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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1년 초봄,모리 모토나리님의 손자 도키미치님이 태어나
모토나리님께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손자의 탄생소식을 접한 모토나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손주들이 이 가문을 오롯이 물려받는 것을 보고 싶으나
시절은 난세이고 나이는 먹어만 가누나.
눈앞의 적군도 적이지만 흐르는 세월도 적이로구나."
이때 모토나리님의 연세는 65세였습니다.
한편 아키국에서 나가토국에 입국한 다카우지라는 모리국 승려는
나가토국에 심어놓은 인맥을 통해
오우치 가문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불교도 무사들과 토호들을 만나며 공작활동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오쿠노미야 요시츠게라는 대담한 성품의 낭인무사를
불만세력의 대장으로 삼아 불만 세력을 모으게하고
모리 가문의 지원금을 세탁하여 출처를 확인할 수 없게 한 다음에
요시츠게에게 전달하여 지원하니
마침내 1561년 늦봄에 요시츠게는 나가토국에서 1000여명의 병력으로 거병하였습니다.
그동안 큐슈의 히고국에선
1560년 겨울에 거병한 아카가와 모치모토의 잇키군 1500여명이
히고국의 거성 구마모토성을 포위했다가
사쓰마국에서 출동한 이토 치카하라님 휘하의 이토군에게 급습당하니
구마모토 수성군도 협격하여 500여명의 병력을 잃고 퇴각하였습니다.
그 이후 잇키들은 히고국 산악지역에서 약탈로 연명하며 구마모토성을 공격하지 못하니
이에 모토나리님은 요시츠케의 닌자단에게 활동자금을 주어 파견하였습니다.
요시츠게는 히고국의 산적과 야쿠자들을 동원하여
치카하라님의 군대의 후방보급로를 습격하거나 전령과 종군상인을 살해하고
이토군 진영에 위장잠입하여
파괴 공작을 벌이거나 엉뚱한 정보를 전달하여 이토군을 히고국 남부에 묶어놓아서
궁극적으로 잇키군의 구마모토성 공격을 돕고자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잇키군이 움직이지 않자
모리 가문의 승려 다카오카가 잇키 수괴 모치모토를 찾아가 이유를 물으니
모치모토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이토 가문이 큐슈를 장악하고 아소교(크리스트교)를 전파한 이후
큐슈 각지에서 수많은 잇키가 일어섰으며
이 히고국에서도 예전에도 일어났었지만
사쓰마의 진압군을 막아내면 분고국에서 진압군이 출동하여 격파했었소.
우리는 그것이 염려되어 이곳에서 재정비하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오."
다카오카는 이런 상황을 모토나리님께 보고 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은 1561년 늦여름,
승려 유키아리가 모리 가문으로부터 지원받은 막대한 활동자금과
그 자신이 보유한 불도와 인맥을 바탕으로
분고국의 불교도들과 불만세력을 다시 모아서 잇키가 발생하게끔 유도하였습니다.
거기에 분고국의 잇키들과 히고국의 잇키들을 연결시켜
서로 각국의 이토군을 담당하기로 약조시켰습니다.
1561년 가을, 분고국의 잇키들은 분고국 거성인 후나이성 인근에서
휴우가국에서 북상한 이토군 2000여명의 공격을 받아 패퇴하고
겨울에 소탕당했습니다.
그러나 분고국의 봉기에도 신중하게 히고국 거성을 공격하지 않았던
히고국 잇키들은 1561년을 무사히 넘겼습니다.
그리고 모리 가문도 신중하게 큐슈 중부의 정세에 집중하되
병력을 함부로 움직이지 않아서
이토 가문의 의심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561년의 큐슈 중부의 잇키가
이웃국 주둔군의 개입으로 좌절되는 것을 겪은 모토나리님은
판을 더욱 확대하기로 결심하고
쥬코쿠와 큐슈 북부의 승려들과 닌자들을 동원하여
큐슈 중부 지역에 투입하고
재정 담당 가로들에게 큐슈 중부 지역 공작에 아낌없이 지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1562년 봄,명나라 황제가 파견한 칙사가 지쿠젠국에 당도하니
모토나리님이 직접 영접하고 일본을 영접한 이유를 여쭙자
칙사는 와코(왜구)가 명나라 절강지역을 노략질하다가
척계광 장군이 지휘하는 명나라 육군과 수군의 합동공격에 소탕되었다고 하고
앞으로 일본에서 단속하여 왜구가 명나라를 침략하지 못하게 하고자
입국했다고 전했습니다.
이에 모토나리님은 칙사 일행들이 교토로 무사히 갈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는 한편,
다카모토님을 통해 칙사 일행중의 상인들과 접촉하여
명나라와의 교역을 확대하고자 시도하고
칙사들과 의논하여 명나라 조정의 감합무역을 확대하고자 하는 청을 드렸습니다.
물론 칙사 일행에 대한 대접에 지원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지요.
마침내 칙사 일행이 무사히 교토에 가서 황제의 명을 전하고 무사히 귀국하였으며
그로부터 얼마지나지 않아 와코의 활동을 일본이 단속하는 조건으로
기존의 대명 감합무역을 확대하겠다는 명나라 조정의 공문이 일본에 전달되었습니다.
이에 교토의 아시카가 막부는 각 가문에 교역량을 배분하였는데
모리 가문은 교토에 많은 자금으로서 교역량을 이끌어내려고 했지만
아시카가 막부는 의도적으로 모리 가문에 적은 교역량을 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명나라 상인들은 명에서 제일 가까운 큐슈 북부에서 주로 거래하였고
각 가문의 교역품들은 결국 모리 가문의 해상로와 영지를 거쳐야
명나라와 교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 모리 가문이 사실상 명나라와의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모토나리님은 수군을 동원하여 해상무역을 방해하는 와코들을 단속하게 하고
단속으로 생계를 잃은 와코들을 농민이나 상인, 혹은 모리 가문의 군대로 육성할 방책을
가신들에게 연구하게끔 지시하셨습니다.
1561년 봄, 유키아리가 다시 분고국에서 공작을 개시했을 때,
분고국의 불교도들과 불만세력들은 거듭된 잇키의 진압으로
희망을 잃고 비관적,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에 유키아리는 분고국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벽보와 이야기를 퍼뜨렸습니다.
"큐슈에 코가 큰 벽안의 도깨비(서양인)들이 싸돌아다니더니
어느날 갑자기 이 세상에 신님은 오직 하나 밖에 없으며 다른 신님들은 악귀라고하고
우리 조상들도 악귀라 하고 심지어 섬기고 인사하는 우리들도 악귀라 하는구나.
나의 집,나의 땅,나의 재산,나의 자식,나의 아내를 빼앗으면 악당이고 원수인데
빼앗고 죽이는 원수를 사랑하고 모든것을 바치라하네.
불법에도 자비가 있다하나 자비가 평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네.
무도로서 바른 길로 이끄는 것 또한 자비일지니
그 길을 가다가 죽는다해도 지옥과의 작별이요,극락으로 여행가는 것이라네."
그리고 모리 가문에서 지원받은 자금을 바탕으로
불만세력을 설득하고 무장시키니
이에 잇키들은 "살아서 지상낙원을 만들고 죽어서 극락으로 가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봉기하였고
그 잇키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토군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모리 가문이 와코들을 억제하고 해상무역을 장려하자
상인들과 백성들이 바다를 안심하고 나닐 수 있게되었고
해상교통과 해상무역이 발달하여 인적,물적 교류가 촉진 되었습니다.
그과정에서 모리 가문은 그동안 전란으로 끊겨졌던
일본 동부의 소식망을 연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해서 알게된 가장 큰 소식은 모리 가문이 일본 서부의 실력자로 알려졌다는 것과
일본 동부를 장악한 거대한 가문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문은 한때 가마쿠라 막부를 장악했었던 호죠 가문 이었습니다.
호죠가문은 주변의 사다케 가문과 다테 가문을 멸문시키며 성장하여
다케다 가문을 밀어내고 이마가와 가문을 궁지에 몰아넣었으며
장차 상경할 것이라는 소문이 교토에까지 퍼져
아시카가 막부를 근심케하고 있다는 정보도 입수되었습니다.
이에 모토나리님은 아직 접하지 않은 호죠 가문이
언젠가 모리 가문을 위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562년 여름,분고국 잇키의 분전 소식이 히고국에도 전해지자
히고국 잇키들도 다시 일어나서 구마모토성을 도모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정보를 접한 모리 가문은 닌자들을 풀어
1년동안 히고국 남부에서 평정을 하고 있는 이토군을 교란하여
구마모토성의 수성군을 돕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한편 유키아리는 분고국의 잇키 유발 성공에 힘입어
휴우가국으로 내려가 잇키를 이끌어냈고
분고국의 잇키활동에 고무된 휴우가국의 잇키들도
분고국의 잇키들 못지 않게 용감히 싸우며
이토군을 괴롭히고 교통망과 연락망을 교란시켰습니다.
이러한 유키아리의 신출귀몰하고 교묘한 설법이
큐슈 전체뿐만 아니라 지코쿠에서도 알려져
불교도들은 그를 고승의 반열에 세우고 존경하였습니다.
유키아리의 명성에 다른 모리 가문 승려들도 분발하여
큐슈에서의 포교 활동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런데 유키아리 못지 않은 불도를 지녔던 다카오카 스님이
사쓰마국에서 불만세력을 모으던 중 치안을 강화하던 이토군에게 붙잡혀
이교도로서 모욕당하고 화형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에 유키아리를 포함한 승려들과 불교도들은 애도하고
더욱 포교를 강행했고 이에 대한 이토 가문의 탄압과 박해도 가혹해져갔습니다.
1562년 8월 보름,휴우가국의 잇키들이 이토군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분고국으로 가는 교통로를 막으며 진압군의 이동을 저지하고
사쓰마국의 다카오카의 처형과 모리 가문 닌자들의 활약으로
사쓰마국의 진압군이 사쓰마국과 히고국 남부에 머물러있는 동안,
분고국과 히고국의 잇키들은 각국의 거성들을 총공격하여
밤낮으로 공격을 계속하여 마침내 함락시키고 수성군을 전멸시켰습니다.
이로인해 큐슈 중부 지역은 잇키들이 장악하게 되었고
그것은 이토 가문과의 해상,육상 무역로가 끊어졌음을 의미 했습니다.
하지만 모토나리님은 이렇게 말슴하시며 아랑곳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큐슈의 우환을 제거할 수 있다면 한동안의 손해도 감수하겠다."
1562년 가을,모토나리님의 손자 요리자네님의 탄생 소식과 더불어
큐슈 중부 지역이 이토 가문의 수중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소식이
지쿠젠국에 계시던 모토나리님께 전해졌고
모토나리님은 즉각 지쿠젠국과 부젠국의 모리군을 히고국과 분고국으로 출격시켰습니다.
1562년 늦가을, 모토나리님이 후쿠바라 다메미츠와 함께 1800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히고국 거성 구마모토성을 포위하니
성을 점령한지 얼마 안되어 식량을 많이 비축하지 못하고
수성준비가 덜되어 있던 반란군은
이토군을 대하던 각오와 전의로서 출성하여 맞서싸우러 왔습니다.
모토나리님은 반란군의 전의와 사기가 드높고
기병부대가 많은 것을 주목하여
군대를 구마모토성으로 이어지는 도로 고개에 주둔시키고
창으로 무장한 아시가루들을 고개 주변 숲속에 매복시킨 후
고갯길에 궁수부대와 본진을 두고 반란군이 쳐들어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반란군 수괴 모치모토는 고갯길에 배치된 모리군의 배치를 확인한 후
모든 기병을 좌익으로 기동시켜 모리군 본진을 배후 공략케하고
반란군 본대는 갑옷과 장창으로 무장한 낭인들을 선봉에 세워
모리군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모리군 궁수 사정거리에 이르자 일제히 소리 지르며 돌격하니
모토나리님은 본진에서 말에 내려 의자에 앉아서 군대를 지휘했고
중앙의 모리군 궁수들은 반란군에게 화살을 퍼부은 다음 칼을 뽑아 맞서 싸웠으며
좌익의 아시가루들이 중앙의 반란군 보병들을 덮쳤고
배후 기동하는 반란군 기병들은
숲속에 매복해있던 모리군 아시가루들이 상대하여 격퇴하였습니다.
기병을 격퇴한 아시가루들이 반란군 배후로 이동하자
반란군은 무너졌고 모리군의 추격을 뿌리친 반란군 수괴와 얼마안되는 잔당들만이
구마모토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모토나리님이 반란군을 격파하고 구마모토성으로 군대를 몰아가서
구마모토성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시작하려고 할 무렵,
아키국에서 서신이 오니 그 내용이
장래 유망한 용감하고 지혜로운 무사를 선발하여 임관시키고자 하니
허락해달라는 것 이었습니다.
이에 모토나리님이 전령에게 묻기를
"이 서신이 오기전에
부젠국의 다카모토가 그자의 역량을 검증해보았을 터,
다카모토는 뭐라고 하더냐?"
라고 하니 전령이 대답하기를
"가독이 서신과 그자의 관한 신상명세를 확인하시고
장차 가문의 간성(방패와 성)을 맡을 수 있는 자라고 보증하셨습니다."
라고 하니 모토나리님이 말씀하시길
"다카모토가 보증했다면 충분할 터,
자세한 이야기는 다카모토에게 직접 듣겠다.
이러는 동안 이토군이 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라고 하고 포위와 공성전 준비가 끝나는 즉시 성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리군은 구마모토성을 공격하기 전에 전령을 보내어
수괴가 성을 바치고 할복하면 수성군을 모두 살려서 석방시키겠다고 제안하였으나
반란군 수괴 모치모토와 불과 50여명 밖에 안되는 그의 부하들은
"살아서 지상낙원을 만들고 죽어서 극락에 가자"는 구호를 외치며
전령을 사살하고 저항하자 이에 모리군은 화공과 집중사격으로서 제압하니
반란군은 전원 사살당하거나 타죽었고
모리군은 구마모토성을 함락시키고 히고국을 장악하였습니다.
잇키들이 전멸하는 광경을 보던 모토나리님은 다메미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종교를 믿는 자들은 결국 자신들을 위해 우리와 싸우고
아소교를 믿는 자들도 결국 아소를 위해 우리와 싸우고
이토나 오우치,다른 가문에 속한 자들도 속한 가문을 위해 우리와 싸우니
결국 천하는 잠재적인 적이란 말인가."
한편 지코쿠의 나가토국은 1561년에 잇키가 봉기한 이후,
한때 잇키들이 나가토국 거성 인근까지 진출했다가
갑자기 나가토국 남쪽으로 이동하여 항구와 농경지를 약탈할 뿐,
나가토국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모리 가문은 잇키들이 오우치군을 신중하게 상대하려고 한다고 판단하고
요시츠케의 닌자단을 파견하여 나가토국의 수성장 야시로 아키토키를 암살케 하고
수성군에게 비관적인 소식만 제공하여 사기를 떨어뜨리고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었습니다.
모리군은 나가토국의 급변에 대비하여
스오국에 다카가게님 휘하 1500명의 군대를 배치해두었습니다.
하지만 나가토국의 잇키들이 약탈만 일삼으며 거성을 공략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자
이상하게 여긴 모리 가문은 닌자들과 정보원들을 풀어
나가토국의 잇키들을 조사케 하였습니다.
그 결과 나가토국 잇키들이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
나가토국 공략은 잊고 약탈과 방화,살인,강간 등만 저지르고 다닌다는 정보를 얻게되자
다카가게님은 즉시 모토나리님과 오우치 가문에 서신을 보내어
동맹 오우치 가문의 영지 나가토국을 어지럽히는 악당들을 토벌하겠다고 밝히고
즉각 군대를 나가토국으로 이동시켜 요시츠케의 악당들을 공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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