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학계가 최근 몇년간 중국과 공동으로 추진해온 長江유역 유적지 발굴과 관련해 흥분하고 있다. 그들은 長江문명을 세계 4대문명에 필적하는 세계 最古의 문명으로 보고 일본의 야요이문화도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직접 長江 유역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해석을 내리고 있다. 長江 유역의 유적 발굴에 직접 참가했던 일본 학자들의 좌담과 국내 일본 고대사 연구자의 반론을 함께 게재한다.
■ 좌담 참석자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작가)
야스다 요시노리(安田喜憲·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교수)
사토 요이치로(佐藤洋一郞·靜岡大學 조교수)
우메하라 장강(長江·揚子江)문명이라고 하면 아직 들은 적도 없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중국의 고대 문명에서 먼저 떠오르는 것은 황하 문명이다. 그런데 최근 발굴조사에 의해 장강 유역에 아무래도 도시 문명이 존재했던 것 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거주했으며 왕궁과 제정전(祭政殿)을 쌓고 훌륭한 옥기(玉器)를 만들었다. 앞으로 10년쯤 지나면 나는 장강 문명이 4대 문명에 첨가되어 역사 교과서에도 실릴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장강 문명의 발굴에 일본이 깊이 관여해 왔다는 것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1996년 중국과 공동으로 장강문명학술조사단이 장강 상류, 쓰촨(四川)성의 용마고성보돈(龍馬古城寶墩) 유적을 발굴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1997년부터 올해에 걸쳐 문부과학성의 ‘장강문명의 탐구’ 프로젝트가 중심이 되어 장강 중류 청터우산(城頭山·湖南省 洞庭湖 주변) 유적을 발굴해 왔다. 야스다씨는 특히 양쪽 발굴작업에서 모두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사토씨는 농학 전문가로서 발굴팀을 지원했다.
야스다 좀처럼 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청터우산에는 매년 70명의 일본인이 바다를 건너가 4년 동안이나 발굴조사를 했기 때문에 환경고고학자로서는 정말 큰 행운이었다.
사토 동감이다. 청터우산 유적이 있는 후난(湖南)성의 겨울은 춥고 침낭 속에서도 꽁꽁 어는 나날이었지만 그 지역 사람들이 아낌없이 협조해줘 매우 감사한다.
우메하라 청터우산 유적의 발굴도 지난 3월 일단락 됐다. 그래서 이번에는 여러분과 함께 장강 문명의 매력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야스다 우선 언급하고 싶은 것은 장강 문명이 4대 문명과는 상당히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메소포타미아·이집트·인더스·황하 문명의 4대 문명은 모두 밀과 목축을 생업으로 했던 문명이다. 그런데 장강 문명은 벼농사와 어업을 생업으로 했다. 그래서 장강 문명을 4대 문명과 나란히 ‘문명’이라고 인정해야 할지 안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만약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게 된다면 세계 유일의 벼농사 문명의 발견이 될 것이다.
사토 밀에 비해 쌀은 같은 양으로 인구를 부양하는 능력이 크다. 벼농사 지대는 밭농사 지대보다 인구를 많이 부양할 수 있기 때문에 문명을 만드는 조건으로는 오히려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장강 중류인 湖南省 청터우산 유적지. 원형의 유적지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집단적 논농사의 흔적과 함께 열주회랑 건축양식의 왕궁과 신전이 발굴됐다.
天照신앙의 起源
우메하라 게다가 연대가 상당히 오래 됐다. 전성기가 약 5,000년 전이었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이 될지도 모르겠다. 야스다 지금까지의 발굴조사를 보면 기원전 3,000년 전후 장강 중류부터 하류에 걸쳐 성벽을 가진 도시가 다수 존재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졌다. 지금까지 세계 최고라고 일컬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이집트 문명 역시 약 5,000년 전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장강 문명은 거의 같은 정도로 오래 됐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고고학계에서는 벼농사 어로민(魚勞民)이 ‘문명’을 갖는다는 발상은 없었다. 문명은 반건조 지대의 빵(밀)을 먹는 밭농사 목축민의 것이고, 질퍽질퍽하고 귀찮은 벼농사 지대는 문명과는 인연이 없는 시대가 오래 계속되었다고 생각됐다. 이런 선입관은 서구 중심의 문명사관이 원인이지만 사실은 중국에서조차 오랫동안 남방을 야만 취급했던 역사가 있다. 그 때문에 장강 유역의 강남 지방은 고대로부터 미개의 대삼림이 펼쳐져 있을 뿐이라고 생각되었다.
우메하라 초(楚)나라의 항우가 한(漢)나라 유방과의 싸움에서 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항우도, 유방도 사실 강남 출신이었는데 전쟁에 진 초나라는 적군이 되었다. 그후 유방이 장안(長安)에 수도를 설치했기 때문에 강남지방의 국가, 이를테면 초·오(吳)·월(越) 등은 야만족이 사는 국가라는 생각이 ‘사기’(史記) 이래 상식이 돼버렸다.
야스다 강남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2세기 송(宋)나라가 항저우(杭州)로 천도하고 나서다. 그래서 미개지역이라고 생각하던 지역에 사실은 고대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세계사를 뒤흔들 가능성도 있다.
우메하라 그렇게 된다면 대단한 발견이다. 먼저 철학자인 내가 어떻게 장강 문명에 관여하게 되었는지 설명하겠다. 장강 하류의 허무다이우(河姆渡·浙江省 紹興市 근처) 유적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91년이다. 호화 여객선 ‘아스카’(飛鳥)에서 견당사(唐代 일본 사절단)의 루트를 더듬어 가는 투어가 있어 나도 참가했다. 그 무렵 나는 조몬(繩文) 문화의 매력에 빠져 있어 오카모토(岡近)와 나란히 ‘조몬삼우오’(繩文三羽烏)라고 불릴 정도였다(웃음). 그래서 야요이(彌生) 문화의 루트인 벼농사 문명 등은 정직하게 말하자면 따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닝보(寧波)에 도착한 뒤 허무다이우 유적에 가서 깜짝 놀랐다. 눈이 확 뜨였다. 허무다이우 유적은 7,600년전 대홍수로 인해 토사에 묻혔던 농가의 유적이지만 거기에는 내가 자란 치다(知多) 반도의 농가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광경이 있었다. 집의 중심에 토방이 있고 볏단이 죽 늘어서 있었다. 게다가 누에를 키우고 있었던 것처럼 누에의 그림을 그린 토기가 있고 많은 직조기도 발굴되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어릴 적 추억이 일시에 되살아났다. 당시, 고향의 농가에는 비좁고 답답한 누에 선반이 죽 늘어서 있었다.
사토 내가 처음 허무다이우에 갔던 것도 1991년이었다. 그때 벼농사의 기원은 인도의 아셈 지방과 장강 상류의 윈난(雲南)성 주변이라는 것이 가설이었다. 그것이 3,000년전 장강 하류로 전해지고 2,000년 전에는 일본으로 전래됐다고 전문가들은 누구나 믿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의 논문을 보면 장강 하류에서 발견된 쌀이 훨씬 오래 됐다. 그래서 허무다이우에 조사하러 갔던 것이다. 거기서 나는 원종(原種)인 야생 벼를 발견했다. 원종이라는 것은 여기서 누군가가 야생 벼를 작물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장강 하류 良渚 유적에서 발굴된 옥으로 만든 祭器. 직사각형의 ‘琮’이라 불리는 玉器로 땅을 상징한다.
일본인이 發掘한 이유
야스다 허무다이우 유적은 장강 문명의 전단계 유적이지만, 일본 문명의 루트인 것은 우선 틀림없다. 예를 들어 후쿠이(福井)현에 토리하마(鳥浜) 패총(貝塚)이라는 조몬시대의 유적이 있지만 이 발굴물을 보면 허무다이우로부터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녹각부(鹿角斧·사슴뿔로 만든 손도끼)는 허무다이우의 것과 꼭 닮았고, 어느쪽 유적이나 표주박이나 들깨·콩류를 재배했던 흔적이 발견된다.
사토 벼의 종류에는 크게 나눠 자포니카와 인디카가 있다. 장강 유역에서 발견된 벼는 DNA 레벨로 조사해 보면 쟈포니카다. 일본 쌀의 루트는 장강 유역에 있다.
우메하라 허무다이우에는 오륜(五輪)인 태양을 새가 양 겨드랑이로 안은 그림이 상징적인 심벌로 사용되었고, 그들이 얼마나 태양을 숭배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 태양신앙도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 있다.
야스다 장강 유역 사람들은, 태양은 새에 의해 옮겨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허무다이우보다 좀 시대가 내려가지만, 지금부터 3,700년 전의 삼성퇴(三星堆:장강 상류 四川省 廣漢市) 유적에서도, 부상(扶桑)의 나무에 머물렀던 아홉 날개의 까마귀가 태양을 운반하는 문양의 청동제 조각이 발견되었다. 벼농사와 태양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벼농사와 함께 태양신앙이 일본에 들어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일본에서 태양신인 ‘아마데라스 오미까미’(天照大神) 신앙이 성행하게 된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우메하라 그렇다고 해도 50년 전의 일본 농촌과 같은 광경이 7,600년전 장강 하류에 있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직관적으로 ‘이처럼 장강 유역에서 옛날부터 벼농사가 발달했다면 그 위에 고도의 도시문명이 발달되지 않았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직관은 학문의 세계에서는 어쩐지 수상쩍다고 생각되기 쉽겠지만 나는 모든 발견에는 오리구치 시노부(折口信夫·일본 국문학자, 민속학자)가 ‘환상’이라고 명명한 분방한 상상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장강 문명의 존재도 당초에는 누구도 믿지 않았지만 지금은 중국 학자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최근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발언을 했을 정도다.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 유적 발굴에 성공한 것도 ‘호메로스’의 시를 믿은 환시(幻視)의 힘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사토 1991년 이후, 장강 유역의 발굴이 진행되어 벼농사의 기원은 상당히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허무다이우 유적으로부터 더 거슬러 올라가 1만2,000∼4,000년 전에는 장강 중류 지역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을 알렸다. 보리 재배의 기원이 1만2,000년 전이라고 하기 때문에 현재의 연구는 쌀이 보리보다 오래 되었다는 것이 된다.
우메하라 나는 아시아의 문명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허무다이우 뒤에 역시 장강 하류의 량주(良渚·浙江省 杭州 부근) 유적으로 가면 이것이 또 아주 훌륭하다. 량주 유적은 약 5,000년 전부터 4,000년 전의 유적이지만 이미 복수의 도시를 형성하고 있고, 이것이 모두 성채(城砦)도시다. 필시 장강 하류의 정치센터였던 것으로 본다. 같은 시기 장강 중류에 발달했던 스자허(石家河) 유적과 함께 이것은 장강 문명의 중심을 이루는 대규모 유적이다.
량주에서 내가 무엇보다 마음을 빼앗긴 것은 묘지에서 발견된 옥이다. 중요한 옥은 ‘종’(琮:정사각형의 옥을 겹쳐 가운데를 파낸 옥기. 땅을 상징)과 ‘월’(鉞:도끼)과 ‘벽’(璧:푸른색의 납작한 옥기로 하늘을 상징) 등인데 모두 제기(祭器)다. ‘종’은 사각에 둥근 것을 끼워 넣은 문양이 몇층이나 이어져 있다. 이것은 정신적인 가치를 나타낸다고 본다. ‘월’은 큰 도끼 모양으로 왕권을 상징한다. 한자 기원의 권위자인 히라카와(白川靜)씨에 따르면, 그 형상이 ‘왕’이라는 글자의 어원이라고 한다. 또 ‘벽’은 납작하고 둥글며 이것은 완벽하다는 말로 나타나듯 후세까지 중국 사람에게 사랑받았다.
옥은 돌을 연마해 부각(浮刻)을 주었는데, 예술적으로도 상당히 세련되었다. 구멍이 있는 옥그릇 가운데로 빛을 쬐면 투명하고 그 아름다움을 비할 데가 없다. 연마와 부식(腐食)이라는 고도의 기술이 응용되고 있다. 옥은 최고의 예기(禮器)라고 공자가 말했지만 이 량주 지역이 옥 문명의 근원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
야스다 량주를 본격적으로 발굴한다면 옥기는 산처럼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중국은 아직까지도 지극히 일부만 발굴했다.
우메하라 들으니 돈이 모자란다고 한다. 돈을 가지고 오면 발굴하겠느냐고 물었더니 거절했다. 그래서 량주 유적의 발굴계획은 잘 진행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량주 대신 청터우산 유적의 발굴을 인정받았다. 청터우산 유적은 약 6,400년전 장강 중류지역의 유적으로 량주나 스자허 직전의 것이지만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사실 여러 가지 수확이 있었다. 나는 현장에 간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분께 그 이야기를 듣고 싶다. 먼저 무엇이 발견되었는가.
야스다 청터우산 유적은 주변을 해자(濠)로 둘러싼, 직경 360m 규모의 작은 원형 유적이다. 왕궁과 신전이 있었고 그것을 둘러싼 높이 4m의 성벽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도시로서 최소한의 요소를 갖춘 최초의 도시 유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중요한 것이 동문(東門)의 배후에서 발견된 제단이다. 여기에서 대량의 볍씨를 발견했다. 제단 앞에는 작은 논의 흔적이 있어 아마 여기서는 풍년을 비는 의식이 거행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천황이 거행하는 니이나메사이(新耆祭·천황이 그해의 수확을 기뻐하고 다음해 풍년을 기원하는 發儀) 같은 것이 행해지지 않았을까 상상하고 있다.
사토 신기제의 기원이 장강 문명이라면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지금 조사하고 있다. 천황은 모내기 할 때 찹쌀과 멥쌀을 양쪽에 심기 때문에 청터우산에도 찹쌀이 없었는지 조사하고 있지만 아직 확인할 수 없다. 우메하라 ‘백인일수’(百人一首)의 첫번째 노래는 텐치텐노(天智天皇:7세기 일본 천황으로 그의 재위기간중 백제가 멸망해 대량의 유민들이 일본에 건너가 정착했다:편집자) 모내기를 하는 모습을 노래한 것이다. 최고권력자가 스스로 노동하는 것은 벼농사 민족들의 공통적인 사상일지도 모르겠다.
왜 단풍나무가 사용되었나
야스다 제단과 반대되는 형태로 왕궁이라고 여겨지는 건물의 흔적도 발견됐다. 사방 13m의 작은 건물이지만, 열주회랑(列柱回廊)이라는 건축양식이 사용됐다는 점이 흥미롭다. 열주회랑이란 건물 주위에 기둥을 늘어놓고 그 위에 지붕을 올리는 양식으로, 그리스 신전에서 사용된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토호쿠(東北)예술공과대학의 미야모토 초지로(宮本長二郞) 선생이 보고 분명해졌다. 더욱이 왕궁의 동쪽에서는 제정전(祭政殿)도 발견되었다. 정전(正殿) 외에 전전(前殿)이 있고, 양 옆에는 협전(脇殿)이 있는 본격적인 모습이다. 신전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메하라 늘어선 기둥의 소재는 무엇인가.
야스다 단풍나무과다. 기둥 자체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많은 나무조각이 발견되었고 그 80% 이상이 단풍나무과였다. 왜 단풍나무과뿐일까. 발굴을 시작했을 무렵 이것이 최대의 의혹이었다. 나루토(鳴門)교육대학의 요네노부 히토시(米廷仁志) 박사가 여러 실험을 거쳐 단풍나무과는 석기로 가공하기 쉬운 면이 있음을 발견했다.
우메하라 구체적으로는 어떤 종류인가.
사토 조롱나무 종류다. 단풍나무처럼 큰 잎이 달렸지만. 가을에는 새빨간 단풍이 들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가로수로 자주 사용된다.
야스다 일본에서는 사라졌지만 중국 남부에는 널리 분포되어 있다. 황거(皇居)에는 중국의 단풍나무가 있는 것 같더라.
우메하라 그러면 농업에 쓰는 도구도 단풍나무로 만들 수 있는가.
야스다 도구나 건물 모두 단풍나무는 아니라고 본다. 그 점은 일본의 조몬 문화가 밤나무에 구애받는 것과 비슷하다. 거기까지 단풍나무에 구애받고 있다면 당연히 단풍나무에 관한 신화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해 중국의 소수민족을 조사해 보았다. 그랬더니 현재 윈난성이나 구이저우(貴州)성에 있는 묘족(苗族)이 지금도 단풍나무를 숭배하는 것을 민속연구가인 하기와라 히데로(萩原秀三郞)씨의 지적으로 알았다. 그들은 마을 한가운데 있는 노생주(蘆笙柱)라는 단풍나무를 자신들의 생명수(樹)라고 믿고 있다.
묘족에게는 이런 신화도 남아 있다. 북방에서 온 황제(黃帝)와 그들의 선조가 싸웠을 때 모두 목이 베어졌고 그 붉은 피가 단풍나무의 빨간 잎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청터우산에 있는 유적은 묘족의 선조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북방의 황하 문명에 의해 멸망하여 난민으로서 윈난과 구이저우의 오지로 도망쳐 들어간 것 아닌가 라고 여기고 있다.
청터우산 유적에서 발굴된 6,400년 전의 볍씨와 소성벽돌 형태의 紅燒土.
燒成벽돌을 둘러싼 논쟁
우메하라 소성벽돌을 깐 도로도 발견됐다고 한다. 소성벽돌은 4,500년전 인더스 문명이 세계 최고라고 하지만, 이번 발견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20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여러 가지 이견이 있는 것 같은데 실제는 어떠한가.
야스다 소성벽돌은 도로뿐만 아니라 제정전과 왕궁의 마루 밑에도 깔려 있는 것으로 발견됐다. 일본의 한 고고학자는 소성벽돌이 아니고 홍소토(紅燒土)라고 한다. 홍소토라는 것은 지금까지 소수민족들이 사용하고 있지만 질퍽하고 습한 땅에 나무를 깐 후 불을 붙여 단단해진 흙이다. 그들은 홍소토를 마루로 해서 집을 지었다. 우리도 처음에는 홍소토라고 생각했지만 교(京)세라총합연구소의 와타라이 모토히코(渡會素彦)씨가 조사했는데 외부와 내부 모두 600도 이상의 열로 거의 균일하게 불태워졌다는 결과가 나왔다. 홍소토는 내부까지 불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벽돌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비판 또한 대단했다.
사토 화전(火田)에도 나무를 베고 풀을 깔아 불태우지만 3일이 지나면 풀의 싹이 나온다. 이렇게땅의 표면을 아무리 태워도 그 조금 아래 부분은 100도까지 가지 않는다. 남김없이 태우지 않으면 내부까지 600도는 결코 되지 않는다.
야스다 일본에서는 맹렬한 반발을 받았지만 예전에 베이징(北京)대학에서 일·중 공동심포지움을 열었을 때 공동연구자인 후난성문물고고연구소의 허지에쥔(何介鈞) 선생이 “1994년의 청터우산 유적 발굴때 상당히 아름다운 부조가 새겨진 벽돌이 나왔다”고 발표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우메하라 중국 학자가 인정하지 않는 한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일본 학자들의 전통적인 학문 자세이기 때문에, 중국측이 인정하면 청터우산의 소성벽돌을 둘러싼 논쟁도 서서히 가라앉을지 모른다.
야스다 청터우산 유적에서 왕권의 탄생이 엿보이는 유적이 확인된 것도 중요한 발견이다. 조금 전 언급한 왕궁과 제정전도 큰 실마리 중 하나지만, 커다랗고 둥그런 환호(環濠)와 관개시설도 발견됐다. 한 도시의 관개용수를 컨트롤하는 나름대로 강력한 권력이 존재했다고 생각된다. 청터우산 유적이 시작된 것은 6,400년전, 제정전이나 왕궁이 생긴 것이 5,200년 전이다. 왕권이 확립되기까지 1,20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중국에서는 청터우산 유적 이전에 이같은 왕권의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우메하라 의외로 중요한 유적인 것 같다. 어쩌면 청터우산이 최초의 도시문명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도 높지만 실제는 어떠한가.
야스다 도시문명을 앞장선 것임에는 틀림없고, 량주나 스자허라고 하는 장강 문명 전성기의 거대도시에 큰 영향을 준 것도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커다란 의혹이 있다. 량주나 스자허의 시대가 되면 웬일인지 급격히 도시가 거대화된다. 청터우산은 10만평 벼농사 규모이지만 스자허 유적은 50만m2, 량주 유적에 이르러서는 중심의 기단(基壇), 막각산(莫角山)만도 30만m2나 되기 때문에 유적군(群) 전체의 분포 범위는 4,000만m2에 달할 것으로 본다. 더욱이 그곳은 수도권의 메가로폴리스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릴 정도였다.
우메하라 량주는 어쨌든 큰 것 같다. 제사가 거행됐던 대막각산(大莫角山·莫角山의 위에 만들어진 基壇)은 동서로 166m, 남북으로 96m나 된다. 나도 몇번 가보았지만 너무 커서 인공적인 산으로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진시황의 아방궁과 비교할 정도로 거대한 유적이다. 그 기단을 만드는 데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인력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야스다 동시대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있는 거대도시 우루나 우루쿠도 그렇지만 어째서 4,500년 전에 갑자기 메가로폴리스를 형성하고 번영의 정점을맞게 되었는지 정말 궁금하다. 거대한 왕권이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 도시국가 연합체가 생겨난 것인지, 그 변화를 잘 모르겠다.
우메하라 어떻게 봐야 하나?
야스다 어디까지나 추리이지만, 북방 문명의 영향이 다소 있었던 것이 아닐까 보고 있다. 즉, 장강 문명은 순수하게 남쪽만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북방의 밭농사 목축민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 영향이 거대한 왕권을 낳아 거대도시의 건설로 이어졌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량주 유적에서 용의 모습을 모티프로 한 옥이 발견된 것도 바로 이 시대다. 용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용의 모습을 볼 때 양자강 악어가 모델인 남방기원설도 유력하지만 나는 반대로 북방의 숲과 초원의 틈새에서 생겼다고 생각한다. 자세히 조사해 보면 가장 오래된 용은 멧돼지·말·물고기 등의 복합동물이 원형이 되고 있다. 즉, 량주에서 용의 문양이 발견되었다면 그것은 북방 문화가 전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토 논을 이용한 벼농사가 시작된 것도 량주의 메가로폴리스 시대와 같은 시기다. 그때까지 습지대에 적당히 씨를 뿌려 벼를 재배했지만, 이 무렵이 되자 네모진 구획을 만들어 논농사를 하게 된다. 이렇게 착실하고 꼼꼼한 일은 어디까지나 북방의 근면한 사람들이 한 것 같다. 뒤에 바둑판 모양의 도시를 건설하는 그들의 사상과 어딘가 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논농사의 기원은 어쩌면 남과 북 문명의 접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야스다 도시 건설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다. 우선 강력한 왕권이 확립되고, 그후 서민들에 대한 착취를 통해 왕궁과 신전 등의 거대한 건축물이 건설된다. 이런 조건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도시문명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나중의 문명의 발전을 살펴보면 이런 것들은 대체로 밭농사 목축민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이고, 아무래도 풍부한 토지에서 느긋하고 태평스럽게 사는 벼농사 어로민에게는 서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혹성물리학자인 마쓰이 다카노리(松井孝典)씨가 일리 있는 말을 했다. 목축민에게는 부감(俯瞰·내려다봄)의 사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초원을 잇는 네트워크를 확보해 항상 넓은 시야를 갖고 있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도시의 건설도 같은 것이다. 위로부터 도시를 바라보는 발상이 있어야 비로소 이것이 가능하다. 벼농사처럼 시간과 노력이 드는 농업을 하는 사람들은 24시간 내내 언제나 아래만 보면서 살기 때문에 아무래도 시야가 좁아지기 쉽다는 생각이 든다.