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미역국에는 맨드라미가 들어간다
안혜민
“바쁘지? 점심시간에 잠깐 문 앞에 나올 수 있어? 미역국 좀 끓였는데 갖다줄게.”
미역국을 만들고 가져다주는 수고로움을 하는 이가, 되려 공짜로 받아먹는 이에게 받을 수 있냐며 양해를 구하고 있다. 이 공정하지 못한 상황은 신기하게도 가족이라는 단어 앞에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어진다. 일 년 동안 병가를 낸 후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했고 복직을 했지만, 또 안 챙겨 먹을까 봐 또 아플까 봐 하는 엄마의 조바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조심스레 받아 든 냄비에는 온기가 가득 남아있다. 냄비 뚜껑을 살짝 열어보니 미역국의 풍성하고 고소한 냄새가 마술램프를 빠져나온 지니처럼 허공으로 한가득 펼쳐진다.
나는 한식을 넘치도록 잘 먹고 자랐다. 종갓집 장남인 아빠의 시골집에는 명절마다 제사마다 다채로운 음식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맏며느리였던 할머니와 또 그 며느리인 우리 엄마의 바쁜 손이 있었다.
이마에 다이아몬드 표시가 있는 반들한 조기, 아기 손처럼 끝이 오그라진 고사리, 빨간 바탕에 하얀 힘줄이 대리석 무늬 같은 고깃덩이……. 수많은 재료가 할머니와 엄마를 거치면 발색이 잘 된 수채화처럼 밥상 위에 하나 가득 그려졌다. 어떨 때는 장독대 주변에 난 풀이나 꽃도 생각지 못한 식재료가 되었다. 어린 나는 새콤달콤 무친 돗나물, 밀가루를 발라 튀겨낸 깻잎 꽃, 진달래 꽃잎으로 고명을 올린 지지미를 보고 세상에는 먹을 게 참 많다며 장독 사이사이를 깡총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장독대 한편에 올망졸망 심어져 있는 맨드라미가 미역국에 들어 있는 무엇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꼬불꼬불 두껍고 풍성한 꽃잎이 입체감 있게 한 몸통에 연결된 것을 보고 혹시 이게 미역귀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엄마의 밥상에서 나는 미역국을 가장 좋아한다. 특히 미역귀의 오독오독 쫄깃한 식감과 푹 고아진 부드러운 양지머리가 어우러지는 깊고 고소한 맛을 느끼고 있으면, 어느새 한 그릇이 뚝딱 없어졌다. 엄마를 따라 시골 5일장에 가면 거의 내 키만 한 진도각을 사서, 사극에서 본 긴 칼처럼 허리춤에 들고 왔다. 언뜻 무기 같기도 한 뻐센 미역이 엄마의 손을 거치면, 세상 맛있는 국이 되곤 했다.
엄마의 손맛은 학교 교무실, 과외 강사, 피아노 학원에까지 널리 퍼져나갔다. 주변 사람들이 돈 받고 반찬 좀 팔라고 하기도 했는데 엄마는 매번 그냥 인심이라면서 찬합 가득 음식을 나누어주셨다. 반찬을 나누어 받은 어른들은 너네 엄마는 저렇게 훌륭하신데 너는 왜 그러냐며 니가 열심히 공부해야지 하는 타박이 이어졌다. 나는 엄마가 베푸는 입장이면서도 도리어 우리 아이 잘 봐달라고 웃으며 굽신거리는 모습이 점점 싫어졌다.
나는 태생이 수용적이고 잔잔한 성격이라 조용히 학창 시절을 보냈다. 아파도 안 아파도 학교에 갔고, 밤늦게까지 야자를 했으며, 독서실에 갔다가 새벽달이 시릴 때쯤 퀭한 눈을 비비며 집에 돌아왔다. 그렇게 내 학창 시절도 십대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을 때였다. 밥 먹고 얼른 독서실가라, 밥 먹고 얼른 학원가라, 밥 먹고 얼른 공부해라 라는 엄마의 말이 며칠째 이어졌다. 아니 제발 그놈의 밥 소리 좀 그만하면 안 되냐고 우리 집에 밥 못 먹어서 죽은 귀신 있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내가 그때 진짜로 듣기 싫었던 건 밥 먹으라는 말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대학생이 되었고 졸업 후 회사원이 되었다. 나는 잦은 야근과 회식으로 지쳐갔고, 서른이 넘은 어느 날 회사를 그만두고 고시 공부를 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부모님의 반대가 필사적으로 이어졌고 나는 집을 나왔다. 그 후 내 밥상은 인스턴트 식품과 빨리 때울 수 있는 것들로 대충 채워졌다. 엄마는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밥 챙겨 먹으라고 하셨지만 나는 응 먹었어 알았어로 일관하며 통화가 길게 이어지는 것을 막았다.
그렇게 시험이 한 달 남짓 남은 어느 날, 나는 실신을 해서 병원에 실려갔고 영양실조와 대상포진이라는 병명을 듣게 되었다. 한달음에 달려온 엄마는 그 후 한 달간, 큰 냄비에 매번 다른 국을 만들어 고시원에 오셨다.
그렇게 임용 시험에 합격하고, 나에게 교사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일도 아이들도 좋아서 시작했지만, 거절을 못 해서 빚더미처럼 떠안은 업무량 때문이었을까, 더 잘하고 완벽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과로했나 하며 대수롭지 않게 들렀던 병원에서 나는 암 판정을 받게 되었다.
휴직계를 내고 장기 일부를 적출하는 수술을 했다. 코로나 19가 한창인 시기여서 암 병동 전체가 밀폐되었고 면회가 금지되었다. 수술 후 일주일 만에 보는 엄마의 얼굴에는 뭐라 한 단어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넘칠 듯 아슬아슬하게 담겨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딱 한 마디 하셨다. “고생했어. 밥먹자.”
식탁에는 미역국과 반찬들이 한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국그릇에는 미역귀가 가득하고 부드러운 양지머리가 먹기 좋게 손으로 찢어져 미역귀 주변을 두르고 있었다. 순간 목구멍에 뜨거운 돌이 울컥 얹혔다. 핑계를 대고 좀 이따 먹겠다고 얼버무리며 문밖에 나왔다.
마당에는 알록달록 여름꽃이 한창이다. 황토집 담벼락에 울멍줄멍 고른 듯 고르지 않은 듯 줄 서 있는 맨드라미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맨드라미 꽃잎이 조금 전 본 미역귀랑 꼭 닮았다. 그래서 어렸을 때 엄마한테 미역국에 맨드라미꽃이 들어가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장독을 넘어 다니며 상상을 펼치던 여자아이가 생각나 웃을 듯 울 듯하고 있는데 뒷마당에서 아빠가 나오신다.
“아궁이 불 때놨으니까 밥 먹고 좀 누워라.”
나는, 아픈 딸 때문에 6월에 불도 때셨냐고 말하고 싶지만, 맨드라미가 예쁘네…. 라고 엉뚱한 말을 한다.
“니 엄마가 너 퇴원하면 보라고 지난주에 꽃 잔뜩 심었어.”
수술 후 3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병원에 다니고 있고, 매번 피검사를 한다. 다행히 지금 내 혈액에는 암세포 대신, 엄마의 맨드라미 미역국이 만들어낸 건강한 혈장과 적혈구들만 흐르고 있다.
맨드라미의 꽃말은 시들지 않는 사랑이다. 엄마가 평생 미역국에 담은 영원한 사랑은, 꼬불꼬불 사이사이에 가득한 꽃잎처럼 내 안에 촘촘히 담겨있다.
ㅡ제19회 중봉조헌문학상 우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