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꽃 송화 /윤후명
꾀꼬리 울면 보얗게 날리는 송홧가루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이고 엿듣고 있다
-박목월, [윤사월]중에서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까지 통틀어 나는 시에 사로잡힌 몸이었다.
시인에의 길만이 꿈이요,보람이었다. 만약 시인으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이 삶이야말로 아무 가치도 없는 삶이라고 굳게 믿었다.
부친은 그렇게 기대를 저버리고 있는 나를 안타깝게 설득하려 했지만, 나는 막무가내였다.
대학에 들어갈 무렵, 집에서는 마차용 폐마(廢馬) 한 마리를 사서
여러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 찌꺼기를 날라다 돼지를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아 말도 없애고 마구간에 방을 들여 내 방을 만들었는데,
그 방에서 나는 밤새 시와 씨름하곤 했다. 그때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세 시인의 공동 시집인 [청록집(靑鹿集)]이었다.
지훈 선생을 뵙지 못한 것은 지금도 후회하고 있지만, 목월 선생으로부터는 직접 배우기도 했고,
두진 선생은 여러 번 찾아뵙고 훈도를 받고는했다.
사실 세 시인의 이야기는 [청록집]을 읽기 전에도 여기저기서 접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목월)나 "해야 솟아라"(두진)나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지훈) 하는 시 구절도 그러려니와,
그들이 만나서 교유하는 장면은 내게 눈물겨운 것이었다.
특히 목월 시인이 뒤에 "시로써 우리가 병들었더니 시로써 다시 서게 되었구나" 하고 말할 때,
나는 시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내 삶에 여간 위안을 받지 않았다.
문학평론가인 김인환도 지훈 선생에게 이 말을 들은 것을 감격적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이분들이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진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내게 던진 화두는
실로 어렵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내가 마구간 방에서 밤새 시와 씨름하곤 한 것은 이 화두와의 씨름이기도 했다.
진실이란 무엇일까. 나는 과연 진실한 것일까.
사실 나는 목월 선생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오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삶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비교적 빠르게, 우리 나이로 22세에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이 되었다.
그러고도 또 다른 많은 시인들을 공부하게 되었으나, 이상하게도 [청록집]의 세계를 떠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읊는 시 가운데 하나...... 목월 시인의[윤사월(閏四月)]......
음력으로 사 년마다 돌아오는 윤달인 윤사월에 소나무 꽃가루 보얗게 날리는 외딴 봉우리.
그 밑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가 문설주에 귀를 대이고('대고'가 아니라) 엿듣는 것은 무엇일까.
오랫동안 나는 이 시의 세계와 같은 곳에서 외롭게 살고 싶었다.
아니,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인이 된 지 십 이년 이라는 세월이 지나 다시 소설가가 되고 말았어도.
나는 외로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말았어도'라는 말 속에는,
예전 평생 시인으로 살려 했던 스스로의 약속이 희석되었음을 용서받겠다는 뜻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이' 시를 쓰던 초발심의 정신으로
내 문학의 길을 가겠다는 약속이야 늘 나와 함께 있다.
허세와 만용의 내 뒷덜미를 낚아채는 예전의 그 화두도 늘 나와 함께 있다.
진실이란 무엇일까. 나는 과연 진실한 것일까
봄이면 송홧가루 날리는 이름 모를 산길을 홀로 걷고 싶다.
외로움과 그리움에 젖어서 봉우리를 넘고 또 넘어서 어느 골짜기로 가고 싶다.
그때 송홧가루는 무슨 과자나 건강식품 따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겨울의 눈발이기도 하고, 여름의 빗발이기도 하고, 또 가을의 낙엽이기도 하다.
꾀꼬리 울음소리,뻐꾸기 울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낡은 산막(山幕)이라도 발견하면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리라.
내가 한 여자에게 어디론가 멀리 가서 아무도 모르게 숨어 살자고 했다면,
그 또한 이시의 영향 아래 한 말임에 틀림없다.
막막한 가운데 진정한 자기를 보며, 아울러 그 여자와 함께 막다른 세상 끝에 이르러 있다는 자각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이 아니런가. 백석의 시[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을 때마다,
눈 오는 날 소주를 마시며 '나타샤'와 함께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는
생각을 하는 구절에서 어느덧[윤사월]과의 호응을 보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러므로 내가 예전에 쓴 다음과 같은 시 구절도 여기 어디에 닿아 있는 게 아닌가 여긴다.
꽃 지는 골짝마다 너를 만나마
손에 돌도끼라도 갈아 쥐고
빈 흙집도 없는 골짝 외진 응달
뻐꾸기 울음이 지어놓은 응달까지 내달아
샅샅이 만나 얽히고 설키마
봄이면 어김없이 송홧가루 날리는 산길에 마음이 막막하여 황홀하다.
그러고 보니 지난 봄은, 아아, 윤사월이었구나.
첫댓글 나는 과연 진실한가..얽히고 설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