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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된다는 것 본문: 마태복음 20: 20-28 1.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생각한 제자도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0-21) 이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는 우리의 흥미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녀는 세베대의 아내이고 예수님의 수제자 3인에 들어가는 야고보와 요한의 엄마입니다. 도대체 그녀가 누구길래 감히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런 부탁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마가복음 1:20에 나온대로 세배대는 어부로서 아들 둘과 품군을 거느리고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배에서 그물을 깁다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어부들은 연중무휴로 생선을 잡아서 팔 수 있기 때문에 다른 갈릴리 주민보다 소득이 낳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세베대의 가정은 배도 있고 일군을 거느릴 정도로 중산층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사렛 예수란 사람이 나타나 아들들을 유혹해서 데려가 버렸으니 세베대나 그 아내의 입장에선 얼마나 황당스럽고 불안했겠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반전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메시야라는 소문도 들려오고 이제 곧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왕위에 오를 거라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 때 세베대의 집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을 겁니다. “아들들을 예수님께 딸려 보내기를 잘했다. 잘한 선택이었다. 이젠 우리 집안도 필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접수하면 우리 아들들도 정권 인수위원회에서 중책을 맡고 그 후에는 개각이 시작되면 최소한 장관직에는 오를 것”이러는 생각으로 장밋빛 기대에 부풀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세베대의 아내는 다른 어마들과 달랐습니다. 자녀의 장래를 위해 행동하는 ‘알파맘’이었습니다. 적극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였습니다. 예수님과 직접 승부를 보기로 했습니다. 두 아들을 좌우에 대동하고 예수님께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그녀의 부탁은 이것입니다. “당신의 나라에서 내 아들중 하나는 당신의 오른편에 하나는 당신의 왼편에 앉혀 주소서.”
그런데 이 세베대의 아내가 생각한 “당신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가 문제입니다. 그 나라는 하늘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세워질 새로운 왕조였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왕으로서 신정정치를 펼칠 나라였습니다. 이 어머니는 이 나라에서 총리와 부총리 자리를 차지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녀와 아들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열심히 삼년을 따라다닌 상급이 높은 지위와 그에 따른 부귀로서 보상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면 다른 열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까요? 피식 웃으면서 혀를 찼을까요? 헛물을 켜는 이 세모자를 바라보고 안타깝게 생각했을까요? 이미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은 고난의 길이라는 걸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6:21에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고 나오지 않습니까? 더욱이 이어서 17장12에서도 예수님은 변화산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셔서 놀랍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시면서도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포한한 제자들의 반응은 예수님의 기대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들은 ‘분개’ 했습니다. 그들의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은 아마도 이럴 것이었을 겁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평소에도 좀 너무 나선다고 생각했는데, 엄마까지 동원해서 한 자리하려고 선수를 쳤구나. 이 치사한 인간들! 정말 짜증난다.”
예수님에게 청탁하는 세베대의 아들들과 그 어머니, 그들을 보고 분개했던 나머지 제자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이었을까요? 네, 그들은 예수님의 길을 영광의 길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길을 성공과 권력의 길로 믿었던 것입니다. 혹시 그 때로부터 2000년 후에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인 저와 여러분은 어떤가요? 예수님을 따르는 이 길을 영광과 성공의 길로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고난과 실패의 길로 생각하십니까? 2. 예수님이 가르치신 제자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청탁을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야고보와 요한의 엄마의 간청에 대한 예수님의 첫 반응은 이랬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참으로 무서운 질문이었습니다. 당장 고위직을 원하는 세베대의 가족에게 “좋다. 한 자리 하려면 먼저 너희 목숨을 내놓아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에게 왜 이렇게 힘든 요구를 하시는 겁니까? 누가복음 14:26-27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던 군중에게 이와 비슷한 요구를 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아무나 제자로 부르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를 사람,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반드시 기존의 유교적 가족관계에서 벗어나야 하고 자기 목숨까지 포기해야 하고 예수님이 지실 십자가 형벌까지 받을 것을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세베대 가족의 모습은 우리 가족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거의 모든 부모들의 마음의 소원은 자식들이 이 땅에서 잘되고 성공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도 좋고 내세도 좋지만, 우선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 땅에서, 현세에서 잘되는 걸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이 간절한 소망에 왜 찬물을 끼얹으시는 걸까요? 그 이유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권력구조가 아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선 우리가 매일매일 경험하고 있는 이 세상의 권력구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25절에서 예수님은 세상나라의 권력구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규정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25) 세상의 권력은 그 속성상 군림하고 지배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모든 국가가 철저한 전제왕정 국가였습니다. 황제나 왕이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집권자들의 권력은 대단히 강합니다. 대통령과 청와대의 권력을 생각해 보십시오. 국가의 거의 모든 정책을 행정부가 집행합니다. 입법부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도 국민보다는 자기 정당의 권력을 더 무서워합니다. 전통적으로 권력은 타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강제적인 힘이나 능력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권력자는 힘이 있는 한,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려 합니다. 약자의 입장을 잘 들어주지 않습니다. 또 하나 세상 권력을 움직이는 동기는 이윤추구입니다. 세상 권력자들은 그들의 권력과 품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돈을 필요로 합니다. 지금 세계를 혼란과 고통으로 몰아넣은 미국발 금융위기의 중요한 원인도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월스트릿의 금융기관과 전문가들의 수단벙법을 가리지 않고 이윤추구를 결과로 진단합니다. 끝없는 지배력과 돈의 추구가 이 세상 권력의 핵심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세상 권력구조와 전혀 다른 나라의 권력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26-27)“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권력의지와 구조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세상 국가에서는 장 영리하거나 힘있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정반대의 원리에 의해 움직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배욕, 이윤추구, 명예심으로 d;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혜롭고 강한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만이 권력자이십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은 그들의 직책이 무엇이든지, 섬기는 사람이고 종입니다. 그들이 가져야할 품성과 덕은 겸손하고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4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하나님 나라에서는 섬기고 종이 되는 것,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것이 제자의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매우 힘듭니다. 우선 우리 인간의 타락한 성격과 배치되기 때문이고 그 다음에는 사회적으로 무시당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에 대한 몇 가지 반응은 이렇습니다. “자존심이 상한다! 어떻게 항상 양보만 하고 사냐? 나쁜 녀석들에게 이용만 당한다. 무시당하기 일쑤이다. 독같이 받는데 남보다 더 많이 일해야 한다. 알아주기는커녕 바보소리 듣는다!” 등등입니다. (맞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왜 유독 예수님의 제자들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의 스승이고 주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부할/승천하셔서 하나님나라를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 길을 가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28절을 다시 읽어 봅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신데도 이 세상에 오셔서 세금 한번 안 걷으시고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런 분을 우리는 이사야 53:4 대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을 주와 왕으로, 스승으로 모셨으면 그 길을 뒤따르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3. 우리의 제자도 모든 제자가 실제로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매달리는 고난을 받아야 한다면 요즘 교회에서는 제자 한사람도 구경 못할 겁니다. 다행이도 오늘날의 고난과 섬김은 조금 가볍습니다. (안심이 되시죠!) <영성>에 대한 책과 <대적기도 시리즈>로 유명한 정원 목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바둑을 좋아해서 바둑사이트에 글을 썼답니다. 자신이 목사라고 밝히자 첫 반응이 “가난한 이들의 피를 빨아먹는 직업을 가지셨군요” 였습니다. 그런데 정 목사님은 이런 악플러를 대할 때는 무조건 온유하고 친절하고 겸손하게 대하는 것이 주님의 제자다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간증합니다. “오래 전에 나를 욕하고 때리겠다고 찾아온 분이 있었다. 큰 소리를 치고 떠들다가 내가 고요한 상태에서 흔들리지 않고 그를 위로하자 나중에는 미안하다고 울었다.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안아주자 죄송하다고 울었다.” 개인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말합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이랜드 사태는 2007년 6월 17일에 시작돼 510일만 인 2008년 11월 13일에 끝났습니다. 결국 노조지도부를 해고하는 대신 나머지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보장을 얻어내는 것으로 협상이 타결되었고 이랜드그룹은 홈에버를 삼성테스코(홈플러스) 측에 매각했습니다. 이 사태에 대해서도 정 목사는 고난과 섬김의 제자도를 적용합니다. “만약 그 기독교 기업의 사장님이 농성장에 직접 들어가 아픈 사람, 누워 있는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일으키고 눈물을 흘리고 포옹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러분, 지난 해 회사가 적자였습니다. 그래서 좋지 않은 결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같이 갑시다. 제 월급을 줄여서라도 우리 같이 갑시다. 우리는 한 식구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누워있는 이들을 일으키고 포옹하고 같이 울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쇼를 하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사업가라면 그러한 마인드가 필요하지 않을까? 헌금을 하고 남을 돕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우선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종업원들에게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배려하고 이들이 <우리 회사는 정말 좋은 회사다. 이 회사에 소속된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이런 마음을 일으키도록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많은 좋은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언론의 주목이 집중되는 상황에서 경직된 자세를 보여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고 지나치게 오해를 받고 공격을 받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악플러들은 쇼를 한다고 온갖 욕을 하더라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사과하고 미안함을 표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겸손하고 온유한 심령을 갖는 것 자체가 주님을 위한 고난이자 영적 승리의 길이라는 말입니다. 그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강한 자가 되기보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승리다.” 예수님의 제자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필요를 채워주는 일, 공공의 선을 위해 노력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희생하고 용기를 내고 인내해야 합니다. 이 고난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면 성경은 이러한 고난을 즐거워하라고 말씀합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여러분은 제자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쁘게 참여하실 준비가 되셨나요? 커지려고 섬기는가, 섬기다 보면 커지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퀴즈를 하나 드리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는데, 크게 되고 으뜸이 되려고 섬겨야 하나요, 아니면 종이 되어 섬기면 크게 되나요? (네, 후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
크기위해 섬기다 보면 더럽고 아니꼬운 것을 자기 힘으로 참다가 “지금은 내가 성공하기 위해 너희들을 섬긴다. 그러나 두고 보자! 언제가 내가 넘버원이 되고 크게 되어 너희들을 손봐줄 것이다.” 이렇게 되기 쉽습니다. 다시 야고보와 요한의 엄마가 출발한 원점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 한자리 하기위해 온갖 것 감내하며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분이 천국에서 한자리 할지 의심이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 신앙의 행위에는 상급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히브리서 11:26에서 모세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던 이유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나옵니다. 상급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급이 저와 여러분의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이루지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작가 벤 스위트랜드는 “성공은 인생의 과정이지 목적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오스트리아의 의사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 . .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확실하게 행동할 것을 권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정말로 성공이 찾아온 것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성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성공하시길 원하십니까?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 나라에서 한자리 하는 꿈을 잊으십시오. 상급도 잊으십시오. 기억할 것은 그리스도가 먼저 우리를 위해 섬기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일 자체가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을 기쁘게 가다보면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크게 하시고 높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그렇게 높이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