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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나는 주인이 아니라 종이며, 내게 부여된 역할을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입니다!
오늘 요한 복음사가는 그 유명한 세례 원조 논쟁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원조 논쟁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분야에 적용됩니다. 새로운 이론이나 학설에 대한 최초 지평을 개척한 사람은 역사에 길이 남습니다. 기술 분야에서 특허를 낸 사람은 특허청에 공식적으로 등록되어, 사용하려면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한 음식단지에 갔다가 요란스런 간판들을 보고 좀 웃었습니다. 그야말로 ‘원조논쟁’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한집 간판이 50년 전통의 원조라고 강조하고 있었는데...조금 더 가니 원조도 모자라 ‘진짜 원조’라고 강조점을 뒀더군요. 좀 더 지나니 그것도 모자라 ‘진짜 오리지널 원조’라고 떡하니 붙여놓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원조’에 대한 집착은 각별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 역시 한때 원조 논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입장에서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세례 하면 당연히 자신들의 스승인 요한이었습니다. 이름도 세례자 요한이지 않습니까?
세례자 요한은 한때 전국민적 세례 갱신 운동을 전개하며 전국구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물로 세례를 받았고 그의 거침없는 외침에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에게 인품에 매료된 수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났으며 ‘세례자 요하 당(黨)이라고까지 불렸습니다.
한때 그렇게 잘 나가던 스승 세례자 요한이었는데...요즘은 파리만 날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최근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훨씬 강력한 빛과 존재감으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신 예수님이었기에 순식간에 전세는 기울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얼마나 당혹스럽고 또 한편으로 억울했으면 이런 표현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요한 3,26)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보다 늦게 개업해놓고 세례 베푸는 일에 있어 더 큰 성공을 보이는 예수님에게 일종의 반감까지 지니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상황이 그런데도 스승은 별 위기감이나 전세를 뒤집을만한 묘안도 내놓지 않으니 더 불만이 고조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세례자 요한이 보인 태도에 우리의 시선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쇠락과 반비례해서 급격히 떠오르는 예수님의 존재감 앞에 세례자 요한은 전혀 동요되지 않습니다. 억울함이나 적개심도 품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자신 사이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 원조 논쟁 앞에서 조금도 망설이거나 그 무엇 하나도 감추지 않고 명백하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7-30)
요한은 이제 자신이 무대에서 내려올 순간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예측했습니다. 자신은 주인이 아니라 종이며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신원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세례자 요한의 뇌리 속에 박혀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참으로 위대한 인물인 것은 분노하고 억울해하면서 무대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경축하면서 무대에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우리는 구세주 예수님을 향한 한없는 존경심과 깊은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구세주를 위한 자신의 퇴장 앞에서 그는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행복해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물러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3,22-30: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우리는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아름답고 겸손한 자세를 볼 수 있다. 즉,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때 사람들이 예수께로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 요한에게 불평한다. 그러나 요한의 답변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답변으로써 3가지를 설명한다.
우선은 세례자 요한은 사실상 자신의 위치가 하느님의 단순한 전달자며 앞으로 오실 더 크신 분을 위한 선구자요 예비자로 보냄을 받았을 뿐, 그 이상의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킨다.
둘째로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 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새로이 나타난 선생이 더 많은 제자와 더 많은 개심자들을 얻고 있다면, 그것은 요한에게서 사람들을 빼앗아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요한의 모습이며, 하느님 앞에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자기들과 하느님은 너무나 밀접한 인연으로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그 관계를 신랑 신부의 혼인 관계 인연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을 신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신부로 표현했고, 이러한 인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의 신을 따를 때는 마치 정혼한 여인이 혼인한 계약을 위반하여 부정의 죄를 범하는 것으로 탈출 34,15; 신명 31,16; 시편 73,27 등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랑이요, 이스라엘 백성은 신부라는 것이며, 세례자 요한은 신랑과 신부를 맺어주는 연결자이며 신랑과 신부를 함께 모시는 사람으로서 혼인 잔치를 주재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 자신이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면서 그 신랑을 신부에게로 맞아들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임무는 끝났으니 기꺼이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무대 중심에서 물러난다는 것이다.
즉 요한의 사명은 이스라엘과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 그리고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이스라엘 사이에 혼인 준비를 하는 것으로서 그 사명이 끝났을 때 자신은 뒤로 사라지는 것이 그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더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는 것은 좌절과 질투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자기의 임무를 다했다는 기쁨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들이 따르게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 오늘 복음에 나타난 요한의 참된 겸손의 자세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삶을 본받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학창 시절의 사회 친구 중에는 벌써 희망 퇴직한 친구들이 꽤 됩니다. 회사에서 희망퇴직을 권했고, 이제 이 회사에 자기 자리가 없는 것 같아서 퇴직하고 제2의 인생을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자기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피하는 일자리만 있다면서 씁쓸한 표정을 짓습니다.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50대에 다른 직업을 알아봐야 한다는 것이 참 속상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80이 넘는 나이임에도 서로 데려가려고 노력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최강야구’라는 프로그램이 인기입니다. 이 최강야구의 감독이 바로 80대의 김성근 감독님이십니다. 최강야구 단장이 직접 찾아가 “감독님, 우리 좀 살려주십시오.”라고 부탁했고, 그래서 80대에도 취업에 성공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80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80대에도 사람들이 불러줄까요? 80대에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려면 지금 자리에서 일류, 즉 그 누구도 대치할 수 없는 모습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남들 만큼만 살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기의 고유함을 찾기보다 남들 따라 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면 끝까지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다르게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나를 대치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남처럼’이 아닌 ‘나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고유함은 주님 안에서 그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의 뜻에 집중할 때, 나의 고유함은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던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께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받던 사랑과 존경이 이제 예수님께로 건너가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인기는 점점 줄어들고, 역사 안에서 사라지는 것만 같습니다.
원조 맛집이 있는데, 그 옆에 똑같은 메뉴로 식당이 생겼습니다. 원래 원조 맛집이 더 장사가 잘될 것 같지만, 오히려 나중에 생긴 집으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입니다. 원조 맛집의 주인은 어떤 마음이 들까요? 옆집이 장사 잘된다고 기뻐할까요?
세례자 요한 역시 화가 날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고유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이라는 자기 고유함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 사람들이 가는 것을 보고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자기 목적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간직할 수 있으며, 주님 뜻에 따라서 자기 고유함을 완성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자연이 하는 일에는 쓸데없는 것이 없다(아리스토텔레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1요한 5,14)
우리가 청하는 것들은
대부분
세상에 있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귀한 자녀들에게
하늘의 신비를
다 내어주고 싶어 하시지만
우리가
하늘에 있는 것들을
청하지 않고
세상의 것들을 청하고 있으면
받을 길이 없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세례자 요한이 스스로를
빛이라고 얘기하지 않고
단지 빛을 증언하러 왔다고 하듯이
우리 역시도 내가 잘나서,
내가 능력이 많거나 특출나서
존재 자체로 빛이 나는 게 아닙니다.
빛이 먼저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빛을 내가 품고 있기 때문에
내가 빛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도 세례자 요한처럼
빛을 받은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
빛을 증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빛을 잃어버렸거나
혹은 아예 빛이 꺼져있다면
내 삶으로 빛을 증언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으로 증언하고 증거하며
선포하고 있는지 제 삶을 돌아봅니다.
하느님을 ‘증언’하고 ‘증거’하고 ‘선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제 남은 삶의 ‘사명’임을 잊고 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추위에
떨어본 사람이
추위에 떠는
이웃들의
목소리를 듣고
따뜻이
그들에게
응답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우리가 기쁘게
계속할 수 있는
것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힘을
받기 때문입니다.
파견된 사람의
기쁨이며
파견된 사람의
의미입니다.
의미있는
일을 하고
의미있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 세례자도
세례를
베푸십니다.
삶을 차지하는
사람은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려 합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가장 큰 삶의
기쁨입니다.
가장 큰 기쁨은
우리를 충만한
삶으로 이끕니다.
충만한 삶이란
하느님께서는
점점 커지시고
우리는 점점
작아지는
은총의 삶입니다.
참되신
하느님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참되신
하느님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참되신
하느님께서는
또한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걸어가는
것이 삶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목소리를 서로
주고받으며
이 일을 계속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서로의
목소리에서
오늘의 복음을
듣고 만나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오늘의 복음은
우리의 생활에서
가장 의미있는
나눔입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5,14-2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14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15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16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17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18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19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20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21 자녀 여러분,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22-30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세례를 주셨다.
23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 물이 많아, 거기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가서 세례를 받았다.
24 그때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25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26 그래서 그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27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2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29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30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