ 유래
신라 경명왕(박혁거세의 29세손)의 첫째 아들 박언침(밀성대군)이 밀성(밀양)대군에 봉해진 후 그 후손들이 박언침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다.
밀양 박씨는 모든 박씨 가운데 종가이고, 밀양 박씨에서 10여 개의 본관으로 나뉘고, 밀양 박씨 내에서도 여러 개로 분파되었다. 이들은 또 여러 파로 다시 나뉘어져서 전체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밀양 박씨는 본관별 인구에서 김해(가락) 김씨 다음으로 인구가 많다.
□ 시조 혁거세
박씨의 시조인 혁거세는 신라의 시조로 13살에 왕위에 올랐는데, 이 때는 '거서간'이라 칭했다.
한편, 서라벌엔 많은 백성들이 모여 살았는데 서라벌 땅은 넓은 들 한 가운데로는 알천이 흐르는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이었다. 또한, 서라벌엔 양산촌(알천에 위치함) 고허촌(돌산) 진지촌(취산) 대수촌(무산) 가리촌(금산) 고야촌(명활산)등 6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이것을 '진한의 6부'라고 한다.
이들 여섯 마을에서는 각각 촌장을 뽑았으며, 촌장은 그 마을을 다스렸다.  여섯 마을의 촌장은 양산촌의 알평, 고허촌의 소벌도리(蘇伐都利) , 진지촌의 지백호, 대수촌의 구례마, 가리촌의 지타, 고야촌의 호진 등이다.
신라가 생기기 전에 여섯개의 마을(6부)에 촌장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1. 이(李)씨 조상인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의 알평(謁平).
2. 최(崔)씨 조상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 - 삼국유사에는 정씨의 조상으로 되어있으며 진주소(蘇)씨도 소벌도리를 시조로하고 있다.
3. 손(孫)씨 조상인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의 구례마(俱禮馬).
4. 정(鄭)씨 조상인 취산 진지촌( 山 珍支村)의 지백호(智伯虎).(삼국유사에는 최씨의 조상으로 되어있다)
5. 배(裵)씨 조상인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의 지타(只他).
6. 설(薛)씨 조상인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의 호진(虎珍).
기원전 69년, 알천의 언덕위에 모여서 여섯 촌장들이 6부족의 단일 지도자를 뽑는 회의를 하였다. 고허촌의 소벌도리가 주관한 이 회의 중에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촌의 ‘나정(蘿井)’ 우물 옆 숲 하늘에서 찬란한 빛이 내리뻗쳤다. 빛이 내리쬐는 곳엔 흰 말 한필이 꿇어앉아 하늘을 향해 절을 하고는 큰 울음 소리를 내며 하늘로 올라갔고, 말이 있던 자리엔 박같이 생긴 큰 알이 한 개가 놓여져 있었다.
알에 손을 대자 껍질이 깨지며, 그 속에서 아주 잘 생긴 사내아이가 나왔다. 여섯 촌장들은 아기를 꺼내어 몸을 깨끗이 씻었다. 아기의 몸에서는 향기와 광채가 났다. 아기는 소벌도리에 의해 길러졌으다. 그리고, 박처럼 큰 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은 ‘박’이라 하였고, 이름은 나라를 밝게 비추어 준다고 하여 '불구내'라고 하였다. (이름을 '혁거세'로 표기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혁'은 빛난다는 뜻이며, '거세'는 세상에 있다는 뜻이다. )
혁거세가 세상에 태어난 무렵에 양산 마을(사량리)의 알영이라는 우물 가에 닭처럼 생긴 용이 구름을 타고 내려왔다. 용의 왼쪽 옆구리에는 여자 아기가 끼어 있었다. 어느 할머니가 달려가서 그 아기를 받아다 키웠다. 그런데, 이 여자 아기는 입술이 닭의 부리처럼 쑥 나와 있었다. 할머니는 여자 아기를 안고 북쪽에 있는 샘을 찾아가 그 입을 씻어 주었다. 그러자 아기의 입술이 들어가서 아주 예쁘게 되었다. 할머니는 이 여자 아기의 이름을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閼英)'이라 지어 주었다.
혁거세는 13살이던 기원 전 57년에 왕으로 봉해졌고, 역시 13살이던 알영을 왕비로 삼았다. 이 때, 신라에는 왕의 제도가 없었다. 박혁거세는 '거서간'으로서 서라벌을 다스리게 되었다.
박혁거세가 다스리기 시작한 서라벌에는 해마다 풍년이 들었고, 모든 것이 풍족하여 백성들은 태평 성대를 노래하였다. 왕이 즉위한 지 5년째 되는 해에 왕비를 맞았다.
박혁거세는 61년 동안 왕의 자리에 있었다. 이 때부터 신라 왕실의 56왕은 박(朴), 석(昔), 김(金)의 3성에 의하여 교체 반복되었는데, 그 중에서 박씨 왕은 시조 혁거세를 비롯하여 모두 10명이다.
□ 계파와 본관
박씨는 다른 씨족과는 달리 역대 세계가 비교적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박씨의 세계는 박혁거세의 증손인 박씨의 세계는 신라 5대 파사왕(婆娑王)과 신라 7대 일성왕(逸聖王)에서 갈라졌는데, 파사왕계는 뒤에 영해, 면천, 강릉 등으로 분관했고, 비안, 우봉(牛峰), 이산(尼山), 해주(海州) 등도 파사왕의 후손이라 한다.
일성왕계는 그의 25대손인 경명왕(신라 54대)과 경애왕(신라 55대) 대에서 다시 갈라졌다.
경명왕(景明王)는 다시 아들 9형제에서
- 첫째아들 박언침의 밀성대군파(密城大君派) : 밀양, 반남, 진원 박씨
- 둘째아들 박언성의 고양대군파(高陽大君派) : 고령 박씨
- 셋째아들 박언신의 속함대군파(速咸大君派) : 함양, 삼척 박씨 등
- 넷째아들 박언립의 죽성대군파(竹城大君派) : 죽산, 음성, 고성 박씨
- 다섯째 아들 박언창의 사벌대군파(沙伐大君派) : 상주, 충주 박씨
- 여섯째 아들 박언화의 완산대군파(完山大君派) : 전주, 무안 박씨
- 일곱째 아들 박언지의 강남대군파(江南大君派) : 순천, 춘천 박씨 등
- 여덟째 아들 박언의의 월성대군파(月城大君派) : 경주 박씨의 8대군파와
- 아홉째 아들 박교순(朴交舜)의 국상공파(國相公派) : 울산 박씨로 분파되었다.
한편 경애왕(景哀王)계는 계림대군파(鷄林大君派)를 이루었다.
밀양, 반남, 고령, 함양, 죽산, 순천, 무안, 충주박씨를 ꡐ8박ꡑ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 8본이 역사상 많은 인물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다른 씨족과는 달리 이처럼 역대 세계가 비교적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밀성대군파의 밀양박씨가 주류를 이루어 박씨 인구의 70~80%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계보도 상당히 복잡하다.
밀양박씨의 세계는
밀성대군의 7대손인 언부(彦孚:고려 문종 때 문하시중)를 중시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를 비롯하여
도평의사사사공파(都評議使司使公派), 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판도공파(版圖公派), 좌윤공파(左尹公派) 등으로 대별되고, 각 파는 아래대로 내려오면서 또 여러 파로 분파된다.
가장 규모가 큰 문하시중공파는 종파인 은산공파(銀山公派:永均), 행산군파(杏山君派:世均), 좌상공파(左相公派:尙禮), 규정공파(糾正公派:鉉), 사문진사공파(四門進士公派:元), 밀성군파(密城君派:陟) 등으로 갈라지고, 이들은 또 여러 파로 나누어진다.
이 중에서 규정공파가 밀양박씨의 분파 중 가장 후손이 번창하다.
또 규정공파에서 나누어진 파 중에서 특히 낙촌공파(駱村公派:忠元), 강수문도공파(江戒文度公派: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 성세
박씨는 옛 문헌에 314본관이 있었지만, 현재는 127개의 본관이 있으며 이 중 46개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의 대한 유래는 알 수가 없다.
시조 또는 중시조가 밝혀진 것은 70본 내외이며, 그 중 주요 본관은 밀양(密陽), 반남(潘南), 죽산(竹山), 함양(咸陽), 순천(順天), 고령(高靈), 무안(務安), 충주(忠州), 상주(尙州), 창원(昌原), 음성(陰城), 영해(寧海), 영암(靈巖), 진원(珍原), 고성(固城), 울산(蔚山), 운봉(雲峰), 춘천(春川), 비안(比安), 강릉(江陵), 월성(月城), 태인(泰仁), 면천(沔川), 삼척(三陟), 문의(文義), 장성(長城) 등이다.
박씨는 김씨, 이씨와 함께 한국의 3대성의 하나이며, 1960년 국세조사에 36만 7271가구에 인구 211만 2076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3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81만 5151 가구로 전국 가구 구성비 8.5%로 순위는 274성 중 역시 제3위였다.
총 127개의 본관과 3,435,640명이 있다.(1985년)
박씨는 여러 본관 중 단 1본도 외래 귀화족이 없다고 하며, 모든 박씨는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끼리는 되도록 혼인을 피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 대표적 인물
밀양박씨는 조선에서 문과급제자 261명, 상신(相臣) 1명, 대제학(大提學) 2명, 청백리(淸白吏) 2명을 배출하였다.

밀양박씨의 대표적 인물을 열거하면
규정공파에서 강생(剛生), 심문(審問), 중손(仲孫), 건(楗), 훈, 충원(忠元), 계현(啓賢), 승종(承宗), 영(英), 성원(聖源) 등이 있고,
사문진사공파에서 의중(宜中), 거겸(居謙), 종남(宗男)과 영신(榮臣) 부자, 연(堧), 열(說)이 있으며,
밀성군파에서 신규(信圭), 이서(彛敍) 등이 있다.
이 인물 중에서 충원은 명종 때 대제학을 지냈고, 승종은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인조반정 후 자결하였으며, 열은 중종 때, 신규는 숙종 때의 청백리이다. 이 밖에 밀양박씨의 두드러진 인물로서 실학(實學)의 대가 제가(齊家)가 있다.
- 문하시중공파 : 8세손 박언부, 은산공파(박영균), 행산군파(박세균), 좌상공파(박상례), 규정공파(16세 박현), 사문진사공파(10세 박원), 밀성군파(13세 박척)로 다시 나뉜다.
- 도평의사사사공파 : 8세손 박언상
- 좌복야공파 : 8세손 박언인
- 밀직부사공파 : 8세손 박양언
- 판도공파 : 8세손 박천익
- 좌윤공파 : 8세손 박을재
- 동정공파 : 13세손 박원광
- 밀직부원군파 : 15세손 박중미
- 정국공파 : 15세손 박위
- 규정공파에서 박강생(剛生), 박심문(審問), 박중손(仲孫), 박건(楗), 박훈, 박충원(忠元), 박계현(啓賢), 박승종(承宗), 영(英), 박성원(聖源) 등이 있고,
- 사문진사공파에서 박의중(宜中), 박거겸(居謙), 박종남(宗男)과 박영신(榮臣) 부자, 박연(堧), 박열(說)이 있으며,
밀성군파에서 박신규(信圭), 박이서(彛敍) 등이 있다.
이 밖에 실학의 대가 박제가(齊家)가 있다.
밀양박씨는 조선에서 문과급제자 261명, 상신 1명, 대제학 2명, 청백리 2명을 배출하였다.
■ 박팽년
본관이 순천(順天)으로 한석당(閑碩堂) 중림(仲林)의 아들이다. 그가 살았던 동구 가양동(더퍼리)에는 유허비가 보존되어 있다. 박팽년은 1434년(세종 16)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成三問)등과 함께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가 되어 각종 편찬사업에 참가하였다. 외직에 있을 때 수양대군(세조)이 황보인․김종서와 안평대군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박팽년은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모의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탄로되어 잡혀 죽었다.
■ 박심문
본관이 밀양으로조선 세종 때 집현전학사와 부제학을 지낸 박강생(朴剛生)의 셋째 아들로서, 아버지와 두 형이 모두 일찍 돌아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장성하였다. 29세(세종 1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함길도 도절제사인 김종서의 종사관으로 여진을 몰아내고 남도민을 이주시킬 것을 건의하여 6진개척에 공을 세웠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양군의 임진 나루로 집을 옮겨 사았다. 1456년(세조 2)에 명나라에 질정관에 임명되어 굳이 사양했으나 피할 수 없이 가게 되었다. 떠나기전날 성삼문, 하위지(河緯地), 이개 등과 단종복위를 논의하였다. 명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사육신의 처형 소식을 듣고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 유적지- 대전 창계숭절사(滄溪崇節祠)
소재지 : 중구 안영동 560번지
문화재 :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호(1989.3.18 지종)
1977년에 세워진 숭절사는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을 비롯한 사육신(死六臣)의 처형 소식을 듣고 자력한 청재(淸齋) 박심문(朴審問, 1408~1456)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고 있다.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은 1685년(숙종 11) 건립된 것이 처음이다. 강원도 고나찰살 홍만종(洪萬鐘)이 영월에 있는 노산대군의 사당 수리를 청하였고, 영월부사 조이한(趙爾翰)과 더불어 6신의 사당을 그 곁에 건립하기를 의논하였다. 사육신과 호장 엄홍도(嚴興道, 단종이 영월에서 죽음을 당했을 때 시신을 수습)의 신위를 모시고 '육신사(六臣祠)'라고 하여 송시열이 액자를 썼다. 1709년 영월 유생 엄세영(嚴世英)이 상?여 '창절(彰節)'과 남효온(南孝溫)을 배향하였다.
1804년(순조 4)에는 순조가 "박심문의 충성과 절의는 6신에 못지 않다"라는 글시를 손수 써 주면서 그에게 이조참의를 증직하였고, 1828년에 창절사에 배향하게 하였다. 원래 대전지역에서 사육신과 관련된 인물을 배향했던 곳은 동구 가양동 흥농(興農)에 1719년(숙종 45)세워진 정절서원에서 송유(宋儒)․박팽년․송갑조(宋甲祚)․김경여(金慶餘)․송국택(宋國澤)등 대전 지역과 관련된 6명을 배향하였다. 그러나 정절서원은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고, 대전 지역에서 단종 때의 절신(節臣)을 모신 곳은 없어졌다.
그 후 박심문과 박팽년을 모신 숭절사가 건립되엇다. “숭절사기(崇節祠記)”에는 사당이 건립되게 된 연유가 간략히 소개되어 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가다.
"6신들의 사당을 세운 곳은 그들의 고향이나, 거주지 그리고 묘소가 있는 곳에 세웠으나 자손들이 살고 있는 곳에는 사당을 세운 것이 없다. 따라서 박심문은 후손인 박연황(朴淵璜)이 창계에 거주한지 여러 대가 되어 조상을 추모하모하고자 사림들의 여론을 모아 집 근처에 사당을 세워 '숭절사'라는 현판을 달고 박심문과 사육신중에 이 지역과 연고를 같이 하는 박팽년을 함께 배향하였다."
숭절사는 1977년에 세워졌고, 그후 외삼문과 강당이 계속 증축되었다. 구조는 야산을 배경으로 동향(東向)하여 1983년에 세워진 외삼문이 있고, 외삼문의 안으로 들어가면 1978년에 증축되어 상의당(尙儀堂)이란 현판이 붙은 강당이 있다.
현재 창계숭절사에는 후손들이 해마다 제사를 드리면서 박팽년과 더불어서 박심문의 충절을사모하고 있다. 또한 밀양 박씨 청재공파 대동보소에서는 “청재박선생충절록”을 간행하여 박심문의 충절을 찬양하고, 이를 번역하여 널리 읽도록 보급하고 있다.
□ 순천박씨
시조 박영규(朴英規)는 신라 경명왕(박혁거세의 29세손)의 일곱째 아들 박언지(강남대군)의 아들이라고 한다. 또 신라 유리왕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으나 고증할 자료는 없고 전설로만 전해온다.
그는 승주(昇州, 순천의 옛이름) 사람이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고, 후백제 견훤의 사위로, 처음에는 견훤의 막하에 있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할 때 부인 견씨와 함께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견훤의 세력을 추출하는데 공을 세워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좌승(左丞)에 제수 되었으며 승주군(昇州君)에 봉해졌다.
박영규는 왕건과 사돈을 맺어 그의 큰딸은 왕건의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이 되었다.
그러나 후손의 계대(系代)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후손 박난봉(朴蘭鳳)이 고려시대에 과거에 등과하여 정승을 역임하고 평양(平陽, 순천의 옛 이름)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자 그를 득관조로 하였고 , 다시 그 후의 계대(系代)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낸 중시조 박숙정(朴淑貞)을 1세 조상으로 하여 본관을 순천으로 하였다.
중용인물로는 박중림(仲林), 사육신(死六臣) 중의 한 사람인 박팽년(彭年), 박계창(繼昌), 박원종(元宗), 박이장(而章), 박광일(光一), 박기정(基正) 등이 있다.
박팽년의 둘째 자부가 낳은 비(婢) 소년의 일화는 유명하며, 간신히 이어진 그 일족을 '묫골박씨' 라고 했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35명, 상신 1명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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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28 성씨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14  `인동 장씨
인동장씨(仁同張氏)

인동(仁同)은 인동장씨(仁同張氏)의 시조인 삼중대광공신호(三重大匡公神號) 위상장군(衛上將軍) 휘금용(諱金用) 부군(府君)이 복거-조기한 고을로 천여 동안 세거해 온 조상의 얼이 심어져 있는 유서 깊은 고장으로 인동장씨((仁同張氏) 관향이다.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여헌선생문집(旅軒先生文集), 동국여지승람, 경상도지리, 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 옥산지(玉山志), 여지도서(與地圖書), 경상도읍지, 동국여지비고, 인동읍지, 대동지지, 영남읍지, 조선각도읍지등의 인동현조(仁同縣條)의 연혁에 인동은 고을의 행정구역 명칭이고 별호를 옥산(玉山)이라 하였으니 옥산은 인동고을의 원이 사무를 본 관아가 있었던 인동의 중심지로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 구미시(龜尾市) 인의동(仁義洞)이다.

인동은 본래 신라 때 사동화현(斯同火縣.혹은 이동화혜(爾同火兮-)이다.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39)에 수동(壽同)으로 개칭하고 성산군(星山郡)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 주군현(州郡縣) 개편시 인동현(仁同縣)으로 개칭하고 고려조 팔대왕인 현종9년(1018)에 경산부(京山府) (지금의 星州(성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 2년(1390)에 경산부(京山府)에서 분리되어 인동에 감무를 설치하고 약목현을 영속시켰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종13년(1413) 전국의 감무를 혁파할 때 인동현으로 개칭하여 현감을 두었다가 선조34년(1601) 찰리사(察理使) 망우당(忘憂堂) 곽재우장군(郭再祐將軍)이 인동의 주악인 천생산(天生山)의 성곽을 수축하고 관방의 요새로 부각됨에 따라 선조 37년(1604) 7월 도원수 한준겸(韓浚謙)의 계청에 의하여 도호부로 승격된 후 조방장(助防將)을 설치하고 府使(부사)가 겸임하였다.
선조39년(1606) 당시 선산부(善山府)의 관할인 해평현(海平縣)이 인동부에 래속 되었다가 선조41년(1608)에 선산으로 다시 환속되고 조방장(助防將)을 혁파하였다. 인조22년(1644)에 칠곡부(漆谷府)를 신설하고 고종32년 (1895) 5월에 지방제도를 개편할때 인동도호부를 인동군으로 개칭하면서 邑(읍) 내면(內面)과 북면(北面), 동면(東面), 장곡면(長谷面), 문량면(文良面), 석적면(石赤面), 북삼면(北三面), 약목면(若木面) 기산면(岐山面) 9개면을 관할하다가 1914년 한일 합방후 3월 1일 인동군을 폐지하여 칠곡군에 편입시키고. 그해 4월 1일 읍내면과 북면을 합쳐서 인동면으로 개편 되었으며 1978년 2월 15일 선산군 구미읍과 칠곡군 인동면을 합쳐 구미시로 승격시키고 1983년 2월 15일 종전의 인동의 인의동(仁義洞)과 황상동(黃桑洞), 구평동(九坪洞)을 합쳐서 인동동(仁同 洞)으로 하고 구포동(龜浦洞)과 금전동(金田洞), 거의동(居依洞), 양호동(陽湖洞)의 일부를 양포동(陽浦洞)으로 진평동과 시미동(侍美洞), 임수동(臨水洞)을 합쳐 진미동(眞美洞)으로 행정관할구역을 개편 하였다. 인동면 은 신라때부터 칠곡군에 병합될 때까지 약 천여년동안 관아의 소재지였으며 1978년 구미시에 편입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인동은 옛부터 성현을 존경하며 도덕을 기리고 학문을 숭상하여 예의를 지키는 고장으로 도학군자(道學君子)와 홍유석학(鴻儒碩學)이 많이 배출되어 추노지향(鄒魯之鄕)으로 불리어 왔으며 장씨(張氏)가 천유여년 세거해온 관향이다. 각종 문헌에 인동고을 대성 가운데 우리 인동 장문(張門)을 첫번째로 기록하고 있다.

 

 

 

 

□ 역사상 인물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조선 중엽의 대성리학자.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며 당대 대표적인 성리학자로서 의학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며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장득만(得萬)
인물화가로서 세조의 영정을 그렸다.
■장경우(張慶遇)
광해군 때 영남유생들과 함께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던 유학자 ,
■장만(張晩),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팔도도원수
■장붕익(張鵬翼),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 張澤相 [장택상]
정치가, 자는 致雨(치우) 호는 창랑(滄浪), 여헌(旅軒) 后(후), 판서 석용(錫龍)의 손, 관찰사 승원(承遠)의 자, 칠곡군 오태리(吳泰里)에서 출생하여 칠세에 한학을 수업 십세에 사서삼경과 한사(漢史)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외교사(外交史)등을 통독한후 우남학회(雩南學會)가 경영하는 한성학교에 입학 신학문에 입문 수학한 후 도일하여 일본 산구현(山口縣)의 소학교에 입학수학후 와세다 대학에 입학 수업하다가 한일합방후 1910년 중국상해로 망명하여 러시아의 군항인 해삼위(海蔘威)에 도착하여 이상설(李相卨) 열사의 권유와 주선으로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영국에 도착하여 영국 에딘바라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후 1919년 도미하여 이승만 조병옥등과 구미위원(歐美委員)으로 활약하였고, 청구구락부사건(靑丘俱樂部事件)으로 투옥되어 일인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미군정시 수도경찰청장 초대 외무부장관 대국무총리 2대 국회부의장, 유엔총회 한국대표, 반공투쟁위원장, 대일굴욕외교범국민투쟁위원장등을 역임하였으며. 향년 77세로 별영면하였다. 건국의 공로로 국민장을 거행하였으며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담백한 기질과 명랑 강직한 성격, 청빈한 기품, 불굴의 자유혼, 기지와 해학, 멸사 봉공으로 헌신한 건국의 공로자이다.
■장지연(張志淵)
우국 언론인. 조선 말기 언론계에 투신하여 항일구국의 필봉을 휘두르며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명사설을 남긴 등을 들 수 있다.
■장태수(泰秀)
근세 인물로 순국지사이다.
仁同(인동)은 우리 仁同張氏(인동장씨)의 始祖(시조)이신 三重大匡公神號衛上將軍(삼중대광공신호위상장군) (諱金用(휘금용))府君(부군)께서 肇基(조기) 卜居(복거)하신 고을로 千有餘年(천유여년)을 世居(세거)해온 祖上(조상)의 얼이 심어져 있는 유서 깊은 고장으로 仁同張氏(인동장씨)의 貫鄕(관향)이다. 
■ 張基榮 [장기영]
호는 백상(栢想), 태상경(太常卿) 백(伯)의 후(后), 일찍이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은행부총재를 지내고, 조선일보, 한국일보사장역임, 공화당시 부총리겸경제기획원장관, 국회의원, 공화당당무위원, 남북조절위원장대리등을 지내는 한편 대한체육회회장, I. O. C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언론, 정치, 국민보건에 크게 공헌한 제3공화국의 정치가이다.

■ 張勉 [장면]
정치가, 죽정(竹亭) 잠(潛)의 후(后), 옹(翁) 봉한(鳳翰)의 후손,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도미 맨하탄대학 문과졸업 맨하탄 시튼홀 포덤등 각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귀국하여 교육계와 천주교에 활약, 해방이후 정계에 진출하여 민주의원 입법의원을 거쳐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유엔 에총회 한국수석대표 바디칸 한국특사, 초대주미한국대사 국무총리를 거쳐 자유당시 민주당을 창당 부통령에 당선 되었으며, 1960년 내각책임제 제2공화국 국무총리에 당선되었다가 계획한 국정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1961년 5. 16 군사혁명으로 군사혁명정부에 정권을 이양하였다. 자유당과 민주당시의 온화한 성품을 지닌 종교가요 정치가이다.
■ 張建相 [장건상]
 충정공(忠貞公) 안세(安世)의 후(后), 월포(月浦)의 후손, 참봉기상(參奉箕相)의 자, 자는 찬성(贊成), 호는 소해(宵海), 1882년 12월 19일 인동에서 출생, 부산에 이주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 학정치학과에 입학, 수학하다 중퇴하고, 미국 인디아주 발프레이조대학 법학과에 입학 1912년에 졸업후 중국상해로 건너가 김규식(金奎植)을 만나 동제사(同濟社)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에 첫발을 디뎠다. 임정 외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21년 쏘련 이루크츠에서 고려공산당에 가입 활동하다가 임정의 의열단 고문으로 일본인 살상 폭탄제조를 지휘하였으며, 일제에 체포되여 상해주재 일본영사관과 부산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아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그 후 비밀리에 탈출 중경(重慶)의 임정간부(臨政幹部)로 활동하다가 귀국하여 여운형(呂運亨)의 노선을 지지하였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으로 부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경찰의 갖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네번째로 많은 득표로 우리나라 최초로 옥중 당선자가 되었다. 1957년 11월 박정호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고, 5.16 직후 구속 되었으나 박정희(朴正熙)의 배려로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초대내각구성시 이승만이 입각을 요청하였으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남북분단을 우려가 있으므로 거절하였다. 1974년 5월 14일 서울의 오두막집에서 가난의 찌든 생활을 하다가 92세로 영면하였다. 분단시대에 정치 한복판에 선 건국초기의 독립운동가이며 사상가이다
■ 張吉相 [장길상]
 자는 치상(致祥), 호는 황재(黃齋), 여헌(旅軒)의 后(후), 형조판서 문헌공(文憲公) 석용(錫龍)의 손 경상북도관찰사 승원(承遠)의 아들). 고종 때 사마(司馬)에 입격하여 규장각 직각(直閣)을 역임하였으며, 아우 직상(稷相)은 선산군수, 택상(澤相)은 건국후 수도경찰청장, 초대외무장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 張志淵 [장지연]
구한국 말의 언론인, 우국지사, 자는 순소(舜韶), 호는 위암(韋庵), 숭양산인(嵩陽山人), 여헌(旅軒) 후(后), 1894년 고종 31에 진사가 되어 승훈랑(承訓郞), 통정대부문헌비고편집위원(通政大夫文獻備考編輯委員)을 지냈으며 1898년 관직을 버리고 南宮檍(남궁억) 柳謹(유근) 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했다. 한편 독립협회 사업에도 가담하여 이상재(李商在) 이승만등과 만민공동회를 개최도 했으며 1902년(광무) 3월부터 황성신문사장을 맡아 민중 계몽과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제목으로 비분에 찬 논설을 실어 서울 장안과 온국민을 울음 바다로 만들었다. 그로 인해 일본관헌에게 체포되어 투옥되고 이듬해 1월말에 출옥되었다. 출옥 후 다시 윤효정(尹孝定) 라수연(羅壽淵)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민족독립의 실력을 기르는 일에 힘쓰다가 해산 당하고 중국과 시베리아를 유랑하다가 1910년에 귀국하였다. 오로지 학문과 독립에 일생을 바친 우리나라 언론인의 대표자이다, 1962년 건국훈장단장이 수여 되었으며 저서로는 유교연원(儒敎淵源), 위암문고(韋庵文庫)등이 있다.
■ 張晩  [장만]
조선 인조조의 공신,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 시호는 충정(忠定), 태상경(太常卿) 백(伯)의 6세손 군수 기정(麒禎)의 삼자(三子). 1589년(선조 22) 생원 진사 양시에 입격하였으며 1591년(선조 24)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및 승문원에 등관하여 예문관 검열 시교, 기사관, 전생서 주부, 사헌부 지평, 형조 예조좌랑, 사간원정언, 성균관전적, 세자시강원사서, 봉산군수,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승지, 충청 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도승지, 공조참판, 견명고명주청부사, 견명세자책봉주청부사, 형조참판, 전라관찰사, 병조참판, 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 함경도 관찰사, 광해3년에 평안도병마절도사, 경상도관찰사, 호조참판, 지중추부사, 체찰부사, 형조,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인조반정후 특진관, 우찬성, 판중추부사, 팔도도원수에 제수되어 원수부를 평양에 두고 관서지방을 진정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진압하여 진무 1등공신에 책정되고, 도원수겸개성유수,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630년(인조 8)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객사터(客舍―) 【터】
동헌터 앞 서쪽에 있는 객사 터. 지금은 밭이 되었음.

인동향교 동헌터(지금은 밭이 되어 있는), 교동, 원들, 옥산, 읍내


□ 시조 :
■장계(張桂)계
시조는 고려 말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예문관대제학을 지내고 옥산군(玉山君)에 봉해진 장계이다.
장계가 인동현 발영전(拔英田)에 터를 잡은 이래, 7세에 이르기까지 후손들이 번성하여 200여 년을 세거하였다.
역대 유명인물로는 조선시대 세조 때 적개공신(敵愾功臣)이었던 장말손(張末孫),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장순손(張順孫) 형제 등이 있다.
■장금용(張金用)계
시조는 고려 초에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지낸 장금용이다.
후손들이 옥산(玉山:仁同의 옛 이름)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옥산으로 하였으며, 그 뒤 조선 말에 옥산이 인동으로 바뀜에 따라 본관을 인동으로 고쳤다.
시조 장금용(張金用)은 장정필의 후손이다. 그는 고려 때 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을 지냈으며 후손들이 옥산에서 살면서 본관을 옥산으로 하였다.
그러나 조선말에 옥산이 인동으로 바뀌어 인동 장씨로 하였으나 일부는 옥산을 본관으로 고집하며 사용하고 있다.
□ 집성촌
대표적인 집성촌으로는 인동장씨의 <천년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경상북도 구미시(龜尾市) 인동동(仁同洞) 일대를 꼽는데, 시조 장금용이 이 곳에 처음 터를 잡은 이래 38대를 내려오면서, 한때는 이웃인 칠곡(漆谷)․선산(善山) 등지에 이르기까지 2000여 호를 헤아릴 정도로 번창한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1976년 구미공단의 개발로 구미시가 발족, 인의동으로 편입되면서 급속히 해체되는 변모를 겪게 되었다.

□ 인동 본관의 성씨;
김(金), 류(柳), 유(兪), 유(兪), 장(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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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301 성씨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25  `개성왕씨   

 개성왕씨(開城王氏)

□ 왕씨의 본관들
강릉 개성 거제 대전 의령 제남 해주 총7개 본관과 20,377명이 있다.(1985년)
본관은 개성(開城), 강릉(江陵), 해주(海州) 이외에 10여 본이 문헌에 전한다.
고려시대의 왕족으로 34왕 475년간 번영을 누린 씨족이다.
왕씨의 대종은 개성왕씨이며, 시조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 왕건의 집안이 본디 송악(松岳:開城) 지방의 호족이었다는 사실 이외는 그 선대에 대한 내력은 전해지지 않는다.
강릉왕씨의 시조는 태조의 아들 유(裕)이고, 해주왕씨 시조 유(儒)는 본성이 박씨(朴氏)였는데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태조가 왕씨 성을 사성. 따라서 해주왕씨와 개성왕씨는 동성이족(同姓異族)이다.
당시에는 태조에게서 왕씨 성을 사성받은 사람이 많았다.
각 지방의 호족들을 무마 포섭하려고 그들과 혼연(婚緣)을 맺거나 왕성을 사성(賜姓)하였다. 예컨대 강릉왕씨에는 유(裕)를 시조로 하는 일파 외에 차(叉)를 시조로 하는 또다른 일파가 있었는데 차는 강릉김씨의 시조 김주원(金周元)의 6대손인 선희(善希)의 아들로서 태조가 그의 딸을 왕비로 삼고 그에게 왕성을 사성하였다. 차의 일파는 그의 13대손 탄지(坦之)대에 다시 강릉김씨로 복성하였다.
이 밖에도 강릉지방의 호족 순식(順式)이 왕성을 사성받았고, 발해의 태자 대광현(大光顯)도 계(繼)라는 성명을 하사받고 종적(宗籍)에도 편입되었다.
그러나 1392년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건국으로 고려는 종지부를 찍었는데, 이 때부터 왕씨의 수난이 시작되어 조선 태조는 고려 왕실의 후예인 왕씨들을 멸족시키는 한편 고려의 사성으로 왕씨가 된 사람은 모두 본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또 왕실의 후예가 아닌 왕씨들은 모두 어머니의 성을 따르도록 했는데, 왕씨들이 전씨(全氏), 옥씨(玉氏)씨 등으로 변성했다고 전해진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1만 4118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79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4,815가구, 전국 가구 구성비 0.05 %로 순위는 274성 중 제82위였다.

□ 개성왕씨의 시작
중국 황제 헌원씨의 17세손 조명이 유누와 함께 우리나라에 와서 지금의 평양 일토산 아래에 정착하였다.
그 후, 조명의 후손 수극이 기자가 왕이 되었을 때 왕씨 성을 하사 받았다. 그후 수극의 57세손 왕염의 13세손 왕몽으로 이어져 왔는데 왕몽은 신라 건국초기에 시중을 지냈다. 당시 비결에 '토초가위왕'이라 하였으므로 그 화가 미칠까 두려워 왕몽이 일곱째 아들 왕림(王琳)을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10여년 동안 수도하면서 전, 신, 차씨 등으로 성을 바꾸었고 차무일이라고 이름을 바꾸었고 한다. 차무일의 셋째 아들 왕식시의 후손이 왕건이다.

□ 왕건
왕건(王建, 877~943)은 송악(개성) 사람으로 901년 궁예가 신라에 반기를 들고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이되었을 때 궁예를 도와 913년 시중이 되었다. 그러나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지 몇년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당시 기장이었던 신숭겸, 배현경 , 유금필, 홍유 등이 왕건에게 왕창근, 송합홍 등 점술가의 예언을 설명하면서 거사를 권하여 궁예를 추출하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려를 개국한 후 삼국을 통일하고 473년동안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을 개국하면서 멸족를 당하게 되자 옥(玉), 금(琴), 마(馬), 전(田), 전(全), 김(金)씨 등의 다른 성으로 행세하며 숨어 살면서 혈통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 정조 때에 비로소 문헌 등을 조사하여 왕씨로 다시 성을 바꾸어 세보를 만들고 왕건이 수도로 정한 송도(개성)을 본관으로 하고 왕원(王垣)을 1세 조상으로 하였다.

□ 성세
[인구] 18,774명이 있다.(1985년)
계파는 양양공파, 안경공파, 시중공파, 평양공파가 있다.

□ 제남왕씨(濟南王氏)
시조 왕이문(王以文)의 원래 이름은 왕봉강으로 중국 제남에 살던 왕족이었다.
명나라 의종 때 청나라가 중국의 판도를 석권하자 협서 안찰사로 있던 왕접이 이에 대항하여 싸우다 영하대전에서 전사하였다. 그러자 청나라 세조가 왕씨를 멸족하려고 1645년(조선 인조 23년) 왕봉강을 심양 포로 수용소로 압송하였다.  그 때 심양(지금의 봉천)에 볼모로 잡혀있던 봉림대군(조선 17대 왕인 효종)이 그를 만나보고 뜻이 맞아 같이 우리나라에 와서 이문이란 이름을 하사 하고 궁중에서 살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왕이문을 시조로 하고 고향인 제남을 본관으로 하였다.
- 묘소는 양주군 진건면에 있으며 음력 10월 초에 한다.
[인구] 800명이 있다.(1985년)
제남 (지난 濟南) (Jinan) 
중국 산둥성[山東省]의 성도(省都)이다. 4,856㎢의 면적에 약 250만의 도시이다.
황허강[黃河]의 하류 샤오칭강[小淸河] 남안에 있다.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이곳에 인류의 거주가 시작되었다고 하며 춘추전국시대 제(齊)의 서부의 도시로 번영하였고, 한(漢)에 와서 도시 북쪽을 지수이강[濟水]이 흐르고 있다고 해서 지난이라 하였다.
이후 수(隋)․당(唐)․원(元)․송(宋)․명(明)․청(淸) 등의 시대를 통해서 번영하였다. 오늘날 시가는 톈진[天津]~푸커우[浦口]간 철도와 칭다오[靑島]~지난[濟南]간 철도의 분기점인 역을 중심으로 선로의 남쪽에 동서로 뻗어 있다.
시가의 동부는 외호(外濠)에 둘러싸인 명(明) 때 건설된 내성(內城)을 중심으로 하는 공원․대학 등이 있는 문화지구, 서부는 상업지구이며 남쪽에 주택지구, 선로의 북쪽은 공업지구이다. 방직․제분․착유․제지 등의 경공업은 일찍부터 발달하였고, 오늘날은 공작기계․자동차․시멘트․화학 등 중공업이 발달하고 있으며 교통의 요지로 산둥성 서부의 농산물 집산지이다. 명승지에 내성 북부의 다밍호[大明湖]․바오투천[튑 突泉]등이 있고 천불산(千佛山)의 불상조각도 유명하다.

□ 개성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
고(高), 김(金), 내(乃), 노(路), 마(馬), 만(萬), 반(班), 방(龐), 배(裵), 야(夜), 연(延), 염(廉), 옥(玉), 왕(王), 용(龍), 음(陰), 이(李), 전(全), 전(田), 천(千), 최(崔), 추(秋), 홍

□ 사성(賜姓)
임금이 신하에게 성을 내리는 것.
한국에서 중국식 성씨가 사용된 것은 삼국시대 이후로 추측되는데, 처음에는 소수의 지배계급들이 그 신분의 고귀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하였고, 고려시대로 들어오면서 점차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각 씨족들이 처음 성을 사용하게 되는 과정은 보통 세 가지로 정리되는데, 매우 일찍부터 사용되어 그 유래를 알 수 없는 것, 본관의 시조로 추정되는 사람이 스스로 자칭하는 것, 그리고 국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는 것 등이다. 사성의 최초의 사례는 신라 유리왕(儒理王)이 고유의 씨족명을 지니고 있던 6부(部)의 촌장들에게 각각 이(李)․최(崔)․손(孫)․배(裵)․정(鄭)․설(薛) 등의 성씨를 하사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에 특별한 공헌을 세운 신하에게 국성(國姓)인 왕씨(王氏)를 하사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고려 초기에는 군현단위로 본관제(本貫制)를 시행하였는데, 이것이 지방의 많은 지배층들에게 중국식 성씨를 자칭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성씨를 칭한 사람은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족보에서 시조(始祖)로 기록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사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후 공을 세운 경우, 외국인이 투화한 경우, 임금의 이름자를 피하는 경우 등에도 사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020215 성씨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24  `전주이씨   

전주이씨(全州李氏)

□ 이씨의 본관
현재 우리 나라 이씨의 본관은 237본인데, 그전의 ‘증보문헌비고’에서는 451본으로, ‘조선씨족통보’에서는 546본으로 나타났던 일이 있다. 이를 견주어 보면 오늘날 이씨의 본은 과거보다 많이 줄어든 셈이다.
이 237본의 이씨는 대체로 한국계(韓國系)와 중국계(中國系)와 기타계(其他系)로 분류할 수 있다.
■ 한국계
한국계는 신라 6성의 하나인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가평이씨(加平李氏),  금구이씨(金溝李氏),  덕은이씨(德恩李氏),  아산이씨(牙山李氏),  영천이씨(永川李氏),  우계이씨(羽溪李氏),  원주이씨(原州李氏),  재령이씨(載寧李氏),  진위이씨(振威李氏),  진주이씨(晋州李氏),  평창이씨(平昌李氏),  합천이씨(陜川李氏) 등이 이에 속한다.
■ 중국계
고성이씨(固城李氏),  상산이씨(商山李氏),  안성이씨(安城李氏),  연안이씨(延安李氏),  원주이씨(原州李氏),  정선이씨(旌善李氏) ․ 청해이씨(靑海李氏),  태안이씨(泰安李氏),  태원이씨(太原李氏), 평산이씨(平山李氏) 등이 이에 속한다.
■ 기타계
기타계로는 안남국(安南國: 현재의 베트남)의 왕 이천조(李天祚)의 아들로 나라가 망할 것을 예견하고 우리 나라로 망명, 옹진반도 화산(花山)에 정착하여 산 화산이씨(花山李氏)와 김알지 후손인 경주김씨(慶州金氏)에서 분적한 광산이씨(光山李氏)와 김해허씨(金海許氏)에서 분적한 인천이씨(仁川李氏) 등이 있다.

□ 귀화 성씨
이씨 중에서 역사가 제일 오랜 것은 경주이씨이고, 중국에서 귀화한 대표적인 이씨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이며, 월남에서 귀화한 화산이씨(花山李氏)도 있다.
그러면 현재 240만명 정도로 추정되는 우리 전주이씨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여기에는 현재까지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이 두 가지 설 모두 그 근거가 모호하여 우리 全州李씨의 정확한 생성유래로서 여러 종현 종친들의 단언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 중국(中國)에서의 귀화설(歸化說)
작자 연대 미상의 <완산실록(完山實錄)>에는 시조에 대하여 이렇게 씌어 있다.
‘야사(野史) 실록(實錄)을 참고해 보면 시조 사공 공의 휘는 한(翰)이요, 자는 견성(甄城)이다. 공은 본디 중원(中原: 중국)에 살았는데, 태어날 때부터 거룩하여, 총명이 과인하고 재질이 특이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 공의 나이 15세에 한림원에 입학하고,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납고 악했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었다. 그래서 그 때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서 반드시 왕기가 나타나리라." 하더니,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함을 받아 공이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로 오니, 그 때 나이 18세였다. 나이 약관도 되지 않아 문장이 비범하고 도덕이 탁월하여 인자한 기풍을 크게 떨쳤다. 불과 수년에 사람들의 칭송하는 소리가 조정까지 들려 신라의 문성왕(文聖王)이 불러 사공 벼슬에 임명하였고, 1년 남짓 다스리매 국정이 공평하여 모든 관원들이 교화되고 만백성들이 즐겼다. 그래서 태종(太宗)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가 사위를 삼았다’
곧 사공 공은 본디 중국인으로 배씨의 모함을 받아 신라로 와 사공 벼슬에 올라 김씨를 아내로 맞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출처 미상의 <이씨 득성의 유래(李氏得姓之由來)>란 글에서는 중국 이씨의 역사를 약술하고서 끝 부분에 ‘우리 전주이씨가 본래 중국 당(唐)나라 황실의 후예라 하나, 그 파계와 원류를 밝힐 분명한 근거가 없고, 시조 휘 한(翰)으로부터 대대로 완산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 경주이씨(慶州李氏)로부터의 분적설(分籍說)
경주이씨는 신라 육성(六姓 : 李․崔․鄭․孫․裵․薛)의 하나로 우리 나라 이씨 중에서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씨족이다.
<경주이씨대동보> 총론편을 보면 경주이씨의 유래가 나온다. 자못 전설적이지만 신라 六성의 시조 6명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곧 육인천강설(六人天降說)이다. 경주이씨의 시조 알평(謁平)은 처음에 하늘로부터 박바위[瓢岩]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 곳은 육촌(六村) 중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인데, 나중에 급량부(及梁部)로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었다. 기원전 69년(前漢 宣帝 地節 元) 3월 초하루에, 이 6촌장이 알천(閼川)의 바위 위에 모여 양산(陽山) 아래를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이 번개 빛 같고 흰 말이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양이 보여, 찾아가 보니 검붉은 알이 있는데, 말은 사람을 보고 슬피 울며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래서 6촌장이 그 알을 깨 보니 한 사내아이가 나타났다. 모두들 이상히 여겨 그 아이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불렀다. 이 혁거세가 13세가 되자, 기원전 57년(前漢 宣帝 五鳳 元)에 이를 왕으로 삼고 나라 이름을 ‘신라’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라를 건국한 공로로 알평은 아찬(阿餐)의 벼슬에 오르고 기원전 32년(新羅 儒理王 8)에 이씨(李氏)를 사성(賜姓)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알평(李謁平)이 경주이씨의 시조가 되는데, 과거의 <경주이씨족보>에는 이알평의 먼 후손 이거명(李居明 : 蘇判公)을 중시조 1세(世)로 삼아 계대수(系代數)를 따져 왔다. 그래서 이알평부터 이거명까지는 몇 대가 흘러갔는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근 2백년 전 조선 말기 무렵에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 족보에서 이알평부터 이거명까지의 대수(代數)와 이름이 나타나 36대의 명단을 찾아냈다고 한다.
(1세)알평(謁平)- (2) 유 - (3) 타 - (4)중가 - (5) 석 - (6)문상- (7)방 - (8)수장 - (9) 수 - (10)기정 - (11)미선 - (12)성립 -(13)서 - (14)계환 - (15) 걸 - (16)선장 - (17)기담 - (18)인흥 - (19) 확 - (20)선정 - (21) 체 - (22)태휘 - (23)우영 - (24) 준 - (25) 소 - (26)경지 - (27) 욱 - (28)원장 - (29)한로 - (30)계탕 -(31) 도 - (32)사언 - (33) 기 → (34)희두 - (35) 계 - (36)거명 ↘ (34)진두 - (35)백전 →(36) 공 ↘(36세) 한(翰)
위에서 보면 시조 이알평부터 36세손 이거명까지의 계통이 분명하다. 과거에는 이거명을 중시조 1세(世)로 따져온 것이다.
여기서 전주이씨와의 문제는 바로 34세 희두(禧斗)의 동생 진두(辰斗)와 그의 둘째 손자인 한(翰)이 관계되는 것이다. 여기서 34세 진두씨의 약력에 나와 있는 기록을 보면
"공도 문장가로서 경문왕 때 임오년에 형 시중공과 같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랑평 장사내사상병부령에까지 이르렀다. <세장보(世藏譜)>를 참고하건대 이분의 손자 한(翰)이 完山 李씨의 시조가 되었다더라." 
이 기록에 의하여 이진두의 둘째 손자 한이 바로 전주이씨의 시조 사공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의 <상서공파세보(尙書公派世譜)>에는
(34세)진두(辰斗)-(35)백전(白全)-(36) 공(恭)-(37) 한(翰)으로 세계(世系)를 꾸며 놓고 이한(李翰)의 약력에 "대사공 은상서 어사중승 상상주국으로서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배위는 군윤 김은의의 딸이다. 전주이씨의 시조다" 라고 적어 놓았다. 여기서도 한(翰)이 전주이씨의 시조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나, 경주이씨 족보와 다른 점은 공(恭)과 한(翰)을 형제가 아닌 부자 사이로 바꾸어 놓은 것이 이상한 점이다.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성으로 경주이씨 족보에 분명히 남아 있는 것은 원주이씨(原州李氏),  재령이씨(載寧李氏), 아산이씨(牙山李氏), 우계이씨(羽溪李氏) 등이다. 이 성들은 분적(分籍)된 기록이 분명하다. 그러나 전주이씨가 경주이씨에게서 갈라져 나갔다는 기록은 위에서와 같이 매우 애매하고, 또 그 기록이 한(翰)씨의 약력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 조부의 약력에 기재되어 있는 점이 더욱 이상하다.
■ 신라 사공한(司空翰)을 시조로 봄이 타당
이상으로 볼 때, 전주이씨가 중국에서 왔다, 또는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하지만, 모든 기록이 애매 모호하다. 중국에서 왔다는 기록은 아마도 옛날 사대사상(事大思想)에서 연유한 야사적(野史的) 기록이라 세직(世稷: 世直)의 세(世)자가 당나라 태종 리세민(李世民)과 같은 항렬자로 본 것이다. 또 경주이씨에게서 왔다는 기록은 경주이씨의 역사가 가장 오래니까 혹시 갈라져 온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경주이씨는 현재 이알평 시조로부터 오늘날 75세(世) 희(熙)자 항렬까지 2천여년의 역사를 가졌고, 경주이씨의 중시조 이거명(李居明)과 전주이씨의 이한(李翰)은 동항렬(同行列)이므로 이분이 우리의 시조라면 연대는 비슷하리라 본다. 그러나 기록이 분명치 않으니 전주이씨 시조 신라 사공(司空) 한(翰) 할아버님의 조상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문제는 현재로서는 단언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규명될 수 있는 후일을 기약해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대흥이씨(大興李氏) 영해이씨(寧海李氏) 등도 있음을 첨언한다.

□ 시조 이한(李翰)
시조는 신라 때 사공(司空)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시조로부터 22세, 즉 한의 21대손이다.
그러나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안사(安社) 이전의 사적(事蹟)은 전혀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안사는 원래 전주 사람이었는데, 그 곳 지주(知州:지금의 지사(知事))와 사이가 나빠 강원도 삼척(三陟)으로 옮겨갔다가 얼마 뒤 지주(知州)가 다시 그 곳으로 부임해 오자 가족을 데리고 간도(間島)지방으로 가서 원(元)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地方官]가 되었다.
그의 아들 익조(翼祖) 행리(行里 : 성계의 증조부), 또 그 아들 탁조(度祖) 춘(椿 : 성계의 조부)도 때때로 두만강 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 벼슬했고, 춘의 아들 환조(桓祖) 자춘(子春)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 : 영흥(永興))의 천호를 지냈다.
자춘은 공민왕의 북강(北疆) 회수 운동에 내응하여 쌍성(雙城) 함락에 결정적인 공(功)을 세워 이 지방의 만호(萬戶) 겸 병마사(兵馬使)로 임명되었다.
성계는 영흥(永興) 태생으로, 22세 때 처음으로 고려(高麗)에 벼슬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북면의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원군(元軍)과 왜구(倭寇) 토벌에 공(功)을 세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러 이 때부터 고려 말 중앙정권의 중추에 등장하였다.

□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인물들
■ 이범진(李範晉)
[ 1852~1910(철종 3~순종 4) ]
독립운동가.
자는 성삼(聖三). 서울 출생.
1879년(고종 16)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87년 협판내무부사가 되었다. 95년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의 주역이 되었다가 실패하자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96년 귀국, 아관파천의 주역이 되어 김홍집(金弘集) 등을 몰아내고 친러내각의 법무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97년 이완용(李完用) 등의 박해로 신변에 위협을 받자 주미공사를 자원하여 3년간 외교활동을 하였다. 1900년에는 주러시아공사로 전임되어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 공사를 겸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된 뒤 외교권이 박탈되고 각국 주재 한국공사들이 소환되자 그는 일본의 소환에 불응, 계속 러시아에 체류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1907년(순종 1)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파견하는 특사로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이들과 협의하여 고종의 친서를 작성하고 아들 위종(瑋鍾)을 특사의 일원 겸 통역으로 동반시키는 등 헤이그특사 파견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08년 연해주(沿海州;프리모르스키)에서 이범윤(李範允)이 의병을 조직할 때 지원금을 보냈으며,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의 계동학교(啓東學校)․세동학교(世東學校)․신동학교(新東學校)를 통합하여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설립할 때 1000루블의 거액을 보내는 등 교육구국운동을 지원하였다. 10년 국권피탈 뒤 자결하였다. 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 이위종(李瑋鐘)[ 1887~? ]
조선 말기 외교관․독립운동가.
서울 출생
외교관인 아버지 이범진(李範晉)을 따라 어린 시절부터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을 순회하여 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 등에 능하였다.
일찍이 러시아 페테부르크 주재 한국공사관 참사관을 지내다가 1905년(광무9) 을사조약으로 공사관이 철수된 후에도 계속 러시아에 머물러 있었다.
1907년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리준, 이상설 등과 함께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화란 헤이그에 갔으나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참석을 거부당했다.
때마침 만국기자협회의 호의로 연설할 기회를 얻게 되자 한국을 위해 호소하는 제목으로 한국의 억울한 처지와 일본의 야만적 침략을 공박, 세계의 여론에 호소했다.
이때 일본 정부는 이들 3인에 대한 궐석재판을 본국에서 열고 종신징역을 선고, 체포령을 내리자 이미 순국한 리준을 헤이그에 묻은 후, 이상설과 함께 페테부르크․런던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
그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다시 페테부르크에 갔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 이준(李儁)
[ 1859~1907 (철종 10~순종 1) ]
한말 순국열사.
자는 무칠(舞七). 호는 일성(一醒).
29세 때 북청에서 초시에 합격, 1894년(고종 31) 함흥 순릉참봉이되었다.
다음해 법관양성소를 졸업,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다가 사임하고, 서재필, 리승만,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초대 평의장에 취임했으며, 서재필(徐載弼), 이승만(李承晩)과 함계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발행했다.
이 해 친로파 내각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하여 1898년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 독립협회의 일을 보았다.
1904년(광무 8) 일본이 국내의 황무지 개간권을 얻으려고 하자 대한보안회를 조직, 이를 저지시키려는 민중운동을 전개했고,일진회에 대항하여 윤하영, 양한묵 등과 공진회를 조직, 회장이 되어 친일적인 대신들을 규탄하다가 철도로 유배, 다음해 민영환(閔泳煥), 이용익의 주선으로 석방된 후 윤하영(尹夏榮), 양한묵(梁漢黙) 등과 헌정연구회를 조직, 다시 항일국민운동을 벌이면서 1905년 유성준(兪星濬), 전덕기(全德基) 등과 국민교육회를 조직한 후 보광학교를 세웠고,이 해 평리원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에 임명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가담,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소장이 되어 모금운동을 버렸으나 일진회의 방해공작으로 좌절, 이 해 고종으로부터 화란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밀령으로 4월 22일 서울을 출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李瑋鐘)과 합류, 헤이그에 도착하여 회의 개최일인 6월 5일 의장을 방문하고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했으나 일본인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할자격을 얻지 못하고 울분으로 순국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 이승만(李承晩)
[ 1875~1965 ]
독립운동가․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운남. ). 황해북도 평산(平山) 출신.
어려서 한학을 배웠으며, 1894년(고종 31) 배재학당에 입학, 이듬해 졸업하고 모교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이 무렵 개화사상에 눈을 뜨고 기독교에 입교하는 한편, 서재필(徐載弼)의 영도하에 설립된 협성회, 독립협회 등의 간부가되어 개화운동에 투신했다.
1898년(광무 2) 정부 타도를 획책했다는 황국협회의 무고로 독립협회의 간부와 함께 투옥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04년 민영환의 주선으로 석방, 이해 겨울 미국에 건너가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한 미국 정부의 관여를 호소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미국에 머물면서 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 등에서 수학,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해 한일합방이 조인되자 귀국하여 기독교 청년회를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투옥, 미국 선교사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1912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1914년 하와이에서 <한국태평양(韓國太平洋)>을 창간, 독립정신을 고취했고, 1917년에는 호놀룰루에 기독교학원과 독립군관학교를 세웠다.
1919년에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에 추대되었고, 1921년 임시정부의 배척으로 대통령을 사임하고 계속해서미국과 하와이를 근거로 독립운동을 했다.
1945년 10월에 귀국,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대한민국대표 민주의원 의장, 민족통일총본부 총재 등을 역임, 이듬해 한국의 독립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에 다녀왔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초대의장이 되고, 7월에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후 강력한 반공배일정책을 견지하고,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했으며, 625동란 때는 U.N.의 도움을 얻어 공산군을 격퇴했다.
1951년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자유당을 창당, 이듬해 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54년 초대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조항(重任制限條項) 철폐를 골자로 한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으로 대통령에 3선되었고,
그러나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해 자유당을 창당, 여러 차례 불법적 개헌을 하여 물의를 일으켰으며 1960년 315 부정선거로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 의거로 하야(실각), 하와이에 망명하여 병사했다.
저서로 《독립정신》 《일본폭로기》 등이 있다.
 
□ 집성촌
[ 집성촌 ]
함북 길주군 덕산면 일원
함북 길주군 양사면 일원
함북 경성군 어대진읍 일원
경기도 연천군 중면 도연리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 일원

□ 제향
조경단(肇慶壇)-시조.사공공  전북기념물 제3호  전북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건지산)  4.10 제향
조경묘(肇慶廟)  시조 및 시조비 -신판(神版)봉안묘 전북 유형문화재 제8호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경기전(慶基殿) 태조고황제 수용 봉안전(奉安殿) 사적 339호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음9.9 

□ 전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
김(金), 도(都), 동(董), 동(童), 류(柳), 마(馬), 박(朴), 변(邊), 선(宣), 심(沈), 애(艾), 연(連), 오(吳), 유(劉), 이(李), 장(張), 전(全), 정(鄭), 주(朱), 최(崔), 호(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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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104 성씨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21  `창녕조씨   

수원백씨(水原白氏)

총 30개의 본관과 309,572명이 있다.(1985년)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3만 3759가구에 인구 19만 1076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27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7만 3853으로 전국가구 구성비 0.7 %, 순위는 274성

□ 백씨의 본관
본관은 일반적으로 수원(水原) 단본으로 알려져 있으나, 문헌에는 그 외에 남포(藍浦), 직산(稷山), 임천(林川), 태인(泰仁), 적성(赤城:淳昌), 문경(聞慶), 청도(淸道), 해미(海美), 남해(南海), 해안(海顔:大邱), 부여(扶餘), 평산(平山) 등 10여 본이 전한다.
또 《증보문헌비고》에는 157본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모두 수원백씨의 분파(分派)로서 오늘날에는 수원백씨로 일원화되었으며, 남포, 태인, 청도, 부여 등이 아직도 호적상으로만 통용될 뿐, 대외적으로는 수원백씨로 통칭된다. 이밖에 염포백씨, 부여백씨, 대흥백씨도 모두 수원백씨에서 갈려나간 성씨다.
□ 시조 송계공
도시조는 중국의 황제 헌원씨(軒轅氏)의 후예 백우경(白宇經)으로, 본디 당나라 사람이며 780년(선덕왕 1년) 신라에 귀화하였다.
그의 14대손 창직(昌稷)이 1세(中始祖)이며, 수원백씨의 시조 휘(揮)는 그의 증손이다.
다른 본관은 휘의 직계, 방계에서 분파한 것으로 전한다.
백씨의 시조 우경(宇經)의 자(字)는 경천(擎天)이며 호(號)는 송계(松溪)이시다.
공은 원래 당(唐)나라 때 소주(蘇州) 사람으로 인품(人品)이 고결(高潔)하고 학문이 뛰어나 당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관작(官爵)이 첨의사(僉議事)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 그러나 간신배들의 모함을 당하자 스스로 당나라를 떠나 신라(新羅)로 건너오시니 때는 신라 선덕왕(宣德王)원년(元年:당의 덕종(德宗)원년), 서기 780년 경신년(庚申年)이었다.
시조 송계공(松溪公)이 신라 조정에 누린 관작(官爵)은 이조(李朝) 세종조(世宗朝)의 명신 황공희(黃公喜)가 지은 영락보(永樂譜) 서문에 <위지대상(位至大相)>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기해대동보(己亥大同譜) 원계편(遠系篇)과 시조 송계공의 망단비(望壇碑)에도 <신라의 벼슬이 좌복야사공 대사도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은 계림(鷄林) 자옥산(紫玉山) 아래에 영월당(迎月堂) 만세암(萬歲庵)을 짓고 거처로 삼았다.
그런데 선덕왕이 어느 날 몸소 찾아와 암자(庵子) 이름을 정혜사(淨惠寺)라고 고쳐 짓고 스스로 붓을 들어 영월당(迎月堂) 현판에 경춘(景春)이라고 썼다 한다. 또한 사운시(四韻詩)를 지어 주기에 그것을 액자에 새겨 걸었다고 하나 세월이 워낙 오래 되어 전해지지 않아 유감이다.
당나라 황제(皇帝)가 여러 차례 돌아오라고 불렀으나 공은 끝내 응하지 않았다. 송계공은 이미 신라 국정에 깊이 관여하며 제자들을 많이 모아 가르치는데 전념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공이 신라의 학문을 일으키고 학문에 힘쓰다 신라에서 73세에 별세했다. 공의 묘(墓)는 옥산(玉山) 남쪽 기슭에 있으며 인근 주민들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 묘를 백정승묘라고 말하고 있다.
송계공의 묘는 실전(失傳)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공의 음덕과 후손들의 열(熱)과 성(誠)으로 우리는 1965년에 공의 묘를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후손들은 그 묘역(墓域)을 중수(重修)하고 제단비(祭壇碑)를 세웠다. 1975년에는 화수회(花樹會) 중앙총본부가 주관하여 시조의 재실(齋室) 건립에 착수, 완공하고 영월당(迎月堂)이라 이름하니 진정 백씨의 경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일에 전국 일가들이 물심양면에 걸쳐 헌신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들은 해마다 양력 5월 첫째 일요일을 시조 송계공의 제일(祭日)로 정하고 전국의 일가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며 시조 송계공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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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씨성(白氏性)의 근원
백씨성의 근원은 만성통보(萬姓統譜)에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皇帝之後 此乃中華白性之源也 / 始祖松鷄公卽中華蘇州人而居東方
황제(皇帝)의 후손이 중국 백씨성의 근원이며 시조 송계공은 중국 소주 사람이 동방에 건너와 살았다는 뜻이다. 백씨의 조상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황제 헌원(軒轅)이라는 것이다.
또한 제왕전승성원도를 보면 중국 白氏의 시조는 황제의 후손인 백을병(白乙丙)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백씨의 기해대동보는 제왕전승성원도에 시조 백우경이 백을병의 후손인 백계반(白季般)의 후손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백계반은 백굉(白 )의 둘째 아들이며 당대의 유명한 시인 백낙천(白樂天:향산(香山) 백거이(白居易))의 아버지인 백계경 (白季庚)의 아우로 되어 있다.
백낙천이 지은 백굉의 사장(事狀)에 따르면 초평왕(楚平王) 웅거(熊居)의 손자(平王太子建의 아들)인 승(勝)이 오(吳)와 초(楚) 사이에 살면서 백공(白公) 이라고 일컬어 성씨로 삼았다. 그러므로 백씨는 우성(芋性)이며 초나라의 공족(公族)이다 (백씨문헌비고). 또한 이 사장은 백을병의 후손인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가 백굉(白 )의 27대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해대동보 서문은 시조 송계공과 백낙천(白樂天)의 관계에 언급하고 있다. 즉 <향산문공년보(香山文公年譜) 자서문(自序文)에 기록하기를 시집(詩集) 5권중 한권은 신라에 거주하는 족인(族人)이라 함은 당시의 송계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나 확고한 문적(文籍)이 없고 소연(昭然)한 계통이 전해 오지 않았으니 고증할 곳이 없음에 매우 유감이로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향산은 백낙천(백거이)의 호이며 시집 5권이란 백낙천의 시집을 가리킨다. 현재에도 송계공은 백계반의 후손이 아니라 아들이며, 따라서 송계공은 백낙천과 사촌간이라고 주장하는 종인(宗人)도 있었다. 그러나 송계공이 중국의 시성(詩聖) 백낙천과 사촌간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우리 수원 백씨는 1997년 3월 중국 현지에 와서 헌원황제 대제(大祭)를 주관해 달라는 중국하남성 정부와 신정시 염황(炎黃)문화연구회의 공식 초청을 받았다. 중앙화수회 진우(鎭禹)회장은 22명의 제관(祭官)들과 함께 중국을 방문, 4월 9일(陰 3월 3일) 대제를 마친 후 백낙천 묘소를 참배하고 기념관을 관람한 자리에서 중국 백씨들과 담소하는 자리에서 송계공과 백낙천이 사촌간이라는 사실을 확인 한 것이다.
□ 인물
백거이(白居易) : 자는 낙천(樂天)이요, 호는 향산(香山)이다. 서기 772년 1월 20일생, 서기846년에 졸하다.
동양의 시선(詩仙)
백우경(白宇經) : 자는 경천(擎天)이요, 호는 송계(松溪)다. 서기 780년에 입국, 73세에 서거하다.
고려시대 대표적 인물로는 성리학자 백이정(燎正), 공민왕 때 명신․학자인 백문보(文寶)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정치가, 유학자인 백인걸(仁傑), 그의 아들 백유함(惟咸), 선조 때의 시인 백광훈(光勳), 한말의 의사 백낙관(樂寬), 한국 신교(그리스도교) 사상 최초의 순교자 백홍준(鴻俊)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총 80명을 배출하였다.
■ 백인걸(白仁傑)
 [1497 ~ 1579]
조선 중기의 유학자. 자 사위(士偉). 호 휴암(休庵). 시호 충숙(忠肅). 개시(改諡) 문경(文敬).
조광조(趙光祖)의 제자이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에 스승과 동지를 잃고 금강산에 입산했다. 그 후 돌아와 1537년 식년문광 병과로 급제하고, 성균관에 오래 머무르다가 검열 남평(南平)현감 호조정랑 지평 등을 역임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소윤(小尹)에 의해 파직되고 1947년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에 연루되어 안변(安邊)에 유배되었다. 1551년 풀려나와 오랫동안 고향에 은거하다가 소윤의 거두 윤원형(尹元衡)이 죽자 복직하고, 1567년 71세의 나이로 교리(校理)가 되고, 선조 때 직제학 이조참판 대사간 대사헌 공조참판,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등을 역임했다.  1578년(선조 11)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이듬해 동서분당(東西分黨)의 폐단을 지적하고 군비확장을 강조하였다. 선조 때 청백리(淸白吏)로 뽑혀 기록되었으며 학문에도 뛰어났다. 남평의 봉산(蓬山)서원, 파주(坡州)의 파산(坡山)서원에 배향되었다.
■ 백광훈(白光勳)
 어려서부터 시재가 있어 13세때 상경하여 양응남(梁應南), 노수신(盧守愼) 등에게 사사했다.
1564년(명종 19)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산수를 즐기며 시서에 열중했다.
1572년(선조 5)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을 따라 백의로 제술관이 되어 사신을 감탄게 했다.
1577년 처음으로 선릉참봉으로 관직에 나갔으며 이어 정릉, 예빈시, 소격서의 참봉을 지냈다.
당시의 최경창(崔慶昌), 이달(李達)과 함께 조선에서 처음으로 성당의 시풍에 들어갔다 하여 삼당으로 불렀다. 글씨에 뛰어났다. 강진의 서봉서원에 제향되었다.
■ 백정기(白貞基)
 한말 독립운동가. 19세에 상경했다가 마침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과 전단을 가지고 귀향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 후 경향 각지를 잠행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 북경으로 망명하여 일제의 군사시설을 파괴 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1925년 상해로 내려가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여 농민운동에 투신했고, 1928년에 개최된 동방무정부주의자 연맹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1933년 3월 17일 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상해 홍구에서 주중 일본대사 유길(有吉)을 암살하려고 모의하다 가 발각되어 피체, 장기재판소에서 무기형을 선고받았고 복역중 옥사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 세계(世系)와 중시조(中始祖)
백씨의 세수(世數)는 시조 송계공(松溪公)으로부터 연계하여 기산(起算)함이 원칙이다. 그러나 정사대동보, 갑자대동보, 기해대동보, 임술대동보가 모두 중시조(中始祖) 창직(昌稷)으로부터 세수를 기산하고 있다. 이번 정축(丁丑)대동보도 이 선례에 따라 중랑장공 (中郞將公)으로부터 세수를 연계하기로 했다. 송계공으로부터 중랑장공까지 연계할 고증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발간한 백씨의 보첩은 [백씨 원계도]와 같이 중시조를 송계공의 14대손(15世)으로 하여 연계한 예도 있다. 그러나 중랑장공을 송계공의 14대손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우선 연대와 세수에 모순이 생긴다. 즉 시조 송계공이 신라에 입국 (入國)한 연대가 780년(선덕왕 원년)이며 중시조의 관직이 중랑장에 이른 것이 신라의 경명(景明) 왕조(재위기간 917~924)이므로 그 연대차는 경명왕의 재위 말년을 기준으로 한다 할지라도 144년에 불과하다. 한 세대는 30년으로 계산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그 144년은 5대에 불과하다. 가령 한 대를 20년으로 계산하더라도 7대나 8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사이에 15대가 경과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둘째 우잠공(牛岑公) 영(永)이 송계공 현손(玄孫)이라는 것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잠공 영이 우잠태수를 제수한 연대가 신라 헌덕왕조의 병오(丙午)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연대는 서기 826년이다. 이 연대는 송계공이 신라에 입국한 연대(서기 780년)와 비교하면 46년에 불과하다. 이 사이에 송계공의 현손 우잠공이 장성(長城)을 쌓은 사실도 수긍하기 어렵다.
기해대동보도 <동국사기(삼국사기)에 우잠공 영이 신라 헌덕왕 병오년에 축성한 사적(事蹟)이 기재되어 있고 한림학사공(翰林學士公) 사유(思柔=중시조의 손자)가 과거에 합격한 것이 고려 광종(光宗) 계유(癸酉)라고 하였으니 그 사이가 148년이다. 대개 30년을 1세로 계산하니 그 예에 준하면 그 사이가 5~6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제종(諸宗)의 계첩(系諜)을 종합해 보면 10세(사실은 13세)로 되어 있으니 세대와 세대의 사이가 너무 근접하여 전후 대수에 착오가 있지 않은가 하여 모든 보첩에 전해오는 연계와 소목(昭穆: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를 살렸으나 시종 미상(未詳)하므로 중랑장공 위 창직으로부터 연계하여 대수를 기재하노라>라고 명기하고 있다.(壬戌譜에서)
평장사공(平章事公) 광원(光元)과 중시조공의 연대차에서도 세수의 모순성을 찾아볼 수 있다. 병진보(丙辰譜)나 기해대동보 [원계편(遠系篇)]와 같은 과거의 백씨 세보(世譜)는 광원의 세수를 시조 송계공으로부터 9세, 창직의 세수를 15세라고 기재하고 있다. 그런데 백씨문헌통고 (서기 1970년 간행)에 따르면 평장사공이 문하시중 벼슬에 오른 것이 신라 경문왕조(재임기간 서기 861-875년)로 되어 있다. 중시조가 중랑장 벼슬에 오른 것은 신라 경명왕조(재위기간 서기 917-924년)으로 되어 있다. 이 두분이 비슷한 연세에 문하시중과 중랑장 벼슬에 올랐다면, 두분의 연령차는 50년 내외에 지나지 않는다. 평장사공이 문하시중에 오른지 40년~60년 뒤에 그 6대손이 중랑장 벼슬에 올랐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
백씨문헌통고(1권)에는 <평장사공은 문하시중사동으로 진성왕을 역사(歷事)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진성여왕의 재위 기간이 서기 887년에서 서기 897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평장사공과 중랑장공의 세수차(世數差)가 6세라는 점에 모순성이 생긴다.
그러나 중랑장공으로부터는 연계와 소목에 관한 고증이 명확하다. 즉 진천임씨보(진천임씨는 중랑장공의 배위(配位))는 시랑공 길(吉), 시랑 탁(卓)이 외손(外孫)으로 기재하고 있다. 낭주최씨보(낭주최씨는 사유(思柔)의 배위, 사유의 아버지가 길(吉)이며 아들이 휘(揮)라고 명기하고 있으며 문헌비고씨족고(文獻備考氏族考)는 진사공 휘(揮)가 중랑장공의 증손이라고 명기하고 있어 그 소목이 뚜렷이 고증되어 있는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시조 송계공으로부터 중시조 중랑장공에 이르기까지를 연계하여 세수를 기산하는 것은 큰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사실에 충실을 기하기 위해 중랑장공을 1세로하여 세수를 기산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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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氏의 관향(貫鄕)
한 성족(姓族)을 상징하는 지명(地名)을 관향(貫鄕), 본(本) 또는 본관(本貫)이라고 한다. 시조 또는 중시조의 고향이나 그 성족과의 깊은 연고지(緣故地)를 관향으로 삼는 것이 통례(通例)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관향은 성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갑자대동보를 발간할 때 각파 대표들이 회합하여 백씨의 관향을 [수원(水原)]으로 단일화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오늘날 백씨는 대부분 수원을 본관으로 한다. 그러나 보령의 이재공파 후손들은 남포로 관향하고 있으며 대흥, 청도, 부여, 임천, 태인등을 관향으로 삼고 있는 종파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수는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기해대동보 서문 [관향]에서 인용)
백씨가 언제부터 수원을 관향으로 삼았는지는 문헌상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영락보 서문에 따르면 조선왕조 세종조에 이미 수성(隋城) 백씨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조에 현재의 수원을 수성이라 하였다.
수원은 백씨의 관향으로 삼기에 충분할 정도로 백씨와 연고가 깊은 지방이다. 중시조 중랑장공의 증손(曾孫)인 진사공 휘(揮)가 고려 목종조(서기 987~1009년)에 대사마대장군으로 수원군에 봉해져 수원지방을 봉토(封土)로 받았다고 한다. 또 중랑장공의 8세손인 정당문학공 천장(天藏)이 원(元)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 이부상서의 벼슬을 지내고 고려조 충선왕(1309~1314년)의 부름을 받고 돌아오니 충선왕은 그를 수원백(水原伯)으로 봉했다 한다. 이와 같이 수원은 진사공이나 정당문학공과 깊은 연고를 맺은 곳이므로 백씨는 수원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역사적 추리이다.
수원은 현재의 경기도 수원시와 화성군 일대. 이 곳은 원래 고구려의 매홀군에 속했다가 신라 진흥왕조에 신라에 귀속되었으며 통일신라 시대인 경덕왕대에는 수성이라 칭했다. 고려 태조대에는 수주(水州)로 승격했고 그후 수원이라 개칭했다(수원도호부, 혹은 수원부). 그 뒤 조선 세종조에 수성군(隋城郡)이라 개칭하고 다시 부(府:중종조), 유수부(留守府:정조조)로 승격시켰고 해방 후 수원시로 승격시키면서 수원을 제외한 종전의 수원지역을 화성군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른다. 수원은 수주, 수성이라고 칭한 외에 한남(漢南), 수성(水城)이라고 칭한 적도 있었다.
백씨는 모두 송계공의 후손들이다. 백씨의 대동단결을 도모하려면 백씨의 관향을 [수원]으로 통일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은 전국의 대다수 일가들의 지배적인 의견이기도 하다. 그러나 관향을 달리해도 백씨는 한 할아버지의 자손이므로 관향을 불문에 붙이고 몇차례 대동보를 발간했다. 대동보 명칭도 관향을 붙이지 않고 [백씨대동보]라고만 표기했다.
이번에 정축대동보를 편찬하면서 <먼 훗날의 자손들을 위해 이번만은 관향을 통일해야한다>는 의견이 대두했다. 대동보편집위원회은 이 주장을 외면할 수 없어 전후 10차례에 걸쳐 각계파 대표자회의를 소집했다. 일가들은 회의 때마다 열띈 토론을 거듭, [관향 통일에 대한 당위성]을 추구했다. 이 토론에서 원계에 속하는 상(尙)선조가 이미 한주태수(漢州는 예전에 수원지방을 일컬는 지명)를 지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같은 원계의 문원공 영(永)이 한남 위례성에 살았으며 우잠태수 벼슬을 지내면서 패강(浿江) 삼백리 장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고증자료로 제시했다. 이 밖의 여러 가지 고증 자료를 종합, [백씨는 중시조 이전부터 수원과 인연을 맺어 왔다]는 것이 확증됐다. 그래서 1996년 12월 23일 제12차회의는 관향을 수원으로 통일한다는데 의견을 모았고 이번에 새로 발간하는 대동보도 [수원백씨대동보]로 발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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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
공(貢), 김(金), 동(董), 방(房), 백(白), 요(姚), 이(李), 최(崔)
□ 性의 發祥地
 백씨성의 근원에 대한 만성통보(萬姓統譜)기록 내용
  皇帝之後 此乃中華白性之源也
  始祖松鷄公卽中華蘇州人而居東方
-이 글은 황제(皇帝)의 後孫이 中國 白氏性의 根源이며 始祖 松溪公은 곧 中國 蘇州 사람이 東方에 건너와 산 것이라는 뜻이다.
이 記錄에 따르면 白氏의 祖上은 歷史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황제 헌원(軒轅)이라는 것이다.
또한 제왕전승성원도를 보면 중국 白氏의 시조는 황제의 후손인 백을병(白乙丙)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백씨의 기해대동보는 제왕전승성원도에 시조 백우경이 백을병의 후손인 백계반(白季般)의 후손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백계반은 백굉(白)의 둘째 아들이며 당대의 유명한 시인 백낙천(白樂天:향산(香山) 백거이(白居易))의 아버지인 백계경 (白季庚)의 아우로 되어 있다.
-백낙천이 지은 백굉의 사장(事狀)에 따르면 초평왕(楚平王) 웅거(熊居)의 손자(平王太子建의 아들)인 승(勝)이 오(吳)와 초(楚) 사이에 살면서 백공(白公)이라고 일컬어 성씨로 삼았다. 그러므로 백씨는 우성(芋性)이며 초나라의 공족(公族)이다 (백씨문헌비고). 또한 이 사장은 백을병의 후손인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가 백굉(白 )의 27대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해대동보의 "백씨의 연원편"에서는 <백씨의 유래를 더듬어보면 상고제왕 자손도에 황제 헌헌씨의 제15대손에 백을병이라는 후손이 있어서 비로소 중화의 백성이 되었다 전하고 시조 송계공이 중화인으로 신라에 건너왔으며, 향산 백낙천(白樂天)의 향산문공년보(香山文公年譜) 자서문(自序文)에 기록하기를 시집(詩集) 5권중 한권은 신라에 거주하는 족인(族人)이 가져다가 신라에 두었다 했으나 신라에 거주하는 족인(族人)이라 함은 당시의 송계공을 지칭함이 아니었을까 하나 확고한 문적(文籍)이 없고 소연(昭然)한 계통이 전해 오지 않았으니 고증할 곳이 없음에 매우 유감이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향산은 백낙천(백거이)의 호이며 시집 5권이란 백낙천의 시집을 가리킨다. 현재에도 송계공은 백계반의 후손이 아니라 아들이며, 따라서 송계공은 백낙천과 사촌간이라고 주장하는 종인(宗人)도 있었는데. 그것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수원백씨는 1997년 3월 중국 현지에 와서 헌원황제 대제(大祭)를 주관해 달라는 중국 하남성 정부와 신정시 염황(炎黃) 문화연구회의 공식 초청을 받았다. 중앙화수회 진우(鎭禹) 회장은 22명의 제관(祭官)들과 함께 중국을 방문, 4월 9일(陰 3월 3일) 대제를 마친 후 백낙천 묘소를 참배하고 기념관을 관람한 자리에서 중국 백씨들과 담소하는 자리에서 송계공과 백낙천이 사촌간이라는 사실을 확인 하였다.

始祖 松溪公 神道碑 銘 내용

-自古로 흥왕업(興王業) 진국위(振國威)에 현철충량지인(賢哲忠良之人)이반린부익(攀鱗附翼)하야 이존홍기(以尊鴻基)하니 백공(白公) 휘(諱)는 우경(宇經)이요 자(字)는 경천(擎天)이요 호(號)는 송계시야(松鷄是也)라 공(公)은 당소주인(唐蘇州人)이라
 
-당덕종원년(唐德宗元年)에 피소인(避宵人)두이기(杜以奇) 배현묵지참(裵玄墨之讒)하야 자둔우아국(自遯于我國)하니 시즉(時卽) 신라선덕왕원년(新羅宣德王元年)이라, 당차시(唐此時)하야 동방지인(東方之人)이 혹유이(或儒而) 무무천여재(貿貿千餘載)라. 교화무적(敎化無跡)하고 강기일이(綱紀日弛)하야 회명부새(晦溟否塞)일새 이공지성당문화수련지기백(以公之 盛唐文化修鍊之 氣魄)으로 자당누징(自唐累徵) 불반이보좌신조(不返而 輔佐新朝)하야 중신기성지유풍(重新箕聖之遺風)하고 복명사도지교(復明斯道之敎)하야 세조구속지염오(洗조舊俗之染汚)하니 나조지치(羅朝之治) 의성중흥지업적(意成中興之業蹟)이라 공위지좌복사사공겸대사도(公位之左僕射司空兼大司徒)하다.

-치전후(致全後)에 퇴거우계림 자옥산하옥천동(退去于鷄林 紫玉山下玉泉洞)하야 종언여생(終焉餘生)하니 향년(享年) 칠십삼세(七十三歲)라. 장우용추지남록(葬于龍湫之南麓)하고 후곤세수(後昆世守)러니 수기일거월제(隨其日居月諸)하야 사산분주(四散分住)에 실기묘소지위(失其墓所之位)하야 성소지전(省掃之典)이 막급언자(莫及焉者) 누백재의(累百載矣)라 금언묘예지감천성심(今焉苗裔之感天誠心)으로 탐득내(探得乃) 공지진조(公之眞兆)하고 장벌궁석(將伐穹石)하여 치대규(峙大逵) 소기대절이욕거루백재미황지전(昭其大節而 欲擧累百載靡遑之典)할세 후곤(後昆) 남필(南弼) 규현(奎鉉)양보(兩甫) 대기종중첨의(代其宗中僉議)하야 문명우불영(問銘于不 )하니 이만생소학(以晩生 學)으로 개감당시촉재(豈敢當是囑哉)아. 연(然)이나 불감예사이본지이사론(不敢禮辭而本之以史論)하고 참지이가장( 之以家狀)하야 위지서자(爲之書者)라.

-공(公)이 유기국(有器局) 유지절(有志節)하고 영자수기(英資秀技)와 강개(慷慨)방정(方正)은 개득어천부자연야(盖得於天賦者然也)며 약기진퇴지간(若其進退之間)에 작작연유여유자(綽綽然有餘裕者)는 학문지력(學問之力)을 고불가무야(固不可誣也)라.남전지옥(藍田之玉)을 이종우계림(移種于?林)하니 명공석유(名公碩儒)는 뇌락상련(磊落相連)하고 효제충의(孝悌忠義)와 경술문장(經術文章)이 현요인지이목이가엽(炫燿人之耳目而柯葉)이 태편일국불가승기자(殆遍一國不可勝記者)는 성유호(誠由乎) 공지 국궁이육후예(公之 鞫躬而育後裔)하야 진진무궁지택야(振振無窮之澤也)니 의여성재(椅歟盛哉)라.  명왈(銘曰)

위아자옥(위아紫玉) 정신피래(挺身避來)
유회영도(惟懷永圖) 납책나조(納策羅朝)
택피생령(澤被生靈) 각차궁석(刻此穹石)
존공영장(尊公靈藏) 둔우동방(遯于東方)
고사회당(固辭回唐) 위업무량(偉業無量)
공수묘당(功垂廟當) 영조무강(永詔無彊)

西紀 一九九六年 丙午 三月
大韓民國 制憲國會議員 礪山   宋必萬 謹識
後孫 前內務部長官 및 大法官    漢成 謹書
檀紀 四千三百年 丁未 冬至日           竪. 끝.
 
□ 백씨의 관향 (本貫)
 -吾宗(오종:우리백씨)의 貫鄕(관향)에 대하여 傳說(전설)이 區區(구구)하니 傳來 文史(전래 문사)에는 처음에는 開城府(개성부)라 하다가 後(후)에는 水原(수원)이라 하였으나 그 內歷(내력)을 밝히지 않았으니 考憑(고빙)할 곳이 없고 後裔(후예)에 이르러 功勳(공훈)으로 一土(일토)를 分封(분봉)하면 그 地名(지명)으로 貫(관)을 삼기도하고 丙火(병화)로 避亂(피난)하여 故鄕(고향)의 地名(지명)으로 貫(관)을 삼기도 하여,
-옛날 萬姓譜(만성보)에는 우리貫鄕(관향)이 一百八十四本(184본)이요 典故大方(전고대방:書名)에는 十二貫鄕(12관향)으로 分(분:나누어저) 있었으나 丙寅年(병인년:檀紀 四二五九年)에 甲子大同譜(갑자대동보)를 畢役後(필역후:만든후) 各派(각파)가 貫(관)을 水原(수원)으로 單一化(단일화) 할 것을 合意(합의)하여 지금은 大體(대체)로 一致(일치) 되었으나 아직도 水原貫(수원 관) 이외의 貫鄕(관향)으로 서는 "藍浦(남포:보령 이제공파), 大興(대흥:영해 담암공파), 淸道(청도:오산군파),  扶餘(부여:양산 송담공파), 林川(임천:임원 부원군파),  泰川 泰仁(태천, 태인: 평북)등 이 있어 九 貫鄕(관향)이 있으나 대외적으로는 大體(대체)로 水原白氏(수원백씨)라 稱(칭:말하다) 하나니라. [기해 대동보 관향편에서]
-삼가 제종의 보첩을 종합하여 보면 黃翼成公이 序한 一卷 譜帖에 일으되 송계공이 蘇州로부터 東으로 건너 수성(水原)에 居住하고 因하여 貫鄕으로 하다!  하였으며
-혹은 중시조 중랑장공(諱 昌稷)의 曾孫 진사공(諱 揮)이 고려 목종조에 대사마 대장군으로 수원군을 封 하여 비로소 수원관을 쓰게 되었다 하고,
-또는 중랑장공의 팔세손 정당문학공(諱 天藏) 이 중국에서 금자광록대부 이부상서로 고려조 충선왕의 소환을 받아 귀국하여 수원백을 封 함으로 貫이 되었다고 하니
-과연 어느 때의 수원貫이 분명 한가를 보학상으로나 사학상으로 명확치 못하니 유감이로되 송계공의 동일한 자손이라는 것은 명확하니 그의 관향도 또한 동일한 것은 사실이라 후일 보가는 이를 밝히기를 바라노라!  라고 [기해 대동보 관향편] 에 기록되어 있다.
-시조 송계공 신도비에 한 성족(姓族)을 상징하는 지명(地名)을 관향(貫鄕), 본(本) 또는 본관(本貫)이라고 한다. 시조 또는 중시조의 고향이나 그 성족과의 깊은 연고지(緣故地)를 관향으로 삼는 것이 통례(通例)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관향은 성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甲子대동보를 발간할 때 각 파 대표들이 회합하여 백씨의 관향을 [수원(水原)]으로 단일화 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오늘날 백씨는 대부분 수원을 본관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보령의 이재공파 후손들은 남포로 관향하고 있으며 대흥, 청도, 부여, 임천, 태인등을 관향으로 삼고 있는 종파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수는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기해대동보 서문 [관향]에서 인용)
-백씨가 언제부터 수원을 관향으로 삼았는지는 문헌상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영락보 서문에 따르면 조선왕조 세종조에 이미 수성(隋城) 백씨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조에 현재의 수원을 수성이라 하였다.
-역사적으로 보아 수원은 백씨의 관향으로 삼기에 충분할 정도로 백씨와 연고가 깊은 지방이다. 중시조 중랑장공의 증손(曾孫)인 진사공 휘(揮)가 고려 목종조(서기 987~1009년)에 대사마대장군으로 수원군에 봉해져 수원지방을 봉토(封土)로 받았다고 한다. 또 중랑장공의 8세손인 정당문학공 천장(天藏)이 원(元)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 이부상서의 벼슬을 지내고 고려조 충선왕(서기 1309~1314년)의 부름을 받고 돌아오니 충선왕은 그를 수원백(水原伯)으로 봉했다 한다. 이와 같이 수원은 진사공이나 정당문학공과 깊은 연고를 맺은 지방이므로 백씨는 수원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역사적 추리라고 생각한다.
-수원은 현재의 경기도 수원시와 화성군 일대를 말한다. 이 지방은 원래 고구려의 매물군에 속했다가 신라 진흥왕조에 신라에 귀속되었으며 통일신라 시대인 경덕왕대에는 수성이라 칭했다. 고려 태조대에는 수주(水州)로 승격했으며 그후 수원이라 개칭했다(수원도호부, 혹은 수원부). 그 뒤 이조 세종조에 수성군(隋城郡)이라  개칭하고 다시 부(府:중종조), 유수부(留守府:정조조)로 승격시켰고 해방 후 수원시로 승격시키면서 수원을 제외한 종전의 수원지역을 화성군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원은 수주, 수성이라고 칭한 외에 한남(漢南), 또는 수성(水城)이라고 칭한 적도 있었다. 수원의 명칭은 백씨의 족보를 이해하는데 여러 가지 참고가 될 것이므로 특별히 수원의 명칭에 관해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았다.
-백씨는 모두 송계공의 후손들이다. 백씨의 대동단결을 도모하려면 백씨의 관향을 [수원]으로 통일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은 전국의 대다수 일가들의 지배적인 의견이기도 하다. 그러나 관향을 달리해도 백씨는 한 할아버지의 자손이므로 관향을 불문에 붙이고 몇차례 대동보를 발간했다. 대동보 명칭도 관향을 붙이지 않고 [백씨대동보]라고만 표기했다.
-그러나 이번에 정축대동보를 편찬하면서 <먼 훗날의 자손들을 위해 이번만은 관향을 통일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했다. 대동보 편집위원회은 이 열화와 같은 주장을 외면할 수 없어 전후 10차례에 걸쳐 각계파 대표자회의를 소집했다. 일가들은 회의 때마다 열띈 토론을 거듭하여 [관향 통일에 대한 당위성]을 추구했다. 이 토론에서 원계에 속하는 상(尙)선조가 이미 한주태수(漢州는 예전에 수원지방을 일컬는 지명)를 지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같은 원계의 문원공 영(永)이 한남 위례성에 살았으며 우잠태수 벼슬을 지내면서 패강(浿江) 삼백리 장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고증자료로 제시했다.
-이 밖의 여러 가지 고증 자료를 종합한 결과 [백씨는 중시조 이전부터 수원과 인연을 맺어 왔다]는 것이 확증됐다. 그래서 1996년 12월 23일 제12차회의는 드디어 관향을 수원으로 통일한다는데 의견을 모았고 이번에 새로 발간하는 대동보도 [수원백씨대동보]로 발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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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118 성씨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21  `진주강씨   
진주강씨(晋州姜氏)
□ 강씨(姜氏)의 시작과 본관
4500여 년 전 최초로 姜氏를 득성한 이는 염제신농(炎帝神農)씨이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신농(神農)씨의 이름은 석년(石年)이며 천수<天水 지금의 중국 감숙성(甘肅省) 위천현(渭川縣)> 지방에서 출생하여 강수(姜水 협서성 기산현) 땅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 곳의 지명을 따서 성을 姜이라고 하였다.
중국의 강씨는 모두 관향을 천수(天水)로 쓰다가 수천년 내려오면서 분파되어 운남(雲南), 광동(廣東), 산서(山西), 니연(尼淵), 유이(維夷) 등으로 갈리었다.
강씨는 강릉 경주 곡성 광주 금천 김해 나주 남양 대전 동래 밀양 백천 보주 보천 부산 불갑 성주 수산 수원 순흥 시흥 안동 여천 연일 원주 인동 전주 제주 진주(진양) 충주 평양 해미 총 32개의 본관과 958,163명이 있다.(1985년)
성씨. 본관은 문헌상으로 100여 본이 전하나 확실한 것은 진주, 금천(衿川), 안동, 배천(白川), 해미(海美), 동복(同福), 광주(光州) 등 7본이다.
□ 진주강씨
통일신라 헌강왕(憲康王) 때 태중대부판내의령(太中大夫判內議令), 정순공(正順公) 강진(姜縉)이 진양후(晉陽侯)로 봉해진 사실(史實)을 근거로 고려 중엽부터 본관(本貫)을 晉陽(진양), 晉山(진산)으로 하다가 1900년대 이후에 진주(晉州)로 본관을 삼았다. 晉陽(진양), 晉山(진산), 진주(晉州)는 다 같은 이름이다.
모두 진주의 지파로 오늘날 모든 강씨가 진주의 유일본을 내세우고 있어, 진주강씨의 도시조(都始祖) 이식(以式)이 모든 강씨의 도시조가 된다.
이식은 고구려의 병마원수(兵馬元帥)로, 597년(영양왕 8)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지성과 충절을 소홀히 한다는 내용의 국서(國書)를 고구려에 보내오자, ꡐ칼로써 대답하자ꡑ고 주장,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임유관(臨楡關)에서 30만의 수군을 대파하여 무공을 세운 명장이다.
그는 그 후에도 을지문덕과 함께 100만의 수군을 무찔러 다시 한번 용맹을 떨쳤다.
강씨는 진주를 중심한 경남, 부산 지방에 가장 많이 살며, 그 다음이 전남, 경북, 전북 지방에서 많이 살고 있다.
□ 진주강씨 (晋州姜氏) 시조 강이식(姜以式)
시조 원수공의 윗대 조상은 누구일까?  
당암공 문집에서 시조 원수공의 윗대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강씨 집안은 염제신농씨로부터 비롯한 집안이다. 그리고 현재 중국과 한국에 강씨 성을 쓰는 모든 사람은 강태공의 후손이다. 문집의 내용을 보면, 시조 원수공은 수나라 문제때 東國(고구려)에서 나셨다 한다. 원수공의 윗대는 齊康公의 후예로서 산동의 호족인데 한고조 유방 때 천수로 옮겼다 한다. 제나라 강공은 태공망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강씨의 마지막 군주이다. 강공 때 전씨에게 제나라를 빼앗겼다. 그리고 이후에는 그 후손이 산동지방의 일개 호족으로 전락하였다가 유방이 중국을 통일하여 한을 건국한 즈음에 天水로 옮겨가 살았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는다. 天水는 염제신농씨의 출생지역으로서 강씨의 발원지이다. 우리나라에 모든 강씨들이 여러 파가 있지만 모두 진주를 본관으로 하듯이 중국의 여러 강씨들은 모두 ‘천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곳으로부터 원수공의 윗대 조상 중 한 사람이 고구려에 온 것 같다. 중국의 학계에서는 염제 신농씨의 출신 부족에 대해 의견이 여럿인데.. 남방의 묘족이라는 말까지 있지만, 가장 근거있는 것은 황하 상류지역 출생이란 것이다. 염제신농씨가 출생한 그 곳은 단군신화의 삼위산 태백산과 이웃하고 있다. 단군의 조상은 그 곳으로부터 만주까지 이동한 것일 것이고, 염제신농씨는 그 곳에서부터 산동까지 이동다. 공자의 출생지 곡부가 바로 염제신농씨가 옮겨서 살았던 곳이다.
시조 강이식(姜以式)은 고구려 도원수를 지내며 597년(고구려 야양왕)에 수 문제 가 군사 30만을 이끌고 침략하자 정병 5만으로 단번에 격퇴하고, 603년에 수 양 제가 군사 200만으로 침략할 때 요동성 살수(청천강) 등의 싸움에서 수군을 격파하는 등 공을 많이 세웠다. 그의 후손인 강진이 진양(진주) 후에 봉해지며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
강이식 묘소는 만주 봉길선 원수림역 역전에 있으며, 음력 4월 10일에 진주 상봉서동 봉산사에서 제사를 지낸다.
□ 각 파의 인물
대표적 파는 박사공삼형제파(博土公三兄弟派), 은열공파(殷烈公派), 인헌공파(仁憲公派:금천강씨)인데, 각 파는 도시조 이식으로부터 각 중시조(中始祖)까지의 계보가 확실하지 않아 동보(同譜)를 못하고 있다.
이 중 박사공삼형제파는 다시 박사공파(博士公派:啓庸), 소감공파(少監公派:渭庸), 시중공파(侍中公派:遠庸)로 구분되지만, 최근에는 족보도 같이 하고 있다.
941,087명. (1985년)
박사공파는 박사공의 손자 사첨(師瞻)이 어사를 지냈다 하여 어사공파(御史公派)라고도 하며, 시중공파는 시중공의 손자 원로(元老)가 관서대장군(關西大將軍)을 지냈다 하여 관서대장군파라고도 한다.
은열공파는 중시조 민첨(民瞻)의 시호 은열공을 따서 붙인 이름이며, 인헌공파는 중시조 감찬(邯贊)의 시호 인헌공을 따서 붙인 이름이며, 감찬의 출생지가 금천(衿川:서울 금천구)이므로 금천강씨로 부른다.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227명을 내고 상신(相臣) 5명, 대제학 1명, 청백리 7명을 냈다.
▲ 어사공파
어사공파의 파조(派祖) 사첨의 현손 중 맏이 회백(淮伯)의 후손을 통정공파(通亭公派), 둘째아들 회중(淮仲)의 후손을 통계공파(通溪公派)로 구분하는데, 이들의 후손에서 가장 많은 인물이 나왔다.
통정공파의 통정 회백은 고려 말 대사헌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에 올랐는데, 성리학에도 밝았다.
그의 아들 강석덕(碩德)은 세종의 국구(國舅)로서 개성유수, 지돈령부지사(知敦寧府事) 등을 지냈으며, 시와 글씨에 능했다.
강석덕의 아들 강희안(姜希顔), 강희맹(姜希孟) 형제는 통정공파의 대표적 인물로 꼽는데, 희안은 세종 때 집현전직제학이 되어 정인지(鄭麟趾), 성삼문(成三問)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뒤에 단종복위(端宗復位)에 연루되었으나 ꡐ참으로 현사(賢士)이니 죽이지 말고 중용하라ꡑ는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하고 뒤에 호조참의를 지냈다.
시서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이라 일컬었다.
그는 ꡐ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ꡑ이란 별칭을 얻을 정도로 이 방면에 있어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낸 구손(龜孫)은 그의 아들이고,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맹경(孟卿)은 희안의 종형이다.
강희맹은 강희안의 동생.이다.
1447년(세종 29)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 등을 거쳐 1455년 집현전 직제학병조정랑을 지냈다.
1463년(세조 9) 진헌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다음해 부윤으로서 어제구현재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중추원 부사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1466년 발영시에 3등, 등준시에 2등으로 급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이 되었으며, 1468년(세조 14)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3등이 되어 진산군에 봉해지고, 1471년(성종 2) 좌리공신 3등이 되었다.
이 해 지춘추관사로서 신숙주등과 함께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병조이조 판서를 역임, 판돈령부사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다.
문장이 당대에 으뜸이어서 죽은 뒤 성종은 서거정을 시켜 그의 유고를 편집하도록 하였다.
▲ 통계공파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사상(士尙), 역시 선조 때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오르고 이조, 병조 판서를 거쳐 중추원판사를 지낸 진흥군(眞興君) 신(紳)과 왕자사부(王子師傅)를 거쳐 임진왜란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오르고 진창군(晋昌君)에 봉해진 인(絪) 형제가 빼어났는데, 정묘호란의 주역으로 불리는 홍립(弘立)도 신의 아들이다.
특히 진창군 인의 후손은 고종 때에 와서 준흠(浚欽), 시영(時永), 문형(文馨), 난형(蘭馨), 우형(友馨), 국형(國馨) 등 판서급(判書級) 인물을 배출해서 명가(名家)로 꼽힌다. 이 밖에 인조 때 화포술(火砲術)을 전한 홍중(弘重)이 있다.
▲ 은열공파
중시조 민첨(民瞻)은 인헌공파의 파조(派祖) 감찬과 더불어 고려사에 크게 무훈을 세운 명장이다.
이 파에서는 특히 강백년(栢年), 강현(  ), 강세황(世晃)의 3대와 노(老)가 유명하다.
강백년은 조선 현종 때 관찰사, 예조판서,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는데, 문명(文名)이 높았다.
그의 아들 강현은 예조, 형조 판서를 거쳐 좌찬성,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강현의 아들 강세황은 한성판윤과 각조 참판을 거쳤으며, 시서화(詩書畵)로 더 유명하였다.
강노는 강세황의 증손으로, 철종 때 대사간,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 인헌공파(금천강씨) 
삼한벽상공신 강궁진의 아들. 938년(성종 2) 문과에 장원,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 성종의 칩입에 조신들은 항복을 주장했으나 이를 반대, 하공진으로 하여금 적을 설득시켜 물러가게 했다.
국자좨주,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이부상서,서경유수, 내사시랑 평장사를 역임하였다.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60만 대군으로 고려에 침공하자, 다음해 서북면 행영도통사로 상원수가 되어 군사 20여만을 이끌고 홍화진에서 적을 무찔렀다.
1019년 회군하는 적을 구주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 천수현 개국 남으로 식읍 삼백 호를 받고 추충협모안국공신의 호를 받았다.
다음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가 1030년 왕에게 청하여 개경에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듬해 특진, 검교태사,시중,천수현 개국후에 봉해졌다.
현종의 묘정에 배향,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강감찬(姜邯贊)을 파조(派祖)로 하는 인헌공파의 인물로는 조선 인조 때 우의정을 지냈고 예학(禮學)에 정통한 석기(碩期)를 들 수 있는데, 그의 딸이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빈(嬪)으로, 소현세자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죽자 사사되었다.
선조 때의 석학인 항(沆)은 공조좌랑, 형조좌랑 등을 지내고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왜군의 포로로 일본으로 잡혀가 일본 학자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쳐 주는 한편, 적의 군사정보 등을 고국에 전했는데, 일본 성리학의 원조로 일컬어진다.
이 밖에 숙종 때 대사간을 지내고 진선군(晋善君)에 봉해진 강석빈(碩賓), 부교리와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내고 시인으로도 알려진 강박(樸), 역시 시문에 뛰어나고 문집 《모헌집(慕軒集)》을 남긴 숙종 때의 필신(必愼) 등이 있다.
또한 한말 《황성신문》 발행인의 한 사람인 강위(瑋)가 있다.
근세인물로는 일본인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수류탄을 던진 강우규(宇奎) 의사, 명창 강장완(章浣) 등을 꼽을 수 있다.
□ 집성촌
강씨는 하(河), 정(鄭)씨와 더불어 진주, 진양의 3대 성으로, 특히 하씨와는 다같이 이 지방의 토성(土姓)이므로 전통적으로 가까이 지내고 있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10만 4760가구에 59만 2984명으로 총인구의 2.4 %를 차지하여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6위였으며, 1985년도 조사에서는 22만 7093가구로 전국 가구구성비 2.4 %, 순위는 274성 중 역시 제6위였다.
020104 성씨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21  `창녕조씨   
창녕조씨(昌寧曺氏)

□ 시조
시조 탄생과 득성(得姓) 유래는 이러하다.
신라 한림학사 이광옥(李光玉)의 딸이 태어나면서부터 속병으로 치병하였다.
백약이 효험없어 신음 중에 주위로부터 창녕 화왕산용지(火旺山龍池)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드리면 효험을 본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지성으로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안개가 자욱히 일어 백주(白晝)임에도 주위가 캄캄해지면서 물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몽롱한 지경에 빠져들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려 집으로 돌아온 그로부터 속병은 씻은 듯이 나아지면서 태기(胎氣)가 있어, 그뒤 아들을 낳았는데 겨드랑이 밑에 "曺"자와 같은 글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꿈에 장부가 나타나 "나는 동해신룡(東海神龍)의 아들 옥결인데 이 아이의 아비이다" 하면서 "이 아이를 잘 기르면 크게는 공후(公侯)가 될 것이고 적어도 경상(卿相)은 틀림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 꿈 이야기를 들은 이광옥은 신라 진평왕(眞平王)에 전했다. 왕은 기이하게 여기고 아이를 직접 접견하고 보니 과연 풍모가 특이하고 겨드랑이 밑에 "曺"자와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왕은 성을 "曺"라 사성(賜姓)하고 이름을, 용지(龍池)에서 동해 신룡의 정기를 이어 받았다 하여 '계룡(繼龍)'이라 지어 주었다 .
그로부터 장성하여 신라 진평왕의 사위(駙馬)가 되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封)하게 되었는데, 이가 바로 창녕조씨의 시조이다.
시조가 탄생 과정부터 기이할 뿐 아니라 임금의 사위가 될 만큼 그 용모와 덕망이 탁월였고 문무가 겸비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전하는 글에 의하면 일찍이 왜구가 동래를 침범했을 때 공이 군졸을 거느리고 적진에 나타나니 왜병이 엎드려 "공은 왕인(王人)이시다" 하면서 물러갔다고 한다.

           시조 태사공 묘역 및 종덕재 전경
           ( 始祖 太師公墓域 및 種德齎 全景)
        경북 경주시 안강읍 노당리 (초재) 소재

□ 특징과 성세
-昌寧을 本으로 하는 單本이다.
-한결같이 선하고 겸손하며 定義的인 성격들이다.
(不正이나 不義를 보면 지나치지 못한다. 옳고 바른 것을 목숨처럼 귀히 여기는 사명감 때문이다. 더 든다면 매사에 끈기가 있어 이루고져 하는 成就의욕이 강하다. 稀姓이면서 요로에 많은 일가들이 성실하게 봉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姓氏에 대한 統譜에 의하면 曺氏는 同源에서 本貫을 달리하는 우리나라 若姓氏로 1985년11월1일 경제기획원에서 실시한 인구 센서스 집계에 의하면 285개의 성씨별 순위 중에서 28번째라 하며 73,196가구로 304,810명이 20本으로 分居하고 있으며 모두가 昌寧曺氏로부터 分籍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씨족 統譜에는 賜姓의 名門으로 주요 本貫 10개중에서 1위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始祖 繼龍은 昌成府院君에 冊封되시며 官爵이 太師에 이르셨다 하니 후손 謙字一世祖로부터 10세손 自字奇字祖에 이르기까지 여덟분이 門下待郞의 平章事가 배출된 名門閥族이고 보면 명예와 전설을 소중히 아니할손가! 무릇 신라이후 고려 말부터 조선조의 혼탁했던 桎梏(질곡)의 역사속에 우리 성씨가 크게 나타나지 않았던 것도 先祖님들의 고매한 지혜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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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장에서는 시조 태사공의 묘각인 종덕재 관련된 내용을 수록한다.
종덕재는 경북 경주시 안강읍 노당리(초제)에 있는 창녕조씨 시조 신라태사 부마도위 창성군 휘 계룡의 묘각이며 문화재(건조물)로서 지정될 만큼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건물이다. 이 종덕재가 언제 어떻게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우리로서는 매우 뜻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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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비사적에 대한 변증
시경(時經)에 조상을 욕되게 하지 말라[무첨황조(無첨皇祖)]고 하였다. 자손이 되어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쓰는 자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와 반대로 조상을 욕되게 하는 자 또한 없지 않으며 자신의 언행이 조상에게 욕이 되는지의 여부조차도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왕왕 있다. 그러나 어떠한 명목하에서도 도덕적인 관념과 정리의 범주를 벗어난 그 어떤 형태의 주장이나 아집은 조상을 욕되게 하는 처사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 조성 시조배위(曺姓 始祖配位)에 대한 문제는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 문제를 가지고 공연히 왈가왈부하면서 정력과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대처하신 선조(先祖)의 전신전의(傳信傳疑)한 교훈을 체득하여 그대로 준행(遵行)한다면 문제가 제기되지 않다. 그리고 그 문제점을 아무리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정론(正論)이다. 왜 그런가 하면 지금부터 1천3백여년 전에 있었던 사실이고 거기다가 증빙(證憑)할 만한 문헌 자료 또한 한계가 잇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후세의 자손이 해결할 수 없는 성질의 문제임과 동시에 해결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필요성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일가 중의 某氏가 이 문제를 가지고 억지논리를 전개하면서 전 종원의 이목을 흐리게 하면 급기야는 종론을 분열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한 위로는 조상을 욕되게 함은 물론이고 아래로는 후손들에게 못난 선조로 지탄을 받게 될 것이며, 조문(曺門)의 전통을 여지없이 훼손이 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니 이것이 어찌 개인적인 문제로 돌릴 성질의 것이겠습니까?
수개월 동안 임원들과 고심하며 숙의한 끝에 한학(漢學)을 전공한 명근씨(命根氏: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연구원.조선왕조실록국판위원)에게 某氏가 주장하며 제시한 열 가지 논증에 대하여 사실을 변증하도록 위촉하였던 바, 미력으로나마 변증해 보겠다는 성의를 표명해 주었고, 마침내는 바쁜 시간 가운데서도 사실을 변증하여 보내 준 원고를 접수하게 된 것이다.
대종회에서 이와 같이 사실을 변증하려고 하는 근본적인 의도는 어느 특정인과 논쟁을 벌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사실을 사실대로 변증함으로서 전체 종원이 허구(虛構)와 진실을 스스로 판별하여 앞으로는 어떠한 왜곡된 사설(邪設)이나 허위주장에 현혹되지 않도록 하려는데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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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조만식
오산중학교 사임
모락장(沙川市場) 만세사건 일어남
3.1운동 직후 대사명을 띠고 도인권(都寅權)과 상해 임시정부로 향하던 중 평남 강동군 열패라는 곳에서 일본 헌병 보조원을 사칭하는 자를 통하여 피체, 평양 형무소에 투옥됨
 1920 년  38 세
가출옥으로 평양 형무소 출감
평양에서 조선물산 장려회를 발기함
서울 형무소에 가서 남강(南岡) 이승훈을 면회, 오산 학교에 다시 부임
간디 대영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선언
 1921 년 39 세
 오산학교장 인가가 나지 않아 오산학교장 사임하고 평양에 돌아와 평양 YMCA 총무에 취임(회장 김동원)
 1922 년 40 세
 평양에서 조선물산 장려회 창립. 그 회장이 됨
중순 하순 사이 조선민립대학 기성회(期成會) 운동에 이상재, 한용운, 송진우, 현상윤, 등 30명으로 구성된 중앙집행 위원회 위원으로 활약
이 무렵 평양 산정현 교회의 장로가 되어 시무
김동원, 오윤선과 이 교회의 3장로로 20여년을 두고 평양 사회를 지킴 
1925 년 43 세
 오산학교 교장에 재취임 
1926 년 44 세
 봄 오산학교 동맹 휴학, 가을경 오산 고등보통학교장을 사임하고 평양에 돌아와 숭인중학교 교장의 일을 보게됨
 1927 년 45 세
 민족단일전선 신간회(新幹會) 창립총회, 신간회 중앙위원 겸 평양 지회장으로 선임되어 활동개시 
 
조식
1501(연산군 7)~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健中), 호는 남명(南冥). 생원 안습(安習)의 증손으로, 승문원판교 언형(彦亨)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1501년(연산군 7) 경상도 삼가현 토골〔兎洞〕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학문연구에 열중하였다.
중국의 대유학자인 주자(朱子)․정자(程子) 등의 초상화를 손수 그려 병풍으로 만들어 수시로 펴놓고 자신을 독려하였다.
1527년(중종 22)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다.
1531년 생계가 어려워 어머니를 모시고 살림이 넉넉한 처가를 찾아가 김해의 탄동(炭洞)에다 산해정(山海亭)을 지어 제자교육에 힘썼다.
1539년 38세에 유일(遺逸)로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544년 관찰사가 만나기를 청하여도 거절하였다.
1549년(명종 4)에는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에 특진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집 근처에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사(雷龍舍)를 지어 강학에 전념하였다.
그 뒤 1552년 종부시주부로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554년 벼슬길에 나아가라는 이황(李滉)의 권고도 거절하였다.
그 뒤 1556년 단성현감, 1560년 조지서사지 등으로 부름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벼슬을 거절하고 은일로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나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만 갔다. 
이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1551년 오건(吳健), 1556년 하항(河沆), 1563년 김우옹(金宇옹), 1565년 최영경(崔永慶), 그 이듬해 정구(鄭逑) 등이 찾아와 사사하였다.
1561년 지리산의 덕천동(德川洞)으로 이거하여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강학에 더욱 힘썼다.
1567년 5월 왕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같은 해 8월에 상서원판관에 임명하여 두번씩이나 부르자 입조하였으나 왕을 만나 치란(治亂)에 관한 의견과 학문의 도리를 표하고 낙향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만 힘썼다.
그는 학문을 알기만 하면 족한 것이 아니라 반궁체험(反躬體驗)과 지경실행(持敬實行)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는 특히 경의(敬義)를 높였는데, 마음이 밝은 것을 ꡐ경(敬)ꡑ이라 하고 외적으로 과단성이 있는 것을 ꡐ의(義)ꡑ라고 하였다.
조재천(曺在千)
 1912~1970. 법조인․정치가.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일운(逸雲).
전라남도 광양출신.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교원을 지냈다.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법학과에 재학중인 1940년 조선변호사시험과 일본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자 1941년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판사로 임관되었다.
광복 후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에 취임, 1946년 조선정판사위폐사건의 담당검사를 맡았다.  
그 뒤 경찰로 옮겨 1948년 이후 철도경찰청장․제1관구경찰청장을 거쳐 1950년 6․25중에 경상북도지사를 지냈다.
1954년 야당인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3대민의원 의원에 당선되었고, 1958년야당인 민주당 소속으로 4대민의원에 당선되어 민주당 선전부장을 지내면서 명대변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1960년 민주당내각 성립과 함께 법무부장관으로 기용되었으며, 1961년 내무부장관으로 옮겨 〈반공법〉 입법 등 4․19 이후의 혼란수습을 추진하다가 5․16으로 좌절되었다.
1963년 통합야당인 민중당에 참여, 전국구의원으로 6대국회의원이 되었으며, 민중당 지도위원으로 구 민주당 신파계열을 이끌고 윤보선(尹潽善) 및 구파계인 유진산(柳珍山)과 대립한 끝에 1964년 이로부터 이탈하여 태완선(太完善)․김영선(金永善)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고 총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1967년 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자, 정계에서 은퇴하고 변호사업에 전념하였다.
정재 조상치
金化九隱洞 (금화구은동) 事實
靜齋先生遺跡地踏査(정재선생 유적지 답사)
-金化九隱洞(금화구은동)과 寧越(영월)을 중심으로 -
[九隱誌 (구운지) 첫머리에 金化九隱洞(금화구은동) 事實이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경태(명(明)나라 경종 연호(景宗年號)) 을해년(乙亥年 : 1455)에 단종이 그 왕위를 손양하는 날에 당하여 매월당 김공과 정재 조공과 둔수(遯수) 박공의 부자 형제 숙질 등 일곱 사람과 합하여 아홉분들이 서로 이끌고 자취를 감추어 처음 이 고을 남쪽 10리되는 사곡촌(沙谷村)에 들어와 초막을 어리고 살아서 창암(窓巖)과 행정(杏亭)사이에서 마음대로 즐기니 무릇 시를 지어 읊을 때는 풀잎에 써서 물에 띄어 버림으로 많이 세상에 전하지 않았고 다만 자규사를 화답한 글만이 있고 인하여 각각 사방으로 흩어질 때 정재선생은 바로 창수리로 돌아가셨다.
이때 정재선생은,
‘새 울고 꽃 떨어져 봄은 장차 저무는데
무한한 충정(衷情)을 풀잎에 쓰노라
갈림길에 손잡으며 도리어 말없이
구름따라 물따라 동서 각각 헤어지네’
라는 시 귀절을 남기었고 매월당선생은
‘만리나 푸른산에 해가 졌는데
 한바퀴 밝은달이 절간을 비추이네
            九隱遺址 (구은유지)            큰마을에 솔잣나무 빽빽히 벌렸는데
            九隱洞의 巖壁 刻字            찬 샘물 웅켜 먹고 잠깐 주저 하였네’

라는 시 귀절이 남아있다. 그 뒤 혹은 가기도 하고 혹은 오기도 하여 머문지 10여년에 수춘산(需春山) 골짜기로 들어가고 부사직공은 광림산(廣林山)으로 들어가고 운와(雲窩)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탁영재(濯纓齋)와 참봉공(參奉公)은 그대로 사곡(沙谷)에 살았으니 행정과 창암은 지금도 그대로 있다.
구은동 사실이 유창주야일록(劉滄州野逸錄)과 김류용 수고지(金柳墉搜古誌)에 자세히 기록되었으니 매월당은 후에 춘천에 들어 갔다가 다시 금오산(金鰲山)으로 들어갔고 정재선생은 금화에서 창수촌으로 들어가 옮겨갔다.
 □득성 유래비
대전광역시 중구 침산동 산34번지 일원 62,000여평에1997.11.1 조성된 뿌리공원에 세워진 창녕조씨 득성유래비
011208 성씨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20  `제주고씨   
제주고씨(濟州高氏)

□ 시조
고씨[高氏]는 탐라 개국설 화에 한라산 북쪽 기슭 삼성혈(三姓穴) 또는 모흥열(毛興穴)에서 용출했다고 전해지는 고을나[高乙那]를 시조로 삼고  본관은 제주로 단일화 하고 있다.
이 삼성혈에서 고을라[高乙那], 양을라[良乙那], 부을라[夫乙那]의 세 신인[神人]이 출현하였고, 그 후 동쪽 바다에 떠내려 온 상자에서 세 미녀와 함께 오곡 종자와 가축이 나와 이들과 함께 제주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 중 고을라가 제주고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본관을 제주로 하였다.
고을라의 45세손 자견왕(自堅王)까지 탐라 군주(耽羅郡主)로 세습(世襲)해 오다가 서기 938년(고려 태조 21) 자견왕(自堅王)의 태자(太子) 말로(末老)가 고려에 들어와 우리나라 고씨(高氏)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그의 아들 유(維), 강(綱), 소(紹) 형제가 모두 고려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지냄으로써 본토의 진출이 시작되었다.
조선조에 와서도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명문의 전통을 이어 왔다.
말로의 증손자 공익(청주), 말로의 증손자 령신(令臣 : 개성), 말로의 10세손 복림(장흥), 말로의 후손 종필(연안), 말로의 16세손 응섭(안동)을 중시조로 하는 등 15개의 본관으로 나뉘었는데 같은 혈손이라며 다시 합본하여 고을라를 시조로하고 본관을 제주로 하여 '제주고씨 중앙종문회'를 만들었다.
□ 후손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말로(末老)를 중시조로 하고 시조(始祖)의 발원지인 제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가문을 크게 번창시켰다.  고씨의 본관은 문헌에 제주를 비롯하여 장흥(長興), 개성(開城), 횡성(橫城), 연안(延安), 용담(龍潭), 담양(潭陽), 의령(宜寧), 고봉(高峰), 옥구(沃溝), 상당(上黨), 김화(金花), 면산(免山), 회령(會寧), 안동(安東) 등이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오늘날에는 제주를 단본으로 하여 중시조 말로(末老)의 15세손(世孫) 인단(仁旦)을 파조(派祖)로 하는 성주공파(星州公派), 13세손(世孫) 신걸(臣傑)을 파조(派祖)로 하는 전서공파(典書公派), 15세손(世孫) 득종(得宗)을 파조(派祖)로 하는 영곡공파(靈谷公派), 11세손(世孫) 경(慶)을 파조(派祖)로 하는 문충공파(文忠公派), 10세손(世孫) 중연을 파조(派祖)로 하는 장흥백파(長興伯派), 11세손(世孫) 인비(仁庇)를 파조(派祖)로 하는 화전군파(花田君派), 13세손(世孫) 택(澤)을 파조(派祖)로 하는 문정공파(文禎公派), 4세손(世孫) 공익(恭益)을 파조(派祖)로 하는상당군파(上黨君派), 4세손(世孫) 영신(令臣)을 파조(派祖)로 하는 양경공파(良敬公派) 등 아홉파(派)로 갈리었다.
□ 인물
제주 고씨가 내륙에 진출여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성주공(星主公) 말로(末老)의 맏아들 유(維)가 처음이다. 
유(維)는 고려조(高麗朝)에서 남성시(南省試)에 장원여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 우복야(右僕射 : 상서도성에 속한 정2품 벼슬)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조기(兆基)는 예종조(睿宗朝)에 문과에 급제하고 인종(仁宗)때 시어사(侍御史)에 올라 이자겸(李資謙)의 일파서 환관과 결탁하여 권세를 누리던 봉우(奉佑)를 탄핵하고 의종(毅宗)이 등극한 후 정당문학(政堂文學)과 판호부사(判戶府事)를 거쳐 1149년(의종 3)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 중서 문하성의 정2품 벼슬)에 올랐다. 시문(詩文)에 능하여 오언시(五言詩)의 신인(神人)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로부터 제주 고씨(濟州高氏)는 고려조(高麗朝)에서 9상서(尙書) 12한림(翰林)의 명현(名賢)을 배출하였고, 조선조(朝鮮朝)에서도 수많은 인재(人才)를 낳아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또는 학행(學行)과 충효(忠孝), 의열(義烈) 등으로 역사를 수(繡) 놓아 탐라왕족(耽羅王族)으로서의 긍지(矜持)를 세습(世襲)하며 명문(名文)의 기틀을 다져왔다.
조선 초에 제주고씨를 빛낸 인물인 영곡공파조(靈谷公派祖) 득종(得宗)은 전서공(典書公) 신걸(臣
傑)의 손자(孫子)이며 상장군(上將軍) 봉지(鳳智)의 아들로 1414년(태종 14)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대호군(大護軍)과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 : 외국사절의 연향과 종실 ,재신의 음식 공괘를 관장하던 종5품 벼슬)을 거쳐 1427년(세종 9)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올랐다.
1438(세종 20)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오른 그는 사신으로 두차례 명나라에 다녀왔고, 통신사로 일본에 가서는 천황의 서계(書契 : 일본 정부와 교섭하던 문서)를 가지고 돌아오는 등 외교적인 공적을 쌓았으며 한성부 판윤을 지냈고 문장과 서예에 일가를 이루었다.
 득종(得宗)의 아들 태필(台弼), 태정(台鼎), 태보(台輔), 태익(台翼) 4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조선 개국공신 여(呂)는 나라에 공을 세워 고성부원군(高城府院君)에 봉해졌고, 화전군(花田君) 인비(仁庇)의 8세손(世孫)이며 사신(思信)의 아들 형산(荊山)은 연산조(燕山朝)에 해주 목사(海州牧使), 와 병마절도사를 거쳐 중종반정 후 형조, 호조, 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했으며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국난으로 나라가 위급할 때 가문의 의맥을 살려 충렬로 전쟁에 공을 세운 충렬공(忠烈公) 경명(敬命)은 제주고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중종(中宗) 때 남화풍(南畵風 : 당나라 왕유를 비조로 하는 문인 화파의 화풍)으로 호랑이 그림을 잘 그린 하천(霞川) 운(雲)의 손자인 경명은 부친 맹영(孟英)이 명종조(明宗朝)에 호조참의(戶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가 이양(李樑)의 일파로 몰려 유배당하는 불운을 맞고 담양에 옮겨 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늙고 병든 몸으로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ꡒ나라 운수가 중도에 비색(丕塞)하여 섬 오랑캐가 밖에서 개떼 덤비듯 한다.ꡓ로 시작되는 거의(擧義)의 격문(檄文)을 팔도에 돌려 구국의 염원으로 일어난 의병을 이끌고 왜병과 싸우다 금산(錦山)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도망가자는 참모의 말을 뿌리치고 차남 인후(因厚)와 함께 의열로 죽음을 맞이했다.
시와 글씨, 그림에도 뛰어나 <호남파 5대 시인으로 손꼽혔던 그의 맏아들 종후(從厚)도 복수군(復讐軍)을 기병(起兵)하여 ꡒ불행한 때를 만나 집안의 화변이 망극하다. 불초고(不肖孤)는 초토(草土)에 앓고 누워 아직까지 이 왜적들과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아 있는 것이 참을 수가 없다. ---ꡓ라는 통문을 돌리면서 여러 갈래로 흐트러진 의병을 모아 영남로 달려가 진주성을 지켰으나 성이 왜병에게 함락당할 때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니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장사(三壯士)’라 일컬었다.
경명(敬命)의 두 딸 노씨(盧氏) 부인과 안씨(安氏)부인도 정유재란 때 왜적을 꾸짖으며 칼을 안고 엎드려 순절하였으니 이들 일가의 절의는 높이 추앙되었다.
 선조(宣祖)는 경명 일가의 죽음을 슬퍼하며 광주(光州)에 사당을 짓게 하여 포충사(褒忠祠)로 사액하고 경명에게는 충렬공(忠烈公), 종후(從厚)에게는 효열공(孝烈公), 인후(因厚)에게는 의열공(義烈公)이라 시호를 내렸다.
 그 외 효륜(孝倫)의 아들로 최경희(崔慶會)의 부장(副將)이 되어 장수(長水), 무주(茂朱), 금산(錦山) 등지에서 왜병과 싸워 전공을 세우고 진주성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박진(朴晋), 황진(黃晋), 원호(元豪)와 더불어 임진왜란의 4대 명장으로 손꼽히는 언백(彦伯)은 1604년(선조 37) 선무2등공신(宣武二等功臣)으로 제흥군(濟興君)에 봉해졌으나 광해군(光海君)에 의해 임해군(臨海君 : 선조의 첫째 서자)와 함께 죽음을 당했다.
이렇게 충효의 가통을 이어온 제주고씨는 우리 한민족의 뿌리깊은 의열사상의 본질을 밝혀 주었으며, 국난의 갈림길에서 서성거리다가 비겁하게 살다 간 우둔한 자들의 지표(指標)가 되었다.
□ 성세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씨(高氏)는 남한에 총 91,384가구, 384,01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고씨동굴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진별리에 소재하고 있는 석회동굴로 주굴의 길이 1,800m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동굴의 하나로 1969년 6월 4일 천연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월읍에서 동남쪽 1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영월화력발전소에서 동남쪽6Km 떨어진 남한강 상류 河蝕斷崖(하식단애)에 위치하고  있다.
1966년 4월 한국동굴학회가 이끄는 한일합동조사단에 의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되었으며 그 후 건국대학의 홍시환 교수팀의 본격적인 개발조사와 당시 군수 유은재,박영국 관광협회장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서 관광동굴로 개발, 공개되었다. 이 동굴이 형성된 지질년대는 고생대의 대석회암통에 속하는 지층으로 약 4-5억년전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굴이 1,800m, 支屈(지굴)을 합하면 총연장6.3km로 소개되어 있으나 정확한 길이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고씨동굴은 석회암이 지하수에 의해 용식되어(물에 녹아서) 만들어진 전형적인 석회동굴 이다.
이 동굴의 원래 이름은 노리곡 동굴이었던 것이 임진왜란 때 부락민이 이 동굴에 피난하였다가 왜병이 동굴 입구에 불을 질러 고씨들만 살아 남았으므로 ‘고씨동굴’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씨동굴에는 피난을 하면서 밥을 짓기 위해 불을 때어 그을린 흔적과 솥을 걸었던 자리가 남아 있다.
동굴 내부에는 약 4억년 전부터 형성된 종유석과 4개의 호수3개의 폭포6개의 광장이 있으며, 동굴 입구쪽은 급한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큰 하천이 앞을 흐른다.
건너편의 주차장과 동굴 입구를 연결하는 다리는 1998년 4월 완공되었는데 현대식으로 매끈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양쪽 난간에 조각을 새겨 놓았으나, 오랜 세월의 인고 끝에 찬란한 자태를 드러낸 동굴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동굴에 들어가면 영겁의 세월이 눈 앞에 찬란하게 드러난다. 동굴 벽과 천장, 바닥 어디를 둘러보아도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수많은 종유석, 석순, 석주 등이 찬란한 빛과 자태를 뽐낸다. 사람들이 저마다 이름을 붙여 놓았으나, 어쩐지 이름이 쑥스럽다. 차라리 침묵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동굴을 감상하시는 분들께서는 부디 이름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란다. 이름을 무시하는 것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이 동굴은 동굴 탐험인들에 의해 약 3,000m 정도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동굴 입구에서 약 200m까지는 비교적 단순하게 외줄기로 뚫려 있고, 400m 지점부터는 협곡이 전개된다.
800m 지점에 이르면 지하천이 넓어지고 거미줄같이 굴이 갈라진다. 해발고도 210m의 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고씨동굴의 기상 환경에 대한 학계 보고에 따르면 동굴 내부의 기온의 연교차는 비교적 적은 편이며, 일교차는 약 10도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86년 11월 16일 14시에 실시한 동굴 안쪽의 기온이 4.5°c일때 바깥쪽은 그보다 약간 낮은 3.2°c였다. 동굴 안의 기온은 입구에서 멀어짐에 따라 점차 상승하여 중간지점인 구름다리 앞에서는 10.2°c였고, 가장 안쪽인 광장의 기온은 16.2°c였다. 즉 외부보다 13°c정도 높다.
내부의 습도는 동굴에서 300m 지점까지는 상대습도 50% 미만이나 깊어짐에 따라 습도는 높아지고 특히 주변에 물이 있는 곳에서는 60%를 상회하였다. 수온은 12°c이고 계절적인 변화는 0.6°c 내외이며 외기변화의 영향은적은 편으로 나타나 있다.
동굴을 형성하는 지형지물의 분포특징은 상층 지각의 구조암석인 석회암질의 구조성분과 지표에서의 침투 수량 및 기간, 집중도 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동굴에서 싹트고 있는 2차 생성물로 대표적인 것은 鐘乳石(종유석)과 石筍(석순),石柱(석주), 流錫(유석),石灰華段丘(석회화단구) 등의 석순경관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동굴의 대표지역이라 할 수 있는 제3지역에는 懸垂狀 鐘乳石群(현수상종유석군), 石灰華瀑(석회화폭), 石幕石筍(석막석순) 그 밖에 섬세한 형성물체들이 있으며, 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절묘한 형상을 하고 있다.
그 밖에 경승지로는 십이선경 일대와  無量塔(*무량탑)등의 거대한 종유석군, 石柱列(석주열), 天宮(천궁) 일대의 대형 석순군 등을 들 수 있고, 기형형성물로는 극락전 일대의 유석군, 神農池(신농지), 꿈의 궁전, 天佛臺(천불대)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보존가치가 높은 것으로 주목되고 있다.
동굴생물로는 1965년 분포조사 때 동굴내부의 호수에 많이 서식하고 있는 백색의 엽새우를 비롯한 20종의 동굴생물이 보고된 바 있고, 1971년도 조사에서는 소과 2종, 게새우 5종, 지네 4종, 곤충류 17종, 포유동물 3종, 거미 10종 등 41종을 확인하였다. 이들의 생태적 분포는 眞洞窟性(진동굴성)이 14%,  好洞窟性(호동굴성)이 36%, 外來洞窟性(외래동굴성)이 50%로 나타나 있다.
이중에는 지구상에서 4-5억년 전에만 볼 수 있었던 화석곤충인 갈로와충이 서식하고있음이 밝혀져 학술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이 동굴은 현재 내부 IKm까지 관광용동굴로 개발 공개되고 있어 훼손 또는 오염의우려가 있다. 관리자는 물론 출입 관람객의 세심한 주의가 요망되고 있다.고씨동굴은 영월읍에서 12km 정도 떨어진 20분 거리에 있다. 남한 강가의 절벽에 입구가 있기 때문에 이 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나룻배를 타야 한다.
그 밖에도 영월에는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17세에 죽음을 맞은 단종의 유배지로 유명한 청령포와 단종의 능인 장릉이 있다. 배를 대지 않으면 강줄기로 둘러싸여 섬이 되어버리는 청령포는 창살없는 감옥이나 다름 없지만 빽빽한 소나무 숲이 장관이다. 단종이 쌓았다는 돌탑과 단종의 유배생활을 굽어 살폈다는 6백년 된 관음송 등도 둘러볼 만하다.
삼 면이 강줄기로 싸여 있고 뒤로는 험한 산줄기와 절벽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수려한 절경으로 인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나 고고하며 애잔하게 느껴지는 까닭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이 곳에는 청령포 유지비각,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이 있다. 또 영월읍에서 강줄기를 따라 12k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어라연 계곡이 있다. 동굴 주변에는 국민관광지가 조성되어 향토 음식점과 숙박 시설이 완비되어 있다.
□ 표충사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이 곳은 임진왜란 당시 호남에서 최초로 의병 7,000명을 모집하여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순절한 고경명(1533 ~ 1592)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액사당이다.
중종 28년~선조 25년(1533~1592). 향년 60세. 조선 전기의 문인.의병장. 본관 장흥(長興). 자 이순(而順). 호 제봉(霽峰) 태헌(苔軒). 시호 충렬(忠烈). 명종 7년(l552) 진사가 되었으며, 1558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호조좌랑으로 기용되었다가 전적(典籍) 정언(正言)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63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 이조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할 때 교리(校理)로서 이에 참여하였다가 그 경위를 이량에게 알려준 사실이 발각되어,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파면되었다.선조 14년(1581) 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되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1년 동래부사로 있다가 서인(西人)이 제거될 때 사직하고 낙향하였으며,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온 백성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의연히 일어서 마상에서 격문을 지어 각 도에 돌리고 의병을 규합,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나라에서는 선조 28년(1595) 선생과 함께 순절한 장남 종후와 차남 인후 삼부자를 위해 정문을 세웠고, 그뒤 선조 34년(1601) 국령으로 사우를 건립하여 선생의 삼부자와 함께 의거 순절한 월파 유팽로(1554 ~ 1592), 청계 안영( ? ~ 1592) 등 다섯 분을 같이 배향하도록 하였다.
후에 선조 36년(1603) 사당에 '포충'이라는 액호를 내리고 예관을 보내 치제하게 하였다. 현재 옛 사우 경내 건물로는 사당, 동재, 서재, 내삼문, 외삼문이 있으며, 1977년 정화시 충효당, 전사청, 청사영당, 고직사 등은 철거 정비되었다.
문집에《제봉문집(霽峰文集)》 저서에《유서석록(遊瑞石錄)》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正氣錄)》 등이 있다.
남광주역 사거리에서 시작되어 광주역에 이어지는 제봉로는 선생을 기리기 위해 이름 붙인 거리이다.


 

 

011207 성씨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20  `남평문씨

남평문씨
□ 뿌리
문헌에 133본이 전한다.
감천(甘泉)과 정선(旌善) 제외하곤 모두가 대종인 남평문씨에서 갈려 나가고, 오늘날에는 남평(南平) 단본
감천문씨와 정선문씨는 본래가 타성으로 성만 같고, 조상이 다르다.
감천문씨의 시조 문원길은 본래 김알지 후손으로 경주김씨. 그의 선대에서 중국에 들어갔다가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문(文)성을 사성받아 문씨(文氏)로 갈았다고 한다.
정선문씨의 시조 문임간은 본래 전씨였다고 한다. 그도 앞의 경우와 같이 중국에 들어가 글로 이름을 날려 문씨 성을 얻고 귀국 후에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 시조
남평문씨 시조는 신라 20대 자비왕 때 사람인 문장성(文多省). 그의 출생 관해서 일화.
전라도 남평군 동쪽에 큰 못이 있고, 그 못가에 천 길이나 되는 바위가 솟아 있엇다.
군의 우두머리가 그 바위 아래서 놀고 있는데, 문득 간난아기의 울음 소리가 들려 오고 오색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 이상하여 사다리 가져오게 해서 올라가 보니 돌상자 하나가 있고 그 안에 피부가 희고 용모 출중한 아름다운 간난아기. 군주는 그 아이를 기르기 사작.
5살에 저절로 글 깨우쳐 무예 익히며 사물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문(文)’으로 성을 삼고 이름을 ‘다성(多省)’이라 이름지어 줬다.
지금도 나주시 남평면 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서너 마장쯤 가면 ‘장자못’이라고 불리는 큰 못이 있고, 그 곁에 우뚝 솟은 바위가 있는데, 이 곳이 남평문씨 시조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 인물
남평문씨는 주로 고려때 많은 인물을 배출.
문공원(文公元)은 고려 예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인종 8년 전중시어사 참지정사 판형부사사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와 판이부사에 올라 수사공이 되었다.
그의 아우 문공유(文公裕)도 인종 때 시어사로 묘청의 도참설에 마음을 빼앗긴 인종을 충고하다가 한때 좌천되기도 했지만, 예종 때에는 서북면 병마사를 거쳐 예부, 병부상서 등을 지냈는데, 명필로 특히 유명하다.
문극겸은 공유의 아들인데, 문물을 겸한 명필로 유명하다.
그는 과거에 세 번이나 떨어졌지만, 네 번째 드디어 급제한 의지의 인물이다. 예종에게 그는 권력을 남용하는 백선연 등을 탄핵한 일이 있고, 정중부의 난 때는 그 훌륭한 인품 때문에 죽음을 면했다.
명종이 즉의하자 우승선 어사중승이 되어 많은 문인들을 구하고 무인들의 자문을 받아 용호대장군을 겸임, 다시 상장공까지 겸임, 이로써 문물을 겸한 최초의 명신이 되었다.
문익점(文益漸)은 공유의 7대손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다가 금수(禁輸)로 되어 있는 목화씨를 붓대 속에 들여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그 재배에 성공했다. 우리 나라 의류 혁명을 가져온 공로자이다.
문래(文萊)는 익점의 손자로 성리학뿐만 아니라 지리 산수에 이르기까지 통달한 학자였다.
조부가 거둔 목화를 베로 짜기 위해 실을 뽑아 내는 문래를 고안하여 유명하다.
물레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조선시대 문씨의 문과 급제자 수는 총 54명이다. 그 중 40명이 남평문씨이고 그 밖에 감천 5명, 개령 4명, 영산 3명, 안동 1명, 본관 미상 1명이다.
□ 남평(南平)
남평현(南平縣) [미동부리, 현웅, 오산, 영평] 폐현】
전라남도 나주시 특수지역
본래 백제의 미동부리현인데,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현웅으로 고쳐서 무주(광주)의 딸린 현이 되었다가, 고려 때 남평 또는 영평으로 고쳐서 나주에 붙이고, 제19대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는데, 제34대 공양 2년(1390)에 화순 감무가 겸하였다가 조선조 태조 3년(1394)에 복구되고, 제3대 태종 13년(1413)에 예에 따라 현감이 되고, 제26대 고종 32년(1895)에 군이 되어 군내, 동촌, 다소, 어천, 도천, 덕곡, 욱곡, 죽곡, 두산, 저포, 등개, 마산의 12개 면을 관할하였는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나주군에 편입되어 현재 남평, 다도, 봉황, 금천, 산포의 5개 면과 광산군 본량면의 지역이 됨.

남평-면(南平面) 【면】
전라남도-나주군-
 나주군 13면의 하나. 본래 남평군의 지역으로서 남평 읍내가 되므로 군내면이라 하여 오창, 서원, 동문, 원촌, 방축, 석교, 옥촌, 교촌, 하촌, 대교, 객사, 대문 , 장기의 13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4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동촌면의 광리, 어전, 수청, 원후, 중남, 하남, 남석, 원적, 죽림, 풍강, 노동, 정광, 신촌의 13개 동리와 두산면의 노가, 반월, 상촌, 구등, 정자의 각 일부와 저포면의 봉산, 문무, 갈갈, 인암, 우진, 구로, 차산, 반계, 운동, 신기의 10개 리와 등포면의 등수리 일부와 도천면의 유촌 일부와 능주군 도장면의 화포리 일부와 대곡면의 점촌, 평촌의 각 일부와 화남면의 이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남평군의 이름을 따서 남평면이라 하여 나주군에 편입되어, 광리, 평산, 수원, 남전, 풍림, 노동, 광촌, 서산, 교원, 교촌, 대교, 동사, 남평, 상곡, 오계, 우산의 16개 리로 개편 관할함. 동쪽은 화순군 화순읍과 도곡면, 남쪽은 도면과 화순군 도곡면, 서쪽은 다도면과 산포면, 북쪽은 광산군 대촌면에 닿음.

남평-리(南平里) [남평읍내, 남평, 읍내] 【리】
전라남도-나주군-남평면-
본래 남평군 군내면의 지역으로서 남평 읍내가 되므로 남평 읍내 또는 읍내, 남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장기리와 대교리, 하촌리의 각 일부와 두산면의 구등리, 정자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남평리라 해서 남주군 남평면에 편입됨.
남평문씨-시조비 【비】
전라남도-나주군-남평면-서산리-
 주막거리 남쪽에 있는, 남평 문씨 시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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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106 성씨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17  `남양홍씨
남양홍씨
□ 시조(始祖)
당홍(唐洪) - 홍은열(洪殷悅)
토홍(土洪) - 홍선행(洪先幸)
 □ 인구수(人口數)
당홍(唐洪) - 382,077명.(1985년)
토홍(土洪) - 13,069명. (1985년)
홍씨는 남한에만 약 40만명, 인구 순위는 20위. 남양(南陽)․풍산(豊山)․부계(缶溪)․홍주(洪州) 외에 문헌에는 개녕(開寧)․회인(懷仁)․경주(慶州)․풍주(豊州)․상주(尙州)․정안(廷安)․의주(義州)․ 개성(開城)․안산(安山) 등 10여 본이 전하나 현재는 위의 4본만 확인된다.
그 중에도 대종은 남양(南陽), 버금이 풍산(豊山)으로 나머지 부계(缶溪)홍씨가 1천여 가구 홍주(洪州)는 몇백 가구에 지나지 않는다.
40만 홍씨의 거의 90%를 차지하는 남양홍씨 중 당홍과 토홍의 비율은 8대 2정도 정립했다. 이것은 또 두 남양홍씨가 어느 한쪽에 흡수되지 않고 유지돼 온 요인이기도 하다.
□ 서로 조상을 달리 하는 두 집안
서로 조상을 달리하는 두 집안이 동성동본(同姓同本)을 일컫는 성씨. 우리나라 2백 49개나 되는 성씨 가운데 그런 성씨는 오직 남양홍씨 뿐이다.
고려(高麗), 조선(朝鮮)에 걸쳐 근 1천여 년 융성을 누리며 우리나라 10대 문벌의 하나로도 꼽혔던 남양홍씨는 <당홍(唐洪)>과 <토홍(土洪)>의 전혀 다른 두 계보가 있다.
<당홍>은 멀리 고구려(高句麗)시절 당나라에서 귀화해 온 홍학사의 후예, <토홍>은 고려 고종조(高宗朝)의 김오위(金吾衛) 별장 홍선행(洪先幸)의 자손으로 각각 일컬어 온다.
당홍․토홍이라는 속칭도 바로 이같은 <귀화파>와 <토착파>의 구분에서 연유했다. 그러나 정작 <토착파>인 토홍의 역사보다 귀화파인 당홍의 역사가 3백여 년 이상 길다는 데서 동성동본 두 집안의 관계는 역사의 미궁에 돌아가 있다.
두 집안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는 몇 가지 가설이 있다.
① 당홍은 글자 그대로 당(唐)나라에서 귀화해온 홍씨이며 토홍은 우리나라 토착의 홍씨라는 것.
② 당홍은 본디 남양(南陽)의 옛 이름인 당성(唐城) 홍씨의 약어로서 또 다른 남양홍씨가 생겨나자, 이를 구분하기 위해 당홍에 대칭하는 용어로 토홍이라는 별칭이 생겨났다는 것.
③ 당홍의 시조로 일컫는 홍학사의 후예 가운데 일파가 난을 피해 신분을 감추며 별계의 토홍을 내세웠다는 설. (당홍측 주장)
상식적으로는 ②의 가설이 무리가 없어 보인다. 실제 본고장인 남양(南陽)(경기도 화성군) 일대에서는 토홍을 남양홍씨로, 당홍을 당성홍씨로 구분하기도 한다고 한다. 두 집안은 오래 전부터 소득 없는 뿌리 밝혀내기의 수고를 포기한 채 서로 따로 계보를 가리되 남 아닌 ‘종씨’로 사이좋게 지내온다. 조상은 다르지만 동성동본인이라 결혼도 하지 않는다. 근래엔 각자 종친회 외에 ‘범(汎)홍씨 대동친목회’(회장 토홍측 홍승만(洪承萬)변호사)까지 결성하였다.
홍씨는 남한에만 약 40만명, 인구순위는 20위. 남양(南陽)․풍산(豊山)․부계(缶溪)․홍주(洪州) 외에 문헌에는 개녕(開寧)․회인(懷仁)․경주(慶州)․풍주(豊州)․상주(尙州)․정안(廷安)․의주(義州)․ 개성(開城)․안산(安山) 등 10여 본이 전하나 현재는 위의 4본만 확인된다.
□ 가문의 활동
조선조(朝鮮朝)에 남양홍씨는 모두 3백 29명(당홍 206, 토홍 123)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전주이씨(全州 李氏) 884명, 안동권씨(安東 權氏) 359명, 파평윤씨(坡平 尹氏) 336명에 이어 네번째의 서열이지만 인구 순위를 감안하면 놀라운 강세다.
당홍에서만 상신(相臣) 8명, 대제학(大提學) 3명, 왕비(王妃) 1명[헌종의 계비(憲宗의 繼妃)], 청백리(淸白吏) 3명을 배출했고, 토홍은 토홍대로 상신(相臣) 3, 대제학(大提學) 2, 청백리(淸白吏) 3명을 배출했으니 남양홍씨의 명성은 부동의 것이 됐었다.
□ 고려시대의 당홍
당홍은 홍학사(이름 天河)를 선시조로 모셔 두고 그의 10대손(족보의 기록)인 고려 개국공신 홍은열(洪殷悅)[초명 유(儒)]을 시조로 그로부터 세계를 헤아려 온다. 그의 손자대에서 1파 [재신공파(宰臣公派)], 증손대에서 다시 1파[예사공파(禮史公派)], 6대손 때 1파[중랑장파(中郞將派)]가 갈리고 13대 아래서 13파가 갈려 16파로 나뉘는데 그 중에도 맏이인 남양군(南陽君)[홍주(洪澍)]파와 문정공(文正公)[홍언박(洪彦博)]파가 당홍 전체의 70%를 차지할 만큼 수도 많고 융성을 누렸다.
그 밖에 판중추(判中樞)[홍언박(洪彦修)파]․익산군(益山君)[홍운수(洪云遂)파]․예사공(禮史公)[홍복파] 중랑공(中郞公)[홍후(洪厚)파]가 버금가는 세력을 차지, 이들 6파가 당홍 위세의 주력인 셈. 특히 남양군 홍주의 7대손인 석벽(石壁) 홍춘경(洪春卿)[선조조 한성우윤(宣祖朝 漢城右尹)]의 자손에서만 상신(相臣) 5명과 문형(文衡)[大提學] 2명, 왕비(王妃) 1명, 20여 명의 판서(判書)급을 배출하는 화려한 가통을 이루었다. 석벽은 천민(天民)[선조조 도승지(宣祖朝 都承旨)]․ 일민(逸民)[현감(縣監)]․ 성민(聖民)[대제학 참찬(大提學 參贊)]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성민의 후손에서 4명의 정승이 나왔다.
고려조(高麗朝)의 당홍 인물로는 고려 태조 왕건(高麗 太祖 王建)의 오른팔인 개국(開國)공신 시조 홍은열(洪殷悅)[儒], 이자겸(李資謙)의 난(亂)에 충절을 지켜 순사한 명필 홍관(洪瓘). 충렬왕(忠烈王) 때 세 번이나 수상직에 오른 홍자번(洪子藩), 공민왕(恭愍王) 때 수상을 지낸 홍언박 등이 있다.

홍자번은 고려(高麗)․원(元)연합군의 일본(日本) 정벌 때 전라도 지휘사(全羅道指揮使)로 점함 건조 책임을 맡았었고, 원의 간섭 간신배들의 이간으로 벌어진 충렬(忠烈)․충선왕(忠宣王) 부자의 불화가 고려의 국기를 위태롭게 만든 위기에서 끝까지 부자를 화합시켜 나라를 안정시키기에 애썼던 충신.
홍언박도 고려 말 공민왕을 도와 원의 속박을 물리치고 자주성을 회복하는 개혁정치에 오른팔 노릇을 했던 인물. 원의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의 처남으로 고려 조정에서 실력자로 군림하여 횡포를 일삼던 기철(寄轍) 일파 숙청에 수훈을 세워 1등공신이 되기도 했다. 1361년(공민왕 10년)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을 때는 모두 서울 개경(開京)을 버리고 피난할 것을 주장했으나 그만이 서울 사수(死守)를 주장했으며 서경(西京)이 함락돼 끝내 서울을 떠날 때는 왕을 따르며 전시에 궁중 경비를 줄이도록 권유하는 등 충언을 아끼지 않아 난을 평정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를 했다. 2년 뒤 김용(金鏞)이 난을 일으켜 흥왕사(興王寺)에서 왕을 죽이려 할 때 몸을 피하라는 아들의 권고를 뿌리치고 난군 앞에 나가 불충을 꾸짖다 살해당해 충신의 한 모범을 보였다. 정승에 추증되고 문정공(文正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충렬왕(忠烈王) 때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오른 홍규(洪奎)는 충렬왕이 공주와 함께 양가의 규수들을 뽑아 원나라에 보내려 할 때 자기 딸을 보내지 않기 위해 머리를 깎은 일이 드러나 한때 가산이 몰수되고 귀양가는 풍파를 겪기도 했다. 당시 고려는 원의 압제하에서 해마다 적지 않은 수(연5백~1천명)의 여자를 元에 보내야 했다. 충렬왕 1년(1275년)부터 공민왕 4년(1355년)까지 80여 년간 여자를 뽑아 가기 위해 원이 고려에 보낸 사신만 50여 차례가 넘었을 정도였다. 이에 민간에서는 딸을 오랑캐에게 주지 않기 위해 일찍 결혼시키는 조혼(早婚)의 풍습이 유행했다고 한다.
홍규는 일족 홍자번 등의 청에 의해 가산이 반환되고 풀려났으나 딸은 원의 사신 아고대(阿古大)에게 시집갔다. 한 나라의 대신이 자기 딸을 보호할 수 없었던 시대, 역사의 어두운 한 장은 독립자강(獨立自强)의 절실한 필요성을 일깨우는 교훈이기도 하다. 그의 딸 하나는 나중에 충숙왕(忠肅王)의 비(妃)가 됐다.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明德太后)다. 또 한딸은 충선왕의 후비가 돼 그는 두 임금의 장인인 셈.

고려조(高麗朝)와의 이같이 깊은 인연으로 당홍의 일부에선 조선조(朝鮮朝) 들어 한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홍의 융성은 조선조 중반 이후에 특히 두드러진다.

 □ 조선 초기의 당홍
조선(朝鮮)초기 당홍의 두드러진 인물로는 조선 개국공신 홍길민(洪吉旼)[호판(戶判)]과 그의 아들 여방(汝方)[이판吏判)], 세조(世祖)의 쿠테타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된 홍윤셩(洪允成)과 홍달손(洪達孫)․ 홍순손(洪順孫) 형제가 있다.
홍윤성은 예조판서(禮曹判書) 등을 거쳐 예종(睿宗) 때 영의정에 올랐으며 홍달손(洪達孫)은 좌의정, 홍순손(洪順孫)은 판서(判書)를 역임, 당홍 영화의 기반을 닦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홍유손(洪裕孫)은 김종직(金宗直)에게 성리학을 배운 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남효온(南孝溫)․이총(李摠)․이정은(李貞恩) 등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과 어울려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칭하며 노장(老莊)의 신선사상을 토론하면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이들의 체제 비판적 현실도피는 결코 안전하지만은 않아 그는 연산군(燕山君) 4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 청주(淸州)에 유배됐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1506년 풀려나기도 했다.
성종(成宗)․광해군(光海君)때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낸 홍흥(洪興)은 ‘당대 제일의 풍채’로 선망을 받았던 인물. 성종은 그를 일부러 명(明)에 사신으로 보내 우리나라의 인물 자랑을 했다고 한다. 뛰어난 풍채만큼 글씨도 훌륭했다. 그의 형 홍응(洪應)은 또 성종조(成宗朝) 좌의정(左議政)에까지 올랐다. 이들은 익산군(益山君)파다. 홍경주(洪景舟)는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한 공신으로 벙조판서(兵曹判書)․대사헌(大司憲)․좌참찬(左參贊)을 지내다 사림파(士林派)출신 언관(言官)들의 탄핵을 받아 벼슬을 물러났다. 그러나 그를 포함한 훈구파(勳舊派)의 반격작전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정치를 무너뜨리고 신진사림(新進士林)들을 몰아낸 뒤 복귀, 좌찬성(左贊成)․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조선시대 당홍인물의 일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중국(中國)에 조선 남아의 기개를 알리고 나중 그 인연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국난극복의 공신이 된 홍순언(洪純彦)이 있다. <통문관지>에 실린 그의 일화를 보자.
홍순언이 젊었을 때 연(燕)나라에 가게 되었다. 어느 날 청루(靑樓=술집)를 찾아갔는데 얼굴이 절묘(絶妙)한 소복(素服)한 여인을 보게 되었다. 여인에게 소복한 연유를 물으니 부모가 본래 절강(浙江) 사람으로 경사(京師=서울) 벼슬을 하다가 일시에 다 죽어 장례 치를 방법이 없어 자신의 몸을 팔아 장비(葬費)에 쓰고자 한다고 하였다. 순언이 장비에 필요하다는 삼백금(金)을 주니 여인이 잘 받지 않는 것을 억지로 주었고, 여인의 순결(純潔)을 보장해 주었다. 몇 년 후 1584년(선조 17)에 종계변무(宗系卞誣. 우리나라 임금의 종계(宗孫) 착오됨을 해명함)의 일로 황지천정욱(黃芝川廷彧)을 따라 통역관으로 중국을 향하였다.
조양문(朝陽門) 밖에 닿을 무렵 말을 타고 달려오는 사람이, 홍판사(判事)[홍언박]인가 묻고, 예부(禮部) 석시랑(石侍郞)이 기다린다 말한다. 이윽고 한 부인이 몸종 10여 명의 호위를 받고 교사에 내려와서 홍판사에게 배복(拜伏)하였다. 홍판사가 자리를 피하고코자 하니 석시랑이 이르기를 이 절은 보은배(報恩拜)이니 절을 받아야 된다고 하였고, 부인은 고의(高義)를 받아 부모를 안장(安葬)하였음은 대인(大人)의 덕(德)이라고 칭찬하였다. 이 일로 석시랑의 도움을 받아 종계변무(宗系卞誣)가 잘 해결되었고. 그 후 1592년(선조 25년)에 일본이 우리 나라를 침략(侵略)하는 것을 석시랑의 적극적인 협조로 중국의 후원병(後援兵)의 도움을 받아 물리쳤다.
홍희남(洪喜男)은 당홍이 낳은 조선조의 명외교가. 임란(壬亂) 이후 대일(對日) 교섭에서 조선측의 주역으로 일본에 여섯 차례나 사신으로 왕래, 국교회복을 매듭지었으며, 명에도 두 차례나 사신으로 파견됐다. 1649년 인조(仁祖)가 죽었을 때는 일본의 조문사절을 부산(釜山)에서 맞아 일본사신 왕래의 새로운 규례를 정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효종(孝宗) 10년(1659) 일본에 사신으로 간 길에 서양을 통해 들어온 유황(硫黃)의 산화법(酸化法)을 배워 와 우리나라 화기 발전에 공헌했다.
□ 조선 중기의 당홍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으로 영의정 대제학에 오른 홍서봉(洪瑞鳳)과 그의 아버지인 천민(天民), 할아버지 춘경(春卿)은 <3대 호당(湖堂)>의 명예를 누린다. 또 천민의 동생인 성민(聖民)의 후예는 그로부터 6대 7명 대과(大科)의 영예를 쌓아, 춘경(春卿)의 아버지 계정(係貞)[이조참판吏曹參判)]부터 따지면 9대 대과의 5백년 유일 무이한 기록을 세웠다. 더욱이 그 중에는 영의정이 둘(홍명하 홍치중), 우의정이 1명(홍중보)으로 당홍 영화의 절정을 이룬다. 6대 이후에도 한말(韓末) 홍순목(洪淳穆)이 영의정에 오르는 등 조선조 중반 이후 당홍의 영화는 시종여일했다.
당홍 영화를 꽃피운 홍서봉에게는 이런 일화가 있다.
어릴 적 여러 아이들과 함께 당시 정승이던 홍섬(洪暹)[토홍(土洪)] 집 연못에서 놀다가 막 피는 연꽃을 모두 꺾어 버렸다. 노한 홍정승이 볼기를 치려 하자 다른 아이들은 다 도망쳤으나 서봉만은 가지 않았다. 홍섬이 기이하게 여겨, ‘네가 만일 시를 짓는다면 매를 때리지 않고 용서해 주겠다’고 했더니 서봉이 ‘좋습니다’고 선뜻 응답했다. 홍섬이 추(秋), 유(遊), 우(牛)의 세 운자를 부르자 서봉은 막힘없이 싯구를 이루었다.
相公池閣冷如秋 童子携朋月下遊(상공지각냉여추 동자휴붕월하유)
昇平大業知何事 但想蓮花不問牛(승평대업지하사 단상연화불문우)
[정승댁 연못은 차기가 가을 같아 소년이 친구와 더불어 달밤에 놀았네. 태평세월에 무슨 일이 문제이리, 어찌타 연꽃만 묻고 소는 아니 물으시는고]
홍섬은 서봉을 불러 자리에 앉히고 어깨를 쓰다듬으며, ‘이 아이가 훗날 반드시 내 자리에 앉을 것이다’고 했다 한다.
과연 그의 말대로 서봉은 벼슬길에서 최고의 자리인 영의정(국무총리)에 올랐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국난을 당해서는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화의(和議)를 주장, 여러 차례 청(淸)나라 진영을 드나들며 강화교섭을 벌였다. 문장과 시에 능했고 글씨도 뛰어났다.
성민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 형인 승지 천민에게서 글을 배웠다. 하루는 글을 배우다 말고 갑자기 슬피 울었다. 천민이 까닭을 물으니, ‘내가 배운 지 몇 달에 한번도 종아리를 맞지 않았는데 이는 나의 아버지 없음을 불쌍히 여긴 때문이라 슬퍼한다’고 했다. 홍문(洪門)의 9대 대과 영예는 스스로 채찍질하는 이같은 면학(勉學)의 정신이 전승돼서 가능했을 것이다.
조정의 중신 자리에 있은 탓에 어쩔 수 없이 주화(主和)를 주장했던 홍서봉과는 대조적으로 홍명형(洪命亨)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로 강화(江華)에 피신했다가 청군(淸軍)이 다다르자 화약에 불을 지르고 뛰어들어 자결. 충렬(忠烈)로 이조판서(吏曹判書)가 추증되기도 했다.
병자호란에서 당홍의 충절(忠節)을 빛낸 또 한 인물은 홍명구(洪命耈)다. 평안도(平安道)관찰사로 청군이 침공하자 2천명 군사를 이끌고 금화(金化)에서 청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좌의정에 추증되고 충렬공(忠烈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도둑이 들어왔다가 솥뚜껑에 먼지가 앉은 것을 보고 돈꾸러미를 놓고 갔더니 다음날 ‘돈잃은 사람은 찾아가라’는 방을 써붙였다는 청백리(淸白吏) 홍서변(洪書燮)[영조조공판(英祖朝工判)]의 일화는 <명심보감(明心寶鑑)>에 올라 있다.
구섭의 아들 재룡(在龍)[여영대장(御營大將)]의 딸은 헌종(憲宗)의 계비(繼妃)로 왕비(王妃)가 되었고, 재룡의 아들 종석(鐘奭)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종석(鐘奭)의 아들 정형(渟馨)도 한말(韓末)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라 부자가 부판(福判)을 지낸 기록을 남겼다. 정형은 일제(日帝)가 한국(韓國)을 합병할 때 작위와 금전의 유혹을 뿌리치고 벼슬을 버렸다.
홍수주(洪受疇)는 예종(肅宗) 때 서(書)․화(畵)의 명인으로 꼽혔다. □
□ 조선 후기의 당홍
영조대(英祖代) 당홍은 일시 재앙을 입는다. 이판(吏判)을 지내고 태조하(奉朝賀)가 된 홍계희(洪啓禧)의 아들 5형제가 대과(大科)에 올라 위세를 떨쳤는데 그중 지해(趾海)[형판(型判)], 술해(述海)[이의(吏議)] , 찬해(纘海)[승지(承旨])와 지해(趾海)의 아들 상간(相簡) 등이 벽파(僻派)[사도세자(思悼世子)를 공격했던 일파. 주로 노론(老論)이었음]에 가담했다가 정조(正祖) 1년 (1777년) <홍인한(洪麟漢)역모> 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사형을 당해 한동안 쇠운에 빠지게 된 것.
그러나 당홍의 이름을 역사에 길이 드높인 인물은 썩어빠진 조선왕조를 뒤엎고 천하를 일신(一新)하려던 혁명아 홍경래(洪景來). 그는 일찍 어려서 서당에서 훈장에게 글을 배우다 진시황(秦始皇)을 암살하려다 잡혀 죽은 형가(邢可)를 두고 시를 지으라는 말에, 秋風易水壯士拳 白日咸陽天子頭(추풍역수장사권 백일함양천자두)라고 지어냈다. 훈장이 ‘秋風易水壯士拳추풍역수장사권)이요, 白日咸陽天子頭(백일함양천자두)라’하고 뜻없이 흥얼거리자 소년 경래는 ‘선생님 그렇게 읽는 게 아닙니다’하고 즉각 이의를 달았다. 그는 ‘秋風易水壯士拳(추풍역수장사권)으로 白日咸陽天子頭(백일함양천자두)를’하며 <으로>와 <를>이라는 토에 힘을 주며 주먹을 쥐어 방바닥을 내리쳤다. 약한 제나라를 삼키려 기회만 노리는 폭군 진시황을 죽이겠다고 차가운 가을 역수(易水) 강물을 건너던 그 형가(邢可)의 주먹으로 대낮 함양(咸陽)에 중국천자(中國天子)의 머리통을 부숴 버리겠다는 이 소년의 기백에 시골훈장은 혼비백산, ‘얘야, 이제부터 나는 너를 가르칠 수 없다’고 도망쳤다는 얘기다.
남 하는 대로 과거에도 응시했으나 예상대로 낙방한 그는 세도정치와 당쟁과 지역차별의 속속들이 병든 조선을 바로잡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고 생각, 과거를 단념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박천(博川)의 청룡사(靑龍寺)에서 명문(名門)의 서자(庶子)로 역시 사회개혁의 의지를 품고 배회하던 우군칙(禹君則)을 만나 의기가 투합, 거사의 모의가 시작된다. 가산 다복동(嘉山 多福洞)을 본거지로 각지의 장사․기인, 술사 등을 모으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부자들도 포섭, 자금을 대게 했다. 1811년(순조 11년) 극심한 흉년으로 인심이 혼란해지자, 12월에 2천 병력을 일으켜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라 일컫고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가산(嘉山)․박천(博川)․곽산(郭山)․ 정주(定州), 선주(宣州), 태산(泰山)․ 철산(鐵山)․용천(龍川) 등 평북(平北) 일대를 휩쓸고 서울로 진격하려 했으나 관군과 安州에서 싸워 패주, 그의 웅지는 꺾이고 만다.
정주성(定州城)에 웅거,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그는 성밑에 굴을 파고 화약을 터뜨린 관군의 기습으로 전사했다. 그때 나이 서른 둘. 불꽃 같은 혁명아의 일생이었다. 비록 웅지(雄志)를 이루지 못한 채 정주(定州) 북장대(北將臺)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민족의 영웅>으로 길이 살아 있다.
한말 대원군(大院君)의 심복이자 수구강경파의 거두였던 영의정 홍정목(洪渟穆)은 아들 홍영식(洪英植)이 개화파의 선봉으로 김옥균(金玉均) 등과 함께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가 실패,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처형되자 자결하는 비운을 맞았다. 영식의 형 만식(萬植)[한말 의정부 찬정(韓末 議政府 贊政)]은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체결에 울분을 못이겨 음독 자결했고, 자객 홍종우(洪鍾宇)는 개화파의 영도자 김옥균을 암살하는 등 당홍의 영화는 개화의 격동과 함께 비운과 교차하며 현대로 넘어온다.
□ 일제시대의 당홍
고종(高宗) 17년(1880년) 일본서 돌아온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왕에게 올려 개화논의가 분분했을 당시, 관동유림(關東儒林)의 대표로 척왜(斥倭)를 상소, 미지근한 태도의 왕까지도 공격하는 등 결사적으로 개화를 반대하다가 참형을 당한 홍재학(洪在鶴)은 조선명벌(朝鮮名閥) 당홍의 보수성을 드러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한말(韓末), 일제(日帝) 침략의 국난기에 당홍은 적잖은 의병 열사를 배출했다.
그중에도 특기할 인물은 滿洲에서 抗日 무력투쟁을 벌인 전설적 영웅 홍범도(洪範圖)장군.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된 이태 후 1907년 차도선(車道善).태양욱(太陽郁) 등과 함께 평북(平北)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압록강(鴨綠江)을 넘나들며 일군(日軍)부대를 공략하는 무력투쟁을 계속했다. 유명한 <평안도(平安道)포수>들로 조직된 그의 소수 정예부대는 신출귀몰하는 기습전술로 三水.惠山.豊山.滿浦鎭.鳳梧洞 등지에서 숱한 승리를 기록하여 침략 日軍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중에도 가장 빛나는 전투가 유명한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 대첩후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 서일(徐一)을 총재로 추대하고 김좌진(金佐鎭)과 함께 부총재가 되어 레닌 정부의 협력을 얻어 고려(高麗)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하던 중 레닌 정부의 배신으로 독립군이 소군(蘇軍)에 무장해제를 당하는 黑河사변으로 조직은 해체되고 큰 타격을 맛본다. 그후로도 그는 백두산(白頭山)일대를 근거지로 무력항쟁을 계속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어떻게 어디서 죽었는지 최후는 전해지지 않는다. 건국후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됐다.
홍병기(洪秉箕)는 천도교(天道敎)대표로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에 가담했으며 3년형을 받고 출옥 후 만주(滿洲)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홍기조(洪基兆) 역시 천도교대표로 33인에 끼었으며 2년형을 사고 나와서는 천도교의 교사(道師). 장로(長老)로 신앙을 통해 청년들에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해방후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주어졌다.
그 밖에도 홍익성(洪益成)은 기독교 장로로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 18개월 옥살이를 하고 3.1운동 때는 황해도 신천군(信川郡)의 시위를 주동하고 만주로 망명, 임정(臨政) 연락원으로 안동(安東)서 활약하다가 일경(日警)에 체포돼 신의주감옥에서 순국했다. 홍식(洪植)은 만주서 독립군사령부 제3영장(營長)으로 국내에 들어왔다가 일경(日警)과 교전 끝에 전사했으며, 홍학정(洪學渟)은 평안도 일대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활약했는데 1927년에는식산은행(殖産銀行) 의주(義州)지점을 습격하고 금융조합에서 9백80원을 강탈, 만주로 가기도 했다. 그 후에도 압록강을 넘나들며 각지의 일본경찰서를 습격하고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일경(日警)에 체포돼 순국했다. 홍원식(洪元植)도 3.1운동 때 고향 화성(華城)에서 시위를 주동했는데 일제의 제암리(提岩里)학살사건 때 현장에서 살해당했다. 일본 중앙대학을 졸업하고 상해로 망명, 임정의 자금조달에 활약했던 홍승로(洪承魯)는 해방 후 귀국, 반민특위(反民特委)감찰위원. 한독당(韓獨黨)감찰위원장으로 민족정기(民族正氣)의 선양에 앞장섰었다.
 □ 조선시대의 토홍
비록 수에서는 당홍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적으면서도 토홍은 당홍에지지 않는 저력이다. 토홍은 시조 선행(先幸)의 9대 내지 12대손에서 문희공(文僖公)․정효공(貞孝公)․참의공(參議公)․주부공(主簿公), 대호군공(大護軍公)의 5파가 갈렸다. 본고장인 남양(경기도 화성군)과 서울 경북(慶北)․예천(醴泉)․ 영주(榮州)․봉화(奉化)․충남(忠南) 아산(牙山)․당진(唐津) 등에 주로 산다.
토홍의 영화 중의 절정은 중종(中宗) 때 영의정에 오른 문희공(文僖公) 언필(彦弼)과 그 아들 섬(暹)의 대. 暹은 선조 때 영의정을 세 번 역임하며 명상 청백리의 칭송을 들었는데 부자가 수상을 지낸 드문 기록을 세웠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 여산(礪山) 송(宋)씨는 중종(中宗) 때 영의정을 지낸 송질의 딸로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모두 수상인 <세계사상 유일의 복많은 여성>. 당시에도 왕비와 대신의 부인 등 상류사회 부인들의 사교 모임이 있었는데, 왕비는 송부인이 나타나면 꼭 일어서서 마중하며 깍듯한 존경을 표했다 한다. 그 까닭을 묻자 왕비는 자신은 남편이 임금일 뿐이지만 송부인은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모두 재상이니 어찌 내가 공경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고 했다는 것.
宋부인은 명문의 여인답게 예의범절에 밝고 부덕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여장부였다 한다.
그녀가 처녀시절 친정아버지 송질은 극성스런 부인의 성격에 골치를 앓던 나머지 딸들도 어머니를 닮으면 큰일이다 싶어 세 딸을 불러도 놓고 한마당 연극을 했다고 한다. 딸들 앞에 약을 한 사발씩 내놓고 너희들이 어머니를 본받아 극성을 부리면 다음에 시집을 가더라도 송씨 가문에 누가 미칠 터이니 그럴 양이면 여기 이것이 독약이니 아예 마시고 죽어라고 했더니, 위로 두 언니는 절대로 어머니 같은 극성을 부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반면 유독 셋째 송부인만은 ‘사람이 세상에 나서 자기 본마음대로 살지못하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뭐가 다르겠냐’고 선뜻 약사발을 들어 들이켰다는 것. 그 약은 그러나 독약이 아니라 보약. 딸들의 기질을 시험하고 길을 들이려던 송질은 이 셋째 딸의 기개에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한다.
유감없이 한 세상을 살 그런 기질을 타고 낳던 듯 싶다. 그녀는 평생 세 번 평양(平壤)을 갔다. 처녀때 평안(平安)감사 아버지를 따라, 결혼한 뒤 평안감사 남편을 따라, 세 번째는 늙어서 평안감사 아들을 따라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 평양의 경치를 구경한 것은 늙어서 아들을 따라가서였다. 처녀때와 젊은 부인이었을 때는 몸가짐을 조심하느라 집밖을 나가지 않았던 것. 할머니가 되어 세 번째 가서야 가마를 멈추게 하고 ‘이제는 평양 구경을 해도 욕되지 않을 것이다’며 산천경개를 구경했다. 평안감사 관사별당에는 그녀가 처녀 때 와서 심었던 복숭아와 앵도나무는 그때 고목이 되어 있었다. 송부인은 나무가 이렇게 늙었으니 나는 얼마나 늙었겠는냐고 인생무상을 탄식했는데 이 얘기를 전해들은 中宗은 이 당대 복덕귀(福德貴)부인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특별과거를 베풀고 글제로<三至柳京歎櫻桃樹老(삼지유경탄앵도수로)>[세번 평양에 가서 앵도나무의 늙음을 탄식하다]를 출제했다는 것이다. 남성 위주의 조선사회에서 여성이 존경과 대우를 받은 드문 한편의 가화(佳話)가 아닐 수 없다. 몇 해 전 미국에서 간행된 세계 유명 여류인사 속에 한국여성으론 유일하게 올랐다는 종친회의 자랑이다.
□ 현대의 당홍과 토홍
당홍은 현대에 들어 과거의 영화의 비할 때 다소 허전한 느낌이 없지 않으나 법무 내무부장관을 역임한 중앙일보(中央日報) 회장 홍진기(洪璡基), 전 내무 보사부장관 홍성철(洪性澈), 전(前) 문공부장관 홍종철(洪種哲), 전 방송공사사장 홍경모(洪景模) 약학계의 태두인 전 서울약대 학장 홍문화(洪文和), 언론인 홍종인(洪種仁), 전 중앙일보주필 부사장 홍성유, 4선국회의원이었던 홍창섭(洪滄燮), 한국방송 광고공사사장 홍두표(洪斗杓)[이상 당홍],
몇 해 전 작고한 전 경련회장 홍재선(洪在善), 전 대한변협회장 국정자문위원인원로 변호사 홍승만(洪承萬), 한국일보발행인 홍유선(洪惟善), 언론인 문학평론가 홍사중(洪思重)[이상 토홍]씨 등이 각계에서 명문 남양홍씨(南陽洪氏)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 당홍 항렬표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43세 44세 45세 46세 47세 48세  49세 50세 51세 52세 53세 54세 55세 56세 57세 58세
 병(秉)○ ○섭(燮) 재(在)○ ○종(鍾) 순(淳)○ ○표(杓) ○식(植) 성(性)○ 지(志)○ ○기(基) ○의(義) 석(錫)○ 진(鎭)○ ○택(澤) ○락(洛)  근(根)○ 주(柱)○ ○환(煥) ○희(熙) 시(時)○ 중(重)○ ○용(鎔) ○수(銖) 연(演)○ 홍(洪)○ ○  사(思)○ 연(然)○ ○균(均) ○철(喆) 경(庚)○ 상(商)○ ○태(泰) ○구(求) 정(禎)○ 락(樂)○ ○형(炯) ○욱(煜) 요(堯)○ 혁(赫)○ ○호(鎬) ○련(連) 수(洙)○ 용(溶)○ ○모(模) ○환(桓) 찬(燦)○ 훤(煊)○ ○증(增) ○배(培) 옥(屋)○ 선(銑)○ ○윤(潤) ○준(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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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026 성씨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16  `문화 유씨
문화유씨(文化柳氏)
◈ 문화류씨의 기원(起源) ◈
우리나라에서 류씨(柳氏)로서 국사(國史)나 공가문헌(公家文獻)에 처음 등재된 것은 고려사(高麗史)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이다.
고려사 열전(列傳)의 문간공 류공권(文簡公 柳公權)의 주(註)에 ‘공의 6세조 차달(車達)은 고려 태조의 개국(開國)을 도와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관직은 대승(大丞)이었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랑의 황해도 문화현(黃海道 文化縣)의 인물편에 ‘류차달(柳車達)은 고려 태조가 남방(南方)을 정벌을 정벌할 때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공급함으로써 그 공으로 대승에 제수함과 아울러 삼한공신으로 사호(賜號)하였다’고 하였다.,
그 아들 좌윤 효금(左尹孝金)이 일찌기 구월산을 유람하다가 대호(大虎)를 만나 그 입 속에 걸려 있던 비녀를 빼 줌으로써 그 음덕(蔭德)으로 자손이 반드시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리라고 산신이 현몽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고, 또한 좌윤공의 5세손 문간공 공권(文簡公 公權) 이하 수대의 사행(事行)이 휼륭히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류씨는 고려 개국 이후 조선을 거쳐 우금 천여년 동안 많은 명경석학(名卿碩學)이 계속 배출되어 국가와 휴척(休戚)을 함께 한 명벌(名閥)로써 옛부터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 왔다.
◈ 외사씨(外史氏)의 류씨평(柳氏評) ◈
초간 문간해(草澗 權文海)가 지은 대동운부군옥(대동운부군옥)에는 동한(동한)명벌 20성(姓) 중에 류씨를 9위에 넣고 있으며,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지은 이천부사 류공경소 묘갈명(利川府使 柳公景紹 墓碣名)에는 ‘문화류씨는 규조가 성황하여 다른 씨족이 바래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며,
익익재 홍봉한(翼翼齋 洪鳳漢)등이 지은 증보문헌비고에는 ‘고려 사인(士人)에 족망상고(族望相高)로 류 최 김 이 4성이 귀종(貴種)이라’ 하여 고려 4대 명족 중에 류씨를 으뜸으로 꼽았으며,
이긍익(李肯翊)은 연려실기술(燃려室記鉥)에서 ‘우리 나라 족보(族譜)의 효시(嚆矢)는 가정(嘉靖)년간에 간행된 문화류씨세보’라 하였다.
명나라의 학사 우신행은 ‘동국의 류씨는 진나라의 왕씨(王氏). 사씨(謝氏), 당나라의 최씨(崔氏). 노씨(盧氏)에 내리지 않는다.’ 하였으니 국내외를 막론하고 류씨의 성망이 얼마나 울연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 류씨의 관향(貫鄕) ◈
씨족통고(氏族通考)에 류씨의 관향이 15본이 전하는데
즉 대종(大宗)이
문화(文化), 풍산(豊山)  서산(瑞山)  선산(善山)  전주(全州)  진주(晋州)  고흥(高興)  영광(靈光) 8본은 현존하며
육창(陸昌) 정주(貞州). 연안(延安). 백천(白川). 부평(富平) 약목(若木). 인동(仁同)등 7본은 미약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 문화현(文化縣)의 연혁 ◈
고대 단군조선(檀君朝鮮)때 당장경(唐藏京)이었는데 고구려 (高句麗)때에 이르러 궐구현(闕口縣)으로 고쳤다.
고려초기에 유주(儒州)로 고쳤더니 성종때에 시령(始寧)으로 바뀌고
현종 9년戊午(1018)에 풍주(豊州)에 예속시켰다가
예종원년 丙(1106)에 유주(儒州)로 복구하여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종46년 기미(1959)에 위사공신(衛社功신)류경(柳경)의 고향이라 하여 문화 로 개칭하는 동시에 현(縣)으로 승격시켜 현령을 두었다.
조선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따라 현령과 훈도(訓導)를 각 1인씩 두었다. 광해군(光海君) 10년 무오1618에 부로 승격시켰다가 곧바로 현(縣)으로 바뀌었다. 고종 32년 을미 1895에 군(郡)이 되었더니 경무(庚戊)1910한일합방이 된후 신천군(信川郡)에 병합되어 문화면(文化面)이 되었다.
단군(檀君)께서 처음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이 곳 당장산(唐藏山: 구월산) 으로 옮겨 당장경(唐藏京)이라 일컬었는데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이곳에 삼성사 를 지어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3위를 모시고 향사하였다.
이 곳 문화에서 동쪽으로 안악군계(安岳郡界)까지 19리요, 남쪽으로 신천군계 (信川郡界)까지 13리요. 서쪽으로 송화현계(松禾縣界)까지 47리요, 은율현계(殷栗縣界)40리요. 북쪽으로 장연현계(長連縣界)까지42리요, 경도한양까지는477리이다. 이 문화 고을의 풍광을 읊은 제영중에 조선조의 문신이 이초는 ‘인사는 기한이 있어 서로 바뀌는데, 계산(溪山)은 옛과 같이 스스로 맑도다.’하였고  김처례는 ‘시냇가에 해가 길으니 중천이 따사롭고, 하늘 끝에 구름이 열리니 월악이 기이하다.’ 하였다.
◈ 문화류시조 류차달 (柳車達) ◈
(고려 태조조 공신 문화류씨 시조)
초휘 해(海). 자 응통(應通). 호 아사(鵝沙). 공은 신라(新羅)말기에 유주(儒州), 지금 황해동 신천군 문화면(黃海道信川郡文化面) 묵방동(墨坊洞)에서 태어났는데 가세(家勢)가 심히 부호(富豪)였다.
후삼국(後三國)시대에 궁예(弓裔)의 신하 왕건(王建)이 신망을 얻어 천하를 통일코자 후백제(後百濟)의 견휜을 정벌하려 할 즈음 군량이 부족하여 나처한 지경에 빠져 있었다. 이 때 공께서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보급하므르써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高麗)를 건국, 태조(太租)가 되었다.
이에 태조께서 공에게 삼한공신(三韓功臣)에 봉함과 아울러 대승(大丞)의 관작을 내리고, 차운달량(車運達糧)의 뜻을 취하여 차달(車達)이라 사명하시었다.
배위 김씨(金氏)는 신라 태부 알지(太傅 閼智)의 후손 균의 따님으로 2남을 두어 효전(孝全)은 대광백(大匡伯)에 추봉되고, 효금(효금)은 좌윤(左尹)을 지내었다.
공의 묘소는 황해도 구월산 남록 인좌에 모셔져 석의(石儀)가 갖추어 있고 , 묘소 아래 재실 경사루(敬思樓)가 현존하고 있다.
원파록(源派錄)에 의하면, 공은 신라 승상 색(丞相고)의 5대손이요. 월흑산장 보림(月黑山長 普林)의 아들이라 하였고, 고려 태조께서 구성(舊姓)차 씨(車氏)의 휼륭한 공적을 잊지 못할 것이요. 류씨(柳氏)로 행세한지 이미 오세(五世)이니 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효전으로 차씨를 승습토록하고, 효금으로 류씨를 계승토록하라 하였다. 이로서 효전은 차 씨시조가 되고, 효금은 류씨를 계승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동사(東史)에 의하면, 고려태조가 장차 견휜을 치려하는데 군량이 부족함을 걱정하니 장수들이 남방(南方)은 토지가 비옥하여 백성들의 남은 곡식이 많다. 하였다. 이 때 공께서 백성들의 곡식을 약탈한다면 어찌 날리를 평정하고 포악무도한 적도를 무찌르는 명분이 설수 있습니까 저의 집에 비축된 곡식이 있으니 그것으로써 군량의 공급을 돕겠읍니다. 하고, 하룻밤 사이에 수레 일천 대를 만들어 군량을 보급하였다. 구월산에 흥률사(興栗寺)란 절이 있는데, 이는 신라 헌덕왕(憲德王)이 도의선사 (道義禪師)로 하여금 자리를 잡아 창건케 한 절이다. 그 후 고려 공민왕(恭愍王) 5년 丙申(1356)4월 법원선사(법원선사)가 중수하고 조선(조선) 숙종(숙종)10년 갑자(1684)애 또 중수 되었다.
숙종 갑자 중수시에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었는데. 이 글은 공민왕 병신에 법원선사가 쓴 기록으로서 그 가운데 우리 대승공에 관한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절에 한 신인(神人)이 있었으니 눈섭이 그린 것 같고 머리는 검으며 살결은 눈처럼 희고 마음씨는 해처럼 밝으며 주공(周公)의 뜻과 공자의 생각 같아 인의의 은혜가 있고 도덕이 빛났다. 어느날 정자 와서 왕장군의 진중에 군량이 떨어져 전공을 이룰지 알수 없는데 이런 위급한 때를 당하여 한가히 졸고 계십니까? 하였다. 신인이 잠을 깨어 내심으로 충절을 하 할 것을 다짐하고 하룻 밤 사이에 수레 천 대를 제작하여 군량을 실었는데 운전하기가 극히 어려웠다. 이 때에 이절의 부처의 신력으로 청의 와 홍의를 입은 신군 일천여명을 동구 밖에 출동시켜잠시에 그들로 하여금 군량을 운반하여 전공을 크게 세우고, 삼한(三韓)을 통합하게 하니 그 공이 은탕왕(殷 湯王) 때 이윤(伊尹)과, 주 무왕(周 武王) 때 여상과 같은지라, 이로 인하여 신인에게 차달이란 이름을 주었다. 이 절의 영험이 아니었다면 왕장군이 삼한 통합의 대업을 이루지 못했으리라 하였다.
◈ 문화류씨 세덕(世德) ◈
문화류씨는 고려.조선 양조에 걸쳐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우리나라의 명문으로 일컬어 왔다.
본 선세편에 그 사행을 자상히 기록한 바 통사에서는 대략 열거하였음을 밝혀둔다.
고려조에는 시조 대승공 차달 이후로 염근(廉謹)과 문필(文筆)로 이세의 사표(師表)가 된 문간공 공권
권신을 제거하여 정권을 왕실에 회복시킨 문정공 경(文正公 璥)
신의를 찬술하여 예절을 바로잡은 정신공 승(貞愼公 陞)
강직한 기개로 정령(政令)을 쇄신한 장경공 돈(章敬公 墩)
충직한 말로서국기를 진작시킨 온정공 인기(溫靖公 仁琦)를 사세오공(四世五公)으로 일컫는다.
조선조에 들어상신으로는 위하도회군으로 개국의 기틀을 마련했던 좌의정 만수(曼殊)
태종을 보필하여 국기를 다진 우의정 량(亮)
대마도의 왜구를 정벌하고 국정에 지대한공을 새운 영의정 정현(廷顯)
국초에 청렴재상으로 백세의 추앙을 받는 우의정 관(寬)
중종반정후 인망으로 정승에 재추대된 영의정 순(洵)
강직한 지절로 을사사하에 수화를 당한 좌의정 관(灌)
충직으로 을사제현(乙巳諸賢)을 설원시킨 중신 영의정 전 (전)
청백재상으로 문필이 구비한 영의정 상운(尙運)
건저소(建儲疏)로서 경종을 보필한 소론 사대신의 일인인 좌의정 봉휘(鳳輝) 등이다

문형(文衡)에 오른이는 송암 관(松庵 灌)
호당에 선발된 이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순절한 사육신의 일인인 낭간성원(낭간 誠源)
기묘사화에 조정암을 구하려다가 관직을 버리고 의리에 죽은 항재 운(恒齋 雲) 우복당 전(遇伏堂 전),이조참판 희발(吏曹參判 希發), 제교 희량(霽嶠 希亮)이며,
경연초선(經筵抄選)에 오른이는 학문과 행의로 백세의 사표가된 백석 집(白石 집)이다.

청백리에 녹선된 이는 우의정 관(右議政 寬),선산부사 희철,승지 혼 .영의정 상운
절신(節臣)으로는 낭간 성원
단종손위에 절의를 지키고 명화 지곡송학도를 남긴 서산 자미
기묘사화에 조정암과 함께 피화되어 항리에서 여생을 마친 빙고별제 맹연 항재운. 송암 관이다.

공신으로는 태종조 좌명공신인 문성부원군 량
세조조 정난공신인 문성군 수, 문성군 하 , 문천군 서, 문원군 사
성종조 좌리공신인 문양군 지
중종조 정국공신인 문성부원군 순, 문원군 응룡과
평난공신인 시령부원군 전
호성공신인 문양군 희림
선무공신인 문흥군 사원
형난공신인 문평군 공량, 문천군 인길등이다. 장인이 3인이니
국조방목(國朝榜目)에 등재된 문과 급제자는, 고려조에 문간공 공권을 비롯하여 복야공 택, 문정공 경, 장경공 돈, 문간공 관, 충경공 량 등 6인이며, 조선조에 들어서는 문숙공 사눌을 비롯하여 134인 도합140인이다. 그 밖에 무과와 생원. 진사에 급제한 이는 헤아릴수 없이 많다.
문화류씨는 옛부터 고향을 지키며 세거하였으나 지금은 세태의 변화로 말미암아 거의 이행한 실정이다.

□ 집성촌
다음은 일제 때 국세조사 통계에 의한 자료로, 당시 30호이상 거주 동족부락을 파별로 열기하였다.
▼사랑공파
안악군대향면생근리, 영덕군 오보면삼계리, 청주군 남이면 금대리, 남일면 가중리, 북일면, 북이면, 보은군, 탄부면 매화리.
▼문숙공파
이천군 모가면 송곡리, 제천군 금성면, 청풍면.
▼하정공파
강화군 선원면 신정리, 염암군 신북면 모산리, 여수군 율촌면 가장리, 정읍군 덕천면 달천리, 충주군 노은면 안락동, 광주군 오포면 양벌리, 연백군 유곡면 식현리 시흥군 의왕면 오전리, 양평군 양평면 회현리, 안악군 서하면 덕일리, 신천군 초리면 홍학리, 장단군 강상면 마성리
▼장령공파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곤산군파
달성군 해안면, 경산군 안심면 신서동,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 칠곡군 약목면, 석적면, 밀양군 삼량진면 청학동
▼문평군파
괴산군 사리면 중흥리, 청주군 사주면 신봉리, 오창면 양청리, 보은군 산외면 산대리
▼지후사공파
담양군 창평면 유곡리, 임실군 삼계면 강촌리, 순창군 금과면 남계리, 군위군 효령면 오천동, 병호동, 중화군 양정면 대내리, 부여군 충화면 만지리, 복금리, 진천군 행정리, 시흥군 군자면 군자리
▼좌상공파
포천군 서면 자작리, 양산군 읍내면 산 막리, 울산군 서상면 양정리, 나주군 본양면 덕림리, 동호리, 칠곡군 칠곡면 죽전리, 영천군 북안면, 부여군 현내면 영창리, 양주군 진접면 팔야리, 진양군 수곡면 원당리, 산청군 시천면 천평리, 합천 함안군 가야면 신음리, 사천군 서포면 자혜리, 강화군 송해면 신당리, 김해군 진례면 청천리, 김해면 외동리,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여주군 북내면 주암리, 홍천군 화촌면 외삼포리, 천안군 성거면 석교리, 성진군 학상면 왕덕동, 공주군 우성면, 탄천면, 신풍면, 부여군 초촌면 응평리, 정읍군 소성면 중광리, 진양군 금곡면 송곡리.
▼검한성공파
가평군 하면 신상리, 화순군 동면 언도리, 온양군 탕정면 동산리, 연천군 백학면 노곡리, 옥천군 옥천면 구일리, 진양군 대평면 당촌리, 김제군 공덕면 황실리, 존걸리, 백산면 상정리, 홍사리, 전주군 초포면 송전리, 장성군 북이면 여률리, 촌천군 신북면 지내리.
▼정숙공파
평산군 세곡면 수동리, 문암리, 옥천군 군복면 추소리, 무주군 적상면 삼류리.
▼판사공파
칠곡군 동명면 학정리.
▼수사공파
평택군 서탄면 봉남리
▼부윤공파
고양군 중면 백석리, 양평군 개군면 계전리, 당진군 고대면 당진포리, 제주군 대정면 인성리, 안덕면 사계리, 화순리.
▼충경공파
곡성군 곡성면 신기리, 대평리, 논산군 두마면 향한리, 연산면 백석리, 임리, 가야곡면 삼전리, 해남군 해남면 해리, 시흥군 수암면 와리, 고잔리, 선산군 구미면 사곡리, 포천군 가산면 금현리, 영광군 묘량면 덕흥리, 거장군 주상면 금현리, 영광군 묘량면 덕흥리, 거창군 주상면 거기리, 청주군 강서면 휴양리, 보은군 내북면 창리, 회북면고석리, 서산군 부석면 가사리,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 합천군 야로면 묵촌리,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 보은군 회남면 서탄리, 합천군 대양면 덕정리, 고성군 고성읍 대평리, 곡성군 죽곡면 봉정리 오곡면 오지리, 남원군 수지면 초리, 구례군 광의면 대산리, 익산군 함염ㄹ면 흘산리. 와리, 무안군, 청계면 사마리, 영암군 덕진면 장등리, 장성군 삼서면 수해리, 광주군 오치면 오치리. 여주군 강천면 도전리, 거창군 고제면 궁항리, 옥천군 군북면 대정리, 대덕군 탄동면 방현리, 천원군 성남면 신덕리, 석곡리, 대흥리, 대정리, 완주군 비봉면 수선리, 공주군 사곡면, 남해군 설천면 분항리, 서면 정포리 서천군 마산면 벽오리, 예산군 신양면 가지리, 임천군 세도면 화수리, 부안군 하서면 장신리, 달성군 다사면 방천동, 장수군 계남면 화양리, 무주군 무주면 당산리.

011123 성씨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16  `여흥민씨

여흥민씨(驪興閔氏)
 
 □ 유래
민씨는 본래 공자의 10제자중의 한명인 자건의 후손이 우리나라에 왔다가 여흥(경기도 여주)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시조 민칭도(閔稱道)는 고려때 벼슬을 했으며 고려 충숙왕(27대)때에 수정승을 지낸 학자인 민지를 시조로 하는 '문인공파'와 같은 시기에 대제학을 지낸 민적을 시조로하는 '문순공파'로 나뉘어 진다.
여흥민씨의 씨족연원은 두가지 설이 전한다.
그 하나는 고려 중엽 중국에서 우리 나라로 온 사신이 정착했다는 설과 경기도 여주 향리에  있는 영월루 민굴(閔窟)(일명 마암굴)에서 나왔다는 두 가지 설이다.
그러나 여흥민씨측은 첫번째 설을 주로 믿는 편이다.
민씨들이 믿고 있는 시족 연원은 다음과 같다.
민씨는 본래 공자의 제자 가운데 10 철중(哲中) 한 사람인 자건(子騫)의 후예로서 그 후손인 칭도(稱道)가 고려 때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왔다가 경기도 여흥(여주의 옛 이름)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고려의 상의봉어(尙醫奉御, 예복 관리의 벼슬)에 올랐던 칭도를 여흥민씨의 시조로 보고 있다.
시조 민칭도의 선계는 어느 때부터 드러났고 또 민칭도가 몇대 손인지도,언제부터 여흥을 본관으로 삼았는지도 여러 보 서문에는 밝혀지지 않으나 세록편을 보면 세 민지가 고려 원종조에 문과에 올라 추성수정성보리공신이 되고 여흥부원군에 봉해졌다고 하였다. 따라서 뚜렷하게 관향을 여흥으로 삼은 것은 이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이러한 연원을 가진 민씨가 해남에 정착한 시기는 조선 초이다.
계유정란이 일어났던 당시 이조판서를 지냈던 민신(伸)은 절제 김종서와 함께 단종 계유정란에 연류돼 다섯 아들인 보창, 보해, 보석, 보흥, 석이와 함께 참형을 당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민신의 손자인 중건(仲騫)만이 용케 살아 남아 해남으로 오게 된다.
즉 당시 집안의 종이었던 사람이 7살 먹은 중건을 항아리에 넣어 지게에 짊어지고 중건의 외숙인 김종 진도군수에게 내려왔다는 것이다.
옛 진도 땅이었던 삼산면(당시 삼촌면)에서 자랐다는 중건은 성장하여 초계 정씨와 결혼, 해남읍 해리로 분가해 온다. 그리고 그의 후손대에 이르러 마산면 양지리(화내리)로 옮겨간다.
이러한 내력으로 인해 해남지역에서 거주하는 민씨들은 입향조인 중건의 조부 민신을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있으며 여흥민씨 족보상 서열인 45개파 중 42번째 파인 충정공파에 속하고 있다.
현재 충정공 민신의 후손은 해남 전역에 7백호가 살고 있고 타지로 나간 사람까지 합하면 2천여호가 족히 넘는다.
또 민신의 후손은 21대(희자 돌림)까지 이어지고 있고 주요 거주지는 마산면 중앙을 위시로 마산 전역에 걸쳐 산다. 또 해남읍 해리, 남송, 계곡면 상면, 산이면 송천, 황산면 연호, 원호 등에도 많다.
한편 민신은 정조왕대에 이르러 그의 후손인 치상이 올린 상소문 등으로 충정공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고 영의정으로 추증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민신은 그의 아들 보창, 보해, 보석과 함께 미산서원에 배향되었고 아들 셋과 함께 서림공원 사층문에도 모셔져 있다.
그의 제사는 음력 10월 10일 마산면 남계리에서 부조묘 제사로 지내고 있다.
 여흥민씨는 고려 때에는 명문 중 명문 집안으로 일컬어졌고 조선시대에도 4명의 왕후를 배출할 만큼 세도가 있는 집안이었다. 태종비인 원경왕후를 비롯하여 숙종비인 인현왕후, 고종비  명성왕후, 순종비인 순명왕후 등 4명의 왕후를 배출시킨 데다 세종 때에는 일등청백리로 잘 알려진 불해, 불탐도 여흥민씨 집안에서 나온 사람들이고 이 외에도 정승, 판서 등 고관대작도 즐비하게 배출시킨 명문집안 이었다. 명문 집안이었던 만큼 해남에서도 여흥민씨의 세도는 꽤 컸다. 특히 정조 때에 이르러 계유정란의 희생자였던 민신에게 충정공 시호가 내려지고 영의정으로 추증되면서 여흥민씨의 세도도 이지역에서 더욱 높아졌다.
때문에 매일 아침 아침재를 넘어 아침 문안 인사를 해야 하는 등 해남으로 내려온 현감들이 시달렸던 얘기며 지역 세도를 꺾기 위해 우슬재와 아침재를 석자 세치씩 깎아 내렸다는 얘기 등 지역 토착 세력 중 하나이기도 했던 여흥민씨의 세도를 짐작케 하는 얘기들은 많이 전한다.  
또한 지금까지도 마산 지역에서는 원주이씨, 무안박씨와 함께 여흥민씨는 중심적인 성씨로 자리잡고 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세 성씨의 텃새가 마산 지역에서 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흥민씨와 얽힌 재미있는 설화도 전한다.
산이면 상공리에 백로와 새우형국을 한 바위가 서 있었는데 그 바위 바로 위쪽에 여흥민씨 선산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김서구가 해남 군수로 재직시(1782년 2월-1783년 6월) 여흥민씨의 세도가 높아 일하는데 불편함을 느껴 백로새우 바위를 파괴시켜 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그렇게 위세가 당당하던 여흥민씨 백자돌림들이 한해에 여럿이 죽은 일이 발생했다는 얘기다.
또 명문거족답게 여흥민씨와 관련된 초당이 많이 존재했음을 사료 등에 나타나고 있다.
귤주공 시가 쓰여 있었다는 남곽초당(해남읍 용정리), 해리에 있었다는 삼해정, 동백정, 금강골 부근에 터만 남아 있는 금강초당 등이다.
또 민씨 집안에서는 아직까지도 집안에 사당을 모셔 놓고 고조부까지를 모시고 있는 집도 있다.
해남읍 백아리에 거주하는 민정기씨 댁과 해남읍 해리 민두삼씨 댁이 그 장본인.
한편 여흥민씨 충정공 하는 학자들을 두루 배출한 집안으로 유명하다.
민선식씨와 남식, 지식 3형제가 모두 이학박사이고, 그의 조카 다섯 모두 박사학위를 수여할 정도. 또 서울대 사학과 교수인 민두기, 민영규(연대교수 역임), 민방기(전대법대 학장역임)씨 등 이 외에도 여흥민씨 충정공파는 많은 학자들을 배출시켰다.    -해남 신문에서- 
<본관> 여흥(여주)
여흥은 여주의 옛이름이다. 여주는 본래 고구려의 골내 근현인데, 신라 경덕왕이 황효현으로 고쳐 기천군의 영현으로 만들었고,고려초에는 황효현으로 개칭,원주에 속하게 하였다. 충렬왕31년 순경왕후 김씨의 내향이라 하여 여흥군으로 승격하였고,조선조 태종이 원경왕후의 친향이라하여 부로 승격,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하였다. 그 후 도호부가 되었고 세종대왕이 영릉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여주로 개칭되었다. 
주요 성씨로는 민.이.안.윤.김.한.음씨 등이 있었다.
<인물>
민공규 : 고려 명종때 좌간의 대부, 문하시중 평장사
민지 : 충렬왕 때 집현전 대학사
민종유 : 부흥군
민적 : 보문각 제학, 대사헌, 진현관 대제학
민제 : 예의관서, 예문관 제학, 예조판서, 한양부윤, 대사헌, 정하 우정승
민개 : 한성부윤, 대사헌
민여익 : 개국공신 3등, 도승지, 대사헌, 호조판서
민의생 : 조선 예조판서
민수생 : 조선 이조판서
민신 : 문종때 이조판서
민효증 : 정국공신, 좌찬성
민재인 : 중종때 좌찬성
민몽용 : 경기도 관찰사, 좌참찬, 이조판서, 우의정
민기 : 경상도 암행어사, 대사성, 대시간, 대사헌, 대사성, 우의정
민형남 : 형난공신, 우찬성
민여임 : 남원부사, 공조참판
민인백 : 선조때 충주목사, 안변부사, 한성부 좌윤
민성휘 : 인조때 개성부유수, 전라도 관찰사, 평안도 관찰사, 호조판서, 형조판서
민영환 : 대사성,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대한민국 건국공노 훈장 중장 수여
민종식 : 홍주에서 의병활동,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노 훈장 복장 수여
<개요>
여흥 민씨는 역사상 세 차례 크게 두각을 나타냈다.첫번째가 고려말 에서 조선개국까지,두번째가 조선의 숙종-영조대,세번째가 한말,특히 일.로.청 등 열강세력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격돌하던 한말의 역사적 시련기에 풍운이 왕비 민비를 정점으로 20여 년간 정권을 장악,갖가지 공과를 남겼다. 시조는 민청도다. 공자의 10명 제자중 한 사람인 민자건의 후예로 고려 중엽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여흥에 정착했다고 한다. 단일본으로 인구는 약 14 만명으로 그 역사적 위세에 비해 인구는 적은 편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던 1392년 조의생.임선미.민안부 등 72 명의 고려충신들은 이성계에게 반기를 들고 두문동에 은신했다. (두문동의 대학살)에서 극적인 탈출을 감행,경남 산청군 생초면 대포리에 피신했다는 것이다. 그의 후손들이 마을을 이루어 대대로 살아오는데 지난 81년 발견 "농헌실기"에 그의 (천리길 탈출기)가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마을 전체 50여 가구 2백50여명이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 인근 산청.거창.함양 등지에 4천여 가구가 산재해 있다. 현재 인구는 약 137,314명으로 조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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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南군 馬山면 禾內리
해남읍의 지형을 사람들은 옥녀탄금형(玉女彈琴刑)이라고 말한다.
삼산면과 현산면 경계에 병풍산이(313m)있다.
이 산과 해남읍 중간이며 읍과 삼산면 면계를 이룬 곳에 금산(216m)이 있으며 해남읍 뒷산 금강산(481m)에 미암(眉岩)이 있다. 이같은 지명은 읍기지명풍수(邑基地名風水)에 의한 것으로 금강산이 옥녀고, 미암은 그 옥녀의 눈썹이며, 멀리 병풍을 둘러치고 비파를 타고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옥천서 해남읍을 넘는 고개는 소의 무릎에 해당한다고 해서 '우슬치(牛膝峙)'라 한다.
해남읍을 지나 학동서 마산면 화내리로 넘는 고개를 '아침고개'또는 '조령(朝嶺)'이라 한다.
조선 말엽 해남고을 현감들은 이곳 토족들 때문에 치정이 어려웠다.
연안이씨와 여흥민씨 두 성씨가 어찌나 세도를 부렸던지 해남 현감은 매일 아침 조령을 넘어 20리 밖에 살던 마산면 화내리 여흥민씨들을 찾아가 문안인사를 드리고 돌아와 정사를 보아야 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아침고개'라고 부르게 됐다는 얘기가 남아 있다.
연안이씨는 이조때 상신(相臣)을 8명, 대제학을 7명, 청백리를 4명, 문과 급제자를 2백50명이나 낸 10대 명문중의 하나였다. 여흥민씨 역시 상신 12명 대제학 3명, 문과급제자 2백44명을 냈을 뿐아니라 한말 씨족세도의 전형을 이룬 민비가문인데다 마산면을 중심으로 8백50여 가구가 집단을 이루고 살았으니 그 기세와 세도를 짐작할만 하다.
이 때문에 해남현감들은 이 두 씨족 시중듣고 문안드리느라 정사를 제대로 못보았고 이들 비위에 거슬리면 곧 파직을 당했다. 이처럼 해남현감들은 국반(國班)을 자처하는 토호들 세도로 계속 파직을 당했기 때문에 현감이 되는 것을 꺼렸다. 1782년 김서구(金敍九)란 사람이 이곳 현감발령을 받았다.
그는 이 곳에 도임하자 곧 고을 뒷산인 금강산에 올라 읍지형을 살펴보았다.
금강산을 주작(朱雀)으로 보고 사방을 살피니 우슬치가 청용이고 조형이 백호요 금산과 읍 사이에 산이 하나 있는데(이 산이 호천리에 있는 葫山이다) 이는 분명 현무(玄武)라 명기(明基)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해남사람들이 거센것은 이 지형때문이라 판단하고 동헌에 돌아온 뒤 밤이면 관속들을 거느리고 매운 마늘같이 생긴 호산의 상봉을 삼척(尺) 삼촌(寸)씩 깎아내렸다.
코가 샌 소의 기를 죽이기 위해 소의 정갱이인 우슬재도 깎아내렸다.
그러나 그도 1년4개월만인 1783년 6월에 쫓겨나고 그 후임 김처승도 1년6개월만에 쫓겨났다.
읍터가 이처럼 좋다고는 하지만 서남쪽이 허해 서북풍이 세차게 읍을 때렸기 때문에 학동과 남외리에 방풍림을 조성, 오늘날도 노거수들이 숲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해방뒤 이곳 해남에는 외지에서 들어와 살면 텃세를 받지않고 상권(商權)을 쥐고 관리들도 모함을 받은 일이 적어져 사람들은 김서구 현감이 지기를 빼고 지형을 바꿨기 때문이란 여론이 일어 10여년전 노인당이 중심이 되어 호산 산봉우리를 높이는 공사를 했으나 우슬치는 도로확장사업으로 더 깎여 복구하지 못하고 있다.
서북풍을 막기위해 조성한 성내(城內)와 남외리 경계의 노거수가 있는 곳을 서림(瑞林)공원이라 한다. 이곳에 단군전(檀君殿)이 있다.
이 사우는 1958년에 지은 것으로 그전에는 화산면 금풍리에 있었다.
황해도 구월산은 93년간 이나라를 다스리던 단군왕검이 3월15일 이 산에서 죽어 승천한 곳이라해서 고려때 삼성사를 짓고 환인천제와 환웅천왕을 제사지내온 곳이다.
뿐만 아니라 이 산은 조선 말 나주출신으로, 부정자(副正字) 벼슬을 지내다가 을사보호조약을 보고 통분, 매국 5적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해 지도로 유배됐고 풀려나오자 한.일합방직전 해인 1909년 대종교를 포교하기 시작했던 나철(羅喆 1864-1916년)이 삼성사 앞에서 자결한 민족혼이 깃든 곳이다.
해남군 화산면 금풍리 출신으로 휘문의숙을 다니면 李鍾轍씨가 九月山수학여행을 갔을때 이씨는 이곳에서 한일합방후 돌보는이 없이 퇴락해가고 있는 삼성사(三聖祠)를 발견, 이 사우에 있던 단군왕검의 영정을 품에 안고 고향에 돌아와 사우를 짓고 제(祭)를 지낸 것이 시초가 된 것이다.
우슬재와 아침재는 石川 林檍과 관련 있다는 주장도 있다.
석천은 해남에서 낳아 자랐는데 한때 마산면 화내리 장천(長川=石川)에 은거해 있어서 해남현감들이 매일 아침문안 다녔다는 것이다. 우슬재는 역시 林씨 묘가 있었는데 김서구 군수가 파묘한 명당이었다는 것으로 파묘때 안개가 무릎꿇은 소형태를 했다고 한다. 조선 선조때 해남군(海南郡) 마산면(馬山面) 맹진(孟津)마을에 학식을 갖춘 이의신(李懿信)이라는 지리학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서손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 문중에서 항상 학대를 받아 오던 중 생모가 돌아가셨다.
평소에 자기가 보아두었던 명당 군왕지지(君王之地)에 모시고자 시신을 바다 건너 가지마을까지 모셔다가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묘자리를 파고 있었다.
그 때 웬 병사 한 명이 나타나 우수영 우수사께서 '움먹이'(가지마을 선착장 해안지명)까지 상주더러 오란다고 했다. 이의신이 일꾼들에게 말하기를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일을 중단하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병사를 따라 움먹이 잔등을 올라가는 순간 앞서가는 병사는 갑자기 구름처럼 사라지고 바다에는 한 척의 배도 안 보였다. 이의신이 놀라는 순간 생모시신을 모신 군왕지지에서 큰 폭음과 함께 두마리의 학이 공중 높이 솟아올랐다. 그중 한마리는 바다 북쪽으로 한마리는 남쪽으로 날아갔다.
이를 본 이의신이 탄식하며[허사로다]하고 학이 날아간 곳을 바라보니 두 마리의 학이 떨어져 섬을 이뤘다.
가지 북쪽 섬을 허사도(許沙島)라 하고, 남쪽으로 누런 학이 바다에 떨어지니 이를 황도(黃島)라 불렀단다. 이의신은 묘자리로 잡은 땅이 당시의 국법으로 백성들이 묘를 쓸 수 없는 땅이라 역모죄로 몰릴까 두려워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 군왕지를 파혈을 안 했던들 명당의 덕으로 틀림없이 임금이 나왔을 것인데 파혈을 하였기에 진짜 임금이 아닌 가짜 임금이 났다고 해서 '가제(假帝)'라 불러왔다.
그 뒤 한일합방 뒤에 '가지'로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의신에 대한 다른 전설도 있다.
인조시대(仁祖時代)사람 이의신(李懿信=일명 義信)은 명(明)나라에서 주부(主簿) 벼슬을 했다.
그의 세보엔 짧게 <공은 지리에 정통하여 명의 주부가 되었으며 지리로서 후세의 사범이 됐다>하였다.
소년시절, 의신이 다니는 서당은 오호만을 굽어보는 만대산 불록 골짜기의 높은 자리에 있었다.
맹진리가 집인 소년은 옆에 열길 벼랑을 낀 '둠벙샘거리'를 지나서 서당엘 오고 있었다.
이목이 수려하고 머리가 좋아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할 정도여서 인근에 그 이름이 있었다.
한가지 주위사람이 안타까워 하는 일은 소년의 처지가 정실 소생이 아닌 점이었다.
나라의 큰 재목이 될 수 있었지만 이때의 제도가 서얼을 쓰지 않는 만큼 모두 가슴 아파하는 것이었다.
어느날 이 소년이 저녁을 먹고 밤공부를 가는데 '둠벙샘거리'를 지나다가 한 소녀를 만났다.
어스름 달빛에 비치는 소녀의 모습은 어린 의신 소년의 눈에도 그지 없이 아름다워 가슴이 두근거릴만큼 요염했다. 마을에서 전엔 못 보던 얼굴이다.
의신 소년이 벼랑길에 거의 나아갔으나 소녀는 꼼짝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길은 좁고 바로 벼랑에 닿아 있어서 소녀를 거기 두고는 비껴갈 수가 없는 터였다. 안 되겠다고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방울을 굴리듯 맑고 고운 음성이 소년을 붙들었다.
"도련님 서당은 이쪽이에요!"
막상집에 돌아간다 해도 어머님의 걱정이 딱하고 이유를 말하자니 쑥스러운 참이다.
"낭자가 길을 막고 서서 서당을 가리는데 내가 어떻게 갈꼬!"
소년이 혼자말 하듯 하자 소녀가 까르르 웃었다.
가을 벌레가 조용히 우는 밤, 소녀의 웃음은 하늘의 음악같이 청아하고 애절한 기운이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소년에게는 남모르는 비밀이 생겼다.
저녁마다 같은 자리에서 소녀를 만났고, 그러면 으례 소녀는 소년의 입에 자기의 입을 대고 이 입술에서 저 입술로, 저 입술에서 이 입술로, 매끄럽고 향기로운 구슬을 희롱했다.
꿈결 같은 일이 계속 됐다.
자신은 모르는 일인데 남의 눈에 비치는 소년은 파리하게 야위어 갔다. 부모님은 물론 모든 사람이 그의 일을 걱정했다. 의원은 소년의 체온이 식어가고 있으나 따로 이유가 없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본인은 더욱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나를 들으면 백을 아는총명을 더해 갔다. 그런 어느날 서당 훈장이 소년에게 말했다.
"네가 미구에 죽을 것임을 아느냐?"
"죽기는 왜요? 전 아무렇지 않은데요. 왜들 법석인지 알 수 없어요"
도리어 의아해 하는 소년을 보며 훈장은
"의신아! 내 말을 믿거라. 너의 거동을 살폈더니, 저녁이면 너를 희롱하는 소녀가 여의주를 머금은 백년 여우가 분명했다. 천지의 이치를 우리 인간이 어찌 다 아랴마는 네 정기를 모두 넘겨가는 날이면 여우는 사람이 되고 네가 죽는 날이 될 것이다. 내일 다시 만나면 네 입안에 구슬이 왔을때 꽉 물고 달려서 내게 오너라.
그러면 내가 너를 살릴 것이다.
지금 네가 사는 길은 이 은 뿐이다."
소년이 다시 만난 소년는 왠지 초조해 하면서도 더욱 다정다감했다.
"이제 하루만 더 기다리셔요. 도련님은 곧 이 세상의 고뇌를 잊고 편안해 진답니다. 선생의 말을 믿으면 슬픈 일이 생긴답니다."
그 낭자는 은근하게 말하기까지 했다. 이 말에 소년은 정신이 들었다. 구슬이 아직도 자기 입안에 있는 것을 깨달았다.
'선생님의 말을 믿지 말라고!'
싸늘한 바람이 소년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소녀를 떠밀어버리자 구슬을 문 소년은 죽을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안 된다고 슬프게 소리치는 소녀의 음성이 소년의 모진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없이 서당 마당에 들어섰을 때 후다닥 문을 차고 나오면서, 훈장이 "의신아 여기다"하고 소리쳤다. 그 서슬에 힘이 풀린 소년은 디딤돌에 걸려 앞으로 넘어졌다.
꿀꺽하고 구슬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소년은 마당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정신을 잃었다.
늙은 여우의 슬피우는 소리가 밤하늘에 아득히 길게 메아리쳤다.
다음날 사당의 훈장은 의기소침한 몰골로 마을을 떠나면서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아! 아깝다. 하늘을 보지 땅은 왜 봐. 여의주가 지관 하나를 만들고 말다니, 슬픈 일이다. 그러나 세상은 명지관을 얻었다 기뻐할 것이다" 의신이 장성하자 학문과 문장이 높아 인물이 많다는 마포땅에서 그와 나란히 설 사람이 없다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아우가 선조(宣祖)때 등과해 관료에 나아가는 영광이 집안에 있었으나, 서일 출신인 의신은 갈데 없는 지관이 되어 팔 도를 주유하는 우울한 신세가 됐다.
그런 가운데 별당의 모친이 장성한 아들의 우울한 나날에 가슴을 찍다가 병을 얻자, 이내 세상을 떠났다.
그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은 '내 죄가 하늘에 닿았다.'했으니 그것은 하늘이 내린 큰 자식을 자기의 신분으로 얽매이게된 모정의 깊은 한을 함축한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어머니의 장지를 잡음에 있어 그 무렵 벌써 명지관의 이름이 놓았던 의신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오호 건너 영암땅에 어머니의 장지를 잡았는데 더러운 물이 찔금거리는 천하의 몹쓸 땅이었다.
사람들이 어찌된 일이냐고 묻자, 의신은 대답하기를 어머니로써 자식에 대한 도리를 못했으니, 이만하면 걸맞다 했다. 사람들은 그러한 의신을 가리켜 그 학문이 아까운 천하의 불효자라 했다.
그 후 삼년이 지나자 난데없이 나타난 의신은 그 모친의 이장을 서둘렀다.
이번에는 그 자리가 딱딱하여 누워있기에 고생스러운 자리를 잡아 어머니를 이장 할 것인데 그러므로써 어머니에 대한 자기의 원한을 한겹 더 풀 것이라고 했다.
이장터는 지금 목파의 입구인 허사도 앞의 돌산 '가재터'였다.
막상 이장하는 날이 되자 의신의 태도는 그의 말과는 달라서 사뭇 진지했다. 삽질 한번 곡괭이질 한번에도 조심을 보였다. 이제 곧 천관을 하여야 할 차례였다.
그때 한 초립등이 나타나 의신의 앞에 정중히 인사하고 말하기를 "지금 사또께서 여기를 지나시다가 높으신 선생님이 그 모친의 장지를 닦고 과시는데 한번 뵙고 가르침을 받았으면 한다고 정중히 여쭙고 오라 합니다."하는 것이었다.
의신은 이장꾼들에게 "이제 곧 암반이 나올 것인 즉 연장을 조심하여 쓰고 암반이 보이면 나를 기다려 천관하도록 하여라"하고 초립동을 따라 한 두발을 떼어 놓았을 때였다.
분명히 앞에서 걸어가던 초립동이 보이지 않았다. 삽시에 질린 얼굴이 된 의신이 모두 발로 뛰어 장지에 돌아오는 참이었다.
한 인부의 곡괭이가 땅에 닿는가 하는 순간 펑하며 그 자리에서 안개가 피어올랐다.
안개 속에선 한마리의 새가 날개를 치며 날아가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의 숲속으로 숨었다.
'허사로다. 하늘이 내 일을 막으니 사람의 지혜로 어찌 하늘의 이치를 당한다 할 것인가'
돌아와 묘혈을 보니 바닥의 암반이 둘로 갈라져 깊은 구멍이 나 있었다.
곡괭이질을 함부로 했던 인부가 그 일을 사죄하나 의신은 쓰게 웃을 뿐 서둘러 이장을 마치라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 후에 의신이 명나라에서 주부 벼슬에 올랐다는 소식이 이 땅에 전해지고 동시에 의신이 그 모친을 이장한 자리가 왕터였으나, 하늘이 말려 그와 같은 변괴가 있었다 하는 말이 떠돌았다.
사람들은 의신이 자기의 힘으로 이땅의 그릇된 신분제도를 고쳐볼 수 없음을 한탄해 그 후예로써 왕을 얻어 한을 풀려 했던 것인데 그 일이 허사로 돌아감으로해서 이 땅을 버리고 중원에 나아갔던 것이며, 그 일을 가슴 아프게 여긴 사람들이 의신을 기려 새가 날아가 앉았던 섬을 "허사도"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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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왕비


 왕비  본관성씨 부  자손  춘추
 
태조 신의왕후 신덕왕후  안변 한씨  곡산 강씨 한경 강윤성  6남 2녀 2남 1녀  55 41
정종 정안왕후 경주 김씨  김천서 0 58
테종  원경왕후 여흥민씨  민제 4남 4녀  56
세종 소헌왕후  청송 심씨 심온 8남 2녀 52
문종  현덕왕후  안동 권씨  권부 1남 1녀  24
 단종  정순왕후  여산 송씨 송현수  0 82
 세조 정희왕후 파평 윤씨 윤번 2남 1녀 66
 덕종  소혜왕후 청주 한씨  한확 2남 1녀 68
 예종  장순왕후 안순왕후  청주 한씨 청주 한씨 한명회 한백륜  1남 1남 1녀 17  ?
 성종  공혜왕후 정현왕후  청주 한씨 파평 윤씨 한명회 윤호  0 1남 1녀  19 69
 연산군  거창 신씨 신승선  2남 33(?)
 중종 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거창 신씨 파평 윤씨 파평 윤씨
신수근 윤여필 윤지임  0 1남 1녀 1남 4녀 71 25 65
 인종 인성왕후 나주 박씨 박용 0 64
 명종 인순왕후  청송 심씨 심강 1남  44
 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  나주 박씨 연안 김씨 박응순 김제남  0 1남 1녀 46 49
 광해군 문화 유씨 유자신 3남  51
 원종  인헌왕후  능성 구씨 구사맹 3남 49
 인조 인열왕후 장열왕후 청주 한씨 양주 조씨 한준겸 조창원  4남 0  42 65
 효종  인선왕후 덕수 장씨 장유  1남 6녀 57
 현종  명성왕후 청풍 김씨 김우명  1남 3녀 42
 숙종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광주 김씨 여흥 민씨 경주 김씨  김만기  민유중  김주신  2녀 0 0  20 35 71
 경종  단의왕후 선의왕후 청송 심씨 참종 어씨 심호 어유구  0 0  33 26
 영조  정성왕후 정순왕후 달성 서씨 경주 김씨 서종제 김한구  0 0  66 61
 진종  효순왕후 풍양 조씨 조문명  0 37
 장조  경의왕후  풍산 홍씨 홍봉한 2남 2녀 81
 정조  효의왕후  청풍 김씨  김시묵 0 69
 순조  순원왕후 안동 김씨 김조순  2남 3녀 68
 문조  신정왕후  풍양 조씨  조만영 1남 83
 헌종  효현왕후 효정왕후 안동 김씨 남양 홍씨 김조근  홍재룡  0 1녀  16 73
 철종  철인왕후  안동 김씨 김문근  1남  42
 고종  명성 황후  여흥 민씨  민치록  4남 1녀  45
순종 순명왕후  여흥 민씨  민태호  0 33
 □ 인물
△ 민영환(閔泳煥)
[ 1861~1905 (철종 12~고종 42) ]
조선 말기의 문신․순국지사.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본관은 여흥(驪興). 시호는 충정(忠正). 서울 출생. 호조판서 겸호(謙鎬)의 아들이다.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에 임명되고, 이듬해 정시문과 병과로 급제, 정자, 수찬, 사인 등의 청환직을 거쳐 1882년 대사성이 되었다.
그 후 도승지,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판, 해방총관 등 여러직을 역임하고예조판서에 올랐다.
1888년과 1890년 두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 1893년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1894년 독판내무부사, 형조판서들의 요직을 거쳤다.
1895년 주미 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살해되어 부임되지 못했다.
다음해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귀국하여 의정부 찬정, 군부대신을 지낸후, 1897년(광무 1)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 전권대사가 되어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축하식에 참석했다.
잦은 해외 여행으로 일찍 새문물에 눈을 떠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건의, 정치에 반영시켰다.
1896년(건양 1)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 민씨 일파의 미움을 사 파직되기도 했다.
후에 다시 기용되어 참정대신, 탁지부 대신, 장례원경, 표훈원 총재, 헌병사령관을 역임했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시종무관장으로 있다가 비분을 못 이겨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그가 자결시에 혈의를 장치하여 두었던 침방 뒤 골방 마루 밑에서 푸른 대나무가 났다 한다.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에 추증, 고종의 묘정에 배향,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유고에는 《해천추범(海天秋帆)》 《사구속초(使歐續草)》 등이 있다.
□ 세력
경주 대전 여주 여흥 영운 영원 영인 정선 창원 청주 해남
총 11개의 본관과 141,328명이 있다.(1985년)

 

011012 성씨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15  `충주 지씨

충주지씨(忠州池氏)
□ 유래
시조 지경(池鏡, 903~1003, 시호는 선의, 자는 자운, 호는 암곡)은 중국 송나라 중원 홍농 사람으로 960년(고려 광종 11년)에 귀화했다. 당시 태학사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여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태보, 평장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경의 6세손인 지종해(池宗海)가 충주에 살았으며 고려 때 문하시랑평장사로 충주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충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또 본래는 충주 지씨였다가 고려 태조에게 충주 어씨로 성을 하사받은 어중익(魚重翼)도 충주 지씨 6세이다. <충주지씨 대동보>는 시조 지경의 아들에 지해관(海貫, 찬성사), 지도관(道貫, 평장사) 형제가 있고, 지해관의 아들에 지윤(胤, 안렴사), 지영(瀛, 부원수) 형제가 있으며, 지영의 아들에 지득상(得尙, 평장사), 지응상(應尙, 찬성사)이 있어 지득상의 손자가 지종해(평장사)이고 지응상의 손자가 지중익, 즉 어중익(평장사)으로 기록되어 있다.
- 시조 지경의 묘는 평안도 중화 당악산 화산정에 있다.
□ 대표적 인물
- 지용수(龍壽) : 고려 공민왕 때 서북면지병마사로 홍건적을 물리쳐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 지윤(奫) : 우왕 때 서북면도원수가 되고 다시 문하찬성사에 올랐다.
- 지용기(湧奇) : 고려 우왕 때 이성계 휘하에서 위화도 회군에 참가하여 충원부원군에 봉해졌다.
- 지여해(汝海) : 조선시대에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지계최 : 도원수 장만(張晩)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 지덕해(德海) : 병자호란 때 활약하였다.
- 지석영(錫永) : 우두법을 처음으로 보급한 의학자이다.
- 지운영(運英) : 지석영의 형. 서화가(書畵家)로 유명하다.
그밖에 독립운동가로 지청천(靑天:일명 李靑天), 지하영(霞榮) 및 의병장 지홍문(弘文)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문과급제자 10명을 배출했다.

[인구] 118,410명이 있다.(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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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어씨(忠州魚氏)
■시조 : 어중익(魚重翼)
시조 어중익(魚重翼)의 본래는 충주지씨 6세손으로 지중익(池重翼)이었는데 그의 겨드랑이에 비늘이 세개가 있다고 해서 고려 태조가 이것을 보고 '인갑이 있으니 이는 물고기다.'하며 어씨 성을 하사 했다고 한다.
벼슬은 평장사를 지냈다. 그후의 후대는 알 수 없다가 성균관 진사를 지낸 어승진의 증손자 어유소(魚有沼)가 조선 세종~성종대에 걸쳐 무장으로서 북변의 야인을 정벌하고 병조판서와 우찬성을 거쳐 중추부판사 겸 도총관을 역임하고 좌대장으로 조선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예성(충주)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어승진을 1세 조상으로 하고 본관을 충주로 하였다.
[참고] 고려 태조때 성을 하사 받았다고 하나 충주 지씨의 시조가 우리나라에 온것은 고려 4대 광종 11년(960년)이라고 함으로 시기가 맞지 않는다.
■어유소(魚有沼)
1451년 내금위에 보직되고 1456년(세조 2) 무과에 장원 급제, 사복시 직장.
감찰을 역임하고, 1460년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워 회령부사가 되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좌대장으로 이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 1등으로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지고 공조판서에 특진되었다.
이 해 겨울 명나라가 건주위를 칠 때 조선에 청병하자 좌대장으로 출전, 큰 공을 세워 명나라 황제로부터 상을 받았다.
1469년(예종 1) 함경북도 절도사가 되고 1471년(성종 2) 좌리공신 4등으로 두 차례나 영안북도 절도사를 지냈다.
이듬해 병조판서를 거쳐 147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다시 건주위 정벌을 하게 되자 서정대장이 되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만포진에 이르렀으나 압록강의 해빙으로 도하작전(渡河作戰)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회군하자 명나라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대신들의 주장으로 양근에 유배당했다.
이듬해에 풀려나와 이조판서, 동지중추부사, 영안도 순찰사를 역임하고 1488년 판중추부사 겸 도총관에 이르렀다.
3,503명. (1985년)
■충주를 본으로 하는 다른 성씨들
강(强), 김(金), 동(董), 동(童), 노(盧), 노(路), 매(梅), 박(朴), 석(石), 승(承), 안(安), 어(魚), 용(龍), 유(劉), 이(李), 이(李), 지(池), 최(崔), 평(平)
□ 지씨의 본관
경주, 광주, 단양, 전주, 진주, 청송, 청주, 충주, 평산, 평창, 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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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주지씨(鳳州智氏)=봉산지씨(鳳山智氏)
■시조 : 지채문(智蔡文)
시조 지채문(智蔡文:호 松谷, 시호 貞憲)은 봉주 사람으로 16세에 문과에 급제, 벼슬이 대제학 지제고에 이르렀다.
1010년(현종 1) 중랑장으로 있을 때 거란병의 침입을 화주(지금의 함흥)에서 격퇴, 강조가 패사한 후에 서경(평양)을 고수하여 공을 세웠다.
이듬해 개경이 함락되고 왕이 나주로 피난할 때 그가 호종한 공으로 밭 30결을 하사받았다.
그 후 우상시가 되어 무관직을 겸하게 되었고, 1026년 우복야에 올랐다.
덕종 때 상장군 좌복야에 추증되고 1등공신에 추록되었다.
그는 고려 초기의 명장으로 《명장록(名將錄)》<고려편>에 그 이름이 보이고 조선조의 명신 홍언필(洪彦弼)이 김유신(金庾信), 을지문덕(乙支文德), 강감찬(姜邯贊)에 비길 만한 명장이라고 극찬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봉주로 하였는데 봉주가 봉산으로 개칭됨에 따라 봉산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모두 같은 뿌리이다.
시조의 묘소는 황해도 봉산군 와현 거지동에 있었는데 분단으로 인해 근황을 알 수 없다.
시조의 후광을 받은 봉주지씨(鳳州智氏)는 고려조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의 손자 지맹(智猛)이 문종조에 사공이 되고 상서좌복야에 이르러 퇴관할 때 궤장을 하사받았다.
그의 아들 지녹연(智祿延)은 숙종 때 동북면 병마판관으로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전중시어사가 되었다.
예종이 즉위한 후 내사지후가 되고 이어 동지추밀원사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자겸(李資謙) 척준경(拓俊京) 등을 제거하려다 실패, 유배되어 가던 중 충주에서 죽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북방 차별의 영향을 받았는지 문과 급제자나 특수한 인물을 내지 못하고 겨우 인조조에 첨절제사를 지낸 지득남(智得男)이 조상의 무용을 이어 받았을 뿐이다.
그는 인조조 정묘호란 때 선천부사 기협(奇協)의 별장으로 선천 월봉에서 의병을 모아 적을 격퇴했다. 명나라 제독 모문룡의 추천으로 첨절제사가 되었다.
■대표적 인물
   지녹연, 지득남
■집성촌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천동리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응암리
 
1985년도 조사에 5,028명이었다.(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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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본관은 봉주(鳳州:鳳山) 단본이다.
봉주지씨의 시조는 고려시대의 명장인 지채문(智蔡文)이다. 그는 1010년(현종 1) 거란군(契丹軍)의 침입을 맞아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또 왕을 호종하여 신변의 위기를 여러 번 막았다. 후에 우복야에 올랐고, 1등공신에 추록되었다.
그 외 인물로는 문종 때의 명신으로 좌복야, 수사공(守司空) 등을 역임한 맹(猛)과 시조 채문의 증손으로 인종 때 추밀원동지사 등을 역임한 녹연(祿延)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의 인물로는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의 의병장인 득남(得男)이 유명한데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지씨는 현재 강원도 평창, 영월 등지와 충북 제천, 충주 지방에 많이 살고 있다.
1975년도 국세조사에는 가구수 631 가구로 249성 중 제122위였고, 85년도 국세조사에서는 1,179가구에 인구 5,028명으로 274성 중 제120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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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14 성씨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13  `가씨, 궉씨(희귀성씨)
소주가씨(蘇州賈氏)
□ 뿌리와 시조
본관지는 중국 소주(蘇州)이다.
가씨는 본래 중국의 성으로 요제(堯帝)가 그의 둘째 아들 공명(公明)을 가후에 봉했으므로 나라이름을 따라 성을 가씨로 하였다.
우리나라 가씨는 소주가씨 단본으로 시조 가유약의 호는 지백당으로 명나라 신종 때 추밀원사, 병부상서, 태자소부를 지내고, 임진왜란이 난 이듬해인 1592년(선조 25년) 소원안찰사로 왕의 명을 받아 원병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
그는 안주에서 왜군과 싸워 공을 세우고 선조 29년까지 4년간 종군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듬해 정유재란이 나자 다시 파견되어 아들 가상(賈祥)과 손자 가침(賈琛) 까지 따라와 3대가 종군하게 됐다.
전쟁 중에 가유약이 아들을 구하려 나아가다 격전끝에 부자가 함께 전사하여 가침은 그들의 시신을 울산 서생진 도독동 양지바른곳에 묻고, 조선에 남아 조선인으로 귀화하여 울산에 터를 잡고 소주가씨의 뿌리를 내렸다.
조선 말 철종은 이들 3대의 충효를 기리는 사당과 정문을 서산에 세웠다.
-시조 가유약의 묘소는 경남 울산 서생진 도독동에 있다.
□ 가문의 번영
소주가씨의 귀화조인 가침은 네아들을 두었는데 그가 죽은뒤 충남 서산으로 터를 옮겨 정착했다.
철종 때 3대의 충효를 기리는 사당과 정문이 세워지기도 했는데 가씨들은 이후 서산일대를 중심으로 충효의 가통을 이어왔다.
가행건(賈行健)은 시조의 14세손으로 천성이 어질어 도덕군자의 칭송이 높았으며 헌종 때 수군병마첨절제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 가일영(賈日永)은 철종 때 울진현령에 올랐다.
충량과에 장원급제 하고 고종 때 가선대부를 역임한 가중영(賈中永)도 가행건의 아들로 소주가씨의 가문을 빛냈다.
이외에도 프랑스 함대의 강화도 점령 때 의병을 일으킨 가익건(賈翊健)과 구한말의 청백리 가정로(賈廷魯)도 알려진 인물들이다.
조선 헌종 때의 명신 가행건(賈行健). 그는 충청도 안흥양진의 수군병마첨절제사가 되었는데 안흥지방은 전복과 해삼이 지방 특산으로 궁중에 올리는 진상품이었다. 엄동설한에도 백성들은 차가운 바닷물에 드나들며 해삼, 전복을 따다 관가에 바쳐 서울로 올려야했다. 가행건은 이같은 민폐의 시정을 중앙에 강력히 건의해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이 이를 받아들여 진상공납을 폐지, 백성들의 고달픔을 덜게했다. 훗날 고을주민들은 돌과 구리로 각각 비석을 세워 그 공적을 새겼다고 한다. 그도 아버지만큼 선정을 펴 그가 울진을 떠날 때 군민들은 10여길이나 되는 암벽을 갈아 그의 공적을 새겼다.
□ 계파
권파 균파(菌派) 기한파 눌파(訥派) 만파(蔓派) 만석파(萬碩派) 문순파(文純派) 문익파(文翼派) 문진파(文晋派) 문헌파(文獻派) 문혁파(文赫派) 사성파(嗣聖派) 세원파(世元派) 세익파(世翼派) 세한파(世漢派) 세흥파(世興派) 수성파(守誠派) 순파(諄派) 안성파(安聖派) 연파 의민파(義敏派) 익한파(翊漢派) 전파(筌派) 창순파(昌順派) 창한파(昌漢派) 훤파(萱派) 훤한파(萱漢派) 희문파(希文派) 희성파(希聖派)
□ 집성촌과 세력
현재 충남 서산, 홍성, 당진, 예산 일대에 많이 거주한다.
그중에도 태안읍이 중심인데 전국 1천 8백 가구의 가씨 중 1천백여 가구가 서산군에, 6백여 가구가 태안읍에 산다.
입향조는 가침의 아들인 가성(賈晟)등 4형제. 그들은 가침이 세상을 뜬뒤 고국인 중국으로 돌아가고자 뱃길이 가까운 태안반도 안흥만에 도착했으나, 그때 중국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난세이므로 결국 귀환을 포기하였다.
1985년도 인구조사에서는 1,783가구에 7,888명으로 274성씨 중 111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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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14 성씨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13  `가씨, 궉씨(희귀성씨)
선산궉씨(先山鴌氏)

□ 본관과 세력
총 3개의 본관과 243명이 있다.(1985년)
조선시대의 학자 이수광의 저서 '지봉유설'에는 ꡒ순창에 궉씨가 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으며, 중국의 성이라고도 한다ꡓ고 기록되어 있다. 또 조선시대의 실학자 이덕무의 '앙엽기'에는 ꡒ선산에 궉씨촌이 있는데 선비가 많다ꡓ고 되어 있는것으로 봐서 오래된 성씨인듯 하다. 1930년 국세조사때 경기도 용인, 충남 보령, 청양, 예산, 천안 등지에 몇가구가 있었다.
선산 9명, 순창 94명, 청주 97명이 있다.(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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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기씨(幸州奇氏)
□ 시조
시조 기우성(奇友誠)은 기자의 49세손으로 백제 은조왕때 시중으로 입사했다 한다.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애왕(41대 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금마(현재의 익산)군에 마한을 세웠으며 마한 말기의 원왕에게 세형제가 있었는데 우평은 고구려에서 태원 선우씨, 우성은 백제에서 행주 기씨, 우경은 신라에서 청주 한씨가 되었으며 기우성의 후손들이 본관을 행주로 하였다고 한다.
[인구] 21,740명이 있다.(1985년)
또 다른 행주 기(箕)씨가 있는데 기(奇)씨와 동원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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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군씨(南原君氏)

성씨. 본관 및 연원은 알 수 없다. 1930년의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경남 김해군 진영읍 진영리에 군점득이라는 사람 1가구가 있었다. 85년의 조사에서는 49가구, 229명으로서 274성 중 제206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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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개씨(麗州介氏)
□ 유래
유래는 알 수 없으며, 1930년 국세조사때 처음 나타난 성씨로 1985년에 165명이 있었다.
[인구] 165명이 있다.(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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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면천곡씨(龍宮-沔川曲氏)
□ 유래와 세력
곡씨는 중국 당나라의 귀화인으로 전해지며, 인물로는 고려 태종때 곡근회가 평찰이라는 벼슬을 역임 한것으로 전한다.
[인구] 용궁 170명, 면천 18명이 있다.(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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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831 성씨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10  `풍양조씨
풍양조씨
□ 시조 : 조맹(趙孟)
시조 맹(孟)은 초명이 바위(巖)로서 신라 말에 풍양현의 천마산 아래 지맥인 독정산(獨井山)의 암굴(지금의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찾아가 장군을 삼았다. 당시 그는 70세였으나, 모습이 웅위하고 수염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만년에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통합삼한벽상 개국공신(統合三韓壁上 開國功臣)에 책록되고,상주국삼광 문하시중평장사(上柱國三匡 門下侍中平章事)에 봉해 졌으며 ‘맹(孟)’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풍양조씨의 시조가 되었다.
지금도 천마산 아래에 그가 태조 왕건을 처음 만났던 암굴이 남아 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에 있고 매년 10월 세째주 일요일(원래는 음력 9월 초정일)에 제사를 지낸다.
 □ 가문
조맹 시조 이후, 중간 6세가 실전되어 지린(之藺)을 1세조로 하는 전직공파(殿直公派)와 몇 세가 실전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혁(臣赫)을 1세조로 하는 평장공파(平章公派)로 대변된다. (양파는 서로 촌수를 가릴 수가 없어 족보도 따로따로 편찬하고 있다.) 이 2파는 뒤에 다시 분파되는데,  전직공파는 호군공파(護軍公派), 회양공파(淮陽公派), 금주공파(錦州公派)의 3파로 나뉘고, 평장공파는 남원공파(南原公派)를 이루어 현재의 풍양조씨는 이 4파 아래 총망라되어 있다.
이 가운데 회양공파가 조선시대에 벼슬을 도맡다시피 하였고 인구도 과반수를 차지한다.
□ 인물
회양공파는 나중에 한평군파(漢平君派:이른바 老論집)와 청교파(靑橋派:이른바 少論집)로 대별되는데, 회양공파에서는 상신 6명, 문형 3명을 비롯하여 판서급이 30여 명이나 배출되었다.
한편, 남원공파 역시 ꡐ소론집ꡑ으로 상신 1명, 문형 1명을 배출하였다.
주요인물을 보면, 숙종 때의 우의정 상우(相愚), 영조 때의 좌의정 문명(文命), 영조 때의 영의정 현명(顯命), 영조 때의 우의정 재호(載浩) 등이 회양공파이다.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이고 효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익(翼), 현종 때 대제학을 지낸 복양(復陽)은 남원공파이다.
또, 영조 때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오면서 고구마 종자를 들여온 엄(  )을 들 수 있는데, 그는 회양공파의분파인 한평군파이다.
이 한평군파는 조선 헌종 때 세도정치까지 폈던 집안으로 풍양조씨의 주축이 되는데, 조선 후기에는 안동김씨(安東金氏)와 쌍벽을 이루었다.
즉, 엄의 손자 만영(萬永)이 문조(익종)의 국구(國舅)가 되었는데, 문조의 아들(만영의 외손)인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1839년(헌종 5)에는 병현(秉鉉)이 형조판서가 되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대규모의 탄압을 하여 기해교난(己亥敎難)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대표적 인물
명문 풍양조씨를 세도가문으로 일으키는데 주춧돌이 된 인물들이 많다..
회양공파의 분파인 청교파에서 숙종 때의 우의정 상우(相愚), 영조 때의 좌의정 문명(文命), 영조 때의 영의정 현명(顯命), 영조 때의 우의정 재호(載浩) 등의 정승이 나왔고, 원명(遠命), 시준(時俊), 정진(鼎鎭), 홍진(弘鎭), 상진(尙鎭), 병필(秉弼), 병창(秉昌) 등의 판서급 인물들이 나왔다.
영조 때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오면서 고구마 종자를 들여와 퍼뜨린 사람으로 유명한 엄(嚴)은 회양공파의 분파인 한평군파이다. 상경(尙絅)의 세 아들 가운데 둘째이다.
엄의 손자 만영(萬永)이 문조(익종)의 국구(國舅)가 되었는데, 문조의 아들(만영의 외손)인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세도가문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누린다.
이 한평군파는 조선 헌종 때 세도정치까지 폈던 집안으로 풍양조씨의 주축이 되는데, 조선 후기에는 안동김씨(安東金氏)와 쌍벽을 이루었다.
한평군파는 도정(都正)을 지낸 도보(道輔)의 아들 상경(尙絅), 상강(尙綱), 상기(尙紀) 3형제와 8명의 손자가 모두 벼슬에 올라 영조와 정조조에 걸쳐 확고한 세도의 기반을 닦았다.
남원공파에서는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인 익(翼)이 효종 때 좌의정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복양(復陽)은 현종 때 이조판서를 거쳐 대제학에 이르렀다.
복양(復陽)의 아들 지겸(持謙)은 숙종때 부제학을 지냈고, 형조 판서 만원(萬元)과 함께 현종때 이조판서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조상우 (趙相愚) : 숙종 때 우의정을 지냄
조문명 (趙文命) : 조선 영조때 좌의정
조현명 (趙顯命) : 조선 영조때 영의정
조재호 (趙載浩) : 우의정
조익 (趙翼) : 성리학자
조복양(趙復陽) : 현종 때 대제학
조엄 : 영조 때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고구마 종자를 들여옴
조만영 (趙萬永)
조인영 (趙寅永)

109,433명. (1985년)
 □ 후손들
현대에 와서 풍양조씨 종손들은‘풍육회(豊育會)’를 설립하여 장학금을 지급하고, 화수회(花樹會)에서는 선조의 묘소 및 유적지 정화사업과 종보 빛 족보발간 등 다양한 사업목표를 설정하여 가문의 결속을 다지는 한편, 매년 여름 상주시 낙동면에 소재한 검간(黔澗)공 정(趙靖) 할아버지(호군공파,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약, 벼슬이 봉상시정(정3품)에 이르고,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됨)의 고택인 양진당에서 뿌리교육을 하고 있으며 종친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바라고 있다. ( 대종회 577-4281)
□ 본관지
경기도 양주(楊州)의 옛 지명으로, 원래 고구려(高句麗)의 골의노현(骨衣奴縣)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황양(荒壤)으로 고쳐 한양군(漢陽郡)의 영현이 되었다가 후에 풍양으로 고쳐 양주에 속하였다. 그 후 포주(抱州)에 이속되고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다시 양주(楊州)에 속하였다.
□ 유적지
견성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3번지 천마산에 있는 절이다.
고려 개국 공신인 풍양조씨 시조 시중 조맹이 은거양덕하던 곳이라 한다. 그 후손들이 이를 추모하기 위해 절을 짓고 견성암이라 하였으나 처음 창건한 연대는 정확히 알수 없고 대략 고려조 중엽으로 추정된다.
서기 1860년(조선 철종 11년)에 조시중의 후손이며 스님인 빈월혜초가 법전과 우화루를 중수하고, 1882년(고종 19년)에 봉성화상이 중수한 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엣기록으로는 견성암중수기, 견성암우화루기, 견성암 중수부정화신성기 등이 있고, 조시중이 수양할 때 마시던 우물이란 뜻으로 독정이 있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아 인근 부락에서 가물 때는 음료수를 길어가기도 하는데 당사를 [독정이 절]이라 하면 산하촌을 독정리라 부른다.
또한 조시중이 수양할 때 기거했다는 수양굴이 있고 지금도 조씨문중에서 이름 있는 사람이 죽으면 가지가 하나씩 말라 죽는다는 기념송(6.25때 포탄에 맞아 쓰러져 현재는 없음)이 있는데, 이는 조시중이 기념으로 직접 심은 것이라 한다.

풍양궁-터(豊壤宮-)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면 내각리
대궐터에 있는 풍양궁의 터. 조선 제2대 정종 2년(1400) 11월에 왕이 왕위를 그 아우 태종에게 물려 주고, 이 곳에 와 있었다. 태종 2년(1402)에 태조가 사랑하는 세자 방석, 방번의 참변을 당하고 태종을 미워하여 함흥에 가 있다가 4년 만에 박순의 충언에 감동되어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이 곳에 머무르고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내각들이 와서 모시고 서울로 올라 왔으므로 더욱 유명하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양조씨(豊壤趙氏)는 남한에 총 25,894가구, 109,43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집성촌
경기도 김포군 월관면 서암리
충남 논산군 성동면 개척리
충남 부여군 세도면 동사리
전북 남원군 덕과면 신양리
충북 옥천군 미면 신광리
전남 강진군 성전면 송월리
경북 상주시 낙동면 일원(상주시 남장동에 풍양조씨 대종보를 모신 보각이 있으며, 대종손이 살고 있다)
평남 용강군 양곡면 초유리
황해도 안악군 안곡면 장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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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는 조맹이 안 나와
<풍양조씨 종친회>와 KBS 드라마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는 ‘조맹’은 나오지 않는다. 이를 두고, 작가의 오류이냐, KBS측의 고증작업 미비이냐 혹은 시조 조맹의 직위가 과장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는 사람이 많다.
고려 태조 왕건은 918년 고려개국 4공신이라 일컬어지는 신숭겸,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폐하고 고려를 창업하였다.
이후 후백제와 신라를 통합하여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많은 호족과 장수, 문인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도움을 준 이들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각자 등급을 나누어 개국공신으로 책록하고 그때까지 성(姓)이 없던 이들에게 성을 사사하였다.(당시에는 김,박,석,최 등 몇몇 성씨를 빼고는 성을 가진 이가 드물었다 한다)
이 때 바위(巖)란 이름의 장군도 왕건을 도왔는데, 조(趙)씨 성과 맹(孟)자 이름을 사사받았다. 삼웅산, 홍술, 백옥, 복사귀라는 이름을 쓰고 있던 신숭겸, 배현경, 홍유, 복지겸도 개국공신 책록과 함께 성과 이름을 사사받아 각각 부림홍씨(缶林洪氏), 경주배씨(慶州裵氏), 평산신씨(平山申氏), 면천복씨(沔川卜氏)의 시조가 되었다.
이 외에도 고려건국에 공을 세운 많은 사람들이 공신에 책록되고 성을 사사받아 각 성씨의 시조가 된 경우가 상당히 많아 그 정확한 수효는 알 수 없다.
(어느 종친)
“시조 할아버지와 관련된 내용이 TV 드라마의 한 장면을 장식하게 되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지만, 드라마를 통해 역사적 史實을 빠짐없이 조명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작가의 입장에서 볼 때 극의 긴장미를 유지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건들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기 때문에 설령 시조 할아버지와 관련된 내용이 소홀하게 취급되어 방송되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해 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에 다루어지지 않는다 해서 시조 할아버지의 존명(尊名)과 역사적 존재가 부정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오늘을 사는 우리가 우리 문중에 대해 얼마나 자긍심을 가지고 훌륭한 삶을 꾸려나가는가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쪼록 드라마에 시조 할아버지께서 나오지 않는다 하여 한편으로 서운하시더라도 널리 이해하시고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함으로써 할아버지의 존명에 누가 되지 않는 후손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참고로 문하시중 평장사라 함은 문하시중(현재의 국무총리격) 밑의 정이품 벼슬이었다 하고, 시중공 묘소에 '고려조 1대 시중'이라고 적혀 있다는 의견이 있으나 그곳을 방문해 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확인할 수 없어 아쉽다. 기회가 닿으면 확인하여 글을 올리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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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조씨 (咸安趙氏)
□ 시조 조정(趙鼎)
고려 초에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정(鼎)은 당(唐)나라 출신으로 신라말(新羅末)에 두 동생 부(釜)와 당(當)을 데리고 절강(浙江) 사람인 장길(張吉)과 함께 고려에 귀화하여, 왕건(王建)을 도와 고창성(古昌城)에서 견훤(甄萱)을 대파(大破)하고, 고려 통일에 공(功)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으로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후손들은 함안(咸安)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며 본관(本貫)을 함안(咸安)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 인물
조선시대에 유명한 인물로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며 시조의 10대손인 여(旅)이다.
여의 후손은 모두 현달하였다. 그의 손자인 조연(趙淵)은 당대의 명필로서 명종 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조여의 현손 종도(宗道)와 임도(任道)도 유명하다. 종도는 조선 선조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아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임도는 전원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인조반정 후에 공조좌랑을 지냈다.
영조 때에는 시․서․화 삼절(三絶)로 이름난 영우(榮祐)가 있고, 조선 후기에는 화가로 산수․인물에 뛰어난 정규(廷奎)와 희룡(熙龍)이 있다.
■조영우(趙榮祐) [1686~1761](일명 營석?)
조선 후기의 화가. 자 종보(宗甫). 호 관아재(觀我齋), 석계산인(石溪山人).
1713년(숙종39)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천거로 등용되어 첨지충추부사(中樞府僉知事)․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다. 특히 산수화와 인물화에 뛰어난 화가로서 당대의 정선(鄭敾), 심사정(沈師正)과 함께 삼재(三齋)로 일컬어진다. 또한 시(詩)와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그림과 함께 삼절(三絶)로 불리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조종도 趙宗道 [1537~1597] 
자 백유(伯由). 호 대소헌(大笑軒). 자 백유(伯由), 시호 충의(忠毅). 조식(曺植)의 문하생.
1558년(명종 13)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천거로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이 되고, 1585년(선조 18) 양지현감(陽智縣監) 때 선정하여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뒤 풀려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안음현감(安陰縣監)이 되고 함양군수를 지내다가 병으로 물러났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의병을 모아 안음현감 곽준(郭剖)과 안의(安義)의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왜장 가토기요마사[加珙淸正]가 인솔한 적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경사(經史)에 밝고 해학(諧謔)을 즐겼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함안(咸安)의 덕암서원(德巖書院), 안의의 황암사(黃巖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대소헌집(大笑軒集)》이 있다.
 □ 본관지 함안
경상남도 함안군으로 삼한시대의 한(弁韓) 땅이었고, 가락국(駕洛國)의 6가야 중 아나가야(阿那伽倻)의 영역이었다. 신라 경덕왕 때 함안군(咸安郡)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고려 때의 995년(성종 14)에 함주(咸州), 1018년(현종 9)에 함안군(郡), 1172년(명종 2)에 함안현(縣), 1374년(공민왕 22)에 함안군, 조선 때의 1505년(연산군 10)에 함안도호부(都護府), 1506년(중종 1)에 함안군이 되었다.


□ 조씨(趙氏)의 본관들
강서 강진 경주 광주 김제 김해 나주 남양 남원 남해 단양 대천 동래 문화 밀양 배천 분양 상주 순창 순천 양주 양평 연백 연일 영산 영춘 옥천 이천 임천 주암 주천 직산 진보 진주 창원 청주 충주 태원 파능 파평 평산 평양 풍년 풍산 풍양 하동 한산 한양 함안 함양 함평 해주 횡성 흥양
□ 호
호(號)는 우리 나라나 중국에서 본이름이나 자(字) 외에 허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을 말한다.  2종 이상의 이름을 갖는 복명속(復名俗) 또는 본이름 부르는 것을 피하는 실명경피속(實名敬避俗)에 근원을 두고 나오게 된 이 호는 중국에선 당나라 때부터 시작하여 송나라 때에 보편화되었다.
 원효의 호가 소성거사(小性居士), 낭산(狼山) 아래 살았다던 한 음악가의 호가 백결선생(百結先生)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면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삼국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호는 자기가 짓기도 하고 남이 지어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호는 아호(雅號)와 당호(堂號)로 나누기도 하는데, 이 외에 또 별호(別號)와 시호(諡號) 등도 있다. 그리고, 글 쓰는 이가 자신의 본이름을 감추고 내세워 쓰는 필명(筆名)도 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호는 대개 땅이름이나 고사 등 그 사람의 성격이나 특징 등에 의하여 지어진다.
 아호는 본래 시문(詩文) 또는 서화(書畵)의 작가들이 사용하는 '우아한 호'라는 뜻으로 일컬은 것이고, 당호는 본래 집의 이름을 뜻하나, 그 집의 주인을 일컫게도 되어 아호와 같이 쓰이기도 한다.
 조선시대까지는 호를 대개 한자로 지었으나, 한말 이후부터는 우리말(한글)로 호를 지은 사람도 많이 나왔다.
 유명한 국어학자 주시경의 호는 '한힌샘'이고, 시조 작가 이병기의 호는 '가람'이다. 최현배의 '외솔'이나 전영택의 '늘봄' 같은 호도 우리 귀에 설지 않은 한글 호이다.
 3. 휘와 시
 휘는 남을 존중해 부르는 이름이고, 시는 죽은 다음에 부르는 이름이다. 아명이나 관명은 생전에 부르는 이름이다.
 따라서, 시는 생전의 성격과 공과(功過)를 생각하여 짓게 된다.
 묘호(廟號)와 휘호(徽號)가 있는데, 이들은 원칙적으로 왕실에 국한되고 있는 것으로, 묘호는 사후에, 휘호는 생전이나 사후에 두루 통하는 것이다.
 직업상으로 붙여지는 이름이 따로 있기도 했는데, 고려시대 이후로 기생에게 붙여져 온 기명이 그 대표적이다.
 이 밖에 종교적으로 붙여지는 것으로는 승려의 승명-법명-석성(釋姓) 등이 있고, 천주교나 기독교의 본명-세례명이 있다.

 

 

 

 

 

 

 

 

 

 

 

 

 

 

 

 

 

 

 

 

 

 

 


010803 성씨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10  `월성석씨(月城昔氏)
월성석씨(月城昔씨(氏)
□ 유래
석씨는 박(朴), 김(金)과 함께 신라 56왕중 8명의 왕이 즉위한 신라 3대 왕성중의 하나이다.
시조 석재흥(昔載興)은 신라 4대 왕 석탈해의 23대손이다. 석재흥은 고려 때에 시랑을 지냈으며 후손들이 그를 1세 조상으로하여 본관을 월성(경주)으로 했다.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석탈해의 전설이 전한다.
신라 남해왕 때에 가락국 바다 가운데에 배가 한 척이 와서 닿았다.
수로왕이 이를 보고 이를 맞이하여 머물게 하려고 했으나, 그배는 나는 듯이 계림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의 아진포(阿珍浦)로 달아났다. 이 때 마침 포구에 어부가 배를 끌어 당겨보니까 까치들이 배 위에 모여들었으며 상자가 하나 있었다.
이 상자를 열어 보니 단정히 생긴 사내아이 하나와 일곱 가지 보석과 노비들이 있었다. 그들을 7일 동안 잘 대접했더니 사내아이는
"나는 원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인데 함달파(含達婆)왕이 오랫동안 왕이 없다가 7년만에 커다란 알을 하나 낳자 왕과 신하들이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라며 상자에 나와 일곱 가지 보석과 노비를 넣어서 배에 실은 뒤 바다에 띄우자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 아이가 산 위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찾다가 산봉우리에 있는 집을 발견하고 숫돌과 숯을 몰래 그 집마당에 묻어 놓고, 다음 날 그 집으로 찾아가서 이 집은 원래 대장간을 하던 우리 조상이 살던 집이라며 땅을 파서 대장간이었던 것을 확인시키고 집을 빼앗았다.
그래서 후에 옛날에 남의 집을 내집이라며 빼앗았다 해서 석씨라고 했다고도 하며 鵲(까치 작)의 鳥를 떼어내고 성을 했다고도 한다. 이 때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가 있는 사람임을 알고 그를 첫째딸과 결혼을 시켰으며 57년에 왕위에 올랐다.
일설에는 예계(穢系)의 한지방 우두머리가 가락을 거쳐 신라에 들어왔다는 설도 있다.
[인구] 3,748명이 있다.(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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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성을 본으로 하는 성씨들
김(金), 박(朴), 석(昔), 최(崔)
□ 충주석씨(흥주석씨)
시조 석린(石隣)은 고려 18대 왕인 의종때 랑장으로 두경승과 함께 조위총란을 평정한 공으로 상장군이 되고 서북병마사를 지냈으며 약성(충주)군에 봉해졌다. 그의 7대 손인 석천을에게 두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첫째아들 석수명의 후손들은 본관을 홍주로 하였고, 둘째아들 석여명의 후손은 본관을 충주로 하여 본관을 나누었으나 본관을 충주로 하여 전국 대종회를 구성하였다.
□ 해주석씨
시조 석성(石星)은 중국 동명 사람으로 1559년 진사 이과에 급제하고 명나라 명종을 직간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등용되어 병부상서에 이르렀다. 그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돕는데 공을 세웠으나 심유경으로 인하여 투옥당했다. 그후에 복관되어 그의 아들 석단ㅇ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해주에 정착하여 살자 왕이 그를 수양군에 봉하고 땅을 하사했으며 본적을 해주로 하게 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해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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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진이씨(碧珍李氏)
[유래]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 벽진(碧珍)장군 이총언이다.
<동국여지승람>은 기록에 따르면, 이총언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워 태조는 그를 고려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벽진장군에 봉하고 "백자천손 대대로 이마음을 길이 간직하자"는 친서를 보내 금석(金石)의 교(交)를 맺었다고 한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벽진’으로 하였다.
[본관 벽진]
-매년 10월 3일 경북 성주군 벽진면 해평동 경수당(敬收堂)에서 시조를 숭조하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 해평동(海坪洞) [별미, 징기, 수촌, 바닷들, 해평]
경북 성주군 벽진면
벽진현이 있던 곳이다. 별미, 변하여 징기, 수촌, 또는 바닷들, 해평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 명암면이 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천동, 상원동, 하원동, 석지동, 봉산동, 행촌동, 상동동, 중평 동 부흥동, 신기동과 운곡면의 대암동, 행정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해평동(리)이라 해서 벽진면에 편입하였다.
해평동에는 벽진장군 이총언 단각(碧珍將軍李忪言壇閣)이 있다.
[가문의 번영]
시조 이총언의 아들 이영(李永)은 18세의 나이로 왕건을 따라 삼국을 정복,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대제학에 올랐고, 손자 이방회(李芳淮)는 추밀원사, 증손 이경석(李慶錫)은 평장사에 이르는 등 초기부터 명문 거족으로 번성하여 후에도 많은 인물들을 배출해 냈다.
[인물]
고려시대의 인물로 이회(李會), 이실(李實), 이극송(李克松), 이옹(李雍) 등을 꼽는다.
이극송은 고려 고종23년 명경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청렴강직한 청백리로 판삼사사의 벼슬에 올라 "맑고 깨끗하여 아무티가 없는 정신을 지녔다" 하여 고종이 친히 ‘영옥(永玉)’이라는 호를 내렸다.
특히, 시조의 10세손 이옹의 아들 4형제중 장남 이견간(李堅幹)은 고려 충열, 충선, 충숙왕 등 3왕대에 걸쳐 벼슬이 진현관대제학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킨 이맹전(李孟專)도 이씨가문의 충의와 절개의 맥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다. 세종 때 친시문과에 급제 사간원 정언 등에 오른 그는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 찬탈을 꾀하는데 분개,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선산으로 내려가 거짓으로 눈멀고 귀먹었다며 초야에 묻혔다.
이약동(李約東)은 제주목사로 있었는데, 임기가 차서 그 곳을 떠나오게 되었는데, 떠나면서 모든 물건은 제주 것이라 하여 모두 그 곳에 남기고 왔다고 한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때 대사성에 이른 이철균(李鐵均), 병자호란때 강화에서 자결한 이상길(李尙吉)은 높은학문과 충의의 인물로 이씨가문을 빛냈다.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으로 중종 때 대사헌, 병조판서를 지낸 이장곤(李長坤), 조선 말의 거유(巨儒) 이항로(李恒老) 등이 있다.
[계 파]
-금릉공파(金陵公派) -문정공파(文靖公派)
-산화공파(山花公派) -지후대장군공파(祗侯大將軍公派)
[집성촌 홈실]
경북 성주군 초전면 월곡1리 속칭 홈실(명곡)마을.
팔작(八作) 지붕의 골기왓집이 처마를 맞대고 43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고풍스런 마을이다.
43가구 중 5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벽진이씨 한 성으로 8백여 년 전 고려 인종 때 금자광록대부이던 입향조 이방화(李芳華)가 당나라 풍수지리의 명당을 찾아 이 곳 곡성산 아래에 터를 잡았다.
그러나, 누대에 5형제가 태어나 고관대작의 벼슬에 오르면 마을을 떠나라는 유언으로 불과 8대를 살다 뿔뿔이 흩어졌다 한다. 5 형제가 벼슬길에 오르고 숙질간에 8판서가 나와 명문대가로 번창했으나 곧 쇠운을 맞았던 것이다.
2백여 년 후 후손들이 가문을 일으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관지]
벽진 : 경북 성주군의 통일신라 때 지명
[기 타]
 인구: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80,662명이 있었다.
[성주 참외]
청정 성주참외는 무공해 가야산의 맑은 물과 풍부한 햇빛, 낙동강 비옥한 평야의 마사질 양토, 4계가 뚜렷한 최적의 기후에서 재배한다. 자연의 숨결 속에서 재배하는 이 참외는 멜론의 교잡종으로 당도 15° 이상의 것만 수확하며,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유기질 퇴비로 연중 재배하여 비타민 A.C가 풍부하여 피부 미용은 물론, 깔끔한 모양과 색깔, 사근사근한 육질, 감칠맛, 신선한 향기가 천하의 일품이다.
[가야산]
가야산은 성주의 남서쪽에 경계 지역에 있는 산으로, 경상남도 합천군, 거창군, 경상북도 고령군에 걸쳐 있는 명산이다.
가야산은 1972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주봉인 칠물봉(1,433m)과 두리봉, 남산, 단지봉, 남산제1봉, 매화산 등 1,000m 내외의 연봉과 능선이 둘러 있다. 예로부터 "조선팔경" 하나로 알려진 가야산은 산세가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는 곳이다.
수륜면에서 가야산으로 이어지는 순환도로를 따라가면 검붉은 기암절벽이 하늘을 찌르는 장쾌한 광경이 펼쳐진다. 이 일대에 해인사 외에 법수사와 심원사 폐사지가 있다. 계곡, 폭포를 끼고 이어지는 용기골과 심원골의 이색적인 등산로 코스가 있다.
용기골은 웅장하고 남성적인 가야산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으며, 하늘 바위 아래 미륵부처님이 오는 길을 굽어 살피고 있다. 길을 따라 이어지는 맑은 계곡도 등산의 묘미를 더해주고 있다.
심원골에서 서성재를 거쳐 용기골로 내려오는 등산로는 이색적인 볼거리들이 늘려 있다. 딸배나무, 고로쇠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산다람쥐, 산토끼 등이 뛰놀고 있어, 자연학습장으로도 좋고, 가족 동반 등산로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기암괴석과 어울어진 가을 단풍은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고, 눈 덮인 가야산 설경은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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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산신씨(검색 요)
http://www.pyongsansin.co.kr/history/history1.htm
460,238명. (1985년)

신숭겸
고려 초의 무신.
본관 : 평산(平山)
별칭 : 초명 능산(能山), 시호 장절(壯節)
관련 표제어
신숭겸(申崇謙)은 본시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사람인데 태조가 여기에서 사성(賜姓)하였다. 숭겸이 일찍이 태조를 따라서 사냥갔다가 삼탄(三灘)에 이르렀는데 마침 기러기 세 마리가 맴돌고 있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 누가 이를 쏘겠는가 >하니 숭겸이 말하기를 < 臣이 쏘아 보리다 >하였다. 태조가 궁시(弓矢)와 안마(鞍馬)를 내리자 숭겸이 말하기를 < 몇 째 기러기를 맞히리까 >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셋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쏘라 >하였다.
숭겸이 명에 응하여 과연 시키는 대로 맞히는지라 태조가 탄복하고 곧 명하여 平州(平山의 古號)를 賜하여 貫鄕을 삼게 하고 아울러 기러기를 쏘던 근방의 땅 三百結을 하사하여 子孫 代代로 그 租를 거두게 하고 因하여 그 곳을 弓位라 이름하였다
 
 초명 능산(能山). 시호 장절(壯節).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 광해주(光海州: 春川) 출생. 918년 태봉(泰封)의 기장(騎將)으로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등과 협력, 궁예(弓裔)를 폐하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루었다. 927년(태조 10) 공산(公山)에서 견훤(甄萱)의 군대에게 태조가 포위되자 김락(金樂) 등과 함께 역전하여 이를 구출하고 전사하였다. 1120년(예종 15) 예종은 그와 김락을 추도하여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었다. 삼중대광(三重大匡)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으며, 태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곡성(谷城)의 양덕사(陽德祠), 대구광역시의 표충사(表忠祠), 춘천의 도포(道浦)서원, 평산(平山)의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에 제향되었다.
공(公 : 申崇謙)이 일찍이 태봉의 기장
(驥將)으로 있을 때 서기918년 6월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 등과 논의하여 포악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 태조를 받들어 고려를 개국하였는데 태조 10년 가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자 태조는 신라는 돕고자 대구 팔공산(八公山)에서 견훤을 맞아 싸웠으나 워낙 수가 많은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에 공은 그 용모가 태조를 닮았으므로 태조를 숨기고 대신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위기를 모면한 태조는 한참뒤에 머리없는 공의 시신을 찾아내어 통곡하고 없어진 머리를 만들어 태조가 직접제례를 행하고 광해주 비방동(現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예장한 후 전사한 그 자리에 단(순절단 殉節壇)을 모으고 절(智妙寺)를 지어 공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묘소에 공의 머리를 금으로 만들어 예장하면서 혹시 엿보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봉분을 셋으로 만들었다고도 하고, 또는 부인을 합장한 것이라고도 하나 어느 봉분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으므로 제향은 중앙의 봉분앞에서 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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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
박(朴), 소(邵), 신(申), 유(庾), 윤(尹), 이(李), 조(趙), 차(車), 한(韓)
^ 신숭겸장군유적 申崇謙將軍遺蹟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 있는 고려 초기 무신 신숭겸의 유적(고려시대)
대구기념물 제1호(1981년 7월 1일) 대구 동구 지묘동 526  면적 : 7,804㎡

1981년 7월 1일 대구광역시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표충재 평산신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고려 태조 때 개국공신 장절공(壯節公) 신숭겸이 순절한 곳이다. 신숭겸은 태봉의 기장(騎將)으로 있으면서 배현경(裵玄慶) 등과 함께 궁예를 내몰았다. 동시에 왕건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한 뒤 대장군이 되었다.
927년(태조 10)에 신라를 위기에서 구하려고 태조 왕건과 함께 후백제군을 상대로 대구 공산(公山)에서 싸웠으나 크게 졌다. 이 싸움에서 왕건의 목숨이 위기에 처하자 왕으로 변장하여 김락(金樂)과 같이 싸우다 왕건을 대신해서 전사하였다. 이를 틈타 왕건은 장졸로 변장하여 적의 포위망을 뚫고 단신으로 탈출하였다.
왕건은 신숭겸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光海州:지금의 춘천)에 예를 갖추어 묻어주었다. 전사한 자리인 이 곳에는 지묘사(智妙寺), 미리사(美理寺)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는 한편, 일품전지(一品田地) 삼백무(三百畝)를 하사하여 이를 수호하게 하였다. 그뒤 지묘사는 고려가 멸망하면서 함께 폐사되었다.
1607년(선조 40)에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柳永詢)이 폐사된 지묘사 자리에 표충사(表忠祠), 표충단, 충렬비를 세워서 신숭겸의 혼을 위로하고 충절을 추모하였다. 그뒤 조정에서는 1672년(현종 13)에 이 서원에 사액(賜額)을 내려 관리하도록 하였다.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표충사가 없어진 뒤부터는 후손들이 재사(齋舍)를 새로 지어 지켜오고 있다.
지금도 표충사 앞쪽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라지는 고개를 왕건의 정예군이 크게 패하였던 고개라 하여 파군재라 부른다. 파군재 남쪽 산기슭의 봉무정 앞에 있는 큼직한 바위는 왕건이 탈출하여 잠시 앉았다고 해서 독좌암이라 부르며, 표충사의 뒷산은 왕산(王山)이라 부른다. 이밖에도 대구에는 이 싸움에서 유래된 안심, 해안, 반야월 등의 많은 지명이 남아 있어 당시 격전지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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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부터 3년에 걸친 장절공(壯節公) 묘역의 조경사업을 끝내고 기념 비를 세웠다.
비(碑)의 귀부(龜趺)와 이수(이首)는 장절공의 순국년대와 비슷한 년대에 세운
 나주군 북내면 고달사(古達寺)의 옛터에 있는 원종대사(元宗大師) 혜진탑비(慧眞塔碑 문화재 보물 제6호)를 모방하였다
^ 신숭겸 묘역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 고려시대. 강원기념물 제21호. 장절공 신숭겸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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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흠
[ 1566~1628(명종 21~인조 6) ]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상촌(象村)․현옹(玄翁)․방옹(放翁).시호는 문정(文貞)
도사 신승서의 아들.
1586년(선조 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학유, 감찰, 병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양재도 찰방을 거쳐 그 후 지평, 사성, 대사간, 부제학, 도승지,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1608년(광해군 즉위) 대사헌으로 세자책봉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의 한 사람이므로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판서가 되어 대제학을 겸했으며, 노서의 중진으로 우의정을 거쳐 1627년(인조 5) 좌의정이 되었고, 이 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모시고 전주로 피난하다가 돌아와서 영의정에 올랐다.
정주학자로 문명이 높았고,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함께 한문학의 조선 중기 태두로 일컬어진다.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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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립(申砬)
조선 도제찰사. 신화국의 아들. 1567년(선조 즉위)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도총부 도사?경력을 지내고 진주판관이 되었다.
1583년 온성부사가 되어 북변에 침입한 나탕개를 격퇴하고,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1587년 홍양에 왜구가 침입하자 우방어사가 되어 군사를 인솔하고 토벌에 나섰으나 이미 왜구들이 철수했으므로 돌아왔다.
159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 다음해 한성부 판윤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 도순변사가 되어 빈약한 병력으로 출전하여 충주의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적군과 싸웠으나 참패하여 부장 김여물과 함께 강물에 투신 자결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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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익희(申翼熙)
대한민국 국회의장.자는 여구(汝耈). 호는 해공(海公). 장례원경 신단의 아들.
1910년 한성외국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일본에 가서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재학중 학우회를 조직, 총무, 평의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학생운동을 벌이고,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했다.
1917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내무차장, 외무차장, 국무원 비서장, 내무총장, 법무총장, 문교부장, 외교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항일독립운동을 지도했다.
해방후 귀국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이 되어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총장을 역임했고, 1946년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대의원에 당선, 이듬해 입법의원의장이 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 부의장이 되었다가 그 해 8월 의장이 되고,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 다시 의장이 되고, 이어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동안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맡아 야당을 영도했으며, 1956년 민주당 후보로 제3대 대통령에 출마하여 한강 유세를 마치고 호남지방 유세차 가돈 도중 열차 안에서 급사하여 국민장이 거행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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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신씨 시조 : 신성용(申成用)
 시조 신성용(申成用)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고 검교 군기감을 역임했다.
 신성용의 선조는 신라의 선비로 대대로 고령에 살면서 호장을 지내왔으므로 후손들이 고령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8세손 신숙주가 익재좌리공신으로 고령 부원군에 봉해졌다.
삼갈신 신(愼거창)씨도 있고, 매울 신(辛-영산=영월)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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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씨의 유래
허씨(許氏)는 연원을 멀리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의 비(妃) 허황옥(許黃玉)에 두고 있다.
허황옥은 원래 인도(印度)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서 16세에 배를 타고 지금의 경남 창원시 웅동면 앞바다에 이르러 수로왕의 영접을 받고 황후가 되었다. 그 후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맏아들 거등(居登)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허황후의 뜻을 살려 허씨(許氏)로 사성(賜姓)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하여 하동칠불(河東七佛 : 경남 하동에 七佛寺가 있다)로 성불하였다.
그러니까 김해김씨는 부성, 허씨는 모성을 각각 계승해 오늘날에도 두 성씨는 상혼(相婚)을 피하고 있다.
허씨의 본관은 문헌에 59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양천(陽川)․하양(河陽)․김해(金海)․태인(泰仁) 4본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또 인천이씨(仁川李氏)도 허씨에서 갈려나온 성씨이다.
신라 허기(許奇)가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을 때 마침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玄宗)을 호종하여 그 공으로 당나라 황실의 성인〈李氏〉를 사성받고 소성백(邵城伯:소성은 지금의 仁川)에 봉해져 인천이씨의 연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양산이씨(梁山李氏)는 인천이씨에서 분관(分貫)되어 나왔다. 따라서 김해김씨, 허씨, 인천이씨, 양산이씨는 이성동족(異姓同族)으로 한 핏줄인 까닭에 서로 결혼을 피하고 있다.

양천허씨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은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의 30세손으로 고려조 대광공(大匡公)이었다. 대대로 공암촌에 살면서 농사에 힘을 써 거부가 되었다. 마침 고려태조가 후백제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이 부족하였는데 군량을 보급하여 군의 사기를 회복케 함으로서 후백제 견훤을 대파하였다. 태조가 그 공을 가상히 여겨 가부(假父)라 칭하고 공암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이로 인하여 본관을 공암(양천)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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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유화상(長遊和尙)
장유화상은 가락국(駕洛國) 수로왕비(首露王妃)인 허황옥(許黃玉)의 오라버니이다. 이에 대한 기록은 김해 은하사 취운루 중수기(銀河寺翠雲樓重修記)에 적혀있다.
허황옥은 아유타국(지금의 인도)의 공주로 1949년 전 가락국에 도착하였다고 <삼룩유사>가 전하고 있다. 허황옥 공주가 가락국 김수로왕과 결혼하여 王妃가 되었는데, 그때 나이 16세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공주의 일행은 이름이 밝혀진 사람은 신하 신보(申輔)와 그의 모정(慕貞), 또다른 신하 조광(趙光)과 그의 처 모량(慕良) 뿐이고, 나머지 사람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아서 누구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취운당 중수기에는 왕비의 오라버니가 '장유화상'이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아유타국에서 온 20여명의 사람들 속에 왕비의 오라버니인 장유화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유타국은 어느 곳에 있는 나라였을까?
현재 지구상에 아유타라고 불리는 땅은 두군데 있다. 하나는 인도 갠지즈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아(Ayodhia)이고, 또하나는 태국 방콕 근처의 아유티야(Ayuthia) 이다. 그런데 태국의 아유티아는 서기 13세기때 생겨난 도시이므로 허황옥이 살았던 서기 1세기부터 2세기 사이에는 지구상에 없었던 곳이다.
따라서 <삼국유사>에 기록된 허황옥의 고향인 아유타는 인도의 아요디아일 수밖에 없다. 인도의 아요디아는 서기전 6세기때 융성했던 도시국가인 코살 (Kosala)국의 수도였다. 인도의 전통종교인 힌두교를 부흥시킨 라마王의 탄생지가 바로 아요디아이기 때문에 더욱 유명한 곳이다.
뿐만 아니라 아요디아는 불교의 교조인 싯다르타왕 자가 출가(出家)하여 처음 공부를 시작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필자가 1985년 처음으로 아요디아를 방문했을 때 도시의 인상은 수천 명의 힌두교도들의 인도 전역에서 참배를 와서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는 곳이었다. 뿐만아니라 아요디아에는 시내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사라유강에는 멀리서 온 참배객들이 강물에 들어가 몸을 씻고 머리를 감고 있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다.
한국에서 간 필자의 눈을 놀라게 한 것은 시내의 사원마다 대문 정면에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마주보는 물고기 두 마리는 김해 수로왕릉(首露王陵) 정문에 그려져 있는 쌍어문(雙魚文)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 雙魚文
가락국 최초의 王이자 아유타국에서 시집온 허황옥공주를 왕비로 맞이한 김수로왕의 무덤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분명히 가락국의 국장(國章)이자 신앙의 상징 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림이 허황옥왕비의 고향인 인도 아요디아 사원마다 그려져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쌍어문은 필시 이천년 전에 이 땅에 시집온 인도공주가 한국땅에 소개한 신앙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br> 쌍어문은 그래서 인도와 한국을 연결하는 끈이고, 한국에 자리잡은 인도 신앙의 증거이다.
장유화상이 허황옥 공주의 오라버니라면 아유타국의 왕자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장유화상의 가락국 도착은 인도신앙 내지는 인도종교가 한국에 도착한 중요한 증거가 된다.
쌍어문을 어느 신앙의 상징으로 삼기 시작한 사람들은 지금부터 2,800여년전 '바빌로니아인'들이다. 그들은 물고기가 인간을 보호하는 영특한 존재로 생각 하였고, 신전 앞에다 대문을 세울 때 대문 머리에다 쌍어를 그렸다. 그런 생각이 중앙아시아 초원에 살던 유목민족 '스키타이인'에게 퍼져 결국은 인도에 까지 스며들어 힌두교의 여러 신상(神像) 중에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신앙은 자연스럽게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의 동방전파와 함께 북으로는 네팔→티벳→몽고로 퍼졌고, 동으로는 남중국을 거쳐 양자강을 따라 황해를 건너서 한국 땅에 도착하였다.
따라서 인도출신 허황옥 공주가 한국땅 가락국에 와서 김수로왕과 결혼하여 왕비가 되면서 쌍어 신앙이 한국에 전파되었다. 그 결과 쌍어신앙은 지금까지 한국 땅에 남아있다.
지금도 옛날 가락국(후에 伽倻)의 옛땅이었던 경상남도에 여러 불교사원에 쌍어문이 남아있다. 김해의 은하사, 계원암, 합천의 영암사에 쌍어문이 그림이나 조각으로 있고, 새로 창건한 김해의 동림사, 김해 장유종선원에 새로운 쌍어문이 등장하였다.
쌍어신앙은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어 선비들이 사용하던 묵(墨)에도 그려지고, 여인네들의 노리개에도 달리게 되었다. 이천년 전에 한 여인의 국제결혼의 결과는 이렇게 지금까지도 우리 문화속에 살아 숨쉬는 현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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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마다 한 차례씩 열리는 김해의 수로제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수로왕과 신하들이 남해바다로부터 배를 타고 나타나는 허황옥 일행을 맞아들이는 장면일 것이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금합 속의 알에서 난 수로왕이 바다 멀리 아득한 나라에서 찾아온 허황옥을 왕비로 맞아들여 함께 나라를 다스린다는 <가락국기> '수로신화'의 핵심인데 매년 열리는 수로제는 바로 이 수로신화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수로제와 수로신화의 이 장면에 등장하는 허황옥과 그 일행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에는 수로왕의 출현과 개국(開國)에 관한 설화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허황옥설화가 포함되어 있다.
(상략)
왕궁에서 서남쪽으로 60걸음 되는 산기슭에 장막으로 궁실처럼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가 산 너머 벌포 나루목에서 배를 매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고 난 다음, 입고 있던 바지를 벗어 폐백으로 삼아 산신에게 보냈다.
(중략)
이에 왕은 왕후와 함께 침전에 있는데,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아유타국의 공주로 성은 허요,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열여섯이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중에 아버지인 왕께서 왕후와 함께 나를 돌아보면서 하는 말씀이 '우리가 어제 꿈에 똑같이 하늘의 상제를 ?는데, 산제가 이르기를 가락국의 으뜸임금인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 보내서 임금 자리에 앉힌 사람으로 신명스럽고 거룩하기가 그만이건만 새로 나라를 꾸미느라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이 꼭 공주를 보내서 짝을 이루게 하라고 하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갔다.
꿈을 깨고 나서도 상제의 말소리가 귀에 쟁쟁하였다. 이러하니 네가 속히 부모를 떠나 그리로 가야겠다'고 하였다. 내가 바다 저편 아득한 남쪽에서 찾고 다시 방향을 틀어 동쪽에서 찾더니, 이제 추한 용모로 존귀한 분을 모시게 되었다."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천생이 비범하여 공주가 멀리서 오시리라는 것을 먼저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아래 신하들이 왕비를 맞아들이라고 청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이제 형숙한 분이 스스로 찾아왔으니 나로서는 다행한 일입니다"고 하였다.
드디어 동침하여 이틀밤을 치르고 하루 낮을 보냈다. 이에 타고 온 배를 돌려 보냈는데, 뱃사공은 모두 15명이었다. 각각 쌀 열섬과 피륵 서른 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초하룻날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왕과 왕후가 한편에 타고, (왕후를) 따라 온 신하 내외도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왔다. 가지고 온 갖가지 외국물건도 모두 실어가지고 천천히 왕궁으로 오니 그 때의 시각이 바로 정오였다.
(하략)
허황옥이 인도사람이었다면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결혼은 국제결혼 1호가 되는 셈이다.
허황옥이 정말 인도 야유타국의 공주였을까? 그게 사실이라면 허황옥은 멀고 먼 한반도까지 시집을 와야 했을까? 또 사실이 아니라면 왜 그런 기록이 남아 있는 걸까? 가야와 인도는 멀고 먼 거리를 두고 자리한 나라인데 말이다.
몇 가지를 짚어보면 그 가능성도 없지않아 보인다.
□ 가야를 상징하는 물고기 문양의 비밀
수로왕이 인도 공주인 허황옥과 결혼했다는 기록은 당시 가야와 인도 사이에 왕래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는 수로 왕릉에서 볼 수 있는 물고기 문양을 들 수 있는데 가야는 나라를 상징하는 무늬로 두 마리 물고기가 입을 마주한 문양(쌍어문)을 만들어 썼다. 그런데 그 물고기 문양은 인도 지방에서 각종 장식에 흔히 사용하는 것이다.
□ 가야라는 나라 이름의 비밀
또 다른 하나는 가야라는 나라 이름에 있다. 가야 혹은 가락은 고대 인도의 언어인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가야는 인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세운 나라일 거라는 주장도 있다. 수로왕이 이끄는 집단이 먼저 한반도로 옮겨왔고 그 뒤를 이어 허황옥이 왔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주장대로라면 가야의 뿌리는 인도의 한 왕국이 된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허 왕비가 인도 사람이었느냐 아니냐에 대한 물음에 지금 당장 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확실한 사실은 아유타국이 실제로 인도의 한 왕국이었고, 가야와 인도는 서로 왕래를 하던 사이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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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 왕씨 (開城 王氏)
시조 : 왕국조(王國祖)
중국 황제 헌원씨의 17세손 조명이 유누와 함께 우리 나라에 와서 지금의 평양 일토산 아래에 정착하였다. 그 후 조명의 후손 수극이 기자가 왕이 되었을 때 왕씨 성을 하사받았다.
수극의 57세손 왕염의 13세손 왕몽으로 이어져 왔는데 왕몽은 신라 건국초기에 시중을 지냈다.
당시 비결에 '토초가위왕'이라 하였으므로 그 화가 미칠까 두려워 왕몽이 일곱째 아들 왕림(王琳)을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10여년 동안 수도하면서 全, 申, 車씨 등으로 성을 바꾸었고 차무일이라고 이름을 바꾸었고 한다.
차무일의 셋째 아들 왕식시의 후손이 왕건이다.
왕건(王建, 877~943)은 송악(개성) 사람으로 901년 궁예가 신라에 반기를 들고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이되었을 때 궁예를 도와 913년 시중이 되었다.
그러나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지 몇년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당시 기장이었던 신숭겸, 배현경 , 유금필, 홍유 등이 왕건에게 왕창근, 송합홍 등 점술가의 예언을 설명하면서 거사를 권하여 궁예를 추출하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려를 개국한 후 삼국을 통일하고 473년동안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을 개국하면서 멸족를 당하게 되자 옥(玉), 금(琴), 마(馬), 전(田), 전(全), 김(金)씨 등의 다른 성으로 행세하며 숨어 살면서 혈통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 정조 때에 비로소 문헌 등을 조사하여 왕씨로 다시 성을 바꾸어 세보를 만들고 왕건이 수도로 정한 송도(개성)을 본관으로 하고 왕원(王垣)을 1세 조상으로 하였다.
계파는 양양공파, 안경공파, 시중공파, 평양공파가 있다.
이 성씨는 고려조의 왕족으로 475년간의 번영을 누렸던 씨족이다. 시조는 물론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다. 와씨는 고려 태조 왕건을 시조로 하는 개성왕씨 외에 강릉, 해주, 왕씨가 있는데, 강릉왕씨의 시조 왕유(王裕)는 왕건의 아들이다. 해주 왕씨의 시조 왕유(王儒)는 본성이 박씨였는데, 왕건이 박유에게 왕(王)이라는 성을 내린 것이다. 조선이 생기고 왕씨들에게는 대대적인 멸족의 위기와 고난을 받게 되었다.
 
18,774명.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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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
고려 제1대 왕(재위 918~943).
본관 : 개성(開城)
별칭 : 자 약천(若天), 시호 신성(神聖)
활동분야 : 정치
주요저서 : 《정계(政誡)》,《계백요서(誡百寮書)》
내용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본관 개성(開城). 자 약천(若天). 성 왕(王). 휘 건(建). 시호 신성(神聖).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追尊) 한씨(韓氏).
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효공왕 2)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고, 900년 광주(廣州), 충주(忠州)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 경상도 지방에서 견훤(甄萱)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시중(侍中)이 되었다.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ꡐ고려ꡑ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이듬해 서울을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 북진정책, 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즉, 지방 호족들을 회유, 무마하는 한편,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神儉)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政誡)》 《계백요서(誡百寮書)》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현릉(顯陵:개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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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씨 (甄氏)
경주 상주 안주 전주 청양 황간
총 6개의 본관과 990명이 있다.(1985년)
성씨. 본관은 황간(黃磵), 상주(尙州) 2본이다.
황간견씨의 시조는 신라 말기의 사불성(沙弗城:尙州)의 호족 아자개(阿慈介)이고, 상주견씨의 시조는 아자개의 아들로 후백제를 세운 견훤(甄萱)이다.
아자개는 신라 진흥왕의 후손으로 본성이 이씨(李氏)였으나 견훤이 15세 때 성을 견으로 바꾸었다. 견훤은 그 후 900년(효공왕 4)에 완산주(完山州:全州)를 점령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1985년도 국세조사에서는 990명으로, 274성씨 중 158위를 차지하였다.

황간 견씨 (黃磵 甄氏) [ 상주 견씨 (尙州 甄氏)]
시조 : 견훤(甄萱,)
문헌에는 황간 견씨와 상주 견씨가 있으나, 아자개를 시조로 한 견씨와 견훤을 시조로 하는 견씨가 각각 본관을 다르게 하고 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甄萱, 867~938)은 농사를 지어 생활하던 아자개(阿慈介)의 맏아들로, <삼국유사>에 따르면 견훤은 원래 이씨였는데 후에 견으로 성을 고쳤다고 한다.
아자개는 아들 넷을 두었다고 한다.
사찬(私撰)인 <이제가기>에 다르면
‘진흥대왕의 비(妃) 사도(思刀)의 시호는 백융부인인데, 그녀의 셋째 아들 구륜공(仇輪公)의 아들 파진간(波珍干)이 있었고, 또한 선품(善品)의 아들인 각간(角干), 작진(酌珍)이 왕교파리(王晈巴里)를 아내로 맞아 원선(元善)을 낳았는데, 바로 이 아이가 아자개(阿慈介)이다.
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이고,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南原夫人)으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 맏아들이 훤(萱), 다음이 능애(能哀), 다음이 용개(龍蓋), 다음이 보개(寶盖), 다음이 소개(小盖)이다. 달은 대주도금(大主刀金)이다.

견훤 전설
젖먹이 시절 아버지가 들에서 밭 가는데,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점심 지어 오기 위해 애기를 밭드렁 수풀 아래에 두었더니 범이 와서 젖을 먹여 주었다. 이 말이 전해지자, 마을 사람들이 ahemn 이상히 여겼는데, 장성할수록 모습이 건장했고, 뜻이 커서 남에게 얽매이지 않고, 멋대로였다.

전설을 뒷받침이나 하듯 그는 커서 군인이 되어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 해변으로 가서 창을 베개 삼아 적군을 기다려 쳐부수었다. 다른 병졸보다 앞장섬으로써 그 용맹성이 높이 평가되어 비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신라 정치가 어지러워 남몰래 반역의 듯을 품고 여러 고을을 돌았는데, 많은 무리들이 글르 따랐다.
무진주-완산주
“백제가 개국한지 6백여 년 만에 나라 망했는데, 아라 세워 원수 갚겠다.”
후백제라 하고 왕에 오름. 효공왕 4년.(900).

황간 견씨 405명, 상주 견씨 1명, 전주 견씨 511명이 있다.(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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