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05. 18:37
강은교 시인
1945년 함남 홍원 출생 1968년 연세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 졸 1968년 9월 ≪사상계(思想界)≫로 등단 한국문학작가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수상시집 『빈자 일기』 『소리집』『붉은 강 』 『우리가 물이 되어』 『바람노래』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초록 거미의 사랑』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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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사랑법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그 소리는 늘 분홍색이다
가시금작화가 필 때면 전화가 오긴 했다,
전화를 기다릴 때면 유리창을 닦곤 했다,
유리창에 세상은 더 뽀얗게 보이곤 했다,
유리창을 다 닦으면 커튼을 내렸다,
귀퉁이가 다 닳아진 열쇠를 들고, 열쇠를 자물쇠 구멍에 쑤셔박았다,
곧 똑똑 소리, 나는 지나가던 바람의 양귀를 잡아 양탄자처럼 폈다,
지나가던 종소리도 붙잡아 라디오처럼 켰다,
그대가 나를 껴안고 가시금작화 핀 벼랑을 달렸다,
벼랑 밑 어딘가 던져 놓았을 닻을 찾아,
그것은 내가 만진, 만족스러운 최초의 꿈꽃,
가시금작화가 필 때면 거기에서 그것의 숨소리는
분홍색 혀를 달달 떨며 양팔 잔뜩 벌린채 파도 속으로 속으로 가라앉고 있을 것이다,
아, 전화가 왔다.
빨래 너는 여자
햇빛이 ‘바리움’처럼 쏟아지는 한낮, 한 여자가 빨래를 널고 있다, 그 여자는 위험스레 지붕 끝을 걷고 있다, 런닝 셔츠를 탁탁 털어 허공에 쓰윽 문대기도 한다, 여기서 보니 허공과 그 여자는 무척 가까워 보인다, 그 여자의 일생이 달려와 거기 담요 옆에 펄럭인다, 그 여자가 웃는다, 그 여자의 웃음이 허공을 건너 햇빛을 건너 빨래통에 담겨 있는 우리의 살에 스며든다, 어물거리는 바람, 어물거리는 구름들,
그 여자는 이제 아기 원피스를 넌다. 무용수처럼 발끝을 곧추세워 서서 허공에 탁탁 털어 빨랫줄에 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그 여자의 무용은 끝났다. 그 여자는 뛰어간다. 구름을 들고.
전화
아마, 다이얼을 돌려본 이들은 알 거예요. 그것이 어떻게 닿지 않는 것
을 닿게 하는지를. 뛰뛰거리는 신호음이 들릴 때면, 아 반가움, 그 사람
이 뛰어오고 있군요 ……가슴을 벌리고, 혀를 움칫거리며, 온몸의 동맥
과 정맥 들을 펄럭펄럭, 허파에 산소를 불러들이며 ……그러나 오늘은
부재, 저 공중을 건너 저 바람을 건너 저 안개를 건너 건너 아라비아 숫
자 여섯 싸늘하게 앉아 있을 뿐,
눈부신 섬, 당신의 뼈.
풀잎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지도.
늦도록 잠이 안 와
살(肉)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 않는 피(血)들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 수 있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별똥별
밤하늘에 긴 금이 갔다
너 때문이다
밤새도록 꿈꾸는
너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칼
이스탄불의 한 궁전에 가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
는 칼이 있었네.
손잡이는 푸른 에머랄드
수많은 진주가 뽀얀 안개를 만들며 칼을 호위하고 있
었네.
수많은 나그네들이 그 앞에 서 있었네.
아, 아름다워라. 나그네들의 붉은 입술에서 한숨과 함
께 탄성들이 솟아나왔네.
칼이 갑자기 일어섰네.
진주 허리를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했네.
칼은 진주보다도 더 빛나며
에메랄드보다도 더 빛나며
나그네들을 찌르기 시작했네
악, 악, 악, 악.
붉은 피들이 루비의 바위를 건너 흘렀네
그렇게 아름다운 허리에서 그렇게 날카로운 칼날이
일어서다니!
뽀얀 안개의 진주 앞, 우리 모두 푸른 나그네인 정오.
저 쪽
허공에서 허공으로 달리며 그는 말했네
1천 광년이나 1억 광년 저쪽에서 보면
이 부르튼 지구도 아름다운 별이라고
아무도 감동하지 않았지만
나는 감동했네
-뿌연 광대뼈와 흐린 눈의 우리도 뽀얀 살빛의 천사들처럼 저쪽에서 보면 아름다운 빛 속에 잠겨 있을 것이네
-이 모오든 시끄러움, 이 모오든 피튀김, 이 모오든 욕망의 찌꺼기들, 눈물 널름대는 싸움들, 검은 웅덩이들, 넘치는 오염들 … 몰려다니는 쥐떼들에도 불구하고
허공에서 허공으로 달리며
우리는 아름다운 별의
한 알의
빛이라고
그 나무에 부치는 노래
..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있을까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서서
찬비 내리면 찬비
큰 바람 불면 큰 바람
그리 맞고 있을까
맞다가 제 잎 떨어내고 있을까
저녁이 어두워진다
문득
길이 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